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성령(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7/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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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7-14 21:28 조회8,712회 댓글0건본문
7월 19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1분
기억절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연구 범위 : 요 14:16~18, 요 14:26, 요 15:26, 마 12:31~32, 요 16:8, 요 3:5~8, 눅 11:9~13.
우리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성령을 가장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안에 거듭난 삶을 창조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것은 정말 역설적이다.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아버지와 아들에 비하여 성령에 관한 성경의 설명이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성령에 대한 언급은 많지만 대부분 은유적이거나 상징적이다. 성경은 성령의 사역에 관한 풍성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분의 본성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는다.
또 다른 원인은 성령의 사역에서 비롯된다. 성령은 우리가 언제나 그분이 아닌 그리스도께 관심의 초점을 두도록 노력하신다. 구원의 계획 속에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섬기는 종속적인 역할을 감당하시지만 이런 기능상의 이유가 본질적으로 열등함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이번 주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기를 열렬히 기도하자.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을지라도 우리가 버려진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에서 위로를 찾는다.
➌ 행하기 : 우리의 삶 또는 다른 이들의 삶에 들어오시려는 성령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한다.
A.
❷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셨습니까?
※ 다른 보혜사이시며 세상을 책망하여 진리로 인도하시는 역사를 하시고 바람과 같이 일하신다고 설명하셨다.
❸ 우리가 성령을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신성의 모든 충만을 가지시고 창조와 구원 역사에 일하시는 신성의 한 위이심이 성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❹ 실생활에서 성령께 자아를 굴복시켜야 하는 상황은 무엇인지 예를 들어 말해 봅시다.
※ 모든 언어생활에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도록 하며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B.
❷ 여러분은 성령께서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하신다고 생각합니까?
※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나를 위하여 간구하셔서 우리를 진리의 정로로 걸어가도록 하신다고 믿는다.
❸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침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성령에 사로잡혀서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❹ 매일 매 순간 성령의 감화 아래에 머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결론 : 예수님은 자신이 없는 동안 그분의 거룩한 협력자께서 지상의 영적 지도력을 감당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의 모든 필요와 눈물 그리고 모든 성공을 지켜보실 것입니다.
첫째날(일) 그리스도의 대리자
7월 13일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예수님은 곧 있을 자신의 죽음을 알리셨다. 제자들은 두렵고 슬픈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이 없다면 누가 그들의 교사와 친구 그리고 상담자가 될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필요를 아시고 자신의 대리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대리자에게 어떤 특별한 칭호를 사용하셨는가?(요 14:16~18 참고) 어떤 의미에서 그 이름이 매우 적절했는가?(요 14:26 참고)
[요14:16~18, 2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답: 다른 보혜사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다. 성령께서 예수께서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돕는 자, 권고자 또는 위로자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는 ‘옆에’라는 뜻의 전치사 ‘파라’와 ‘부름 받은’이라는 뜻의 형용사 ‘클레토스’의 합성어이다.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옆에 있도록 부름을 받은 자’이며 ‘어떤 이를 돕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한만이 ‘파라클레토스’를 사용했고 흥미롭게도 예수님에게도 이 단어를 적용했다(요일 2:1).
지상 사역 기간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돕는 자요 권고자며 위로자셨다. 따라서 그분의 후임자를 동일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성령은 아들의 요청에 따라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으셨다(요 14:16, 26). 성령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속해 나아가신다.
제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동행하였다. 주께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외로운 ‘고아들’에게 크게 위로가 되지 않는 간헐적인 방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항구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선언하셨다.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예수님의 약속은 오직 성령의 내주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의 제약을 받으시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시기 어렵다. 그러나 성령은 무소부재하시다(시 139:7). 우리 구주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와 그분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접근하실 수 있다.
<부가설명> 역사적으로 성령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어려웠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시대를 성령 사역시대라고 계시한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계시록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아버지 하나님 같이 성경이 뚜렷하게 개체적 존재 상태를 계시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표현들이 마신다.(고전12:13) 흐르는 강이다.(요7:37~39) 숨을 쉬며 성령을 받으라.(요20:22) 등등. 이런 말씀들이 성령의 개체성을 의심하게 하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에게 대하여서도 같은 표현들이 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1:5) 반석이다.(시18:2) 여호와는 불이다.(신4:24) 등등. 또 예수님도 포도나무(요15:1) 빛(요8:12), 반석(고전10:4), 해(말4:2) 등등. 이런 비유적 표현들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이나 아버지 하나님의 개체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성령에 대하여서는 개체를 의심한다. 이것은 사단의 공작이다. 성령을 부인하거나 의심하면 성경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요16:13~15) 바울도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신령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기록하였다.(고전2:13,14) 예수님은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셔서 예수님이 개체를 가진 것과 같이 성령도 보혜사로서의 개체를 가지신 분으로 가르쳐주셨다. 요일3:1은 예수님을 보혜사(대언자)라고 기록하였다. 성령은 예수님과 다른 보혜사이시다.
비유로 표현하는 것은 예수님, 하나님이라는 말로 그분의 하시는 역할을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나 아버지 하나님을 이런 비유로 표현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우리는 사단이 인간적 생각으로 판단하도록 유혹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자신이 없을지라도 그분의 대리자인 성령을 보내셔서 계속하여 우리를 돕고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둘째날(월) 인격적 존재이신 성령
7월 14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엘렌 G. 화잇은 “성령의 본질은 오묘이다. 사람들은 성령을 설명할 수 없는데, 이는 주께서 인간들에게 성령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이러한 오묘에 관하여는 침묵이 금이다”(사도행적, 52)라고 기록했다.
그럼에도 엘렌 G. 화잇은 “성령께서는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심령에 증언해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인격적 존재이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복음전도, 616~617)라고 확언했다. 이런 진술은 성경에 기초해 있다(롬 8:16, 고전 2:10~11).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는 적어도 성경을 통해서 성령이 인격적이며 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령에 대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도 이러한 결론을 확증한다.
1. 성령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분의 행위는 무엇입니까?(요 14:26, 15:26, 16:7~14 참고)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7~14]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답: 진리를 깨닫도록 가르치시고,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 등이다.
예수님은 성령이 수행하는 활동을 몇 가지 언급하셨는데 그 모두가 그분의 인격적 특성을 암시한다.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를 가르치며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떠오르게 하실 수 있겠는가?(요 14:26)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요 15:26), 세상을 정죄하며(요 16:8),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듣기도 하며 말하기도 할 수 있겠는가?(요 16:13)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성령에게 핵심적인 인격적 특성인 의지(고전 12:11)와 지성(행 15:28, 롬 8:27)과 감정(롬 15:30, 엡 4:30)이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설명했다.
성령은 신성을 가진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뜻과 지도에 겸손히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시도록 영접해야 한다(롬 8:9). 그러면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딛 3:5) 우리의 품성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갈 5:22~23). 우리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것처럼 그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 될 수 있다.
<부가설명> 성령에 대한 비유적 표현 때문에 성령의 인격적 개체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같은 의미로 아버지에 대하여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셨다.(요1:18, 딤전6:16) 그래서 결국 아버지와 예수는 동일한 존재이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인격적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빠지면 예수님에 대하여서도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인하려고 하면 그들은 결국에는 예수님과 구원에 대하여서도 믿지 않게 될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인격적 개체성을 분명히 기록하였고 증언의 말씀도 교과 저자가 인용한 것처럼 “성령께서는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심령에 증언해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인격적 존재이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복음전도, 616~617)라고 기록하였다. 요즘 우리 교회 일각에서 성령을 부인하는 운동이 일렁거린다. 속지 않기를 바란다. 성령의 인격적개체성을 부인하면 성경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교훈 : 성령에 대하여 전부 알 수는 없지만 그분은 신격을 가진 인격적 존재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므로 우리는 그분의 인도와 뜻에 굴복해야 한다.
셋째날(화) 신적 존재이신 성령
7월 15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소개하면서 그분을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셨다(요 14:16). 예수님이 ‘다른’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신 그리스어 ‘알로스’는 ‘종류가 같은 또 다른 하나’를 의미하는 반면 ‘헤테로스’는 ‘종류와 질이 다른’을 의미한다.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시키는 본성의 동질성은 아들과 성령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고 말씀하셨다. 오직 신적인 존재만이 미래의 일을 말할 수 있다(사 46:9~10).
또한 성령의 신성은 예수님이 명확하게 지목하셨던 한 역할 즉 성경의 영감에 관한 그분의 역할을 통해 증명된다. 예수님은 시 110:1에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막 12:36)했다고 주장하셨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은 줄곧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다. 침례식 때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뒤에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마 3:16~17, 눅 4:1). 예수님은 시험하는 자를 이기고 사역을 실행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눅 4:14)셨다. 그분이 일으킨 이적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마 12:28).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에 의지하셨다는 사실은 성령의 신적 속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증이다. 왜냐하면 신이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상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성령의 신성을 증명하는 또 다른 예는 삼위를 동등하게 언급하는 성경절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나타나 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마 28:19)도록 사도들에게 사명을 맡기셨다.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얻지만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 못한다(마 12:31~32). 이는 성령이 평범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직접 하나님께 짓는 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삼위의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여러 주장이 있다. 이 성경절의 바로 앞뒤의 문장은 사람들이 구원의 사역을 펼치시는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너무 완고하게 거역하다 못해 그분이 하신 일을 마귀의 일로 간주하는 심각한 상황을 보여준다.
<부가설명> 성령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프뉴마”이다. 이 말은 중성단어이다. 그래서 어떤 교단에서는 성령을 물질이라고 가르친다. 만일 성령이 물질이라면 그를 받는 대명사는 중성대명사를 사용해야 문법적으로 옳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을 나타내는 중성 명사 “프뉴마”를 받을 때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였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 성령을 대명사로 받을 때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였다. 본 명사가 비록 중성명사이지만 성령을 뜻하는 중성명사 프뉴마가 성령의 호칭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인격적 개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인칭 대명사로 받은 것이다. 요한이 문법을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인격적 개체이시기 때문에 문법을 무시하고 그렇게 받은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속지 않아야 한다.
교훈 : 성령은 예수님과 같은 또 다른 보혜사이자 아버지와 아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신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그분을 거역하는 죄는 용서 받지 못한다.
넷째날(수) 성령의 사역
7월 16일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우리는 성령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경의 영감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언급했다. 오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1. 성령께서는 어떤 필수적인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구주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키시는가?(요 16:8)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답: 성령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사역으로 구주를 영접하도록 하신다.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 누가 약을 먹으려 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성령은 우리가 과거에 죄를 지었고 지금도 죄가 있으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자상하게 그러나 꾸준하게 상기시키신다.
그다음 성령은 우리를 예수님에게 인도하며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증언하신다(요 15:26). 예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에(요 14:6) 성령은 우리를 그분께 인도함으로써 “모든 진리 가운데로”(요 16:13) 인도하신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불린다(요 14:17).
일단 우리가 죄를 깨닫고 예수님과 그분의 진리로 인도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위대한 일을 행하실 준비가 끝난 것이다.
‘영으로 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요 3:5~8)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혁하려고 노력했던 자들은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무익한지 알게 된다. 하나님의 개입 없이 죄로 인해 열등해진 삶을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죄인이 거듭나려면 오직 거룩한 성령이 제공하시는 창조의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5) 구원을 받는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옛 삶을 수정하거나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바꾸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기적의 결과는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이 된다. 성령의 역사는 신앙생활의 초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그분이 필요하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증진시키기 위해 성령은 우리를 가르치실 뿐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모든 것이 떠오르게 하신다(요 14:26). 그분께 우리를 맡긴다면 그분은 영원히 우리를 돕는 자요, 우리의 위로자며, 권고자로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이다(요 14:16).
<부가설명>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역사하셨다. 그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날 때 역사하신다. 성령으로 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라고 예수께서 가르치셨다.(요3:3~6) 성령께서는 사람이 거듭나게 하기 위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고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도록 역사하신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이 깨닫기를 원하시는 대로 깨달을 수 없다.(고전2:13,14) 성령을 부인하는 자는 세상에 속한 자이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요14;17)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님이라고 고백하지도 못한다.(고전12:3)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또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고 또 재림하셔서 성도들을 하늘로 데리고 가시고 마침내 지상으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깨닫고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올바르게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교훈 : 성령은 우리가 죄를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가며 모든 진리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끄시며 우리의 죄 많은 삶이 거듭날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다섯째날(목) 성령으로 충만하게 됨
7월 17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물론 성령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열어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이끌지 않는다면 무의미하게 된다. 예수님은 하늘의 손님이 매일 우리와 동거하도록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데 실패한다면 다른 종류의 영이 우리의 공허한 삶에 들어와 영적인 폐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하셨다(마 12:43~45). 예수님 자신은 성령으로 충만하셨다(눅 4:1). “그는 날마다 성령의 새로운 침례를 받으셨다”(실물교훈, 139).
1. 눅 11:9~13은 우리가 성령을 받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이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는 얼마나 기꺼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자 하는가?
[눅11:9~13]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답: 성령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아비가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는 것과 같이 성령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그 당시 제자들의 필요를 채우게 될 성령의 위로와 가르침의 사역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상황이 바뀌어서 제자들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2. 부활하신 뒤 성령에 대해 주신 예수님의 약속은 무엇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가?(행 1:4~8)
[행1:4~8]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답: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행 1:5은 성령의 침례를 받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담은 유일한 기록이다. 침례 요한도 이런 특별한 침례에 대해 선언한 적이 있었다(마 3:11, 요 1:33). 그렇다면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행 1:8에서 예수님은 친히 성령의 침례를 평행대구법으로 설명하셨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행 1:8), 너희가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행 1:5).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주로 물 또는 무엇인가에 완전히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 전존재를 포함한다. 성령의 침례는 온전히 성령으로 충만하여(엡 5:18) 그분의 감화에 전적으로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번에 영원으로 이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계속 새롭게 될 필요가 있는 경험이어야 한다.
<부가설명> 성령의 침례는 교과의 설명대로 성령에 잠기어서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실을 에스겔서에 계시해 주셨는데,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겔47:3~5)고 했다. 헤엄할 물, 우리는 성령에 잠겨서 헤엄해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컨트롤해야 하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비유적 현상이다. 우리는 성령의 강에 잠겨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생활해야 한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모습이다. 무슨 이적을 행하거나 이상한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고 진리의 인도를 따라 인격이 형성되는 상태이며 그렇게 변화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교훈 : 우리는 성령에 대해 알 뿐 아니라 성령의 침례를 받음으로 온전히 영으로 충만하고 그분의 감화에 굴복하는 지속적인 경험을 해야 한다.
여섯째날(금)
7월 1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교회증언 8권>, 19~23 “약속된 능력”, <사도행적>, 47~56 “성령의 선물”을 읽어 보라.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모든 슬픔과 고통 중에서나 앞길이 캄캄하고 장래가 암담하게 보일 때에 또한 우리가 무기력하고 외로움을 느낄 때에 믿음의 기도의 응답으로써 보혜사가 보내신 바 될 것이다. 주변 환경은 우리를 모든 지상의 친구로부터 분리시킬지 모르지만 어떤 환경도, 어떤 먼 거리도 우리를 하늘의 보혜사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그분은 우리를 지지하고 붙들며 격려하고 위로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오른편에 계신다”(시대의 소망, 669~670).
“성령은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을 높이기 위하여 아버지께 간청할 수 있는 모든 선물 중에 가장 고상한 선물이었다.… 죄는 오직 신성의 제 삼위의 강력한 작용을 통해서 물리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다. 그분은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가운데 오실 것이었다. 세상의 구주께서 이루신 일을 효력 있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다”(시대의 소망, 67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기를 높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에 반하여 성령의 겸손하고 순종적인 사역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칩니까?
※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굴복하도록 이끄시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➋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비유로부터 어떤 영적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 성령의 보편적 역사를 나타내며 볼 수는 없어도 그 영향력은 확인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친다.
➌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한 증거는 소위 방언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주장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 성경은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한 것을 확실히 제시할 것이다.
➍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일대일 관계를 기초로 하는 개인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 교회가 전체적으로 연합한 한 몸으로 성령의 실재적인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온 교회가 곧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 개개인이 진리를 따라 굴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교회가 성령 충만을 경험하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일몰:오후 7시 51분
기억절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연구 범위 : 요 14:16~18, 요 14:26, 요 15:26, 마 12:31~32, 요 16:8, 요 3:5~8, 눅 11:9~13.
우리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성령을 가장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안에 거듭난 삶을 창조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것은 정말 역설적이다.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아버지와 아들에 비하여 성령에 관한 성경의 설명이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성령에 대한 언급은 많지만 대부분 은유적이거나 상징적이다. 성경은 성령의 사역에 관한 풍성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분의 본성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는다.
또 다른 원인은 성령의 사역에서 비롯된다. 성령은 우리가 언제나 그분이 아닌 그리스도께 관심의 초점을 두도록 노력하신다. 구원의 계획 속에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섬기는 종속적인 역할을 감당하시지만 이런 기능상의 이유가 본질적으로 열등함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이번 주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기를 열렬히 기도하자.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을지라도 우리가 버려진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에서 위로를 찾는다.
➌ 행하기 : 우리의 삶 또는 다른 이들의 삶에 들어오시려는 성령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한다.
A.
❷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셨습니까?
※ 다른 보혜사이시며 세상을 책망하여 진리로 인도하시는 역사를 하시고 바람과 같이 일하신다고 설명하셨다.
❸ 우리가 성령을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신성의 모든 충만을 가지시고 창조와 구원 역사에 일하시는 신성의 한 위이심이 성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❹ 실생활에서 성령께 자아를 굴복시켜야 하는 상황은 무엇인지 예를 들어 말해 봅시다.
※ 모든 언어생활에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도록 하며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B.
❷ 여러분은 성령께서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하신다고 생각합니까?
※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나를 위하여 간구하셔서 우리를 진리의 정로로 걸어가도록 하신다고 믿는다.
❸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침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성령에 사로잡혀서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❹ 매일 매 순간 성령의 감화 아래에 머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결론 : 예수님은 자신이 없는 동안 그분의 거룩한 협력자께서 지상의 영적 지도력을 감당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의 모든 필요와 눈물 그리고 모든 성공을 지켜보실 것입니다.
첫째날(일) 그리스도의 대리자
7월 13일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예수님은 곧 있을 자신의 죽음을 알리셨다. 제자들은 두렵고 슬픈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이 없다면 누가 그들의 교사와 친구 그리고 상담자가 될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필요를 아시고 자신의 대리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대리자에게 어떤 특별한 칭호를 사용하셨는가?(요 14:16~18 참고) 어떤 의미에서 그 이름이 매우 적절했는가?(요 14:26 참고)
[요14:16~18, 2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답: 다른 보혜사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다. 성령께서 예수께서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돕는 자, 권고자 또는 위로자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는 ‘옆에’라는 뜻의 전치사 ‘파라’와 ‘부름 받은’이라는 뜻의 형용사 ‘클레토스’의 합성어이다.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옆에 있도록 부름을 받은 자’이며 ‘어떤 이를 돕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한만이 ‘파라클레토스’를 사용했고 흥미롭게도 예수님에게도 이 단어를 적용했다(요일 2:1).
지상 사역 기간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돕는 자요 권고자며 위로자셨다. 따라서 그분의 후임자를 동일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성령은 아들의 요청에 따라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으셨다(요 14:16, 26). 성령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속해 나아가신다.
제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동행하였다. 주께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외로운 ‘고아들’에게 크게 위로가 되지 않는 간헐적인 방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항구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선언하셨다.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예수님의 약속은 오직 성령의 내주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의 제약을 받으시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시기 어렵다. 그러나 성령은 무소부재하시다(시 139:7). 우리 구주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와 그분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접근하실 수 있다.
<부가설명> 역사적으로 성령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어려웠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시대를 성령 사역시대라고 계시한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계시록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아버지 하나님 같이 성경이 뚜렷하게 개체적 존재 상태를 계시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표현들이 마신다.(고전12:13) 흐르는 강이다.(요7:37~39) 숨을 쉬며 성령을 받으라.(요20:22) 등등. 이런 말씀들이 성령의 개체성을 의심하게 하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에게 대하여서도 같은 표현들이 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1:5) 반석이다.(시18:2) 여호와는 불이다.(신4:24) 등등. 또 예수님도 포도나무(요15:1) 빛(요8:12), 반석(고전10:4), 해(말4:2) 등등. 이런 비유적 표현들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이나 아버지 하나님의 개체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성령에 대하여서는 개체를 의심한다. 이것은 사단의 공작이다. 성령을 부인하거나 의심하면 성경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요16:13~15) 바울도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신령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기록하였다.(고전2:13,14) 예수님은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셔서 예수님이 개체를 가진 것과 같이 성령도 보혜사로서의 개체를 가지신 분으로 가르쳐주셨다. 요일3:1은 예수님을 보혜사(대언자)라고 기록하였다. 성령은 예수님과 다른 보혜사이시다.
비유로 표현하는 것은 예수님, 하나님이라는 말로 그분의 하시는 역할을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나 아버지 하나님을 이런 비유로 표현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우리는 사단이 인간적 생각으로 판단하도록 유혹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자신이 없을지라도 그분의 대리자인 성령을 보내셔서 계속하여 우리를 돕고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둘째날(월) 인격적 존재이신 성령
7월 14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엘렌 G. 화잇은 “성령의 본질은 오묘이다. 사람들은 성령을 설명할 수 없는데, 이는 주께서 인간들에게 성령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이러한 오묘에 관하여는 침묵이 금이다”(사도행적, 52)라고 기록했다.
그럼에도 엘렌 G. 화잇은 “성령께서는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심령에 증언해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인격적 존재이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복음전도, 616~617)라고 확언했다. 이런 진술은 성경에 기초해 있다(롬 8:16, 고전 2:10~11).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는 적어도 성경을 통해서 성령이 인격적이며 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령에 대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도 이러한 결론을 확증한다.
1. 성령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분의 행위는 무엇입니까?(요 14:26, 15:26, 16:7~14 참고)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7~14]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답: 진리를 깨닫도록 가르치시고,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 등이다.
예수님은 성령이 수행하는 활동을 몇 가지 언급하셨는데 그 모두가 그분의 인격적 특성을 암시한다.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를 가르치며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떠오르게 하실 수 있겠는가?(요 14:26)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요 15:26), 세상을 정죄하며(요 16:8),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듣기도 하며 말하기도 할 수 있겠는가?(요 16:13)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성령에게 핵심적인 인격적 특성인 의지(고전 12:11)와 지성(행 15:28, 롬 8:27)과 감정(롬 15:30, 엡 4:30)이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설명했다.
성령은 신성을 가진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뜻과 지도에 겸손히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시도록 영접해야 한다(롬 8:9). 그러면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딛 3:5) 우리의 품성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갈 5:22~23). 우리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것처럼 그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 될 수 있다.
<부가설명> 성령에 대한 비유적 표현 때문에 성령의 인격적 개체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같은 의미로 아버지에 대하여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셨다.(요1:18, 딤전6:16) 그래서 결국 아버지와 예수는 동일한 존재이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인격적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빠지면 예수님에 대하여서도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인하려고 하면 그들은 결국에는 예수님과 구원에 대하여서도 믿지 않게 될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인격적 개체성을 분명히 기록하였고 증언의 말씀도 교과 저자가 인용한 것처럼 “성령께서는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심령에 증언해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인격적 존재이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복음전도, 616~617)라고 기록하였다. 요즘 우리 교회 일각에서 성령을 부인하는 운동이 일렁거린다. 속지 않기를 바란다. 성령의 인격적개체성을 부인하면 성경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교훈 : 성령에 대하여 전부 알 수는 없지만 그분은 신격을 가진 인격적 존재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므로 우리는 그분의 인도와 뜻에 굴복해야 한다.
셋째날(화) 신적 존재이신 성령
7월 15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소개하면서 그분을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셨다(요 14:16). 예수님이 ‘다른’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신 그리스어 ‘알로스’는 ‘종류가 같은 또 다른 하나’를 의미하는 반면 ‘헤테로스’는 ‘종류와 질이 다른’을 의미한다.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시키는 본성의 동질성은 아들과 성령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고 말씀하셨다. 오직 신적인 존재만이 미래의 일을 말할 수 있다(사 46:9~10).
또한 성령의 신성은 예수님이 명확하게 지목하셨던 한 역할 즉 성경의 영감에 관한 그분의 역할을 통해 증명된다. 예수님은 시 110:1에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막 12:36)했다고 주장하셨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은 줄곧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다. 침례식 때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뒤에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마 3:16~17, 눅 4:1). 예수님은 시험하는 자를 이기고 사역을 실행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눅 4:14)셨다. 그분이 일으킨 이적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마 12:28).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에 의지하셨다는 사실은 성령의 신적 속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증이다. 왜냐하면 신이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상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성령의 신성을 증명하는 또 다른 예는 삼위를 동등하게 언급하는 성경절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나타나 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마 28:19)도록 사도들에게 사명을 맡기셨다.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얻지만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 못한다(마 12:31~32). 이는 성령이 평범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직접 하나님께 짓는 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삼위의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여러 주장이 있다. 이 성경절의 바로 앞뒤의 문장은 사람들이 구원의 사역을 펼치시는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너무 완고하게 거역하다 못해 그분이 하신 일을 마귀의 일로 간주하는 심각한 상황을 보여준다.
<부가설명> 성령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프뉴마”이다. 이 말은 중성단어이다. 그래서 어떤 교단에서는 성령을 물질이라고 가르친다. 만일 성령이 물질이라면 그를 받는 대명사는 중성대명사를 사용해야 문법적으로 옳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을 나타내는 중성 명사 “프뉴마”를 받을 때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였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 성령을 대명사로 받을 때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였다. 본 명사가 비록 중성명사이지만 성령을 뜻하는 중성명사 프뉴마가 성령의 호칭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인격적 개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인칭 대명사로 받은 것이다. 요한이 문법을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인격적 개체이시기 때문에 문법을 무시하고 그렇게 받은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속지 않아야 한다.
교훈 : 성령은 예수님과 같은 또 다른 보혜사이자 아버지와 아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신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그분을 거역하는 죄는 용서 받지 못한다.
넷째날(수) 성령의 사역
7월 16일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우리는 성령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경의 영감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언급했다. 오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1. 성령께서는 어떤 필수적인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구주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키시는가?(요 16:8)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답: 성령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사역으로 구주를 영접하도록 하신다.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 누가 약을 먹으려 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성령은 우리가 과거에 죄를 지었고 지금도 죄가 있으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자상하게 그러나 꾸준하게 상기시키신다.
그다음 성령은 우리를 예수님에게 인도하며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증언하신다(요 15:26). 예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에(요 14:6) 성령은 우리를 그분께 인도함으로써 “모든 진리 가운데로”(요 16:13) 인도하신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불린다(요 14:17).
일단 우리가 죄를 깨닫고 예수님과 그분의 진리로 인도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위대한 일을 행하실 준비가 끝난 것이다.
‘영으로 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요 3:5~8)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혁하려고 노력했던 자들은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무익한지 알게 된다. 하나님의 개입 없이 죄로 인해 열등해진 삶을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죄인이 거듭나려면 오직 거룩한 성령이 제공하시는 창조의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5) 구원을 받는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옛 삶을 수정하거나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바꾸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기적의 결과는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이 된다. 성령의 역사는 신앙생활의 초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그분이 필요하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증진시키기 위해 성령은 우리를 가르치실 뿐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모든 것이 떠오르게 하신다(요 14:26). 그분께 우리를 맡긴다면 그분은 영원히 우리를 돕는 자요, 우리의 위로자며, 권고자로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이다(요 14:16).
<부가설명>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역사하셨다. 그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날 때 역사하신다. 성령으로 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라고 예수께서 가르치셨다.(요3:3~6) 성령께서는 사람이 거듭나게 하기 위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고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도록 역사하신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이 깨닫기를 원하시는 대로 깨달을 수 없다.(고전2:13,14) 성령을 부인하는 자는 세상에 속한 자이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요14;17)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님이라고 고백하지도 못한다.(고전12:3)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또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고 또 재림하셔서 성도들을 하늘로 데리고 가시고 마침내 지상으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깨닫고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올바르게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교훈 : 성령은 우리가 죄를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가며 모든 진리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끄시며 우리의 죄 많은 삶이 거듭날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다섯째날(목) 성령으로 충만하게 됨
7월 17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물론 성령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열어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이끌지 않는다면 무의미하게 된다. 예수님은 하늘의 손님이 매일 우리와 동거하도록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데 실패한다면 다른 종류의 영이 우리의 공허한 삶에 들어와 영적인 폐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하셨다(마 12:43~45). 예수님 자신은 성령으로 충만하셨다(눅 4:1). “그는 날마다 성령의 새로운 침례를 받으셨다”(실물교훈, 139).
1. 눅 11:9~13은 우리가 성령을 받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이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는 얼마나 기꺼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자 하는가?
[눅11:9~13]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답: 성령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아비가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는 것과 같이 성령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그 당시 제자들의 필요를 채우게 될 성령의 위로와 가르침의 사역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상황이 바뀌어서 제자들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2. 부활하신 뒤 성령에 대해 주신 예수님의 약속은 무엇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가?(행 1:4~8)
[행1:4~8]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답: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행 1:5은 성령의 침례를 받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담은 유일한 기록이다. 침례 요한도 이런 특별한 침례에 대해 선언한 적이 있었다(마 3:11, 요 1:33). 그렇다면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행 1:8에서 예수님은 친히 성령의 침례를 평행대구법으로 설명하셨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행 1:8), 너희가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행 1:5).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주로 물 또는 무엇인가에 완전히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 전존재를 포함한다. 성령의 침례는 온전히 성령으로 충만하여(엡 5:18) 그분의 감화에 전적으로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번에 영원으로 이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계속 새롭게 될 필요가 있는 경험이어야 한다.
<부가설명> 성령의 침례는 교과의 설명대로 성령에 잠기어서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실을 에스겔서에 계시해 주셨는데,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겔47:3~5)고 했다. 헤엄할 물, 우리는 성령에 잠겨서 헤엄해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컨트롤해야 하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비유적 현상이다. 우리는 성령의 강에 잠겨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생활해야 한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모습이다. 무슨 이적을 행하거나 이상한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고 진리의 인도를 따라 인격이 형성되는 상태이며 그렇게 변화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교훈 : 우리는 성령에 대해 알 뿐 아니라 성령의 침례를 받음으로 온전히 영으로 충만하고 그분의 감화에 굴복하는 지속적인 경험을 해야 한다.
여섯째날(금)
7월 1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교회증언 8권>, 19~23 “약속된 능력”, <사도행적>, 47~56 “성령의 선물”을 읽어 보라.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모든 슬픔과 고통 중에서나 앞길이 캄캄하고 장래가 암담하게 보일 때에 또한 우리가 무기력하고 외로움을 느낄 때에 믿음의 기도의 응답으로써 보혜사가 보내신 바 될 것이다. 주변 환경은 우리를 모든 지상의 친구로부터 분리시킬지 모르지만 어떤 환경도, 어떤 먼 거리도 우리를 하늘의 보혜사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그분은 우리를 지지하고 붙들며 격려하고 위로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오른편에 계신다”(시대의 소망, 669~670).
“성령은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을 높이기 위하여 아버지께 간청할 수 있는 모든 선물 중에 가장 고상한 선물이었다.… 죄는 오직 신성의 제 삼위의 강력한 작용을 통해서 물리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다. 그분은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가운데 오실 것이었다. 세상의 구주께서 이루신 일을 효력 있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다”(시대의 소망, 67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기를 높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에 반하여 성령의 겸손하고 순종적인 사역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칩니까?
※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굴복하도록 이끄시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➋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비유로부터 어떤 영적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 성령의 보편적 역사를 나타내며 볼 수는 없어도 그 영향력은 확인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친다.
➌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한 증거는 소위 방언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주장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 성경은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한 것을 확실히 제시할 것이다.
➍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일대일 관계를 기초로 하는 개인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 교회가 전체적으로 연합한 한 몸으로 성령의 실재적인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온 교회가 곧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 개개인이 진리를 따라 굴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교회가 성령 충만을 경험하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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