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과 기도 : 부흥의 심장(교사들을위한강해식과정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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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7-09 11:44 조회4,715회 댓글1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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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2과 기도 : 부흥의 심장
7월 13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4분
연구 범위
행 1:4, 8, 14, 막 1:35, 눅 5:16, 마 18:19~20, 고후 10:3~5, 시 50:23.
기억절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
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도입)
파충류나 물고기나 곤충에게도 모성애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이성으로 새끼들이나 자식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모성애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미물들의 본능적인 모성애지만 그들을 통해서 가슴 벅찬 중요한 교훈을 받기도 한다. 오늘 기억절에 나타난 말씀은 주 예수님께서 인간의 부모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성도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부모 마음은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비록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즉 모든 인간들은 선천적으로 악하지만 한결같은 모성애를 갖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하려고 한다. 즉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그 자녀에 대해서만은 그 악한 것보다 더 선을 베풀려고 한다는 것이다. 20명을 연쇄 살인한 유영철, 7명의 부녀자들을 살해한 강호순이 체포되고 난 후 그들의 신상이 공개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똑 같이 자식들을 걱정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강호순은 그의 재산이 다 몰수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자 7명을 죽인 범죄행각을 글로 써서 인세를 받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아들 걱정은 사회적인 통념으로 볼 때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기도할 때 강력하게 움직이신다.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의 말이 옳았다. “세상이 꿈꾸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이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부흥의 역사는 기도로 흠뻑 젖어 있다. 구약 성경은 부흥을 간구했던 부조와 선지자들의 중보 기도를 기록하였다. 모세, 다윗 그리고 다니엘은 능력을 달라고 전능하신 분께 탄원하였다. 사도행전은 하늘을 움직이고 성령의 부어 주심을 간구하기 위해 무릎 꿇은 신약 교회 신자들을 그린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는 기도 생활을 하셨다. 복음서들은 그분에게 있는 영적 능력의 근원을 어렴풋이 보여 준다. 구주께서는 오직 그분의 무릎으로 아버지께 엄청난 힘을 받으셨다.
“신앙 부흥은 오직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대할 필요가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21). 이번 과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부흥의 역사에서 기도가 차지했던 역할을 탐색하고자 한다.
결론 :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더 온전히 파악하고, 그분의 임재를 더 강하게 느낍니다. 기도함으로 그분의 지혜와 능력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소통의 통로입니다. 기도는 부흥을 위하여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아들이도록 우리 마음을 열어 줍니다.
첫째날(일) 사도행전에 기록된 기도와 부흥
7월 7일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교사강해 1)
부부가 한 평생을 함께 살아도 마음이 맞지 않아 싸우고, 더 이상 못살겠다고 황혼 이혼도 한다. 그런데 각기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낳아서 애지중지 키운 자식도 부모와 생각이 달라서 가슴을 치고 안타까워하는 일들이 있는데 교회에 교회의 모인 성도들이 하나 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한 마음 될 수 있는 비결이 있다. 어렵지 않다. 간단하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사도행전의 신자들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충만하였다. 현저한 방식으로 그들 위에 성령이 부어졌다. 심령이 감동을 받고 삶이 변화되었다. 복음은 가장 어려운 지역까지 관통하였고, 수많은 이가 회심하였다. 사도행전 2장에서 3천 명이 교회에 더해졌다(행 2:41). 행 4:4에서는 믿는 자의 수가 남자만 5천 명이었다. 전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다수의 종교 지도자도 믿음에 “복종”하였다(행 6:7). 경이적인 성장의 이야기는 사도행전 9장에서도 계속된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에서 교인의 “수가 더 많아”졌다(행 9:31). 사도행전 10~12장에서 복음은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섰다. 로마의 백부장과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침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처음에 다락방에 모인 신자의 수는 약 백이십 명이었다(행 1:13, 15). 그런데 1세기 끝에 로마 제국 내에는 적어도 백만 명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이는 놀라운 성장이다. 그렇다면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다음 성경절을 살펴보라. 신약 교회가 성장하였던 중요한 원인은 무엇인가?(행 1:4, 8, 14, 2:42, 4:31, 33, 6:3~4)
R. A. 토레이(Torrey) 목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영감적인 부흥 설교자였다. 그는 1903~1905년에 영국에서 그리고 1906~1907년에는 미국에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분주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고 너무 바빠서 능력을 얻지 못한다. 활동은 많지만 성취는 적고, 집회는 많지만 회심은 없으며, 장비는 갖춰졌지만 결과는 거의 없다.”
부가적용)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이렇게 말했다. 기도 없이 10년 하는 것보다 기도하고 10분을 하는 게 낫다.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차라리 10분간 기도하는 편이 낫다.’ 고든(A.J.Gordon)은 말하길, ‘기도한 다음에는 기도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기까지는 결코 기도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없다.’
교훈 :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지속적으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의 기도에 있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도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합니까?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하루에 얼마나 기도하느냐는 질문에 보통 2시간 정도 기도하고 아주 바쁜 날은 3시간 정도 기도한다는 대답으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해야 할 일이 많고 바쁠수록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에 쫓기면서 일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성령의 지배를 받고 그분의 능력으로 일해야 합니다.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 적용 |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데에 더욱 집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왜 성령의 선물을 열망하지 않는가? - “이것이 우리가 능력을 받을 수 있는 방편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열망하고 애태우지 않는가? 왜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에 관해 설교하지 않는가? 자식에게 좋은 선물을 주기를 원하는 부모보다 주님은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기를 더욱 원하신다”(사도행적, 50).
기도
아버지,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바쁘기 때문에 더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매 순간 도와주옵소서.
둘째날(월) 예수님의 기도 생애
7월 8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교사강해 2)
기독교는 원래 적극적이며 동적인 종교이다. 기독교의 종교는 소극적이거나 정적 종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 기도처를 찾았다. 왜 한적한 곳을 찾으셨을까? 이에 한적(閑寂)의 종교라 하면, 혹 불교를 연상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활동력 있는 종교일지라도 그 속에는 한적의 신비가 잠재해 있다. 우주의 만상을 살펴보라. 장엄한 천체의 순환과 수많은 동식물의 번식이 살아 활동하는 놀라운 힘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잠재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롬 1:20). 신 33:14절에 “결실케 하는 보물 태양과 자라게 하는 보물 태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대낮의 태양은 결실케 하지만 모든 식물을 자라게 하는 것은 태음 즉 저녁을 관장하는 달이다. 대낮의 활동성과 한 밤의 한적한 쉼이 매일 같이 교차하고 있다. 이 땅의 삶이 한적한 곳과 번잡한 곳이 함께 공존해 있는 이 우주는 정적인 동시에 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삼라만상의 외면적인 활발한 활동의 모습은 그 힘이 정적인 깊음에서 나옴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물질 세대를 거슬러 종교의 한적에 처할 것이며, 우주의 신비를 느끼며 종교의 한적에 처함이 인생의 최고의 지혜이며 최상의 이상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놀라운 외적인 능력의 산실은 보이지 않는 한적한 기도에 있었음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한적한 기도처를 찾아 기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음 말씀을 비교해 보라. 막 1:35, 눅 5:16, 9:18. 이 말씀들이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하여 보여 주는 3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하여 항상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4),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마 20:28) 함이라고 하셨다. 그가 사시고, 생각하시고, 기도하신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요 남을 위함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여러 시간 동안 아버지와 교통하심으로 하늘의 빛을 사람에게 나누어 줄 준비를 하셨다”(실물교훈, 139).
아래 성경 말씀을 살펴보라.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는지 찾으라. 예수님의 기도는 그분의 최우선적인 관심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예수님이 드리셨던 각각의 기도에서 가장 독특한 요소는 무엇인가?
요 17:20~24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눅 22:31~32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마 26:36~44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는 예수님의 삶에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기도는 아버지와 연결된 생명선이었다. 구주는 매일 기도를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다. 그분은 기도 생활을 통해 원수의 유혹에 맞설 용기와 힘을 얻으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리라는 깊은 헌신의 마음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오셨다. 기도는 그분께 영적 신선함과 능력을 제공하였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9).
부가적용)
우리는 종종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너무너무 바빠 봤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피곤이 겹치다 못해서 밥보다 잠을 더 좋게 느껴봤던 상태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아침에 몸이 비틀면서 ‘5분만 더...’를 외치다가 결국은 학교(또는 직장, 예배)에 늦어본 적은 없는가? 이런 상태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하루의 일과가 과중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이 얼마나 피곤한 상태이었겠는가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전날에 하루 종일 사역을 하시고, 저녁 늦은 시간까지 수많은 각색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 그런데 이처럼 피곤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 이른 시간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무슨 일을 하셨을까? 마가의 증언을 들어보자(막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님은 그 새벽에 한적한 곳을 찾아가서“기도”하셨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가셨다는 말이다.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도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새롭게 하셨다. 사실 여기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의 과정을 보면, 주님은 계속적으로 한적한 곳을 찾아서 하나님과 교제하셨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5-16)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У돈
7월 13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4분
연구 범위
행 1:4, 8, 14, 막 1:35, 눅 5:16, 마 18:19~20, 고후 10:3~5, 시 50:23.
기억절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
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도입)
파충류나 물고기나 곤충에게도 모성애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이성으로 새끼들이나 자식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모성애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미물들의 본능적인 모성애지만 그들을 통해서 가슴 벅찬 중요한 교훈을 받기도 한다. 오늘 기억절에 나타난 말씀은 주 예수님께서 인간의 부모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성도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부모 마음은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비록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즉 모든 인간들은 선천적으로 악하지만 한결같은 모성애를 갖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하려고 한다. 즉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그 자녀에 대해서만은 그 악한 것보다 더 선을 베풀려고 한다는 것이다. 20명을 연쇄 살인한 유영철, 7명의 부녀자들을 살해한 강호순이 체포되고 난 후 그들의 신상이 공개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똑 같이 자식들을 걱정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강호순은 그의 재산이 다 몰수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자 7명을 죽인 범죄행각을 글로 써서 인세를 받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아들 걱정은 사회적인 통념으로 볼 때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기도할 때 강력하게 움직이신다.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의 말이 옳았다. “세상이 꿈꾸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이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부흥의 역사는 기도로 흠뻑 젖어 있다. 구약 성경은 부흥을 간구했던 부조와 선지자들의 중보 기도를 기록하였다. 모세, 다윗 그리고 다니엘은 능력을 달라고 전능하신 분께 탄원하였다. 사도행전은 하늘을 움직이고 성령의 부어 주심을 간구하기 위해 무릎 꿇은 신약 교회 신자들을 그린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는 기도 생활을 하셨다. 복음서들은 그분에게 있는 영적 능력의 근원을 어렴풋이 보여 준다. 구주께서는 오직 그분의 무릎으로 아버지께 엄청난 힘을 받으셨다.
“신앙 부흥은 오직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대할 필요가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21). 이번 과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부흥의 역사에서 기도가 차지했던 역할을 탐색하고자 한다.
결론 :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더 온전히 파악하고, 그분의 임재를 더 강하게 느낍니다. 기도함으로 그분의 지혜와 능력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소통의 통로입니다. 기도는 부흥을 위하여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아들이도록 우리 마음을 열어 줍니다.
첫째날(일) 사도행전에 기록된 기도와 부흥
7월 7일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교사강해 1)
부부가 한 평생을 함께 살아도 마음이 맞지 않아 싸우고, 더 이상 못살겠다고 황혼 이혼도 한다. 그런데 각기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낳아서 애지중지 키운 자식도 부모와 생각이 달라서 가슴을 치고 안타까워하는 일들이 있는데 교회에 교회의 모인 성도들이 하나 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한 마음 될 수 있는 비결이 있다. 어렵지 않다. 간단하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사도행전의 신자들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충만하였다. 현저한 방식으로 그들 위에 성령이 부어졌다. 심령이 감동을 받고 삶이 변화되었다. 복음은 가장 어려운 지역까지 관통하였고, 수많은 이가 회심하였다. 사도행전 2장에서 3천 명이 교회에 더해졌다(행 2:41). 행 4:4에서는 믿는 자의 수가 남자만 5천 명이었다. 전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다수의 종교 지도자도 믿음에 “복종”하였다(행 6:7). 경이적인 성장의 이야기는 사도행전 9장에서도 계속된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에서 교인의 “수가 더 많아”졌다(행 9:31). 사도행전 10~12장에서 복음은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섰다. 로마의 백부장과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침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처음에 다락방에 모인 신자의 수는 약 백이십 명이었다(행 1:13, 15). 그런데 1세기 끝에 로마 제국 내에는 적어도 백만 명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이는 놀라운 성장이다. 그렇다면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다음 성경절을 살펴보라. 신약 교회가 성장하였던 중요한 원인은 무엇인가?(행 1:4, 8, 14, 2:42, 4:31, 33, 6:3~4)
R. A. 토레이(Torrey) 목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영감적인 부흥 설교자였다. 그는 1903~1905년에 영국에서 그리고 1906~1907년에는 미국에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분주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고 너무 바빠서 능력을 얻지 못한다. 활동은 많지만 성취는 적고, 집회는 많지만 회심은 없으며, 장비는 갖춰졌지만 결과는 거의 없다.”
부가적용)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이렇게 말했다. 기도 없이 10년 하는 것보다 기도하고 10분을 하는 게 낫다.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차라리 10분간 기도하는 편이 낫다.’ 고든(A.J.Gordon)은 말하길, ‘기도한 다음에는 기도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기까지는 결코 기도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없다.’
교훈 :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지속적으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의 기도에 있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도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합니까?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하루에 얼마나 기도하느냐는 질문에 보통 2시간 정도 기도하고 아주 바쁜 날은 3시간 정도 기도한다는 대답으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해야 할 일이 많고 바쁠수록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에 쫓기면서 일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성령의 지배를 받고 그분의 능력으로 일해야 합니다.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 적용 |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데에 더욱 집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왜 성령의 선물을 열망하지 않는가? - “이것이 우리가 능력을 받을 수 있는 방편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열망하고 애태우지 않는가? 왜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에 관해 설교하지 않는가? 자식에게 좋은 선물을 주기를 원하는 부모보다 주님은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기를 더욱 원하신다”(사도행적, 50).
기도
아버지,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바쁘기 때문에 더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매 순간 도와주옵소서.
둘째날(월) 예수님의 기도 생애
7월 8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교사강해 2)
기독교는 원래 적극적이며 동적인 종교이다. 기독교의 종교는 소극적이거나 정적 종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 기도처를 찾았다. 왜 한적한 곳을 찾으셨을까? 이에 한적(閑寂)의 종교라 하면, 혹 불교를 연상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활동력 있는 종교일지라도 그 속에는 한적의 신비가 잠재해 있다. 우주의 만상을 살펴보라. 장엄한 천체의 순환과 수많은 동식물의 번식이 살아 활동하는 놀라운 힘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잠재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롬 1:20). 신 33:14절에 “결실케 하는 보물 태양과 자라게 하는 보물 태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대낮의 태양은 결실케 하지만 모든 식물을 자라게 하는 것은 태음 즉 저녁을 관장하는 달이다. 대낮의 활동성과 한 밤의 한적한 쉼이 매일 같이 교차하고 있다. 이 땅의 삶이 한적한 곳과 번잡한 곳이 함께 공존해 있는 이 우주는 정적인 동시에 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삼라만상의 외면적인 활발한 활동의 모습은 그 힘이 정적인 깊음에서 나옴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물질 세대를 거슬러 종교의 한적에 처할 것이며, 우주의 신비를 느끼며 종교의 한적에 처함이 인생의 최고의 지혜이며 최상의 이상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놀라운 외적인 능력의 산실은 보이지 않는 한적한 기도에 있었음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한적한 기도처를 찾아 기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음 말씀을 비교해 보라. 막 1:35, 눅 5:16, 9:18. 이 말씀들이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하여 보여 주는 3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하여 항상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4),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마 20:28) 함이라고 하셨다. 그가 사시고, 생각하시고, 기도하신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요 남을 위함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여러 시간 동안 아버지와 교통하심으로 하늘의 빛을 사람에게 나누어 줄 준비를 하셨다”(실물교훈, 139).
아래 성경 말씀을 살펴보라.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는지 찾으라. 예수님의 기도는 그분의 최우선적인 관심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예수님이 드리셨던 각각의 기도에서 가장 독특한 요소는 무엇인가?
요 17:20~24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눅 22:31~32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마 26:36~44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는 예수님의 삶에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기도는 아버지와 연결된 생명선이었다. 구주는 매일 기도를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다. 그분은 기도 생활을 통해 원수의 유혹에 맞설 용기와 힘을 얻으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리라는 깊은 헌신의 마음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오셨다. 기도는 그분께 영적 신선함과 능력을 제공하였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9).
부가적용)
우리는 종종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너무너무 바빠 봤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피곤이 겹치다 못해서 밥보다 잠을 더 좋게 느껴봤던 상태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아침에 몸이 비틀면서 ‘5분만 더...’를 외치다가 결국은 학교(또는 직장, 예배)에 늦어본 적은 없는가? 이런 상태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하루의 일과가 과중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이 얼마나 피곤한 상태이었겠는가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전날에 하루 종일 사역을 하시고, 저녁 늦은 시간까지 수많은 각색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 그런데 이처럼 피곤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 이른 시간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무슨 일을 하셨을까? 마가의 증언을 들어보자(막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님은 그 새벽에 한적한 곳을 찾아가서“기도”하셨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가셨다는 말이다.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도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새롭게 하셨다. 사실 여기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의 과정을 보면, 주님은 계속적으로 한적한 곳을 찾아서 하나님과 교제하셨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5-16)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У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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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용님의 댓글
이한용 작성일
목사님 감사합니다. 늘건강 하시고 행복 하세요.
모성애 잘 보았습니다. 이한용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