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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감(질문과 대답과부가설명)0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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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8-01 12:39 조회8,673회 댓글0건

본문

8월 9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2분

기억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연구 범위 : 요 3:1~15, 고후 5:17, 요 15:4~10, 마 6:9~13, 눅 9:23~24.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마음이 끌렸지만, 드러내 놓고 그분을 뵙지는 못했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교사로 인정하며 그분께 공손히 인사했다. 구주는 이런 정중한 인사 뒤에 가려진 진리를 찾는 심령을 아셨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는 이론적 지식보다는 영적인 거듭남 즉 중생이 훨씬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는 이런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자신의 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철저한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 같은 극단적인 변화가 필요하단 말인가?
예수님은 영적 변화란 성령이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일이라고 차근차근 설명하셨다. 우리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그 결과를 감지할 수는 있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즉 회심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고 변화시키셨는지 항상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점점 더 자신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매일 부단히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이 신자의 성장과 발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심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우리의 영적 성장을 고무시키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에 만족한다.
➌ 행하기 :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대한 지식과 지혜와 이해 속에서 성장한다.

A.
❷ 옛 자아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생활해주는 사람이다.(갈2:20)
❸ 왜 우리는 매일 말씀과 기도의 생활을 해야 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서 물과 영양을 받는다. 말씀과 기도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영양을 받는 길이다.
❹ 그대의 느낌에 다른 신자들이 거듭나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통해 그대는 어떤 확신을 갖게 됩니까?
※ 성경말씀이 생명이 되어 그들의 삶을 이끄는 것을 볼 때 거듭난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누구든지 그런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굴복할 때 그렇게 될 것이다.

B.
❷ 왜 거듭나지 않은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까?
※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❸ 날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 말씀과 기도로 그리스도와 연결된 기능을 누려야 한다.

결론 : 신자의 성장은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 그리고 양육하는 교회 분위기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이런 조건이 갖춰지는 곳은 어디든지 선교적 성장을 통해 개인의 성장이 증진됩니다.


첫째날(일) 다시 태어남
8월 3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어떤 열성적인 신자가 한 정치인을 만나 물었다. “의원님은 거듭나셨습니까?” 사적인 질문에 짜증이 난 그는 “한 번 태어났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는 한 번만 태어난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고려한다면 한 번 태어난 것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1. 요 3:1~15에 나오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읽어 보라. 예수님은 거듭남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셨는가?
[요1:1~15]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답: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땅의 일이 아니고 하늘의 일이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예수께서 들려야 한다고 하셨다.

물론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교사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심령이 필요하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 기꺼이 그것을 창조하시려고 한다는 구약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다(시 51:10, 겔 36:26).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하면서 그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그 대화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난다. 니고데모의 대답은 없다. 그는 아마도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성령이 잠잠히 그의 안에서 일하셨고 3년 후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준비가 되었다.
거듭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첫 번째 삶이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충분함을 말해준다. 두 번째 탄생은 이중적이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 니고데모는 침례 요한의 사역을 비춰보고 물로 거듭나는 것이 물로 침례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쉽게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었다.
육체적 탄생과 영적 탄생 사이에는 비슷한 점들이 있다. 둘 다 삶의 출발점이 된다. 둘 다 우리 스스로 일어나게 할 수 없고 우리를 위해 일어날 뿐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태어날지 말지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적인 거듭남은 선택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안에서 새로운 영적 자아를 창조해 주시도록 성령께 자신을 자발적으로 맡기기로 결심한 자들에게만 거듭남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비록 우리를 변화시키기 바라시지만 강제로 우리를 변화시키지는 않으신다.

<부가설명> 거듭날는지 아니할는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날 수 있도록 모든 조처를 취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육체적 출생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표현상으로 말하자면 부모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부모의 선택도 아니다. 역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처럼 거듭남도 나의 선택이 이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거듭날 수 있는 조처를 취해두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육체로 나는 것이나 거듭나는 것이나 태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육체로 태어나는 것을 성경은 땅에서 났다고 하고 거듭나는 것을 하늘에서 났다고 한다.(고전15:47~50) 왜 거듭나야 하는가?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목에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세계에는 없는 자이다. 사람은 출생하기 전에는 없는 자인 것과 같다. 없게 된 그것을 다시 있도록 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고후5:17) 우리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만 산 자의 하나님의 나라 곧 산 자의 땅에 출생하는 것이다. 그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거기가 참으로 고향이기 때문이다.

교훈 : 첫 번째 탄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둘째날(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
8월 4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거듭남은 오직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가능하다. 예수님은 그리스어 ‘프뉴마’가 ‘영’과 ‘바람’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사실을 활용하여 회심의 과정을 설명하셨다(요 3:8). 바람이 불어도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불고 어디서 멈추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의 힘은 인간의 통제력 밖에 있다. 우리는 단지 그것에 반응하여 그것을 막든지 아니면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 힘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끊임없이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하신다. 아무도 우리를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위대한 능력을 조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령께 저항하든지 굴복할 뿐이다. 우리가 성령의 감화에 자신을 굴복시킬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신다.
우리가 중생을 경험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있다. 성령의 사역은 보이지 않지만 그 결과는 눈에 보인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심령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일으키는 내적 변화는 언제나 외적 증거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새 삶은 몇 가지 외적인 개혁으로 보완한 삶이 아니다. 거듭남이란 옛 인생의 수정이나 개선이 아니라 완전한 변화를 의미한다.

1. 다음의 성경절에 따르면 우리가 새로 날 때에 우리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딛 3:5~7, 고후 5:17, 갈 6:15)
[딛3:5~7]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답: 의롭다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며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새로운 생각과 감정과 동기를 심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고 생각을 변화시키며 모든 세속적 욕망을 정복하고 우리를 하늘의 향기로운 평화로 채우신다.
론 변화가 즉시 일어나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우리는 필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태에서 나온 첫 번째 삶은 결코 하나님께 가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려면 태어나야 한다.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에 태어나는 것을 거듭나는 것이라고 한다. 요3:3에 거듭난다는 말은 “아노덴 게나오”인데 “위로부터 나는”이라는 말이다. 요3:31에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는 말에서 “위로부터”가 “아노덴”이다. 31절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이고 3절은 “위로부터 태어나는”이다.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에 태어나는데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를 따라 태어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요1:12,13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는 뜻이다. 즉 아담에게서 받은 것은 땅에서 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데,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태어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존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생명의 본질이 다른 것이다. 거듭난 생명이 거듭난 사람을 거듭난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삶은 거듭난 생명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삶의 모습이 땅에서 난 사람과 같다면 그는 거듭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고전15:45~50 참고)

교훈 : 성령의 일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증거로 우리의 삶에 나타나며 성령으로 거듭난 인생의 목적은 부분적인 개혁이 아닌 완전한 변화이다.


셋째날(화) 그리스도 안에 거함
8월 5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번성하는 영적 삶이란 한결같이 그리스도께 의지할 때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어 이런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로 묘사된다(사 5:1~7, 시 80:8~9, 렘 2:21).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요 15:1)로 제시하시면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제자들에게 자신과 연합하도록 촉구하였다.

1. 포도나무의 비유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요 15:4~10)
[요15:4~10]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답: 가지가 나무에서 분리되면 죽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떨어져나가면 죽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결코 예수님을 한 순간이라고 떠나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다.

방금 나무에서 분리된 가지는 당분간 살아있지만 곧 시들어 죽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결실을 얻으려면 이러한 연합이 유지되어야 한다. 아침에 가지는 경건의 시간은 필수적이다. 또한 주님과 우리의 교제는 낮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분을 찾고, 그분의 인도를 구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며, 우리를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가장 기만적인 함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신앙생활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요 15:5)다고 말씀하셨다. 그분 없이 우리는 단 하나의 유혹도 거부하지 못하며, 단 하나의 죄도 이기지 못할 뿐 아니라 그분의 형상을 따라 품성을 발전시키지도 못한다. 영적으로 새로운 삶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영적 양식을 취하고 힘을 얻는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간직될 때 그 말씀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 물론 “세상의 염려”(막 4:19)로 마음이 산만해지기 쉽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부가설명> 포도나무 비유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안정된 상태로 염려 없이 이루어질 것을 보증하는 말씀인 것 같아 보인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요 우리가 그 가지이면 열매를 맺는 것은 저절로 될 것이 아니겠는가.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나가지 않으면 되는데, 사실 포도나무 가지는 스스로 떨어질 수 없다. 가지를 잘라내는 어떤 자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부탁은 잘라내려는 자를 용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사단의 공격이요 세상의 유혹이요 욕심에 사로잡히는 것 등등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서 사단의 이런 공격들을 용납하지 않으면 나무에서 떨어져나가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예수님께 붙어서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계속 받으면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것을 관리하시는 분은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요15:1) 열매는 생명의 작용으로 맺는 것이지 가지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시려고 하신다.(요10:10) 우리는 분명히 이 생명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교훈 :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 지속적으로 연결되어야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넷째날(수) 기도
8월 6일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성경연구와 함께 기도가 필수적이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연합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셨다. 그분은 기도의 생애를 모본으로 남기셨다. 기도는 중요한 순간마다 그분의 삶을 특징짓는 요소였다. 그분은 침례를 받을 때 기도하셨다. 그분은 자주 일출 전 한적한 곳에서 또는 일몰 후 산에서 기도하셨다. 그분은 종종 열두 사도를 선택할 때처럼 밤새 기도하셨다. 그분은 기도로 나사로를 부활시키셨다. 심지어 십자가도 그분의 기도를 막지 못했다.
만약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마 6:8)신다면, 왜 우리의 필요를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할까?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자아를 비우고 그분께 더욱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마 7:7)라고 약속하셨다. 물론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도로 그분을 감동시킬 필요까지는 없지만 어떤 문제든지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끈질기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요 15:7, 16:24).

1. 주기도의 각 구절은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움을 주는가?(마 6:9~13)
[마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답: 주기도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며 일상에 필요한 것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늘 깨우쳐주는 내용이다. 이런 공급으로 우리는 생활하고 성장하게 된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중보자시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라고 우리에게 지시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 예수님은 이 놀라운 약속이 성취되기 위한 조건이 있음을 알려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마 21:22).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용서의 태도가 필요하다(막 11:25). 그리고 항상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마 6:10, 눅 22:42). 응답이 지연된다고 실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눅 18:1).

<부가설명>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감동을 받아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과 끊어지면 더 이상 성도가 아니다. 성도는 기도로 자기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진정한 필요를 깨닫게 되고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감격도 맛보게 된다. 자기가 기도한다는 것보다 기도할 대상이 있다는 사실이 벅찬 것이다. 기도는 호흡이기 때문에 결코 멈출 수 없다. 기도를 멈추는 것은 성도의 영적 생명이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호흡이 멈추면 사람은 죽는 것이다. 생활 자체가 기도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호흡하는 것이다.

교훈 : 기도는 하나님과 연합하며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 그분께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다섯째날(목) 매일 자신에 대하여 죽어라
8월 7일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진정으로 살 수 있다. 침례를 받을 때 우리는 옛 본성에 대해서는 죽고 새로운 삶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가 침례식 물에 잠길 때 죄악의 옛 사람이 영원히 죽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조만간 우리 모두는 자신의 과거 행습과 경향이 여전히 살아서 삶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서 침례식 이후에도 우리의 옛 본성은 반복해서 죽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신앙생활을 십자가와 연관시키셨던 이유이다.

1. 눅 9:23~2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눅9:23,2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답: 땅에서 난 사람, 곧 첫 아담으로부터 받은 썩어질 씨로 태어난 육신적인 자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예수 안에서 받은 새 생명으로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가 심각한 질병이나 불운한 생활 형편 또는 항구적인 장애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것들도 무거운 십자가가 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그 이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매일 자아를 부인한다는 뜻이다. 잠시 한 번만이 아니라 매일 부인해야 하며 삶의 일부만이 아닌 존재 전체를 부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옛날에 십자가형을 당하는 자는 바로 죽지 않았다. 보통 그들은 여러 시간, 종종 여러 날 동안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했다. 우리의 옛 본성도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거기에서 내려와 살려고 몸부림을 친다.
자아를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옛 본성은 끈질기게 살아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기를 원치 않는다. 더욱이 우리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다.
“아무도 자기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비울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해 주시도록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허락할 뿐이다”(실물교훈, 159).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심령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될 것이다. ‘주여, 저는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릴 수 없사오니 당신이 제 마음을 취하소서. 제 마음은 당신의 소유물이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하여 그것을 보존할 수 없사오니 당신이 그것을 깨끗이 보존하옵소서. 비록 제가 연약하고 제 자신이 그리스도와 같지 않을지라도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저를 재창조하사 당신의 사랑이 저의 심령 속을 통하여 흐를 수 있는 순결하고 거룩한 분위기 속으로 저를 이끌어 올리소서.’ ”(실물교훈, 159).

<부가설명> 우리교회에서는 옛 본성이라는 말을 잘 사용한다. 이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표현을 내 스스로 음미해보면 사람이 살아있는 존재인데 그 살아있는 상태의 본성이 타락한 본성으로 살아있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이렇게 표현하는 핵심은 옛 본성, 또는 타락한 본성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성경을 읽고 깨달은 것은 아담의 후손들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고 죽은 자라고 단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라고 하였고,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8:22)고 하셔서 이 세상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옛 본성, 또는 타락한 본성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본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담 안에서 썩어질 씨로(벧전1:23) 태어난 옛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썩어질 씨로 태어났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썩어져가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두 썩어져가는 것이다. 그것을 옛 사람이라고 하였다.(엡4:22) 그리스도인 안에 아직도 이 썩어져가는 구습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친다. 그것이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다.(롬7:23)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거듭난 생명의 법으로 이 죄의 법을 이긴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롬8:2) 옛 본성은 살아있는 사람의 어떤 성질이 아니고 죽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썩어져가는 성질임을 깨닫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가? 그들을 죽은 자에서 산 자가 되게 하는 것이 구원이요 예수께서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의 뜻이다. 이 생명을 얻으면 이 생명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고 고백한 것이다.(갈2:20)

교훈 : 우리의 옛 본성은 거듭난 뒤에도 자꾸 살아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을 예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


여섯째날(금)
8월 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43~48 “헌신”, <시대의 소망>, 167~177 “니고데모”를 읽어 보라.

“자신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은 일찍이 싸운 싸움 중 가장 큰 싸움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자신을 바치는 일은 고투(苦鬪)가 요구된다. 그러나 심령이 새로워져서 성결케 되려면 그 심령을 하나님께 순복시켜야 한다”(정로의 계단, 43).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생애가 변화된다. 죄의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한다.… 축복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임한다. 그때에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한다”(시대의 소망, 17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대의 경험에 따르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때에 어떤 일이 생깁니까? 반대로 그분과 관계가 단절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고 그것은 말씀이 자기의 삶을 완전히 운전한다는 것을 뜻한다. 단절이 되는 것은 말씀의 진정한 의미와 상관없이 생활하는 것이다.

➋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어 기도의 의미에 대해 고민에 빠진 경험이 모두에게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 자신이 기도한 그 사실이 진정으로 합당한 기도였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합당하다고 여기는 상태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➌ 우리가 매일 부인해야 하는 자아는 과연 무엇이며 그것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대가 자아를 부인하지 않고 그것이 그대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대는 어떤 형태의 삶을 살게 될까요? 그것이 우리 구주의 형상을 닮게 될까요? 그대는 그리스도와 단절된 자아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 부인해야 하는 자아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아, 곡 썩어질 씨로 태어나서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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