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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 생명의 말씀을 경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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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9-07-05 21:40 조회6,0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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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07월11일(안) (일몰(日沒) : 오후 7시 55분)

제2과 생명(生命)의 말씀을 경험(經驗)함

(기억절(記憶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일 1:3)

(깨닫기) : 예수님과의 사귐이 참된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느끼기) : 사귐의 기쁨을 경험한다.
(행하기) :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

(요점(要點))
요한이 예수님과 더불어 경험한 개인적인 기쁨과 사귐은 전염성이 있다. 그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충만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일(日) (7월 5일)
<요한일서의 서론(序論) (요일 1:1~4)>

◉ 사람들이 어떠한 설명(說明)이나 저작(著作)이나 집필(執筆)이나 영화(映畵)나 작품(作品)등을 만들 때 그에 대한 내용과 목적과 핵심을 간단히 묶어서 본 작품의 실마리가 되도록 요약하는 것을 "모두이야기" 또는 "서론"이라고 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의 서신(書信)의 개요(槪要)의 서론(序論)으로
1.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個人的)인 친분(親分)을 선언(宣言)하고, (요일 1:1-3)
2. 편지를 쓰는 목적(目的)으로 (요일 1:3-4)
가).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북돋우기 위하며, (요일 1:3)
나). 기쁨을 충만(充滿)케 하기 위하여 (요일 1:4) 라고 서술한다.
특히 요한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그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게 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서론으로 묘사(描寫)하고 있다.

☞ 요한이 말하고 있는 그분(예수님)을 요한일서1장 1절과 3절에서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로 진술을 하였다.
(1) 태초부터 이미 (예수님) 계셨으며, → 이미 존재(存在)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2)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 바요, → 기억(記憶)이 아직도 남아있음을 뜻한다.
(3) (예수님)을 본(호라오(horao′) 바요, → 물리적(物理的)인 행위(行爲)를 의미한다.
(4) (예수님)를 주목(注目)하였고, → 주의하여 보다 "바라보다"로 성육신(成肉身)하신 말씀을 바라보는 것을 말함. 그 결과가 현재에도 계속되는 것을 뜻 한다.
(5) (예수님)를 만졌으며, → "만진 바라" "손으로 더듬다" "더듬어 찾다" "자세히 조사하다""손을 대다""만지다"
요한과 그의 무리가 육신(肉身)이 된 말씀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음을 진술하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지상경험(地上經驗)이 현실성이 없다는 다양한 이설(異說)들을 반박(反駁)하는데 이보다 더욱 명백한 방법을 생각해내기는 거의 힘들었을 것이다.
(6) (예수님)을 나타내신바, → "알리다" "보이게 하다" "명백하게 하다" "나타내다" 요한은 복음서에서 9회 서신에서6회나 이 말을 사용하였다. 이 생명의 나타남은 (요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와 조화되며 그 영광(榮光)을 목도(目睹)한 지상거민들이 본 성육신(成肉身)을 언급하는 것이다.
(7) 또한 (예수님)에 전해 들었는지를 말하였다. →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증거를 전해 들었는지. ("소식을 가져오다" "선포하다""선언하다" '전하노니" )

요약해서 말하자면,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을 통하여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실체(實體)를 우리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요한은 우리 자신들도 영원한 생명과 사귐,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가질 수 있는 기쁨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였다. 우리가 믿는 그분은 요한 자신이 듣고 보고 만졌던 동일한 예수님이시다.

◉ 요한은 빛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계속 빛 가운데로 행할 것과 (요일 1:1-2:8),
서로 사랑 할 것과 (2:9-4:21)
"세상을 이긴 이김"인 믿음의 확신을 가질 것을 (5:1-21) 성도(신자)들에게 권면 하였다.
요한의 서신가운데에서 "가징 긴 요한일서에서 요한은 격려(激勵)와 경고(警告)를 균형(均衡)있게 조화(調和)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신앙적(信仰的)인 문제점(問題點)들을 다루었다.
곧 하나님과의 교제(交際), 죄(罪), 중재자(仲裁者) 예수, 계명을 지키는 일, 사랑, 거짓 교사의 식별(識別), 영생(永生)과 승리(勝利)에 대한 확신, 기도의 응답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日常生活)등이 요한 서신의 주제와 내용이다.

◉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듣고 보고 만져본 그분이 바로 태초부터 계셨던 분이시며, 생명에 관하여서는 이 말씀은 곧 생명에 관한 말씀이이며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 설명을 하면서 이 설명의 모두는 구주(救主)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의 서신에서 핵심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이 직접 듣고 보고 주목(注目)하고 손으로 만진 경험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참으로 귀한 가치를 지닌 요한의 증언 (1:1-3 인용) >
“ 요한이 한 증언은 “나는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원수(怨讐)는 교회 안에 불화(不和)와 의심(疑心)을 조장(助長)할 만한 의문(疑問)을 제기(提起)하려고 시도한 바 있었다.
이때에 요한의 증언(證言)은 신자들의 믿음을 확정짓는 데에 그 가치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었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이같이 말할 수가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셨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증언할 수가 있다” (원고 29, 1911).

◉ 요한은 자신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자라고 말했다. 요한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도 생생한 감동을 전달받을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님과 사귀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요한은 다른 이들과 함께 이 “생명의 말씀”을 직접 목격한 자임을 천명하면서 그의 서신을 시작한다.
2절과 3절의 앞부분에서 그는 이 “생명”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요한은 자신이 “생명의 말씀”에 관해 선언한 결과로
요한은 자신의 전파를 통해 우리에게 사귐이 있고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원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생애, 그분의 의, 그리고 그분의 죽음을 값없이 선물로 제공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이끈다. 감사, 찬양, 그리고 기쁨이 우러나고, 순종은 즐거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기쁨이 되고, 마음은 성령께서 거하실 수 있도록 언제나 열려 있는 거처가 된다. 하나님과 회개하는 죄인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수립된다. 그것은 두려움과 의무의 관계라기보다는 사랑과 경탄에 기초된 교제이다.”(기본교리, (한) 2007년, 160)

◉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의 요한일서의 서두에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직접 듣고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월(月) (7월 6일)
<요한일서 1장과 요한복음 1장(요일 1:1~5)>

◉ 요한은 그의 복음서(福音書)를 → "태초(太初)에" (in the beginning)라는 말로 시작하는 반면에
그의 첫 번째 서신(요한일서)은 → "태초부터" (from the beginning)로 시작한다.
그 차이는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요한복음서 에서 그는 "태초"의 때에 말씀(the word)이 "이미"존재하고 있었음을 강조(强調)하며,
이곳(요한일서)에서는 "말씀(the word)"이 "태초의 때부터 존재해 오고 있음을 확증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요한복음서는 태초(太初)와 그 이전을 고찰(考察)하며,
요한의 서신(書信)(요한일서)은 태초(太初)와 그 이후를 살핀다.

◉ 요한일서 1:1~5 와
요한복음 1:1~5의 비슷한 내용은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단어(單語)들로는
"태초(太初)", "생명(生命)", "말씀", "하나님", "함께", "빛" 등이 있다.
요한은 이 두 곳에서 예수님을 태초(太初)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두 구절 다 거의 비슷하게 시작된다. 둘 다 분명히 창세기 1:1의 창조를 언급하는
“태초에”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과거의 어느 시점을 가리키고 있다.
둘 다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을 구분하고 있으며,
이 두 분을 나란히 언급함으로 상호간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두 구절 다 “생명”과 “빛”이라는 상징(象徵)을 사용하고 있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 두 구절(句節) 사이에는 유사(類似)한 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차이점(差異點)도 있다.
요한일서 1:1~5에서는 예수님을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으로" 직접적으로 소개하지 않고 발견할 수 없지만,
요한복음 1:1~5에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직접적(直接的)으로 두드러지게 언급(言及)하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으로 힘 있게 강조되어 있다.
요한일서 1:3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통해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강조되어 있긴 하지만, 요한일서의 서론에는 요한복음의 서론에서처럼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예수님께 직접 적용되지는 않았다.
또한 요한복음에는 창조주(創造主)로서의 예수님의 역할(役割)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아무 것도 그분이 없이는 창조되지 않았다.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창조주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공적이고 대중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었지만,
요한일서는 목격자들의 개인적인 증언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 정리하자면, 둘 다 구원(救援)의 계획의 중심이신 예수님에 관한 진리(眞理)를 드러내 준다.

◉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는 참 생명>
“육체의 생명은 생명의 시여 자(施與者)이신 하나님께서 다시 취하여 가시는 것이므로 영원하거나 불멸하는 생명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지배할 힘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딴 데서 빌리신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에게서 생명을 취하여 갈 수 없다. 주님께서는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안에 있던 생명은 근본적인 것이었고 딴 데서 빌린 것이 아니었으며 다른 기원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이러한 생명을 타고나지 못하였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가려 뽑은 기별, 1권, 296-297)

화(火) (7월 7일)
<생명의 말씀(요일 1:1~2)>

◉ 생명(生命)이란 씨앗과 같다.
씨앗은 땅에 묻혀 습도 온도 토양(土壤)등의 조건만 맞으면 싹이 트고 새순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생명의 말씀(예수님)도 인간들의 마음 밭에 떨어져 씨앗의 비유처럼 조건만 맞으면 믿음의 싹이 트고 새순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다.
요한은 그 씨앗(예수님)에 대하여 "들었고" "만졌고" "소유"한 사람이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씨앗을 소유했다는 것은,
요한처럼 확신에 찬 증거(證據)를 소유해야만 그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씨앗(예수님)도 없는 데 어떻게 믿음의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 ①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요 4:1-29)은 처음에는 씨앗(예수님)(요 4:7-19)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여인이 씨앗(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미 듣던 분(예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만난 씨앗(예수님)을 이젠 동네에 맨발로 달려가서 소개(요 4:28-29) 하였고,

② 소경 "바디메오"도 씨앗(예수님)에 대하여 듣기만 하다가 그분이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소리에 씨앗을 갈구함으로 열매를 맺어 눈이 떠지는 역사가 일어났고,(막 10:46-52)

③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듣기만 하던 씨앗(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위해 여인의 처지와 형편을 무릅쓰고 씨앗(예수님)을 만지므로 깨끗이 치유(治癒)함을 받았다. (마 9:18-26 ; 막 5:21-43 ; 눅 8:40-56)

④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 여인(마리아)(요12:3)은 예수님의 씨앗이 없을 때에는 창녀로 귀신들린 여인으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으로 인생의 밑바닥의 생활을 했던 그 여인이 씨앗(예수님)을 소유함으로 그의 기록은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큰 감동(感動)을 주는 믿음의 거장(巨匠)이다.

⑤ 다니엘과 3친구도 씨앗(예수님)을 소유했기에 "극열(極熱)히 타는 풀무 불에도, 사자굴 에도 들어갔다.
그 외(外)의 세리 마태와 베드로와 삭개오와 도마와 일일이 다 열거하기조차 힘든 많은 사람들이 씨앗(예수님)을 소유하여 마음 밭에서 잘 자랐을 때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인 믿음의 알곡을 추수하고 있다는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신 예수님의 씨앗을 이번의 기회로 잘 알고 생명이신 그분만이 우리의 전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성경에서 하나님(삼위)이라는 단어(單語)말고,
가장 귀한 단어(單語)가 있다면 바로 "생명(生命)"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생명(生命)이 최고이고 그 다음으로가 이 세상의 존재(存在)해 있는 모든(단어)것 들이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生命) 즉 영생(永生)을 소유한 사람들이지 않겠습니까?
요한은 생명에 대하여 깊은 깨달음으로 영감을 받은 사람으로 그 생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 토록 중요한 생명에 관하여 모든 미사용어(美辭用語)나 정관사(定冠詞)를 빼버리고,
복음서(福音書)나 서신(書信)을 통해서 핵심(核心)으로 "생명에 관해서"초점(焦點)을 맞추고,
그 생명이 되시는 분을 귀로 듣고 분을 눈으로 보아 주목(注目)하고 손으로 만진 분이라는 확신으로,
그의 뜨거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요한일서1:1절의 "말씀" (호 로고스 (ho logos)에 관한 설명은 요한복음 1:1절에 나오는 헬라어 로고스(logos)의 "발언(發言)" "말" "이야기" "기사(記事)"의 사상을 조직적이고도 의미 있게 정리한 면을 강조 하는 말이다.
70인 역(譯)에서 "로고스"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창조적이고(시편 33:6; 참조 창세기 1:3, 6, 9 등) 교통(交通)하기를 좋아하는(렘 1:4 ; 겔 1:3 ; 암 3:1)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요한이 이 글을 기록할 당시에는 "로고스"의 구약적(舊約的) 용례(用例)를 염두(念頭)에 두었다는 것을 의심(疑心)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뜻과 목적을 창조(創造)와 계시(啓示)를 통(通)하여 표현(表現)했으며,
이제 요한복음 (1:14)의 자신의 최상의 완전한 계시인 성육신(成肉身)을 통하여 그 일을 이룬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요한복음의 주요주제로 집약(集約)해준다.
(참조: 요한복음 14:8-10 아래의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아울러 요한복음 1:18에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소개(紹介)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예수님)는 아버지를 "선포하러"왔다. 그리스도의 명칭으로서 "로고스"는 신약에서 오직 요한만이 그의 복음서(요1장)와 요일 1:1절과 계 19:13절에서 사용했다.
이 용어는 그리스도를 만민이 구원(救援)받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의 체현(體現)으로 (참조: 딤전 2:4),"들을 수 있도록 나타난 하나님의 사상"으로 나타낸다. (시대의 소망 19); (본교 성경주석 (한) 10권483-484 참조)

◉ 1. “생명의 말씀”이라는 말의 의미(意味)는
요한의 저술(著述)들에서 “생명의 말씀”은 오직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분은 생명(生命)(요 14:6)이시고, 말씀(요 1:1, 요일 1:1)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딱 어울리는 표현(表現)입니다.

요한일서 1:1에는 생명의 “말씀”에 관한 언급(言及)이 나온다.
이와 같은 용어(用語)가 요한복음 1:1~3에서도 발견되는데,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分明)하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백마(白馬)를 탄 이가 “하나님의 말씀”(계 19:13)으로 불렸는데,
이 또한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한의 글들에서 그 용어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문맥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요한일서 1:1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용어(用語)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 “생명”이라는 용어(用語)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 14:6).
따라서 요한일서 1:2의 생명 또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분은 당연히 “생명의 말씀”이시다.

2. 요한이 사용한 “생명의 말씀”이라는 용어가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또 다른 증거는
요한은 “생명의 말씀”을 보고 듣고 만졌다고 했는데, 이는 그가 말씀(로고스)이신 예수님을 목격하였고,
또한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3년 반의 공생애 동안 그분과 함께 했던 경험을 지칭하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말씀”이라는 표현(表現)을 복음이 전파(傳播)되는 것으로 해석(解釋)하지만,
그 표현이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분명(分明)한 증거(證據)가 있다.
복음(福音)을 귀로 듣는 것은 가능(可能)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눈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만약 “생명의 말씀”이 복음 전파를 가리킨다면 그것을 손으로 만지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하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개인적(個人的)으로 듣고 보고 만진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보고 만진다는 말보다 훨씬 더 이치에 맞다.
더군다나 “이 생명이 …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요일 1:2)고 하였으므로,
요한이 “생명의 말씀”을 언급할 때에 한 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교과 28)

◉ <생명의 말씀에 복종함>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생명의 떡을 먹고, 구원의 물을 마실 때에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라날 것이다. 그들의 품성은 마음이 먹고 마시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이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생명의 말씀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하는 모든 봉사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되며 사람이 높임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가 존귀함을 받는다.”(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5)

◉ 생명은 생명을 낳는다,
즉 생명이시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1:2에 나오는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요한은 그분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으며, 손으로 만졌다고 하였다.

수(水) (7월 8일)
<목격자(目擊者)들 (신 4:1~9)>

◉ 증인(證人)으로서 첫째가 시(視)요 둘째가 청(聽)이요 셋째가 각(覺)이다.
그래서 법정(法廷)에서의 증인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또한 교육(敎育)에도 중요하게 주장하는 용어(用語)가 시청각(視聽覺)이라고 주장(主張)을 한다.

☞ 그러나 시청각(視聽覺)이 주는 교훈(敎訓)중에서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교훈이 있다.
똑같은 사물(事物)을 보고 그의 보는 각도(角度)에 따라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어떠한 사물을 정면(正面)에서 보는 것과 후면(後面)에서 보는 것의 깨달음은,
정반대(正反對)의 결과(結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즉 태양(太陽)이 비추는 정면에서 보는 것과 태양을 안고 앞에 사물(事物)을 두고 뒤에서 그림자만을 볼 때에는 그 보는 차이(差異)가 정반대(正反對)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로마 군인들과 그 시대(時代)의 많은 사람들이 본 예수님!
가룟 유다가 보고 만진 예수님 !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공생애를 같이 보고 목격(目擊)했지만
십자가(十字架)의 사건(事件)과 예수님의 부활(復活)이전(以前)에는 모두가 "빛"되시는 예수님을 뒤에서 즉 후면(後面)에서 보고 목격(目擊)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도 예수님을 옆에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는 그 분이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신 분으로 태초(太初)부터 계셨던 분으로 알지 못했다는 것인데.
부활후(復活後)에 예수님의 만남이 이제 그가 이미 들었던 그분이요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깨달았다는 것이며 목숨을 걸만큼 확신을 하는 것이 요한이 쓴(기록한) 복음서와 요한의 서신인 요한일서 이서, 삼서와 요한계시록 인 것입니다.

◉ <일예(一例)로 >
가정집 주부(主婦)가 "칼"을 보고 사용하는 것과,
수술의사(手術醫師)가 "칼"을 보고 사용하는 것과
강도(强盜)가 "칼"을 보고 사용하는 것은 똑같이 칼을 목도(目睹)하였지만 그들의 생각은 다 다를 것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지만 교회(敎會)를 보는 각도(角度)가 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사람은 정말로 생명과 같은 분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이번 기에 공부하는 요한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교회(敎會)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 위하여 기다리고 기다리며 안식일(安息日)을 맞이하기 위하여 한 주간동안 준비하며 그에 삶과, 그에 직업(職業)과, 그에 업무(業務)가 온통 예수님과의 핫라인(hot line ; directly)의 상태(狀態)로 유지(維持)하면서 신앙을 하는 성도(聖徒)님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反對)로
교회(敎會)에 안식일(安息日)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보러 가는 성도님들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즉 그들의 삶은 준비가 아니라 체면(體面)과 세상적인 이해타산(利害打算)과 취미(趣味)정도?
교회에 안가면 그렇고 그냥 적당히 할 수없이 습관적(習慣的)으로 신앙을 하는 부류(部類)가 필시(必是)있을 것입니다.
사도(使徒)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목격자들이었다.
이 “그리스도 사건”은 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요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요한일서 1:1~4에서 그는 예수님을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을 뿐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듣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요한은 이 주장을 여러 절에서 반복하였고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개인적인 경험의 진실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우리도 태초(太初)부터 계시고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셔서 죄악(罪惡)으로 멸망(滅亡)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구속주(救贖主)로 구원자(救援者)로 이 땅에 오셔서 내 대신 돌아가신 생명의 구주(救主)로 사도 요한이 만나 체험한 그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이 체험(體驗)하고 목도(目睹)한 증인으로 생애(生涯)합시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목격하거나 성경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직접 목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해 목격자들이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특히 '포스트모던'(post-modern) 세계에서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경험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인 사건들보다도 하나님의 실존과 선하심에 대한 더 강력한 증언이 될 수 있다.

◉ <예수님의 가장 친밀한 제자였던 요한>
“제자들은 얼마 동안 적극적인 활동으로 예수님과 함께 사귀어 왔다. 요한과 야고보, 안드레와 베드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 마태는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과 더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예수님의 이적도 더 많이 목격하였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한층 더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당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거의 항상 함께 있었다. 요한은 예수님과 한층 더 긴밀한 친분을 가짐으로 그분의 사랑받는 자로서 구별되었다. 구주께서는 그들을 다 사랑하셨으나 요한이 가장 잘 받아들이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시대의 소망, 292)

◉ 요한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을 나누는 사도 요한과 같은 증인이 됩시다.

목(木) (7월 9일)
<성도(聖徒)의 교제(交際) (행 2:42~47)>

◉ 가정(家庭)과 가족(家族)과 사회(社會)에는 위계질서(位階秩序)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형식(型式)과 격식(格式)이 있어 어느 때에는 좋고 ,
어느 때에는 참으로 불편(不便)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제(交際)라는 말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 교회에서의 필요한 것은
① 가르침 → 그리스도에 관한추가적인 교훈으로 계속하여 보충(補充)함
② 교 제(交際) → 헬라어 "코이노니아"(koino′nia)를 개역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飜譯)되어있다.
"교제" (고전 1:9; 빌 1:5). "사귐"(요일 1:3, 6, 7). "참예"(고전 10:16; 빌 3:10).
"교통"(고후 13:13). "동정(同情)"(롬 15:26). "연보"(고후 9:13). "나눠주기"(히 13:16)등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교제(交際)라는 말은 사도들과 회심자(悔心者)들 사이에 생긴 "형제애(兄弟愛)"를 가리킨다.
③ 떡을 떼며 → 주의 만찬(晩餐)(고전 10:46)과 일상적(日常的)인 친교의 식사(참조 행2:44, 46)를 모두 포함.
④ 기 도(祈禱) → 초대교회(初代敎會)에서는
그리스도인 사회의 생활에 적용되었던 네 가지 기본적인 요소가 있었다.
가). 신자(信者)들은 사도(使徒)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진리(眞理)를 점점 더 깨닫게 되었고
나). 공동예배와 상호간(相互間)에 친절(親切)과 선행(善行)을 통하여, 서로 간에 친교를 나누었다.
다). 그들은 성만찬(聖晩餐)을 포함하는 "떡을 떼"는 일에 참여했다.
라). 그들은 개인적(個人的)으로나 연합(聯合)하여 기도하는 일에 참여했다.
⑤ 전혀 힘쓰니라. → "꾸준히 하다" "끊임없이 관심을 쏟다"

⑥ 사람마다 함께. →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하고. (재산(財産), 소유(所有))를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⑦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聖殿)에서나 집에서 떡을 떼며 음식(飮食)을 먹고
⑧ 하나님을 찬미(讚美)하며
⑨ 칭송(稱頌)을 받으니
⑩ 하나님께서 구원(救援)받는 사람을 교회(敎會)에 날마다
⑪ 더하게 하신다. → "더하고 있도록" 또는 "계속해서 더 하게" 날마다 계속 더해졌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 요한일서 1:3에 따르면 이 사귐의 축복들은 서로 친교(親交)하는 축복을 누린다.
그 친교(親交)는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함께 하며 또 성도(聖徒)들과 함께 하는 친교(親交)이다.

◉ 예수님은 친히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고(마 16:18),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이 친히 교회를 돌보신다(요 10:14~16).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 뿐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의 사귐 속으로 인도해 준다.
보이지 않는 하늘과의 연결도 있지만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시적인 연결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을 홀로 이끌어갈 필요가 없다.
그들은 외롭게 홀로 떨어져 있지 아니하고, 지상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 인해 많은 복을 누린다.

◉ <초기교회 신자(信者)들의 친밀(親密)한 교제(交際)>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제자들이 살아 계신 구주를 선포하려고 나아갈 때에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 날마다 서로 교제하는 중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사랑을 나타내었다. 이기심 없는 말과 행동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이 사랑을 불붙이고자 노력하였다.”
(사도행적, 547)

◉ 요한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리고 신자들과의 사귐을 누리게 함으로 그들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도와의 교제 속으로 인도된다.
이 땅에서의 교제는 천국에서의 행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요점(要點)>
◉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요한은 그가 이미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누리고 있는 동일한 사귐을 독자들도 누리게 하기 위해 그의 지식을 함께 나누기를 열망한다. 이 애정(愛情)어린 열망(熱望)을 표현하는 동안 그는 아들의 신성(神性)과 영원성(永遠性) 그리고 성육신(成肉身)과 인성(人性)을 역설(力說)한다.
그가 살던 시대나 우리 시대의 독자(讀者)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역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疑心)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이 놀라운 지식을 단순하지만 단호(斷乎)한 언어로 전달하였다.”(재림교 성경주석, (한), 14권, 295~296)

행복한 안식일 맞이 하세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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