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순종 : 부흥의 열매(교사들을위한강해식성경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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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7-26 22:36 조회4,78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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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5과 순종 : 부흥의 열매
8월 3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9분
연구 범위
마 26:69~74, 행 5:28~32, 행 6:3~10, 행 9:1~9, 빌 2:5~8.
기억절 :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4~5).
도입)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싸워야 할 싸움의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싸움도 어떻게 이겨야 할지를 배우게 한다. 애굽의 종살이를 400여년을 한 저들이 이제 홍해를 건너 시내광야까지 오는 과정에서 저들은 물의 부족 양식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지만 저들은 늘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저들에게 아말렉을 보내어 전쟁을 치르게 하셨다. 무기나 전력에 비해 이스라엘은 아말렉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승리하였다. 무기나 전력에 있어 이스라엘은 이길 수 없는 승리였으나 이 전쟁을 이긴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이스라엘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나아가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 있는 행위 말고는 이길 수 있는 방편이 없었다. 모세가 힘이 떨어지면 전쟁에서 지므로 아론과 홀이 모세의 팔을 붙들어 주어 손이 내려오지 못하게 한 것뿐이다. 이 두 가지가 행위가 이 전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쟁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지를 수 있는 죄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 대신에 “내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나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일견 맞아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싸우는 무기는 우리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무기는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순종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의지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우리는 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하늘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 이겨주시도록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 그분의 발 앞에 우리 자신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방법이다.
*안교반과 소그룹을 일원화시키면 가장 좋습니다.
부흥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 예는 1904년 웨일즈의 부흥에서 볼 수 있다. 에번 로버츠와 그의 친구들은 성령의 부어 주심을 열렬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보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연구하며 믿음을 전하였다.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이 부어졌고, 삶은 변화되었다. 6개월 동안 웨일즈 지방에서 십만 명의 회심이 일어났다. 부흥의 결과는 전국에 걸쳐 나타났다. 온종일 수천 명의 사람이 기도하러 교회로 몰려들었다. 거칠고 입이 험한 석탄 광부들이 친절하고 예의바른 신사로 변화되었다. 심지어 석탄을 운반하던 조랑말들조차 광부들이 더 이상 욕을 하지 않아 새로운 명령을 익혀야 했다. 마음의 회심이 삶의 변화와 순종으로 이어졌다. 반박할 수 없는 참부흥이란 이런 것이다.
첫째날(일) 변화된 삶
7월 28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
라”(행 5:32).
교사강해 1)
성령을 받는 개개인들의 느낌과 감정이 모두 동일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써 감정의 극치를 기대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8)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바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역사할 때에 그것을 볼 수 없지만, 그분의 능력은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준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거나 만지지는 못할지라도, 그분께서 해놓으신 결과를 볼 수는 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우리의 생애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증거 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오직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만 분명하게 확증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마음속의 우상과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사람들만이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대해서 자랑치 아니할 것이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전 2:10,12)
부흥의 결과는 단지 예수님과 가까워진 것 같은 따뜻하고 다정한 느낌이라기보다는 변화된 삶이다. 성경의 기자들도 때로는 예수님이 매우 가깝게, 때로는 멀게 느껴졌다. 하늘을 날 듯이 기분이 좋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즐거워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분이 가까이 계심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다.
긍정적인 감정은 부흥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다. 부흥의 결과는 변화된 삶이다. 부흥의 열매는 감정이 아니라 순종이다. 이는 오순절 이후 제자들의 삶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십자가 이후, 부활 이후 그리고 오순절 이후 베드로의 반응들을 분석해 보라. 그대는 무엇을 알게 됐는가? 십자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사건은 각각 베드로의 태도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가?
마 26:69~74 - 십자가 이전에 베드로의 반응
요 21:15~19 - 부활 이후에 베드로의 반응
행 5:28~32 - 오순절 이후에 베드로의 반응
오순절 성령 강림은 베드로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그 사건은 베드로를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신자에서 믿음이 충만하고 순종하는 제자로 변화시켰다. 한때 경솔한 말과 공허한 약속을 남발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믿음과 용기와 전도 열성이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 이는 믿음과 순종으로 주께 굴복하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훌륭한 예이다.
부가적용)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에, 우리는 어떤 황홀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침착함과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정서와 생애를 비교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처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게 될 것이다. 그분의 생애는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있는 생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뇌와 희생으로 점철된 생애였다. 그리스도께 있어서 성령 충만함이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표시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성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의 진리가 감정과 느낌을 지배해야 한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 있는 가정생활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교훈 : 부흥의 결과는 예수님과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라기보다는 믿음에 충만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변화된 삶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부흥을 바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흥을 바라는 입장은 신자마다 다르지 않습니다. 메마른 영성과 침체된 분위기. 우리는 이 상황이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고 늦은 비 성령의 임재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부흥이 영적 분위기를 계속 고조시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흥분에는 위험 요소가 따릅니다. 감정에 치우칠 때에 우리는 참부흥과 거짓 부흥을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삶의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 적용 |
부흥의 결과로 그대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삶의 변화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회심하고 변화해야 함 - “그대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회심하고 변화해야 한다. 진리가 그대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것은 생활의 개혁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면 불신의 세상은 그대처럼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의 마음속에 크나큰 변화를 초래한 진리에 담겨 있는 능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2권, 678).
기도
아버지, 제게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제 마음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프겠으나, 믿음을 굳게 잡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서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는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날(월) 순종의 큰 대가
7월 29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교사강해 2)
사울은 스데반이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하며 숨진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히 여겼다. 왜냐하면 이 당시 사도 바울이 믿고 있던 하나님의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이었다. 절대로 용서가 아니다. 지은 죄는 값을 치러야 하였다. 사도 바울 아니 사울에게는 이 당시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것을 전파하니 모두 처형을 받아야 마땅하다. 한 사람도 용서를 할 수가 없다. 이처럼 돌 같이 굳어진 사울의 귀에 스데반의 고백은 아무런 힘이 없어 보였다. 최소한 그 당시에는…. 그러나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스데반의 고백은 사울의 굳어진 양심에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지켜보던 사울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영혼의 급소에 큰 충격을 맞은 것 같았다. 스데반의 고백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양심을 깨우칠 수 있는 그처럼 큰 능력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한국을 방문했던 코일 수녀 신학자가 인생을 북으로 비유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북이 차 있으면 두드려도 별로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이 빈 북은 소리를 멀리까지 울려 퍼지게 합니다. 우리의 북도 속이 비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가 닿는 것도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스데반은 속이 빈 북과 같았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이 스데반이라는 빈 북을 통해 커지고 또 커져서 사울의 가슴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양심의 가책으로 찢어 놓았다. 찢겨진 가슴 사이로 주님은 후에 사울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스데반의 생애는 믿음과 순종의 대가를 보여 준 초기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 말씀에서 스데반은 어떤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행 6:3~10, 7:55.
제자들은 성령 충만을 입고 이타적이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들의 믿음은 순종으로 이어졌다. 영적 투쟁이 맹렬했다. 그러나 때마다 구주이신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굳세게 하기 위해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은 돌에 맞거나, 투옥되거나, 화형을 당하거나 조난을 당하였다. 그들의 순종에는 종종 매우 큰 대가가 따랐다. 대부분의 제자가 순교를 당하였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장문의 설교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하였다. 그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그리고 솔로몬의 경험을 설명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불성실함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묘사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고 성령의 감화를 거역한 잘못을 지적하면서 설교의 결론을 맺었다(행 7:51~52).
그의 증언으로 인하여 스데반에게 어떤 일에 벌어졌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신실함의 대가에 대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행 7:54~60)
스데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고, 죽는 순간까지 그의 사명에 충실했다. 우리가 다 순교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설령 그런 부르심을 받을지라도 우리는 주께 충성하여 물러서지 않고 스데반처럼 끝까지 신실하게 믿음의 편에 남아있어야 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언젠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가적용)
스데반을 통하여 선포되는 진리의 말씀을 들은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공회원들과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도 오히려 이를 갈며 분노하고, 말씀 듣기를 싫어하여 귀를 막고, 진리를 선포하는 스데반을 대적하고 돌로 쳐서 죽여 버렸던 것처럼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라는 양심을 거역해 우리의 마음에서 행한 적은 없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를 못 박는 모든 사람들까지도 다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스데반집사처럼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시도해 본적이 있는가?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씀과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는 말씀(빌4:5)을 분명히 기억하고 생활 속에 실천하고 있는가? 마지막 때의 사람들은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고 말씀했는데(딤후3:2-5)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원수를 맺는 것은 육체의 열매인데(갈5:20), 과연 우리는 육체의 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가?
교훈 : 부흥을 경험하고 성령의 충만을 입은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주께 순종하며 때로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신앙과 순종 때문에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자신의 판단으로 그때 어떻게 하겠다고 약속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도 주를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걸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각오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붙잡아 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언제나 주를 부인하지 않기 위해 순간마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 적용 |
영적 부흥의 결과 그대가 감당해야 할 어려움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순교자들 - “무수한 사람이 옥에 갇히거나 살육을 당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들의 자리를 채웠다. 이와 같이 신앙의 이유로 순교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보증을 받고, 승리자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선한 싸움을 싸웠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42).
기도
아버지, 저는 순교자들의 뒤를 따를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은 선조들이 두려움 없이 믿음을 증언하였던 것처럼 저에게도 그러한 큰 용기와 믿음을 주셔서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성령께서 우리를 놀라게 하실 때
7월 30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3~5).
교사강해 3)
종교적 도그마(dogma)란 사람을 굳어지게 하게 잘못된 신념에 빠지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이었다. 사울은 서론, 본론, 결론 혼자 다 내리고는 자기의 신념과 다른, 자기의 종교와 다른 주장에 대해 맹렬한 분노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종교를 대적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전에처럼 다메섹으로 올라가던 길에 때가 정오쯤 되었는데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사울을 비치었다. 땅에 엎드려 들으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소리가 들렸다. 사울의 영혼은 그 소리가 하나님이신 줄 직감으로 깨닫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하는 언어로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다. 그 소리가 대답하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였다. 이 사건이야말로 사울을 바울로 바꾼 순간이요, 이 대단한 유대교인이 저 유명한 기독교의 사도로 바뀌어진 순간이요, 그의 생애 최대의 사건이었다. 사울에게 이 사건은 얼마나 엄청난 충격이었든지 평생을 통하여 이 사건이 그의 회심이요 개종이며 신학과 신앙의 출발점이라고 늘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삼 일 동안 눈으로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큰 감동과 감격 속에 지냈다. 그는 그때에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복음이요 하나님의 권능이며 하나님의 구원 사건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영광중에 만나 뵌 살아 계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죄의 죽음이었고, 그분의 의는 그의 의의 부활이요 생명의 부활이며 육체의 부활의 보증임을 깨달았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하면서도 자신은 광신도에 맞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 다메섹에 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갑자기 그에게 나타나셨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겪은 바울의 경험은 그의 인생뿐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켰다.
행 9:1~9에서 바울의 회심을 다룬 기사를 읽어 보라. 주님은 왜 이 경험 직후에 그를 아나니아에게 보내셨는가?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그들의 빛과 경험에 대해 지상에서 그분이 인정하시는 제자들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이시므로 그들이 근심할 때에 마음 아파하신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지만 인간의 계몽과 구원을 위하여 당신께서 정하신 방법을 존중히 여기시어 당신께서 세상의 빛의 통로로 만드신 교회로 죄인들을 인도하신다.
무지한 죄과와 편견 가운데서 사울이 그가 핍박하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를 받았을 때에 그는 세상의 빛인 교회와 직접 교통하도록 조치되었다”(사도행적, 122).
예수님은 어떻게 아나니아를 놀라게 했는가? 구주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 아나니아는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했는가?(행 9:10~16)
부가적용)
사울은 주님 앞에 회개할 때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죄에 대하여 깊이 회개하였다. 사울에게 있어 다른 그 어떤 죄악보다 더 가슴 아프게 회개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주의 백성들을 돌로 쳐 죽인 죄였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옥에 넣고 발길질하고 욕하던 그의 죄는 그의 회개에 있어서 가장 중심을 이루었다. 그래서 그는 훗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3-16)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그는 이 일만 생각하면 그만 목이 막히고 눈에 눈물이 흐른다. 그 자신에게 있어서 제일 큰 죄는 적어도 불신과 우상숭배와 도덕적 부패 이상으로 교회를 핍박한 죄, 주님의 몸을 범한 죄였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은 실제로 우리보다 죄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주 예수께서는 그의 이런 죄까지도 십자가에 지셨다는 것을 사울이 깨달았을 때 그의 마음은 평안으로 채워졌다. 그는 그의 발에 채이고 그의 손에 맞으며 그의 입으로 저주받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 대한 모욕과 핍박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씻음 받은 것을 생각할 때 평생을 다하여 이 놀라운 주님의 속죄의 사랑, 그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리라고 마음에 다짐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실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예수님을 아는 고상한 지식에 비하여 부질없는 배설물로 여겼다. 그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주님과 복음을 위해 바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행 20:24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교훈 : 초기 기독교가 큰 선교 부흥을 일으킨 배경에는 사람의 예측을 뛰어넘는 성령의 갑작스러운 개입과 신자들의 순종이 있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갑작스런 죄인들의 회심과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까?
부흥은 필연적으로 활발한 전도 활동을 낳습니다. 그러면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하여 주께 돌아옵니다. 그중에는 우리가 이전에 접촉해 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 교회는 이런 면에서 특별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원수였던 사울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진로를 극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게다가 교회는 이런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사울을 받아들였습니다. 누구나 용납할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이미 부흥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 적용 |
그대와 그대의 교회는 낯선 사람을 용납하기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기 도
가혹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 “주께서는 실수하는 사람, 연약하고 떠는 사람, 진리로부터 배도한 사람조차도 우리 안으로 돌아오라고 특별히 부르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교회 안에 거의 없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은 더 적다. 오히려 그런 불쌍한 영혼들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 매우 많은 사람이 가혹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교회증언 2권, 20).
기도
아버지, 매일매일 하늘의 은혜와 기적으로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에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성령께서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시든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성령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반응함
7월 31일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행 26:19). 사울은 봉사의 생애를 살면서 성령의 인도와 책망과 지도와 능력을 받았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봤던 하늘의 이상을 설명하였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사역의 목적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행 26:18)기 위한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교사강해 4)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 앞에서 자신이 받은 사명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이를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하나는 회개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구약성경의 예언으로서 그리스도가 고난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이 빛을 선포하는 것이라 하였다. 바울은 이런 증언을 통해 구약성경의 핵심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것을, 그리고 구약의 예언은 예수님의 구원 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밝힌다. 이는 결국 바울이 유대교의 핵심적인 신앙에 따라 충실하게 사는 사람임을 증거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바울은 청중을 정확하게 간파한 지혜로운 복음 전파의 방식을 선택했다.
성령의 인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다메섹 도상의 이상에 대한 사도 바울의 반응에는 어떤 중요한 점이 있는가? 성령의 부르심에 대한 바울의 반응과 아그립바 왕의 반응을 대조해 보라(행 26:19~32).
바울과 정반대로 아그립바 왕은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과 이기적인 욕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라는 성령의 설득과 투쟁하였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5~36).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순종하여 따르고 진리의 빛 가운데 행하면, 그분은 계속 더 큰 빛과 진리를 보여 주신다. 그에 반하여 우리가 성령의 설득을 거부하고 그분을 거절하면 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굳어지게 될 것이다.
부가적용)
바울을 통해 드러난 복음은 제국의 힘과 인간의 이성에 대한 숭배로 물든 로마인의 시각으로 볼 때 매우 미련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베스도 총독은 그런 복음을 따르는 바울의 학식은 인정하였지만 그를 미친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유대인인 아그립바 왕은 “선지자를 믿느냐”는 바울의 물음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된다. 믿는다고 하면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미련한 신앙을 가진 자가 될 것이고, 믿지 않는다고 하면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입지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그립바의 어정쩡한 태도에 대해 바울은 그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는 솔직한 마음을 밝혔다. 비록 바울은 사슬에 매인 몸이었지만 오히려 그 까닭에 유대인의 왕과 로마 총독에게까지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어떠하든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교훈 :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면 할수록 더 큰 영적 유익이 따르지만, 그분의 음성을 거절하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묘하게 거절하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성경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슬픈 말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도 어떻게 그와 비슷한 태도를 품고 있을 위험성이 있는가? 예를 들어 주와 동행하는 삶에서 우리가 취하는 타협은 어떻게 아그립바의 말에서 나타난 동일한 정신을 드러내는가?
| 적용 |
그대가 지금 순종해야 하는 성령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두 가지 감화 - “사람들의 마음이 성령의 강권하시는 감화로 부드러워지고 그 감화에 굴복할 때에는 권고에 귀를 기울일 것이지만, 그 훈계에서 돌아서서 저희 마음이 굳어질 때에는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다른 감화에 의하여 인도되도록 버려두신다. 진리를 거절함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파멸을 몰고 올 올무가 될 허위를 받아들인다”(선지자와 왕, 425).
기도
아버지, 제게 아직도 거역하는 죄의 성질이 남아 있습니다. 이 옛 본성이 죽고, 성령의 음성을 기꺼이 따르며, 주의 뜻을 즐겁게 준행하는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성령에 이끌리는 순종
8월 1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교사강해 5)
그리스도인이 참된 순종을 하려면 성령에 이끌리는 기름부음,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쓰시는 종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고 능력을 행하게 하심을 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삼손 엘리야 엘리사 사울 다윗 경우가 그랬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그리스도라는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신약의 사도들에게 있어서 기름부음이 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실 때에도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해 사역을 하게 하셨다. 사도행전에 빌립집사에게도 기름부음이 임하였고 결과 사마리아에서 복음 전할 때에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이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구약에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놀라운 기적을 행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재 하셨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더욱 때마다 시마다 신선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한다.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영혼 가운데 부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능력임을 고백하고 그분의 기름부음을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령은 예수님의 생애의 모든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침례를 받고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에 성령과 권능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마 1:20, 3:16~17, 행 10:34~38). 그리스도는 평생 동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요 8:29, 히 10:7).
빌 2:5~8을 읽어 보라. 예수님에 대한 이 구체적인 묘사에 따르면 성령으로 충만한 삶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이며 본체이셨던 분이 자신을 비워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와 특권을 버리고 대신 종이 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종이셨다. 그분은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빌 2:8)셨다.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한 예를 보여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원하여 복종하며 겸손하게 굴복하는 생애이며, 기도하는 심령으로 사역과 봉사에 바쳐진 생애이고, 아버지의 나라에서 구원받은 자들을 보고자 하는 열렬한 소망으로 불타는 생애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한 신약 교회의 신자들이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롬 1:5)했다고 선언하였다. 반면 불신자들은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롬 2:8)랐다.
부가적용)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본체이셨지만 그 스스로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내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은 인간이 그 어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불평 없는 순종으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극한 고통과 극한 십자가의 죽음까지 원망 없이 받으신 그리스도의 순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조금만 고통스럽고 우리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쉽사리 화를 내거나 불쾌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오래 참지 못한다. 우리를 그 자리에 두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모든 신자들이 배우게 된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새로운 장을 열어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애의 모본이 되셨다.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다 그 같은 정신으로 순종의 생애를 산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진정한 순종이란 어떤 것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롬 6:15~23에서 바울은 “죄의 종”과 “의의 종”이라는 대조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롬 8:12~17에서는 “종의 영”과 “양자의 영”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하나님과의 만남, 믿음, 죄와의 투쟁, 하나님의 영접에 대한 그대의 경험에 비춰 볼 때에 이러한 용어들은 어떤 의미인가? 결국 우리는 무엇인가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죄에, 그분을 안 후에는 의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의에 대한 순종에도 종의 마음으로 하는 순종과 아들의 마음으로 하는 순종이 있습니다.
| 적용 |
그대가 순종의 생애를 산다면 지금과 어떤 점이 가장 크게 달라질까요?
영감의 교훈
하나님께 의지하신 예수님 -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시고 그분의 능력에 의존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완전히 비우셨으므로 자신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시고 아버지께서는 날마다 당신의 계획을 공개하셨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의지하여 우리의 생애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생애가 되도록 해야 한다”(시대의 소망, 208).
기도
아버지, 제게 예수님의 마음을 부어 주시옵소서. 평생 성령께 순종하는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닮게 해 주시옵소서. 구속의 때가 가까울수록 제 얼굴에 예수님의 모습이 더욱 분명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8월 2일
“영생으로 가는 길의 출입문에 하나님은 믿음을 두신다. 그리고 모든 길을 따라 빛과 평화와 자원하는 순종의 기쁨을 줄지어 놓으신다. 이 길을 걷는 순례자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높은 부르심의 표를 자신 앞에 간직한다. 그 상급이 항상 목전에 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명령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기쁨과 평화이다”(In Heavenly Places, 183).
“성령의 약속은 어떤 시대나 어떤 족속에게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거룩한 감화가 세상 끝 날까지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오순절 때부터 지금까지 보혜사 성령은 자신을 주님과 그분의 사업에 온전히 바친 모든 사람과 함께하셨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게 성령은 권고자로, 성결케 하는 자로, 인도자로 그리고 증인으로 함께 하셨다. 신자들이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할 때 그들은 구속주의 사랑과 그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더욱 힘 있고 분명하게 증언하게 되었다. 박해와 시련의 오랜 세기를 통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에 성령의 임재를 크게 누렸으며 세상에서 이적과 기사를 베푸는 자들로 섰다. 그들은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 구속하시는 사랑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나타냈다”(사도행적, 4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행 5:1~11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는 이 놀랍고도 조금은 두려운 이야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그들이 자신의 행동 때문에 그 같은 심각한 결과를 맞이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➋ 목요일 소지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떻게 자신을 비우셨는지에 관한 내용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원칙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야 합니까? 특히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는 교회적으로 부흥과 개혁을 추구할 때에 이 같은 자기 부정과 죽음이 매우 중요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운명을 가르는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 토의해 보십시오.
8월 3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9분
연구 범위
마 26:69~74, 행 5:28~32, 행 6:3~10, 행 9:1~9, 빌 2:5~8.
기억절 :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4~5).
도입)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싸워야 할 싸움의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싸움도 어떻게 이겨야 할지를 배우게 한다. 애굽의 종살이를 400여년을 한 저들이 이제 홍해를 건너 시내광야까지 오는 과정에서 저들은 물의 부족 양식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지만 저들은 늘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저들에게 아말렉을 보내어 전쟁을 치르게 하셨다. 무기나 전력에 비해 이스라엘은 아말렉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승리하였다. 무기나 전력에 있어 이스라엘은 이길 수 없는 승리였으나 이 전쟁을 이긴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이스라엘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나아가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 있는 행위 말고는 이길 수 있는 방편이 없었다. 모세가 힘이 떨어지면 전쟁에서 지므로 아론과 홀이 모세의 팔을 붙들어 주어 손이 내려오지 못하게 한 것뿐이다. 이 두 가지가 행위가 이 전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쟁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지를 수 있는 죄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 대신에 “내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나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일견 맞아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싸우는 무기는 우리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무기는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순종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의지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우리는 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하늘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 이겨주시도록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 그분의 발 앞에 우리 자신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방법이다.
*안교반과 소그룹을 일원화시키면 가장 좋습니다.
부흥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 예는 1904년 웨일즈의 부흥에서 볼 수 있다. 에번 로버츠와 그의 친구들은 성령의 부어 주심을 열렬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보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연구하며 믿음을 전하였다.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이 부어졌고, 삶은 변화되었다. 6개월 동안 웨일즈 지방에서 십만 명의 회심이 일어났다. 부흥의 결과는 전국에 걸쳐 나타났다. 온종일 수천 명의 사람이 기도하러 교회로 몰려들었다. 거칠고 입이 험한 석탄 광부들이 친절하고 예의바른 신사로 변화되었다. 심지어 석탄을 운반하던 조랑말들조차 광부들이 더 이상 욕을 하지 않아 새로운 명령을 익혀야 했다. 마음의 회심이 삶의 변화와 순종으로 이어졌다. 반박할 수 없는 참부흥이란 이런 것이다.
첫째날(일) 변화된 삶
7월 28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
라”(행 5:32).
교사강해 1)
성령을 받는 개개인들의 느낌과 감정이 모두 동일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써 감정의 극치를 기대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8)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바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역사할 때에 그것을 볼 수 없지만, 그분의 능력은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준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거나 만지지는 못할지라도, 그분께서 해놓으신 결과를 볼 수는 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우리의 생애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증거 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오직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만 분명하게 확증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마음속의 우상과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사람들만이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대해서 자랑치 아니할 것이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전 2:10,12)
부흥의 결과는 단지 예수님과 가까워진 것 같은 따뜻하고 다정한 느낌이라기보다는 변화된 삶이다. 성경의 기자들도 때로는 예수님이 매우 가깝게, 때로는 멀게 느껴졌다. 하늘을 날 듯이 기분이 좋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즐거워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분이 가까이 계심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다.
긍정적인 감정은 부흥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다. 부흥의 결과는 변화된 삶이다. 부흥의 열매는 감정이 아니라 순종이다. 이는 오순절 이후 제자들의 삶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십자가 이후, 부활 이후 그리고 오순절 이후 베드로의 반응들을 분석해 보라. 그대는 무엇을 알게 됐는가? 십자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사건은 각각 베드로의 태도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가?
마 26:69~74 - 십자가 이전에 베드로의 반응
요 21:15~19 - 부활 이후에 베드로의 반응
행 5:28~32 - 오순절 이후에 베드로의 반응
오순절 성령 강림은 베드로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그 사건은 베드로를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신자에서 믿음이 충만하고 순종하는 제자로 변화시켰다. 한때 경솔한 말과 공허한 약속을 남발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믿음과 용기와 전도 열성이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 이는 믿음과 순종으로 주께 굴복하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훌륭한 예이다.
부가적용)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에, 우리는 어떤 황홀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침착함과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정서와 생애를 비교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처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게 될 것이다. 그분의 생애는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있는 생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뇌와 희생으로 점철된 생애였다. 그리스도께 있어서 성령 충만함이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표시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성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의 진리가 감정과 느낌을 지배해야 한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 있는 가정생활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교훈 : 부흥의 결과는 예수님과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라기보다는 믿음에 충만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변화된 삶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부흥을 바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흥을 바라는 입장은 신자마다 다르지 않습니다. 메마른 영성과 침체된 분위기. 우리는 이 상황이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고 늦은 비 성령의 임재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부흥이 영적 분위기를 계속 고조시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흥분에는 위험 요소가 따릅니다. 감정에 치우칠 때에 우리는 참부흥과 거짓 부흥을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삶의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 적용 |
부흥의 결과로 그대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삶의 변화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회심하고 변화해야 함 - “그대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회심하고 변화해야 한다. 진리가 그대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것은 생활의 개혁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면 불신의 세상은 그대처럼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의 마음속에 크나큰 변화를 초래한 진리에 담겨 있는 능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2권, 678).
기도
아버지, 제게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제 마음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프겠으나, 믿음을 굳게 잡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서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는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날(월) 순종의 큰 대가
7월 29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교사강해 2)
사울은 스데반이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하며 숨진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히 여겼다. 왜냐하면 이 당시 사도 바울이 믿고 있던 하나님의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이었다. 절대로 용서가 아니다. 지은 죄는 값을 치러야 하였다. 사도 바울 아니 사울에게는 이 당시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것을 전파하니 모두 처형을 받아야 마땅하다. 한 사람도 용서를 할 수가 없다. 이처럼 돌 같이 굳어진 사울의 귀에 스데반의 고백은 아무런 힘이 없어 보였다. 최소한 그 당시에는…. 그러나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스데반의 고백은 사울의 굳어진 양심에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지켜보던 사울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영혼의 급소에 큰 충격을 맞은 것 같았다. 스데반의 고백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양심을 깨우칠 수 있는 그처럼 큰 능력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한국을 방문했던 코일 수녀 신학자가 인생을 북으로 비유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북이 차 있으면 두드려도 별로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이 빈 북은 소리를 멀리까지 울려 퍼지게 합니다. 우리의 북도 속이 비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가 닿는 것도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스데반은 속이 빈 북과 같았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이 스데반이라는 빈 북을 통해 커지고 또 커져서 사울의 가슴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양심의 가책으로 찢어 놓았다. 찢겨진 가슴 사이로 주님은 후에 사울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스데반의 생애는 믿음과 순종의 대가를 보여 준 초기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 말씀에서 스데반은 어떤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행 6:3~10, 7:55.
제자들은 성령 충만을 입고 이타적이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들의 믿음은 순종으로 이어졌다. 영적 투쟁이 맹렬했다. 그러나 때마다 구주이신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굳세게 하기 위해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은 돌에 맞거나, 투옥되거나, 화형을 당하거나 조난을 당하였다. 그들의 순종에는 종종 매우 큰 대가가 따랐다. 대부분의 제자가 순교를 당하였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장문의 설교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하였다. 그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그리고 솔로몬의 경험을 설명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불성실함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묘사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고 성령의 감화를 거역한 잘못을 지적하면서 설교의 결론을 맺었다(행 7:51~52).
그의 증언으로 인하여 스데반에게 어떤 일에 벌어졌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신실함의 대가에 대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행 7:54~60)
스데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고, 죽는 순간까지 그의 사명에 충실했다. 우리가 다 순교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설령 그런 부르심을 받을지라도 우리는 주께 충성하여 물러서지 않고 스데반처럼 끝까지 신실하게 믿음의 편에 남아있어야 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언젠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가적용)
스데반을 통하여 선포되는 진리의 말씀을 들은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공회원들과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도 오히려 이를 갈며 분노하고, 말씀 듣기를 싫어하여 귀를 막고, 진리를 선포하는 스데반을 대적하고 돌로 쳐서 죽여 버렸던 것처럼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라는 양심을 거역해 우리의 마음에서 행한 적은 없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를 못 박는 모든 사람들까지도 다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스데반집사처럼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시도해 본적이 있는가?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씀과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는 말씀(빌4:5)을 분명히 기억하고 생활 속에 실천하고 있는가? 마지막 때의 사람들은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고 말씀했는데(딤후3:2-5)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원수를 맺는 것은 육체의 열매인데(갈5:20), 과연 우리는 육체의 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가?
교훈 : 부흥을 경험하고 성령의 충만을 입은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주께 순종하며 때로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신앙과 순종 때문에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자신의 판단으로 그때 어떻게 하겠다고 약속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도 주를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걸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각오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붙잡아 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언제나 주를 부인하지 않기 위해 순간마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 적용 |
영적 부흥의 결과 그대가 감당해야 할 어려움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순교자들 - “무수한 사람이 옥에 갇히거나 살육을 당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들의 자리를 채웠다. 이와 같이 신앙의 이유로 순교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보증을 받고, 승리자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선한 싸움을 싸웠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42).
기도
아버지, 저는 순교자들의 뒤를 따를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은 선조들이 두려움 없이 믿음을 증언하였던 것처럼 저에게도 그러한 큰 용기와 믿음을 주셔서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성령께서 우리를 놀라게 하실 때
7월 30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3~5).
교사강해 3)
종교적 도그마(dogma)란 사람을 굳어지게 하게 잘못된 신념에 빠지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이었다. 사울은 서론, 본론, 결론 혼자 다 내리고는 자기의 신념과 다른, 자기의 종교와 다른 주장에 대해 맹렬한 분노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종교를 대적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전에처럼 다메섹으로 올라가던 길에 때가 정오쯤 되었는데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사울을 비치었다. 땅에 엎드려 들으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소리가 들렸다. 사울의 영혼은 그 소리가 하나님이신 줄 직감으로 깨닫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하는 언어로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다. 그 소리가 대답하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였다. 이 사건이야말로 사울을 바울로 바꾼 순간이요, 이 대단한 유대교인이 저 유명한 기독교의 사도로 바뀌어진 순간이요, 그의 생애 최대의 사건이었다. 사울에게 이 사건은 얼마나 엄청난 충격이었든지 평생을 통하여 이 사건이 그의 회심이요 개종이며 신학과 신앙의 출발점이라고 늘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삼 일 동안 눈으로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큰 감동과 감격 속에 지냈다. 그는 그때에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복음이요 하나님의 권능이며 하나님의 구원 사건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영광중에 만나 뵌 살아 계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죄의 죽음이었고, 그분의 의는 그의 의의 부활이요 생명의 부활이며 육체의 부활의 보증임을 깨달았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하면서도 자신은 광신도에 맞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 다메섹에 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갑자기 그에게 나타나셨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겪은 바울의 경험은 그의 인생뿐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켰다.
행 9:1~9에서 바울의 회심을 다룬 기사를 읽어 보라. 주님은 왜 이 경험 직후에 그를 아나니아에게 보내셨는가?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그들의 빛과 경험에 대해 지상에서 그분이 인정하시는 제자들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이시므로 그들이 근심할 때에 마음 아파하신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지만 인간의 계몽과 구원을 위하여 당신께서 정하신 방법을 존중히 여기시어 당신께서 세상의 빛의 통로로 만드신 교회로 죄인들을 인도하신다.
무지한 죄과와 편견 가운데서 사울이 그가 핍박하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를 받았을 때에 그는 세상의 빛인 교회와 직접 교통하도록 조치되었다”(사도행적, 122).
예수님은 어떻게 아나니아를 놀라게 했는가? 구주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 아나니아는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했는가?(행 9:10~16)
부가적용)
사울은 주님 앞에 회개할 때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죄에 대하여 깊이 회개하였다. 사울에게 있어 다른 그 어떤 죄악보다 더 가슴 아프게 회개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주의 백성들을 돌로 쳐 죽인 죄였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옥에 넣고 발길질하고 욕하던 그의 죄는 그의 회개에 있어서 가장 중심을 이루었다. 그래서 그는 훗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3-16)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그는 이 일만 생각하면 그만 목이 막히고 눈에 눈물이 흐른다. 그 자신에게 있어서 제일 큰 죄는 적어도 불신과 우상숭배와 도덕적 부패 이상으로 교회를 핍박한 죄, 주님의 몸을 범한 죄였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은 실제로 우리보다 죄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주 예수께서는 그의 이런 죄까지도 십자가에 지셨다는 것을 사울이 깨달았을 때 그의 마음은 평안으로 채워졌다. 그는 그의 발에 채이고 그의 손에 맞으며 그의 입으로 저주받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 대한 모욕과 핍박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씻음 받은 것을 생각할 때 평생을 다하여 이 놀라운 주님의 속죄의 사랑, 그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리라고 마음에 다짐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실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예수님을 아는 고상한 지식에 비하여 부질없는 배설물로 여겼다. 그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주님과 복음을 위해 바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행 20:24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교훈 : 초기 기독교가 큰 선교 부흥을 일으킨 배경에는 사람의 예측을 뛰어넘는 성령의 갑작스러운 개입과 신자들의 순종이 있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갑작스런 죄인들의 회심과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까?
부흥은 필연적으로 활발한 전도 활동을 낳습니다. 그러면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하여 주께 돌아옵니다. 그중에는 우리가 이전에 접촉해 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 교회는 이런 면에서 특별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원수였던 사울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진로를 극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게다가 교회는 이런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사울을 받아들였습니다. 누구나 용납할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이미 부흥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 적용 |
그대와 그대의 교회는 낯선 사람을 용납하기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기 도
가혹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 “주께서는 실수하는 사람, 연약하고 떠는 사람, 진리로부터 배도한 사람조차도 우리 안으로 돌아오라고 특별히 부르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교회 안에 거의 없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은 더 적다. 오히려 그런 불쌍한 영혼들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 매우 많은 사람이 가혹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교회증언 2권, 20).
기도
아버지, 매일매일 하늘의 은혜와 기적으로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에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성령께서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시든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성령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반응함
7월 31일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행 26:19). 사울은 봉사의 생애를 살면서 성령의 인도와 책망과 지도와 능력을 받았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봤던 하늘의 이상을 설명하였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사역의 목적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행 26:18)기 위한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교사강해 4)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 앞에서 자신이 받은 사명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이를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하나는 회개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구약성경의 예언으로서 그리스도가 고난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이 빛을 선포하는 것이라 하였다. 바울은 이런 증언을 통해 구약성경의 핵심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것을, 그리고 구약의 예언은 예수님의 구원 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밝힌다. 이는 결국 바울이 유대교의 핵심적인 신앙에 따라 충실하게 사는 사람임을 증거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바울은 청중을 정확하게 간파한 지혜로운 복음 전파의 방식을 선택했다.
성령의 인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다메섹 도상의 이상에 대한 사도 바울의 반응에는 어떤 중요한 점이 있는가? 성령의 부르심에 대한 바울의 반응과 아그립바 왕의 반응을 대조해 보라(행 26:19~32).
바울과 정반대로 아그립바 왕은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과 이기적인 욕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라는 성령의 설득과 투쟁하였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5~36).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순종하여 따르고 진리의 빛 가운데 행하면, 그분은 계속 더 큰 빛과 진리를 보여 주신다. 그에 반하여 우리가 성령의 설득을 거부하고 그분을 거절하면 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굳어지게 될 것이다.
부가적용)
바울을 통해 드러난 복음은 제국의 힘과 인간의 이성에 대한 숭배로 물든 로마인의 시각으로 볼 때 매우 미련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베스도 총독은 그런 복음을 따르는 바울의 학식은 인정하였지만 그를 미친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유대인인 아그립바 왕은 “선지자를 믿느냐”는 바울의 물음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된다. 믿는다고 하면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미련한 신앙을 가진 자가 될 것이고, 믿지 않는다고 하면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입지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그립바의 어정쩡한 태도에 대해 바울은 그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는 솔직한 마음을 밝혔다. 비록 바울은 사슬에 매인 몸이었지만 오히려 그 까닭에 유대인의 왕과 로마 총독에게까지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어떠하든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교훈 :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면 할수록 더 큰 영적 유익이 따르지만, 그분의 음성을 거절하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묘하게 거절하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성경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슬픈 말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도 어떻게 그와 비슷한 태도를 품고 있을 위험성이 있는가? 예를 들어 주와 동행하는 삶에서 우리가 취하는 타협은 어떻게 아그립바의 말에서 나타난 동일한 정신을 드러내는가?
| 적용 |
그대가 지금 순종해야 하는 성령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두 가지 감화 - “사람들의 마음이 성령의 강권하시는 감화로 부드러워지고 그 감화에 굴복할 때에는 권고에 귀를 기울일 것이지만, 그 훈계에서 돌아서서 저희 마음이 굳어질 때에는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다른 감화에 의하여 인도되도록 버려두신다. 진리를 거절함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파멸을 몰고 올 올무가 될 허위를 받아들인다”(선지자와 왕, 425).
기도
아버지, 제게 아직도 거역하는 죄의 성질이 남아 있습니다. 이 옛 본성이 죽고, 성령의 음성을 기꺼이 따르며, 주의 뜻을 즐겁게 준행하는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성령에 이끌리는 순종
8월 1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교사강해 5)
그리스도인이 참된 순종을 하려면 성령에 이끌리는 기름부음,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쓰시는 종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고 능력을 행하게 하심을 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삼손 엘리야 엘리사 사울 다윗 경우가 그랬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그리스도라는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신약의 사도들에게 있어서 기름부음이 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실 때에도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해 사역을 하게 하셨다. 사도행전에 빌립집사에게도 기름부음이 임하였고 결과 사마리아에서 복음 전할 때에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이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구약에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놀라운 기적을 행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재 하셨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더욱 때마다 시마다 신선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한다.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영혼 가운데 부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능력임을 고백하고 그분의 기름부음을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령은 예수님의 생애의 모든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침례를 받고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에 성령과 권능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마 1:20, 3:16~17, 행 10:34~38). 그리스도는 평생 동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요 8:29, 히 10:7).
빌 2:5~8을 읽어 보라. 예수님에 대한 이 구체적인 묘사에 따르면 성령으로 충만한 삶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이며 본체이셨던 분이 자신을 비워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와 특권을 버리고 대신 종이 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종이셨다. 그분은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빌 2:8)셨다.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한 예를 보여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원하여 복종하며 겸손하게 굴복하는 생애이며, 기도하는 심령으로 사역과 봉사에 바쳐진 생애이고, 아버지의 나라에서 구원받은 자들을 보고자 하는 열렬한 소망으로 불타는 생애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한 신약 교회의 신자들이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롬 1:5)했다고 선언하였다. 반면 불신자들은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롬 2:8)랐다.
부가적용)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본체이셨지만 그 스스로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내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은 인간이 그 어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불평 없는 순종으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극한 고통과 극한 십자가의 죽음까지 원망 없이 받으신 그리스도의 순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조금만 고통스럽고 우리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쉽사리 화를 내거나 불쾌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오래 참지 못한다. 우리를 그 자리에 두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모든 신자들이 배우게 된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새로운 장을 열어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애의 모본이 되셨다.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다 그 같은 정신으로 순종의 생애를 산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진정한 순종이란 어떤 것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롬 6:15~23에서 바울은 “죄의 종”과 “의의 종”이라는 대조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롬 8:12~17에서는 “종의 영”과 “양자의 영”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하나님과의 만남, 믿음, 죄와의 투쟁, 하나님의 영접에 대한 그대의 경험에 비춰 볼 때에 이러한 용어들은 어떤 의미인가? 결국 우리는 무엇인가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죄에, 그분을 안 후에는 의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의에 대한 순종에도 종의 마음으로 하는 순종과 아들의 마음으로 하는 순종이 있습니다.
| 적용 |
그대가 순종의 생애를 산다면 지금과 어떤 점이 가장 크게 달라질까요?
영감의 교훈
하나님께 의지하신 예수님 -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시고 그분의 능력에 의존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완전히 비우셨으므로 자신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시고 아버지께서는 날마다 당신의 계획을 공개하셨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의지하여 우리의 생애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생애가 되도록 해야 한다”(시대의 소망, 208).
기도
아버지, 제게 예수님의 마음을 부어 주시옵소서. 평생 성령께 순종하는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닮게 해 주시옵소서. 구속의 때가 가까울수록 제 얼굴에 예수님의 모습이 더욱 분명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8월 2일
“영생으로 가는 길의 출입문에 하나님은 믿음을 두신다. 그리고 모든 길을 따라 빛과 평화와 자원하는 순종의 기쁨을 줄지어 놓으신다. 이 길을 걷는 순례자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높은 부르심의 표를 자신 앞에 간직한다. 그 상급이 항상 목전에 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명령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기쁨과 평화이다”(In Heavenly Places, 183).
“성령의 약속은 어떤 시대나 어떤 족속에게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거룩한 감화가 세상 끝 날까지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오순절 때부터 지금까지 보혜사 성령은 자신을 주님과 그분의 사업에 온전히 바친 모든 사람과 함께하셨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게 성령은 권고자로, 성결케 하는 자로, 인도자로 그리고 증인으로 함께 하셨다. 신자들이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할 때 그들은 구속주의 사랑과 그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더욱 힘 있고 분명하게 증언하게 되었다. 박해와 시련의 오랜 세기를 통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에 성령의 임재를 크게 누렸으며 세상에서 이적과 기사를 베푸는 자들로 섰다. 그들은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 구속하시는 사랑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나타냈다”(사도행적, 4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행 5:1~11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는 이 놀랍고도 조금은 두려운 이야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그들이 자신의 행동 때문에 그 같은 심각한 결과를 맞이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➋ 목요일 소지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떻게 자신을 비우셨는지에 관한 내용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원칙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야 합니까? 특히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는 교회적으로 부흥과 개혁을 추구할 때에 이 같은 자기 부정과 죽음이 매우 중요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운명을 가르는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 토의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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