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감(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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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08-02 06:30 조회5,169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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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6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감
8월 9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2분
기억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도입)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음이 전제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히9:27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모두가 죽음을 전제로 하여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 그 생존의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사형수와 같이 언젠가 죽음이 올 것이 분명한 존재이다. 예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지 아니할 새로운 몸, 거듭난 몸으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의 나라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 땅의 백성들은 죽음을 맛볼 수밖에 없는데 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지 아니하는 존재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거듭남이란 우리의 현재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죄사함이 거듭남처럼 생각하면서, 죄사함만으로 구원을 마쳤다고 믿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죄사함과 거듭남은 다르다. 죄사함은 내 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깨끗이 용서 받아 흑암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거듭남은 죽었던 내 영이 성령의 도움으로 살아나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연구 범위 : 요 3:1~15, 고후 5:17, 요 15:4~10, 마 6:9~13, 눅 9:23~24.
*교과 토의 시간은 믿음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마음이 끌렸지만, 드러내 놓고 그분을 뵙지는 못했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교사로 인정하며 그분께 공손히 인사했다. 구주는 이런 정중한 인사 뒤에 가려진 진리를 찾는 심령을 아셨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는 이론적 지식보다는 영적인 거듭남 즉 중생이 훨씬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는 이런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자신의 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철저한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 같은 극단적인 변화가 필요하단 말인가?
예수님은 영적 변화란 성령이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일이라고 차근차근 설명하셨다. 우리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그 결과를 감지할 수는 있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즉 회심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고 변화시키셨는지 항상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점점 더 자신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매일 부단히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이 신자의 성장과 발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심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우리의 영적 성장을 고무시키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에 만족한다.
➌ 행하기 :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대한 지식과 지혜와 이해 속에서 성장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밭의 잡초나 몸의 잔병을 뿌리 뽑기 정말 어려웠던 경험이 있으면 나눠 봅시다.
❷ 옛 자아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❸ 왜 우리는 매일 말씀과 기도의 생활을 해야 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❹ 그대의 느낌에 다른 신자들이 거듭나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통해 그대는 어떤 확신을 갖게 됩니까?
B. ❶ 썩은 과일이나 채소를 성한 것들과 함께 보관하다가 모두 버린 경험이 있습니까?
❷ 왜 거듭나지 않은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까?
❸ 날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❹ 함께 성장하는 안교소그룹이 되기 위해 어떻게 서로에게 힘과 의지가 될 수 있을까요?
결론 : 신자의 성장은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 그리고 양육하는 교회 분위기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이런 조건이 갖춰지는 곳은 어디든지 선교적 성장을 통해 개인의 성장이 증진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일대일 관계를 점검합니다.
❷ 새 신자나 구도자가 그들의 친구를 어떻게 소그룹으로 초청해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다시 태어남
8월 3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교사강해 1)
우리는 거듭남에 대해 많은 경우에 죄사함으로 인한 도덕적인 변화만을 생각하기 쉽다. 니고데모는 도덕적으로 매우 훌륭한 사람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충격적인 말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모든 인간은 죽음이 당연한 귀결점이다. 이 죽음에서 아무도 우리를 해방시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해방시켜줄 경험이 필요한데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원리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은 무엇일까? 물, 곧 침례가 어떻게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주는 관문이 될 것인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마3:16-17절에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인간은 무덤에 내려가면 하늘이 닫히게 되는 존재다. 그런데 물에서 예수께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다고 말씀하고 있다. 침례라는 사건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물속에 장사지내고 물 바깥으로 나올 때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는 중생 곧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새로 태어나는 경험이다. 죽어야 할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놓으신 구원의 표상인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거듭남을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가? 고전 15:45절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존재였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게 되자 성령께서는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인치는 성령이 함께 하셔야 한다. 엡1:13-14절에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성령의 임재는 곧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사건인 것이다.
어떤 열성적인 신자가 한 정치인을 만나 물었다. “의원님은 거듭나셨습니까?” 사적인 질문에 짜증이 난 그는 “한 번 태어났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는 한 번만 태어난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고려한다면 한 번 태어난 것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요 3:1~15에 나오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읽어 보라. 예수님은 거듭남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셨는가?
물론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교사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심령이 필요하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 기꺼이 그것을 창조하시려고 한다는 구약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다(시 51:10, 겔 36:26).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하면서 그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그 대화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난다. 니고데모의 대답은 없다. 그는 아마도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성령이 잠잠히 그의 안에서 일하셨고 3년 후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준비가 되었다.
거듭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첫 번째 삶이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충분함을 말해준다. 두 번째 탄생은 이중적이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 니고데모는 침례 요한의 사역을 비춰보고 물로 거듭나는 것이 물로 침례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쉽게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었다.
교훈 : 첫 번째 탄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으로, 성령으로 나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물'은 사람이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를 말하며, 곧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던 침례도 십자가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죽었던 사람이 성령의 힘으로 무덤 속에서 살아나는 것을 말하며, 곧 '생명'을 의미한다. 로마서 6:4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골로새서 2:12에 “너희가 침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도 그와 함께 살아났느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이 침례를 받아 물 속에 잠길 때 내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인도자에 의해 물속에서 꺼내질 때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서 일으켜져 성령으로 잉태된 새사람, 곧 중생한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다. 즉, 죄에 물든 나의 옛사람(육적인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믿음으로 연합하여 죽고,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듯이 죽었던 내 영이 성령의 도움으로 살아나 새사람(영적인 사람), 곧 중생한 사람이 되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무엇을 계기로 거듭남의 삶을 선택하였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육체적 탄생과 영적 탄생 사이에는 비슷한 점들이 있다. 둘 다 삶의 출발점이 된다. 둘 다 우리 스스로 일어나게 할 수 없고 우리를 위해 일어날 뿐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태어날지 말지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적인 거듭남은 선택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안에서 새로운 영적 자아를 창조해 주시도록 성령께 자신을 자발적으로 맡기기로 결심한 자들에게만 거듭남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비록 우리를 변화시키기 바라시지만 강제로 우리를 변화시키지는 않으신다.
| 적용 |
그대의 마음은 지금 어떤 방향으로 거듭나고(변하고)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종교 -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종교만이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종교이다. 그분을 바로 섬기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방심하지 않도록 인도할 것이다. 이 거듭남이 마음을 정화시키고 정신을 새롭게 할 것이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분의 모든 요구에 즐겨 순종하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참된 예배이다”(증언보감 3권, 356).
기도 : 주님, 죄 짓고 죽을 수밖에 없는 저를 이 땅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이 생명 속에서 저의 생각, 감정, 취향, 목적, 관계가 모두 거듭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
8월 4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교사강해 2)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하였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거듭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고 했다. 온전히 거듭나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내 육신의 본능과 사탄의 주관과 싸워 이겨야 되고, 내 영을 예수님의 형상을 이룰 때까지 성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거듭남은 '영적 출생'(중생)뿐만이 아니라 '영적 성장'(성화)과 '영적 완성'(영화)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치 갓난아기가 태어나도 잘 먹이고 돌보지 않으면 병이 나듯이 거듭남을 쉽게 생각하고 자만하는 것은 좋지 않다.
거듭남은 오직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가능하다. 예수님은 그리스어 ‘프뉴마’가 ‘영’과 ‘바람’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사실을 활용하여 회심의 과정을 설명하셨다(요 3:8). 바람이 불어도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불고 어디서 멈추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의 힘은 인간의 통제력 밖에 있다. 우리는 단지 그것에 반응하여 그것을 막든지 아니면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 힘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끊임없이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하신다. 아무도 우리를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위대한 능력을 조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령께 저항하든지 굴복할 뿐이다. 우리가 성령의 감화에 자신을 굴복시킬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신다.
우리가 중생을 경험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있다. 성령의 사역은 보이지 않지만 그 결과는 눈에 보인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심령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일으키는 내적 변화는 언제나 외적 증거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새 삶은 몇 가지 외적인 개혁으로 보완한 삶이 아니다. 거듭남이란 옛 인생의 수정이나 개선이 아니라 완전한 변화를 의미한다.
다음의 성경절에 따르면 우리가 새로 날 때에 우리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딛 3:5~7, 고후 5:17, 갈 6:1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새로운 생각과 감정과 동기를 심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고 생각을 변화시키며 모든 세속적 욕망을 정복하고 우리를 하늘의 향기로운 평화로 채우신다.
교훈 : 성령의 일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증거로 우리의 삶에 나타나며 성령으로 거듭난 인생의 목적은 부분적인 개혁이 아닌 완전한 변화이다.
부가적용)
거듭났다는 건 죽었던 내 영이 살아나 내 육신을 주관하고, 죄와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감동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예수님의 사랑과 동행을 느낄 수 있는 상태이다. 사도 베드로는 거듭나기 전에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의 앞길을 가로 막고, 두려운 마음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오순절 성령으로 거듭난 다음에는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였고, 앉은뱅이와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웠으며, 죽은 자를 살려 냈고, 기꺼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다.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은 내 안에 있는 '속사람'(영) 안에서 능력으로 우리를 강건하게 하신다. 성령을 받기 위해선 틈나는 대로 성경 읽고 기도하며 찬송을 불러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가운데 거해야 한다. 영이 어리면 육신도 주관하지 못하고, 어린아이가 동네 불량배에게 당하듯 악령에게 계속 당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항상 빛 가운데 있어야 어두움이 침입하지 못하고, 강한 것을 붙들어야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거듭났다는 외적인 증거는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물론 변화가 즉시 일어나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우리는 필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태에서 나온 첫 번째 삶은 결코 하나님께 가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 적용 |
그대 주위의 사람들이 그대의 말과 행동 그리고 태도에서 얼마나 예수님을 느낀다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 보이지 않는 능력 -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그 영향은 분명히 볼 수도 있고 감촉할 수도 있는 바람과 같이 사람의 마음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사람의 마음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사람의 마음 안에 새 생명을 나게 하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 사람을 만들어 낸다”(정로의 계단, 57).
기도 : 아버지, 제 삶의 모든 조각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사하기를 원합니다. 완전한 변화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작은 예수’가 되게 하옵소서.
셋째날(화) 그리스도 안에 거함
8월 5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교사강해 3)
사탄과 마귀는 이 세상의 권세를 잡고 있으며,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하고 있다. 이를 대적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옷를 입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악한 날의 영적 전쟁에 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넘어지지 않고 서 있기 위함이다. 갑옷과 방패 없이 전쟁터에 나갔다가는 적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될 것인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끊임없는 교제와 그분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삶에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내 힘으로는 육신의 강한 본능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믿고 내 안에 모시면 예수님은 세상(죄, 사망, 사탄)과 싸워 이기신 분이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진리)이 나를 죄와 사망의 법(본능)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해 육신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나를 사망으로 이끄는 죄성과 육신의 본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번성하는 영적 삶이란 한결같이 그리스도께 의지할 때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어 이런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로 묘사된다(사 5:1~7, 시 80:8~9, 렘 2:21).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요 15:1)로 제시하시면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제자들에게 자신과 연합하도록 촉구하였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요 15:4~10)
방금 나무에서 분리된 가지는 당분간 살아있지만 곧 시들어 죽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결실을 얻으려면 이러한 연합이 유지되어야 한다. 아침에 가지는 경건의 시간은 필수적이다. 또한 주님과 우리의 교제는 낮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분을 찾고, 그분의 인도를 구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며, 우리를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가장 기만적인 함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신앙 생활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요 15:5)다고 말씀하셨다. 그분 없이 우리는 단 하나의 유혹도 거부하지 못하며, 단 하나의 죄도 이기지 못할 뿐 아니라 그분의 형상을 따라 품성을 발전시키지도 못한다. 영적으로 새로운 삶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
교훈 :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 지속적으로 연결되어야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부가적용)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듣는 것이다. 진리를 알아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과 기도로 대화할 수 있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진리를 알아야 나를 옭아매는 육신의 본능과 죽음의 두려움과 사탄의 주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진리를 알아야 거짓 교리나 사상에 속지 않고, 세상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해 바르게 살 수 있다. 성경은 구원의 관문이자 길인 예수님에 대해 증거 하는 책으로, 영생을 가져다주는 진리 말씀이 들어 있다. 예수님이 성경을 상고하라고 명하셨으므로, 매일 틈나는 대로 성경을 정독해서 읽는 것이 좋다. 한번 거듭났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내 영과 혼과 몸이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이 온전해지기 위해선 끊임없이 더 이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 신앙은 나이야가라 폭포 위 강에서 물을 거슬러 노를 저어 가는 것과 같아서 노를 젓지 않으면 저절로 뒤로 밀려가 떨어진다. 이와 같이 거듭난 성도가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진리를 얻지 못하면 세상의 시류와 육신의 본능과 사탄의 주관에 휩쓸려 참 생명을 잃게 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계속 그리스도 안에 머물지 못하도록 그대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영적 양식을 취하고 힘을 얻는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간직될 때 그 말씀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 물론 “세상의 염려”(막 4:19)로 마음이 산만해지기 쉽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적용 |
영적인 장애물을 제거하거나 극복하려면 어떤 단계와 노력이 필요합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성령을 계속적으로 받아들여 그분에게 봉사하는 일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생애를 의미한다. 교통의 통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계속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포도나무 가지가 산 포도나무에서 수액(樹液)을 계속적으로 빨아올리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께 매달려서 믿음으로 능력과 그분의 품성의 완전하심을 그분에게서 받아야 한다”(시대의 소망, 676).
기도 : 세상의 화려한 사물들에 대하여 눈을 감고 오직 하늘의 사물에 집중하기 원합니다. 세상의 소리를 낮추고 오직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세상을 향해 자라는 곁가지를 잘라내고 오직 그리스도께 붙은 마음의 가지만 남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넷째날(수) 기도
8월 6일
교사강해 4)
“그곳에 도착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시고(누가 22:40) ”그러나 네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네가 회심하게 되면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하시니라.“(누가 22:32). 믿음은 어떠한 시험과 환난도 이겨낼 수 있는 방패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내 의지로 갖는 믿음은 한계가 있으며, 온전한 믿음은 기도로써 간구할 때 성령의 은혜로 채워진다. 기도는 하나님(예수님)과의 대화로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진정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도는 회개와 감사와 간구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성경연구와 함께 기도가 필수적이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연합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셨다. 그분은 기도의 생애를 모본으로 남기셨다. 기도는 중요한 순간마다 그분의 삶을 특징짓는 요소였다. 그분은 침례를 받을 때 기도하셨다. 그분은 자주 일출 전 한적한 곳에서 또는 일몰 후 산에서 기도하셨다. 그분은 종종 열두 사도를 선택할 때처럼 밤새 기도하셨다. 그분은 기도로 나사로를 부활시키셨다. 심지어 십자가도 그분의 기도를 막지 못했다.
만약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마 6:8)신다면, 왜 우리의 필요를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할까?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자아를 비우고 그분께 더욱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마 7:7)라고 약속하셨다. 물론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도로 그분을 감동시킬 필요까지는 없지만 어떤 문제든지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끈질기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요 15:7, 16:24).
주기도의 각 구절은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움을 주는가?(마 6:9~13)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중보자시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라고 우리에게 지시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 예수님은 이 놀라운 약속이 성취되기 위한 조건이 있음을 알려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마 21:22).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용서의 태도가 필요하다(막 11:25). 그리고 항상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마 6:10, 눅 22:42). 응답이 지연된다고 실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눅 18:1).
교훈 : 기도는 하나님과 연합하며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 그분께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부가적용)
우리는 원하는 것을 기도로 간구해도 잘 이루어지질 않을 때에는 곧잘 실망을 하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역사는 때가 있고,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소원을 들어 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내 소원을 들어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끈질기게 간구하며, 말없이 충성하다 보면 어느새 소원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기도로 간구할 땐 육신의 소욕이나 자신의 이익만 내세우지 말고, 형제를 안위를 위하며, 예수님의 뜻 안에서 간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떤 필요가 있어 기도합니까?
예수님은 지상 사역의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에 몰입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구하고 찾으라는 말씀으로 기도하기를 강하게 권유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간절한 필요가 있을 때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기도가 우리의 간절한 필요라는 사실은 잊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 강력하게 연결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가 절실합니다.
| 적용 |
그대가 한때 중단했지만 다시 시작해야 하는 기도 제목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품성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정신을 나타내며 그분의 사업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주의 약속은 조건하에 주신 바 되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되 죄 가운데서 구원하지 않으시고 죄로부터 구원하시며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은 순종으로 그들의 사랑을 나타낼 것이다”(시대의 소망, 668).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수많은 제목으로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지만 가장 소중한 기도의 응답은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함께해 주셨던 것입니다. 응답이 느린 것처럼 보여도 아버지를 믿고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섯째날(목) 매일 자신에 대하여 죽어라
8월 7일
교사강해 5)
사도 바울은 이전의 잘못되고 불완전한 것을 버리기 위해 자신이 매일 죽는다고 기쁨으로 고백했다. 온전한 구원을 위해선 매일 옛사람의 나쁜 습성을 버리고, 진리와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사람을 덧입어야 한다. 거듭남은 마치 하나님의 은혜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동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지기 위해 연단 받은 것과 같다. 구원 받고 나서도 세상의 즐거움을 좇아다닌 다면 어렵게 회복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다시 끊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 향락(pleasure)에 빠져 사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라 했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화려한 선악과를 따 먹어서 영이 죽고 육신으로 주저앉은 것과 같다. 세상 유행이나 육신의 쾌락을 추구함은 사탄과는 가까워지지만 하나님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육신은 편안하고 쉬는 것을 좋아하고, 불편하거나 일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우리는 차를 타더라도 좀 더 크고 편안한 중대형차를 선호하고, 집을 사더라고 넓고 편안한 집을 고른다. 아침 일찍 시계 벨소리에 일어나려면 게으른 육신과 일을 하려는 정신이 사투를 벌인다. 게으른 사람의 나태와 안일은 끝도 없으며,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헛된 망상을 좇아다닌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진정으로 살 수 있다. 침례를 받을 때 우리는 옛 본성에 대해서는 죽고 새로운 삶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가 침례식 물에 잠길 때 죄악의 옛 사람이 영원히 죽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조만간 우리 모두는 자신의 과거 행습과 경향이 여전히 살아서 삶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서 침례식 이후에도 우리의 옛 본성은 반복해서 죽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신앙생활을 십자가와 연관시키셨던 이유이다.
눅 9:23~2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가 심각한 질병이나 불운한 생활 형편 또는 항구적인 장애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것들도 무거운 십자가가 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그 이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매일 자아를 부인한다는 뜻이다. 잠시 한 번만이 아니라 매일 부인해야 하며 삶의 일부만이 아닌 존재 전체를 부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옛날에 십자가형을 당하는 자는 바로 죽지 않았다. 보통 그들은 여러 시간, 종종 여러 날 동안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했다. 우리의 옛 본성도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거기에서 내려와 살려고 몸부림을 친다.
자아를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옛 본성은 끈질기게 살아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기를 원치 않는다. 더욱이 우리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다.
“아무도 자기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비울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해 주시도록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허락할 뿐이다”(실물교훈, 159).
교훈 : 우리의 옛 본성은 거듭난 뒤에도 자꾸 살아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을 예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죄사함을 받으면 우리 안에 있던 더러운 영이 쫓겨나는데 우리 육신은 빈 집과 같아서 성령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쫓겨났던 악령이 더 악한 영들을 데리고 다시 들어와 상태를 이전보다 더 악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믿음만 있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육신의 욕구를 바탕으로 하는 사탄의 주관을 이기지 못하고 보통 사람보다 더 악해지지만 독선과 위선으로 자신의 죄를 가리게 된다. 육신은 천성적으로 게을러서 좀 더 자고, 좀 더 졸고, 좀 더 눕기를 원하나 이는 내게 가난과 실패만 안겨다 준다. 죽었던 내 영을 살려 자라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육신이 게을러지는 이유는 육신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활동할 의욕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아프리카의 사자가 먹이를 실컷 먹은 후에는 나무그늘 밑에서 며칠 동안 잠만 자는 것과 같다. 구원이란 확실한 소망과 목적을 가지고, 성령이 함께 하시면 게으른 육신을 끌고 나갈 수 있다. 사탄과 마귀들은 우리가 온전히 거듭나지 못하도록 교활하고 악랄하게 훼방한다. 그들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 진리와 진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있다. 악령들은 지구상에서 하나님 행세를 하면서 온갖 악을 자행하고 있고, 갖은 음모로 우리를 속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자신의 옛 자아가 살아있다고 느낄 때 그대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심령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될 것이다. ‘주여, 저는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릴 수 없사오니 당신이 제 마음을 취하소서. 제 마음은 당신의 소유물이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하여 그것을 보존할 수 없사오니 당신이 그것을 깨끗이 보존하옵소서. 비록 제가 연약하고 제 자신이 그리스도와 같지 않을지라도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저를 재창조하사 당신의 사랑이 저의 심령 속을 통하여 흐를 수 있는 순결하고 거룩한 분위기 속으로 저를 이끌어 올리소서.’ ”(실물교훈, 159).
| 적용 |
매일 매순간 자아를 부정하려면 어떤 생각과 결심 그리고 노력이 필요할까요?
영감의 교훈 : 매일 해야 할 일 - “이와 같이 자아를 포기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처음 시작할 때에만 할 것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매 발걸음마다 거듭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에만 우리는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다”(실물교훈, 160).
기도 : 예수님, 제 마음속에 일어나는 질투와 시기, 증오와 분노, 욕망과 경쟁, 불평과 원망을 보옵소서. 그 아래에 자아가 살아있음을 고백합니다. 진정으로 내가 살 길은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여섯째날(금)
8월 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43~48 “헌신”, <시대의 소망>, 167~177 “니고데모”를 읽어 보라.
“자신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은 일찍이 싸운 싸움 중 가장 큰 싸움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자신을 바치는 일은 고투(苦鬪)가 요구된다. 그러나 심령이 새로워져서 성결케 되려면 그 심령을 하나님께 순복시켜야 한다”(정로의 계단, 43).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생애가 변화된다. 죄의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한다.… 축복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임한다. 그때에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한다”(시대의 소망, 17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대의 경험에 따르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때에 어떤 일이 생깁니까? 반대로 그분과 관계가 단절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➋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어 기도의 의미에 대해 고민에 빠진 경험이 모두에게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➌ 우리가 매일 부인해야 하는 자아는 과연 무엇이며 그것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대가 자아를 부인하지 않고 그것이 그대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대는 어떤 형태의 삶을 살게 될까요? 그것이 우리 구주의 형상을 닮게 될까요? 그대는 그리스도와 단절된 자아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8월 9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2분
기억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도입)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음이 전제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히9:27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모두가 죽음을 전제로 하여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 그 생존의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사형수와 같이 언젠가 죽음이 올 것이 분명한 존재이다. 예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지 아니할 새로운 몸, 거듭난 몸으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의 나라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 땅의 백성들은 죽음을 맛볼 수밖에 없는데 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지 아니하는 존재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거듭남이란 우리의 현재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죄사함이 거듭남처럼 생각하면서, 죄사함만으로 구원을 마쳤다고 믿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죄사함과 거듭남은 다르다. 죄사함은 내 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깨끗이 용서 받아 흑암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거듭남은 죽었던 내 영이 성령의 도움으로 살아나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연구 범위 : 요 3:1~15, 고후 5:17, 요 15:4~10, 마 6:9~13, 눅 9:23~24.
*교과 토의 시간은 믿음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마음이 끌렸지만, 드러내 놓고 그분을 뵙지는 못했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교사로 인정하며 그분께 공손히 인사했다. 구주는 이런 정중한 인사 뒤에 가려진 진리를 찾는 심령을 아셨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는 이론적 지식보다는 영적인 거듭남 즉 중생이 훨씬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는 이런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자신의 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철저한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 같은 극단적인 변화가 필요하단 말인가?
예수님은 영적 변화란 성령이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일이라고 차근차근 설명하셨다. 우리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그 결과를 감지할 수는 있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즉 회심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고 변화시키셨는지 항상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점점 더 자신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매일 부단히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이 신자의 성장과 발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심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우리의 영적 성장을 고무시키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에 만족한다.
➌ 행하기 :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대한 지식과 지혜와 이해 속에서 성장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밭의 잡초나 몸의 잔병을 뿌리 뽑기 정말 어려웠던 경험이 있으면 나눠 봅시다.
❷ 옛 자아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❸ 왜 우리는 매일 말씀과 기도의 생활을 해야 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❹ 그대의 느낌에 다른 신자들이 거듭나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통해 그대는 어떤 확신을 갖게 됩니까?
B. ❶ 썩은 과일이나 채소를 성한 것들과 함께 보관하다가 모두 버린 경험이 있습니까?
❷ 왜 거듭나지 않은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까?
❸ 날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❹ 함께 성장하는 안교소그룹이 되기 위해 어떻게 서로에게 힘과 의지가 될 수 있을까요?
결론 : 신자의 성장은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 그리고 양육하는 교회 분위기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이런 조건이 갖춰지는 곳은 어디든지 선교적 성장을 통해 개인의 성장이 증진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일대일 관계를 점검합니다.
❷ 새 신자나 구도자가 그들의 친구를 어떻게 소그룹으로 초청해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다시 태어남
8월 3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교사강해 1)
우리는 거듭남에 대해 많은 경우에 죄사함으로 인한 도덕적인 변화만을 생각하기 쉽다. 니고데모는 도덕적으로 매우 훌륭한 사람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충격적인 말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모든 인간은 죽음이 당연한 귀결점이다. 이 죽음에서 아무도 우리를 해방시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해방시켜줄 경험이 필요한데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원리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은 무엇일까? 물, 곧 침례가 어떻게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주는 관문이 될 것인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마3:16-17절에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인간은 무덤에 내려가면 하늘이 닫히게 되는 존재다. 그런데 물에서 예수께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다고 말씀하고 있다. 침례라는 사건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물속에 장사지내고 물 바깥으로 나올 때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는 중생 곧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새로 태어나는 경험이다. 죽어야 할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놓으신 구원의 표상인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거듭남을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가? 고전 15:45절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존재였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게 되자 성령께서는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인치는 성령이 함께 하셔야 한다. 엡1:13-14절에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성령의 임재는 곧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사건인 것이다.
어떤 열성적인 신자가 한 정치인을 만나 물었다. “의원님은 거듭나셨습니까?” 사적인 질문에 짜증이 난 그는 “한 번 태어났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는 한 번만 태어난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고려한다면 한 번 태어난 것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요 3:1~15에 나오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읽어 보라. 예수님은 거듭남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셨는가?
물론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교사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심령이 필요하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 기꺼이 그것을 창조하시려고 한다는 구약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다(시 51:10, 겔 36:26).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하면서 그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그 대화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난다. 니고데모의 대답은 없다. 그는 아마도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성령이 잠잠히 그의 안에서 일하셨고 3년 후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준비가 되었다.
거듭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첫 번째 삶이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충분함을 말해준다. 두 번째 탄생은 이중적이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 니고데모는 침례 요한의 사역을 비춰보고 물로 거듭나는 것이 물로 침례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쉽게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었다.
교훈 : 첫 번째 탄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으로, 성령으로 나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물'은 사람이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를 말하며, 곧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던 침례도 십자가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죽었던 사람이 성령의 힘으로 무덤 속에서 살아나는 것을 말하며, 곧 '생명'을 의미한다. 로마서 6:4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골로새서 2:12에 “너희가 침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도 그와 함께 살아났느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이 침례를 받아 물 속에 잠길 때 내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인도자에 의해 물속에서 꺼내질 때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서 일으켜져 성령으로 잉태된 새사람, 곧 중생한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다. 즉, 죄에 물든 나의 옛사람(육적인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믿음으로 연합하여 죽고,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듯이 죽었던 내 영이 성령의 도움으로 살아나 새사람(영적인 사람), 곧 중생한 사람이 되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무엇을 계기로 거듭남의 삶을 선택하였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육체적 탄생과 영적 탄생 사이에는 비슷한 점들이 있다. 둘 다 삶의 출발점이 된다. 둘 다 우리 스스로 일어나게 할 수 없고 우리를 위해 일어날 뿐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태어날지 말지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적인 거듭남은 선택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안에서 새로운 영적 자아를 창조해 주시도록 성령께 자신을 자발적으로 맡기기로 결심한 자들에게만 거듭남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비록 우리를 변화시키기 바라시지만 강제로 우리를 변화시키지는 않으신다.
| 적용 |
그대의 마음은 지금 어떤 방향으로 거듭나고(변하고)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종교 -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종교만이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종교이다. 그분을 바로 섬기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방심하지 않도록 인도할 것이다. 이 거듭남이 마음을 정화시키고 정신을 새롭게 할 것이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분의 모든 요구에 즐겨 순종하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참된 예배이다”(증언보감 3권, 356).
기도 : 주님, 죄 짓고 죽을 수밖에 없는 저를 이 땅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이 생명 속에서 저의 생각, 감정, 취향, 목적, 관계가 모두 거듭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
8월 4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교사강해 2)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하였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거듭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고 했다. 온전히 거듭나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내 육신의 본능과 사탄의 주관과 싸워 이겨야 되고, 내 영을 예수님의 형상을 이룰 때까지 성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거듭남은 '영적 출생'(중생)뿐만이 아니라 '영적 성장'(성화)과 '영적 완성'(영화)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치 갓난아기가 태어나도 잘 먹이고 돌보지 않으면 병이 나듯이 거듭남을 쉽게 생각하고 자만하는 것은 좋지 않다.
거듭남은 오직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가능하다. 예수님은 그리스어 ‘프뉴마’가 ‘영’과 ‘바람’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사실을 활용하여 회심의 과정을 설명하셨다(요 3:8). 바람이 불어도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불고 어디서 멈추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의 힘은 인간의 통제력 밖에 있다. 우리는 단지 그것에 반응하여 그것을 막든지 아니면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 힘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끊임없이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하신다. 아무도 우리를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위대한 능력을 조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령께 저항하든지 굴복할 뿐이다. 우리가 성령의 감화에 자신을 굴복시킬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신다.
우리가 중생을 경험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있다. 성령의 사역은 보이지 않지만 그 결과는 눈에 보인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심령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일으키는 내적 변화는 언제나 외적 증거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새 삶은 몇 가지 외적인 개혁으로 보완한 삶이 아니다. 거듭남이란 옛 인생의 수정이나 개선이 아니라 완전한 변화를 의미한다.
다음의 성경절에 따르면 우리가 새로 날 때에 우리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딛 3:5~7, 고후 5:17, 갈 6:1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새로운 생각과 감정과 동기를 심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고 생각을 변화시키며 모든 세속적 욕망을 정복하고 우리를 하늘의 향기로운 평화로 채우신다.
교훈 : 성령의 일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증거로 우리의 삶에 나타나며 성령으로 거듭난 인생의 목적은 부분적인 개혁이 아닌 완전한 변화이다.
부가적용)
거듭났다는 건 죽었던 내 영이 살아나 내 육신을 주관하고, 죄와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감동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예수님의 사랑과 동행을 느낄 수 있는 상태이다. 사도 베드로는 거듭나기 전에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의 앞길을 가로 막고, 두려운 마음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오순절 성령으로 거듭난 다음에는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였고, 앉은뱅이와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웠으며, 죽은 자를 살려 냈고, 기꺼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다.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은 내 안에 있는 '속사람'(영) 안에서 능력으로 우리를 강건하게 하신다. 성령을 받기 위해선 틈나는 대로 성경 읽고 기도하며 찬송을 불러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가운데 거해야 한다. 영이 어리면 육신도 주관하지 못하고, 어린아이가 동네 불량배에게 당하듯 악령에게 계속 당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항상 빛 가운데 있어야 어두움이 침입하지 못하고, 강한 것을 붙들어야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거듭났다는 외적인 증거는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물론 변화가 즉시 일어나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우리는 필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태에서 나온 첫 번째 삶은 결코 하나님께 가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 적용 |
그대 주위의 사람들이 그대의 말과 행동 그리고 태도에서 얼마나 예수님을 느낀다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 보이지 않는 능력 -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그 영향은 분명히 볼 수도 있고 감촉할 수도 있는 바람과 같이 사람의 마음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사람의 마음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사람의 마음 안에 새 생명을 나게 하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 사람을 만들어 낸다”(정로의 계단, 57).
기도 : 아버지, 제 삶의 모든 조각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사하기를 원합니다. 완전한 변화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작은 예수’가 되게 하옵소서.
셋째날(화) 그리스도 안에 거함
8월 5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교사강해 3)
사탄과 마귀는 이 세상의 권세를 잡고 있으며,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하고 있다. 이를 대적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옷를 입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악한 날의 영적 전쟁에 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넘어지지 않고 서 있기 위함이다. 갑옷과 방패 없이 전쟁터에 나갔다가는 적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될 것인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끊임없는 교제와 그분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삶에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내 힘으로는 육신의 강한 본능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믿고 내 안에 모시면 예수님은 세상(죄, 사망, 사탄)과 싸워 이기신 분이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진리)이 나를 죄와 사망의 법(본능)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해 육신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나를 사망으로 이끄는 죄성과 육신의 본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번성하는 영적 삶이란 한결같이 그리스도께 의지할 때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어 이런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로 묘사된다(사 5:1~7, 시 80:8~9, 렘 2:21).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요 15:1)로 제시하시면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제자들에게 자신과 연합하도록 촉구하였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요 15:4~10)
방금 나무에서 분리된 가지는 당분간 살아있지만 곧 시들어 죽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결실을 얻으려면 이러한 연합이 유지되어야 한다. 아침에 가지는 경건의 시간은 필수적이다. 또한 주님과 우리의 교제는 낮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분을 찾고, 그분의 인도를 구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며, 우리를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가장 기만적인 함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신앙 생활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요 15:5)다고 말씀하셨다. 그분 없이 우리는 단 하나의 유혹도 거부하지 못하며, 단 하나의 죄도 이기지 못할 뿐 아니라 그분의 형상을 따라 품성을 발전시키지도 못한다. 영적으로 새로운 삶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
교훈 :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 지속적으로 연결되어야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부가적용)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듣는 것이다. 진리를 알아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과 기도로 대화할 수 있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진리를 알아야 나를 옭아매는 육신의 본능과 죽음의 두려움과 사탄의 주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진리를 알아야 거짓 교리나 사상에 속지 않고, 세상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해 바르게 살 수 있다. 성경은 구원의 관문이자 길인 예수님에 대해 증거 하는 책으로, 영생을 가져다주는 진리 말씀이 들어 있다. 예수님이 성경을 상고하라고 명하셨으므로, 매일 틈나는 대로 성경을 정독해서 읽는 것이 좋다. 한번 거듭났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내 영과 혼과 몸이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이 온전해지기 위해선 끊임없이 더 이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 신앙은 나이야가라 폭포 위 강에서 물을 거슬러 노를 저어 가는 것과 같아서 노를 젓지 않으면 저절로 뒤로 밀려가 떨어진다. 이와 같이 거듭난 성도가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진리를 얻지 못하면 세상의 시류와 육신의 본능과 사탄의 주관에 휩쓸려 참 생명을 잃게 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계속 그리스도 안에 머물지 못하도록 그대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영적 양식을 취하고 힘을 얻는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간직될 때 그 말씀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 물론 “세상의 염려”(막 4:19)로 마음이 산만해지기 쉽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적용 |
영적인 장애물을 제거하거나 극복하려면 어떤 단계와 노력이 필요합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성령을 계속적으로 받아들여 그분에게 봉사하는 일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생애를 의미한다. 교통의 통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계속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포도나무 가지가 산 포도나무에서 수액(樹液)을 계속적으로 빨아올리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께 매달려서 믿음으로 능력과 그분의 품성의 완전하심을 그분에게서 받아야 한다”(시대의 소망, 676).
기도 : 세상의 화려한 사물들에 대하여 눈을 감고 오직 하늘의 사물에 집중하기 원합니다. 세상의 소리를 낮추고 오직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세상을 향해 자라는 곁가지를 잘라내고 오직 그리스도께 붙은 마음의 가지만 남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넷째날(수) 기도
8월 6일
교사강해 4)
“그곳에 도착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시고(누가 22:40) ”그러나 네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네가 회심하게 되면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하시니라.“(누가 22:32). 믿음은 어떠한 시험과 환난도 이겨낼 수 있는 방패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내 의지로 갖는 믿음은 한계가 있으며, 온전한 믿음은 기도로써 간구할 때 성령의 은혜로 채워진다. 기도는 하나님(예수님)과의 대화로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진정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도는 회개와 감사와 간구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성경연구와 함께 기도가 필수적이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연합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셨다. 그분은 기도의 생애를 모본으로 남기셨다. 기도는 중요한 순간마다 그분의 삶을 특징짓는 요소였다. 그분은 침례를 받을 때 기도하셨다. 그분은 자주 일출 전 한적한 곳에서 또는 일몰 후 산에서 기도하셨다. 그분은 종종 열두 사도를 선택할 때처럼 밤새 기도하셨다. 그분은 기도로 나사로를 부활시키셨다. 심지어 십자가도 그분의 기도를 막지 못했다.
만약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마 6:8)신다면, 왜 우리의 필요를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할까?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자아를 비우고 그분께 더욱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마 7:7)라고 약속하셨다. 물론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도로 그분을 감동시킬 필요까지는 없지만 어떤 문제든지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끈질기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요 15:7, 16:24).
주기도의 각 구절은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움을 주는가?(마 6:9~13)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중보자시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라고 우리에게 지시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 예수님은 이 놀라운 약속이 성취되기 위한 조건이 있음을 알려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마 21:22).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용서의 태도가 필요하다(막 11:25). 그리고 항상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마 6:10, 눅 22:42). 응답이 지연된다고 실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눅 18:1).
교훈 : 기도는 하나님과 연합하며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 그분께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부가적용)
우리는 원하는 것을 기도로 간구해도 잘 이루어지질 않을 때에는 곧잘 실망을 하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역사는 때가 있고,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소원을 들어 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내 소원을 들어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끈질기게 간구하며, 말없이 충성하다 보면 어느새 소원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기도로 간구할 땐 육신의 소욕이나 자신의 이익만 내세우지 말고, 형제를 안위를 위하며, 예수님의 뜻 안에서 간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떤 필요가 있어 기도합니까?
예수님은 지상 사역의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에 몰입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구하고 찾으라는 말씀으로 기도하기를 강하게 권유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간절한 필요가 있을 때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기도가 우리의 간절한 필요라는 사실은 잊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 강력하게 연결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가 절실합니다.
| 적용 |
그대가 한때 중단했지만 다시 시작해야 하는 기도 제목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품성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정신을 나타내며 그분의 사업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주의 약속은 조건하에 주신 바 되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되 죄 가운데서 구원하지 않으시고 죄로부터 구원하시며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은 순종으로 그들의 사랑을 나타낼 것이다”(시대의 소망, 668).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수많은 제목으로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지만 가장 소중한 기도의 응답은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함께해 주셨던 것입니다. 응답이 느린 것처럼 보여도 아버지를 믿고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섯째날(목) 매일 자신에 대하여 죽어라
8월 7일
교사강해 5)
사도 바울은 이전의 잘못되고 불완전한 것을 버리기 위해 자신이 매일 죽는다고 기쁨으로 고백했다. 온전한 구원을 위해선 매일 옛사람의 나쁜 습성을 버리고, 진리와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사람을 덧입어야 한다. 거듭남은 마치 하나님의 은혜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동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지기 위해 연단 받은 것과 같다. 구원 받고 나서도 세상의 즐거움을 좇아다닌 다면 어렵게 회복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다시 끊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 향락(pleasure)에 빠져 사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라 했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화려한 선악과를 따 먹어서 영이 죽고 육신으로 주저앉은 것과 같다. 세상 유행이나 육신의 쾌락을 추구함은 사탄과는 가까워지지만 하나님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육신은 편안하고 쉬는 것을 좋아하고, 불편하거나 일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우리는 차를 타더라도 좀 더 크고 편안한 중대형차를 선호하고, 집을 사더라고 넓고 편안한 집을 고른다. 아침 일찍 시계 벨소리에 일어나려면 게으른 육신과 일을 하려는 정신이 사투를 벌인다. 게으른 사람의 나태와 안일은 끝도 없으며,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헛된 망상을 좇아다닌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진정으로 살 수 있다. 침례를 받을 때 우리는 옛 본성에 대해서는 죽고 새로운 삶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가 침례식 물에 잠길 때 죄악의 옛 사람이 영원히 죽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조만간 우리 모두는 자신의 과거 행습과 경향이 여전히 살아서 삶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서 침례식 이후에도 우리의 옛 본성은 반복해서 죽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신앙생활을 십자가와 연관시키셨던 이유이다.
눅 9:23~2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가 심각한 질병이나 불운한 생활 형편 또는 항구적인 장애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것들도 무거운 십자가가 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그 이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매일 자아를 부인한다는 뜻이다. 잠시 한 번만이 아니라 매일 부인해야 하며 삶의 일부만이 아닌 존재 전체를 부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옛날에 십자가형을 당하는 자는 바로 죽지 않았다. 보통 그들은 여러 시간, 종종 여러 날 동안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했다. 우리의 옛 본성도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거기에서 내려와 살려고 몸부림을 친다.
자아를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옛 본성은 끈질기게 살아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기를 원치 않는다. 더욱이 우리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다.
“아무도 자기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비울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해 주시도록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허락할 뿐이다”(실물교훈, 159).
교훈 : 우리의 옛 본성은 거듭난 뒤에도 자꾸 살아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을 예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죄사함을 받으면 우리 안에 있던 더러운 영이 쫓겨나는데 우리 육신은 빈 집과 같아서 성령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쫓겨났던 악령이 더 악한 영들을 데리고 다시 들어와 상태를 이전보다 더 악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믿음만 있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육신의 욕구를 바탕으로 하는 사탄의 주관을 이기지 못하고 보통 사람보다 더 악해지지만 독선과 위선으로 자신의 죄를 가리게 된다. 육신은 천성적으로 게을러서 좀 더 자고, 좀 더 졸고, 좀 더 눕기를 원하나 이는 내게 가난과 실패만 안겨다 준다. 죽었던 내 영을 살려 자라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육신이 게을러지는 이유는 육신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활동할 의욕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아프리카의 사자가 먹이를 실컷 먹은 후에는 나무그늘 밑에서 며칠 동안 잠만 자는 것과 같다. 구원이란 확실한 소망과 목적을 가지고, 성령이 함께 하시면 게으른 육신을 끌고 나갈 수 있다. 사탄과 마귀들은 우리가 온전히 거듭나지 못하도록 교활하고 악랄하게 훼방한다. 그들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 진리와 진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있다. 악령들은 지구상에서 하나님 행세를 하면서 온갖 악을 자행하고 있고, 갖은 음모로 우리를 속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자신의 옛 자아가 살아있다고 느낄 때 그대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심령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될 것이다. ‘주여, 저는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릴 수 없사오니 당신이 제 마음을 취하소서. 제 마음은 당신의 소유물이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하여 그것을 보존할 수 없사오니 당신이 그것을 깨끗이 보존하옵소서. 비록 제가 연약하고 제 자신이 그리스도와 같지 않을지라도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저를 재창조하사 당신의 사랑이 저의 심령 속을 통하여 흐를 수 있는 순결하고 거룩한 분위기 속으로 저를 이끌어 올리소서.’ ”(실물교훈, 159).
| 적용 |
매일 매순간 자아를 부정하려면 어떤 생각과 결심 그리고 노력이 필요할까요?
영감의 교훈 : 매일 해야 할 일 - “이와 같이 자아를 포기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처음 시작할 때에만 할 것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매 발걸음마다 거듭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에만 우리는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다”(실물교훈, 160).
기도 : 예수님, 제 마음속에 일어나는 질투와 시기, 증오와 분노, 욕망과 경쟁, 불평과 원망을 보옵소서. 그 아래에 자아가 살아있음을 고백합니다. 진정으로 내가 살 길은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여섯째날(금)
8월 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43~48 “헌신”, <시대의 소망>, 167~177 “니고데모”를 읽어 보라.
“자신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은 일찍이 싸운 싸움 중 가장 큰 싸움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자신을 바치는 일은 고투(苦鬪)가 요구된다. 그러나 심령이 새로워져서 성결케 되려면 그 심령을 하나님께 순복시켜야 한다”(정로의 계단, 43).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생애가 변화된다. 죄의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한다.… 축복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임한다. 그때에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한다”(시대의 소망, 17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대의 경험에 따르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때에 어떤 일이 생깁니까? 반대로 그분과 관계가 단절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➋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어 기도의 의미에 대해 고민에 빠진 경험이 모두에게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➌ 우리가 매일 부인해야 하는 자아는 과연 무엇이며 그것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대가 자아를 부인하지 않고 그것이 그대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대는 어떤 형태의 삶을 살게 될까요? 그것이 우리 구주의 형상을 닮게 될까요? 그대는 그리스도와 단절된 자아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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