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생명의 말씀을 경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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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09-07-02 16:35 조회6,321회 댓글0건본문
제2과 생명의 말씀을 경험함
7월 11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5분)
기억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연구범위: 신 4:14, 고전 15:48, 요일 1:1~4, 5장, 계 19:13.
학습 포인트: 예수님을 가리켜 왜 “생명의 말씀”이라 부르는가? 요한이 그의 서신의 서론을 그렇게 쓴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증인들이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공동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안식일 오후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한 남자가 법정에 섰다. 그는 큰 소리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결코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건 발생 당시에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의 말만 들었다면 그 말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목격자들이 등장했다. 목격자들은 한 명씩 나와서 거의 같은 내용의 진술을 하였다. 그들은 피고인을 범행 현장에서 보았고, 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목격자들이 사건 당시에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의 증언은 확증적이었고 그 사람의 유죄는 분명해졌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목격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서신을 시작한 것이다.
핵심본문: 요일 1:1-4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과의 사귐이 참된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느끼기: 사귐의 기쁨을 경험한다.
행하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
교과 개요
I. 깨닫기: 하나님과의 사귐
A. 요한일서 1:3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언급하였다. 이 사실은 하나님과의 사귐의 기회를 어떻게 제공해 주는가?
B.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고난을 겪으심으로, 우리는 그분을 통해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 기쁨은 어떤 기쁨인가?
C. 요한은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의 사귐을 기뻐하였다. 그리스도인 삶에서 사귐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II. 느끼기: 충만한 기쁨
A.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오는 행복과 기쁨은 다른 근원에서 오는 행복과 기쁨과는 어떻게 다른가?
B. 서로간의 사귐은 기쁨을 증대하는 데 있어 어떤 역할을 하는가?
III. 행하기: 기쁨으로 변화됨
A. 당신은 어떤 경우에 참된 기쁨을 경험하는가? 이러한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B. 안식일학교 활동반(또는 교과반)은 어떤 식으로 사귐을 증대시켜 주는가? 다음 한 주 동안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사귐을 증진시키기로 결심하자.
요점: 요한이 예수님과 더불어 경험한 개인적인 기쁨과 사귐은 전염성이 있다. 그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충만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일요일(7월 5일) 요한일서의 서론(요일 1:1~4)
1. 요한일서 1:1~4을 읽으십시오. 요한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요한의 말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요일1: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답: 요한은 자신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자라고 말했다. 요한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도 생생한 감동을 전달받을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님과 사귀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요한은 다른 이들과 함께 이 “생명의 말씀”을 직접 목격한 자임을 천명하면서 그의 서신을 시작한다. 2절과 3절의 앞부분에서 그는 이 “생명”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2. 요한은 자신이 “생명의 말씀”에 관해 선언한 결과로 어떤 두 가지의 일이 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까?
답: 요한은 자신의 전파를 통해 우리에게 사귐이 있고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원했다.
요한은 1장 1절과 3절에서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진술을 하였다. (1) 태초부터 무엇이 있었으며, (2) 우리가 무엇을 들었고, (3) 무엇을 보았으며, (4) 무엇을 주목하였고, (5) 무엇을 만졌으며, (6) 또 무엇을 보았고, (7) 또한 어떤 증거를 전해 들었는지를 말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요일 1:3)고 하였다. 2절에는 “이 영원한 생명을 … 너희에게 전하노”라(요일 1:2)고 하는 말이 나온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을 통하여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실체를 우리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자신들도 영원한 생명과 사귐,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가질 수 있는 기쁨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였다. 우리가 믿는 그분은 요한 자신이 듣고 보고 만졌던 동일한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함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생애, 그분의 의, 그리고 그분의 죽음을 값없이 선물로 제공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이끈다. 감사, 찬양, 그리고 기쁨이 우러나고, 순종은 즐거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기쁨이 되고, 마음은 성령께서 거하실 수 있도록 언제나 열려 있는 거처가 된다. 하나님과 회개하는 죄인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수립된다. 그것은 두려움과 의무의 관계라기보다는 사랑과 경탄에 기초된 교제이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160)
<부가설명>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1:7)이다. 우리는 이 마음으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재림신자들이 은근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생각 된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생활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롬8:1, 5:1) 요한은 이 사실을 자기의 체험을 통하여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생활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과 친교하는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교훈: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의 서두에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직접 듣고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월요일(7월 6일) 요한일서 1장과 요한복음 1장(요일 1:1~5)
요한복음을 아는 이들은 요한일서의 서론이 요한복음의 서론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눈치 챌 것이다.
1. 요한일서 1:1~5을 읽고 요한복음 1:1~5과 비교해 보십시오. 비슷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일1:1-5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답: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단어들로는 태초, 생명, 말씀, 하나님, 함께, 빛 등이 있다. 요한은 이 두 곳에서 예수님을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두 구절 다 거의 비슷하게 시작된다. 둘 다 분명히 창세기 1:1의 창조를 언급하는 “태초에”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과거의 어느 시점을 가리키고 있다. 둘 다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을 구분하고 있으며, 이 두 분을 나란히 언급함으로 상호간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두 구절 다 “생명”과 “빛”이라는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 두 구절 사이에는 유사한 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차이점도 있다.
2. 요한일서 1:1~5에서는 발견할 수 없지만 요한복음 1:1~5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요한일서와 비교해 볼 때,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더욱 분명하게 창조주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매우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언급하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으로 힘 있게 강조되어 있다. 요한일서 1:3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통해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강조되어 있긴 하지만, 요한일서의 서론에는 요한복음의 서론에서처럼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예수님께 직접 적용되지는 않았다. 또한 요한복음에는 창조주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아무 것도 그분이 없이는 창조되지 않았다.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창조주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공적이고 대중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었지만, 요한일서는 목격자들의 개인적인 증언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정리하자면, 둘 다 구원의 계획의 중심이신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 준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는 참 생명
“육체의 생명은 생명의 시여자이신 하나님께서 다시 취하여 가시는 것이므로 영원하거나 불멸하는 생명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지배할 힘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딴 데서 빌리신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에게서 생명을 취하여 갈 수 없다. 주님께서는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안에 있던 생명은 근본적인 것이었고 딴 데서 빌린 것이 아니었으며 다른 기원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이러한 생명을 타고나지 못하였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96-297)
<부가설명> 요한은 우리 주님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일에 담대하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진 목격자이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사실에 추호의 의심이 없었다. 그는 공적이거나 사적이거나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언을 했다. 그가 이렇게 증거할 때에 그의 상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을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그의 증거를 믿지 않아도 그의 체험이 그 자신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체험한 것과 같은 체험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기록된 말씀이 우리 재림성도들을 통하여 육신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이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이 육신이 되어 나타난 모습을 볼 수 있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교훈: 요한복음은 공적이고 대중적인 견지에서 예수님을 하나님과 창조주로 나타냈으며, 요한일서는 보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그분을 드러냈다.
화요일(7월 7일) 생명의 말씀(요일 1:1~2)
1. “생명의 말씀”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말은 왜 예수님께 딱 어울리는 표현입니까?
답: 요한의 저술들에서 “생명의 말씀”은 오직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분은 생명(요 14:6)이시고, 말씀(요 1:1, 요일 1:1)이시다.
요한일서 1:1에는 생명의 “말씀”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이와 같은 용어가 요한복음 1:1~3에서도 발견되는데,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백마(白馬)를 탄 이가 “하나님의 말씀”(계 19:13)으로 불렸는데, 이 또한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한의 글들에서 그 용어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문맥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요한일서 1:1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용어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생명”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 14:6). 따라서 요한일서 1:2의 생명 또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분은 당연히 “생명의 말씀”이시다.
2. 이 구절들에서 요한이 사용한 “생명의 말씀”이라는 용어가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또 다른 증거는 무엇입니까?
답: 요한은 “생명의 말씀”을 보고 듣고 만졌다고 했는데, 이는 그가 말씀(로고스)이신 예수님을 목격하였고, 또한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3년 반의 공생애 동안 그분과 함께 했던 경험을 지칭하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그 표현이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복음을 귀로 듣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눈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만약 “생명의 말씀”이 복음 전파를 가리킨다면 그것을 손으로 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개인적으로 듣고 보고 만진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보고 만진다는 말보다 훨씬 더 이치에 맞다. 더군다나 “이 생명이 …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2)고 하였으므로, 요한이 “생명의 말씀”을 언급할 때에 한 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생명의 말씀에 복종함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생명의 떡을 먹고, 구원의 물을 마실 때에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라날 것이다. 그들의 품성은 마음이 먹고 마시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이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생명의 말씀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하는 모든 봉사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되며 사람이 높임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가 존귀함을 받는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5)
<부가설명>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을 본질적 면에서 우리에게 소개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생명 자체이시고 말씀 자체이시다. 말씀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말씀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예수님이 의미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을 빼면 우주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면 존재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피조물은 생명의 말씀 안에서 그 존재를 유지하며 존재의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며 말씀이시다. 그분만이 모든 것의 의미이시다. 의미를 상실한 것은 없어지는 것이다.
교훈: 요한일서 1:2에 나오는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요한은 그분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으며, 손으로 만졌다고 하였다.
수요일(7월 8일) 목격자들(신 4:1~9)
사람들은 축구 경기나 음악회나 정치적 모임에 참석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진행 과정을 직접 보기를 원하고, 스스로 그것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런 다음에야 그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사건이나 사고를 우연히 목격하여 법정에 증인으로 호출되기도 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목격자들이었다. 이 “그리스도 사건”은 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요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요한일서 1:1~4에서 그는 예수님을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을 뿐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듣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요한은 이 주장을 여러 절에서 반복하였고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개인적인 경험의 진실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1. 요한은 사건의 목격자로 강력히 주장하고 나선 성경의 유일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구절들은 요한일서 1:1~3과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말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들은 무엇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신 4:1~9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3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을 인하여 행하신 바를 너희가 목도하였거니와 바알브올을 좇은 모든 사람을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서 진멸하셨으되 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5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모세는 주의 영광을 보았고, 그분의 선하심을 백성에게 가르쳤으며, 백성들도 목도하였다.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도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과 부활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고전 15:4~8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 바울도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격자라고 증언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목격하거나 성경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직접 목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해 목격자들이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특히 '포스트모던'(post-modern) 세계에서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경험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인 사건들보다도 하나님의 실존과 선하심에 대한 더 강력한 증언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가장 친밀한 제자였던 요한
“제자들은 얼마 동안 적극적인 활동으로 예수님과 함께 사귀어 왔다. 요한과 야고보, 안드레와 베드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 마태는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과 더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예수님의 이적도 더 많이 목격하였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한층 더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당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거의 항상 함께 있었다. 요한은 예수님과 한층 더 긴밀한 친분을 가짐으로 그분의 사랑받는 자로서 구별되었다. 구주께서는 그들을 다 사랑하셨으나 요한이 가장 잘 받아들이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시대의 소망, 292)
<부가설명>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다. 모세도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 바울은 뒤에 참여했지만 예수님을 목격하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들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도 예수님을 그들처럼 목격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을 잘 묘사하고 있다. 기록된 말씀으로 말씀이시고 생명이신 분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피부를 손으로 만질 수는 없다. 그러나 말씀 올바르게 깊이 젖으면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것과 같은 감동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도 증인이 된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말씀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교훈: 요한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을 나누는 증인이 될 수 있다.
목요일(7월 9일) 성도의 교제(행 2:42~47)
하나님께는 손자, 손녀가 없고 오직 자녀들만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리스도인 경험은 부모나 조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에 결심함으로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드린다.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하여 경험해 줄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그분께 완전히 굴복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요한일서의 처음 몇 절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추가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관한 자신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더불어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나누는 교제의 경험을 하도록 초청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그리고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믿음의 가족들과 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1. 요한일서 1:3에 따르면 이 사귐의 축복들은 무엇입니까?
요일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답: 서로 친교하는 축복을 누린다. 그 친교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며 또 성도들과 함께 하는 친교이다.
예수님은 친히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고(마 16:18),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이 친히 교회를 돌보신다(요 10:14~16).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 뿐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의 사귐 속으로 인도해 준다. 보이지 않는 하늘과의 연결도 있지만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시적인 연결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을 홀로 이끌어갈 필요가 없다. 그들은 외롭게 홀로 떨어져 있지 아니하고, 지상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 인해 많은 복을 누린다.
2. 성경에서 이와 같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교제가 묘사되어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행 2:42~47, 롬 12:3~17)
행2:42-47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롬12:3-17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답: 위에 기록된 성경 구절에 이상적인 친교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몸의 지체와 같은 사이이다. 지체는 서로 다툴 수 없다.
요한일서의 서론은 1:4에서 끝난다. 요한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리고 신자들과의 사귐을 누리게 함으로 그들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었다.
초기교회 신자들의 친밀한 교제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제자들이 살아 계신 구주를 선포하려고 나아갈 때에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 날마다 서로 교제하는 중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사랑을 나타내었다. 이기심 없는 말과 행동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이 사랑을 불붙이고자 노력하였다.”(사도행적, 547)
<부가설명> 친교의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감정적 요소가 아주 강하다. 때때로 감정이 앞서서 이성을 상실한 그릇된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말하면 그릇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정욕이나 이기심이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자기도 속이고 다른 사람도 속이는 모양일 뿐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중심 사상은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살도록 도우는 일이다. 사람을 살리는 정신과 도움 그것이 사랑이다. 원수도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울 때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주로 인정이나 동정이나 감성적 표현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에는 이런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핵심은 살리는 정신이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살려주려는 마음으로 친교해야 한다. 원칙적으로는 영생의 생명으로 살도록 도우는 것이고 또 육신의 삶도 도우는 것이다. 참으로 서로 사랑하자.
교훈: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도와의 교제 속으로 인도된다. 이 땅에서의 교제는 천국에서의 행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금요일(7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시대의 소망, 제35장 “잠잠하라 고요하라”(340)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요한은 그가 이미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누리고 있는 동일한 사귐을 독자들도 누리게 하기 위해 그의 지식을 함께 나누기를 열망한다. 이 애정어린 열망을 표현하는 동안 그는 아들의 신성과 영원성 그리고 성육신과 인성을 역설한다. 그가 살던 시대나 우리 시대의 독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역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이 놀라운 지식을 단순하지만 단호한 언어로 전달하였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4권, 295~29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교과반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십시오. 자신의 이야기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비교할 때 공통적인 부분은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다른 이들의 경험에서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나의 경험 가운데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될 만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개인적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길로 인도된 경험이어야 한다. 바른길이란 성경말씀이 지도하는 길인데, 성경으로 성경이 해석된 그 길이라야 한다. 요즘은 성경을 학문의 눈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미혹의 길에 빠지기가 아주 쉽다.
2. 목격자의 증언은 왜 힘이 있습니까? 한편 우리는 왜 증언을 모두 믿어서는 안 됩니까? 사람들이 위증을 하거나 그들의 목격한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묘사된 목격자의 증언은 얼마나 믿을 만한 것입니까? 그 증언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진실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 증언이 진실하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까? 아니면 둘 다 입니까?
*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친히 감동하시고 친히 편집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 증언이 진실이라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둘 다이다.
3. 사귐에 관한 문제를 살펴봅시다. 모든 신자들에게 사귐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를 떠나 홀로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종종 어떤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까? 반대로 교회에만 너무 의존하는 것에는 어떤 위험이 따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이 지체들이 각각 지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 몸은 불구가 된다. 교회를 떠나서 그리스도인 삶을 운위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지체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볼 것이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정말 사랑하고 싶다.
7월 11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5분)
기억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연구범위: 신 4:14, 고전 15:48, 요일 1:1~4, 5장, 계 19:13.
학습 포인트: 예수님을 가리켜 왜 “생명의 말씀”이라 부르는가? 요한이 그의 서신의 서론을 그렇게 쓴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증인들이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공동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안식일 오후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한 남자가 법정에 섰다. 그는 큰 소리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결코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건 발생 당시에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의 말만 들었다면 그 말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목격자들이 등장했다. 목격자들은 한 명씩 나와서 거의 같은 내용의 진술을 하였다. 그들은 피고인을 범행 현장에서 보았고, 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목격자들이 사건 당시에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의 증언은 확증적이었고 그 사람의 유죄는 분명해졌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목격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서신을 시작한 것이다.
핵심본문: 요일 1:1-4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과의 사귐이 참된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느끼기: 사귐의 기쁨을 경험한다.
행하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
교과 개요
I. 깨닫기: 하나님과의 사귐
A. 요한일서 1:3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언급하였다. 이 사실은 하나님과의 사귐의 기회를 어떻게 제공해 주는가?
B.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고난을 겪으심으로, 우리는 그분을 통해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 기쁨은 어떤 기쁨인가?
C. 요한은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의 사귐을 기뻐하였다. 그리스도인 삶에서 사귐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II. 느끼기: 충만한 기쁨
A.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오는 행복과 기쁨은 다른 근원에서 오는 행복과 기쁨과는 어떻게 다른가?
B. 서로간의 사귐은 기쁨을 증대하는 데 있어 어떤 역할을 하는가?
III. 행하기: 기쁨으로 변화됨
A. 당신은 어떤 경우에 참된 기쁨을 경험하는가? 이러한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B. 안식일학교 활동반(또는 교과반)은 어떤 식으로 사귐을 증대시켜 주는가? 다음 한 주 동안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사귐을 증진시키기로 결심하자.
요점: 요한이 예수님과 더불어 경험한 개인적인 기쁨과 사귐은 전염성이 있다. 그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충만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일요일(7월 5일) 요한일서의 서론(요일 1:1~4)
1. 요한일서 1:1~4을 읽으십시오. 요한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요한의 말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요일1: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답: 요한은 자신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자라고 말했다. 요한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도 생생한 감동을 전달받을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님과 사귀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요한은 다른 이들과 함께 이 “생명의 말씀”을 직접 목격한 자임을 천명하면서 그의 서신을 시작한다. 2절과 3절의 앞부분에서 그는 이 “생명”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2. 요한은 자신이 “생명의 말씀”에 관해 선언한 결과로 어떤 두 가지의 일이 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까?
답: 요한은 자신의 전파를 통해 우리에게 사귐이 있고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원했다.
요한은 1장 1절과 3절에서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진술을 하였다. (1) 태초부터 무엇이 있었으며, (2) 우리가 무엇을 들었고, (3) 무엇을 보았으며, (4) 무엇을 주목하였고, (5) 무엇을 만졌으며, (6) 또 무엇을 보았고, (7) 또한 어떤 증거를 전해 들었는지를 말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요일 1:3)고 하였다. 2절에는 “이 영원한 생명을 … 너희에게 전하노”라(요일 1:2)고 하는 말이 나온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을 통하여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실체를 우리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자신들도 영원한 생명과 사귐,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가질 수 있는 기쁨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였다. 우리가 믿는 그분은 요한 자신이 듣고 보고 만졌던 동일한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함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생애, 그분의 의, 그리고 그분의 죽음을 값없이 선물로 제공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이끈다. 감사, 찬양, 그리고 기쁨이 우러나고, 순종은 즐거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기쁨이 되고, 마음은 성령께서 거하실 수 있도록 언제나 열려 있는 거처가 된다. 하나님과 회개하는 죄인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수립된다. 그것은 두려움과 의무의 관계라기보다는 사랑과 경탄에 기초된 교제이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160)
<부가설명>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1:7)이다. 우리는 이 마음으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재림신자들이 은근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생각 된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생활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롬8:1, 5:1) 요한은 이 사실을 자기의 체험을 통하여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생활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과 친교하는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교훈: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의 서두에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직접 듣고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월요일(7월 6일) 요한일서 1장과 요한복음 1장(요일 1:1~5)
요한복음을 아는 이들은 요한일서의 서론이 요한복음의 서론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눈치 챌 것이다.
1. 요한일서 1:1~5을 읽고 요한복음 1:1~5과 비교해 보십시오. 비슷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일1:1-5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답: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단어들로는 태초, 생명, 말씀, 하나님, 함께, 빛 등이 있다. 요한은 이 두 곳에서 예수님을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두 구절 다 거의 비슷하게 시작된다. 둘 다 분명히 창세기 1:1의 창조를 언급하는 “태초에”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과거의 어느 시점을 가리키고 있다. 둘 다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을 구분하고 있으며, 이 두 분을 나란히 언급함으로 상호간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두 구절 다 “생명”과 “빛”이라는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 두 구절 사이에는 유사한 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차이점도 있다.
2. 요한일서 1:1~5에서는 발견할 수 없지만 요한복음 1:1~5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요한일서와 비교해 볼 때,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더욱 분명하게 창조주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매우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언급하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으로 힘 있게 강조되어 있다. 요한일서 1:3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통해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강조되어 있긴 하지만, 요한일서의 서론에는 요한복음의 서론에서처럼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예수님께 직접 적용되지는 않았다. 또한 요한복음에는 창조주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아무 것도 그분이 없이는 창조되지 않았다.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창조주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공적이고 대중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었지만, 요한일서는 목격자들의 개인적인 증언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정리하자면, 둘 다 구원의 계획의 중심이신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 준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는 참 생명
“육체의 생명은 생명의 시여자이신 하나님께서 다시 취하여 가시는 것이므로 영원하거나 불멸하는 생명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지배할 힘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딴 데서 빌리신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에게서 생명을 취하여 갈 수 없다. 주님께서는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안에 있던 생명은 근본적인 것이었고 딴 데서 빌린 것이 아니었으며 다른 기원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이러한 생명을 타고나지 못하였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96-297)
<부가설명> 요한은 우리 주님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일에 담대하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진 목격자이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사실에 추호의 의심이 없었다. 그는 공적이거나 사적이거나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언을 했다. 그가 이렇게 증거할 때에 그의 상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을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그의 증거를 믿지 않아도 그의 체험이 그 자신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체험한 것과 같은 체험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기록된 말씀이 우리 재림성도들을 통하여 육신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이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이 육신이 되어 나타난 모습을 볼 수 있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교훈: 요한복음은 공적이고 대중적인 견지에서 예수님을 하나님과 창조주로 나타냈으며, 요한일서는 보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그분을 드러냈다.
화요일(7월 7일) 생명의 말씀(요일 1:1~2)
1. “생명의 말씀”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말은 왜 예수님께 딱 어울리는 표현입니까?
답: 요한의 저술들에서 “생명의 말씀”은 오직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분은 생명(요 14:6)이시고, 말씀(요 1:1, 요일 1:1)이시다.
요한일서 1:1에는 생명의 “말씀”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이와 같은 용어가 요한복음 1:1~3에서도 발견되는데,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백마(白馬)를 탄 이가 “하나님의 말씀”(계 19:13)으로 불렸는데, 이 또한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한의 글들에서 그 용어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문맥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요한일서 1:1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용어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생명”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 14:6). 따라서 요한일서 1:2의 생명 또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분은 당연히 “생명의 말씀”이시다.
2. 이 구절들에서 요한이 사용한 “생명의 말씀”이라는 용어가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또 다른 증거는 무엇입니까?
답: 요한은 “생명의 말씀”을 보고 듣고 만졌다고 했는데, 이는 그가 말씀(로고스)이신 예수님을 목격하였고, 또한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3년 반의 공생애 동안 그분과 함께 했던 경험을 지칭하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그 표현이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복음을 귀로 듣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눈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만약 “생명의 말씀”이 복음 전파를 가리킨다면 그것을 손으로 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개인적으로 듣고 보고 만진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보고 만진다는 말보다 훨씬 더 이치에 맞다. 더군다나 “이 생명이 …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2)고 하였으므로, 요한이 “생명의 말씀”을 언급할 때에 한 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생명의 말씀에 복종함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생명의 떡을 먹고, 구원의 물을 마실 때에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라날 것이다. 그들의 품성은 마음이 먹고 마시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이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생명의 말씀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하는 모든 봉사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되며 사람이 높임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가 존귀함을 받는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5)
<부가설명>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을 본질적 면에서 우리에게 소개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생명 자체이시고 말씀 자체이시다. 말씀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말씀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예수님이 의미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을 빼면 우주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면 존재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피조물은 생명의 말씀 안에서 그 존재를 유지하며 존재의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며 말씀이시다. 그분만이 모든 것의 의미이시다. 의미를 상실한 것은 없어지는 것이다.
교훈: 요한일서 1:2에 나오는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요한은 그분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으며, 손으로 만졌다고 하였다.
수요일(7월 8일) 목격자들(신 4:1~9)
사람들은 축구 경기나 음악회나 정치적 모임에 참석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진행 과정을 직접 보기를 원하고, 스스로 그것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런 다음에야 그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사건이나 사고를 우연히 목격하여 법정에 증인으로 호출되기도 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목격자들이었다. 이 “그리스도 사건”은 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요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요한일서 1:1~4에서 그는 예수님을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을 뿐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듣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요한은 이 주장을 여러 절에서 반복하였고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개인적인 경험의 진실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1. 요한은 사건의 목격자로 강력히 주장하고 나선 성경의 유일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구절들은 요한일서 1:1~3과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말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들은 무엇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신 4:1~9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3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을 인하여 행하신 바를 너희가 목도하였거니와 바알브올을 좇은 모든 사람을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서 진멸하셨으되 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5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모세는 주의 영광을 보았고, 그분의 선하심을 백성에게 가르쳤으며, 백성들도 목도하였다.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도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과 부활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고전 15:4~8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 바울도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격자라고 증언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목격하거나 성경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직접 목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해 목격자들이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특히 '포스트모던'(post-modern) 세계에서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경험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인 사건들보다도 하나님의 실존과 선하심에 대한 더 강력한 증언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가장 친밀한 제자였던 요한
“제자들은 얼마 동안 적극적인 활동으로 예수님과 함께 사귀어 왔다. 요한과 야고보, 안드레와 베드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 마태는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과 더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예수님의 이적도 더 많이 목격하였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한층 더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당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거의 항상 함께 있었다. 요한은 예수님과 한층 더 긴밀한 친분을 가짐으로 그분의 사랑받는 자로서 구별되었다. 구주께서는 그들을 다 사랑하셨으나 요한이 가장 잘 받아들이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시대의 소망, 292)
<부가설명>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다. 모세도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 바울은 뒤에 참여했지만 예수님을 목격하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들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도 예수님을 그들처럼 목격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을 잘 묘사하고 있다. 기록된 말씀으로 말씀이시고 생명이신 분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피부를 손으로 만질 수는 없다. 그러나 말씀 올바르게 깊이 젖으면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것과 같은 감동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도 증인이 된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말씀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교훈: 요한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을 나누는 증인이 될 수 있다.
목요일(7월 9일) 성도의 교제(행 2:42~47)
하나님께는 손자, 손녀가 없고 오직 자녀들만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리스도인 경험은 부모나 조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에 결심함으로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드린다.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하여 경험해 줄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그분께 완전히 굴복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요한일서의 처음 몇 절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추가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관한 자신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더불어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나누는 교제의 경험을 하도록 초청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그리고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믿음의 가족들과 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1. 요한일서 1:3에 따르면 이 사귐의 축복들은 무엇입니까?
요일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답: 서로 친교하는 축복을 누린다. 그 친교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며 또 성도들과 함께 하는 친교이다.
예수님은 친히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고(마 16:18),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이 친히 교회를 돌보신다(요 10:14~16).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 뿐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의 사귐 속으로 인도해 준다. 보이지 않는 하늘과의 연결도 있지만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시적인 연결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을 홀로 이끌어갈 필요가 없다. 그들은 외롭게 홀로 떨어져 있지 아니하고, 지상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 인해 많은 복을 누린다.
2. 성경에서 이와 같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교제가 묘사되어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행 2:42~47, 롬 12:3~17)
행2:42-47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롬12:3-17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답: 위에 기록된 성경 구절에 이상적인 친교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몸의 지체와 같은 사이이다. 지체는 서로 다툴 수 없다.
요한일서의 서론은 1:4에서 끝난다. 요한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리고 신자들과의 사귐을 누리게 함으로 그들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었다.
초기교회 신자들의 친밀한 교제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제자들이 살아 계신 구주를 선포하려고 나아갈 때에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 날마다 서로 교제하는 중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사랑을 나타내었다. 이기심 없는 말과 행동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이 사랑을 불붙이고자 노력하였다.”(사도행적, 547)
<부가설명> 친교의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감정적 요소가 아주 강하다. 때때로 감정이 앞서서 이성을 상실한 그릇된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말하면 그릇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정욕이나 이기심이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자기도 속이고 다른 사람도 속이는 모양일 뿐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중심 사상은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살도록 도우는 일이다. 사람을 살리는 정신과 도움 그것이 사랑이다. 원수도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울 때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주로 인정이나 동정이나 감성적 표현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에는 이런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핵심은 살리는 정신이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살려주려는 마음으로 친교해야 한다. 원칙적으로는 영생의 생명으로 살도록 도우는 것이고 또 육신의 삶도 도우는 것이다. 참으로 서로 사랑하자.
교훈: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도와의 교제 속으로 인도된다. 이 땅에서의 교제는 천국에서의 행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금요일(7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시대의 소망, 제35장 “잠잠하라 고요하라”(340)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요한은 그가 이미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누리고 있는 동일한 사귐을 독자들도 누리게 하기 위해 그의 지식을 함께 나누기를 열망한다. 이 애정어린 열망을 표현하는 동안 그는 아들의 신성과 영원성 그리고 성육신과 인성을 역설한다. 그가 살던 시대나 우리 시대의 독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역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이 놀라운 지식을 단순하지만 단호한 언어로 전달하였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4권, 295~29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교과반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십시오. 자신의 이야기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비교할 때 공통적인 부분은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다른 이들의 경험에서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나의 경험 가운데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될 만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개인적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길로 인도된 경험이어야 한다. 바른길이란 성경말씀이 지도하는 길인데, 성경으로 성경이 해석된 그 길이라야 한다. 요즘은 성경을 학문의 눈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미혹의 길에 빠지기가 아주 쉽다.
2. 목격자의 증언은 왜 힘이 있습니까? 한편 우리는 왜 증언을 모두 믿어서는 안 됩니까? 사람들이 위증을 하거나 그들의 목격한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묘사된 목격자의 증언은 얼마나 믿을 만한 것입니까? 그 증언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진실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 증언이 진실하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까? 아니면 둘 다 입니까?
*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친히 감동하시고 친히 편집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 증언이 진실이라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둘 다이다.
3. 사귐에 관한 문제를 살펴봅시다. 모든 신자들에게 사귐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를 떠나 홀로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종종 어떤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까? 반대로 교회에만 너무 의존하는 것에는 어떤 위험이 따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이 지체들이 각각 지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 몸은 불구가 된다. 교회를 떠나서 그리스도인 삶을 운위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지체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볼 것이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정말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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