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 예수님과 요한의 서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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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9-06-29 22:57 조회6,119회 댓글0건첨부파일
- 2009년7월4일(안) (제1과) 예수님과 요한의 서신들.hwp (35.5K) 163회 다운로드 DATE : 2009-06-29 22: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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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7월04일(안)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7분)
제1과 예수님과 요한의 서신(書信)들
기억절(記憶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요일 4:14)
깨닫기 : 예수님의 희생과 중보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이해한다.
느끼기 : 예수님 안에서 긍정적인 그리스도인 삶을 살 수 있음을 확신한다.
행하기 :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따뜻하고 배려하는 관계를 형성해 간다.
요점(要點)
요한은 거짓 가르침에 대항(對抗)하면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犧牲)과 중보라는 긍정적(肯定的)인 진리(眞理)에 초점(焦點)을 맞추었다. 우리가 예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올바로 이해(理解)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따뜻하고 사랑스런 관계(關係)를 맺게 될 것이다.
일(日) (6월 28일)
<발신인(發信人)과 수신인(受信人)은 누구인가? (요일 1:1~3)>
◉ 속담(俗談)에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나타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책을 구입(購入)해도 자기 이름을 먼저 써놓고, 모든 일용품(日用品)들에까지 자기 이름을 써놓기를 좋아하며, 부동산을 소유(所有)해도 등기부(登記簿)에 자기에 이름을 기록(記錄)하여 소유주(所有主)임을 나타내며, 심지어 교회(敎會)에서의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獻金)도 굳이 이름을 호명(呼名)해줄 때 헌금의 액수가 증가(增加)되고 있는 실정이며, 공공장소를 비롯해서 명산(名山)이나 유적지(遺蹟地)의 높은 바위 절벽에까지 사람들의 이름으로 낙서(落書)를 많이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기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학교나 어느 단체(團體)에 장학금(獎學金)이나 기부금(寄附金)등을 헌납(獻納)할 때에도 자기의 이름이나 아호(雅號)로 호칭(呼稱)해주기를 원(願)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헌신(獻身)과 헌납(獻納)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마 6:3 에) 예수님께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번 기(期)에 우리가 공부하는 요한의 서신(書信)을 접하면서 자기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은 사도(使徒)요한의 겸양(謙讓)한 정신(情神)까지도 본(本)받아야 할 것이다.
저자(著者)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요한 1, 2, 3서(書)를 어떻게 해서 사도(使徒)요한의 글이라고 인정(認定)하는 가의 해답(解答)으로 요한서의 서신들이 문체(文體)와 주제(主題)에 있어서 요한복음과 유사성(類似性)(말미부록(末尾附錄)의 대조표(對照表) 참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참고로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신약(新約)의 편지서(便紙書)들 가운데 그 저자(著者)의 신원(身元)을 밝힌 것은 없다. (본교 성경주석 14권 287참조)
요한복음이나 요한의 서신(書信) 둘 다 아무런 형식적(形式的)인 편지식(便紙式)의 서론(序論) 없이 문득 본론(本論)으로부터 시작한다.
편지서(便紙書)는 "태초(太初)부터 있는 생명(生命)의 말씀"으로 시작(始作)하고 복음서는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한다.
문체(文體), 어휘(語彙), 어순(語順) 전치사(前置詞)의 사용, 문법(文法)의 구조(構造), 그리고 어둠과 빛, 사망과 생명, 미움과 사랑 등과 같은 반대개념(反對槪念)들의 배합(配合)등에는 밀접(密接)한 유사성(類似性)이 있는데, 이것은 명백(明白)한 요한의 특성(特性)이다.
비록 두 책의 목록과 길이에 있어서의 차이가 커다란 상치점(相馳點)을 이루기는 하지만 두 책의 주된 문제는 너무나 흡사하여 마치 이 편지서(便紙書)가 그 복음서(福音書)의 주요내용을 요약(要約)한 개요(槪要)의 구실을 하는듯하다는 것이다.
이 요한서신의 편지서는 한통의 목회서신(牧會書信)으로서 자연스럽게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한편 복음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成肉身)에 관한 깊고도 오랜 명상(瞑想)의 결과로 나타난 책이라는 증거(證據)가 역연(歷然)하다.
이러한 말씀과 배경(背景)과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책의 발신인(發信人)은 사도(使徒)요한으로 본다.
요한의 서신은 줄곧 신념과 기쁨의 빛이 가득 채워져 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였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갈 바리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까이 서있던 제자였다.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아침에 빈 무덤 속을 들여다 본 제자였다.
요한은 후에 밧모섬 에가 있을 때 는 성령에 의하여 하늘로 올리워져 열린 하늘 문을 보았다.
◉ 요한 1, 2, 3서에 기자는 그 서신(書信)의 수신인(受信人)들에 대해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호칭(呼稱)하고 있다.
그리고 속(速)히 그들을 만나기 원(願)하며 그들과 사귐이 있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참으로 친밀(親密)한 관계(關係)로 맺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요한 서신(書信)의 저자(著者)인 사도(使徒)요한)
“요한이 기록(記錄)한 것으로 알려진 신약(新約)의 편지서(便紙書)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그 저자(著者)의 신원(身元)을 밝힌 것은 없다. 그렇지만 이 첫 번째 편지서(便紙書)와 요한복음 사이에는 너무나 큰 유사성(類似性)이 있어서 대부분의 학자(學者)들은 그 두 저술(著述)의 저자(著者)가 동일인(同一人)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만약 우리가 제4복음이 세베대의 아들인 사도(使徒)요한으로 밝혀지는 사랑받는 제자(요 21:20-24)에 의하여 기록(記錄)되었다는 주장을 지지한다면, 우리는 그가 또한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첫 번째 편지서의 저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타당(妥當)한 근거(根據)들을 가지게 된다. 첫 번째 편지와 두 번째 편지 사이에 그리고 두 번째 편지와 세 번째 편지 사이에는 매우 큰 유사성(類似性)이 있어서 이것들을 서로 밀접(密接)하게 연결(連結)시키고 있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4권, 287)
◉ 사실 요한서신을 쓸 당시 그것을 받은 대상이 누군지 아는 것은 그다지 중요(重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聖經)은 온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기자(記者)가 누구이든지 하나님이 저자(著者)이시고, 당시의 수신자(受信者)가 누구였든지 상관없이 온 인류(人類)가 수신자(受信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직접(直接)보낸 편지를 읽는 마음으로 이 편지서를 연구하는 것은 합당(合當)한 태도(態度)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녀가 되어야 하고 진리(眞理)의 사랑을 흠뻑 받는 성도(聖徒)들이 되어야 한다.
◉ 요한 1, 2, 3서의 발신인(發信人)은 사도(使徒)요한이며,
수신인(受信人)은 그가 사랑하고 돌보는 성도였음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이들이 주님 안에 굳게 서기를 소원(所願)하였다.
월(月) (6월 29일)
<이 서신(書信)들의 내용(內容)은 무엇인가? (요이 1:1~13)>
◉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관한 그의 아는바 지식(知識)에 대하여 증거(證據)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생명(生命)의 말씀에 관(觀)하여 들었고, 보았고, 만졌다.
요한은 그의 증거(證據)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들과 함께 가까이 사귐으로 그들의 기쁨이 충만(充滿)케 되기를 원(願)하고 있다.( 요일 1:3-4, 7, 요일 2:13-14)
◉ 서신(書信)들의 내용(內容).을 요약 해보면
▶ 하나님은 빛이시다. (요일 1:5)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8, 16)
▶ 하나님은 의(義)로우시다. (요일 2:29)
▶ 하나님은 생명(生命)이시다. (요일 5:11-12)
▶ 하나님은 진리(眞理)이시다. (요한이서)
▶ 하나님은 선(善)하시다. (요한삼서)
1. 올바른 행위 (요일 1:1-3:24)
① 빛 가운데 행(行)하라.
② 스스로 죄인(罪人)임을 시인(是認)하라.
③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④ 그리스도를 본(本)받으라.
⑤ 남을 사랑하라.
⑥ 세상에 대한 관계(關係)
가) 육신(肉身)의 정욕(情欲) →유혹(誘惑)은 육채를 통하여,
특히 육체의 식욕(食慾)과 정열(情熱)에 호소(呼訴)하여온다.
나) 안목(眼目)의 정욕(情欲) → 보는 것을 주의 하라.
눈(眼)이 어떤 부정한 것을 보았을 때 우리 마음에 그 부정한 자국이 찍히게 된다는 것을 주의하라.
다) 이생의 자랑 → 우리인간은 누구나 야망(野望)을 갖고 있다. 이러한 명예(名譽)에 대하여 야망에 이끌려 얼마나 많은 천재적 인물(天才的人物)들이 그릇 된길로 나갔는가!
우리는 이러한 교육적(敎育的)야망, 금전적(金錢的)야망, 지위(地位)와 권세(權勢)에 대한 야망을 단숨에 달성(達成)하려고 애를 쓴다.
⑦ 그리스도는 의(義)로우시다는 것을 生活로 증거(證據)하라.
2. 올바른 믿음 (요일 4:1-5:11)
①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肉體)로 오신 것을 믿어야 한다. (요일 4:1, 2, 5:20-21)
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어야 한다. (요일 4:15, 5:5)
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어야 한다. (요일 4:8)
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救主)이심을 믿어야 한다. (요일 5:10-12)
② 하나님과 사랑
3. 풍성(豊盛)한 상급(賞給) (요일 5:12-21)
그리스도 안의 생활에 대한 상급(賞給)은 서신(書信)마지막 부분(部分)에 기록(記錄)되어있다.
㉮ 영생(永生)의 보증(保證) (요일 5:13)
㉯ 기도(祈禱)의 능력(能力) (요일 5:14-15)
㉰ 중보(中保)의 능력(能力) (요일 5:16)
㉱ 승리(勝利) (요일 5:18과 5:4-5)
① 진리(眞理)안에 거(居)함을 인해 감사(感謝)를 표현(表現)했고(요이 1:1-3),
② 계명(誡命)대로 순종(順從)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했다(4절).
③ 새 계명(誡命)을 좇아 사랑하자는 권면(勸勉)을 한 다음(5-6절),
④ 적(敵)그리스도의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各別)히 주의하라고 당부(當付)하였다(7-11절).
⑤ 마지막으로 그는 그들과 만나기를 원(願)한다고 말하였다.(12-13절)
◉ 요한은 그 당시에 교회(敎會)안에 퍼지고 있던 이설(異說)들, 특히 거짓 교사들로 인해 야기(惹起)된 문제(問題)들을 수습(收拾)하기 위(爲)해 매우 강경(剛勁)한 어조(語調)로 그 문제들을 언급(言及)하고 있다.
화(火) (6월 30일)
< 이 서신(書信)들이 기록(記錄)된 목적(目的)은 무엇인가? >
◉ 매사(每事)에는 목적(目的)이 분명(分明)히 있다.
여행(旅行)을 해도 목적지(目的地)가 있고, 공부를 해도 그에 공부하는 목적이 있고,
건축(建築)을 하여도 용도(用度)에 목적이 있고, 열심(熱心)히 돈을 벌어도 그에 목적이 있다.
특히 영화(映畵)제작이나, 책을 집필(執筆)할 때에도 분명한 목적이 있다.
분명한 목적이 없는 모든 작품(作品)들은 아마도 그 작품의 본질(本質)되로 사용되지 못할 것이다.
인생도 목적이 없는 삶의 인생은 참으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 이유(理由)는 공항(空港)에서 비행기가 이륙(離陸)을 하고, 항구(港口)에서 배(船)가 출항(出港)을 해서 목적지가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망망대해(茫茫大海)를 항해(航海)하는 기장(機長)이나 선장(船長)은 없을 것이다. 만약에 목적지가 없이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바다를 항해하고 다닌다면? 그 결과는 상상(想像)에 맞기고 싶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남녀노소(男女老少)나 빈부귀천(貧富貴賤)이나 인종(人種)의 차별(差別)이 없이 공히 똑 같이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간이다. 그러해서 하나님께서는 시간(時間)속에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인(印)과 행복을 넣어 놓으신 것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어떤 사람은 목적을 두고 시간을 잘 활용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수직(垂直)관계가 온전히 잘 적립(積立)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통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하면,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주어진 시간에 목적이 없이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가 금수(禽獸)같은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표를 정하고 하는 신앙(信仰)과, 목표를 정하고 드리는 기도(祈禱)와, 목표를 정하고 공부(工夫)하는 것과, 목표를 정하고 매일(每日)의 말씀 정독(精讀)과 이웃에게의 봉사(奉仕)하는 신앙인(信仰人)이라면 아마도 그의 삶이 평범한 사람으로 비범(非凡)한 삶을 분명히 살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向方)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虛空)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고전 9:26)라고 사도 바울은 성경(聖經)에 기록하고 있다.
◉ 이 서신(書信)은 다음의 이유(理由)로 이 서신(書信)을 썼다.
① 이단(異端)들이 교회(敎會)를 괴롭히고 있었고,
거짓교사들이 내부(內部)에서 일어나 믿음을 파괴(破壞)하려하고 있었다. (요일 2:18-19)그러므로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③ 빛이시며,
④ 그 안에 거짓이 없는 의(義)로운 분이라고 강조하면서,
⑤ "하나님께서 난자마다 죄(罪)를 짓지 아니"한다. (요일 3:9)
⑥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인(否認)하는 거짓 교사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이끈 결과를 낳기 때문에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잔존하여 계속 손상(損傷)을 입히고 위협(威脅)하고 있는 점을 보면서 사람들이 오류(誤謬)에 빠져들지 않게 하기위하여 이 편지를 쓰는 것이다. (재림교회(한) 성경주석 14권 290 참조)
☞ 요한의 서신(書信)을 요약정리(要約整理)해보면
① 우리의 기쁨이 충만(充滿)케 하려고 (요일 1:4)
② 우리로 죄를 범(犯)치 않게 하려고 (요일 2:1)
③ 우리로 잘못됨이 없게 하려고 (요일 2:26)
④ 우리로 알게 하려고 (요일 5:13)이다.
◉ 이 서신의 일차적인 목적(目的)은 목회적(牧會的)인 것이다.
요한은 그의 영적(靈的)인 자녀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인 생애를 보다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편지(便紙)를 쓴다.
이 편지(便紙)의 골자요 핵심(核心)은 "사랑"이다.
배경(背景)은 단순(單純) 하지만 그윽히 깊은 영적권면(靈的勸勉)을 안겨준다.
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8)
② 사랑은 하나님께 속(屬)한 것이다. (7절)
③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10-11절)
그러나 이러한 고상한 주제들은 이 편지서(便紙書)에 논쟁적이며, 동시에 목회적(牧會的)인 목적(目的)을 갖게 하는 반대파(反對派)의 배경과 대조(對照)를 이루면서 묘사(描寫)되어 있다.
◉ 요한이 대항(對抗)하고 있는 근본적(根本的)인 이단(異端)은 일종의 원시 영지주의(Proto-Gnosticism)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거짓 그노시스(gnosis)즉 거짓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편지서에 나타난 강조점(强調點)들로 미뤄볼 때 반대파(反對派)는 영지주의의 두 가지 주요 형태,
곧 "가현설(Docetism)"과 "케린투스 (Cerinthianism)"설(說)에서 온 것으로
둘 다 그리스도의 본질(本質)에 관한 이단(異端)을 제시(提示)한 사상(思想)들이다.
1>. 가현설(假現說)은?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의 실제(實際)를 부인(否認)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가진 것처럼 나타났을 (dokein, apperar)따름이라고 가르쳤다. 두 번째 이단은
2>. 요한의 동 시대중의 한 사람인 케린투스(Cerinthus)에게서 생겨난 것인데
그는 애굽에서 교육을 받은 다음 소아시아에서 가르치면서 유대화 주의의 교훈들을 퍼뜨렸다.
☞ "케린투스"는 주장하기를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사이에 자연적(自然的)으로 출생한 아들 이였으며 그가 침례(浸禮)를 받는 순간에 그리스도가 예수의 몸 안에 들어갔다가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돌아가기 직전(直前)에 도로 나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단(異端)들의 창시자(創始者)들과 지지자들을 요한은 생생한 표현으로 묘사(描寫)하기를
"적(敵)그리스도"(요일 2:18절22절 ; 4:3)와 "거짓 선지자"(요일 4:1)라고 하였다.
이러한 오류(誤謬)를 퇴치(退治)하기위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동안의 가시적(可視的)인 인성(人性)의 실제 즉
① 그분은 참으로 육체(肉體)로 오셨다는 것과. (요일 4:2)
② 신자들은 거짓 "그노시스와"는 반대(反對)가 되는, 이 참 지식(知識)(요일 5:20)을 향유(享有)할 것이라는 것을 강조(强調)하고 있다.
이러한 초기의 논쟁(論爭)들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 매우 광범(廣範)하게 의심(疑心)되고 있는 현대(現代)를 위하여 깊은 의미(意味)를 갖는다.
요한의 편지에 대한 연구는 독자(讀者)의 마음을 성육신(成肉身)의 진리(眞理)로 이끌어갈 것이며, 온 세상의 죄를 위(爲)한 화목제물(和睦祭物)이 되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높이 들린 비전을 독자(讀者)들 앞에 제시(提示)하고 있다.
◉ <요한이 서신들을 기록한 목적>
“이단들이 교회를 괴롭히고 있었고, 거짓 교사들이 내부에서 일어나 믿음을 파괴하려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요일 2:18~19). 비록 그들이 교회를 떠나기는 했으나 그들의 영향은 아직도 잔존하여 계속적인 손상을 입히고자 위협하고 있었다. 요한은 이러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들 위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진리를 매우 매력적으로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오류에 빠져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는 것이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4권 290)
◉ 요한은 거짓 교사들에 의해 퍼지고 있는 신학적(神學的) 오류(誤謬)와 도덕적(道德的)인 문제,
그리고 교회내(敎會內)에서의 권력투쟁(權力鬪爭) 등을 경계(警戒)하기 위해 이 서신(書信)들을 썼다.
수(水) (7월 1일)
< 요한 서신(書信)에 묘사(描寫)된 예수님 >
◉ 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성경을 보면
마태는 예수님을 "왕(王)"으로 묘사(描寫)해서 기록(記錄)하고 있으며.
마가는 예수님을 "종"으로 묘사해서 기록 하였고,
누가는 예수님을 완전한 "인간"으로 묘사(描寫)하여 제시(提示)하고 있으며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描寫)하고 있다.
특히 사도(使徒)요한은 요한 1, 2, 3, 서(書)를 통하여
예수님을 "듣고" "보고" "만진" 예수님을 "사랑"의 실체(實體)로 묘사(描寫)했다.
그러한 분을 요한은 요한의 서신(書信)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목적(目的)과 이유(理由)로,
요한1,2,3서를 기록하고 있다.
(요일 1:1) (태초(太初)부터 있는 생명(生命)의 말씀이신 예수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2, 5:20)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나타내신바 된 참 하나님,)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證據)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요일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일 1:3, 4:15)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예수님)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일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2:1) (우리의 대언자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代言者)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8) (우리에게 비취는 참 빛이신 예수님)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요일 2:22)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요일 4:14)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예수님)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證據)하노니."
(요일 5:20)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신 예수님)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 <성경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성경(聖經)의 초점(焦點)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엡 4:21)를 이해하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진리이시기 때문이다(요 14:6).
우주적 쟁투에서 사단의 전략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예수 없이도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시키는 것이다. 그같이 하여 진리의 여러 중심점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제안되었다.
즉 (1)인간, (2)자연계 혹은 관측 가능한 우주, (3)성경, (4)교회 등이 그것이다. …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다른 진리의 중심점을 제시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본질과 목적에 잘 부합 된다”(기본교리, (한) 2007년, 143~144)
◉ 요한 서신(書信)에서 예수님은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인간(人間)의 육체(肉體)로 이 세상(世上)에 오신 사람의 아들이심이 분명(分明)히 묘사(描寫)되어 있다.
목(木) (7월 2일)
< 요한 서신(書信)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使役) >
◉ (어떤 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다.)
어떤 화가(畵家)가 천사(天使)의 얼굴을 그리려고 모델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이목(耳目)이 수려(秀麗)한 한 소년(少年)에게 그것을 발견(發見)하고 그를 천사(天使)의 모델로 그렸다. 수십 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이 화가(畵家)가 악마(惡魔)의 얼굴을 그리려고 모델을 찾다가 어떤 흉상(凶相)의 늙은이에게서 그것을 발견하고 그를 악마의 모델로 그렸다. 후(後)에 알고 보니 그 악마의 모델은 수십 년 전에 그린 그 천사의 모델과 동일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 인간의 양면성(兩面性)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위를 선택하셔서 그 이름을 마태(하나님의 선물)로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레위를 마태로 바꿔 주십니다.
만남을 통해서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쏘디움"과 + "크로라 디움"이 만나면 = "독약(毒藥)"이 되고
"수소"와 + "불"이 만나면 = "폭탄(爆彈)"이 되며
"수소"와 + "산소(酸素)"가 만나면 = "물"이 되며
"알미늄"과 + "닉켈 코발트"가 만나면 +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자석(磁石)"이 됩니다.
우리의 이름이 세상(世上)과 연합(聯合)하고 세상에 같이 살아가지만
나무와 연합(聯合)해 있으면 나무만큼 강(强)하고
돌과 같이 연합(聯合)해 있으면 돌 만큼 강(强)하고
쇠(철(鐵))와 같이 연합해 있으면 쇠붙이만큼 강(强)합니다.
사도(使徒)요한은 전능자(全能者) 예수님과 같이 합(合)하여
그의 지난 추(醜)한 인생에서 180도의 변모(變貌)된 사도(使徒)가 되었다.
성경과 영감의 글에 서술(敍述)한 바와 같이 그는
“우뢰(雨雷)의 아들”(막 3:17)이라고 불리었고, 자부심(自負心)이 강(强)하고 야심적(野心的)이며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예수님과 만나서 "보고" "듣고" "만진"바 사랑의 주님이심을 체험(體驗)하고 예수님의 지상(地上) 공생애(公生涯)를 통하여 그분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확신(確信)하게 되었고 그분의 이 땅에서의 사역이 죄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救援)하시기 위하여 사랑의 본체(실체(實體))되셔서 이 땅에 속죄제물(贖罪祭物)로 오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는 목숨을 걸고 증거하고 있다.
◉ 요한 언제나 열심(熱心)으로 구주(救主)를 따르고 그 말씀을 듣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한 요한이었지만, 그 품성에 결코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순(柔順)하고 몽상적(夢想的)인 열심자(熱心者)는 아니었다.
그와 그의 형제는 “우뢰(雨雷)의 아들”(막 3:17)이라고 불리었다.
요한은 자부심(自負心)이 강(强)하고 야심적(野心的)이며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거룩하신 교사께서는 요한의 이런 모든 성격(性格)의 이면(裏面)에 있는 열렬(熱烈)하고 순진(純眞)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이기주의(利己主義)를 견책(見責)하시고, 야심(野心)을 꺾으셨으며, 믿음을 시험(試驗)하셨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심령(心靈)이 사모(思慕)하고 있는 성결(聖潔)의 아름다움 곧 당신께서 가지고 계시는 사람을 변화(變化)시키는 사랑을 그에게 나타내셨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교육, 86)
(요일 1:7) (사귐의 약속(約束)과 죄(罪)의 정결(淨潔)에 대한 약속(約束))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2:25)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에 대한 약속(約束))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일 2:28) (주님의 재강림(再降臨)에 대한 약속(約束))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 3:8) (마귀(魔鬼)의 일을 멸(滅)하실 것에 대한 약속(約束))
"죄를 짓는 자는 마귀(魔鬼)에게 속(屬)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犯罪)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滅)하려 하심이니라."
(요일 3:16) (우리를 위(爲)해 목숨을 버리시고 사랑을 알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約束))
"그가 우리를 위(爲)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兄弟)들을 위(爲)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5:18) (죄(罪)와 악(惡)한 자로부터 지키실 것에 대한 약속(約束))
"하나님께 로서 난 자마다 범죄(犯罪)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 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惡)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이 1:3) (예수 그리스도를 통(通)해 은혜(恩惠)와 긍휼(矜恤)과 평강(平康)을 주실 것에 대한 약속(約束))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 <예수님을 통(通)한 구원(救援)의 약속(約束)>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주(救主)이시다.
비록 고침을 받아야 할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분께서 주신 자비를 거절(拒絶)할지라도, 그분의 공로(功勞)를 신뢰(信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멸망(滅亡)하도록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을 때의 우리의 속절없는 상태를 깨닫는 한편 낙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를 의지해야 한다. 가련하고 죄로 병든 절망적인 영혼(靈魂)이여, 바라보고 삶을 얻으라.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기로 약속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증언보감, 2권, 93)
◉ 우리가 올바른 신앙(信仰)을 가지려면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救主)로서 행(行)하신 일과, 우리의 중보자(中保者)로서 지금 행(行)하고 계신 일에 대한 바른 이해(理解)를 가져야 한다.
◉ <사도(使徒)요한의 시대(時代)에는 교회(敎會)에 위험(危險)이 가득했었다.>
“사단의 기만(欺瞞)이 도처(到處)에 있었다. …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公言)하는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이 하나님의 율법(律法)에 순종하는 일에서 그들을 해방(解放)시켰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다른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의 관습과 의식들을 준수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이 없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선량한 사람이었음은 인정했지만 그분의 신성은 부인하였다. 하나님의 사업에 충성하는 척하는 어떤 이들은 기만자(欺瞞者)들이었고 그들은 행실(行實)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부인(否認)하였다. 죄악 가운데 살고 있는 그들은 교회에 이설(異說)들을 들여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의주의(懷疑主義)와 기만(欺瞞)의 미궁(迷宮)에 빠지게 되었다.
요한은 이 유해(有害)한 오류(誤謬)가 살금살금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슬픔에 가득 찼다.
그는 교회가 직면(直面)한 위험(危險)을 알고 신속(迅速)하고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요한의 서신(書信)들은 사랑의 정신을 나타낸다.
이 서신들은 마치 그가 사랑에 적셔진 붓으로 기록(記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律法)을 범하면서도 저희가 죄 없다고 공언(公言)하는 자들을 대할 때는 그들의 무서운 기만(欺瞞)에 대하여 단호(斷乎)히 경고(警告)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도행적, 553~554)
<초점(焦點)>
1. 예수님의 사랑을 보고 듣고 만져본 사도(使徒)요한은 요한의 1.2.3서신(書信)을 통하여
거짓 가르침에 대항(對抗)하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犧牲)과 중보(中保)와 진리(眞理)에 초점(焦點)을 맞추고 올바로 이해(理解)할 것 같으면, 이단(異端)사설(邪說)에 넘어가지 않고, 희생정신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음을 증거(證據)하고 있다.
◉ 말미부록(末尾附錄)>
※ 요한 일,이 서와 요한복음사이에 유사성(類似性)성과 대조표(對照表)
< 도표로 작성하였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깨지으로 첨부 파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제1과 예수님과 요한의 서신(書信)들
기억절(記憶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요일 4:14)
깨닫기 : 예수님의 희생과 중보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이해한다.
느끼기 : 예수님 안에서 긍정적인 그리스도인 삶을 살 수 있음을 확신한다.
행하기 :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따뜻하고 배려하는 관계를 형성해 간다.
요점(要點)
요한은 거짓 가르침에 대항(對抗)하면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犧牲)과 중보라는 긍정적(肯定的)인 진리(眞理)에 초점(焦點)을 맞추었다. 우리가 예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올바로 이해(理解)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따뜻하고 사랑스런 관계(關係)를 맺게 될 것이다.
일(日) (6월 28일)
<발신인(發信人)과 수신인(受信人)은 누구인가? (요일 1:1~3)>
◉ 속담(俗談)에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나타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책을 구입(購入)해도 자기 이름을 먼저 써놓고, 모든 일용품(日用品)들에까지 자기 이름을 써놓기를 좋아하며, 부동산을 소유(所有)해도 등기부(登記簿)에 자기에 이름을 기록(記錄)하여 소유주(所有主)임을 나타내며, 심지어 교회(敎會)에서의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獻金)도 굳이 이름을 호명(呼名)해줄 때 헌금의 액수가 증가(增加)되고 있는 실정이며, 공공장소를 비롯해서 명산(名山)이나 유적지(遺蹟地)의 높은 바위 절벽에까지 사람들의 이름으로 낙서(落書)를 많이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기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학교나 어느 단체(團體)에 장학금(獎學金)이나 기부금(寄附金)등을 헌납(獻納)할 때에도 자기의 이름이나 아호(雅號)로 호칭(呼稱)해주기를 원(願)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헌신(獻身)과 헌납(獻納)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마 6:3 에) 예수님께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번 기(期)에 우리가 공부하는 요한의 서신(書信)을 접하면서 자기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은 사도(使徒)요한의 겸양(謙讓)한 정신(情神)까지도 본(本)받아야 할 것이다.
저자(著者)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요한 1, 2, 3서(書)를 어떻게 해서 사도(使徒)요한의 글이라고 인정(認定)하는 가의 해답(解答)으로 요한서의 서신들이 문체(文體)와 주제(主題)에 있어서 요한복음과 유사성(類似性)(말미부록(末尾附錄)의 대조표(對照表) 참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참고로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신약(新約)의 편지서(便紙書)들 가운데 그 저자(著者)의 신원(身元)을 밝힌 것은 없다. (본교 성경주석 14권 287참조)
요한복음이나 요한의 서신(書信) 둘 다 아무런 형식적(形式的)인 편지식(便紙式)의 서론(序論) 없이 문득 본론(本論)으로부터 시작한다.
편지서(便紙書)는 "태초(太初)부터 있는 생명(生命)의 말씀"으로 시작(始作)하고 복음서는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한다.
문체(文體), 어휘(語彙), 어순(語順) 전치사(前置詞)의 사용, 문법(文法)의 구조(構造), 그리고 어둠과 빛, 사망과 생명, 미움과 사랑 등과 같은 반대개념(反對槪念)들의 배합(配合)등에는 밀접(密接)한 유사성(類似性)이 있는데, 이것은 명백(明白)한 요한의 특성(特性)이다.
비록 두 책의 목록과 길이에 있어서의 차이가 커다란 상치점(相馳點)을 이루기는 하지만 두 책의 주된 문제는 너무나 흡사하여 마치 이 편지서(便紙書)가 그 복음서(福音書)의 주요내용을 요약(要約)한 개요(槪要)의 구실을 하는듯하다는 것이다.
이 요한서신의 편지서는 한통의 목회서신(牧會書信)으로서 자연스럽게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한편 복음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成肉身)에 관한 깊고도 오랜 명상(瞑想)의 결과로 나타난 책이라는 증거(證據)가 역연(歷然)하다.
이러한 말씀과 배경(背景)과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책의 발신인(發信人)은 사도(使徒)요한으로 본다.
요한의 서신은 줄곧 신념과 기쁨의 빛이 가득 채워져 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였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갈 바리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까이 서있던 제자였다.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아침에 빈 무덤 속을 들여다 본 제자였다.
요한은 후에 밧모섬 에가 있을 때 는 성령에 의하여 하늘로 올리워져 열린 하늘 문을 보았다.
◉ 요한 1, 2, 3서에 기자는 그 서신(書信)의 수신인(受信人)들에 대해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호칭(呼稱)하고 있다.
그리고 속(速)히 그들을 만나기 원(願)하며 그들과 사귐이 있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참으로 친밀(親密)한 관계(關係)로 맺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요한 서신(書信)의 저자(著者)인 사도(使徒)요한)
“요한이 기록(記錄)한 것으로 알려진 신약(新約)의 편지서(便紙書)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그 저자(著者)의 신원(身元)을 밝힌 것은 없다. 그렇지만 이 첫 번째 편지서(便紙書)와 요한복음 사이에는 너무나 큰 유사성(類似性)이 있어서 대부분의 학자(學者)들은 그 두 저술(著述)의 저자(著者)가 동일인(同一人)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만약 우리가 제4복음이 세베대의 아들인 사도(使徒)요한으로 밝혀지는 사랑받는 제자(요 21:20-24)에 의하여 기록(記錄)되었다는 주장을 지지한다면, 우리는 그가 또한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첫 번째 편지서의 저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타당(妥當)한 근거(根據)들을 가지게 된다. 첫 번째 편지와 두 번째 편지 사이에 그리고 두 번째 편지와 세 번째 편지 사이에는 매우 큰 유사성(類似性)이 있어서 이것들을 서로 밀접(密接)하게 연결(連結)시키고 있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4권, 287)
◉ 사실 요한서신을 쓸 당시 그것을 받은 대상이 누군지 아는 것은 그다지 중요(重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聖經)은 온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기자(記者)가 누구이든지 하나님이 저자(著者)이시고, 당시의 수신자(受信者)가 누구였든지 상관없이 온 인류(人類)가 수신자(受信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직접(直接)보낸 편지를 읽는 마음으로 이 편지서를 연구하는 것은 합당(合當)한 태도(態度)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녀가 되어야 하고 진리(眞理)의 사랑을 흠뻑 받는 성도(聖徒)들이 되어야 한다.
◉ 요한 1, 2, 3서의 발신인(發信人)은 사도(使徒)요한이며,
수신인(受信人)은 그가 사랑하고 돌보는 성도였음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이들이 주님 안에 굳게 서기를 소원(所願)하였다.
월(月) (6월 29일)
<이 서신(書信)들의 내용(內容)은 무엇인가? (요이 1:1~13)>
◉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관한 그의 아는바 지식(知識)에 대하여 증거(證據)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생명(生命)의 말씀에 관(觀)하여 들었고, 보았고, 만졌다.
요한은 그의 증거(證據)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들과 함께 가까이 사귐으로 그들의 기쁨이 충만(充滿)케 되기를 원(願)하고 있다.( 요일 1:3-4, 7, 요일 2:13-14)
◉ 서신(書信)들의 내용(內容).을 요약 해보면
▶ 하나님은 빛이시다. (요일 1:5)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8, 16)
▶ 하나님은 의(義)로우시다. (요일 2:29)
▶ 하나님은 생명(生命)이시다. (요일 5:11-12)
▶ 하나님은 진리(眞理)이시다. (요한이서)
▶ 하나님은 선(善)하시다. (요한삼서)
1. 올바른 행위 (요일 1:1-3:24)
① 빛 가운데 행(行)하라.
② 스스로 죄인(罪人)임을 시인(是認)하라.
③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④ 그리스도를 본(本)받으라.
⑤ 남을 사랑하라.
⑥ 세상에 대한 관계(關係)
가) 육신(肉身)의 정욕(情欲) →유혹(誘惑)은 육채를 통하여,
특히 육체의 식욕(食慾)과 정열(情熱)에 호소(呼訴)하여온다.
나) 안목(眼目)의 정욕(情欲) → 보는 것을 주의 하라.
눈(眼)이 어떤 부정한 것을 보았을 때 우리 마음에 그 부정한 자국이 찍히게 된다는 것을 주의하라.
다) 이생의 자랑 → 우리인간은 누구나 야망(野望)을 갖고 있다. 이러한 명예(名譽)에 대하여 야망에 이끌려 얼마나 많은 천재적 인물(天才的人物)들이 그릇 된길로 나갔는가!
우리는 이러한 교육적(敎育的)야망, 금전적(金錢的)야망, 지위(地位)와 권세(權勢)에 대한 야망을 단숨에 달성(達成)하려고 애를 쓴다.
⑦ 그리스도는 의(義)로우시다는 것을 生活로 증거(證據)하라.
2. 올바른 믿음 (요일 4:1-5:11)
①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肉體)로 오신 것을 믿어야 한다. (요일 4:1, 2, 5:20-21)
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어야 한다. (요일 4:15, 5:5)
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어야 한다. (요일 4:8)
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救主)이심을 믿어야 한다. (요일 5:10-12)
② 하나님과 사랑
3. 풍성(豊盛)한 상급(賞給) (요일 5:12-21)
그리스도 안의 생활에 대한 상급(賞給)은 서신(書信)마지막 부분(部分)에 기록(記錄)되어있다.
㉮ 영생(永生)의 보증(保證) (요일 5:13)
㉯ 기도(祈禱)의 능력(能力) (요일 5:14-15)
㉰ 중보(中保)의 능력(能力) (요일 5:16)
㉱ 승리(勝利) (요일 5:18과 5:4-5)
① 진리(眞理)안에 거(居)함을 인해 감사(感謝)를 표현(表現)했고(요이 1:1-3),
② 계명(誡命)대로 순종(順從)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했다(4절).
③ 새 계명(誡命)을 좇아 사랑하자는 권면(勸勉)을 한 다음(5-6절),
④ 적(敵)그리스도의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各別)히 주의하라고 당부(當付)하였다(7-11절).
⑤ 마지막으로 그는 그들과 만나기를 원(願)한다고 말하였다.(12-13절)
◉ 요한은 그 당시에 교회(敎會)안에 퍼지고 있던 이설(異說)들, 특히 거짓 교사들로 인해 야기(惹起)된 문제(問題)들을 수습(收拾)하기 위(爲)해 매우 강경(剛勁)한 어조(語調)로 그 문제들을 언급(言及)하고 있다.
화(火) (6월 30일)
< 이 서신(書信)들이 기록(記錄)된 목적(目的)은 무엇인가? >
◉ 매사(每事)에는 목적(目的)이 분명(分明)히 있다.
여행(旅行)을 해도 목적지(目的地)가 있고, 공부를 해도 그에 공부하는 목적이 있고,
건축(建築)을 하여도 용도(用度)에 목적이 있고, 열심(熱心)히 돈을 벌어도 그에 목적이 있다.
특히 영화(映畵)제작이나, 책을 집필(執筆)할 때에도 분명한 목적이 있다.
분명한 목적이 없는 모든 작품(作品)들은 아마도 그 작품의 본질(本質)되로 사용되지 못할 것이다.
인생도 목적이 없는 삶의 인생은 참으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 이유(理由)는 공항(空港)에서 비행기가 이륙(離陸)을 하고, 항구(港口)에서 배(船)가 출항(出港)을 해서 목적지가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망망대해(茫茫大海)를 항해(航海)하는 기장(機長)이나 선장(船長)은 없을 것이다. 만약에 목적지가 없이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바다를 항해하고 다닌다면? 그 결과는 상상(想像)에 맞기고 싶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남녀노소(男女老少)나 빈부귀천(貧富貴賤)이나 인종(人種)의 차별(差別)이 없이 공히 똑 같이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간이다. 그러해서 하나님께서는 시간(時間)속에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인(印)과 행복을 넣어 놓으신 것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어떤 사람은 목적을 두고 시간을 잘 활용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수직(垂直)관계가 온전히 잘 적립(積立)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통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하면,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주어진 시간에 목적이 없이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가 금수(禽獸)같은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표를 정하고 하는 신앙(信仰)과, 목표를 정하고 드리는 기도(祈禱)와, 목표를 정하고 공부(工夫)하는 것과, 목표를 정하고 매일(每日)의 말씀 정독(精讀)과 이웃에게의 봉사(奉仕)하는 신앙인(信仰人)이라면 아마도 그의 삶이 평범한 사람으로 비범(非凡)한 삶을 분명히 살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向方)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虛空)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고전 9:26)라고 사도 바울은 성경(聖經)에 기록하고 있다.
◉ 이 서신(書信)은 다음의 이유(理由)로 이 서신(書信)을 썼다.
① 이단(異端)들이 교회(敎會)를 괴롭히고 있었고,
거짓교사들이 내부(內部)에서 일어나 믿음을 파괴(破壞)하려하고 있었다. (요일 2:18-19)그러므로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③ 빛이시며,
④ 그 안에 거짓이 없는 의(義)로운 분이라고 강조하면서,
⑤ "하나님께서 난자마다 죄(罪)를 짓지 아니"한다. (요일 3:9)
⑥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인(否認)하는 거짓 교사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이끈 결과를 낳기 때문에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잔존하여 계속 손상(損傷)을 입히고 위협(威脅)하고 있는 점을 보면서 사람들이 오류(誤謬)에 빠져들지 않게 하기위하여 이 편지를 쓰는 것이다. (재림교회(한) 성경주석 14권 290 참조)
☞ 요한의 서신(書信)을 요약정리(要約整理)해보면
① 우리의 기쁨이 충만(充滿)케 하려고 (요일 1:4)
② 우리로 죄를 범(犯)치 않게 하려고 (요일 2:1)
③ 우리로 잘못됨이 없게 하려고 (요일 2:26)
④ 우리로 알게 하려고 (요일 5:13)이다.
◉ 이 서신의 일차적인 목적(目的)은 목회적(牧會的)인 것이다.
요한은 그의 영적(靈的)인 자녀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인 생애를 보다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편지(便紙)를 쓴다.
이 편지(便紙)의 골자요 핵심(核心)은 "사랑"이다.
배경(背景)은 단순(單純) 하지만 그윽히 깊은 영적권면(靈的勸勉)을 안겨준다.
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8)
② 사랑은 하나님께 속(屬)한 것이다. (7절)
③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10-11절)
그러나 이러한 고상한 주제들은 이 편지서(便紙書)에 논쟁적이며, 동시에 목회적(牧會的)인 목적(目的)을 갖게 하는 반대파(反對派)의 배경과 대조(對照)를 이루면서 묘사(描寫)되어 있다.
◉ 요한이 대항(對抗)하고 있는 근본적(根本的)인 이단(異端)은 일종의 원시 영지주의(Proto-Gnosticism)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거짓 그노시스(gnosis)즉 거짓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편지서에 나타난 강조점(强調點)들로 미뤄볼 때 반대파(反對派)는 영지주의의 두 가지 주요 형태,
곧 "가현설(Docetism)"과 "케린투스 (Cerinthianism)"설(說)에서 온 것으로
둘 다 그리스도의 본질(本質)에 관한 이단(異端)을 제시(提示)한 사상(思想)들이다.
1>. 가현설(假現說)은?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의 실제(實際)를 부인(否認)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가진 것처럼 나타났을 (dokein, apperar)따름이라고 가르쳤다. 두 번째 이단은
2>. 요한의 동 시대중의 한 사람인 케린투스(Cerinthus)에게서 생겨난 것인데
그는 애굽에서 교육을 받은 다음 소아시아에서 가르치면서 유대화 주의의 교훈들을 퍼뜨렸다.
☞ "케린투스"는 주장하기를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사이에 자연적(自然的)으로 출생한 아들 이였으며 그가 침례(浸禮)를 받는 순간에 그리스도가 예수의 몸 안에 들어갔다가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돌아가기 직전(直前)에 도로 나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단(異端)들의 창시자(創始者)들과 지지자들을 요한은 생생한 표현으로 묘사(描寫)하기를
"적(敵)그리스도"(요일 2:18절22절 ; 4:3)와 "거짓 선지자"(요일 4:1)라고 하였다.
이러한 오류(誤謬)를 퇴치(退治)하기위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동안의 가시적(可視的)인 인성(人性)의 실제 즉
① 그분은 참으로 육체(肉體)로 오셨다는 것과. (요일 4:2)
② 신자들은 거짓 "그노시스와"는 반대(反對)가 되는, 이 참 지식(知識)(요일 5:20)을 향유(享有)할 것이라는 것을 강조(强調)하고 있다.
이러한 초기의 논쟁(論爭)들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 매우 광범(廣範)하게 의심(疑心)되고 있는 현대(現代)를 위하여 깊은 의미(意味)를 갖는다.
요한의 편지에 대한 연구는 독자(讀者)의 마음을 성육신(成肉身)의 진리(眞理)로 이끌어갈 것이며, 온 세상의 죄를 위(爲)한 화목제물(和睦祭物)이 되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높이 들린 비전을 독자(讀者)들 앞에 제시(提示)하고 있다.
◉ <요한이 서신들을 기록한 목적>
“이단들이 교회를 괴롭히고 있었고, 거짓 교사들이 내부에서 일어나 믿음을 파괴하려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요일 2:18~19). 비록 그들이 교회를 떠나기는 했으나 그들의 영향은 아직도 잔존하여 계속적인 손상을 입히고자 위협하고 있었다. 요한은 이러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들 위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진리를 매우 매력적으로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오류에 빠져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는 것이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4권 290)
◉ 요한은 거짓 교사들에 의해 퍼지고 있는 신학적(神學的) 오류(誤謬)와 도덕적(道德的)인 문제,
그리고 교회내(敎會內)에서의 권력투쟁(權力鬪爭) 등을 경계(警戒)하기 위해 이 서신(書信)들을 썼다.
수(水) (7월 1일)
< 요한 서신(書信)에 묘사(描寫)된 예수님 >
◉ 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성경을 보면
마태는 예수님을 "왕(王)"으로 묘사(描寫)해서 기록(記錄)하고 있으며.
마가는 예수님을 "종"으로 묘사해서 기록 하였고,
누가는 예수님을 완전한 "인간"으로 묘사(描寫)하여 제시(提示)하고 있으며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描寫)하고 있다.
특히 사도(使徒)요한은 요한 1, 2, 3, 서(書)를 통하여
예수님을 "듣고" "보고" "만진" 예수님을 "사랑"의 실체(實體)로 묘사(描寫)했다.
그러한 분을 요한은 요한의 서신(書信)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목적(目的)과 이유(理由)로,
요한1,2,3서를 기록하고 있다.
(요일 1:1) (태초(太初)부터 있는 생명(生命)의 말씀이신 예수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2, 5:20)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나타내신바 된 참 하나님,)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證據)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요일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일 1:3, 4:15)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예수님)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일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2:1) (우리의 대언자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代言者)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8) (우리에게 비취는 참 빛이신 예수님)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요일 2:22)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요일 4:14)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예수님)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證據)하노니."
(요일 5:20)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신 예수님)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 <성경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성경(聖經)의 초점(焦點)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엡 4:21)를 이해하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진리이시기 때문이다(요 14:6).
우주적 쟁투에서 사단의 전략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예수 없이도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시키는 것이다. 그같이 하여 진리의 여러 중심점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제안되었다.
즉 (1)인간, (2)자연계 혹은 관측 가능한 우주, (3)성경, (4)교회 등이 그것이다. …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다른 진리의 중심점을 제시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본질과 목적에 잘 부합 된다”(기본교리, (한) 2007년, 143~144)
◉ 요한 서신(書信)에서 예수님은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인간(人間)의 육체(肉體)로 이 세상(世上)에 오신 사람의 아들이심이 분명(分明)히 묘사(描寫)되어 있다.
목(木) (7월 2일)
< 요한 서신(書信)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使役) >
◉ (어떤 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다.)
어떤 화가(畵家)가 천사(天使)의 얼굴을 그리려고 모델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이목(耳目)이 수려(秀麗)한 한 소년(少年)에게 그것을 발견(發見)하고 그를 천사(天使)의 모델로 그렸다. 수십 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이 화가(畵家)가 악마(惡魔)의 얼굴을 그리려고 모델을 찾다가 어떤 흉상(凶相)의 늙은이에게서 그것을 발견하고 그를 악마의 모델로 그렸다. 후(後)에 알고 보니 그 악마의 모델은 수십 년 전에 그린 그 천사의 모델과 동일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 인간의 양면성(兩面性)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위를 선택하셔서 그 이름을 마태(하나님의 선물)로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레위를 마태로 바꿔 주십니다.
만남을 통해서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쏘디움"과 + "크로라 디움"이 만나면 = "독약(毒藥)"이 되고
"수소"와 + "불"이 만나면 = "폭탄(爆彈)"이 되며
"수소"와 + "산소(酸素)"가 만나면 = "물"이 되며
"알미늄"과 + "닉켈 코발트"가 만나면 +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자석(磁石)"이 됩니다.
우리의 이름이 세상(世上)과 연합(聯合)하고 세상에 같이 살아가지만
나무와 연합(聯合)해 있으면 나무만큼 강(强)하고
돌과 같이 연합(聯合)해 있으면 돌 만큼 강(强)하고
쇠(철(鐵))와 같이 연합해 있으면 쇠붙이만큼 강(强)합니다.
사도(使徒)요한은 전능자(全能者) 예수님과 같이 합(合)하여
그의 지난 추(醜)한 인생에서 180도의 변모(變貌)된 사도(使徒)가 되었다.
성경과 영감의 글에 서술(敍述)한 바와 같이 그는
“우뢰(雨雷)의 아들”(막 3:17)이라고 불리었고, 자부심(自負心)이 강(强)하고 야심적(野心的)이며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예수님과 만나서 "보고" "듣고" "만진"바 사랑의 주님이심을 체험(體驗)하고 예수님의 지상(地上) 공생애(公生涯)를 통하여 그분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확신(確信)하게 되었고 그분의 이 땅에서의 사역이 죄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救援)하시기 위하여 사랑의 본체(실체(實體))되셔서 이 땅에 속죄제물(贖罪祭物)로 오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는 목숨을 걸고 증거하고 있다.
◉ 요한 언제나 열심(熱心)으로 구주(救主)를 따르고 그 말씀을 듣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한 요한이었지만, 그 품성에 결코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순(柔順)하고 몽상적(夢想的)인 열심자(熱心者)는 아니었다.
그와 그의 형제는 “우뢰(雨雷)의 아들”(막 3:17)이라고 불리었다.
요한은 자부심(自負心)이 강(强)하고 야심적(野心的)이며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거룩하신 교사께서는 요한의 이런 모든 성격(性格)의 이면(裏面)에 있는 열렬(熱烈)하고 순진(純眞)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이기주의(利己主義)를 견책(見責)하시고, 야심(野心)을 꺾으셨으며, 믿음을 시험(試驗)하셨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심령(心靈)이 사모(思慕)하고 있는 성결(聖潔)의 아름다움 곧 당신께서 가지고 계시는 사람을 변화(變化)시키는 사랑을 그에게 나타내셨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교육, 86)
(요일 1:7) (사귐의 약속(約束)과 죄(罪)의 정결(淨潔)에 대한 약속(約束))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2:25)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에 대한 약속(約束))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일 2:28) (주님의 재강림(再降臨)에 대한 약속(約束))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 3:8) (마귀(魔鬼)의 일을 멸(滅)하실 것에 대한 약속(約束))
"죄를 짓는 자는 마귀(魔鬼)에게 속(屬)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犯罪)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滅)하려 하심이니라."
(요일 3:16) (우리를 위(爲)해 목숨을 버리시고 사랑을 알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約束))
"그가 우리를 위(爲)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兄弟)들을 위(爲)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5:18) (죄(罪)와 악(惡)한 자로부터 지키실 것에 대한 약속(約束))
"하나님께 로서 난 자마다 범죄(犯罪)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 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惡)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이 1:3) (예수 그리스도를 통(通)해 은혜(恩惠)와 긍휼(矜恤)과 평강(平康)을 주실 것에 대한 약속(約束))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 <예수님을 통(通)한 구원(救援)의 약속(約束)>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주(救主)이시다.
비록 고침을 받아야 할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분께서 주신 자비를 거절(拒絶)할지라도, 그분의 공로(功勞)를 신뢰(信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멸망(滅亡)하도록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을 때의 우리의 속절없는 상태를 깨닫는 한편 낙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를 의지해야 한다. 가련하고 죄로 병든 절망적인 영혼(靈魂)이여, 바라보고 삶을 얻으라.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기로 약속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증언보감, 2권, 93)
◉ 우리가 올바른 신앙(信仰)을 가지려면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救主)로서 행(行)하신 일과, 우리의 중보자(中保者)로서 지금 행(行)하고 계신 일에 대한 바른 이해(理解)를 가져야 한다.
◉ <사도(使徒)요한의 시대(時代)에는 교회(敎會)에 위험(危險)이 가득했었다.>
“사단의 기만(欺瞞)이 도처(到處)에 있었다. …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公言)하는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이 하나님의 율법(律法)에 순종하는 일에서 그들을 해방(解放)시켰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다른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의 관습과 의식들을 준수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이 없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선량한 사람이었음은 인정했지만 그분의 신성은 부인하였다. 하나님의 사업에 충성하는 척하는 어떤 이들은 기만자(欺瞞者)들이었고 그들은 행실(行實)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부인(否認)하였다. 죄악 가운데 살고 있는 그들은 교회에 이설(異說)들을 들여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의주의(懷疑主義)와 기만(欺瞞)의 미궁(迷宮)에 빠지게 되었다.
요한은 이 유해(有害)한 오류(誤謬)가 살금살금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슬픔에 가득 찼다.
그는 교회가 직면(直面)한 위험(危險)을 알고 신속(迅速)하고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요한의 서신(書信)들은 사랑의 정신을 나타낸다.
이 서신들은 마치 그가 사랑에 적셔진 붓으로 기록(記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律法)을 범하면서도 저희가 죄 없다고 공언(公言)하는 자들을 대할 때는 그들의 무서운 기만(欺瞞)에 대하여 단호(斷乎)히 경고(警告)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도행적, 553~554)
<초점(焦點)>
1. 예수님의 사랑을 보고 듣고 만져본 사도(使徒)요한은 요한의 1.2.3서신(書信)을 통하여
거짓 가르침에 대항(對抗)하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犧牲)과 중보(中保)와 진리(眞理)에 초점(焦點)을 맞추고 올바로 이해(理解)할 것 같으면, 이단(異端)사설(邪說)에 넘어가지 않고, 희생정신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음을 증거(證據)하고 있다.
◉ 말미부록(末尾附錄)>
※ 요한 일,이 서와 요한복음사이에 유사성(類似性)성과 대조표(對照表)
< 도표로 작성하였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깨지으로 첨부 파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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