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구원(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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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07-19 15:59 조회5,161회 댓글2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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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4과 구원
7월 2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6분
기억절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개역).
도입)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지 태어났다가는 죽는다. 그런데 성경에서 영생을 한다고 하는 말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말씀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장18절) 세상 사람의 생각으로는 믿을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지라고 강조한 원인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신앙인들 가운데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교회만 나오는 것으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께서 나의 허물과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받을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것과 세 번째는 내가 다시금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세 가지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예수님이 나의 허물과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고 했는데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전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살면서 윤리 도덕을 지키며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들 가운데 석가나 공자나 맹자 같은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은 의인이 아닌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들도 역시 죄 때문에 죽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도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다.
연구 범위 : 눅 18:9~14, 요 6:44, 눅 15:3~10, 마 20:28, 요 8:34~36, 요 6:35, 요 6:47~51.
*신자들과 반생들이 서로 공부하도록 권합시다.
우리는 종종 죽음은 삶의 일부라고 말한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일부가 아닌 삶의 반대이다. 그러나 죽음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우리는 그 본질을 정반대로 인식하여 분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든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 모두가 영원한 죽음에 처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러한 도움이 이르러왔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천사가 메시아의 탄생을 알렸을 때 그는 그분을 ‘예수’ 곧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고 불렀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구원의 사역을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우리는 구원의 기초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그다음 그 결과에 대해 연구하려고 한다.
성경의 논지는 분명하다. 죄에 관하여 우리는 불못에서 죄값을 치르든지 아니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선물을 연구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는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기를 바란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영생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제안이 우주적인 죽음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임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죄의 영향력과 형벌뿐 아니라 그 결과인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경험한다.
➌ 행하기 :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으나 관대하게 제공되는 영생을 받아들인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가 평소에 가장 큰 해방감을 누릴 때는 언제입니까?
❷ 그대는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구원이 바로 해방과 자유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❸ 우리가 구원을 누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지금부터 누릴 영생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B. ❶ 그대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❷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떻게 다가오셨는지 각자 말해 봅시다.
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서 어떤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까?
❹ 주님이 우리 주위에서 찾으려는 잃은 양은 누구이며, 우리는 그를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결론 :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 우리를 완전하게 해방시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침례 받을 분들을 어떻게 특별하게 축하할지 계획합니다.
❷ 여름 장막회를 기점으로 영혼의 추수를 어떻게 지속시킬지 상의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7월 20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교사강해 1)
어떤 전도사가 석탄광 속에 들어가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광부들에게 하나님의 값없는 구원을 가르쳐 전도하였다. 일할 시간이 되자 전도사는 탄광을 나오면서 광부에게 아까 한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한 광부가 "값이 너무 헐해서 그런 종교는 믿어지지가 않소." 하고 대답했다. 전도사는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승강기 앞에 서서 "이제 이 탄광을 나가려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거야 타고 올라가면 그만이지요."
"위까지 올라가는데 한참 걸립니까?"
"한 3분밖에 안 걸립니다."
"그럼 나는 애쓸 필요가 없군요."
"맞습니다. 당신은 그냥 타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 탄광을 파고 이만한 장치를 한 사람은 힘도 들고 돈도 많이 들었겠네요."
"그거야 그렇지요. 이 지상에서 500m 아래에 있지요. 주인이 돈 쓴거야 말할 수 없지요."
"네, 옳은 말씀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 말씀에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 다고 했는데, 당신은 `너무 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멸망과 사망의 굴에서 당신들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께서 죽으시니 막대한 비용을 들였답니다."라고 말했다.
인도(印度)에서 사역하시던 어느 선교사님이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에요”라고 설명하자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고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며 계속 반문했다고 한다. 선교사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냥 값없이 구원을 주셨어요”라고 설명하니까 그제야 조금 이해하는 듯 하더랍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던 한 자매가 자신의 목걸이를 가리키며 이런 말을 했다. “아, 그러면 구원이 제 진주 목걸이 같겠군요. 저를 사랑하던 애인이 저를 위해 진주를 따다가 죽고 말았어요. 이 목걸이는 그가 남겨준 진주를 가지고 만든 거예요. 제가 애인에게 공짜로 받은 것이지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선물이죠. 하나님의 구원도 값으로 따질 수없는 선물이란 말이군요.” 그 자매의 말을 듣는 순간 선교사님도 퍼뜩 깨달았다. ‘그래 맞아! 구원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야!’ 이 선물을 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 바로 구원이다.
요 3:16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을 묘사하기 위해 두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 두 동사는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두 동사는 우리의 구원의 출처에 관하여 무엇을 밝히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동사 ‘아가파오(사랑하다)’가 설명하는 세심한 관심의 깊이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부적합하다. 신약성경에서 ‘아가파오’와 명사형 ‘아가페(사랑)’는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피조물들에 대한 그분의 깊고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낸다. 사랑은 하나님의 품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속성이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사랑이시다(요일 4:8).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감정이나 기호에 기초한 충동적 반응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은 선별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을 즉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 거기에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도 포함된다.
진정한 사랑은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으로 증명된다. 종종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정반대를 증명하곤 한다(요일 3:17~18).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분의 행동에는 그분의 사랑이 반영되어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하신 아들을 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즉 자기 자신을 주셨다.
눅 18:9~14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교훈 :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에 대한 심오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며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시고 거저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 증명되었다.
부가적용)
구원은 값없이 거저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 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고는 있지만 구원의 가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너무나 비싼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주신 그 큰 구원을 값싼 구원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 같다. 구원의 가치를 모르면 아무도 그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구원을 가치 없이 여기는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구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그 구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왜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 받는 원리를 이해하기 어려워 할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우리는 이 비유를 너무 많이 읽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 18:14)는 예수님의 선언에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이는 불공평한 결론이지 않은가? 맞다. 완전히 부당한 결과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 주어지는 방식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이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살 수 없고 단지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은혜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시지 않았지만 구원이 은혜로 주어졌으며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 적용 |
그대가 구원을 거저 받았으니 이제는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 놀라운 은혜의 나타남 - “죄인은 하나님의 율법의 신령함과 그 영원한 구속력을 본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죄된 인간을 위한 대치물과 담보를 마련하신 것에서 보게 되는 바 그 대치물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다. 세상에 대한 구원의 선물을 통한 이러한 은혜의 나타남은 죄인을 놀라움으로 차게 한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이 사랑은 모든 장벽을 허물어 버린다”(가려 뽑은 기별 3권, 194).
기도 : 모든 것 주시는 아버지, 마침내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 갚을 길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고, 좋으신 우리 아버지 자랑하며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구원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계획
7월 21일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교사강해 2)
우리 모두는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으로 판단하려고 한다. 당연히 우리는 중요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눈에 사랑스러운 것들이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별 볼일 없는 중요하지 않는 카테고리에 넣어서 분류해 버리려고 한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가치는 사람 목록에서부터 배제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저기 밖에 있는” 사람들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일주일 동안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동시에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던 주님께서 가장 싫어한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위에 무의식적으로 많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 그런 생각들을 은근히 하고 있다. 주인공에 해당하는 여러분들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전혀 나쁠 건 없다. 기분이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일 뿐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생각은 깨트려 져야 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자이다. 구원이 필요한 자이며 반드시 찾아야 할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 중의 하나인 것이다.
단순히 복음서를 읽기만 해도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가 초청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을 인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신 “나를 보내신 이” 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는 구절은 이것이 ‘아버지가 주도하신 계획’임을 확증한다(요 7:28, 8:29, 12:49).
요 6:44에 따르면 아버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또 어떤 일을 하시는가?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아들을 통해 죄사함을 받도록 방도를 마련하셨다(요일 4:10).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이로운 사랑이다.
우리의 구원에는 아버지만 개입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도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하신다. 그분은 매우 뚜렷한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우리가 지상에서 올리우신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은 우리를 자신께로 이끄신다(요 12:32).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기꺼이 애를 쓰시는가?(눅 15:3~10)
이 두 비유는 하나님이 우리가 오기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우리를 찾아 나서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다.
우리가 곁길로 빠졌든지, 멀리 위험한 장소에 있든지 아니면 집에서 영적인 길을 잃었든지 상관없다. 주님은 우리를 발견할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열성으로 우리를 찾으신다.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어버리자마자 목자의 마음은 슬픔과 근심으로 가득찼다. 그는 양을 세어 보고 또 세어 본다.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실물교훈, 188).
교훈 :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도적인 계획을 세우셨다. 그분은 우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부가적용)
우리 모두는 과거에는 길 잃은 양과 같이 갈길 모르는 채 이러 저리로 헤매며 죄와 무의미, 허무 속에서 방황하며 고통 했던 존재들이었다. 인생의 구원의 길을 찾으려 해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보겠다며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기도 하고 한다. 누구를 만나면 자기의 이 방황이 끝이 날 수 있겠고 또 외롭고 상처 난 내 마음에 누가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사람을 찾기도 한다. 훌륭한 사람들의 강의를 들어보기도 하고, 자기 마음을 위로해줄 이성을 사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문제가 이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다가온 운명의 짐을 너무 버거워하며 막막한 자신의 인생길을 끝내고자 자살하기도 한다. 온 세상이 다 고통하고 방황하고 있다. 세상에는 우리를 위한 근본대책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길 잃고 헤매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와 한없는 겸손으로 만나시고 영접하시고 구원해주신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자신이 혹시 집 안에서 잃어버린 동전과 같은 존재는 아닐지 생각해 보십시오.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간다. 밤이 어두워질수록 비바람이 심해질수록 목자의 염려는 더욱 커져 더 열심히 찾는다. 그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한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양의 울음소리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에 그는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실물교훈, 188)
| 적용 |
다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를 우리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 생명을 건 구출 - “그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가파른 고개를 기어오르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의 가장자리를 지나기도 하면서 소리 나는 그곳으로 간다. 그가 그렇게 양을 찾아가는 동안 양의 울음 소리가 점점 희미해가는 것을 듣고 그 양이 거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침내 그렇게 노력한 보람이 있어 잃었던 양을 찾게 된다”(실물교훈, 188).
기도 : 아무도 찾지 않고 버려진 동전 같은 저를 발견하고, 갈 길을 잃고 신음하는 저를 구해 주신 주님,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고 얻은 기쁨을 저도 맛보기를 원하오니 주님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게 하시고 누구를 주님께 인도해야 할지 알게 하옵소서.
셋째날(화) 필수적인 죽음
7월 22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교사강해 3)
왜 예수께서 속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셔야 하였는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우주적 사면령을 발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마치 대통령이 특별한 절기에 베푸는 특사나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모른 채하고 눈감아 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그로티우스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우주통치권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우주적 통치자로서 질서를 파괴하는 사탄과 달리 우주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으셨으며, 따라서 범죄를 마음대로 용서해 줄 수 없고 공정한 절차와 방법을 사용해야 하셨다. 만일 어떤 통치자가 어떤 사람에게는 법을 적용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의 법집행적 권위는 실추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을 가르치신 예수님이 자기 교회를 세우기에 앞서 먼저 치리제도를 설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완전한 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있는 하나님이 인류의 범죄를 용서해 주려는 사랑의 마음을 가졌을 때, 과연 어떤 해결책이 가능하였을까? 정의와 사랑의 두 원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해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었다. 구약시대의 엄격한 제사제도가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범죄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간과될 수 없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신적 원리였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은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서 자기를 속죄할 자격이 없었으며, 따라서 인간의 구속은 외부로부터(extra nos) 온, 그러면서도 인류를 대신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했고, 모든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전능하고 의로운 신적 대표여야 했다. 그래서 안셈은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에서, 신의 정의와 사랑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구속을 성취하였다는 만족설을 주창하였으며, 모든 교회가 이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것이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묘사했다. 성전에서 바쳐지는 제물과 구약에 기록된 거룩한 역사에 익숙한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이 은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는 믿음을 나타냈고 여호와는 이삭을 대신하여 제물로 바칠 한 동물을 준비하셨다(창 22:13).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잡은 어린 양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했다(출 12:1~13). 성소제도가 마련되자 아침과 해질 무렵에 한 마리씩, 매일 두 마리의 양이 제단의 제물로 바쳐졌다(출 29:38~39). 모든 제물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기 때문에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 같았다(사 53:6~7). 따라서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소개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께서 맞이할 죽음의 대속적 속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죽으셔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예수님은 사역 기간 내내 반복적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셨다(마 16:22). 그리고 점차 자신이 죽어야 하는 중대한 목적을 설명하셨다.
우리의 대속물로서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가리키기 위해 예수님은 어떤 예증을 사용하셨는가?(마 20:28, 요 10:11)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이런 희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한다 해도 이 말씀은 진실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마 26:28) 피를 흘리셨다.
교훈 : 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에서 예언했고 침례 요한이 소개했으며 예수님 본인도 설명하셨던 것처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자발적이고 대속적인 죽음이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실현하시되 죄인에 대한 미움으로 단순히 형벌을 가하는 방법이 아니라, 형벌을 가하되 그가 가장 사랑하는 성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식으로 정의와 사랑을 둘 다 아름답게 자기희생적으로 만족 시키셨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 가할 채찍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대신 때리는 사랑의 정의, 그것이 십자가의 대속이었다. 사랑의 정의가 진정한 정의이며, 정의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다. 따라서, 십자가는 범죄한 인류의 잘못된 사랑과 정의를 고쳐주는 치유의 실천적 가르침이기도 하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죄 사함 받는다는 것은 그대에게 기쁜 소식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독자를 주시고 그 아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다. 예수님은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고 선언하셨다. 심지어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부인하고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한 가야바조차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인정하였다(요 11:49~51).
| 적용 |
그대는 지금 어떤 문제로 인해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주목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 -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자는 회개와 용서는 오직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서만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보장을 가지고 죄인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루어진 사업과 일치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끈질긴 탄원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울며 매달림으로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자신의 영혼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3).
기도 : 어린 양이신 예수님, 대속적 희생으로 가당치 않은 이 죄인을 속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끄럽고 염치가 없으나 다시 사함을 얻기 위해 그리고 그 숭고한 정신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 지금도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넷째날(수) 죄로부터 자유함
7월 23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교사강해 4)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사랑의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주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보다 의로운 일은 없다 하셨다. 스펄전은 밤을 새워 어둠의 고통을 겪지 않고는 그 어둠의 고통을 알 수 없으며 눈물로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 하였다. 이처럼 고난에 함께 참여하지 않고서는 그 고통을 알 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한 자가 아니요 우리와 같이 한 결같이 시험을 받는 자'(히4:15) 하였으며 다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2:6,8) 증언하였다. 그러면 주께서 이처럼 천사보다 잠간 못하게 되어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을 저의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하였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생각을 요하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말한 '구원의 주'는 '구원의 대장'(KJV), 곧 우리를 대표하신 분을 말한 것이다. 대장이란 어떤 그룹의 총수로서 전쟁의 선두자이다. 여기서 '많은 아들'이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가르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한 번 죽는 것이 정하여진 인간의 대표 주자였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죽음을 맛보셔야 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이었으며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한 일이었다. 이것은 주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친히 우리의 대장, 우리의 대표가 되어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친히 구원할 자들의 대장이 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과 함께 영광에 들어가려 하려 하신 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죄의 노예이자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비롯되는 악한 충동의 노예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대신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 중심적인 방식으로 살았다. 영적인 노예 생활의 불가피한 결과는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눌린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다(눅 4:18). 이는 문자적인 의미의 포로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사탄의 포로를 뜻한다(막 5:1~20, 눅 8:1~2). 예수님은 헤롯에게 붙잡힌 침례 요한을 풀어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죄 많은 생활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내고 무거운 죄의 짐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셨다.
요 8:34~36을 읽어 보라. 이 말씀 속에는 어떤 위대한 약속이 있는가?
36절에 사용된 “참으로”라는 말은 실제로 하나님께 더 불순종하도록 옥죄는 거짓 자유가 세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청중들은 조상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자유를 줄 희망이라고 믿었다. 우리도 비슷한 위험에 처해 있다. 원수는 우리가 그리스도 대신 구원을 위하여 교리적 지식, 개인의 경건, 하나님을 위해 바친 봉사의 기록같이 다른 것에 의존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것의 중요성과 상관없이 죄와 그 정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능력이 없다. 우리를 해방시킬 유일한 분은 한 번도 죄의 노예가 된 적이 없는 아들 하나님뿐이시다.
예수님은 즐겨 죄를 사하셨다. 네 사람이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가 방탕한 삶의 결과로 병을 얻었지만 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다. 애원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서 예수님은 용서에 대한 갈망과 유일하게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분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셨다.
교훈 : 예수님은 영적으로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된 자들을 자유롭게 하시고 죄 사함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용서를 베푸신다.
부가적용)
시편기자는 그리스도의 그 고통과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시 22:14~17) 정말 예수님은 죄인처럼 짐승처럼 벌레처럼 죽으셨다. 예수님은 친히 죽음의 고난을 하나하나 맛보셨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고난을 친히 맛보신 것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죄 사함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용서를 베푸시기 위해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당신과 나의 모든 죄, 곧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 내게 흘러내리는 아담의 원죄와 조상들과 부모의 죄와 내가 알거나 모르고 지은 모든 죄까지 전부 그에게 담당시키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신 것이다. 나와 온 인류가 받을 죄의 댓가 곧 심판과 정죄와 죽음과 지옥(바로 이 땅이 지옥임)의 문제를 예수께서 모두 해결해 주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시고, 육체를 입으시고, 짐승처럼 어린양이 되시고, 마지막엔 스스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것은 당신과 나의 모든 죄의 문제를 다 담당하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은 역사적이고 사실적이고 체험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대속적(代贖的)이고 구속적인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용서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죄책감에서 자유롭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가운데 가장 달콤한 말씀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절망의 짐이 사라지고 그의 심령은 용서와 평화로 가득찼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과 육신의 치유를 찾았다.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어떤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눈물로 닦더니 향유를 부었다(눅 7:37~38). 그 바리새인의 거부감을 감지하시고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눅 7:47)라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그녀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눅 7:48)라고 말씀하셨다.
| 적용 |
그대는 지금 어떤 죄 때문에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 -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적게 신뢰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또한 우리를 통하여 하실 수 있는 것을 더욱 많이 신뢰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업을 하고 있다. 그대의 의지와 길을 그분께 맡겨라. 단 한 가지도 자신을 위하여 남겨두지 말고, 단 한 가지도 자신과 타협하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라”(가정과 건강, 336).
기도 : 주님, 제게도 들려 주옵소서.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부드러운 음성에 마음의 짐이 사라지고, 죄의 얽매임에서 놓여, 주님이 주신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게 하옵소서.
다섯째날(목)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심
7월 24일
교사강해 5)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저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고만 하시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말씀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가 “떡이시라”는 말씀도 또한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그냥 다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으셨을 것이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저 우리를 잠시 만나보고 가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사명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떡이 되시라고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신 것이다. 떡이 무엇인가? 양식이다. 우리가 먹을 양식이다. 우리가 먹어야 살고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양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먹히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로 택하신 이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그들을 위한 양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런 뜻에서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때 거르지 않고 부지런히 먹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가 당신을 먹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하셨다. 요6: 50-51절을 보라.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사람이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나 밥을 먹어서 살 수 있는 것은 잠시뿐이다. 밥은 매일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 또 아무리 부지런히 밥을 잘 먹어도 언젠가는 다 죽는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은 자들도 다 죽었는데 그것은 육의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들을 위해서는 영생의 양식을 주셨는데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있는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그를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에로 구원하신 백성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실 우리 귀에 불경스럽게 들리기도 하고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겠는가? 우리가 식인종도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우리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먹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 요 6: 47-48절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하신 말씀이 답이다. 생명의 떡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영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그를 먹는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또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모든 사람에게 유일하신 구원자이시라는 것과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기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며 그를 믿기만 하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받으며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미 요3:16에서 예수님 자신이 보다 간결하게 요약해주셨음을 보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믿음을 갖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떡으로 먹는다는 말의 기본적인 뜻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청구된 죽음의 죄값을 지불하셨다. 순결하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심으로 죄를 지은 우리는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요 3:15은 우리에게 이같이 놀라운 약속을 준다. 그리고 요 3:16에 이 약속은 다시 반복된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어떤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지라도 영생에 대한 약속은 오직 그분이 재림하신 후에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원의 약속은 현재형으로 표현되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요 3:36).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현재 “영생을 얻었고” 마지막 날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요 5:24)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어 무덤에 잠들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시적인 휴식이 영생의 실제성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실 때, 우리의 삶은 새로운 의미를 얻고, 우리는 더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만족시키는 세상의 쾌락 대신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 즉 그분 안에서 끝없이 샘솟는 만족감으로 충만한 삶을 제공하신다. 이같이 새롭고 풍성한 삶은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육체적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해 여러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분은 그들에게 죄로부터 깨끗해지고, 그분에 대한 믿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한, 영적으로 새로워진 생명을 주기 바라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은유를 사용하셨는가? 그것은 매일의 실제적인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요 6:35, 47~51)
교훈 :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금부터 영생을 소유한다. 그들은 세상이 주는 쾌락과는 달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만족으로 충만한 삶을 누린다.
부가적용)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기본적인 고백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르치신 모든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바르게 깨달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운다는 뜻으로 그의 말씀을 먹는 것이 곧 그를 먹는다는 말의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지적으로 아는 것만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 안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이고 그가 매라 하신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메고 그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그의 말씀을 먹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머리로 먹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먹고 삶으로 먹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는 일이며 영생을 소유한 사람의 삶이 되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이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을 무엇을 통해 확신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은 미래의 어느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영접하면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죽으면 잠들 수밖에 없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잠든 자들에게는 시들지 않는 생명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의 시간 위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생명밖에 보장 받지 못한 이들처럼 조급할 것도, 두려울 것도 그리고 싸우고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사람은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에서 최고의 행복을 경험합니다.
| 적용 |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영생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길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 영생의 시작 - “그리스도를 그 진정한 품성 그대로 보고 그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믿음으로 마음에 성령을 받아들일 때 곧 영생이 시작된다”(시대의 소망, 388).
기도 : 주님, 제게 주신 영원한 생명이 제 삶 속에 자라게 하시고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과 평안, 기쁨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이 이르기까지 영생이 머무는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지 않도록 제 생각과 마음을 지켜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7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17~22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함”, <가려 뽑은 기별 1권>, 350~354 “1883년에 제시된 문제”를 읽어 보라.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루신 희생이 얼마나 크고 의미 심장한 것인지를 더욱 충분히 깨닫게 된다. 구속의 경륜은 우리 앞에서 영광스럽게 빛나고 갈보리의 사상은 우리 마음속에 활력 있고 신성한 감격을 일깨운다.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돌리는 찬양이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있을 것이니 이는 갈보리의 장면들을 기억 속에 생생하게 간직하는 영혼들에게는 교만과 자아숭배가 번성할 수 없는 까닭이다.
구주의 다함이 없는 사랑을 바라보는 자는 사상이 향상되고, 마음이 순결하게 되며, 품성이 변화될 것이다. 그는 나아가 세상의 빛이 될 것이며 이 오묘한 사랑을 반사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고 말한 사도의 말을 더욱 완전히 받아들일 것이다”(시대의 소망, 66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구원은 선물입니다. 즉 무상으로 제공됩니다. 그래도 뭔가 대가가 있지 않을까요? 이 선물을 받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엇일까요? 그 대가가 무엇이든 구원이 그보다 더 값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➋ 월요일에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계획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성경절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3).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➌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과 선행 그리고 율법의 준수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면,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으로만 속죄할 수 있다면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7월 2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6분
기억절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개역).
도입)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지 태어났다가는 죽는다. 그런데 성경에서 영생을 한다고 하는 말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말씀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장18절) 세상 사람의 생각으로는 믿을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지라고 강조한 원인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신앙인들 가운데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교회만 나오는 것으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께서 나의 허물과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받을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것과 세 번째는 내가 다시금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세 가지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예수님이 나의 허물과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고 했는데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전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살면서 윤리 도덕을 지키며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들 가운데 석가나 공자나 맹자 같은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은 의인이 아닌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들도 역시 죄 때문에 죽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도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다.
연구 범위 : 눅 18:9~14, 요 6:44, 눅 15:3~10, 마 20:28, 요 8:34~36, 요 6:35, 요 6:47~51.
*신자들과 반생들이 서로 공부하도록 권합시다.
우리는 종종 죽음은 삶의 일부라고 말한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일부가 아닌 삶의 반대이다. 그러나 죽음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우리는 그 본질을 정반대로 인식하여 분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든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 모두가 영원한 죽음에 처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러한 도움이 이르러왔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천사가 메시아의 탄생을 알렸을 때 그는 그분을 ‘예수’ 곧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고 불렀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구원의 사역을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우리는 구원의 기초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그다음 그 결과에 대해 연구하려고 한다.
성경의 논지는 분명하다. 죄에 관하여 우리는 불못에서 죄값을 치르든지 아니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선물을 연구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는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기를 바란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영생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제안이 우주적인 죽음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임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죄의 영향력과 형벌뿐 아니라 그 결과인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경험한다.
➌ 행하기 :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으나 관대하게 제공되는 영생을 받아들인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가 평소에 가장 큰 해방감을 누릴 때는 언제입니까?
❷ 그대는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구원이 바로 해방과 자유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❸ 우리가 구원을 누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지금부터 누릴 영생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B. ❶ 그대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❷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떻게 다가오셨는지 각자 말해 봅시다.
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서 어떤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까?
❹ 주님이 우리 주위에서 찾으려는 잃은 양은 누구이며, 우리는 그를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결론 :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 우리를 완전하게 해방시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침례 받을 분들을 어떻게 특별하게 축하할지 계획합니다.
❷ 여름 장막회를 기점으로 영혼의 추수를 어떻게 지속시킬지 상의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7월 20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교사강해 1)
어떤 전도사가 석탄광 속에 들어가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광부들에게 하나님의 값없는 구원을 가르쳐 전도하였다. 일할 시간이 되자 전도사는 탄광을 나오면서 광부에게 아까 한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한 광부가 "값이 너무 헐해서 그런 종교는 믿어지지가 않소." 하고 대답했다. 전도사는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승강기 앞에 서서 "이제 이 탄광을 나가려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거야 타고 올라가면 그만이지요."
"위까지 올라가는데 한참 걸립니까?"
"한 3분밖에 안 걸립니다."
"그럼 나는 애쓸 필요가 없군요."
"맞습니다. 당신은 그냥 타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 탄광을 파고 이만한 장치를 한 사람은 힘도 들고 돈도 많이 들었겠네요."
"그거야 그렇지요. 이 지상에서 500m 아래에 있지요. 주인이 돈 쓴거야 말할 수 없지요."
"네, 옳은 말씀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 말씀에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 다고 했는데, 당신은 `너무 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멸망과 사망의 굴에서 당신들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께서 죽으시니 막대한 비용을 들였답니다."라고 말했다.
인도(印度)에서 사역하시던 어느 선교사님이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에요”라고 설명하자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고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며 계속 반문했다고 한다. 선교사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냥 값없이 구원을 주셨어요”라고 설명하니까 그제야 조금 이해하는 듯 하더랍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던 한 자매가 자신의 목걸이를 가리키며 이런 말을 했다. “아, 그러면 구원이 제 진주 목걸이 같겠군요. 저를 사랑하던 애인이 저를 위해 진주를 따다가 죽고 말았어요. 이 목걸이는 그가 남겨준 진주를 가지고 만든 거예요. 제가 애인에게 공짜로 받은 것이지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선물이죠. 하나님의 구원도 값으로 따질 수없는 선물이란 말이군요.” 그 자매의 말을 듣는 순간 선교사님도 퍼뜩 깨달았다. ‘그래 맞아! 구원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야!’ 이 선물을 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 바로 구원이다.
요 3:16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을 묘사하기 위해 두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 두 동사는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두 동사는 우리의 구원의 출처에 관하여 무엇을 밝히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동사 ‘아가파오(사랑하다)’가 설명하는 세심한 관심의 깊이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부적합하다. 신약성경에서 ‘아가파오’와 명사형 ‘아가페(사랑)’는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피조물들에 대한 그분의 깊고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낸다. 사랑은 하나님의 품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속성이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사랑이시다(요일 4:8).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감정이나 기호에 기초한 충동적 반응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은 선별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을 즉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 거기에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도 포함된다.
진정한 사랑은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으로 증명된다. 종종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정반대를 증명하곤 한다(요일 3:17~18).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분의 행동에는 그분의 사랑이 반영되어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하신 아들을 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즉 자기 자신을 주셨다.
눅 18:9~14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교훈 :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에 대한 심오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며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시고 거저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 증명되었다.
부가적용)
구원은 값없이 거저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 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고는 있지만 구원의 가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너무나 비싼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주신 그 큰 구원을 값싼 구원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 같다. 구원의 가치를 모르면 아무도 그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구원을 가치 없이 여기는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구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그 구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왜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 받는 원리를 이해하기 어려워 할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우리는 이 비유를 너무 많이 읽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 18:14)는 예수님의 선언에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이는 불공평한 결론이지 않은가? 맞다. 완전히 부당한 결과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 주어지는 방식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이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살 수 없고 단지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은혜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시지 않았지만 구원이 은혜로 주어졌으며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 적용 |
그대가 구원을 거저 받았으니 이제는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 놀라운 은혜의 나타남 - “죄인은 하나님의 율법의 신령함과 그 영원한 구속력을 본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죄된 인간을 위한 대치물과 담보를 마련하신 것에서 보게 되는 바 그 대치물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다. 세상에 대한 구원의 선물을 통한 이러한 은혜의 나타남은 죄인을 놀라움으로 차게 한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이 사랑은 모든 장벽을 허물어 버린다”(가려 뽑은 기별 3권, 194).
기도 : 모든 것 주시는 아버지, 마침내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 갚을 길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고, 좋으신 우리 아버지 자랑하며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구원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계획
7월 21일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교사강해 2)
우리 모두는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으로 판단하려고 한다. 당연히 우리는 중요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눈에 사랑스러운 것들이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별 볼일 없는 중요하지 않는 카테고리에 넣어서 분류해 버리려고 한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가치는 사람 목록에서부터 배제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저기 밖에 있는” 사람들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일주일 동안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동시에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던 주님께서 가장 싫어한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위에 무의식적으로 많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 그런 생각들을 은근히 하고 있다. 주인공에 해당하는 여러분들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전혀 나쁠 건 없다. 기분이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일 뿐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생각은 깨트려 져야 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자이다. 구원이 필요한 자이며 반드시 찾아야 할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 중의 하나인 것이다.
단순히 복음서를 읽기만 해도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가 초청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을 인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신 “나를 보내신 이” 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는 구절은 이것이 ‘아버지가 주도하신 계획’임을 확증한다(요 7:28, 8:29, 12:49).
요 6:44에 따르면 아버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또 어떤 일을 하시는가?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아들을 통해 죄사함을 받도록 방도를 마련하셨다(요일 4:10).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이로운 사랑이다.
우리의 구원에는 아버지만 개입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도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하신다. 그분은 매우 뚜렷한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우리가 지상에서 올리우신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은 우리를 자신께로 이끄신다(요 12:32).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기꺼이 애를 쓰시는가?(눅 15:3~10)
이 두 비유는 하나님이 우리가 오기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우리를 찾아 나서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다.
우리가 곁길로 빠졌든지, 멀리 위험한 장소에 있든지 아니면 집에서 영적인 길을 잃었든지 상관없다. 주님은 우리를 발견할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열성으로 우리를 찾으신다.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어버리자마자 목자의 마음은 슬픔과 근심으로 가득찼다. 그는 양을 세어 보고 또 세어 본다.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실물교훈, 188).
교훈 :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도적인 계획을 세우셨다. 그분은 우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부가적용)
우리 모두는 과거에는 길 잃은 양과 같이 갈길 모르는 채 이러 저리로 헤매며 죄와 무의미, 허무 속에서 방황하며 고통 했던 존재들이었다. 인생의 구원의 길을 찾으려 해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보겠다며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기도 하고 한다. 누구를 만나면 자기의 이 방황이 끝이 날 수 있겠고 또 외롭고 상처 난 내 마음에 누가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사람을 찾기도 한다. 훌륭한 사람들의 강의를 들어보기도 하고, 자기 마음을 위로해줄 이성을 사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문제가 이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다가온 운명의 짐을 너무 버거워하며 막막한 자신의 인생길을 끝내고자 자살하기도 한다. 온 세상이 다 고통하고 방황하고 있다. 세상에는 우리를 위한 근본대책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길 잃고 헤매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와 한없는 겸손으로 만나시고 영접하시고 구원해주신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자신이 혹시 집 안에서 잃어버린 동전과 같은 존재는 아닐지 생각해 보십시오.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간다. 밤이 어두워질수록 비바람이 심해질수록 목자의 염려는 더욱 커져 더 열심히 찾는다. 그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한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양의 울음소리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에 그는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실물교훈, 188)
| 적용 |
다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를 우리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 생명을 건 구출 - “그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가파른 고개를 기어오르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의 가장자리를 지나기도 하면서 소리 나는 그곳으로 간다. 그가 그렇게 양을 찾아가는 동안 양의 울음 소리가 점점 희미해가는 것을 듣고 그 양이 거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침내 그렇게 노력한 보람이 있어 잃었던 양을 찾게 된다”(실물교훈, 188).
기도 : 아무도 찾지 않고 버려진 동전 같은 저를 발견하고, 갈 길을 잃고 신음하는 저를 구해 주신 주님,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고 얻은 기쁨을 저도 맛보기를 원하오니 주님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게 하시고 누구를 주님께 인도해야 할지 알게 하옵소서.
셋째날(화) 필수적인 죽음
7월 22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교사강해 3)
왜 예수께서 속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셔야 하였는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우주적 사면령을 발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마치 대통령이 특별한 절기에 베푸는 특사나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모른 채하고 눈감아 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그로티우스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우주통치권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우주적 통치자로서 질서를 파괴하는 사탄과 달리 우주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으셨으며, 따라서 범죄를 마음대로 용서해 줄 수 없고 공정한 절차와 방법을 사용해야 하셨다. 만일 어떤 통치자가 어떤 사람에게는 법을 적용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의 법집행적 권위는 실추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을 가르치신 예수님이 자기 교회를 세우기에 앞서 먼저 치리제도를 설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완전한 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있는 하나님이 인류의 범죄를 용서해 주려는 사랑의 마음을 가졌을 때, 과연 어떤 해결책이 가능하였을까? 정의와 사랑의 두 원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해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었다. 구약시대의 엄격한 제사제도가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범죄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간과될 수 없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신적 원리였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은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서 자기를 속죄할 자격이 없었으며, 따라서 인간의 구속은 외부로부터(extra nos) 온, 그러면서도 인류를 대신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했고, 모든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전능하고 의로운 신적 대표여야 했다. 그래서 안셈은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에서, 신의 정의와 사랑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구속을 성취하였다는 만족설을 주창하였으며, 모든 교회가 이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것이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묘사했다. 성전에서 바쳐지는 제물과 구약에 기록된 거룩한 역사에 익숙한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이 은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는 믿음을 나타냈고 여호와는 이삭을 대신하여 제물로 바칠 한 동물을 준비하셨다(창 22:13).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잡은 어린 양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했다(출 12:1~13). 성소제도가 마련되자 아침과 해질 무렵에 한 마리씩, 매일 두 마리의 양이 제단의 제물로 바쳐졌다(출 29:38~39). 모든 제물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기 때문에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 같았다(사 53:6~7). 따라서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소개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께서 맞이할 죽음의 대속적 속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죽으셔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예수님은 사역 기간 내내 반복적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셨다(마 16:22). 그리고 점차 자신이 죽어야 하는 중대한 목적을 설명하셨다.
우리의 대속물로서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가리키기 위해 예수님은 어떤 예증을 사용하셨는가?(마 20:28, 요 10:11)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이런 희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한다 해도 이 말씀은 진실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마 26:28) 피를 흘리셨다.
교훈 : 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에서 예언했고 침례 요한이 소개했으며 예수님 본인도 설명하셨던 것처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자발적이고 대속적인 죽음이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실현하시되 죄인에 대한 미움으로 단순히 형벌을 가하는 방법이 아니라, 형벌을 가하되 그가 가장 사랑하는 성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식으로 정의와 사랑을 둘 다 아름답게 자기희생적으로 만족 시키셨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 가할 채찍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대신 때리는 사랑의 정의, 그것이 십자가의 대속이었다. 사랑의 정의가 진정한 정의이며, 정의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다. 따라서, 십자가는 범죄한 인류의 잘못된 사랑과 정의를 고쳐주는 치유의 실천적 가르침이기도 하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죄 사함 받는다는 것은 그대에게 기쁜 소식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독자를 주시고 그 아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다. 예수님은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고 선언하셨다. 심지어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부인하고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한 가야바조차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인정하였다(요 11:49~51).
| 적용 |
그대는 지금 어떤 문제로 인해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주목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 -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자는 회개와 용서는 오직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서만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보장을 가지고 죄인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루어진 사업과 일치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끈질긴 탄원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울며 매달림으로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자신의 영혼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3).
기도 : 어린 양이신 예수님, 대속적 희생으로 가당치 않은 이 죄인을 속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끄럽고 염치가 없으나 다시 사함을 얻기 위해 그리고 그 숭고한 정신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 지금도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넷째날(수) 죄로부터 자유함
7월 23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교사강해 4)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사랑의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주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보다 의로운 일은 없다 하셨다. 스펄전은 밤을 새워 어둠의 고통을 겪지 않고는 그 어둠의 고통을 알 수 없으며 눈물로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 하였다. 이처럼 고난에 함께 참여하지 않고서는 그 고통을 알 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한 자가 아니요 우리와 같이 한 결같이 시험을 받는 자'(히4:15) 하였으며 다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2:6,8) 증언하였다. 그러면 주께서 이처럼 천사보다 잠간 못하게 되어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을 저의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하였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생각을 요하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말한 '구원의 주'는 '구원의 대장'(KJV), 곧 우리를 대표하신 분을 말한 것이다. 대장이란 어떤 그룹의 총수로서 전쟁의 선두자이다. 여기서 '많은 아들'이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가르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한 번 죽는 것이 정하여진 인간의 대표 주자였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죽음을 맛보셔야 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이었으며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한 일이었다. 이것은 주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친히 우리의 대장, 우리의 대표가 되어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친히 구원할 자들의 대장이 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과 함께 영광에 들어가려 하려 하신 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죄의 노예이자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비롯되는 악한 충동의 노예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대신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 중심적인 방식으로 살았다. 영적인 노예 생활의 불가피한 결과는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눌린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다(눅 4:18). 이는 문자적인 의미의 포로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사탄의 포로를 뜻한다(막 5:1~20, 눅 8:1~2). 예수님은 헤롯에게 붙잡힌 침례 요한을 풀어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죄 많은 생활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내고 무거운 죄의 짐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셨다.
요 8:34~36을 읽어 보라. 이 말씀 속에는 어떤 위대한 약속이 있는가?
36절에 사용된 “참으로”라는 말은 실제로 하나님께 더 불순종하도록 옥죄는 거짓 자유가 세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청중들은 조상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자유를 줄 희망이라고 믿었다. 우리도 비슷한 위험에 처해 있다. 원수는 우리가 그리스도 대신 구원을 위하여 교리적 지식, 개인의 경건, 하나님을 위해 바친 봉사의 기록같이 다른 것에 의존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것의 중요성과 상관없이 죄와 그 정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능력이 없다. 우리를 해방시킬 유일한 분은 한 번도 죄의 노예가 된 적이 없는 아들 하나님뿐이시다.
예수님은 즐겨 죄를 사하셨다. 네 사람이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가 방탕한 삶의 결과로 병을 얻었지만 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다. 애원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서 예수님은 용서에 대한 갈망과 유일하게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분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셨다.
교훈 : 예수님은 영적으로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된 자들을 자유롭게 하시고 죄 사함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용서를 베푸신다.
부가적용)
시편기자는 그리스도의 그 고통과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시 22:14~17) 정말 예수님은 죄인처럼 짐승처럼 벌레처럼 죽으셨다. 예수님은 친히 죽음의 고난을 하나하나 맛보셨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고난을 친히 맛보신 것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죄 사함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용서를 베푸시기 위해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당신과 나의 모든 죄, 곧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 내게 흘러내리는 아담의 원죄와 조상들과 부모의 죄와 내가 알거나 모르고 지은 모든 죄까지 전부 그에게 담당시키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신 것이다. 나와 온 인류가 받을 죄의 댓가 곧 심판과 정죄와 죽음과 지옥(바로 이 땅이 지옥임)의 문제를 예수께서 모두 해결해 주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시고, 육체를 입으시고, 짐승처럼 어린양이 되시고, 마지막엔 스스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것은 당신과 나의 모든 죄의 문제를 다 담당하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은 역사적이고 사실적이고 체험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대속적(代贖的)이고 구속적인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용서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죄책감에서 자유롭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가운데 가장 달콤한 말씀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절망의 짐이 사라지고 그의 심령은 용서와 평화로 가득찼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과 육신의 치유를 찾았다.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어떤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눈물로 닦더니 향유를 부었다(눅 7:37~38). 그 바리새인의 거부감을 감지하시고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눅 7:47)라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그녀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눅 7:48)라고 말씀하셨다.
| 적용 |
그대는 지금 어떤 죄 때문에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 -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적게 신뢰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또한 우리를 통하여 하실 수 있는 것을 더욱 많이 신뢰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업을 하고 있다. 그대의 의지와 길을 그분께 맡겨라. 단 한 가지도 자신을 위하여 남겨두지 말고, 단 한 가지도 자신과 타협하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라”(가정과 건강, 336).
기도 : 주님, 제게도 들려 주옵소서.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부드러운 음성에 마음의 짐이 사라지고, 죄의 얽매임에서 놓여, 주님이 주신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게 하옵소서.
다섯째날(목)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심
7월 24일
교사강해 5)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저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고만 하시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말씀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가 “떡이시라”는 말씀도 또한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그냥 다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으셨을 것이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저 우리를 잠시 만나보고 가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사명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떡이 되시라고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신 것이다. 떡이 무엇인가? 양식이다. 우리가 먹을 양식이다. 우리가 먹어야 살고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양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먹히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로 택하신 이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그들을 위한 양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런 뜻에서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때 거르지 않고 부지런히 먹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가 당신을 먹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하셨다. 요6: 50-51절을 보라.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사람이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나 밥을 먹어서 살 수 있는 것은 잠시뿐이다. 밥은 매일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 또 아무리 부지런히 밥을 잘 먹어도 언젠가는 다 죽는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은 자들도 다 죽었는데 그것은 육의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들을 위해서는 영생의 양식을 주셨는데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있는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그를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에로 구원하신 백성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실 우리 귀에 불경스럽게 들리기도 하고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겠는가? 우리가 식인종도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우리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먹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 요 6: 47-48절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하신 말씀이 답이다. 생명의 떡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영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그를 먹는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또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모든 사람에게 유일하신 구원자이시라는 것과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기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며 그를 믿기만 하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받으며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미 요3:16에서 예수님 자신이 보다 간결하게 요약해주셨음을 보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믿음을 갖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떡으로 먹는다는 말의 기본적인 뜻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청구된 죽음의 죄값을 지불하셨다. 순결하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심으로 죄를 지은 우리는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요 3:15은 우리에게 이같이 놀라운 약속을 준다. 그리고 요 3:16에 이 약속은 다시 반복된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어떤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지라도 영생에 대한 약속은 오직 그분이 재림하신 후에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원의 약속은 현재형으로 표현되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요 3:36).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현재 “영생을 얻었고” 마지막 날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요 5:24)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어 무덤에 잠들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시적인 휴식이 영생의 실제성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실 때, 우리의 삶은 새로운 의미를 얻고, 우리는 더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만족시키는 세상의 쾌락 대신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 즉 그분 안에서 끝없이 샘솟는 만족감으로 충만한 삶을 제공하신다. 이같이 새롭고 풍성한 삶은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육체적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해 여러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분은 그들에게 죄로부터 깨끗해지고, 그분에 대한 믿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한, 영적으로 새로워진 생명을 주기 바라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은유를 사용하셨는가? 그것은 매일의 실제적인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요 6:35, 47~51)
교훈 :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금부터 영생을 소유한다. 그들은 세상이 주는 쾌락과는 달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만족으로 충만한 삶을 누린다.
부가적용)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기본적인 고백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르치신 모든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바르게 깨달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운다는 뜻으로 그의 말씀을 먹는 것이 곧 그를 먹는다는 말의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지적으로 아는 것만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 안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이고 그가 매라 하신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메고 그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그의 말씀을 먹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머리로 먹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먹고 삶으로 먹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는 일이며 영생을 소유한 사람의 삶이 되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이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을 무엇을 통해 확신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은 미래의 어느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영접하면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죽으면 잠들 수밖에 없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잠든 자들에게는 시들지 않는 생명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의 시간 위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생명밖에 보장 받지 못한 이들처럼 조급할 것도, 두려울 것도 그리고 싸우고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사람은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에서 최고의 행복을 경험합니다.
| 적용 |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영생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길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 영생의 시작 - “그리스도를 그 진정한 품성 그대로 보고 그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믿음으로 마음에 성령을 받아들일 때 곧 영생이 시작된다”(시대의 소망, 388).
기도 : 주님, 제게 주신 영원한 생명이 제 삶 속에 자라게 하시고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과 평안, 기쁨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이 이르기까지 영생이 머무는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지 않도록 제 생각과 마음을 지켜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7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17~22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함”, <가려 뽑은 기별 1권>, 350~354 “1883년에 제시된 문제”를 읽어 보라.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루신 희생이 얼마나 크고 의미 심장한 것인지를 더욱 충분히 깨닫게 된다. 구속의 경륜은 우리 앞에서 영광스럽게 빛나고 갈보리의 사상은 우리 마음속에 활력 있고 신성한 감격을 일깨운다.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돌리는 찬양이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있을 것이니 이는 갈보리의 장면들을 기억 속에 생생하게 간직하는 영혼들에게는 교만과 자아숭배가 번성할 수 없는 까닭이다.
구주의 다함이 없는 사랑을 바라보는 자는 사상이 향상되고, 마음이 순결하게 되며, 품성이 변화될 것이다. 그는 나아가 세상의 빛이 될 것이며 이 오묘한 사랑을 반사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고 말한 사도의 말을 더욱 완전히 받아들일 것이다”(시대의 소망, 66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구원은 선물입니다. 즉 무상으로 제공됩니다. 그래도 뭔가 대가가 있지 않을까요? 이 선물을 받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엇일까요? 그 대가가 무엇이든 구원이 그보다 더 값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➋ 월요일에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계획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성경절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3).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➌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과 선행 그리고 율법의 준수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면,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으로만 속죄할 수 있다면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댓글목록
최성현님의 댓글
최성현 작성일늘 정성스럽게 교과준비를 해 주시는 목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특별히 이번 주 일요일 소지의 구원에 예화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조춘호님의 댓글
조춘호 작성일늘 열심히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격려까지..건강하시고 늘 강건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