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구원을 받는 법(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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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07-26 08:07 조회5,110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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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5과 구원을 받는 법
8월 2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0분
기억절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도입)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이 ‘놋뱀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주신 말씀이다. 오늘 과정공부 제목이 구원을 받는 법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구원을 받으려는 자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은 뱀 때문이다. 이 뱀은 곧 사단을 예표하고 있고 또한 이 뱀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가지게 된 인간의 형편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영적인 본성과 죄에 대하여 기울어진 그릇된 인간의 심성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요 8:41)라고 말씀하셨다. 이곳에서 말한 ‘너희 아비’란 사단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향하여 대하여 독사의 자식들(마 12:34, 눅 3:7)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어두움의 권세(눅 22:53)에 속한 자들이라는 표현과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 8:4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적 부모의 특성을 닮은 유전적인 계승을 통해 닮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마귀의 품성을 닮은 자로 태어난 것이다. 원죄의 문제는 죄의 유무를 떠나 인간이 출생할 때부터 죄악 세상에 태어났고 이미 그와 같은 사단이 지배하는 이 죄악 세상의 죄의 영향력 아래 출생한 것이 문제가 되었고 인생 자체가 출생하면서 사단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가지게 된 심성의 근본적인 욕심과 진리에 서지 못한 인간의 모습, 그 상태가 이미 죄로 오염되어 있어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는 문제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원죄아래 태어났다 함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마귀의 자녀요 사단의 자녀로 그에게 속하여 태어났다는 그 진정한 모습을 뜻한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이 마귀의 손에서 구원해 주지 않으시면 이미 사단의 손에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곳 기억절에 기록된 이 말씀 곧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고 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연구 범위 : 눅 5:27~32, 눅 13:1~5, 마 22:2~14, 슥 3:1~5, 요 8:30~31, 눅 14:25~27.
*안교반과 소그룹을 일원화시키면 가장 좋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뱀에게 물렸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서 뱀에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보고 목숨을 건지게 하셨다.
구리뱀에 치료의 효능이 있었는가? 아니다. 치료의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구리뱀을 바라봄으로 그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희망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원하셨다. 그분은 죽음의 상징을 생명의 상징으로 변화시켰다. 그 구리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죄를 짊어지셨던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우리도 믿음으로 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옛 뱀 사탄에게 물린 치명적인 상처를 고칠 치유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감출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이다. 그런데 그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되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구원에 필요한 단순하고 실제적인 단계에 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개인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과정을 배운다.
➋ 느끼기 :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죄의 올무가 깨졌음을 기뻐한다.
➌ 행하기 : 이런 놀라운 소식을 친구와 친지, 동료 그리고 낯선 사람들에게도 전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질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대는 건강 검진에 적극적입니까? 아니면 소극적입니까?
❷ 도덕적으로 별 문제가 없는 사람과 부도덕한 과거를 괴로워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복음을 더 잘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❸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용서를 받은 뒤에는 어떤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❹ 아직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B. ❶ 최근에 그대에게 용서를 빌었던 사람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❷ 진정한 회개에는 어떤 특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❸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과 제자로서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은 어떻게 다릅니까?
❹ 구원받은 제자로서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고쳐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결론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가는 과정은 단순하며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깨닫고 죄를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유일한 세상의 구주께서는 우리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새 신자 또는 구도자와 기존 신자 사이에 일대일 관계를 세웁니다.
❷ 기존 신자가 새 신자 또는 구도자를 어떻게 영적으로 지원해야 할지 안내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그대의 필요를 인식하라
7월 27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교사강해 1)
이 땅에는 의인이 없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인간의 영적인 본성과 죄에 대하여 기울어진 그릇된 인간의 심성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요 8:41)라고 말씀하셨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요 8:44)다고 말씀하심으로 모든 인간이 죄의 창시자인 마귀의 자녀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저 하늘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고 한 것처럼 하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들이 사는 곳이지만 이 땅은 의인이 없는 곳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영향력 아래 태어난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이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을 말한다. 마귀의 편에 선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었으나 그가 하나님께 반역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눅 5:27~32을 읽어 보라. 그대가 어느 무리에 속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육체적으로 건강한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 그렇다면 누가 영적으로 정말 건강한 사람일까? 인류 가운데는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시 14:3)다. 스스로 의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롬 3:10). 우리는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착한 일을 행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의롭게 내세울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눅 5:32)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실제로는 의롭지 않으나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언급하고 계셨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다고 믿었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요 9:40~41).
죄로부터의 치유를 얻는 첫 단계는 죄 많은 자신의 상태와 스스로를 치료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눈 멀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진정한 부족을 알 수 있는가? 만약 우리의 죄가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는가?(요 16:8)
우리의 영적 실상을 알게 해 주는 안약은 성령이다. 우리를 위해 다른 일을 행하시기 전에 그분은 먼저 우리의 죄를 지적하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 피할 수 없는 죄의식과 깊은 죄책감을 일으켜서 우리가 구주를 갈망하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만간 성령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도 하실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굳어질 것이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교훈 : 구원을 얻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죄로 말미암은 절망적인 상태를 깨닫는 것이다. 성령은 죄를 지적해서 우리가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신다.
부가적용)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의 실상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인간은 구원의 길이 없다. 마귀의 반역처럼 인간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는 죄인들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17:13)라고 말한다. 여호와는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의 근원이시다. 그러나 바로 우리의 생명의 주를 버리는 자들은 모두 다 수치, 곧 죽음을 당할 것인데 결국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모두 흙에 기록되게 되는데 이는 생수의 근원, 곧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이 사실을 믿지 않고 저버린 모든 자들마다 죽음이라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결국 그 인생의 마지막은 저들이 본래 만들어졌던 그 근원인 흙에 기록하고 말 것이다. 기독교적인 사고에 혁명적인 변화라 할 수 있는 진화론 사상이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에게서 일어나게 되었다. “진화론은 생물학은 물론 종교, 윤리, 도덕의 문제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물리학과 화학의 발전에 따라 물질로 자연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점점 거세지던 시점에 휘두른 논리적인 강타였다. 마귀는 인간의 믿음을 흐리게 만들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존재로 인간을 세뇌시켜 변질시켜 버렸다. 마귀의 자식들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을 주장하는 다윈조차도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눈의 신비롭고 복합적인 구조와 기능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토로했었다. 이것은 “조금씩의 변화를 거쳐 지금의 눈이 되었다는 것보다는 누군가의 ‘큰 설계’에 의한 작품으로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는 말처럼 들린다. 사물로부터 반사된 빛이 수정체를 거쳐 들어와 망막으로 인식세포를 거쳐 신경으로 전환되어서 사물을 인식하게 하고, 이에 따라 반응하게 되는 이 ‘경탄스러운 네트워크’는 ‘진화’보다 ‘창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보는 것이 어울려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한 「생명과학 강의노트」라는 책을 기록한 이우성교수의 고백적 기록을 통해서 보더라고 쉽게 진화론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우성 교수는 “‘창조의 혼’을 무조건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창조의 설계와 함께 하는 진화의 공정’이 다양한 생명체의 존재를 더욱 합당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우연의 산물처럼 그 스스로를 여길 것인가?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달린 매우 중요한 선택의 문제이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죄, 가장 우두머리 죄는 자신의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인 것처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배역이 가장 큰 곧 죽음에 이르러 심판을 받아야 할 죄임을 알아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철저하게 깨닫고 있습니까?
자신에게는 이렇다 할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마도 겉으로 나타난 결과를 기준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면을 살피는 사람은 가증한 거짓과 위선, 들끓는 분노와 욕망, 사악하고 위험한 생각이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자신의 마음을 보고 놀라며 좌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공공연한 죄인은 사함을 받고 기뻐하기 쉬우나, 죄의 동기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자신에게 아무런 가망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 적용 |
그대는 최근 어떤 죄의식 또는 죄책감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까?
영감의 교훈 : 회개를 일으키는 은혜의 성령 - “회개는 용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용서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것은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는 것이다. 통회하는 자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회개를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연약함과 약점들을 잘 알고 계시므로 우리들을 분명히 도우실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53).
기도 : 병든 제 마음을 보옵소서. 상처만 남은 제 삶을 보시옵소서. 이제 제 자신을 포기합니다. 죄의 결과만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저를 건져주시며 받아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회개
7월 28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5).
교사강해 2)
회개가 무엇일까? 회개(悔改)라는 말은 한자어가 의미하는 뜻대로 뉘우치고 고치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인간이 그 행위를 고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에 이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회개란 무엇일까? 우리는 회개의 의미를 도덕적인 우리의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이기에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미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 세상에 속한 자는 모두가 다 마귀의 자녀요 진노의 자녀요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니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죄라는 부모의 죄책을 유전 받은 의미를 떠나 인간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마귀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며 그의 나라에 속하여 사는 마귀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개하여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에 말한 대로 여호와를 떠난 자들이 다시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다.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다. 주를 버렸던 자들, 여호와를 떠났던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이것이 아버지로께로 돌아오는 탕자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가 자꾸 우리의 도덕적 행위의 변화에 그 기초를 두어 회개를 가르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도덕적 수준을 가진 자들이 많아 도덕적인 지탄을 받을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죄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기에는 반드시 회개가 수반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회개의 의미는 세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즉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과거의 죄를 슬퍼하며,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 하나라도 빠지면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유다는 죄를 범했지만 주님을 배신한 죄에 대한 슬픔은 없었다(마 27:3~4). 그는 회개가 아닌 후회의 감정에 휩싸였다. 그의 자백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침례 요한과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마 3:2, 4:17)다고 설교하면서 사역을 시작했던 사실에서 우리는 회개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후에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첫 전도 여행으로 파송하자 그들은 “나가서 회개하라”(막 6:12)
고 전파하였다. 오순절 이후 베드로도 군중들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했다(행 2:38, 3:19).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해 회개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강한 어조를 보라.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별을 주시는가?(눅 13:1~5)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롬 2:4)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의 얼음 덩어리는 작은 조각으로 부서질 수 있지만 부서진 조각은 여전히 얼음이다. 그런데 같은 크기의 얼음 덩어리를 불 옆에 두면 그것은 녹아서 물이 된다. 우리에게 있는 교만의 얼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의 온기에 노출되어야 녹는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사랑의 증거를 곱씹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교훈 : 죄를 깨달은 다음에는 회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진정한 회개는 죄를 시인하고 슬퍼하며 다시는 범죄하지 않으려는 정신을 포함해야 한다.
부가적용)
이 세상에 아무도 그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없고 죄의 영향아래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다만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른 임금 곧 예수”(행 17:7) 그리스도의 전도가 없었다면 모두가 마귀의 자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난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구원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모두가 사단에게 속하여 태어난 것이다. 신자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육욕이나 악한 생각 그리고 본성 가운데 악의 경향들은 이미 둘째 사망을 당하기에 충분한 상태이며 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덕적인 행위의 개선을 통해서는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율법의 지키려는 노력으로는 인간은 의에 이를 수 없다. 회개의 첫 시작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마귀의 자녀였음을 고백하고 또한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우리의 도덕적인 절망적인 상태를 바라보고서 우리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 때에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침례의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우리가 죽고 다시 태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지 우리의 도덕적인 노력과 개선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에 이를 수 없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잘못했어요!” 아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엄마에게 빕니다. 엄마는 끝까지 잘했다고 대들지 않고 ‘잘못했다.’고 말해 주는 아이가 고맙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뭘 잘못했는데?” 엄마는 아이가 혼날까봐 두려워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뉘우치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즉각 회개하는 것이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냥 회개하고 빨리 넘어가려는 심리가 조금이라도 작용한다면 진정한 회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겠다는 굳은 결심을 포함합니다.
| 적용 |
그대가 진실한 마음으로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할 죄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 사랑에 이끌린 회개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실물교훈, 189).
기도 : 아버지, 제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뭔가 잘못된 제 삶에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죄악과 배반의 삶을 내려놓고 눈물로써 새 마음을 받기 원합니다.
셋째날(화) 예수님을 믿으라
7월 29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교사강해 3)
회개하라는 말에 대해서 자꾸만 우리의 도덕적인 모습의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없다. 지금까지 해결 되지 않는 이런 이해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문제점은 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인한다. 이 끝없는 논쟁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이렇게 주장하는 신학자들 모두가 인간이 어떤 노력을 통해 일정한 수준의 도덕적 향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의를 도덕적인 의로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서 이해하는데 따른 결과이다. 그러므로 루터 자신도 그와 같은 도덕적인 의에 대한 부담으로 눌린 적이 있었다. 여기서 신학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이 점에 대하여 그 해답을 풀 수 있는 길은 의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는 길이다. 우리가 가지는 의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진정한 칭의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의 사상 속에서 칭의가 의롭게 간주되는 사건과 의롭게 되는 과정으로 나누어 생각한 이 개념이 기독교의 구원관에 잘못된 사상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의에 대한 이해를 올바로 가지면 그 해답이 나오게 될 것이다. 칭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義)를 이해해야 한다. 의(義)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존재하는 단어이다. 렘 23:6에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했다.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한 이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의이시고 의의 기준이시고 의의 참된 정체가 되신다. 의라는 말이 하나님의 실존과 관계가 있는 말이다. 롬 10:3절에도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다.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의는 도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다. 여호와라 이름 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심은 그 자체가 의의 나타남이다. 이 말은 의에 대한 일차적 개념이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의(義)라고 하는 것이다. 율법보다 그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존재하시고 그의 존재와 함께 의가 존재했는데 바로 그 의 자체가 하나님이시다. 렘 33:15,16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고 말하고 있는 의로운 가지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며 그 의가 바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을 의미하고 있다.
진정한 회개는 예수님을 우리의 유일한 구주로 여기는 믿음을 동반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베푸는 복을 받으려면 자신을 믿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자주 말씀하셨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은 필수적이다. 사탄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를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강구한다(눅 8:12).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뭔가 일어나리라는 모호한 기대감 이상이다. 그것은 정신적 훈련 이상이다.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내용 없는 허울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대상이 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믿는 것뿐 아니라 더욱 누군가를 믿는 것이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알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 이해하며(요 6:69) 그분을 개인적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요 1:12).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셨고 그를 진정으로 믿는 모든 사람이 영생을 누리게 하셨다. 하지만 그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분의 의를 덧입어야 한다.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는 의를 얻고 보증을 얻는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그분이 우리를 부활시키시리라는 위대한 약속을 받는다(요 6:40).
예수님은 죄악의 삶을 살았던 여인에게 보증하셨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48, 50). 이는 무슨 뜻인가?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교훈 :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 믿음은 예수님을 알고 신뢰하며 그분의 죽음을 인정하고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의라는 관념은 죄인에게 있어서 결코 복음이 복된 소식이 아니었다. 그것이 사실에 있어서는 저주 외에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죄악된 인간의 능력에 대해 루터는 점점 더 비관적 견해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절망이었다. 구원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신학적, 순전한 학문적 관심사만은 결코 아니었다. 루터는 자신의 구원이 결려있다고 생각했다. 루터에게 있어서도 역시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물음은 어떻게 자신의 구원을 획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개인적 관심사들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물음이었다.” “루터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를 칭의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했다. 이 행위는 인간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기 전에 그가 해야만 하고 이루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루터는 점차적으로 이것은 점차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의라는 이 구절을 단지 처벌하는 의로 해석할 수 있을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오해한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신학적 용어에 빠져 하나님의 참된 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의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여질 수 있는 용어이며 그분 자신에게만 일컬어 질 수 절대적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의가 존재하지 않으며 의라는 것이 없다. 인간에게 의롭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더 도덕적이라는 것일 뿐이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죄됨을 바라보고 그 스스로의 계발된 양심에 따라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가질 수는 있었으나 그 스스로는 의로울 수가 없으며 의로움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또한 의롭게 되어갈 수도 없다. 절대적인 의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방법은 인간의 도덕적 개선과 인간의 수양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다. 다만 의로우신 하나님에게 속하며 그분의 편에 서게 될 때 그분께서 분여(分與)해 주시는 축복일 뿐이다. 한스 K. 라론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성경적 정의는 신자들 개개인의 이름에 그리스도의 의를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과연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주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의를 입혀주신 이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가 의에 대한 개념을 도덕적이고 사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의는 도덕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라 이름 하신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그 자체가 의의 나타남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도덕적인 것만이 아닌 하나님 자체가 의이시며 의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의를 도덕적인 문제로만 생각하여 도덕적인 의를 덧입혀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여 도덕적으로 부족한 죄인이 그분이 씌어준 의를 소유해 마치 의롭게 된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의롭게 되었다고 간주하시는 칭의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의롭지 못한 인간의 마음에는 내적 갈등이 심화되고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게 되면서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자신은 한없이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의의 종교이다. 한스 K. 라론델이 말한 칭의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입어할 옷이 도덕적인 것 만인지 아니면 생명을 입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오해가 있기 때문에 혼란이 온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와 기타 종교의 다른 점은 도덕적인 가르침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율법을 범한 죄인들이 마치 그 죄를 가리는 행위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기 때문에 혼란이 왔다. 모든 인생은 이것에 대한 해답을 아놀드 V. 왈렌캄프는 “성경이 전하는 기별의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의 이 깨져버린 관계를 복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두는 것’이라고나 칭의,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라고 부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것이고 그분은 의로운 분이시며 우리는 의롭지 못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과 의는 그분께 의존될 때에만 이르러 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롬 6:3)을 강조하고 그분과 합하여진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연합하고 그분 안에 있게 될 때 인간은 도덕적인 개선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의 믿음을 뭐라고 설명하겠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누군가를 치유하실 때 그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막 10:52, 눅 17:19)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에 어떤 치유의 능력을 부여하셨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지 그들을 치유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온전한 신뢰였을 뿐이다. 믿음의 힘은 믿는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 적용 |
그대가 지금 예수님을 믿으므로 이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 믿는다는 것의 의미 -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로 돌아가셨다는 것,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그분 자신의 의를 나누어 주신 것을 완전히 수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의를 요구하고, 그것을 믿는다.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의 의가 된다. 그분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믿음과 행함, 70).
기도 : 주님, 믿음이 없어 제 힘으로 사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을 잘 알지 못함을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내게 손을 내미시는 주님께 고백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넷째날(수) 혼인 잔치 예복
7월 30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마 22:11~12).
교사강해 4)
우리는 위에서 말한 예복이 우리의 부덕한 모습을 덮어준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예복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또한 그 옷, 예복은 우리의 죄를 덮는 흠 없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상징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흠없는 품성이 될 수 있을까? 이곳에 나타난 혼인 잔치의 예복이란 무엇일까? 성경 이야기의 핵심 그 초점은 인간의 벗김과 입힘의 이야기이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 인간은 벌거벗은 상태였다(창 2:25).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저들은 부끄러워하며 저들의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자신의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리었다. 창 2장이나 3장의 사건에서 아담과 하와는 동일하게 벗은 상태이지만 왜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가졌는가? 이것은 그가 벗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인데 왜 벗었다고 여겨졌을까? 본래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었던 옷은 영광의 옷이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광의 옷이 벗겨진 3장 이후에는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롬8:21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했다. 인간을 덮고 있는 피부라는 이 겉옷은 썩어 없어질 옷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광의 자유에 이른다고 했는데 본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 때에 입고 있었던 곧 영광의 옷, 곧 썩지 않을 옷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영광의 옷이란 썩어짐의 반대인 썩지 아니할 옷, 썩지 아니할 예복임이 분명하다. 갈 3:2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서 입게 될 의복 곧 예복이다.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란 바로 하나님의 형상(고후 4:4)인 것이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곧 썩지 아니할 몸, 곧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었다는 것인데 바로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았을 때, 우리는 새생명으로 태어나 그리스도께서 거져 입혀주시는 예복인 하나님의 형상, 곧 흠없는 예복, 하나님과 같은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 앉아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바리새인만큼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에게 기쁨을 드리기보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지 말도록 경고하셨다(마 6: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는가? 혼인 잔치의 비유는 진정한 의의 원천을 찾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마 22:2~14을 읽어 보라. 왕은 왜 모든 하객이 혼인 잔치 예복을 입었는지 확인하려고 했는가?(사 61:10, 슥 3:1~5 참고)
왕은 혼인 잔치 예복을 무료로 제공하였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길가에 다니다가 무작위로 초청을 받았다. 그래서 아마도 결혼식에 적합한 의복이 없을 뿐더러 살 돈도 없었을 것이다. 잔치 초대와 의복은 모두 왕의 선물이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 위한 유일한 요구사항은 두 가지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이후에 모든 인류는 영적으로 헐벗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한 직후에 벗었음을 깨닫고 무화과 잎을 엮어 자신의 몸을 가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편할 뿐 아니라 전혀 쓸모가 없었다(창 3:7).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의는 “더러운 옷”(사 64:6)에 불과하다.
비유에서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의복을 제공하신다. 그분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의복을 만드셔서 그들에게 입히셨다(창 3:21). 그 옷은 죄인을 덮는 그분의 의를 상징한다.
교훈 :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옷을 입는데 그 옷은 우리의 죄를 덮는 흠 없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상징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하늘에서 우리의 썩을 몸을 가진 상태로 죄인인 우리의 죗된 모습을 덮어준 것이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신 의의 옷, 구원의 옷은 썩지 아니할 영광스러운 죽지 아니할 몸으로 바뀐 우리의 몸이 불멸의 몸을 입은 것을 의미한다. 침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 곧 죽지 않을 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우리 주께서 오실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침례를 받고 구원에 이른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자꾸 우리의 시선을 우리의 도덕적인 옷으로 우리의 몸을 가리려 해서는 안된다.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선이 없다. 오직 절대적인 선을 가지신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뿐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이 되셔서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다시 부활하셨다. 인간이 죽지 않을 영원한 그리스도와 같은 옷을 입고 죽지 아니하리라는 보증을 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 예복, 곧 영광의 옷을 입혀주시려고 하신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품성을 가져보려고 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만을 느낄 뿐이고 우리가 걸치고 있는 육신의 겉옷은 날마다 후패해져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양의 보혈로 우리에게 입혀주신 의의 두루마기를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날마다 빨아야 한다.(계 22:14)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우리는 주님이 제공하는 의의 옷을 어떻게 매일 입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교회에 제공하시므로 교회는 “티나 주름 잡힌 것”(엡 5:27)이 없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계 19:8)을 받는다. “이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 곧 믿음으로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실물교훈, 310).
| 적용 |
흠이 없는 품성의 옷으로 그대는 오늘 어떤 품성의 흠을 가리기 원합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신 옷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옷을 하나 준비하셨다. 그것은 그분 자신의 의의 두루마기이며 그분께서는 믿음으로 그 옷을 받아들이는 회개하고 믿는 모든 영혼들에게 그것을 입히실 것이다.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고 말했다.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것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벗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하늘, 378).
기도 : 주님, 저의 누더기 같은 옷 대신 새하얀 옷을 입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옷을 잊고 벌거벗고 다니지 않도록 날마다 주의 의 가운데서 살게 하옵소서.
다섯째날(목) 예수님을 따르라
7월 31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30~31).
교사강해 5)
칭의에 대한 이해를 ‘죄사함과 의의 전가’로 이해되고 있는 루터나 그 밖의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의 이해의 한계로 말미암아 칭의의 이해가 제한되어 왔다. 칭의에 대한 문제점은 인간을 살아있는 도덕적 인간으로 이해하면서 현재 인간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충족시킬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의를 그리스도를 믿는 과정적인 삶을 통해 도달하여 가는 과정으로서 칭의를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멜랑히톤과 칼빈 또한 어거스틴과 젊은 루터가 하나의 단위로 취급한 과정의 두 가지 측면을 구분했다. 어거스틴도 칭의가 의롭다고 간주되는 사건과 과정을 둘 다 포함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자체를 함축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멜랑히톤과 칼빈에 있어서 사건(칭의)과 과정(성화)은 구분될 수 있고 또한 구분되어야 했다. 죄의 용서와 성령이 새롭게 하시는 선물은 논리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취급하였다. 칭의를 의롭다고 간주하는 사건으로 성화를 의롭게 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보편적인 개신교와 전통적인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의식에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죄사함과 의의전가에 대한 칭의와 성화를 논할 때 칭의에 대한 이해에서 의롭다고 간주하는 사건에서 이미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합하여져 죽은 사실을 간과하면서 일어난 오해가 포함되어 있다. 의롭다고 간주한 사건에서 이미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하며 그분은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시기 위해 죽으신 것을 믿어야 하며 성화자체가 점진적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이미 성화된 사람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성화된 생활을 살아가는 것이다. 의로움에 대한 전가가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서의 탄생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잘못 오해한 것에서 이런 사상이 도출된 것이다. 칭의의 경험은 간주되는 경험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경험으로 경험되어져야 한다. 나는 죄인으로서 이미 영적으로 죽어있고 도덕적 개선을 통해서 성화의 과정을 밟아 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새롭게 주님 안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될 죽어야 할 죄인이며 다시 태어나야 할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어둠의 왕국,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의로운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상태가 의로운 상태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칭의 속에 이미 내가 죽어있으며 내가 다시 살 수 있는 길이 함께 들어져 있을 뿐이다. 의의 전가나 죄사함의 방법으로는 인간의 모든 죄책이나 책임에서 영원히 헤어날 수 없다.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려면 죽어야 하고 다시 태어나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 이후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제자는 스승과 같아지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란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같아지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침례를 통해 그리스의 옷을 입고 이제 그분과 같아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본받으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제자로서 살아가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필요를 깨닫고 회개하며 죄를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주장하면 우리는 그분의 제자가 된다. 예수님은 사역 기간 동안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여러 사람을 그분의 제자로 부르셨다. 제자로의 부르심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암시했다(마 4:20, 22, 막 10:28, 눅 5:28). 사실 복음서에서 ‘따르다’라는 뜻의 동사는 실질적으로 ‘제자’와 동의어가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두 가지 요소는 무엇인가?(요 8:30~31)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보다 그분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그 둘을 분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구분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에게 두 가지의 요소는 상호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제자도의 근본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의 인격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도 충성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시선에서 놓치는 신앙이나 교리에 사로잡힐 위험성도 있지만 주님과 동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단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할 위험성도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가장 큰 대가는 무엇인가?(눅 14:25~27)
예수님은 ‘미워하다’라는 동사를 ‘덜 사랑하다’의 과장된 의미로 사용하셨다. 동일한 기사를 다루는 마태복음의 평행절은 그 말씀의 뜻이 명확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삶의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
교훈 :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신다. 진정한 제자란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부가적용)
제자란 그 스승과 같아지려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아지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의 마음에 인식해야 할 가장 중요한 초점은 우리 자신에게는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에게 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질 때, 인간의 노력으로 어떤 도덕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자꾸 옆사람과 자신의 주변의 사람과 비교하게 된다. 우리의 도덕적 수준을 그리스도와 비교하라. 사람은 우리의 본받을 대상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의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고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다 불쌍한 죄인들임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처절한 죄인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놋뱀을 장대에 달게 하신 것이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도록 놋뱀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구원의 자신감을 상실한다. 우리 자신에게 죄가 발견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안에 내가 죽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장 높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표준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우리의 목표이고 꿈이고 이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혹여 자신에 대해 실망하는 일이 생기거든 실망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선을 행하기에 무력한 죄인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사는 존재들이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언제나 죄를 이기기에 무력한 존재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불뱀에게 물릴 때마다 놋뱀이 되어 우리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지금 그대의 신앙생활은 제자의 삶과 얼마나 일치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믿음과 동시에 그분의 뜻을 따르는 제자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는다는 고백 너머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모시고 새로운 나라의 땅에서 새로운 가족과 함께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땅과 혈연 그리고 그 안에 얽혀 있는 가치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잃은 것을 찾을 뿐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보상 받을 것입니다(마 19:29).
| 적용 |
그대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의 헌신의 모범을 따르라 -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사랑으로 간절히 호소한다. 모든 세상의 관심사는 위대한 구속 사업의 다음 자리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모든 사회적 요구와 모든 지상의 애착심을 하나님의 사업에 굴복시켰던 그리스도의 헌신의 모범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청지기에게 보내는 권면, 53).
기도 : 예수님, 제가 걷는 믿음의 길이 곧 제자의 길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의 소유, 심지어 가족까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오직 천성을 향해 주님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여섯째날(금)
8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23~32 “회개”를 읽어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다.… 우리가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셨나니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그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정로의 계단, 26~27).
“진정한 회개로 부드러워진 겸손하고 상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갈보리에서 지불된 대가(代價)를 얼마만큼 이해하게 될 것이니 한 아들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버지께 자복하는 것처럼 참으로 참회(懺悔)하는 자는 자기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것이다”(정로의 계단, 4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죄책감을 술과 마약, 세상의 쾌락으로 달래거나 자신의 삶을 광기어린 행동으로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이 소용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는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 죄책감을 해결하는 진정한 방법을 발견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돕겠습니까?
➋ “회개에 합당한 열매” 없이도 죄를 인정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한 회개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열매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 열매란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해 행하여진 선행입니까? 여러분의 의견을 설명해 보십시오.
➌ 그리스도의 의가 무료지만 값싸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토의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위해 대가를 치를 필요는 없지만, 주님은 십자가에서 무한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우리를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타락했고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8월 2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0분
기억절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도입)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이 ‘놋뱀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주신 말씀이다. 오늘 과정공부 제목이 구원을 받는 법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구원을 받으려는 자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은 뱀 때문이다. 이 뱀은 곧 사단을 예표하고 있고 또한 이 뱀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가지게 된 인간의 형편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영적인 본성과 죄에 대하여 기울어진 그릇된 인간의 심성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요 8:41)라고 말씀하셨다. 이곳에서 말한 ‘너희 아비’란 사단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향하여 대하여 독사의 자식들(마 12:34, 눅 3:7)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어두움의 권세(눅 22:53)에 속한 자들이라는 표현과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 8:4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적 부모의 특성을 닮은 유전적인 계승을 통해 닮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마귀의 품성을 닮은 자로 태어난 것이다. 원죄의 문제는 죄의 유무를 떠나 인간이 출생할 때부터 죄악 세상에 태어났고 이미 그와 같은 사단이 지배하는 이 죄악 세상의 죄의 영향력 아래 출생한 것이 문제가 되었고 인생 자체가 출생하면서 사단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가지게 된 심성의 근본적인 욕심과 진리에 서지 못한 인간의 모습, 그 상태가 이미 죄로 오염되어 있어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는 문제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원죄아래 태어났다 함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마귀의 자녀요 사단의 자녀로 그에게 속하여 태어났다는 그 진정한 모습을 뜻한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이 마귀의 손에서 구원해 주지 않으시면 이미 사단의 손에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곳 기억절에 기록된 이 말씀 곧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고 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연구 범위 : 눅 5:27~32, 눅 13:1~5, 마 22:2~14, 슥 3:1~5, 요 8:30~31, 눅 14:25~27.
*안교반과 소그룹을 일원화시키면 가장 좋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뱀에게 물렸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서 뱀에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보고 목숨을 건지게 하셨다.
구리뱀에 치료의 효능이 있었는가? 아니다. 치료의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구리뱀을 바라봄으로 그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희망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원하셨다. 그분은 죽음의 상징을 생명의 상징으로 변화시켰다. 그 구리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죄를 짊어지셨던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우리도 믿음으로 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옛 뱀 사탄에게 물린 치명적인 상처를 고칠 치유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감출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이다. 그런데 그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되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구원에 필요한 단순하고 실제적인 단계에 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개인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과정을 배운다.
➋ 느끼기 :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죄의 올무가 깨졌음을 기뻐한다.
➌ 행하기 : 이런 놀라운 소식을 친구와 친지, 동료 그리고 낯선 사람들에게도 전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질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대는 건강 검진에 적극적입니까? 아니면 소극적입니까?
❷ 도덕적으로 별 문제가 없는 사람과 부도덕한 과거를 괴로워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복음을 더 잘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❸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용서를 받은 뒤에는 어떤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❹ 아직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B. ❶ 최근에 그대에게 용서를 빌었던 사람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❷ 진정한 회개에는 어떤 특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❸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과 제자로서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은 어떻게 다릅니까?
❹ 구원받은 제자로서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고쳐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결론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가는 과정은 단순하며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깨닫고 죄를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유일한 세상의 구주께서는 우리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새 신자 또는 구도자와 기존 신자 사이에 일대일 관계를 세웁니다.
❷ 기존 신자가 새 신자 또는 구도자를 어떻게 영적으로 지원해야 할지 안내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그대의 필요를 인식하라
7월 27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교사강해 1)
이 땅에는 의인이 없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인간의 영적인 본성과 죄에 대하여 기울어진 그릇된 인간의 심성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요 8:41)라고 말씀하셨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요 8:44)다고 말씀하심으로 모든 인간이 죄의 창시자인 마귀의 자녀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저 하늘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고 한 것처럼 하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들이 사는 곳이지만 이 땅은 의인이 없는 곳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영향력 아래 태어난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이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을 말한다. 마귀의 편에 선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었으나 그가 하나님께 반역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눅 5:27~32을 읽어 보라. 그대가 어느 무리에 속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육체적으로 건강한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 그렇다면 누가 영적으로 정말 건강한 사람일까? 인류 가운데는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시 14:3)다. 스스로 의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롬 3:10). 우리는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착한 일을 행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의롭게 내세울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눅 5:32)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실제로는 의롭지 않으나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언급하고 계셨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다고 믿었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요 9:40~41).
죄로부터의 치유를 얻는 첫 단계는 죄 많은 자신의 상태와 스스로를 치료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눈 멀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진정한 부족을 알 수 있는가? 만약 우리의 죄가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는가?(요 16:8)
우리의 영적 실상을 알게 해 주는 안약은 성령이다. 우리를 위해 다른 일을 행하시기 전에 그분은 먼저 우리의 죄를 지적하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 피할 수 없는 죄의식과 깊은 죄책감을 일으켜서 우리가 구주를 갈망하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만간 성령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도 하실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굳어질 것이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교훈 : 구원을 얻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죄로 말미암은 절망적인 상태를 깨닫는 것이다. 성령은 죄를 지적해서 우리가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신다.
부가적용)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의 실상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인간은 구원의 길이 없다. 마귀의 반역처럼 인간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는 죄인들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17:13)라고 말한다. 여호와는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의 근원이시다. 그러나 바로 우리의 생명의 주를 버리는 자들은 모두 다 수치, 곧 죽음을 당할 것인데 결국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모두 흙에 기록되게 되는데 이는 생수의 근원, 곧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이 사실을 믿지 않고 저버린 모든 자들마다 죽음이라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결국 그 인생의 마지막은 저들이 본래 만들어졌던 그 근원인 흙에 기록하고 말 것이다. 기독교적인 사고에 혁명적인 변화라 할 수 있는 진화론 사상이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에게서 일어나게 되었다. “진화론은 생물학은 물론 종교, 윤리, 도덕의 문제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물리학과 화학의 발전에 따라 물질로 자연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점점 거세지던 시점에 휘두른 논리적인 강타였다. 마귀는 인간의 믿음을 흐리게 만들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존재로 인간을 세뇌시켜 변질시켜 버렸다. 마귀의 자식들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을 주장하는 다윈조차도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눈의 신비롭고 복합적인 구조와 기능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토로했었다. 이것은 “조금씩의 변화를 거쳐 지금의 눈이 되었다는 것보다는 누군가의 ‘큰 설계’에 의한 작품으로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는 말처럼 들린다. 사물로부터 반사된 빛이 수정체를 거쳐 들어와 망막으로 인식세포를 거쳐 신경으로 전환되어서 사물을 인식하게 하고, 이에 따라 반응하게 되는 이 ‘경탄스러운 네트워크’는 ‘진화’보다 ‘창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보는 것이 어울려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한 「생명과학 강의노트」라는 책을 기록한 이우성교수의 고백적 기록을 통해서 보더라고 쉽게 진화론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우성 교수는 “‘창조의 혼’을 무조건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창조의 설계와 함께 하는 진화의 공정’이 다양한 생명체의 존재를 더욱 합당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우연의 산물처럼 그 스스로를 여길 것인가?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달린 매우 중요한 선택의 문제이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죄, 가장 우두머리 죄는 자신의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인 것처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배역이 가장 큰 곧 죽음에 이르러 심판을 받아야 할 죄임을 알아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철저하게 깨닫고 있습니까?
자신에게는 이렇다 할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마도 겉으로 나타난 결과를 기준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면을 살피는 사람은 가증한 거짓과 위선, 들끓는 분노와 욕망, 사악하고 위험한 생각이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자신의 마음을 보고 놀라며 좌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공공연한 죄인은 사함을 받고 기뻐하기 쉬우나, 죄의 동기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자신에게 아무런 가망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 적용 |
그대는 최근 어떤 죄의식 또는 죄책감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까?
영감의 교훈 : 회개를 일으키는 은혜의 성령 - “회개는 용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용서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것은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는 것이다. 통회하는 자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회개를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연약함과 약점들을 잘 알고 계시므로 우리들을 분명히 도우실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53).
기도 : 병든 제 마음을 보옵소서. 상처만 남은 제 삶을 보시옵소서. 이제 제 자신을 포기합니다. 죄의 결과만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저를 건져주시며 받아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회개
7월 28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5).
교사강해 2)
회개가 무엇일까? 회개(悔改)라는 말은 한자어가 의미하는 뜻대로 뉘우치고 고치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인간이 그 행위를 고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에 이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회개란 무엇일까? 우리는 회개의 의미를 도덕적인 우리의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이기에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미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 세상에 속한 자는 모두가 다 마귀의 자녀요 진노의 자녀요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니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죄라는 부모의 죄책을 유전 받은 의미를 떠나 인간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마귀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며 그의 나라에 속하여 사는 마귀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개하여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에 말한 대로 여호와를 떠난 자들이 다시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다.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다. 주를 버렸던 자들, 여호와를 떠났던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이것이 아버지로께로 돌아오는 탕자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가 자꾸 우리의 도덕적 행위의 변화에 그 기초를 두어 회개를 가르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도덕적 수준을 가진 자들이 많아 도덕적인 지탄을 받을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죄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기에는 반드시 회개가 수반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회개의 의미는 세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즉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과거의 죄를 슬퍼하며,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 하나라도 빠지면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유다는 죄를 범했지만 주님을 배신한 죄에 대한 슬픔은 없었다(마 27:3~4). 그는 회개가 아닌 후회의 감정에 휩싸였다. 그의 자백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침례 요한과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마 3:2, 4:17)다고 설교하면서 사역을 시작했던 사실에서 우리는 회개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후에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첫 전도 여행으로 파송하자 그들은 “나가서 회개하라”(막 6:12)
고 전파하였다. 오순절 이후 베드로도 군중들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했다(행 2:38, 3:19).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해 회개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강한 어조를 보라.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별을 주시는가?(눅 13:1~5)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롬 2:4)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의 얼음 덩어리는 작은 조각으로 부서질 수 있지만 부서진 조각은 여전히 얼음이다. 그런데 같은 크기의 얼음 덩어리를 불 옆에 두면 그것은 녹아서 물이 된다. 우리에게 있는 교만의 얼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의 온기에 노출되어야 녹는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사랑의 증거를 곱씹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교훈 : 죄를 깨달은 다음에는 회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진정한 회개는 죄를 시인하고 슬퍼하며 다시는 범죄하지 않으려는 정신을 포함해야 한다.
부가적용)
이 세상에 아무도 그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없고 죄의 영향아래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다만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른 임금 곧 예수”(행 17:7) 그리스도의 전도가 없었다면 모두가 마귀의 자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난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구원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모두가 사단에게 속하여 태어난 것이다. 신자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육욕이나 악한 생각 그리고 본성 가운데 악의 경향들은 이미 둘째 사망을 당하기에 충분한 상태이며 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덕적인 행위의 개선을 통해서는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율법의 지키려는 노력으로는 인간은 의에 이를 수 없다. 회개의 첫 시작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마귀의 자녀였음을 고백하고 또한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우리의 도덕적인 절망적인 상태를 바라보고서 우리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 때에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침례의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우리가 죽고 다시 태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지 우리의 도덕적인 노력과 개선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에 이를 수 없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잘못했어요!” 아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엄마에게 빕니다. 엄마는 끝까지 잘했다고 대들지 않고 ‘잘못했다.’고 말해 주는 아이가 고맙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뭘 잘못했는데?” 엄마는 아이가 혼날까봐 두려워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뉘우치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즉각 회개하는 것이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냥 회개하고 빨리 넘어가려는 심리가 조금이라도 작용한다면 진정한 회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겠다는 굳은 결심을 포함합니다.
| 적용 |
그대가 진실한 마음으로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할 죄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 사랑에 이끌린 회개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실물교훈, 189).
기도 : 아버지, 제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뭔가 잘못된 제 삶에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죄악과 배반의 삶을 내려놓고 눈물로써 새 마음을 받기 원합니다.
셋째날(화) 예수님을 믿으라
7월 29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교사강해 3)
회개하라는 말에 대해서 자꾸만 우리의 도덕적인 모습의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없다. 지금까지 해결 되지 않는 이런 이해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문제점은 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인한다. 이 끝없는 논쟁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이렇게 주장하는 신학자들 모두가 인간이 어떤 노력을 통해 일정한 수준의 도덕적 향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의를 도덕적인 의로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서 이해하는데 따른 결과이다. 그러므로 루터 자신도 그와 같은 도덕적인 의에 대한 부담으로 눌린 적이 있었다. 여기서 신학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이 점에 대하여 그 해답을 풀 수 있는 길은 의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는 길이다. 우리가 가지는 의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진정한 칭의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의 사상 속에서 칭의가 의롭게 간주되는 사건과 의롭게 되는 과정으로 나누어 생각한 이 개념이 기독교의 구원관에 잘못된 사상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의에 대한 이해를 올바로 가지면 그 해답이 나오게 될 것이다. 칭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義)를 이해해야 한다. 의(義)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존재하는 단어이다. 렘 23:6에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했다.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한 이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의이시고 의의 기준이시고 의의 참된 정체가 되신다. 의라는 말이 하나님의 실존과 관계가 있는 말이다. 롬 10:3절에도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다.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의는 도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다. 여호와라 이름 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심은 그 자체가 의의 나타남이다. 이 말은 의에 대한 일차적 개념이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의(義)라고 하는 것이다. 율법보다 그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존재하시고 그의 존재와 함께 의가 존재했는데 바로 그 의 자체가 하나님이시다. 렘 33:15,16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고 말하고 있는 의로운 가지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며 그 의가 바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을 의미하고 있다.
진정한 회개는 예수님을 우리의 유일한 구주로 여기는 믿음을 동반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베푸는 복을 받으려면 자신을 믿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자주 말씀하셨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은 필수적이다. 사탄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를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강구한다(눅 8:12).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뭔가 일어나리라는 모호한 기대감 이상이다. 그것은 정신적 훈련 이상이다.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내용 없는 허울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대상이 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믿는 것뿐 아니라 더욱 누군가를 믿는 것이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알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 이해하며(요 6:69) 그분을 개인적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요 1:12).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셨고 그를 진정으로 믿는 모든 사람이 영생을 누리게 하셨다. 하지만 그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분의 의를 덧입어야 한다.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는 의를 얻고 보증을 얻는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그분이 우리를 부활시키시리라는 위대한 약속을 받는다(요 6:40).
예수님은 죄악의 삶을 살았던 여인에게 보증하셨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48, 50). 이는 무슨 뜻인가?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교훈 :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 믿음은 예수님을 알고 신뢰하며 그분의 죽음을 인정하고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의라는 관념은 죄인에게 있어서 결코 복음이 복된 소식이 아니었다. 그것이 사실에 있어서는 저주 외에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죄악된 인간의 능력에 대해 루터는 점점 더 비관적 견해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절망이었다. 구원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신학적, 순전한 학문적 관심사만은 결코 아니었다. 루터는 자신의 구원이 결려있다고 생각했다. 루터에게 있어서도 역시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물음은 어떻게 자신의 구원을 획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개인적 관심사들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물음이었다.” “루터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를 칭의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했다. 이 행위는 인간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기 전에 그가 해야만 하고 이루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루터는 점차적으로 이것은 점차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의라는 이 구절을 단지 처벌하는 의로 해석할 수 있을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오해한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신학적 용어에 빠져 하나님의 참된 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의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여질 수 있는 용어이며 그분 자신에게만 일컬어 질 수 절대적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의가 존재하지 않으며 의라는 것이 없다. 인간에게 의롭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더 도덕적이라는 것일 뿐이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죄됨을 바라보고 그 스스로의 계발된 양심에 따라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가질 수는 있었으나 그 스스로는 의로울 수가 없으며 의로움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또한 의롭게 되어갈 수도 없다. 절대적인 의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방법은 인간의 도덕적 개선과 인간의 수양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다. 다만 의로우신 하나님에게 속하며 그분의 편에 서게 될 때 그분께서 분여(分與)해 주시는 축복일 뿐이다. 한스 K. 라론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성경적 정의는 신자들 개개인의 이름에 그리스도의 의를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과연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주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의를 입혀주신 이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가 의에 대한 개념을 도덕적이고 사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의는 도덕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라 이름 하신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그 자체가 의의 나타남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도덕적인 것만이 아닌 하나님 자체가 의이시며 의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의를 도덕적인 문제로만 생각하여 도덕적인 의를 덧입혀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여 도덕적으로 부족한 죄인이 그분이 씌어준 의를 소유해 마치 의롭게 된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의롭게 되었다고 간주하시는 칭의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의롭지 못한 인간의 마음에는 내적 갈등이 심화되고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게 되면서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자신은 한없이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의의 종교이다. 한스 K. 라론델이 말한 칭의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입어할 옷이 도덕적인 것 만인지 아니면 생명을 입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오해가 있기 때문에 혼란이 온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와 기타 종교의 다른 점은 도덕적인 가르침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율법을 범한 죄인들이 마치 그 죄를 가리는 행위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기 때문에 혼란이 왔다. 모든 인생은 이것에 대한 해답을 아놀드 V. 왈렌캄프는 “성경이 전하는 기별의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의 이 깨져버린 관계를 복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두는 것’이라고나 칭의,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라고 부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것이고 그분은 의로운 분이시며 우리는 의롭지 못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과 의는 그분께 의존될 때에만 이르러 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롬 6:3)을 강조하고 그분과 합하여진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연합하고 그분 안에 있게 될 때 인간은 도덕적인 개선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의 믿음을 뭐라고 설명하겠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누군가를 치유하실 때 그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막 10:52, 눅 17:19)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에 어떤 치유의 능력을 부여하셨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지 그들을 치유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온전한 신뢰였을 뿐이다. 믿음의 힘은 믿는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 적용 |
그대가 지금 예수님을 믿으므로 이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 믿는다는 것의 의미 -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로 돌아가셨다는 것,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그분 자신의 의를 나누어 주신 것을 완전히 수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의를 요구하고, 그것을 믿는다.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의 의가 된다. 그분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믿음과 행함, 70).
기도 : 주님, 믿음이 없어 제 힘으로 사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을 잘 알지 못함을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내게 손을 내미시는 주님께 고백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넷째날(수) 혼인 잔치 예복
7월 30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마 22:11~12).
교사강해 4)
우리는 위에서 말한 예복이 우리의 부덕한 모습을 덮어준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예복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또한 그 옷, 예복은 우리의 죄를 덮는 흠 없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상징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흠없는 품성이 될 수 있을까? 이곳에 나타난 혼인 잔치의 예복이란 무엇일까? 성경 이야기의 핵심 그 초점은 인간의 벗김과 입힘의 이야기이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 인간은 벌거벗은 상태였다(창 2:25).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저들은 부끄러워하며 저들의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자신의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리었다. 창 2장이나 3장의 사건에서 아담과 하와는 동일하게 벗은 상태이지만 왜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가졌는가? 이것은 그가 벗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인데 왜 벗었다고 여겨졌을까? 본래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었던 옷은 영광의 옷이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광의 옷이 벗겨진 3장 이후에는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롬8:21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했다. 인간을 덮고 있는 피부라는 이 겉옷은 썩어 없어질 옷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광의 자유에 이른다고 했는데 본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 때에 입고 있었던 곧 영광의 옷, 곧 썩지 않을 옷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영광의 옷이란 썩어짐의 반대인 썩지 아니할 옷, 썩지 아니할 예복임이 분명하다. 갈 3:2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서 입게 될 의복 곧 예복이다.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란 바로 하나님의 형상(고후 4:4)인 것이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곧 썩지 아니할 몸, 곧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었다는 것인데 바로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았을 때, 우리는 새생명으로 태어나 그리스도께서 거져 입혀주시는 예복인 하나님의 형상, 곧 흠없는 예복, 하나님과 같은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 앉아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바리새인만큼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에게 기쁨을 드리기보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지 말도록 경고하셨다(마 6: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는가? 혼인 잔치의 비유는 진정한 의의 원천을 찾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마 22:2~14을 읽어 보라. 왕은 왜 모든 하객이 혼인 잔치 예복을 입었는지 확인하려고 했는가?(사 61:10, 슥 3:1~5 참고)
왕은 혼인 잔치 예복을 무료로 제공하였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길가에 다니다가 무작위로 초청을 받았다. 그래서 아마도 결혼식에 적합한 의복이 없을 뿐더러 살 돈도 없었을 것이다. 잔치 초대와 의복은 모두 왕의 선물이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 위한 유일한 요구사항은 두 가지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이후에 모든 인류는 영적으로 헐벗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한 직후에 벗었음을 깨닫고 무화과 잎을 엮어 자신의 몸을 가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편할 뿐 아니라 전혀 쓸모가 없었다(창 3:7).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의는 “더러운 옷”(사 64:6)에 불과하다.
비유에서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의복을 제공하신다. 그분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의복을 만드셔서 그들에게 입히셨다(창 3:21). 그 옷은 죄인을 덮는 그분의 의를 상징한다.
교훈 :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옷을 입는데 그 옷은 우리의 죄를 덮는 흠 없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상징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하늘에서 우리의 썩을 몸을 가진 상태로 죄인인 우리의 죗된 모습을 덮어준 것이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신 의의 옷, 구원의 옷은 썩지 아니할 영광스러운 죽지 아니할 몸으로 바뀐 우리의 몸이 불멸의 몸을 입은 것을 의미한다. 침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 곧 죽지 않을 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우리 주께서 오실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침례를 받고 구원에 이른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자꾸 우리의 시선을 우리의 도덕적인 옷으로 우리의 몸을 가리려 해서는 안된다.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선이 없다. 오직 절대적인 선을 가지신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뿐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이 되셔서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다시 부활하셨다. 인간이 죽지 않을 영원한 그리스도와 같은 옷을 입고 죽지 아니하리라는 보증을 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 예복, 곧 영광의 옷을 입혀주시려고 하신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품성을 가져보려고 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만을 느낄 뿐이고 우리가 걸치고 있는 육신의 겉옷은 날마다 후패해져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양의 보혈로 우리에게 입혀주신 의의 두루마기를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날마다 빨아야 한다.(계 22:14)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우리는 주님이 제공하는 의의 옷을 어떻게 매일 입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교회에 제공하시므로 교회는 “티나 주름 잡힌 것”(엡 5:27)이 없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계 19:8)을 받는다. “이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 곧 믿음으로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실물교훈, 310).
| 적용 |
흠이 없는 품성의 옷으로 그대는 오늘 어떤 품성의 흠을 가리기 원합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신 옷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옷을 하나 준비하셨다. 그것은 그분 자신의 의의 두루마기이며 그분께서는 믿음으로 그 옷을 받아들이는 회개하고 믿는 모든 영혼들에게 그것을 입히실 것이다.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고 말했다.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것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벗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하늘, 378).
기도 : 주님, 저의 누더기 같은 옷 대신 새하얀 옷을 입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옷을 잊고 벌거벗고 다니지 않도록 날마다 주의 의 가운데서 살게 하옵소서.
다섯째날(목) 예수님을 따르라
7월 31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30~31).
교사강해 5)
칭의에 대한 이해를 ‘죄사함과 의의 전가’로 이해되고 있는 루터나 그 밖의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의 이해의 한계로 말미암아 칭의의 이해가 제한되어 왔다. 칭의에 대한 문제점은 인간을 살아있는 도덕적 인간으로 이해하면서 현재 인간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충족시킬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의를 그리스도를 믿는 과정적인 삶을 통해 도달하여 가는 과정으로서 칭의를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멜랑히톤과 칼빈 또한 어거스틴과 젊은 루터가 하나의 단위로 취급한 과정의 두 가지 측면을 구분했다. 어거스틴도 칭의가 의롭다고 간주되는 사건과 과정을 둘 다 포함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자체를 함축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멜랑히톤과 칼빈에 있어서 사건(칭의)과 과정(성화)은 구분될 수 있고 또한 구분되어야 했다. 죄의 용서와 성령이 새롭게 하시는 선물은 논리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취급하였다. 칭의를 의롭다고 간주하는 사건으로 성화를 의롭게 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보편적인 개신교와 전통적인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의식에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죄사함과 의의전가에 대한 칭의와 성화를 논할 때 칭의에 대한 이해에서 의롭다고 간주하는 사건에서 이미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합하여져 죽은 사실을 간과하면서 일어난 오해가 포함되어 있다. 의롭다고 간주한 사건에서 이미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하며 그분은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시기 위해 죽으신 것을 믿어야 하며 성화자체가 점진적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이미 성화된 사람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성화된 생활을 살아가는 것이다. 의로움에 대한 전가가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서의 탄생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잘못 오해한 것에서 이런 사상이 도출된 것이다. 칭의의 경험은 간주되는 경험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경험으로 경험되어져야 한다. 나는 죄인으로서 이미 영적으로 죽어있고 도덕적 개선을 통해서 성화의 과정을 밟아 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새롭게 주님 안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될 죽어야 할 죄인이며 다시 태어나야 할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어둠의 왕국,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의로운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상태가 의로운 상태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칭의 속에 이미 내가 죽어있으며 내가 다시 살 수 있는 길이 함께 들어져 있을 뿐이다. 의의 전가나 죄사함의 방법으로는 인간의 모든 죄책이나 책임에서 영원히 헤어날 수 없다.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려면 죽어야 하고 다시 태어나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 이후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제자는 스승과 같아지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란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같아지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침례를 통해 그리스의 옷을 입고 이제 그분과 같아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본받으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제자로서 살아가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필요를 깨닫고 회개하며 죄를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주장하면 우리는 그분의 제자가 된다. 예수님은 사역 기간 동안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여러 사람을 그분의 제자로 부르셨다. 제자로의 부르심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암시했다(마 4:20, 22, 막 10:28, 눅 5:28). 사실 복음서에서 ‘따르다’라는 뜻의 동사는 실질적으로 ‘제자’와 동의어가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두 가지 요소는 무엇인가?(요 8:30~31)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보다 그분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그 둘을 분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구분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에게 두 가지의 요소는 상호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제자도의 근본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의 인격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도 충성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시선에서 놓치는 신앙이나 교리에 사로잡힐 위험성도 있지만 주님과 동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단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할 위험성도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가장 큰 대가는 무엇인가?(눅 14:25~27)
예수님은 ‘미워하다’라는 동사를 ‘덜 사랑하다’의 과장된 의미로 사용하셨다. 동일한 기사를 다루는 마태복음의 평행절은 그 말씀의 뜻이 명확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삶의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
교훈 :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신다. 진정한 제자란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부가적용)
제자란 그 스승과 같아지려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아지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의 마음에 인식해야 할 가장 중요한 초점은 우리 자신에게는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에게 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질 때, 인간의 노력으로 어떤 도덕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자꾸 옆사람과 자신의 주변의 사람과 비교하게 된다. 우리의 도덕적 수준을 그리스도와 비교하라. 사람은 우리의 본받을 대상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의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고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다 불쌍한 죄인들임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처절한 죄인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놋뱀을 장대에 달게 하신 것이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도록 놋뱀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구원의 자신감을 상실한다. 우리 자신에게 죄가 발견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안에 내가 죽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장 높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표준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우리의 목표이고 꿈이고 이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혹여 자신에 대해 실망하는 일이 생기거든 실망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선을 행하기에 무력한 죄인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사는 존재들이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언제나 죄를 이기기에 무력한 존재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불뱀에게 물릴 때마다 놋뱀이 되어 우리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지금 그대의 신앙생활은 제자의 삶과 얼마나 일치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믿음과 동시에 그분의 뜻을 따르는 제자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는다는 고백 너머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모시고 새로운 나라의 땅에서 새로운 가족과 함께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땅과 혈연 그리고 그 안에 얽혀 있는 가치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잃은 것을 찾을 뿐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보상 받을 것입니다(마 19:29).
| 적용 |
그대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의 헌신의 모범을 따르라 -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사랑으로 간절히 호소한다. 모든 세상의 관심사는 위대한 구속 사업의 다음 자리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모든 사회적 요구와 모든 지상의 애착심을 하나님의 사업에 굴복시켰던 그리스도의 헌신의 모범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청지기에게 보내는 권면, 53).
기도 : 예수님, 제가 걷는 믿음의 길이 곧 제자의 길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의 소유, 심지어 가족까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오직 천성을 향해 주님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여섯째날(금)
8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23~32 “회개”를 읽어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다.… 우리가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셨나니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그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정로의 계단, 26~27).
“진정한 회개로 부드러워진 겸손하고 상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갈보리에서 지불된 대가(代價)를 얼마만큼 이해하게 될 것이니 한 아들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버지께 자복하는 것처럼 참으로 참회(懺悔)하는 자는 자기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것이다”(정로의 계단, 4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죄책감을 술과 마약, 세상의 쾌락으로 달래거나 자신의 삶을 광기어린 행동으로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이 소용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는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 죄책감을 해결하는 진정한 방법을 발견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돕겠습니까?
➋ “회개에 합당한 열매” 없이도 죄를 인정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한 회개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열매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 열매란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해 행하여진 선행입니까? 여러분의 의견을 설명해 보십시오.
➌ 그리스도의 의가 무료지만 값싸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토의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위해 대가를 치를 필요는 없지만, 주님은 십자가에서 무한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우리를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타락했고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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