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그리스도처럼 생활함(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8/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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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8-08 09:01 조회8,894회 댓글0건본문
8월 1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24분
기억절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연구 범위 : 마 9:36, 막 10:21, 눅 10:30~37, 마 25:31~46, 눅 6:32~35, 요 15:4~12.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신약에서 처음 가르친 계명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미 백성들에게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도 “자기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레 19:18, 34).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의 명령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라는 새로운 차원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이타적인 생애와 죽음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가장 심오한 의미를 밝히셨다.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시고 걸으시고 일하신 요소였다. 그는 세상을 그분의 사랑의 팔로 품으시려고 오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야 하며 그를 우리의 모본으로 삼아야 한다”(하나님의 아들과 딸들, 147).
이번 주 우리가 예수님의 자상하며 동정심 많고 사려깊으며 인정 많은 삶을 살펴볼 때 우리의 심령이 참된 기독교 신앙의 표준인 하나님의 거룩하고 능동적인 사랑의 원리에 감동을 받아 꼴지워지기를 바란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사랑의 성경적 의미를 찾기 위해 예수님의 생활방식과 가르침을 살펴본다.
➋ 느끼기 : 매일 선택의 순간마다 예수님의 사랑의 생활방식을 모방하려고 간절히 염원한다.
➌ 행하기 : 인내의 태도, 용서의 성품, 실질적인 섬김을 통해 사랑을 실천한다.
A.
❷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생애를 사셨다고 생각합니까?
※ 사람을 구원하여 영생의 생명을 얻게 하려는 마음으로 생애하셨다.
❸ 마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그대는 어떤 교훈이 마음에 와 닿습니까?
※ 양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교훈이다. 그들은 그것이 너무 당연한 일상생활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하지 않은 것이다.
B.
❷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을 통해 이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합니까?
※ 그리스도인 각자가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정의한다.
❸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각자의 경험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보십시오.
※ 예수의 생명을 얻게 하려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길이다.
❹ 우리가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 어떻게 매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 말씀과 기도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날마다 더 풍성하여지는 생명을 공급받아야 한다.
결론 :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날(일) 예수님이 사셨던 방법
8월 10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사탄의 맹렬한 공격을 줄기차게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사랑과 봉사의 이타적인 삶을 사셨다. 그분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맞춰져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변함없이 다른 이들을 섬기는 친절한 성품을 보이셨다. 어떤 경우든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시면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분은 어린이, 여성, 외국인, 한센병자, 세리같이 사회에서 무가치하게 간주되는 이들을 애정을 다해 돌보셨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마 20:28)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행 10:38)다. 그분에게는 먹고 쉬는 육체적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다른 이들의 안녕을 바라는 동정과 자비와 관심이 더 중요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도 그분은 자신의 고통보다 어머니를 더욱 염려하였다(요 19:25~27).
1. 마 9:36, 14:14, 15:32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을 어떤 관점으로 보셨는가?
[마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마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답: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대하셨다. 즉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시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셨고 진심으로 그들에 대해 염려하셨다. 동정심에 가득한 그분의 마음은 지치고 흩어진 군중을 향하였다. 여리고 근처에서 만난 두 소경(마 20:34), 도움을 구했던 한센병자(막 1:40~41), 외아들을 잃었던 과부(눅 7:12~13)같이 의지할 데 없는 개인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끼셨다.
2. 여러 사람을 상대하실 때에 예수님은 어떤 행동수칙을 따르셨는가?(막 10:21, 요 11:5)
[막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요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답: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시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행동수칙이었다.
예수님이 베푸신 모든 자비의 행동과 이적과 말씀의 동기는 그분의 무한한 사랑 곧 변치않는 영원한 사랑이었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분은 처음부터 제자들을 사랑셨을 뿐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셨다(요 13:1).
그분은 십자가에서 이타적인 사랑이 이기심을 정복하는 모습을 온 우주에 보여주셨다. 갈보리에 비춰볼 때 자아를 부인하는 사랑의 원칙은 하늘과 땅에서 유일한 생명의 바탕임이 분명하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부가설명> 예수께서 사신 방법은 그분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일치하게 사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사람들을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하실 때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간절한 소원으로 대하셨다. 그러나 그 생명을 끝까지 거절할 때에는 결과를 말씀해주셨다. 주로 바리새인과 당국자들에게 그렇게 하셨다. 예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은 도덕적인 사랑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동정하고 구제하고 자비를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 아무리 탁월한 사랑을 나타내어도 그것이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정신과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새 계명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의 도덕적인 사랑으로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교훈 :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사신 예수님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남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위대한 사랑을 보이셨다.
둘째날(월) 네 이웃을 사랑하라
8월 11일
예수님처럼 살려면 그분이 보여주셨던 동일한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그분은 그 같은 사랑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예증하셨다(눅 10:30~37). 이 비유는 한 율법사와의 대화중에 나왔다. 그 율법사는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눅 10:27)는 말로 요약하였다. 신 6:5과 레 19:18을 인용할 만큼 성경을 잘 알았으므로 그는 이웃에게 사랑을 나타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로 그는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라고 예수님께 물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어떻게 설명하셨는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눅 10:30~37)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어떻게 황금률과 관계가 있는가?(마 7:12)
[눅10:30~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답: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이웃이 누군지 가르쳐주셨다. 이 비유는 우리가 선한 이웃이 되어주라는 비유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정신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라는 것이 황금률이다.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고 대답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내 이웃은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라고 묻기보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네가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라’는 당시에 널리 알려진 가르침을 초월하셨다. 그분은 랍비들의 부정적인 표현을 긍정적인 언어로 제시하심으로 우리가 피해야 할 것뿐 아니라 특히 우리가 해야 할 것까지 언급하셨다.
이 원칙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하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대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친절한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우리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에게 못되게 행하기 쉽다. 대부분은 그렇게 한다. 하지만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그들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과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부가설명> 내 생각으로는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율법사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대답하셨는데, 주석이나 설교자들이 한결같이 선한사마리아인의 이웃이 강도만난 사람이라고 하는 것으로 들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대답하신 것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비유 이야기를 자세히 읽으면 율법사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는데 예수님은 비유 끝에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가?”라고 반문하셨다. 이 말은 고난당하는 사람이 이웃이라는 뜻이 아니고 내가 고난당하는 사람의 이웃이라는 뜻이다. 그 율법사에게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은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율법사 자신이 사마리아인 같은 이웃이 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교훈을 항상 거꾸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이웃이 되라는 교훈이다. 고난당하는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그리스도인은 선한 이웃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인상 깊게 가르치셨는데, 우리는 율법사처럼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 교과도 그렇게 설명했고 밑에 있는 교훈도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 통 어리둥절하다. 밑에 “묵상”을 읽으니까 내가 이해한 것과 같은 말을 했다. 안도가 된다. 이 교훈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의 선한 이웃이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는 그들의 태도와 상관없이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셋째날(화) 사랑의 봉사
8월 12일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1. 마 25:31~46의 바탕 기별은 무엇인가?
[마25: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답: 예수님의 정신으로 생활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바탕 기별이다.
최후의 날에 놀랄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인자의 오른편에 있던 자들은 이타적인 사랑의 실천이 그렇게 결정적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전한 유창한 설교, 그들이 행한 가치 있는 일 또는 그들이 희사한 너그러운 기부를 칭찬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들이 형제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했던 작은 친절로 인해 그들을 하늘로 영접하실 것이다.
왼편에 있는 자들도 왕이 내린 선고로 인하여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하지만 이런 일이 필요하더라도 사랑의 태도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은 쓸모가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겼다고 주장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전혀 알지 못하셨다(마 7:23).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과 그분의 형제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한 신앙의 원칙을 실천하지 않았다(약 1:27 참고).
“지극히 작은 자”(마 25:40)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그리스도인의 책임의 범위를 알려면 그들이 누구인지 확정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지극히 작은 형제’가 사도와 다른 선교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마 10:40~42에서 이런 견해의 근거를 찾고 모든 인류의 운명은 기독교 선교사들을 대하는 태도에 좌우된다고 결론짓는다. 어떤 학자들은 마 12:48~50을 근거로 예수님의 지극히 작은 형제들은 일반적으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그분의 형제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범위는 훨씬 넓어 보인다. “그분은 자신을 인간의 모든 아들과 동일시하신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시며 따라서 아담의 모든 자녀의 형제가 되신다”(시대의 소망, 638).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영생의 생명을 받아들이기를 열망하신다.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그러나 사단이 사람들의 마음을 옭아매어서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소외된 계층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사람에게까지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들에게 영생의 생명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도덕적 선을 행한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적에 언제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항의 했는데, 그들도 돌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의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지적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역사로 그런 일이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겠는가.
교훈 :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행위가 아닌 진실한 사랑의 마음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친절하게 돌보고 섬기는 태도가 천국에서는 환영을 받는다.
넷째날(수) 네 원수를 사랑하라
8월 13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탁월한 증거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당시에 지배적인 사상과는 대조되는 표준으로 높이 세우셨다. 많은 사람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계명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너의 원수를 미워하라’는 개념을 추론한다. 물론 말씀 속에는 그러한 암시가 없다.
1. 그리스도에 따르면 원수에 대한 사랑은 어떤 실질적인 방법으로 나타나는가?(눅 6:27~28)
[눅6:27,28]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답: 원수를 선대하고 그를 위하여 복을 빌고 기도하는 생활로 나타난다.
원수는 우리에게 3가지 다른 방법 즉 적대적인 태도(미워함), 나쁜 말(저주함), 못된 행동(남용과 핍박)(마 5:44)으로 우리에게 적개심을 보일 수 있다. 이런 3가지 적대적인 표현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3가지 표현 즉 착한 행동(선행), 좋은 말(축복),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함(기도)으로 반응하도록 지시하셨다.
증오와 적대적 감정에 대한 그리스도의 반응은 “선으로 악을 이기”(롬 12:21)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먼저 원수를 사랑하도록 요구하셨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다음 그 결과로 선행과 좋은 말 그리고 중보의 기도로 사랑을 나타내라고 하셨다. 하늘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랑 없이는 그러한 말과 행동, 기도는 오히려 진실한 신앙에 대한 공격과 위선적인 속임수가 될 것이다.
2. 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이유들을 언급하셨는가?(눅 6:32~35)
[눅6:32~35]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답: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 같은 차원 높은 명령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3가지의 논증을 사용하셨다. 첫째, 우리는 세상의 낮은 표준보다 차원 높은 삶을 살아야 한다. 죄인들도 서로 사랑하고 범죄자들도 서로를 돕는다.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이 세상의 자녀들의 덕보다 더 우월한 방식으로 살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고양시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치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둘째,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우리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보상을 바라지 않을지라도 그분은 우리에게 풍성하게 보상하실 것이다. 셋째, 이런 종류의 사랑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눅 6:35)신 하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눈다는 증거이다.
<부가설명> 이 말씀에서 주목 되는 것은 “너희”와 비교되는 상대방을 “죄인”이라고 한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하신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할 사항이다. “너희”라고 불린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죄인과 너희 곧 의인은 사망에 처한 사람과 생명을 받은 사람의 대조로 이해할 수 있다. 생명이 있는 사람과 생명이 없는 사람은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사망에 처한 사람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고 생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들이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다.(롬6:4) 당연히 삶의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은 사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애를 쓰게 된다.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런 사랑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감정적, 도덕적 접근을 뜻하기보다는 원수가 되어 나를 못살게 공격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생명을 얻게 하도록 마음을 다해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실이다.
교훈 : 기독교의 차원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증명된다. 우리는 원수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다섯째날(목) 예수님처럼 사는 법
8월 14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압도하고 절망시킬 만큼 이타적인 사랑의 삶에 대하여 높은 이상을 제시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본성이 이기적인 우리가 이타적인 방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게다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구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가증스럽고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을 사랑하며 섬기라고 결코 요구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 표준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명령이나 권고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약속 곧 매우 적극적인 약속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으셨으며, 또 사악한 의지를 개입시키지 않고 그분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모든 자를 위하여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산상보훈, 76).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뒷받침하는 약속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고 자비하시다는 보증이다(눅 6:35~36).
우리도 그들 가운데 포함된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롬 5:10).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우리가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날마다 재확인할 때, 자기를 부인하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스며든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경험할수록 그분의 사랑이 우리로부터 다른 이에게 심지어 우리의 원수에게 흘러넘칠 것이다.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그분께 굴복시키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했던 방법으로 우리도 예수님과 그분의 뜻에 의지해야 한다(요 5:30).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께 굴복하기로 선택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사신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갈 2:20)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이타적인 사랑의 생애로 변화된다.
1.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어떤 관계인가?(요 15:4~12)
[요15:4~12]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답: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계속 받는다. 그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 곧 사망에 처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전달하려는 그 마음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가설명> 이 문제에 대하여 부가설명이 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답에 설명이 들어있고, 6과 전체를 통하여 사랑과 예수님의 생명에 대한 관계를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잠깐 더듬어 보려고 한다. 이것도 이미 여러 번 말한 내용이지만. 성경의 사랑은 도덕적 사랑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인데,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내주신 사랑이다.(롬5:8) 이 사랑은 생명이다. 요일3:14에 그 사실이 기록되었는데, 유의하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표현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증거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그 사랑은 생명의 성질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에 거한다고 했으니 사망에 거한 사람은 사망의 성질인 썩어져가는 구습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 간단한 구절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을 소유하지 않은 존재는 이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생명을 가졌는가? 그렇다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 즉 원수도 이 생명을 얻게 되도록 도울 수 있다는 말이다.
교훈 :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날마다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그분의 사랑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여섯째날(금)
8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497~505 “선한 사마리아 사람”, 637~641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읽어 보라.
“우리의 주위에는 동정의 말과 도움의 손길이 요구되는 가련한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다. 동정과 도움이 요구되는 과부들이 있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위탁하신 자로 받아들이라고 명하신 고아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가족의 일원(一員)임으로 그분의 청지기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들의 영혼을’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실물교훈, 386~38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언뜻 보기에 양과 염소의 비유는 행위로 얻는 구원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 선행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보면 그들이 공로를 얻기 위해 사랑을 실천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이 그분을 믿은 결과라고 가르치셨습니다(요 3:15, 6:40, 47, 11:25~26). 진정한 사랑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런 행위는 구원의 증거이지 근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의 태도로 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하늘에 들어갈 권리를 얻기 위해 일한다는 사고의 함정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항상 구원의 결과와 수단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사람은 도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으로 좋은 결과를 초래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의식에 젖어 있다. 만일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예수께서 굳이 죽으실 필요가 없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이 앞 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이 선한 행위는 전적으로 예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시는 것임을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➋ 까다로운 직장 동료, 무례한 지인, 은혜를 모르는 이웃 등 단지 신경질적이고 불친절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해를 끼쳤거나 나와 우리 가족에게 해를 끼치려고 했던 진짜 원수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까?
※ 부가설명에서 누누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었으면 그들을 이 생명으로 이끌고자하는 정신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원수를 가장 확실하게 갚는 것은 그 원수를 내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 생명을 같이 소유하면 그렇게 된다.
➌ 사람들은 우리의 신학, 교리, 생활방식 등 여러 문제를 두고 논쟁합니다. 그러나 이타적이고 사심이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타적인 사랑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논증을 초월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가 이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을 때 그 생명의 능력으로 이 사랑이 나타나게 된다.
일몰:오후 7시 24분
기억절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연구 범위 : 마 9:36, 막 10:21, 눅 10:30~37, 마 25:31~46, 눅 6:32~35, 요 15:4~12.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신약에서 처음 가르친 계명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미 백성들에게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도 “자기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레 19:18, 34).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의 명령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라는 새로운 차원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이타적인 생애와 죽음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가장 심오한 의미를 밝히셨다.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시고 걸으시고 일하신 요소였다. 그는 세상을 그분의 사랑의 팔로 품으시려고 오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야 하며 그를 우리의 모본으로 삼아야 한다”(하나님의 아들과 딸들, 147).
이번 주 우리가 예수님의 자상하며 동정심 많고 사려깊으며 인정 많은 삶을 살펴볼 때 우리의 심령이 참된 기독교 신앙의 표준인 하나님의 거룩하고 능동적인 사랑의 원리에 감동을 받아 꼴지워지기를 바란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사랑의 성경적 의미를 찾기 위해 예수님의 생활방식과 가르침을 살펴본다.
➋ 느끼기 : 매일 선택의 순간마다 예수님의 사랑의 생활방식을 모방하려고 간절히 염원한다.
➌ 행하기 : 인내의 태도, 용서의 성품, 실질적인 섬김을 통해 사랑을 실천한다.
A.
❷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생애를 사셨다고 생각합니까?
※ 사람을 구원하여 영생의 생명을 얻게 하려는 마음으로 생애하셨다.
❸ 마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그대는 어떤 교훈이 마음에 와 닿습니까?
※ 양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교훈이다. 그들은 그것이 너무 당연한 일상생활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하지 않은 것이다.
B.
❷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을 통해 이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합니까?
※ 그리스도인 각자가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정의한다.
❸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각자의 경험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보십시오.
※ 예수의 생명을 얻게 하려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길이다.
❹ 우리가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 어떻게 매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 말씀과 기도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날마다 더 풍성하여지는 생명을 공급받아야 한다.
결론 :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날(일) 예수님이 사셨던 방법
8월 10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사탄의 맹렬한 공격을 줄기차게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사랑과 봉사의 이타적인 삶을 사셨다. 그분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맞춰져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변함없이 다른 이들을 섬기는 친절한 성품을 보이셨다. 어떤 경우든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시면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분은 어린이, 여성, 외국인, 한센병자, 세리같이 사회에서 무가치하게 간주되는 이들을 애정을 다해 돌보셨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마 20:28)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행 10:38)다. 그분에게는 먹고 쉬는 육체적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다른 이들의 안녕을 바라는 동정과 자비와 관심이 더 중요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도 그분은 자신의 고통보다 어머니를 더욱 염려하였다(요 19:25~27).
1. 마 9:36, 14:14, 15:32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을 어떤 관점으로 보셨는가?
[마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마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답: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대하셨다. 즉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시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셨고 진심으로 그들에 대해 염려하셨다. 동정심에 가득한 그분의 마음은 지치고 흩어진 군중을 향하였다. 여리고 근처에서 만난 두 소경(마 20:34), 도움을 구했던 한센병자(막 1:40~41), 외아들을 잃었던 과부(눅 7:12~13)같이 의지할 데 없는 개인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끼셨다.
2. 여러 사람을 상대하실 때에 예수님은 어떤 행동수칙을 따르셨는가?(막 10:21, 요 11:5)
[막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요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답: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시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행동수칙이었다.
예수님이 베푸신 모든 자비의 행동과 이적과 말씀의 동기는 그분의 무한한 사랑 곧 변치않는 영원한 사랑이었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분은 처음부터 제자들을 사랑셨을 뿐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셨다(요 13:1).
그분은 십자가에서 이타적인 사랑이 이기심을 정복하는 모습을 온 우주에 보여주셨다. 갈보리에 비춰볼 때 자아를 부인하는 사랑의 원칙은 하늘과 땅에서 유일한 생명의 바탕임이 분명하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부가설명> 예수께서 사신 방법은 그분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일치하게 사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사람들을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하실 때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간절한 소원으로 대하셨다. 그러나 그 생명을 끝까지 거절할 때에는 결과를 말씀해주셨다. 주로 바리새인과 당국자들에게 그렇게 하셨다. 예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은 도덕적인 사랑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동정하고 구제하고 자비를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 아무리 탁월한 사랑을 나타내어도 그것이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정신과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새 계명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의 도덕적인 사랑으로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교훈 :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사신 예수님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남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위대한 사랑을 보이셨다.
둘째날(월) 네 이웃을 사랑하라
8월 11일
예수님처럼 살려면 그분이 보여주셨던 동일한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그분은 그 같은 사랑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예증하셨다(눅 10:30~37). 이 비유는 한 율법사와의 대화중에 나왔다. 그 율법사는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눅 10:27)는 말로 요약하였다. 신 6:5과 레 19:18을 인용할 만큼 성경을 잘 알았으므로 그는 이웃에게 사랑을 나타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로 그는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라고 예수님께 물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어떻게 설명하셨는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눅 10:30~37)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어떻게 황금률과 관계가 있는가?(마 7:12)
[눅10:30~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답: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이웃이 누군지 가르쳐주셨다. 이 비유는 우리가 선한 이웃이 되어주라는 비유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정신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라는 것이 황금률이다.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고 대답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내 이웃은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라고 묻기보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네가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라’는 당시에 널리 알려진 가르침을 초월하셨다. 그분은 랍비들의 부정적인 표현을 긍정적인 언어로 제시하심으로 우리가 피해야 할 것뿐 아니라 특히 우리가 해야 할 것까지 언급하셨다.
이 원칙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하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대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친절한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우리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에게 못되게 행하기 쉽다. 대부분은 그렇게 한다. 하지만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그들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과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부가설명> 내 생각으로는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율법사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대답하셨는데, 주석이나 설교자들이 한결같이 선한사마리아인의 이웃이 강도만난 사람이라고 하는 것으로 들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대답하신 것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비유 이야기를 자세히 읽으면 율법사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는데 예수님은 비유 끝에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가?”라고 반문하셨다. 이 말은 고난당하는 사람이 이웃이라는 뜻이 아니고 내가 고난당하는 사람의 이웃이라는 뜻이다. 그 율법사에게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은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율법사 자신이 사마리아인 같은 이웃이 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교훈을 항상 거꾸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이웃이 되라는 교훈이다. 고난당하는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그리스도인은 선한 이웃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인상 깊게 가르치셨는데, 우리는 율법사처럼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 교과도 그렇게 설명했고 밑에 있는 교훈도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 통 어리둥절하다. 밑에 “묵상”을 읽으니까 내가 이해한 것과 같은 말을 했다. 안도가 된다. 이 교훈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의 선한 이웃이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는 그들의 태도와 상관없이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셋째날(화) 사랑의 봉사
8월 12일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1. 마 25:31~46의 바탕 기별은 무엇인가?
[마25: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답: 예수님의 정신으로 생활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바탕 기별이다.
최후의 날에 놀랄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인자의 오른편에 있던 자들은 이타적인 사랑의 실천이 그렇게 결정적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전한 유창한 설교, 그들이 행한 가치 있는 일 또는 그들이 희사한 너그러운 기부를 칭찬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들이 형제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했던 작은 친절로 인해 그들을 하늘로 영접하실 것이다.
왼편에 있는 자들도 왕이 내린 선고로 인하여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하지만 이런 일이 필요하더라도 사랑의 태도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은 쓸모가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겼다고 주장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전혀 알지 못하셨다(마 7:23).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과 그분의 형제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한 신앙의 원칙을 실천하지 않았다(약 1:27 참고).
“지극히 작은 자”(마 25:40)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그리스도인의 책임의 범위를 알려면 그들이 누구인지 확정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지극히 작은 형제’가 사도와 다른 선교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마 10:40~42에서 이런 견해의 근거를 찾고 모든 인류의 운명은 기독교 선교사들을 대하는 태도에 좌우된다고 결론짓는다. 어떤 학자들은 마 12:48~50을 근거로 예수님의 지극히 작은 형제들은 일반적으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그분의 형제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범위는 훨씬 넓어 보인다. “그분은 자신을 인간의 모든 아들과 동일시하신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시며 따라서 아담의 모든 자녀의 형제가 되신다”(시대의 소망, 638).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영생의 생명을 받아들이기를 열망하신다.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그러나 사단이 사람들의 마음을 옭아매어서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소외된 계층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사람에게까지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들에게 영생의 생명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도덕적 선을 행한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적에 언제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항의 했는데, 그들도 돌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의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지적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역사로 그런 일이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겠는가.
교훈 :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행위가 아닌 진실한 사랑의 마음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친절하게 돌보고 섬기는 태도가 천국에서는 환영을 받는다.
넷째날(수) 네 원수를 사랑하라
8월 13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탁월한 증거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당시에 지배적인 사상과는 대조되는 표준으로 높이 세우셨다. 많은 사람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계명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너의 원수를 미워하라’는 개념을 추론한다. 물론 말씀 속에는 그러한 암시가 없다.
1. 그리스도에 따르면 원수에 대한 사랑은 어떤 실질적인 방법으로 나타나는가?(눅 6:27~28)
[눅6:27,28]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답: 원수를 선대하고 그를 위하여 복을 빌고 기도하는 생활로 나타난다.
원수는 우리에게 3가지 다른 방법 즉 적대적인 태도(미워함), 나쁜 말(저주함), 못된 행동(남용과 핍박)(마 5:44)으로 우리에게 적개심을 보일 수 있다. 이런 3가지 적대적인 표현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3가지 표현 즉 착한 행동(선행), 좋은 말(축복),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함(기도)으로 반응하도록 지시하셨다.
증오와 적대적 감정에 대한 그리스도의 반응은 “선으로 악을 이기”(롬 12:21)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먼저 원수를 사랑하도록 요구하셨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다음 그 결과로 선행과 좋은 말 그리고 중보의 기도로 사랑을 나타내라고 하셨다. 하늘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랑 없이는 그러한 말과 행동, 기도는 오히려 진실한 신앙에 대한 공격과 위선적인 속임수가 될 것이다.
2. 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이유들을 언급하셨는가?(눅 6:32~35)
[눅6:32~35]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답: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 같은 차원 높은 명령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3가지의 논증을 사용하셨다. 첫째, 우리는 세상의 낮은 표준보다 차원 높은 삶을 살아야 한다. 죄인들도 서로 사랑하고 범죄자들도 서로를 돕는다.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이 세상의 자녀들의 덕보다 더 우월한 방식으로 살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고양시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치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둘째,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우리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보상을 바라지 않을지라도 그분은 우리에게 풍성하게 보상하실 것이다. 셋째, 이런 종류의 사랑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눅 6:35)신 하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눈다는 증거이다.
<부가설명> 이 말씀에서 주목 되는 것은 “너희”와 비교되는 상대방을 “죄인”이라고 한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하신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할 사항이다. “너희”라고 불린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죄인과 너희 곧 의인은 사망에 처한 사람과 생명을 받은 사람의 대조로 이해할 수 있다. 생명이 있는 사람과 생명이 없는 사람은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사망에 처한 사람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고 생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들이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다.(롬6:4) 당연히 삶의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은 사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애를 쓰게 된다.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런 사랑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감정적, 도덕적 접근을 뜻하기보다는 원수가 되어 나를 못살게 공격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생명을 얻게 하도록 마음을 다해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실이다.
교훈 : 기독교의 차원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증명된다. 우리는 원수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다섯째날(목) 예수님처럼 사는 법
8월 14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압도하고 절망시킬 만큼 이타적인 사랑의 삶에 대하여 높은 이상을 제시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본성이 이기적인 우리가 이타적인 방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게다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구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가증스럽고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을 사랑하며 섬기라고 결코 요구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 표준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명령이나 권고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약속 곧 매우 적극적인 약속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으셨으며, 또 사악한 의지를 개입시키지 않고 그분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모든 자를 위하여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산상보훈, 76).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뒷받침하는 약속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고 자비하시다는 보증이다(눅 6:35~36).
우리도 그들 가운데 포함된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롬 5:10).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우리가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날마다 재확인할 때, 자기를 부인하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스며든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경험할수록 그분의 사랑이 우리로부터 다른 이에게 심지어 우리의 원수에게 흘러넘칠 것이다.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그분께 굴복시키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했던 방법으로 우리도 예수님과 그분의 뜻에 의지해야 한다(요 5:30).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께 굴복하기로 선택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사신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갈 2:20)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이타적인 사랑의 생애로 변화된다.
1.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어떤 관계인가?(요 15:4~12)
[요15:4~12]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답: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계속 받는다. 그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 곧 사망에 처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전달하려는 그 마음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가설명> 이 문제에 대하여 부가설명이 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답에 설명이 들어있고, 6과 전체를 통하여 사랑과 예수님의 생명에 대한 관계를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잠깐 더듬어 보려고 한다. 이것도 이미 여러 번 말한 내용이지만. 성경의 사랑은 도덕적 사랑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인데,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내주신 사랑이다.(롬5:8) 이 사랑은 생명이다. 요일3:14에 그 사실이 기록되었는데, 유의하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표현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증거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그 사랑은 생명의 성질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에 거한다고 했으니 사망에 거한 사람은 사망의 성질인 썩어져가는 구습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 간단한 구절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을 소유하지 않은 존재는 이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생명을 가졌는가? 그렇다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 즉 원수도 이 생명을 얻게 되도록 도울 수 있다는 말이다.
교훈 :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날마다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그분의 사랑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여섯째날(금)
8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497~505 “선한 사마리아 사람”, 637~641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읽어 보라.
“우리의 주위에는 동정의 말과 도움의 손길이 요구되는 가련한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다. 동정과 도움이 요구되는 과부들이 있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위탁하신 자로 받아들이라고 명하신 고아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가족의 일원(一員)임으로 그분의 청지기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들의 영혼을’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실물교훈, 386~38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언뜻 보기에 양과 염소의 비유는 행위로 얻는 구원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 선행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보면 그들이 공로를 얻기 위해 사랑을 실천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이 그분을 믿은 결과라고 가르치셨습니다(요 3:15, 6:40, 47, 11:25~26). 진정한 사랑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런 행위는 구원의 증거이지 근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의 태도로 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하늘에 들어갈 권리를 얻기 위해 일한다는 사고의 함정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항상 구원의 결과와 수단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사람은 도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으로 좋은 결과를 초래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의식에 젖어 있다. 만일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예수께서 굳이 죽으실 필요가 없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이 앞 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이 선한 행위는 전적으로 예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시는 것임을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➋ 까다로운 직장 동료, 무례한 지인, 은혜를 모르는 이웃 등 단지 신경질적이고 불친절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해를 끼쳤거나 나와 우리 가족에게 해를 끼치려고 했던 진짜 원수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까?
※ 부가설명에서 누누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었으면 그들을 이 생명으로 이끌고자하는 정신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원수를 가장 확실하게 갚는 것은 그 원수를 내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 생명을 같이 소유하면 그렇게 된다.
➌ 사람들은 우리의 신학, 교리, 생활방식 등 여러 문제를 두고 논쟁합니다. 그러나 이타적이고 사심이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타적인 사랑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논증을 초월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가 이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을 때 그 생명의 능력으로 이 사랑이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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