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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구원을 받는 법(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8/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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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7-26 07:53 조회8,8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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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0분

기억절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연구 범위 : 눅 5:27~32, 눅 13:1~5, 마 22:2~14, 슥 3:1~5, 요 8:30~31, 눅 14:25~27.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뱀에게 물렸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서 뱀에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보고 목숨을 건지게 하셨다.
구리뱀에 치료의 효능이 있었는가? 아니다. 치료의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구리뱀을 바라봄으로 그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희망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원하셨다. 그분은 죽음의 상징을 생명의 상징으로 변화시켰다. 그 구리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죄를 짊어지셨던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우리도 믿음으로 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옛 뱀 사탄에게 물린 치명적인 상처를 고칠 치유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감출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이다. 그런데 그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되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구원에 필요한 단순하고 실제적인 단계에 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개인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과정을 배운다.
➋ 느끼기 :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죄의 올무가 깨졌음을 기뻐한다.
➌ 행하기 : 이런 놀라운 소식을 친구와 친지, 동료 그리고 낯선 사람들에게도 전한다.

A.
❷ 도덕적으로 별 문제가 없는 사람과 부도덕한 과거를 괴로워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복음을 더 잘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아마도 괴로워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해결하려는 마음이 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 죄를 해결하는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근본적인 죄를 깨닫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야 한다.
❸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용서를 받은 뒤에는 어떤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 그분의 말씀을 따라 생활하는 예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❹ 아직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 사람 자체가 사망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이 사망이 예수 안에서 해결되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이 이미 드러난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B.
❷ 진정한 회개에는 어떤 특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어야 한다.(지) 그 죄를 진정으로 슬퍼해야 한다.(정) 그 죄에서 확실히 돌아서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의)
❸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과 제자로서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은 어떻게 다릅니까?
※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과 행위를 구원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의 차이이다.

결론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가는 과정은 단순하며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깨닫고 죄를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유일한 세상의 구주께서는 우리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첫째날(일) 그대의 필요를 인식하라
7월 27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1. 눅 5:27~32을 읽어 보라. 그대가 어느 무리에 속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눅5:27~32]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답: 우리는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하는 무리에 속해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 그렇다면 누가 영적으로 정말 건강한 사람일까? 인류 가운데는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시 14:3)다. 스스로 의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롬 3:10). 우리는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착한 일을 행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의롭게 내세울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눅 5:32)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실제로는 의롭지 않으나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언급하고 계셨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다고 믿었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요 9:40~41).
죄로부터의 치유를 얻는 첫 단계는 죄 많은 자신의 상태와 스스로를 치료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눈 멀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진정한 부족을 알 수 있는가? 만약 우리의 죄가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2. 우리에게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는가?(요 16:8)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답: 성령의 역사로 비로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의 영적 실상을 알게 해 주는 안약은 성령이다. 우리를 위해 다른 일을 행하시기 전에 그분은 먼저 우리의 죄를 지적하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 피할 수 없는 죄의식과 깊은 죄책감을 일으켜서 우리가 구주를 갈망하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만간 성령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도 하실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굳어질 것이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부가설명> 우리 성도들이 솔직히 생각해보자. 도벽이 있는 사람이 심리적 치료와 수양과 노력으로 도벽을 고칠 수 없을까? 성을 잘 내는 사람이 스스로 성 잘 내는 성질을 고쳐야한다고 인식했을 때 노력하고 수양해서 정말 고칠 수 없을까? 만일 살인을 했다면 회복할 수 없다. 아마 간음한 것도 회복할 수 없는 행위일 것이다. 거짓말한 결과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을 고칠 수 있다. 유교적 수양이나, 불교적 참선이나 기타 노력으로 인간을 아주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공자, 석가, 그 외의 위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인류는 성인이라고 그들을 칭송한다.
그런데 교회는 사람이 죄를 지으려는 성질을 고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솔직히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그렇다는 말인가? 부자 법관 청년은 어려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다.(마19:20) 바울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했다.(빌3:6) 그러면 의인이 아닌가?
성경이 말하는 우리가 결코 할 수 없다는 의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죄된 것을 고칠 수 없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아담의 후손이고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자기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라도 그것이 자기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짜 내용이다. 성령께서 이것을 깨닫게 하시는데, 우리의 행위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자지가 진정한 죄인이라는 이유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자기 행위나 성질로 나타나는 죄된 것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것이 잘못인줄 다 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된 사실, 즉 사망이 죄라는 사실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사람이 깨달을 수 없다. 옛날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었다.(롬10:1~4 참고) 우리는 어떤가?

교훈 : 구원을 얻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죄로 말미암은 절망적인 상태를 깨닫는 것이다. 성령은 죄를 지적해서 우리가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신다.


둘째날(월) 회개
7월 28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5).

그런데 죄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기에는 반드시 회개가 수반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회개의 의미는 세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즉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과거의 죄를 슬퍼하며,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 하나라도 빠지면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유다는 죄를 범했지만 주님을 배신한 죄에 대한 슬픔은 없었다(마 27:3~4). 그는 회개가 아닌 후회의 감정에 휩싸였다. 그의 자백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침례 요한과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마 3:2, 4:17)다고 설교하면서 사역을 시작했던 사실에서 우리는 회개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후에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첫 전도 여행으로 파송하자 그들은 “나가서 회개하라”(막 6:12)고 전파하였다. 오순절 이후 베드로도 군중들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했다(행 2:38, 3:19).

1.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해 회개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강한 어조를 보라.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별을 주시는가?(눅 13:1~5)
[눅13:1~5]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답: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한다고 강하게 말씀하셨다.

2.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롬 2:4)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롬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답: 사람이 스스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회개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놓으셨기 때문에 사람이 회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의 얼음 덩어리는 작은 조각으로 부서질 수 있지만 부서진 조각은 여전히 얼음이다. 그런데 같은 크기의 얼음 덩어리를 불 옆에 두면 그것은 녹아서 물이 된다. 우리에게 있는 교만의 얼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의 온기에 노출되어야 녹는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사랑의 증거를 곱씹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부가설명> 우리는 죄를 짓는다고 말할 때 일상생활에서 짓는 죄들에 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죄를 알아야 한다. 아담의 후손은 모두 아담 안에서 썩어질 씨로 태어났다.(벧전1:23)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썩어질 씨로 태어난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들이 된다.(엡4:22) 사람은 본질적으로 썩어져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썩는 모습이 일상생활에서 저질러지는 죄들이다. 그것은 썩어질 씨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처리하고 교정하느라 애를 쓴다. 그것을 수양이라 하고 도야라 하고 수신이라 한다. 그것은 마치 썩어가는 물질에 방부제를 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진정으로 깨달아야하는 죄는 썩어질 씨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썩고 있으며 결과는 사망으로 없어지게 된다. 썩어질 씨는 사망의 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자기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성인의 경지에 있다고 해도 여전히 썩어질 씨로 태어난 사망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사망의 몸이라고 하였다.(롬7:24) 또 죄의 몸이라고 하였다.(롬6:6) 사람의 이런 상태를 진저으로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며 이것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이끌어 회개하게 한다고 한 것이다.

교훈 : 죄를 깨달은 다음에는 회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진정한 회개는 죄를 시인하고 슬퍼하며 다시는 범죄하지 않으려는 정신을 포함해야 한다.


셋째날(화) 예수님을 믿으라
7월 29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진정한 회개는 예수님을 우리의 유일한 구주로 여기는 믿음을 동반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베푸는 복을 받으려면 자신을 믿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자주 말씀하셨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은 필수적이다. 사탄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를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강구한다(눅 8:12).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뭔가 일어나리라는 모호한 기대감 이상이다. 그것은 정신적 훈련 이상이다.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내용 없는 허울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대상이 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믿는 것뿐 아니라 더욱 누군가를 믿는 것이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알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 이해하며(요 6:69) 그분을 개인적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요 1:12).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셨고 그를 진정으로 믿는 모든 사람이 영생을 누리게 하셨다. 하지만 그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분의 의를 덧입어야 한다.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는 의를 얻고 보증을 얻는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그분이 우리를 부활시키시리라는 위대한 약속을 받는다(요 6:40).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누군가를 치유하실 때 그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막 10:52, 눅 17:19)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에 어떤 치유의 능력을 부여하셨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지 그들을 치유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온전한 신뢰였을 뿐이다. 믿음의 힘은 믿는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1. 예수님은 죄악의 삶을 살았던 여인에게 보증하셨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48, 50). 이는 무슨 뜻인가?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눅7:48,50]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답: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믿음이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은 이 여인이 예수님의 구원을 깨닫고 자기를 예수께 맡겼다는 뜻이다.

<부가설명>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성경은 믿음은 선물이라고 하였다.(엡2:8) 믿음이 선물이라면 분명히 믿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뿐만 아니다. 믿음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선물이다. 내가 아무리 믿고자 해도 상대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믿음이 내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나를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면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믿음은 상대가 나에게 준 선물이다. 그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믿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은 선물이다. 믿고 나를 예수님께 맡기게 된다. 헬라어로 믿음은 피스티스이다. 믿는다는 동사는 피스튜오이다. 믿음직하다는 형용사는 피스토스이다. 그런데 동사 피스튜오는 맡긴다는 뜻도 있다. 누가복음 16:11에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는 구절의 “맡기겠느냐”가 피스튜오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완전히 예수님께 맡긴다는 뜻이다. 그분이 나의 생명이며 그분이 내 존재와 사상과 생활의 전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의 실상이다.

교훈 :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 믿음은 예수님을 알고 신뢰하며 그분의 죽음을 인정하고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넷째날(수) 혼인 잔치 예복
7월 30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마 22:11~12).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 앉아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바리새인만큼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에게 기쁨을 드리기보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지 말도록 경고하셨다(마 6: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는가? 혼인 잔치의 비유는 진정한 의의 원천을 찾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1. 마 22:2~14을 읽어 보라. 왕은 왜 모든 하객이 혼인 잔치 예복을 입었는지 확인하려고 했는가?(사 61:10, 슥 3:1~5 참고)
[마22:2~14]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사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슥3:1~5]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답: 그 옷은 의의 옷으로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옷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 지어 입은 옷이 아니다.

왕은 혼인 잔치 예복을 무료로 제공하였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길가에 다니다가 무작위로 초청을 받았다. 그래서 아마도 결혼식에 적합한 의복이 없을 뿐더러 살 돈도 없었을 것이다. 잔치 초대와 의복은 모두 왕의 선물이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 위한 유일한 요구사항은 두 가지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이후에 모든 인류는 영적으로 헐벗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한 직후에 벗었음을 깨닫고 무화과 잎을 엮어 자신의 몸을 가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편할 뿐 아니라 전혀 쓸모가 없었다(창 3:7).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의는 “더러운 옷”(사 64:6)에 불과하다.
비유에서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의복을 제공하신다. 그분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의복을 만드셔서 그들에게 입히셨다(창 3:21). 그 옷은 죄인을 덮는 그분의 의를 상징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교회에 제공하시므로 교회는 “티나 주름 잡힌 것”(엡 5:27)이 없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계 19:8)을 받는다. “이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 곧 믿음으로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실물교훈, 310).

<부가설명> 그리스도의 의는 곧 하나님의 의이다. 신약성경에 그리스도의 의라는 말은 벧후1:1에 한 번 나온다. 하나님의 의는 일곱 번 기록되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받는 의은 그리스도의 의이며 하나님의 의이다. 그 의가 정말 무엇인가? 예수님이 행하신 의의 행동은 한 행동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롬5:18) 그러므로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의로운 행동과 모든 선한 성품”이라고 하면 예수께서 행하신 의로운 행동이 한 행동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드러낸다. 흠이 없는 예수님의 품성이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뿐인 것이 옳지 않는가. 예수께서 행하신 의의 한 행동이 무엇인지 성경으로 대답을 들어야 한다. 그 행동을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8) 범죄도 하나, 의의 행동도 하나이다. 이 구절에 많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헬라 원어에는 모든 사람이다. 범죄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의의 행동도 하나이면 족한 것이다. 그런데 원어를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러므로 하나의 범죄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정죄가 이른 것처럼, 또한 하나의 의의 행위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칭의가 이르렀느니라.”이다.(본교 주석 롬5:18) 바울은 의가 생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주었다. 그러므로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옷 입은 것을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담 부부가 벌거벗은 것을 알았다는 것은 생명을 잃었기 때문에 생명의 빛이 사라진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성경을 세밀히 잘 살펴보면 좋겠다.

교훈 :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옷을 입는데 그 옷은 우리의 죄를 덮는 흠 없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상징한다.


다섯째날(목) 예수님을 따르라
7월 31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30~31).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필요를 깨닫고 회개하며 죄를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주장하면 우리는 그분의 제자가 된다. 예수님은 사역 기간 동안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여러 사람을 그분의 제자로 부르셨다. 제자로의 부르심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암시했다(마 4:20, 22, 막 10:28, 눅 5:28). 사실 복음서에서 ‘따르다’라는 뜻의 동사는 실질적으로 ‘제자’와 동의어가 되었다.

1.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두 가지 요소는 무엇인가?(요 8:30~31)
[요8:30,31]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답: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보다 그분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그 둘을 분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구분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에게 두 가지의 요소는 상호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제자도의 근본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의 인격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도 충성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시선에서 놓치는 신앙이나 교리에 사로잡힐 위험성도 있지만 주님과 동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단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할 위험성도 주의해야 한다.

2.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가장 큰 대가는 무엇인가?(눅 14:25~27)
[눅14:25~27]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답: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미워하다’라는 동사를 ‘덜 사랑하다’의 과장된 의미로 사용하셨다. 동일한 기사를 다루는 마태복음의 평행절은 그 말씀의 뜻이 명확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삶의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

<부가설명>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지표(指標)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의 유명한 선생들의 교훈이나 세성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들의 삶이 사람들의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분들이 그를 지표로 삼는 사람의 생명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이시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영원한 사망이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이런 의미이다. 자기 목숨을 애지중지해서 붙들고 있으면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 들어갈 자리가 없게 된다. 한 사람에게 두 생명이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한 생명, 한 인격, 한 생활만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사람이 생활하는 여러 분야 중에 하나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의  생명과 존재 자체가 오직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교훈 :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신다. 진정한 제자란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여섯째날(금)
8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23~32 “회개”를 읽어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다.… 우리가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셨나니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그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정로의 계단, 26~27).

“진정한 회개로 부드러워진 겸손하고 상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갈보리에서 지불된 대가(代價)를 얼마만큼 이해하게 될 것이니 한 아들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버지께 자복하는 것처럼 참으로 참회(懺悔)하는 자는 자기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것이다”(정로의 계단, 4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죄책감을 술과 마약, 세상의 쾌락으로 달래거나 자신의 삶을 광기어린 행동으로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이 소용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는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 죄책감을 해결하는 진정한 방법을 발견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돕겠습니까?
※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의 죄책감을 잊어버리는 효과는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런 죄책감을 일으키는 죄 자체는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죄를 더 쌓게 한다. 오직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기를 굴복할 때 모든 문제의 해결을 맛볼 것이다.

➋ “회개에 합당한 열매” 없이도 죄를 인정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한 회개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열매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 열매란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해 행하여진 선행입니까? 여러분의 의견을 설명해 보십시오.
※ 회개는 회개한 그런 상태에 다시는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열매는 다시는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는 생활을 드러내는 것이다. 열매는 호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에게 예수 생명이 생활하는 상태일 뿐이다.

➌ 그리스도의 의가 무료지만 값싸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토의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위해 대가를 치를 필요는 없지만, 주님은 십자가에서 무한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우리를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타락했고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 죄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도덕 이전의 사실이다. 아담 안에서 생명을 잃고 아담으로부터 사망의 씨, 곧 썩어질 씨로 태어난 사실이다. 이것은 사망을 폐하지 않는 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사망의 결과에 이르면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존재 자체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 자체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망이 되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사망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딤후1:10)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셨다.(히2:14) 그리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는 사망을 폐하고 생명과 썩지 않는 삶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죄를 해결하는 것이고 구원받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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