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기 제5과 빛- 세속적인 것을 포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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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하 작성일09-07-22 15:55 조회3,905회 댓글0건본문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 2:15-
거듭남
색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빛을 만날 때까지 방황한다. 아무리 자극적이어도 색은 수동적이다. 빛이 없다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명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쓸모가 없다. 빛을 만난 뒤에야 모든 물상은 각자의 색을 반사하며 제 자리를 찾는다. 빛을 만나기까지 어떤 존재도 그 색을 인정받지 못한다. 색계에 흐트러졌던 무질서는 빛과 더불어 비로소 가지런해진다. 빛은 색계의 희망이다. 색은 빛을 받아야 화가의 작업실에서 갓 튀어나온 그림처럼 생명력을 갖는다. 어두움에 묻혔던 물상들이 새벽햇살과 더불어 탄생하는 이 일이 매일 반복되기 때문에 이 일을 기적으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빛과 더불어 매일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 일은 분명 기적이다. “필립푸스에 의하면 예수는 유채색을 그렇게도 순수한 흰색으로 되돌리는 일을 하는 염색가로 등장한다.”(마가레테 브룬스 『색의 수수께끼』 216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나는 ‘유채색에서 흰색으로의 전환’을 성경은 기적 또는 거듭남이라고 말한다.
성년식을 치르는 자가 아동적 존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을 정도의 고통을 치러야 하듯이 인간은 색의 존재를 벗기 위해 무서운 고통을 치러야 한다. 가장 큰 고통은 자기포기이다. 색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은 누구나 한번은 자기포기의 성년식을 치러야 한다. 그 후에야 그가 반사할 생명의 불꽃이 타오른다. 그 불꽃 앞에서 행복에 대한 갈망이 해체되고 냉담한 벽과 경계선이 무너지면서 전대미문의 구원이 빛난다. ‘저쪽 세계’로 가기위한 통과 과정이다.
속(俗)
속(俗)은 아(雅)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속어, 속인, 통속, 세속, 시속, 속견, 속념, 속설, 속명, 속물, 속세 등, 속(俗)은 이말 저말과 합하여 끊임없이 말들을 증식하지만 그 어떤 말도 속과 합하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 한자의 속(俗)이 보여주는 형상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에 사람이 서있는 모습이다. 상상만 해 보아도 우아한 이 형상이 왜 그 가치를 상승시키는 말을 만들어내지 못할까?
출가를 만류하는 부왕에게 싯달타가 말한다.
“만일 네 가지를 해 주신다면 고행림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나의 목숨이 죽음으로 가지 않도록, 나의 몸이 질병에 빼앗기지 않도록, 나의 젊음이 늙음으로 가지 않도록, 이 세상의 영화를 빼앗기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불가능한 말을 하는 아들에게 부왕은 말한다.
“그런 쓸데없는 마음을 버려라. 지나친 희망은 마땅치 않느니라.”
다시 싯달타가 말한다.
“만일 이 희망을 이룰 수 없다면 불타는 집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헤어짐이 확실한 것이니 올바른 법대로 헤어짐이 최상이옵니다. 나는 죽음을 떠날 힘이 없으니 만족이 없습니다.”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찾아 속(俗)을 떠나려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면 속을 떠난 줄 알고 세상을 떠나려 하지만 사람을 떠난다고 속(俗)이 성(聖)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 없는 골짜기에 홀로 서 있으면 누구나 성자요 누구나 의인처럼 보인다. 자연에서 아(雅)를 경험한 자가 다시 사람들 속으로 왔을 때 속(俗)을 드러낸다면 그는 속(俗)을 떠난 게 아니라 사람을 떠난 것이다. 상형문자에 의하면, 골짜기에 홀로 서서 성(聖)과 의(義)를 꿈꾸는 사람이야말로 속(俗)이다. 인간이 참으로 속(俗)을 떠나 성을 이루려면 사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이 없는 곳엔 속(俗)도 아(雅)도 성(聖)도 없는 것이다.
만물이 고요히 잠든 밤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미련 없이 버리고 왕궁을 떠난 싯달타도 해탈의 즐거움을 얻은 뒤엔 녹야원에 이르러 사람들을 앞에 두고 설법을 시작했다. 진실로 속을 떠난 사람은 사람을 경계(警戒)하지 않는다.
인간을 속(俗)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 속에서 꿈틀대는 증오와 욕심이다. 증오와 욕심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속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사람을 떠날 게 아니라 자기 속에서 증식하고 있는 증오와 욕심을 추방해야 한다.
증오
참으로 속되고 추한 것은 증오다. 타인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의 심장을 찌른다. 어떻게 이 어리석은 증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레이첼 킹 여사가 자료를 수집하여 펴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에 보면 미국에는 화해를 위한 살인피해자유족회(Murder Victim's Families for Reconciliation)가 있다. 그 회에 가입하려면 가족 가운데 살해된 사람이 있어야 하며 사형 제도를 반대해야 한다.(레이첼 킹 여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 9쪽) 이 책에 나오는 10명의 살인사건은 대부분 모르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가족을 살해한 살인자를 용서해줄 뿐 아니라 사형제도 자체를 반대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MVFR 회원들이 한마음으로 도달한 결론은 사형제도가 자신들을 치유해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사형제도는 치유를 더디게 한다.”(상게서11쪽) 다시 말하면 그들은 “격심한 고통과 슬픔 속으로 파고들어가려는....노력과 인내가 있어야 고통을 극복할 수 있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기에”(상게서 17쪽) 용서를 선택한 것이다. “극심한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상처를 치유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일종의 종결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살인 사건으로 누구를 잃은 사람들은 종결점이란 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삶을 계속해 나아갈 힘을 주고 삶에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주는 건설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비극을 긍정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용서의 역설은 그것이 가장 이타적인 행동 같아 보이지만 실은 매우 이기적인 것이라는데 있다.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은 고통과 분노에 사로잡히고, 그 결과 살인범에 의한 상처를 한 번 더 받게 된다. 살인범은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갈 뿐 아니라 그들이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마저 앗아간다. 빌 펠케이는 할머니를 죽인 소녀에 대해 ‘폴라 쿠퍼를 용서하는 것은 그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내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상게서 17쪽) 진실로 용서는 자기를 위한 것이다.
허두에 말한 필립푸스의 말을 의역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유채색을 순수한 흰색으로 돌리셨다’. 그와 같이 증오에서 벗어나 용서의 길을 걷기 위해선 희생이 따른다. 이 희생을 막아서는 것이 욕심이다.
욕심
인간이 사람을 떠나 홀로 있으면 모든 욕심은 달아나고 청정을 느낀다. 하지만 사람 속으로 돌아오면 곧 욕심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난다. 혼자 살면 오두막집에서도 행복하던 사람이 친구가 사는 큰 집에 다녀온 후로는 자기 집이 비좁게 느껴지고 큰집에로의 욕심이 가슴 한 가운데서 먼지를 일으킨다. 골짜기에 홀로 서서 느낀 청정은 속(俗)을 떠난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199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흑인 여류작가 토니 모리슨의 소설 『가장 푸른 눈』에 나오는 흑인 소녀 피콜라는 ‘가장 푸른 눈'을 갖기를 원했다. ‘가장 푸른 눈'은 그가 죽어도 가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가 가진 욕망이다.
피콜라의 욕망을 뜻하는 자그마한 눈알은 인간의 욕망이 거창한 게 아니라 지극히 사소한 것이며 개인적임을 나타낸다. 인간의 욕망은 ‘가장 푸른 눈'처럼 사소한 것이지만 충족되는 순간 자기복제를 하면서 인간의 삶 전체를 뒤 흔든다.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 교수는 그가 쓴 『경제 원론』에서 ‘행복의 공식’을 말한다. 그가 내놓은 행복의 공식은 욕망 분의 소유다(H=P/D).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만큼 소유했는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내가 100을 원하는데 100을 가지고 있으면 나는 완벽하게 행복하다. 그러나 100을 원하는데 가진 게 20 뿐이라면 내 행복은 20%에 그친다. 여기서 소유를 성취로 고쳐도 마찬가지다. 나의 욕망은 100인데 20밖에 성취하지 못했다면 나의 행복은 20%에 그친다. 폴 새뮤얼슨의 말대로 행복이 소유와 욕망이라는 두 요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인간은 행복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욕망은 소유하는 순간 또 다시 자기복제를 하기 때문이다.
암은 끊임없이 자기복제를 하다가 주인인 몸이 죽으면 그때에야 자신도 죽는다. 욕망이 추하고 속된 것은 그것이 암과 같이 끊임없이 자기복제를 하기 때문이다. 암이 결국 인간을 사망으로 몰고 가듯이 욕망도 결국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간 뒤에야 끝을 낸다. 욕망의 자기복제를 깨달은 붓다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욕망의 불길을 끔으로 열반(涅槃)에 이르고, 욕망 때문에 받는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解脫)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열반과 해탈, 그것이 속을 벗어나는 길일까?
요한이 말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지 못하고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하지 못하듯이 속과 성은 공존하지 못한다. 하지만 ‘속이냐 성이냐’, ‘세상이냐 하나님이냐’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생명이냐 죽음이냐에서 인간에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없듯이 인간은 어둠을 선택할 권리도, 속이나 세상을 사랑할 권리도 없다. 이것이 선택 사항이라면 속과 세상을 사랑한 것에 대한 벌은 면제된다. 하지만 죽음이 선택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자살 미수죄가 성립되듯이 성과 하나님 사랑이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인간의 의무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한데 왜 인간은 하나님 사랑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할까?
요한이 계속해서 말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사단이 하와에게 보여준 나무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창 3:6)였다. 인간이 탐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한 탐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죄는 이 통로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한다.
먹음직하다는 것은 식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욕심의 배를 채우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음직한 욕망의 통로’를 통과한다. 보암직한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자신을 미화시키고자하는 욕구다. 자신을 미화하는 과정에서 거짓이 춤바람을 일으킨다. 이생의 자랑은 자신의 지혜로 생명을 보존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요한이 말하는 ‘흉악한 자’(요일 2:15)들이다. 이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죽음의 세력들이다. 문제는 이 흉악한 것들이 인간의 본능의 범주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찌해야할까?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흉악한 죽음의 세력에 의해 끌려가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께서 대언자가 되셨다. 대언자로 번역된 ‘파라클레이토스’는 중보자요 위로자요 대변인이요 변호사이다. 그는 대언자가 되기 위해 먼저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치명적인 문제를 오직 그분에게 맡겨야 한다. 그 후에야 ‘유채색에서 흰색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아무 케이스나 맡지 않으시고 아는 사람의 케이스만 맡아 변호하신다. 예수께서는 누구를 아신다고 하실까? 요한이 말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요일 2:15-
거듭남
색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빛을 만날 때까지 방황한다. 아무리 자극적이어도 색은 수동적이다. 빛이 없다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명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쓸모가 없다. 빛을 만난 뒤에야 모든 물상은 각자의 색을 반사하며 제 자리를 찾는다. 빛을 만나기까지 어떤 존재도 그 색을 인정받지 못한다. 색계에 흐트러졌던 무질서는 빛과 더불어 비로소 가지런해진다. 빛은 색계의 희망이다. 색은 빛을 받아야 화가의 작업실에서 갓 튀어나온 그림처럼 생명력을 갖는다. 어두움에 묻혔던 물상들이 새벽햇살과 더불어 탄생하는 이 일이 매일 반복되기 때문에 이 일을 기적으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빛과 더불어 매일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 일은 분명 기적이다. “필립푸스에 의하면 예수는 유채색을 그렇게도 순수한 흰색으로 되돌리는 일을 하는 염색가로 등장한다.”(마가레테 브룬스 『색의 수수께끼』 216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나는 ‘유채색에서 흰색으로의 전환’을 성경은 기적 또는 거듭남이라고 말한다.
성년식을 치르는 자가 아동적 존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을 정도의 고통을 치러야 하듯이 인간은 색의 존재를 벗기 위해 무서운 고통을 치러야 한다. 가장 큰 고통은 자기포기이다. 색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은 누구나 한번은 자기포기의 성년식을 치러야 한다. 그 후에야 그가 반사할 생명의 불꽃이 타오른다. 그 불꽃 앞에서 행복에 대한 갈망이 해체되고 냉담한 벽과 경계선이 무너지면서 전대미문의 구원이 빛난다. ‘저쪽 세계’로 가기위한 통과 과정이다.
속(俗)
속(俗)은 아(雅)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속어, 속인, 통속, 세속, 시속, 속견, 속념, 속설, 속명, 속물, 속세 등, 속(俗)은 이말 저말과 합하여 끊임없이 말들을 증식하지만 그 어떤 말도 속과 합하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 한자의 속(俗)이 보여주는 형상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에 사람이 서있는 모습이다. 상상만 해 보아도 우아한 이 형상이 왜 그 가치를 상승시키는 말을 만들어내지 못할까?
출가를 만류하는 부왕에게 싯달타가 말한다.
“만일 네 가지를 해 주신다면 고행림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나의 목숨이 죽음으로 가지 않도록, 나의 몸이 질병에 빼앗기지 않도록, 나의 젊음이 늙음으로 가지 않도록, 이 세상의 영화를 빼앗기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불가능한 말을 하는 아들에게 부왕은 말한다.
“그런 쓸데없는 마음을 버려라. 지나친 희망은 마땅치 않느니라.”
다시 싯달타가 말한다.
“만일 이 희망을 이룰 수 없다면 불타는 집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헤어짐이 확실한 것이니 올바른 법대로 헤어짐이 최상이옵니다. 나는 죽음을 떠날 힘이 없으니 만족이 없습니다.”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찾아 속(俗)을 떠나려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면 속을 떠난 줄 알고 세상을 떠나려 하지만 사람을 떠난다고 속(俗)이 성(聖)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 없는 골짜기에 홀로 서 있으면 누구나 성자요 누구나 의인처럼 보인다. 자연에서 아(雅)를 경험한 자가 다시 사람들 속으로 왔을 때 속(俗)을 드러낸다면 그는 속(俗)을 떠난 게 아니라 사람을 떠난 것이다. 상형문자에 의하면, 골짜기에 홀로 서서 성(聖)과 의(義)를 꿈꾸는 사람이야말로 속(俗)이다. 인간이 참으로 속(俗)을 떠나 성을 이루려면 사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이 없는 곳엔 속(俗)도 아(雅)도 성(聖)도 없는 것이다.
만물이 고요히 잠든 밤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미련 없이 버리고 왕궁을 떠난 싯달타도 해탈의 즐거움을 얻은 뒤엔 녹야원에 이르러 사람들을 앞에 두고 설법을 시작했다. 진실로 속을 떠난 사람은 사람을 경계(警戒)하지 않는다.
인간을 속(俗)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 속에서 꿈틀대는 증오와 욕심이다. 증오와 욕심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속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사람을 떠날 게 아니라 자기 속에서 증식하고 있는 증오와 욕심을 추방해야 한다.
증오
참으로 속되고 추한 것은 증오다. 타인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의 심장을 찌른다. 어떻게 이 어리석은 증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레이첼 킹 여사가 자료를 수집하여 펴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에 보면 미국에는 화해를 위한 살인피해자유족회(Murder Victim's Families for Reconciliation)가 있다. 그 회에 가입하려면 가족 가운데 살해된 사람이 있어야 하며 사형 제도를 반대해야 한다.(레이첼 킹 여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 9쪽) 이 책에 나오는 10명의 살인사건은 대부분 모르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가족을 살해한 살인자를 용서해줄 뿐 아니라 사형제도 자체를 반대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MVFR 회원들이 한마음으로 도달한 결론은 사형제도가 자신들을 치유해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사형제도는 치유를 더디게 한다.”(상게서11쪽) 다시 말하면 그들은 “격심한 고통과 슬픔 속으로 파고들어가려는....노력과 인내가 있어야 고통을 극복할 수 있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기에”(상게서 17쪽) 용서를 선택한 것이다. “극심한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상처를 치유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일종의 종결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살인 사건으로 누구를 잃은 사람들은 종결점이란 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삶을 계속해 나아갈 힘을 주고 삶에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주는 건설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비극을 긍정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용서의 역설은 그것이 가장 이타적인 행동 같아 보이지만 실은 매우 이기적인 것이라는데 있다.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은 고통과 분노에 사로잡히고, 그 결과 살인범에 의한 상처를 한 번 더 받게 된다. 살인범은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갈 뿐 아니라 그들이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마저 앗아간다. 빌 펠케이는 할머니를 죽인 소녀에 대해 ‘폴라 쿠퍼를 용서하는 것은 그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내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상게서 17쪽) 진실로 용서는 자기를 위한 것이다.
허두에 말한 필립푸스의 말을 의역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유채색을 순수한 흰색으로 돌리셨다’. 그와 같이 증오에서 벗어나 용서의 길을 걷기 위해선 희생이 따른다. 이 희생을 막아서는 것이 욕심이다.
욕심
인간이 사람을 떠나 홀로 있으면 모든 욕심은 달아나고 청정을 느낀다. 하지만 사람 속으로 돌아오면 곧 욕심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난다. 혼자 살면 오두막집에서도 행복하던 사람이 친구가 사는 큰 집에 다녀온 후로는 자기 집이 비좁게 느껴지고 큰집에로의 욕심이 가슴 한 가운데서 먼지를 일으킨다. 골짜기에 홀로 서서 느낀 청정은 속(俗)을 떠난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199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흑인 여류작가 토니 모리슨의 소설 『가장 푸른 눈』에 나오는 흑인 소녀 피콜라는 ‘가장 푸른 눈'을 갖기를 원했다. ‘가장 푸른 눈'은 그가 죽어도 가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가 가진 욕망이다.
피콜라의 욕망을 뜻하는 자그마한 눈알은 인간의 욕망이 거창한 게 아니라 지극히 사소한 것이며 개인적임을 나타낸다. 인간의 욕망은 ‘가장 푸른 눈'처럼 사소한 것이지만 충족되는 순간 자기복제를 하면서 인간의 삶 전체를 뒤 흔든다.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 교수는 그가 쓴 『경제 원론』에서 ‘행복의 공식’을 말한다. 그가 내놓은 행복의 공식은 욕망 분의 소유다(H=P/D).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만큼 소유했는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내가 100을 원하는데 100을 가지고 있으면 나는 완벽하게 행복하다. 그러나 100을 원하는데 가진 게 20 뿐이라면 내 행복은 20%에 그친다. 여기서 소유를 성취로 고쳐도 마찬가지다. 나의 욕망은 100인데 20밖에 성취하지 못했다면 나의 행복은 20%에 그친다. 폴 새뮤얼슨의 말대로 행복이 소유와 욕망이라는 두 요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인간은 행복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욕망은 소유하는 순간 또 다시 자기복제를 하기 때문이다.
암은 끊임없이 자기복제를 하다가 주인인 몸이 죽으면 그때에야 자신도 죽는다. 욕망이 추하고 속된 것은 그것이 암과 같이 끊임없이 자기복제를 하기 때문이다. 암이 결국 인간을 사망으로 몰고 가듯이 욕망도 결국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간 뒤에야 끝을 낸다. 욕망의 자기복제를 깨달은 붓다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욕망의 불길을 끔으로 열반(涅槃)에 이르고, 욕망 때문에 받는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解脫)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열반과 해탈, 그것이 속을 벗어나는 길일까?
요한이 말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지 못하고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하지 못하듯이 속과 성은 공존하지 못한다. 하지만 ‘속이냐 성이냐’, ‘세상이냐 하나님이냐’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생명이냐 죽음이냐에서 인간에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없듯이 인간은 어둠을 선택할 권리도, 속이나 세상을 사랑할 권리도 없다. 이것이 선택 사항이라면 속과 세상을 사랑한 것에 대한 벌은 면제된다. 하지만 죽음이 선택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자살 미수죄가 성립되듯이 성과 하나님 사랑이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인간의 의무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한데 왜 인간은 하나님 사랑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할까?
요한이 계속해서 말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사단이 하와에게 보여준 나무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창 3:6)였다. 인간이 탐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한 탐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죄는 이 통로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한다.
먹음직하다는 것은 식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욕심의 배를 채우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음직한 욕망의 통로’를 통과한다. 보암직한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자신을 미화시키고자하는 욕구다. 자신을 미화하는 과정에서 거짓이 춤바람을 일으킨다. 이생의 자랑은 자신의 지혜로 생명을 보존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요한이 말하는 ‘흉악한 자’(요일 2:15)들이다. 이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죽음의 세력들이다. 문제는 이 흉악한 것들이 인간의 본능의 범주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찌해야할까?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흉악한 죽음의 세력에 의해 끌려가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께서 대언자가 되셨다. 대언자로 번역된 ‘파라클레이토스’는 중보자요 위로자요 대변인이요 변호사이다. 그는 대언자가 되기 위해 먼저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치명적인 문제를 오직 그분에게 맡겨야 한다. 그 후에야 ‘유채색에서 흰색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아무 케이스나 맡지 않으시고 아는 사람의 케이스만 맡아 변호하신다. 예수께서는 누구를 아신다고 하실까? 요한이 말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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