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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믿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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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9-04-02 18:58 조회5,3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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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믿음
4월 11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분)

도입)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진다(엡 2:8). 이 진리는 성경의 모든 가르침의 분수령이다. 그러나 만일 은혜를 잘못 이해하거나 믿음에 대해 그릇된 정의를 내린다면, 이 진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이 완고하고 회개치 않은 죄인들도 어쩔 수 없이 받아 주어야 하는 그런 피동적인 성격이 아니다. 참된 은혜는 우리에게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 것’(딛 2:12)을 가르친다. 은혜는 새 언약에 나타난 의무들(고전 7:19)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비록 언제나 그렇게 순종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분명히 은혜는 육에 속한 삶을 허락하지 않으며 성령 안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준다. 은혜와 마찬가지로 믿음도 피동적인 것이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어떤 사실들을 이해하고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회개, 복종, 그리고 순종하려는 초자연적인 열심 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이런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들은 행함 없는 믿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믿음의 개념에서 복종과 굴복, 그리고 죄로부터 돌이킨다는 개념을 제거하고, 그리고 구원의 모든 실제적 요소들을 인간의 행위로 규정한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진리에 대한 단순한 이해와 동의 이상의 믿음을 통해서만 얻어짐을 알아야 한다. 단순한 이해와 동의 차원의 믿음은 마귀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주님의 자비에 끌리는 만큼 죄악의 삶을 싫어하는데 있다. 그리스도께 마음이 끌려서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핵심 본문: 엡 2:8

학습 목표
깨닫기: 믿음이란 신념의 차원을 넘어 신뢰를 경험하는 것임을 배운다.
느끼기: 성경 연구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믿음의 성장을 맛본다.
행하기: 믿음이 나의 생애를 인도하는 원칙이 되게 한다.

교과 개요
I. 발견하는 믿음(히 2:4)
A. 믿음은 단순히 진리를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나의 매일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 주는가?
B. 믿음은 성경 연구와 개인적 체험을 통해 자라난다. 나의 믿음의 기초는 무엇인가? 나는 왜 지금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되었는가?

II. 살아가는 믿음(히 11장)
A.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벨로부터 기드온까지 위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는 '명예의 전당'으로 불린다. 이들을 구별 짓는 특별한 특성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이들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는가?
B. 히브리서 11:6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 우리는 때때로 믿음을 잃어버리는가? 믿음의 선물을 받기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인가?

III. 증명하는 믿음(약 2:14-17)
A.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나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요점: 믿음의 경험은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하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발전시킴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삶의 모든 면에 나타나게 할 수 있다.

기억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연구범위: 엡 6:10-18, 히 11장, 약 2:18-19, 벧전 1:3-8.

중심 사상: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도하는 원칙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교리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에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차원이 있다. 이번 주에는 믿음의 더 중요한 차원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안식일 오후
우리는 믿음과 개인적 신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성경적 의미의 믿음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이성에 기초하지 않으며, 우리의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우리의 인격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뿌리 깊은 확신이다. 믿음은 삶을 지배하는 원칙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수단이다. 히브리서 11:1은 믿음의 실체에 관해 말해 준다. 히브리서의 전문가인 윌리엄 존슨(William G. Johnsson)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제안한다. “믿음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에 대한 (부동산의) 권리증서이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확실성이다.”(풍요한 삶을 위한 성경 확대경: 히브리서, 1994년, 204)

일요일(4월 5일)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엡 2:8)

도입)
믿음의 시작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어떤 논리에 의해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인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잘 설명을 해도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믿어지지가 않는다. 반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예수님이 믿어진다. 믿음은 마치 눈에 백내장이 있던 사람이 그 백내장을 제거하면 보이지 않던 눈이 보게 되듯이 믿음은 그런 것이다. 즉 자신의 현명함이나 논리적인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 16:16-17절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잘하였도다, 베드로야 네가 용케도 알게 되었구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다. 또한 바울은 고전 1:21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속에서 성령님이 이미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을 단순히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행위와 약속으로 보여주신 사랑을 확신하고 순종함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무섭게 무너지고 깨어지는 세상에서 이 선물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리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부모님에 의해 믿음 안에서 양육받았기 때문인가? 항상 교회를 다녔기 때문인가?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 관한 책을 읽음으로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인가? 그리고 거기서 기뻐 날뛸 만한 어떤 이성적인 논증을 발견했기 때문인가? 결국 우리가 얻는 결론은, 믿음은 하나의 기적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이다.

1. 사도 바울은 믿음의 중요성을 어떻게 묘사했습니까?(엡 2:8)
답: ▶ 1문 길잡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한 가지는 확실하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듯이, 믿음이 없을 때에도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가 어렵다고 가르치거나, 믿음이 없으면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못박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믿음의 대체물은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의 위인들이 믿음으로 살았듯이, 오늘날 그분의 백성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조지 R. 나이트, 히브리서 탐구: 묵상을 위한 주석, 2003년, 198)

2. 믿음의 선물을 받기 위해 먼저 우리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필요합니까?(롬 10:17, 참조 히 11:6)
답: ▶ 2문 길잡이: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하였다. 그런데 이 믿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던 자, 에녹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저는 옮기 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히 11:5).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운명에 처한 세상 가운데서 에녹은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교제의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음의 권세 아래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 에녹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의 순결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기를 구할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사할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88)

교훈: 믿음은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부가적용)
믿음은 본질상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측면에서의 믿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선언하고 있다(히 11:6절). 이어서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아벨이다. 그는 믿음의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 둘째는 에녹이다. 믿음으로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다. 또한 그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 셋째는 노아이다. 그는 아직 보지 못한 일에 대한 경고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자신의 집을 구원하였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 2:8~9) 고 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대 전제는 구원도 하나님이 베푸신 선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케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얻도록 하신 것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편의 일방적인 사랑에 의한 것임을 기억하고 늘 감사하고 감격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무엇보다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있는가?

월요일(4월 6일)
우리 믿음의 기초(요 5:39)

도입)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다르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어떤 철학적 사상을 받아들이고 믿는데서 출발한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를 제거해도 불교는 존재하며, 유교에서는 공자가 빠져도 건재하다. 왜냐하면 불교와 유교는 윤리 사상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 모하메드를 제거해도 이슬람교는 살아남는데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모하메드가 아닌 ‘알라’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진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곧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리스도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그분의 가르침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즉,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모든 것의 진정성은 자신에 대한의 그분의 주장에 기초한다.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분의 인격은 분리될 수 없다.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에게서는 이것이 가능하지만, 그리스도에게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분의 가르침이 성립하려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셔야 한다.

여러 언어로 번역된 한 유명한 찬미(505장)의 가사는 “우리의 소망이 오직 예수님의 보혈과 그분의 의(義) 위에 세워져 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음의 기초와 근거가 되신다. 믿음의 선물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의 신비이지만, 그 믿음이 어떻게 일깨워지고 강화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약간의 통찰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성경의 위인들 중에는 갑작스런 경험을 통해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이들이 있다. 아마도 바울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믿음의 순례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을 점진적으로 인식하였다. 물론 체험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매우 강력한 요소이다. 하지만 믿음에는 내용도 담겨 있어야 하며, 성경의 계시는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 믿음의 체험을 갖는 데 있어서 성경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요 5:39, 딤후 3:15)
답: ▶ 1문 길잡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도록 기록된 책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경은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소홀히 여긴다면 우리의 믿음은 약해진다. 하지만 성경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일깨워주고 강화시켜 주는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그 유명한 “히브리서 11:1도 우리에게 피스티스(pistis, 믿음을 가리키는 헬라어)의 정의를 내려주지 못하며, 믿음이 작용하는 방식을 묘사해 주지 않는다.
사도는 우리 마음에 믿음이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한 심리학적인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가능케 하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에 대해 말하였는데, 그것은 (1) 소망을 실재로 만들고, (2)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윌리엄 G. 존슨, 풍요한 삶을 위한 성경 확대경, 리뷰 앤드 헤럴드, 1994년, 205)

2. 야고보서 2:18-19을 읽으십시오. 믿음은 왜 하나님의 존재나 다른 교리에 대하여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이어야 합니까?
답: ▶ 2문 길잡이: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8-19)

믿음을 자라게 해 주는 성경 연구
“우리의 믿음은 성경을 연구할 때 자라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빛 안에서 빛을 볼 것이며, 진리 안에서 기뻐할 것이다.”(설교와 강연, 2권, 27)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언제나 그들 앞에 모실 것 같으면, 그들은 그분의 형상을 따라 변화될 것이다. … 그러나 사람이 영적 생애에서 아무리 향상할지라도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할 필요가 없는 지점까지는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의 증거를 그 곳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증언보감, 2권, 219)

교훈: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성경이 믿음의 기초가 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소유하게 된다.

부가적용)
건축학 이론에 의하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부실 공사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미국 컬럼비아 대학 건축과 교수인 M. Salvadori의 건축 구조학 이론에 의하면 건축물이란 세 가지 하중을 고려해야 그 건물이 튼튼하고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하중이란 ‘고정하중’ ‘적재하중’ ‘이동하중’이란 3가지 하중이다. 고정하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콘크리트 벽돌 철골빔 등 구조물 자체무게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고, 적재하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그 건축물 안에 모든 것이 들어가고 실린 상태의 무게 즉 사람이나 각종 물건 등 모든 것들이 들어간 상태의 무게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동하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그 건축물에 가해지는 각종 외부의 영향이나 압력 즉 비나 바람 눈 태풍 지진 등 외부의 각종 영향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그래야 그 건물이 기초가 튼튼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멋있게 보여도 그 건축물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마태복음 7:24-27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고 하셨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으로서 기초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해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이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머리로 말씀을 선별하는 이들이 있다.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결코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실임을 알기에 말씀을 나침반삼아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마치 채에 무언가를 거르듯 자신의 이성과 판단으로 말씀을 선별하는 이들은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마치 어두운 세상 속에서 쉽게 불을 꺼뜨리는 어리석은 나그네와 같다. 그리고 거센 세상의 바람 앞에선 영락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들에게 세상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강하고 옳은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부터 출발한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다.

화요일(4월 7일)
믿음을 행사함(눅 16:30-31)

도입)
스펄전 목사는 “작은 믿음은 당신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지만 큰 믿음은 천국을 당신의 영혼으로 인도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볼록렌즈를 가지고 태양 빛을 끌어당겨 포커스를 맞추면 종이를 태우게 된다. 믿음은 강하신 주님을 의지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강하신 주의 은총 때문에 믿음을 가진 자는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또한 믿음은 크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힘이다. 실패의 현장을 성공과 축복의 현장으로 바꾸는 힘이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병 고치신 기사를 이야기하면서, 그 이적을 일으킨 요소는 마술이 아니라 믿음이었음을 강조하였다.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을 행사하도록 도전을 받았다. 예수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목도하면서도 믿음을 갖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1. 누가복음 16:30-31에서 말하는 중요한 요점은 무엇입니까?
답: ▶ 1문 길잡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목도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을 것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이나 다른 이들의 삶에 역사하시는 것을 보는 경험을 통하여 강화되지만,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보다 우리의 믿음이 선행(先行)될 때도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우리를 위해 우리를 통하여 행동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와 같은 신뢰를 가지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2. 다음 구절들은 믿음으로 사는 것의 다양한 면들을 어떻게 나타내 줍니까?(롬 1:17, 갈 5:6, 약 2:17-18, 요일 5:4-5)
답: ▶ 2문 길잡이: 성경에서 믿음은 매우 역동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동적인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하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 하였고, 야고보는 "행함이 수반된 믿음"(약 2:17-18)이라 하였으며, 사도 요한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일 5:4-5)이라 하였다.

3. 한편 믿음이 없을 때 생기는 비극적인 결과는 무엇입니까?(롬 11:20, 히 3:19)
답: ▶ 3문 길잡이: 히브리서의 기자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자들을 언급하면서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9)고 지적하였다.

로마서 11:20의 문맥은 바울이 고대 히브리인들, 즉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구원의 약속을 받았던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믿음을 행사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요한 삶을 경험할 수 있었으나, 그들의 실패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 11:6)는 사실을 분명히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베데스다 못 가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아무런 보증도 그에게 주지 않으셨다. …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으며 그 말씀에 입각하여 행동하자 힘을 얻었다.”(시대의 소망, 203)

교훈: 믿음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이들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함으로써 자라난다. 때로는 그분의 능력을 보기 전에 믿음을 행사해야 할 경우도 있다.

부가적용)
자동차에 타고 전진 기어를 넣으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후진 기어를 넣으면 차가 뒤로 간다. 생각을 바꾸면 나의 생애 전체를 바꿀 수도 있다. 목표한 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다 성취된 영상을 그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직 현실은 그렇지 못해도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는 영상을 그려야 한다. 그 영상을 보며 지금 기뻐하고, 지금 감사하고, 지금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산이 옮겨지는 실상을 그리는 믿음이요, 가능케 하는 믿음인 것이다. 주님은 “믿고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다. 태산과 같은 어려운 문제라도 이루어지는 영상을 그려보시기 바란다.

수요일(4월 8일)
믿음 안에서 자라감(벧후 3:18)

도입)
너무나도 자주 사람들이 더 많은 이적과 증거를 가진다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이 더 자라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믿음이나 그것의 결핍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고 심지어 이적이나 표적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굴복시키는 정도만큼만 믿음이 자라날 수 있으며, 우리의 믿음을 행사함으로써만 믿음을 자라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배우고자 하는 열린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는 정도만큼만 믿음 안에서 자랄 수 있다. 하나님은 믿음의 근원이시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께 신뢰심을 두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란다(롬 10:17).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연구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한다. 주님께 마음을 굴복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깨달을수록 그분을 더 많이 사랑하고 신뢰하게 된다. 믿음이 자라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가 필수적이다.

우리에게 의심과 난관이 닥쳐올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의 느낌과 상관없이, 그 상황의 혹독함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면 믿음은 증대될 것이다. 믿음이란 느낌 그 이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흔들리는 감정을 초월한 하나의 원칙이다. 믿음이란 비록 그 일이 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라면 실행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은혜 안에서 자라가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생애와 품성에 관해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가능한 모든 기회를 활용하려 할 것이다. 즉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믿음을 향상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그분을 더 잘 알 때에 자라나게 된다. 이 일은 그분의 생애와 그분의 사랑을 곰곰이 묵상할 때 일어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공언하면서 우리 자신이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산다면 하나님을 가장 욕되게 하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자라남의 목표는 무엇입니까?(살후 1:3, 벧후 3:18)
답: ▶ 1문 길잡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2. '믿음의 방패'는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엡 6:10-18)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답: ▶ 2문 길잡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용사들이 착용해야 할 여러 가지 전신갑주를 소개한 다음,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라(엡 6:16)고 하였다. 믿음은 사단의 공격에 대응하는 최대의 방어 무기이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믿음의 ‘성숙’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필생의 과업이다. 우리가 자라남의 축복을 경험하고 “믿음에 굳게” 서게 되면(고전 16:13), 다른 이들은 왜 ‘연약한’ 믿음(고전 16:13)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갖기가 쉽다. 하지만 우리도 지금의 영적 상태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시간이 걸렸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코 자랑하거나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전 10:12). 믿음의 싹을 틔우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영적으로 자라게 하신 분도 그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묵상함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명상하는 데 매일 한 시간을 바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그의 생애를 한 조목 한 조목씩 연구하고, 각 장면 특히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머리 속에 그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를 위한 그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격발되고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깊이 물들게 될 것이다.”(시대의 소망, 83)

교훈: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이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믿음의 성장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 해야 한다.

부가적용)
믿음의 성장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인격적 신뢰”이다.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삶을 통하여 체험하는 만큼 그분을 향한 신뢰는 점점 더 커진다. 결국 신뢰가 커지면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믿는다. 그 이유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알기에 주의 인격을 온전하게 믿게 되며 따라서 이제는 주님의 말씀만 들어도 그 말씀이 이루어진 줄로 알기 때문이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하루가 주어진 이유도 오직 믿음의 성장 때문이다. 무엇을 하던 결국 믿음이 성장할 것인지 믿음이 연약할 것인지 … 그 씨름을 매일 치르게 되어있다. 이러한 믿음의 시각에서 우리의 상황을 본다면 우리의 상황은 하나의 테스트일 뿐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을 신뢰하는 자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강을 누린다. 평강을 누린다는 것이 바로 주님을 향한 강한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분은 전능자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피로 값주고 사신 사랑의 구세주이시다.

목요일(4월 9일)
한 분을 믿음(딤전 4:16)

도입)
인격, 신조, 그리고 행동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상호의존적이다. 인격은 사람의 어떠함이고, 신조는 그가 믿고 있는 것이며, 행동은 그가 하고 있는 것이다. 신조는 보통 인격의 산물이다. 악함과 선함은 지적 의견의 평행추이다. 자성을 띤 바늘은 그 밑에 있는 관속에 있는 쇠에 의해서 저해된다. 교리적인 설교는 때때로 얕보는 반면, 도덕적인 설교가 선호된다. 교리는 단순히 가르침이며, 사람들은 언제나 지식이 없어서 고통당하고 있고 망하고 있다. 도덕적인 설교들은 단순히 어떤 교리들을 믿는 것에 따르는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신조와 행동 간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살고 있는 삶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붙들고 있는 교리들만으로도 확실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믿음과는 상관없이 정해진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들은 사실상 둘 다 잘못된 것이며, 유해한 취지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믿음과 삶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진리를 믿는 것과 그것에 맞추어서 사는 것에 매어 있다. 명쾌한 생각은 교리 자체만으로도 표현되어야 한다. 혼동된 믿음과 불완전한 발언은 모호하며 무익한 것이다. 진리는 이해되어야 하고 경험되어야 하고 공식화되어야 한다. 진리의 공식화는 좀 더 명확한 이해와 더 깊은 경험을 결과로 낳게 되는 것이다.

교리는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그분에 관해 더 알고 싶어 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을 깨닫기를 열망할 것이다. 우리가 창조주에 관하여,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알기 원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믿는 교리가 진리라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이 닻을 내릴 곳은 교리적 체계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시다. 교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에 관하여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방편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믿음에 있어 교리의 역할은 문법(文法)의 역할과 같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쓰고 말하는 것에 문법적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교리를 통하여 우리 믿음의 내용을 체계화하는 것이다.

1. 건전한 교리를 갖는 것은 왜 중요합니까?(딤전 4:16, 딛 2:1)
답: ▶ 1문 길잡이: 올바른 교리를 믿는 것은 바르게 믿고 섬기는 일에 필수적이다. 그릇된 교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열심을 일으켜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건전한 교리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생명력 없는 이론에 머문 교리와 신학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신자(信者)가 되지 않고도 신학자가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믿음이란 단지 성경적으로 옳은 몇 가지의 신조들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교리들을 말씀하신 그 한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2. 교회는 근본적으로 어떤 확신 위에 세워졌습니까?(마 16:13-19)
답: ▶ 2문 길잡이: 교회는 진리의 반석이신 그리스도(벧전 2:4-8) 위에 세워진 기관이다. 진리 위에 세워지지 않은 것이라면 견고히 설 수 없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고 말 것이다.

마태복음 16장의 내용은 종종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교의 창설자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증거로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견해는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기초인 반석이시다(참조 벧전 2:4-8). 이 반석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시라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교회를 인간의 기관이 아닌 하나님의 교회가 되게 한다.

교리를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교리를 유창하게 말하고 그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반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만일 저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온유함과 사랑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에 배치되는 정신은 그 공언하는 바가 어떠하든지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험담을 하거나 어리석은 얘기를 함으로써, 그 진실되지 못하고 불친절한 말로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있다. 생애의 부담을 회피하고 헛된 향락을 추구함으로써 예수를 부인할 수 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마 10:32)

교훈: 교리는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하도록 성경의 진리들을 체계화해 놓은 것이다. 그 교리를 통해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부가적용)
“교리를 치워버려라”와 “예수님께로 돌아가자”라고 자주 제기되는 외침은 사람들을 현혹하고 기만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의 초기로 되돌아가서 사도들의 선포를 검토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모두 교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임박한 심판을 선포했다. 바울은 교리적인 토론으로 유대인들을 당황케 함으로써 자신의 사역을 시작했다. 교리를 선포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복음의 모든 국면과 모양은 교리로 나타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그리스도인의 교리의 나무에만 자라는 열매이다.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의견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단자라는 단어는 잘못된 신조(miscredo)에 기원을 둔다. 잘못된 신조로 인한 오류는 삶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악을 생산한다. 사상은 행동을 낳고 세상을 통제한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신조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훼손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도 그의 신조보다 더 낫게 될 수 없다.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재판소장이 가진 신조의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딛 2:1절의 “바른 교훈”은 건강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건강한 가르침은 건강한 삶을 생산할 것이다. 병든 가르침은 병든 삶을 열매로 내게 될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서신을 쓰면서 “때가 이르리니 그들이 바른 교훈을 견디지 못하여 귀가 가려워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리라”(딤후 4:3, 4)라고 말함으로써 그러한 때를 예언하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바른 교리의 기초가 되신다.

금요일(4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베드로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권면하기를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고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이 은혜 안에서 자라갈 때에 저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명백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저들은 성경의 거룩한 진리 가운데서 새 빛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각 시대의 교회 역사에 있어서 그러하였고 또한 세상 끝 날까지도 그러할 것이다. …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내세를 바라보며 지력의 발달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보증을 붙잡을 수 있나니, 이것은 사람의 재능이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되고 심령의 온갖 능력이 빛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 직접 접촉하므로 답답하던 모든 것이 그 때에는 밝히 알려지겠고, 또한 이해하기 곤란하던 것들이 그 때에는 해석을 얻게 될 것을 인하여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정로의 계단, 112-11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히브리서 11장에는 수많은 믿음의 영웅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품성과 행동에는 어떤 결점들이 있었습니까? 우리 자신의 죄와 결함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 이들의 실수와 죄를 통하여 우리는 어떤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까?

2. 각자에게 믿음의 시련과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투쟁 중에 있는 가족이나 교인이 있다면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믿음은 체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뢰심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이와 같은 믿음을 일깨우고 강화시키며 유지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믿음은 단지 신념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원칙이다. 난 의무들(고전 7:19)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비록 언제나 그렇게 순종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분명히 은혜는 육에 속한 삶을 허락하지 않으며 성령 안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준다. 은혜와 마찬가지로 믿음도 피동적인 것이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어떤 사실들을 이해하고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회개, 복종, 그리고 순종하려는 초자연적인 열심 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이런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들은 행함 없는 믿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믿음의 개념에서 복종과 굴복, 그리고 죄로부터 돌이킨다는 개념을 제거하고, 그리고 구원의 모든 실제적 요소들을 인간의 행위로 규정한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진리에 대한 단순한 이해와 동의 이상의 믿음을 통해서만 얻어짐을 알아야 한다. 단순한 이해와 동의 차원의 믿음은 마귀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주님의 자비에 끌리는 만큼 죄악의 삶을 싫어하는데 있다. 그리스도께 마음이 끌려서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핵심 본문: 엡 2:8

학습 목표
깨닫기: 믿음이란 신념의 차원을 넘어 신뢰를 경험하는 것임을 배운다.
느끼기: 성경 연구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믿음의 성장을 맛본다.
행하기: 믿음이 나의 생애를 인도하는 원칙이 되게 한다.

교과 개요
I. 발견하는 믿음(히 2:4)
A. 믿음은 단순히 진리를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나의 매일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 주는가?
B. 믿음은 성경 연구와 개인적 체험을 통해 자라난다. 나의 믿음의 기초는 무엇인가? 나는 왜 지금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되었는가?

II. 살아가는 믿음(히 11장)
A.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벨로부터 기드온까지 위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는 '명예의 전당'으로 불린다. 이들을 구별 짓는 특별한 특성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이들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는가?
B. 히브리서 11:6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 우리는 때때로 믿음을 잃어버리는가? 믿음의 선물을 받기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인가?

III. 증명하는 믿음(약 2:14-17)
A.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나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요점: 믿음의 경험은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하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발전시킴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삶의 모든 면에 나타나게 할 수 있다.

기억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연구범위: 엡 6:10-18, 히 11장, 약 2:18-19, 벧전 1:3-8.

중심 사상: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도하는 원칙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교리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에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차원이 있다. 이번 주에는 믿음의 더 중요한 차원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안식일 오후
우리는 믿음과 개인적 신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성경적 의미의 믿음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이성에 기초하지 않으며, 우리의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우리의 인격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뿌리 깊은 확신이다. 믿음은 삶을 지배하는 원칙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수단이다. 히브리서 11:1은 믿음의 실체에 관해 말해 준다. 히브리서의 전문가인 윌리엄 존슨(William G. Johnsson)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제안한다. “믿음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에 대한 (부동산의) 권리증서이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확실성이다.”(풍요한 삶을 위한 성경 확대경: 히브리서, 1994년, 204)

일요일(4월 5일)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엡 2:8)

도입)
하님의 증거는 믿음을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이다. 믿음의 시작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어떤 논리에 의해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인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잘 설명을 해도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믿어지지가 않는다. 반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예수님이 믿어진다. 믿음은 마치 눈에 백내장이 있던 사람이 그 백내장을 제거하면 보이지 않던 눈이 보게 되듯이 믿음은 그런 것이다. 즉 자신의 현명함이나 논리적인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 16:16-17절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잘하였도다, 베드로야 네가 용케도 알게 되었구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다. 또한 바울은 고전 1:21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속에서 성령님이 이미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을 단순히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행위와 약속으로 보여주신 사랑을 확신하고 순종함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무섭게 무너지고 깨어지는 세상에서 이 선물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리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부모님에 의해 믿음 안에서 양육받았기 때문인가? 항상 교회를 다녔기 때문인가?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 관한 책을 읽음으로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인가? 그리고 거기서 기뻐 날뛸 만한 어떤 이성적인 논증을 발견했기 때문인가? 결국 우리가 얻는 결론은, 믿음은 하나의 기적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이다.

1. 사도 바울은 믿음의 중요성을 어떻게 묘사했습니까?(엡 2:8)
답: ▶ 1문 길잡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한 가지는 확실하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듯이, 믿음이 없을 때에도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가 어렵다고 가르치거나, 믿음이 없으면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못박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믿음의 대체물은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의 위인들이 믿음으로 살았듯이, 오늘날 그분의 백성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조지 R. 나이트, 히브리서 탐구: 묵상을 위한 주석, 2003년, 198)

2. 믿음의 선물을 받기 위해 먼저 우리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필요합니까?(롬 10:17, 참조 히 11:6)
답: ▶ 2문 길잡이: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하였다. 그런데 이 믿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던 자, 에녹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저는 옮기 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히 11:5).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운명에 처한 세상 가운데서 에녹은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교제의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음의 권세 아래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 에녹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의 순결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기를 구할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사할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88)

교훈: 믿음은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부가적용)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 2:8~9) 고 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대 전제는 구원도 하나님이 베푸신 선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케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얻도록 하신 것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편의 일방적인 사랑에 의한 것임을 기억하고 늘 감사하고 감격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무엇보다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월요일(4월 6일)
우리 믿음의 기초(요 5:39)

도입)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다르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어떤 철학적 사상을 받아들이고 믿는데서 출발한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를 제거해도 불교는 존재하며, 유교에서는 공자가 빠져도 건재하다. 왜냐하면 불교와 유교는 윤리 사상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 모하메드를 제거해도 이슬람교는 살아남는데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모하메드가 아닌 ‘알라’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진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곧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리스도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그분의 가르침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즉,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모든 것의 진정성은 자신에 대한의 그분의 주장에 기초한다.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분의 인격은 분리될 수 없다.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에게서는 이것이 가능하지만, 그리스도에게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분의 가르침이 성립하려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셔야 한다.

여러 언어로 번역된 한 유명한 찬미(505장)의 가사는 “우리의 소망이 오직 예수님의 보혈과 그분의 의(義) 위에 세워져 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음의 기초와 근거가 되신다. 믿음의 선물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의 신비이지만, 그 믿음이 어떻게 일깨워지고 강화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약간의 통찰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성경의 위인들 중에는 갑작스런 경험을 통해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이들이 있다. 아마도 바울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믿음의 순례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을 점진적으로 인식하였다. 물론 체험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매우 강력한 요소이다. 하지만 믿음에는 내용도 담겨 있어야 하며, 성경의 계시는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 믿음의 체험을 갖는 데 있어서 성경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요 5:39, 딤후 3:15)
답: ▶ 1문 길잡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도록 기록된 책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경은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소홀히 여긴다면 우리의 믿음은 약해진다. 하지만 성경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일깨워주고 강화시켜 주는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그 유명한 “히브리서 11:1도 우리에게 피스티스(pistis, 믿음을 가리키는 헬라어)의 정의를 내려주지 못하며, 믿음이 작용하는 방식을 묘사해 주지 않는다.
사도는 우리 마음에 믿음이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한 심리학적인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가능케 하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에 대해 말하였는데, 그것은 (1) 소망을 실재로 만들고, (2)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윌리엄 G. 존슨, 풍요한 삶을 위한 성경 확대경, 리뷰 앤드 헤럴드, 1994년, 205)

2. 야고보서 2:18-19을 읽으십시오. 믿음은 왜 하나님의 존재나 다른 교리에 대하여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이어야 합니까?
답: ▶ 2문 길잡이: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8-19)

믿음을 자라게 해 주는 성경 연구
“우리의 믿음은 성경을 연구할 때 자라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빛 안에서 빛을 볼 것이며, 진리 안에서 기뻐할 것이다.”(설교와 강연, 2권, 27)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언제나 그들 앞에 모실 것 같으면, 그들은 그분의 형상을 따라 변화될 것이다. … 그러나 사람이 영적 생애에서 아무리 향상할지라도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할 필요가 없는 지점까지는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의 증거를 그 곳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증언보감, 2권, 219)

교훈: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성경이 믿음의 기초가 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소유하게 된다.

부가적용)
건축학 이론에 의하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부실 공사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미국 컬럼비아 대학 건축과 교수인 M. Salvadori의 건축 구조학 이론에 의하면 건축물이란 세 가지 하중을 고려해야 그 건물이 튼튼하고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하중이란 ‘고정하중’ ‘적재하중’ ‘이동하중’이란 3가지 하중이다. 고정하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콘크리트 벽돌 철골빔 등 구조물 자체무게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고, 적재하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그 건축물 안에 모든 것이 들어가고 실린 상태의 무게 즉 사람이나 각종 물건 등 모든 것들이 들어간 상태의 무게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동하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그 건축물에 가해지는 각종 외부의 영향이나 압력 즉 비나 바람 눈 태풍 지진 등 외부의 각종 영향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그래야 그 건물이 기초가 튼튼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멋있게 보여도 그 건축물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마태복음 7:24-27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고 하셨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으로서 기초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해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이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머리로 말씀을 선별하는 이들이 있다.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결코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실임을 알기에 말씀을 나침반삼아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마치 채에 무언가를 거르듯 자신의 이성과 판단으로 말씀을 선별하는 이들은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마치 어두운 세상 속에서 쉽게 불을 꺼뜨리는 어리석은 나그네와 같다. 그리고 거센 세상의 바람 앞에선 영락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들에게 세상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강하고 옳은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부터 출발한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다.

화요일(4월 7일)
믿음을 행사함(눅 16:30-31)

도입)
스펄전 목사는 “작은 믿음은 당신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지만 큰 믿음은 천국을 당신의 영혼으로 인도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볼록렌즈를 가지고 태양 빛을 끌어당겨 포커스를 맞추면 종이를 태우게 된다. 믿음은 강하신 주님을 의지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강하신 주의 은총 때문에 믿음을 가진 자는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또한 믿음은 크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힘이다. 실패의 현장을 성공과 축복의 현장으로 바꾸는 힘이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병 고치신 기사를 이야기하면서, 그 이적을 일으킨 요소는 마술이 아니라 믿음이었음을 강조하였다.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을 행사하도록 도전을 받았다. 예수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목도하면서도 믿음을 갖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1. 누가복음 16:30-31에서 말하는 중요한 요점은 무엇입니까?
답: ▶ 1문 길잡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목도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을 것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이나 다른 이들의 삶에 역사하시는 것을 보는 경험을 통하여 강화되지만,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보다 우리의 믿음이 선행(先行)될 때도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우리를 위해 우리를 통하여 행동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와 같은 신뢰를 가지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2. 다음 구절들은 믿음으로 사는 것의 다양한 면들을 어떻게 나타내 줍니까?(롬 1:17, 갈 5:6, 약 2:17-18, 요일 5:4-5)
답: ▶ 2문 길잡이: 성경에서 믿음은 매우 역동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동적인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하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 하였고, 야고보는 "행함이 수반된 믿음"(약 2:17-18)이라 하였으며, 사도 요한은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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