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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소망(조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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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9-04-10 07:01 조회5,6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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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소망
4월 18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0분)

도입)
“희망이란 도대체 만들 수 없는 형상이다. 그러나 희망이란 단 한 가지 평탄한 길을 거쳐 인생의 종착역까지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세계를 움직인 명언, P.62 - 라 로슈코프)
한때 테니스 세계의 정상을 차지했었으나 자살을 시도했던 보리스 백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윔블던에서 두 번이나 우승을 했습니다. 그중 한 번은 가장 나이 어린 선수였습니다. 나는 부자였습니다. 필요한 모든 물질을 소유했지만 아주 불행했습니다. 제 마음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저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만이 아니다. 유명한 소설을 쓴 한 작가는 소년 시절에 알았었다면 하는 것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정상에 도달해 봐야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무엇이 부족했을까? 사람이 그렇게 많이 소유하고도 여전히 불만스럽고, 자살까지 기도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오직 그분만이 만족시켜 주실 수 있는 의미와 목적과 희망을 갈망하도록 만드셨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때 주님께서는 이 갈망을 채워 주신다. 성공을 했든 안했든 누구든지 이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길은 주 예수를 구주로 모시는 것뿐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는 것이다.

핵심본문: 벧전 3:15

학습 목표
깨닫기: 우리는 비록 죄로 망가진 세상에 살지만 예수님 안에 영생의 소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확신한다.
행하기: 영생의 약속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소망을 나누어주면서 소망 가득한 삶을 살아간다.

교과 개요
I. 소망의 근원(고전 15:12-19)
A.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소망의 기초를 둔다.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고 한 바울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B. 영생의 약속이 소망의 이유가 된다. 그리스도교의 또 어떤 진리가 소망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가?

II. 소망을 확증함(눅 21:25-28)
A.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예언의 선물을 통해 당신의 지혜와 지식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B. 영생의 소망은 미래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이곳에서 소망의 실체를 경험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III. 소망을 실현함(시 31:24)
A. 영생의 약속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자. 소망이 우리 삶의 방식에 배어나도록 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요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믿음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가련한 사람들이 되고 만다. 우리의 소망이 참으로 우리 삶의 모습에 영향을 행사하게 하자.

기억절: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벧전 3:15)

연구범위: 눅 21:25-26, 요 5:24, 고전 15:20-26, 50-55, 계 21장.

중심 사상: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소망이 없는 이 세상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이 소망이 우리 자신이나 세상의 어떤 사물에 기초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과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 오후
20세기가 시작될 때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었다. 20세기가 시작되고 처음 50년 동안은 사람들이 멋진 삶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낙관론이 서구사회에 팽배해 있었다. 사람들은 이성을 활용하여 모든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완전한 도덕성을 갖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새로운 발명품들, 빨라진 교통수단들, 눈부시게 발전하는 의학 지식, 새롭게 도입되는 기계 등으로 모든 삶이 향상되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대학살, 냉전과 핵무기의 위협, 상존하는 세계적인 테러의 공포, 그리고 인간에 의해 파괴되는 환경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해 낙관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은 있다. 그 희망은 우리가 보고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것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

일요일(4월 12일)
이 세상에서의 소망(눅 21:25-26)

도입)
독일에서 태어난 베르너 렘케(Werner Lemke)는 유년 시절에 2차 세계대전을 겪었는데, 연합군이 진격해 오는 바람에 온 가족이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그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심정으로 짐을 꾸린 뒤, 마지막으로 정든 집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때 큰아들이 “잠깐만!”이라고 하더니 피아노 앞으로 달려갔다. 가족이 함께 모여 웃고 찬양하던 피아노 앞에 앉아, 큰아들은 그들이 즐겨 부르던 ‘예부터 도움 되시고’(찬송가 438장)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찬송 가사 가운데 하나님을 가리켜 ‘내 소망 되신 주’라고 고백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 부분을 부르며 그들은 하나님이 정말 그들의 소망이 되신다는 격려를 받고 담대함과 평안함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렘케 가족은 피난길에 오르면서도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삶의 경주를 달려갔다.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아주 평안했다. 성경은 소망을 ‘영혼의 닻’(히 6:19)이라고 부른다. 닻은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영혼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꽉 붙들어 주는 것이다. 닻이 없으면 배는 바람과 물결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중심을 잡아 주는 닻이 없으면 예측 불가능한 인생의 기후로 인해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으면 그분과 하나로 묶이게 되어 삶의 경주를 달려갈 수 있는 새 힘을 얻게 된다. 또한 모든 역경을 헤치고 날아오를 수 있는 힘도 얻게 된다. 피곤함이나 지침도 모르고서 말이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사람들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사람들은 여객기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으로 돌진하는 장면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가득 탄 여객기를 이용해 자폭을 감행했던 테러리스트들이 또 다시 폭탄을 짊어지고 버스 정류장이나 슈퍼마켓으로 뛰어든다면 그것을 완전히 방지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 도처에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왜 이러한 공포를 느껴야 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안다.

1.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눅 21:25-26)
답: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눅 21:25-26)

“죄악은 거의 그 한도를 채웠다. 혼란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큰 공포가 곧 인류에게 임할 것이다. 종말은 매우 가깝다. 하나님의 백성은 가공할 사건이 세상에 일어날 것에 대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새 자녀 지도법, 555). 마치 엘렌 화잇이 9. 11을 목격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의 세상은 전쟁과 부패, 탐욕과 공포의 세상이다. 그리고 많은 불유쾌한 일들이 세상에서, 그리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 여전히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소망을 가지고 있다. 나라들 간에 큰 고통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할 것이다(눅 21:26). 그러나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염려하거나 이 일들로 인해 놀라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일들은 그 말씀이 진실임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2. 예수께서는 이 혼란과 공포의 세상 중에서도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제공해 주십니까?(눅 21:28)
답: 우리는 세상의 혼란과 공포 가운데서도 위를 바라볼 수 있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소망을 품을 수 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눅 21:28).

교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으로 두려운 세상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소망을 안겨주셨으므로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부가적용)
중세 시대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을 '대죄(大罪)'로 여겼다. 그러나 어리석은 낙관주의도 역시 치명적인 죄이며, 그것을 기독교적인 소망으로 대치하려는 시도도 마찬가지 죄이다. 선천적으로 낙관적인 사람들이 있다. 낙관주의는 "걱정 하지마!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끝까지 사태를 다룰 수 있는 보다 훌륭한 능력을 갖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 낙관주의는 "기운 내!"라고 말하고, 소망은 "하나님을 바라보라. 너의 구원이 다가오고 있다!"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소망은 광야에서, 사막에서, 유랑생활 중에 선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결코 '백일몽(白日夢)'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현실을 대면해야 하는 미래를 향하여 분투하는 "소망을 동반한 절대적인 믿음"이다. 기독교적 소망은 '아브라함'과 같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수 있으며, 고난 중에 인내하는데,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을 통해 소망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삶의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도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하나의 중심적인 소망이신 하나님을 굳게 붙잡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고 바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주 하나님 안에서 집약된 소망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로마서 5:3~6)

월요일(4월 13일)
소망은 지금 여기에(요 5:24)

도입)
영국 런던에 있는 케이 미술관에 가보면 프레드릭 왓츠라는 분이 그린 소망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을 보면 둥그런 지구 위에 어떤 약하게 보이는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그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눈에 수건을 싸매었다. 앞을 보지 못한다. 그 여자의 손에는 조그마한 비파가 하나 있다. 그 비파의 줄은 본래 일곱 줄이었으나 여섯 줄은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았다. 캄캄해서 앞을 보지 못하고 여섯 줄은 끊어졌지만 이 여자는 한 줄을 가지고 비파를 계속해서 탄다. 그 줄은 바로 소망의 줄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믿던 모든 줄이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소망의 줄만 끊어지지 아니하면 우리 인간은 계속해서 모든 것을 이기고 나갈 수 있다고 하는 뜻이다. 끝까지 끊어지지 아니하는 소망의 줄이 어떤 줄인가? 영원하신 하나님께 둔 소망의 줄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하나님의 백성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과 함께 할 영원한 삶 등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미래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현재적이고 실제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이들과 구별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主)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위대한 변화를 상기시켜 준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우리도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변화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을 때(13절)만 가능하다.

1.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을 때 일어나는 근본적인 변화를 예수께서는 어떻게 묘사하셨습니까?(요 5:24)
답: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2. 요한복음 10:10은 우리의 삶이 어떠할 것이라고 말합니까? 이 약속은 무슨 의미이며, 어떻게 그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답: 예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삶)은 미래에 속한 것이면서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우리는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생명’은 요한복음의 핵심 단어 중 하나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생명은 근본적으로 영생을 가리킨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의 생명은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그분께서 베푸시는 현재적이고 실제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두 가지 열쇠가 있는데, 첫째는 그 생명의 근원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요 6:33-58, 14:6, 요일 5:11-12). 예수께서 계시는 곳이면 어디나 생명이 있다(요 11:25-26). 생명을 얻는 두 번째 열쇠는 믿는 것이다(요 1:4, 12). 우리가 예수님 안에 항상 있는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비결은 그분과 계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요 3:16, 36).”(존 폴린, 풍요한 삶을 위한 성경 확대경: 요한복음, 퍼시픽 프레스, 1995년, 189)

교훈: 우리는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우리는 영생의 축복을 지금 이곳에서도 누릴 수 있다.

부가적용)
많은 사람이 얄팍한 현실의 세계에 자신의 영혼의 닻을 내리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현실 어디에도 우리 마음의 닻을 내릴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 우리 영혼의 닻을 내릴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의 품뿐입니다. 우리가 피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생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과 같이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겉핥기식의 신앙생활로 영적 만족을 누리려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진실한 내적 동기도 없이 의미 없는 기도회와 세미나 등에 참여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신을 속이며 살아갑니다. 믿는 사람들이 흔하게 하는 말 가운데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질, 성공, 출세, 권력과 같은 것을 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단지 교리의 틀만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은 하나님 중심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집과 독선을 하나님 중심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 중심은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허락하는 삶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고 버릴 수 있는 삶의 용기, 진실성, 담대함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 「삶, 그리고 성령」/ 임영수

화요일(4월 14일)
무덤 너머의 소망(살전 4:14)

도입)
우리는 인간으로 세상을 살면서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며 그 연장선에서 죽음과 그 너머의 세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무종교자이든, 신자든, 무신론자든 모든 사람에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친구이다. 이 친구는 빈부 남녀 노유를 가리지 않고 예고 없이 찾아온다. 인간에게 죽음 너머의 문제가 담론이 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흔히 삶은 죽음을 향한 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인간에게 죽음이 그 끝이라면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어진다면 이 세상에 편만한 영적 문제와 영적 세계에 대한 흔적들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으며 종교는 또한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가?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인생과정의 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진수이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세상에서 그 인생을 값지게 준비하려고 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죽음 너머에 있는 영혼의 생명을 소망하며 그것에 걸맞게 살려고 노력하기 그렇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하리라” 그렇다. 기독교 신앙이 가진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만일 이 땅에 한정된 것이라면 무엇이 소중하겠는가?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향한 영원한 소망을 품을 수 있다면 이 보다 값진 인생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우리 주님은 죽음 이후의 삶을 분명히 약속하고 계시다. 진실한 신앙은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두려움 없이 맞이하게 한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죽음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온다(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사별의 슬픔을 맛보았다. 우리는 또한 날마다 죽음이라는 무서운 실체와 대면하고 있다. 공동묘지를 지날 때나 영구차를 볼 때, 혹은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것을 본다. 그러나 더욱 슬픈 일은 우리 자신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적(大敵)인 죽음도 언젠가는 패배하게 될 원수이다.

1. 죽음의 실체에 관한 어떤 영광스런 진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고전 15:20-26, 50-55, 벧전 1:3)
답: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4-55)

2. 부활의 아침에 인류는 어떻게 나눠집니까?(살전 4:14)
답: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무덤에서 부활하여 승천하는 특권을 누릴 것이나,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에 이를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유명한 부활장(고전 15장)에서, 부활의 소망을 우리의 전체 신앙 경험의 핵심적인 요소로 강조하고 있다(12-19절).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다.
물론 육신의 부활에 관한 여러 면들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의 '부활'이 현재 우리 신체의 구성 성분을 안전하게 보존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부활은 우리의 고유한 신원을 보존하시고, 다시는 성형수술을 하거나 노화방지제를 섭취하지 않아도 되도록 한 순간에 새로운 몸으로 재창조하실 창조주의 능력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이적을 행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맨 처음 세상에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으셨던 그분께서는 거룩한 기억력으로 사람들의 신원을 온전히 보존하시고, 그들로 이 땅에 충만하도록 재창조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부활의 소망은 우리의 지성이나 감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에 기초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신자들은 죽음이라는 일시적인 '잠'에서 일어나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교훈: 우리의 소망은 죽음 그 너머에까지 미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의뢰하자.

부가적용)
1967년 6월 30일 열일곱 살의 운동 선수 조니 에릭슨은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그로 인해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쓰라림과, 좌절, 원망, 분노, 심지어 자살하고 싶은 우울증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에 휩싸였다. 하지만 얼마 후 그녀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법 뿐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는 모임도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이토록 변화시킨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그녀의 변화의 중심에는“부활”이 있었다. 그녀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자 나에게도 미래에 대한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늘에서 '영화롭게'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구부러지고, 근육은 쇠약해지고, 무릎은 비틀리고, 어깨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내가, 언젠가는 가볍고 밝으며 강력하고 눈부신 의로 옷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되다니... 나는 지금까지 그 어떤 종교나 철학에서도 이런 약속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상처 입은 사람이 이처럼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믿는 신자들이 죽는 것을 가리켜 잠을 잔다고 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안식한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다시금 깬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이 세상의 마지막 날 다시 살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굳게 하자.

수요일(4월 15일)
영원한 소망(고전 15:42-43, 52)

도입)
우리 인생의 소망의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영원한 소망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실의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또한 우리의 소망이 영원한 소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현존하는 이유와 그분은 이 세상을 사랑하는 다는 것과 바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이유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의 이유가 된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어찌 무한한 것을 깨달을 수 있으며, 보통 80년 혹은 90년도 살지 못하는 인생이 어찌 영원한 불멸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영생이란 단지 지금의 우리의 삶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가까울 것이다. 영생은 전혀 질적으로 다른 삶이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상태에 있을 동안에는 장래의 영광을 어렴풋이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희미하게' 볼 뿐이며, '부분적으로' 알 뿐이다.(고전 13:12)

1. 영원한 삶이 지금의 삶과 다른 점은 무엇이고, 또 비슷한 점은 무엇이겠습니까?(고전 15:42-43, 52, 계 21장)
답: 죽음에서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서 주님을 영접하여 홀연히 변화된 성도의 몸은 더 이상 썩지 아니할 불멸의 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신원(identity)을 간직함으로, 과거에 알았던 이들은 서로를 알아 볼 것이다.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삶을 생각할 때, 지금 이곳에서는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배울 수 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흘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과 동일한 분이심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죽을 몸과는 달리, 자연의 법칙에 지배받지 않는 '영화롭게 된'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러나 한편 그분께서는 죽음과 부활 이전에 가지셨던 '인간의 모습'을 계속해서 소유하셨다. 사람들은 그분의 외모와 음성과 동작까지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를 알던 이들은 우리가 '영화롭게 된 새 몸'을 가졌을 때에도 알아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에도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돌아온 자에게 성령께서 임재하신다고 설명한다(롬 8:10). 그러므로 신자들은 장차 올 세상에서 온전히 실현될 영원한 생명에 이미 접촉되었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이다.(엡 1:13-14)

교훈: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은 그분의 부활을 통해 확증되었으며,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보증되었다.

부가적용)
우리는 거짓말이 난무하는 사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죄로 여기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정치인들은 거짓말로 공약을 내거는 것이 행사처럼 반복되고 있다. 정치인들 하면 으레 떠오르는 생각이 거짓말쟁이들, 사기꾼들 이라는 선입견이다. 그만치 정치인들인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거짓말을 예사로 한다. 많은 사람들은 가장하는 위선과 거짓말로 사기 치는 것을 대단한 능력인 양 생각하고 행동한다. 거짓말 못하는 사람들, 정직한 사람들은 소위 바보 취급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생각은 다르다. 요한계시록 22:15에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사람들이 하는 짓으로 보아서는 벌써 멸망했어도 몇 번을 망했어야 하건만, 하나님이 일반은총으로 사람들과 우주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다. 이런 것만 보아도 우리는 하나님이 거짓이 없으신 분임을 즉각 알아챌 수 있다. 즉 역사의 전개, 하나님이 하시는 일발전인 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가장 중요한 점 중의 하나가 거짓말을 못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인류의 긍극적인 소망이다. 하나님이 정치인들처럼,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라면 정말 끔찍할 것이다. …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딛 1:2절) 바울은 영생을 약속하신 분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다음으로 영생의 약속이 무작위 적으로 방금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약속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2절) 이 부분의 영원 전부터 라는 헬라어 표현은 프로 크로논 아니오니온 이다. 크로논은 흐르는 시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이 영생을 약속하신 것이 된다. 즉 창세 전에 라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시고 이들 중에 영생을 주실 것을 창세 전에 이미 계획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창세 전에 이미 갖고 계신 것이었기 때문에 이 약속은 공고하고 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을 계획하시고 이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구원계획은 창세 전에 이미 있었다. 영생을 주실 것은 이미 창세 전에 작정이 되었다. 그러므로 절대 공고한 것이다.

목요일(4월 16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딛 2:13)

도입)
소망은 히브리어로 “베타흐”라고 한다. 이는 “믿는다, 신뢰한다, 의지한다.”는 뜻에서 나왔다. 소망의 헬라어는 “엘피스”이다. 이는 “붙잡는다, 기대한다”는 뜻에서 나왔다. 원래 인간은 소망하는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의 존재라고 했고, 어떤 이는 인간을 공작하는 존재라고 했지만 사회 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은 인간이란 소망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인간을 희망을 갖고 희망 때문에 사는 희망의 존재이다. 희망이 없으면 살 수 없고 희망이 없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희망이 없으면 짐승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문명과 기술은 희망을 가진 사람들의 꿈이다. 희망을 갖고 노력했던 사람들의 열매요, 소망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희망의 존재로 만들었다. 소망이 없으면 죽음이다. 범죄한 인간에게서 소망이 사라졌다. 그것이 곧 죄악이요, 사망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새 희망이 되시고, 소망이 되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소망이 생명의 동기가 되고 생명이 바로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소망이며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시기 벌써 오래 전에 그분의 오심이 예고되었었다. 참으로 그분은 약속대로 오셨다. 그분의 재림의 약속은 더욱 다양하게 주어졌다. 그분께서는 "내가 다시 오리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성경 마지막 페이지에도 이 약속은 반복되어 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소망이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다.(딛 2:13)

1.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분의 재림의 약속은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계 22:7, 10-12, 20)
답: 그리스도의 재림은 구속의 계획에 있어서 절정이요 결말이다.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고 말씀하신다.

2. 베드로후서 3:8-9은 재림과 관련하여 사용된 '속히'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죄의 문제와 죄로 인해 야기된 모든 불행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인간이 고안한 어떤 것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우리의 소망은 인간의 과학 기술이나 똑똑한 정치가나, 사회적 및 도덕적 진보에 있지 않다. 이것들은 결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물론 주님의 오심을 전후하여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대하는 그분을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곧 오실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시간문제이다. 그리고 아무도 이 사실을 변경할 수 없다. 어떤 힘 있는 사람도 세상을 그분의 통제에서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손에 단단히 그리고 영원히 붙들리게 되었다. 우리는 십자가의 승리로 충만한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루어질 가능성도 없는 먼 훗날의 막연한 소망을 향해 무작정 전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어 놓으신 소망으로부터 의기양양하게 나아가는 것이다.(노먼 걸리,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리뷰 앤드 헤럴드, 1998년, 540)

교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은 죄에 빠진 인류의 모든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는 최후의 소망이다. 그분은 분명히, 그리고 속히 오실 것이다.

부가적용)
이스라엘 민족의 꺼지지 않는 소망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들을 택하신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희망이요, 또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룩한 언약의 성취가 소망이다. 그 소망을 이루신 이가 바로 메시야이시다. 메시야 강림은 이스라엘의 소망이다. 그 메시야가 오셔서 약속하신 새 천년의 세계, 그야말로 행복과 기쁨과 풍요가 깃든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종말론적인 희망이다. 이스라엘의 이 같은 종말론적인 희망은 물론 역사의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인 파루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종말신앙이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세계가 바르게 성취될 날이 올 것이요, 이것이 수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하신 약속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 같이 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미 우리의 희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시편 3:5절에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라고 했다. 내가 매일 자고 깨어나는 것, 내가 평안히 눕고 침대에서 자는 것 이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이요, 붙들어 주심이라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영성이요, 희망이요 소망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멀리 있는 소망이 아니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소망, 지금 성취되어 기뻐하고 만족하는 소망이다.

금요일(4월 1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각 시대의 대쟁투, 제42장 '대쟁투의 종막'(662-678).

다음의 장엄한 구절을 암송해 보라. “대쟁투는 끝났다. 죄와 죄인들은 없어졌다. 온 우주는 깨끗해졌다. 오직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온 우주의 만물을 통하여 고동(鼓動)친다. 생명과 빛과 환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게서 끝없이 넓은 우주로 퍼져나간다. 가장 작은 원자(原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67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새 땅에서의 삶이 어떨 것인지에 대해 각자가 묘사해 보고, 그것을 교과 시간에 발표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토의해 보십시오.

2. 모든 일이 나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듯이 보일 때에도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3. 그리스도 안에 소망을 둔 사람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요약: 소망은 그리스도인 삶에 있어 지극히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에 확고히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지금 이 땅에서의 삶과도 연결된다. 왜냐하면 장차 올 왕국은 원칙적으로 신자들 가운데 이미 임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스러운 소망의 완전한 실현은 미래에 있다. 세상은 여전히 사단의 반역의 결과로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 결과는 보증되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그분의 영원한 왕국은 영광스럽게 곧 실현될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영원히 그 왕국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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