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구원(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7/26/14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4과 구원(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7/26/14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7-18 03:08 조회8,216회 댓글0건

본문

7월 2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6분

기억절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개역).

연구 범위 : 눅 18:9~14, 요 6:44, 눅 15:3~10, 마 20:28, 요 8:34~36, 요 6:35, 요 6:47~51.

우리는 종종 죽음은 삶의 일부라고 말한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일부가 아닌 삶의 반대이다. 그러나 죽음에 너무 익숙해지다보니 우리는 그 본질을 정반대로 인식하여 분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든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 모두가 영원한 죽음에 처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러한 도움이 이르러왔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천사가 메시아의 탄생을 알렸을 때 그는 그분을 ‘예수’ 곧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고 불렀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구원의 사역을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우리는 구원의 기초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그다음 그 결과에 대해 연구하려고 한다.
성경의 논지는 분명하다. 죄에 관하여 우리는 불 못에서 죄 값을 치르든지 아니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선물을 연구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는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기를 바란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영생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제안이 우주적인 죽음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임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죄의 영향력과 형벌뿐 아니라 그 결과인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경험한다.
➌ 행하기 :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으나 관대하게 제공되는 영생을 받아들인다.

A.
❷ 그대는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구원이 바로 해방과 자유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 그것은 죄, 곧 사망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 깨닫는다.
❸ 우리가 구원을 누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사망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 그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을 드러내셔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존재가 이미 사망이기 때문에 죽으면 생명을 얻을 길이 없다.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사망을 처리하시고 생명을 드러낼 수 있으므로 말씀하나님이이 사람되어 예수(구주)라는 이름으로 오셔서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여 생명을 드러내신 것이다.  
❹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지금부터 누릴 영생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 하나님 나라를 보며 사는 것이다. 영생 예매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B.
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서 어떤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까?
※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생활한다.
❹ 주님이 우리 주위에서 찾으려는 잃은 양은 누구이며, 우리는 그를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 생명의 복음을 깨닫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예수께서 생명이 되심을 깨닫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실상이고 원수도 사랑하는 정신이다.

결론 :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 우리를 완전하게 해방시킵니다.


첫째날(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7월 20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1. 요 3:16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을 묘사하기 위해 두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 두 동사는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두 동사는 우리의 구원의 출처에 관하여 무엇을 밝히고 있는가?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답: 이처럼 사랑하셨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셨다.

오늘날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동사 ‘아가파오(사랑하다)’가 설명하는 세심한 관심의 깊이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부적합하다. 신약성경에서 ‘아가파오’와 명사형 ‘아가페(사랑)’는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피조물들에 대한 그분의 깊고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낸다. 사랑은 하나님의 품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속성이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사랑이시다(요일 4:8).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감정이나 기호에 기초한 충동적 반응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은 선별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을 즉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 거기에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도 포함된다.
진정한 사랑은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으로 증명된다. 종종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정반대를 증명하곤 한다(요일 3:17~18).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분의 행동에는 그분의 사랑이 반영되어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하신 아들을 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즉 자기 자신을 주셨다.
우리는 이 비유를 너무 많이 읽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 18:14)는 예수님의 선언에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이는 불공평한 결론이지 않은가? 맞다. 완전히 부당한 결과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 주어지는 방식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이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살 수 없고 단지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은혜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시지 않았지만 구원이 은혜로 주어졌으며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2. 눅 18:9~14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눅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답: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굴복하는 태도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부가설명> 아가페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사도요한의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깨닫게 한다. 물론 요3:16도 그 사랑의 성질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만 요일4:9은 더욱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리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3:3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기록하였다. 자기 있는 것을 다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면 인간적 관점에서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그래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하든지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아담의 후손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려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정신  없이 도덕적으로 베푸는 사랑도 아주 좋은 것이지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한 바로 그런 사랑이 되는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에 대한 심오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며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시고 거저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 증명되었다.


둘째날(월) 구원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계획
7월 21일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단순히 복음서를 읽기만 해도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가 초청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을 인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신 “나를 보내신 이” 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는 구절은 이것이 ‘아버지가 주도하신 계획’임을 확증한다(요 7:28, 8:29, 12:49).

1. 요 6:44에 따르면 아버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또 어떤 일을 하시는가?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답: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예수께로 이끄시는 일도 하신다.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아들을 통해 죄사함을 받도록 방도를 마련하셨다(요일 4:10).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이로운 사랑이다.
우리의 구원에는 아버지만 개입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도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하신다. 그분은 매우 뚜렷한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우리가 지상에서 올리우신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은 우리를 자신께로 이끄신다(요 12:32).

2.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기꺼이 애를 쓰시는가?(눅 15:3~10)
[눅15:3~10]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답: 잃은 양을 찾는 선한 목자처럼, 은전을 잃은 주부처럼 부지런히 찾을 때까지 찾으신다.

이 두 비유는 하나님이 우리가 오기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우리를 찾아 나서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다.
우리가 곁길로 빠졌든지, 멀리 위험한 장소에 있든지 아니면 집에서 영적인 길을 잃었든지 상관없다. 주님은 우리를 발견할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열성으로 우리를 찾으신다.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어버리자마자 목자의 마음은 슬픔과 근심으로 가득찼다. 그는 양을 세어 보고 또 세어 본다.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실물교훈, 188).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간다. 밤이 어두워질수록 비바람이 심해질수록 목자의 염려는 더욱 커져 더 열심히 찾는다. 그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한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양의 울음소리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에 그는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실물교훈, 188)

<부가설명>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는 세상에 사는 구원받아야할 세 부류의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잃은 양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잃어버려진 줄 알지만 스스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잃은 은전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잃어버려진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대표하며 아울러 집안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암시한다. 어쩌면 교회에 다니면서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마지막 탕자는 잃어버려진 것도 알고 돌아갈 길도 아는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여기 목자나, 은전을 찾는 주부나, 탕자의 아버지는 모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나타내며 잃어버린 사실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를 드러낸다. 사실 양이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도망한 것이 아니겠는가. 책임이 전적으로 양과 탕자에게 있다. 그러나 양을 찾는 목자는 “내가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탕자의 아버지는 “내 아들은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고 말한다. 얼마나 극진한 사랑이며 잃은 상태에 빠진 것을 양이나 아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너그러운 하나님의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의 본심이다.(애3:22,23,33 참고)

교훈 :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도적인 계획을 세우셨다. 그분은 우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셋째날(화) 필수적인 죽음
7월 22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묘사했다. 성전에서 바쳐지는 제물과 구약에 기록된 거룩한 역사에 익숙한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이 은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는 믿음을 나타냈고 여호와는 이삭을 대신하여 제물로 바칠 한 동물을 준비하셨다(창 22:13).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잡은 어린 양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했다(출 12:1~13). 성소제도가 마련되자 아침과 해질 무렵에 한 마리씩, 매일 두 마리의 양이 제단의 제물로 바쳐졌다(출 29:38~39). 모든 제물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기 때문에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았다(사 53:6~7). 따라서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소개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께서 맞이할 죽음의 대속적 속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죽으셔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예수님은 사역 기간 내내 반복적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셨다(마 16:22). 그리고 점차 자신이 죽어야 하는 중대한 목적을 설명하셨다.

1. 우리의 대속물로서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가리키기 위해 예수님은 어떤 예증을 사용하셨는가?(마 20:28, 요 10:11)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답: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준다는 말씀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으로 예증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이런 희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한다 해도 이 말씀은 진실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마 26:28) 피를 흘리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독자를 주시고 그 아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다. 예수님은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고 선언하셨다. 심지어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부인하고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한 가야바조차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인정하였다(요 11:49~51).

<부가설명> 예수께서 구주로 오셔서 왜 꼭 주어야만 할까? 구주는 원수보다 강해서 구원해야할 대상을 원수에게 빼앗아오면 되고 원수를 처리하면 되는데 말이다. 왜 구약은 구주가 죽어야 한다고 예언했을까? 사람들이 명확한 대답을 잘 내놓지 않는 것 같다. 증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할 때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깨어진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의 생명을 요구하였다. 온 우주에서 사람을 위하여 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이는 한 분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 자신처럼 거룩하므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만이 범법을 속죄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밖에는 아무도 타락한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하늘과 조화시킬 수 없었다”(부조와 선지자, 63). 올바른 표현이지만 합리적인 이해를 하도록 하는 말은 아니다. 율법을 범할 때 왜 생명이 요구되는가?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 자신처럼 거룩하기 때문에 그 율법을 범한 것은 하나님을 범한 것과 같으므로 생명을 요구한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죄인을 살려주시려는 분인데 그 율법을 범한 죄로 죽을 수밖에 없도록 하셨을까? 사실 이 문제는 율법을 범하는 상태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필 때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하셨다.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의 생명을 거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생명을 회수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자발적인 의지로 한 것이 아니고 유혹에 현혹되어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다시 생명 얻을 기회를 허락하신 것이 구원의 경륜이다. 그러나 사람이 거절한 그 생명은 회수 되어야 한다. 사람에게서 생명을 회수하면 사람은 끝난다. 그래서 생명을 회수해도 다시 스스로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분이 사람이 되어 회수되어야만 하는 그 생명을 내어주고 그리고 자존하는 능력으로 생명을 회복할 때 사람들은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여호와이신 예수께서 그 생명을 내어주시고 다시 생명으로 일어나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요10:18) 성경이 가르치는 대속의 도리를 간단히 말해본 것인데, 사실은 많은 설명이 필요한 내용이지만 엄청 은혜로운 사건이다.

교훈 : 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에서 예언했고 침례 요한이 소개했으며 예수님 본인도 설명하셨던 것처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자발적이고 대속적인 죽음이었다.


넷째날(수) 죄로부터 자유함
7월 23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죄의 노예이자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비롯되는 악한 충동의 노예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대신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방식으로 살았다. 영적인 노예 생활의 불가피한 결과는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눌린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다(눅 4:18). 이는 문자적인 의미의 포로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사탄의 포로를 뜻한다(막 5:1~20, 눅 8:1~2). 예수님은 헤롯에게 붙잡힌 침례 요한을 풀어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죄 많은 생활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내고 무거운 죄의 짐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셨다.

1. 요 8:34~36을 읽어 보라. 이 말씀 속에는 어떤 위대한 약속이 있는가?
[요8:34~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답: 사망을 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다.

36절에 사용된 “참으로”라는 말은 실제로 하나님께 더 불순종하도록 옥죄는 거짓 자유가 세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청중들은 조상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자유를 줄 희망이라고 믿었다. 우리도 비슷한 위험에 처해 있다. 원수는 우리가 그리스도 대신 구원을 위하여 교리적 지식, 개인의 경건, 하나님을 위해 바친 봉사의 기록같이 다른 것에 의존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것의 중요성과 상관없이 죄와 그 정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능력이 없다. 우리를 해방시킬 유일한 분은 한 번도 죄의 노예가 된 적이 없는 아들 하나님뿐이시다.
예수님은 즐겨 죄를 사하셨다. 네 사람이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가 방탕한 삶의 결과로 병을 얻었지만 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다. 애원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서 예수님은 용서에 대한 갈망과 유일하게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분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셨다.
예수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가운데 가장 달콤한 말씀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절망의 짐이 사라지고 그의 심령은 용서와 평화로 가득찼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과 육신의 치유를 찾았다.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어떤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눈물로 닦더니 향유를 부었다(눅 7:37~38). 그 바리새인의 거부감을 감지하시고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눅 7:47)라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그녀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눅 7:48)라고 말씀하셨다.

<부가설명> 죄로부터 자유하게 된다고 할 때 죄의 실상이 무엇일까? 일상생활에서 도덕적으로 잘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또 율법적으로 잘못하는 것을 뜻할까? 물론 이런 것들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솔직히 말하면 이런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다 인정할 것이다. 예수를 믿고 생활해도 아직도 감정적일 때가 많고, 도덕적으로나 계명을 지키는 쪽으로나 자주 허물에 빠진다. 다만 그때마다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런 죄로부터 자유하다면 도덕적으로나 계명적으로나 허물을 범하지 않는 상태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신다고 하셨을 때 그 죄의 실상을 확실히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사망이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사망이 다시 우리를 주장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이 드러낸 영생의 생명을 얻는다. 그 사람들은 부활로 영생의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증거할 것이다. 죄는 사망이고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영생의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5~11)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교훈 : 예수님은 영적으로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된 자들을 자유롭게 하시고 죄 사함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용서를 베푸신다.


다섯째날(목)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심
7월 24일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청구된 죽음의 죄값을 지불하셨다. 순결하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심으로 죄를 지은 우리는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요 3:15은 우리에게 이같이 놀라운 약속을 준다. 그리고 요 3:16에 이 약속은 다시 반복된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어떤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지라도 영생에 대한 약속은 오직 그분이 재림하신 후에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원의 약속은 현재형으로 표현되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요 3:36).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현재 “영생을 얻었고” 마지막 날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요 5:24)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어 무덤에 잠들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시적인 휴식이 영생의 실제성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실 때, 우리의 삶은 새로운 의미를 얻고, 우리는 더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만족시키는 세상의 쾌락 대신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 즉 그분 안에서 끝없이 샘솟는 만족감으로 충만한 삶을 제공하신다. 이같이 새롭고 풍성한 삶은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육체적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해 여러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분은 그들에게 죄로부터 깨끗해지고, 그분에 대한 믿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한, 영적으로 새로워진 생명을 주기 바라셨다.

1.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은유를 사용하셨는가? 그것은 매일의 실제적인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요 6:35, 47~51)
[요6:35, 47~5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답: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로 설명하셨다. 이것은 매일 생활에 우리가 먹고 마셔야 하는 생활에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은근히 지시하신 것이다.

<부가설명> 구원은 한 마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준”(요5:24)것이다. 사람은 아담 안에서 다 사망이 되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히2:14)에게 예속되어 사망의 두려움 속에서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에 종노릇 하는 자들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셔서(딤후1:10)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가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원을 정확하게 모르는 것은 구원받아야할 상태인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죄를 도덕적인 허물들로 생각하고 있는 한 구원의 실상을 모르게 되어 있다. 죄가 아담 안에서 죽은 사실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구원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은 그 사망을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복음의 실상이 무엇인지 확실히 드러내시고 예수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확실히 가르치셨다. 이렇게 된 사람은 날마다 생활에서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은유로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영생을 얻은 것과 영생으로 살아가는 것은 구별되어 있다. 지금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부터 이 몸이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비유로 말하면 우리는 영생을 예매(豫買)한 것이다. 이 예매권을 가진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예매권이 있는 사람만 영생의 생명으로 부활하고 그때부터 영생을 실제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골3:1~4 참고) 이것을 예수님은 거듭나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이라고 하셨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구별하여 가르쳐주셨다.(요3:3~5)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금부터 영생을 소유한다. 그들은 세상이 주는 쾌락과는 달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만족으로 충만한 삶을 누린다.


여섯째날(금)
7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17~22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함”, <가려 뽑은 기별 1권>, 350~354 “1883년에 제시된 문제”를 읽어 보라.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루신 희생이 얼마나 크고 의미심장한 것인지를 더욱 충분히 깨닫게 된다. 구속의 경륜은 우리 앞에서 영광스럽게 빛나고 갈보리의 사상은 우리 마음속에 활력 있고 신성한 감격을 일깨운다.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돌리는 찬양이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있을 것이니 이는 갈보리의 장면들을 기억 속에 생생하게 간직하는 영혼들에게는 교만과 자아숭배가 번성할 수 없는 까닭이다.
구주의 다함이 없는 사랑을 바라보는 자는 사상이 향상되고, 마음이 순결하게 되며, 품성이 변화될 것이다. 그는 나아가 세상의 빛이 될 것이며 이 오묘한 사랑을 반사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고 말한 사도의 말을 더욱 완전히 받아들일 것이다”(시대의 소망, 66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구원은 선물입니다. 즉 무상으로 제공됩니다. 그래도 뭔가 대가가 있지 않을까요? 이 선물을 받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엇일까요? 그 대가가 무엇이든 구원이 그보다 더 값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따라 사는 것이다.

➋ 월요일에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계획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성경절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3).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확실히 열어놓으시고 우리에게 그 길로 걸어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 길을 걸어주시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갈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우리가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으로 걸어가라는 것이다.

➌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과 선행 그리고 율법의 준수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면,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으로만 속죄할 수 있다면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 사람이 스스로 죄, 곧 사망을 해결할 수 있다면 죄 짓기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해결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