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아들(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7/12/14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2과 아들(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7/12/14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7-05 04:35 조회8,374회 댓글0건

본문

7월 12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5분

기억절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연구 범위 : 마 24:30, 단 7:13~14, 마 11:27, 눅 5:17~26, 요 8:58, 마 20:28.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지 2년이 훨씬 지난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고 물으셨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말을 들은 대로 전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다음 좀 더 까다로운 질문을 하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개인의 입장을 묻는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분의 외모나 성격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묻지 않으셨다. 그 질문은 예수님의 존재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으며 제자들 각자의 개인적인 확신과 믿음을 표현하도록 요구하였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 이 동일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각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개인적으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믿음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순수하게 자신의 신념에 따라 대답해야 한다. 그 대답에 각자의 운명이 달려 있다.
이번 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의 근거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목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했던 베드로의 대답에 이르는 것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의 자기 인식과 함께 그 정체성이 우리의 구원에 미치는 의미를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신성한 특권을 내려놓고 마침내 생명을 포기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➌ 행하기 :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개인적으로 수용한다.

A.
❷ 그대는 ‘인자’,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중에서 어떤 예수님의 호칭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모든 호칭이 그 의미와 함께 마음에 와 닿도록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❸ 각 호칭에서 미루어볼 때 예수님이 이루시고자 했던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일을 깨닫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❹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지적으로 알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 기도와 말씀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B.
❷ 그대는 예수님이 자신의 신성을 어떤 방식으로 증명하셨다고 생각합니까?
※ 그분이 행하시는 표적과 교훈을 통하여 증명하셨다.
❸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 상과 아주 달랐기 때문이다.

결론 : 인류에게 이해심 많은 친구이자 죄인을 위한 거룩한 대속물이 되시는 전능한 창조주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입니다.


첫째날(일) 인자
7월 6일

“인자가…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

‘인자(사람의 아들)’는 예수님이 즐겨 쓰셨던 호칭이다. 그분은 자신을 일컬어 80회 이상 ‘인자’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분을 절대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물론 예수님이 자신에게 이 호칭을 쓰신 데는 목적이 있었다.
이 관용적인 표현은 구약에 흔히 사용되었다. 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 말은 언제나 인간을 가리켰다. 물론 예수님도 자신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호칭을 사용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을 진정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그분은 아기로 태어나서 지혜와 키가 자라 어린이로 성장하셨고(눅 2:40, 52), 형제자매를 두셨다(마 13:55~56).
그분은 음식을 드셨고(마 9:11), 주무셨으며(눅 8:23), 피곤을 느끼셨고(요 4:6),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힘겨워하셨다(마 4:2, 요 19:28). 그분은 슬픔과 고뇌를 경험하셨다(마 26:37).
언뜻 예수님은 군중 가운데 다니는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분을 평범한 남자 이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요 7:46). 사람들은 그분을 자신들 가운데 하나처럼 취급했다. 그분을 비웃고(눅 8:53), 비난했으며(마 11:19), 심지어 모욕하고 때렸다(눅 22:63). 그들에게 그분은 또 다른 한 사람에 불과했다. 불행히도 그들은 이 호칭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 7:13~14에 따르면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다. 유대인들은 이 ‘인자’를 메시아로 이해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호칭을 사용하셨을 때는 자신이 약속된 메시아이며 성육신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밝히셨던 것이다.

1. 마 24:30, 25:31, 26:64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단 7:13~14을 상기시키는 어떤 요소들이 있는가?
[마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26: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답: 다니엘 7:13,14은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나타나시는 장면을 보여주셨는데, 위의 세 성경구절에서 예수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하신 것이 다니엘서와 같은 요소이다. 또 인자라는 말도 같다.

<부가설명> 신약성경에 예수님을 가리켜 인자라고 표현한 말이 84회가 나온다. 그중에 계시록에 1번(계1:13) 히브리서에 1번(히2:6), 사도행전에 1번 있고(행7:56), 나머지는 모두 복음서에 있다. 계시록은 예수께서 금촛대 사이에 계신 것을 말할 때 인자 같은 이라고 하였고, 히브리서는 시편 8:5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증거 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또 사도행전 7:56에는 스데반이 순교하기 전에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증거한 말이다. 그 외에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친히 자신을 표현하는 칭호로 이 말을 사용하신 것이다. 81회나 그렇게 사용하신 것이다. 교과에 있는 대로 이 말은 다니엘 7:13에 있는 칭호를 사용하신 것이다. 교과의 설명대로 이 칭호는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사실을 표현하는 뜻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다니엘 7:13에 말한 바로 그분이 자신임을 드러내는 칭호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 칭호를 스스로 사용하신 것은 사람이 되셨다는 뜻보다는 다니엘7:13의 인자 바로 그분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유대인들이 깨닫기를 원하는 마음이 강하게 표현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교훈 :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인자’라는 칭호를 즐겨 쓰셨는데 그것은 그분의 인
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분이 인간으로 오신 메시아라는 뜻이었다.


둘째날(월) 하나님의 아들
7월 7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로소이다”(요 1:49).

나다나엘뿐 아니라 일부의 사람이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눅 1:35, 마 14:33, 막 15:39, 요 1:49, 11:27). 그분은 그런 칭호를 수용하셨지만, 그 말을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셨다. 백성들이 던지는 돌에 죽지 않으려면 그렇게 하셔야 했다. 그럼에도 성경은 아버지와 그분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여러 방식으로 계시하고 있다.
아버지는 침례식에서 그리고 변형산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아들임을 시인하셨다(마 3:17, 17:5).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독특하다. 그리스도는 우주에서 그 같은 관계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1. 다음의 성경절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완전한 연합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마 11:27, 요 3:35, 5:17, 10:30)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요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답: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신다고 하셨다. 또 아버지께서 만물을 아들에게 주셨다고 하셨으며 아버지가 일하기 때문에 아들도 일한다고 하셨고 마침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고 하셨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완전한 연합은 서로에 대한 완전한 이해 그리고 의지와 목적의 일치를 포함한다. 또한 그것은 본질의 연합까지 내포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두 인격이지만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다. 그런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중성 대명사 ‘하나’이다(고전 3:8과 비교해 보라).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오셔서 여기 계시는 동안 아버지께 자원하여 복종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빌 2:6~8). 이런 한계는 기능상 필요했을 뿐 그분에게 있는 본질의 일부는 아니었다. 예수님은 특별한 목적과 뜻을 위해 자신을 굴복시키셨다.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왜 예수께서 자신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요 5:19)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요 5:30) 한다고 말씀하셨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런 기능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은 “아버지는 나보다 크”(요 14:28)다고 말씀하셨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하여 조직신학은 영원한 아들이라고 설명한다. 이 교과 저자도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썼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계시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성경은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아버지라고 계시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그런 분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될 때에 아들의 칭호로 주신 것을 계시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사실을 나타낸다. 그분이 아들의 신분을 취하시므로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취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 것은(요1:12) 그분이 영존하신 아버지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런 신분을 비우시고(빌2:6)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조직신학이 설명하는 대로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영원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직 구속사적 의미로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깨달은 바이다. 독자들 중에 이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 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성경을 연구하고 깨달은 나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이렇게 적었다.

교훈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하지만 이 땅에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셋째날(화) 예수님의 신성-1
7월 8일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그리스도의 신성은 우리에게 있는 믿음의 근거이다. 인간은 아무리 비범한 삶을 산다 할지라도 구세주가 될 수 없다. 신약성경은 전반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증언한다. 오늘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누구라고 설명하기란 무엇보다 쉽지 않은 문제였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그분은 자신이 육체를 입은 하나님 곧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분이 공개적으로 ‘나는 하나님이다.’ 또는 ‘나는 메시아이다.’라고 말했던 기록은 없다. 그분은 자신의 신성을 암시하는 방법을 선택하셔서 청중들로 하여금 그분의 신성을 직감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점차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시자 대부분의 청중은 그분의 뜻을 알아차렸으면서도 그 주장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그러한 태도는 다음의 질문에서 확실해진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요 10:24). 그러나 이 질문의 배경을 보면 불행히도 그 의도는 순수하지 않았다.
어제 보았듯이 예수님은 아버지와 자신의 특별한 관계를 여러 차례 언급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신성을 계시하기 위해 사용하신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분이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주장하실 때 많은 사람은 그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였다(요 5:18).
예수님은 죄를 사할 수 있는 거룩한 특권을 주장하셨다. 그분은 또한 자신이 “영광의 보좌에 앉”(마 25:31)아 만국을 심판하고 각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일들 즉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속한 일들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이보다 얼마나 더 구체적으로 공개하실 수 있었겠는가?

1. 눅 5:17~26을 읽어 보라. 여기서 예수님은 공개적인 언급 없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는가?
[눅5:17~26]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답: 지붕을 뚫고 내린 중풍변자를 고치실 때 그의 죄를 사하였다는 말씀을 하시므로 예수께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내셨다.

<부가설명>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심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분의 입으로부터 직접 당신이 메시아라고 표현하는 확답을 듣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에 이르러올 위험을 예수께서 아셨다. 예수님은 죄, 곧 사망을 처리하기 위하여 죽으셔야할 것인데 유대인은 죽는 메시아를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회적으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셨다.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안드레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당장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의 형에게 단정적으로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다. 또 사마리아 여자에게는 예수께서 친히 내가 곧 그라고 하셨다. 진정으로 진리를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믿고 따르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이렇게 드러내셨다.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은 지금도 예수님이 구주이심과 그분의 뜻대로 그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주장하지 않았지만 여러 방식으로 그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넷째날(수) 예수님의 신성-2
7월 9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죽음을 이기신 것처럼 자신도 동일한 능력을 가졌다고 선언하시고 그 사실을 증명하셨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오직 하나님만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요 11:25)라고 주장할 수 있다.
자신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한 주장은 그분의 신성에 대한 또 다른 명확한 증거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다(요 3:13, 5:23).
예수님은 자신의 선재성을 재확인하셨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1. 어떻게 요 8:58이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심오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출 3:13~14 참고)
[요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답: “내가 있느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인데 영어로는 “I AM”이다. 이것은 “나는 있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출애굽기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의 헬라어 표현이다. 예수님이 출애굽기 3:14의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한 말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에 존재하게 된 아브라함과 달리(그리스어 어근 ‘기노마이’의 문자적 의미가 여기서는 ‘있었다.’로 번역되었음.),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에 계셨을 뿐 아니라 영원히 존재해 오셨다. “내가 있느니라(I AM)”는 표현 자체는 하나님의 칭호 ‘야훼’와 같다(출 3:14).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일컬어 불붙은 떨기나무에 나타나셨던 야훼(I AM)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모를 수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분은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 그래서 돌로 그분을 치려고 하였다(요 8:59).
복음서는 예수님이 다른 이들의 경배를 거부하지 않고 받으셨음을 보여준다. 성경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그분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사탄에게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고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의 경배를 받음으로 그분은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다. 바다 위의 제자들(마 14:33), 치유 받은 맹인(요 9:38),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마 28:9),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마 28:11) 모두가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고 그분께 공개적으로 경배를 드렸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했던 도마의 고백은 자신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다는 분명한 자각 없이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하시는 여호와”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고 풀이한다. 이것은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적어서 헬라어 발음으로 읽은 것이다. 사람 여호수아에 대하여 뜻을 풀이할 때에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구주 예수님에 대하여 풀이할 때에는 구원하는 여호와라고 풀이하는 것이 옳다고 나는 믿는다. 출애굽기 3:1~15절을 읽으면 불붙는 떨기나무에 나타나신 분이 여호와의 사자(2절)라고 밝힌다. 그리고 4~6에서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여호와라고 밝힌다. 그리고 마침내 모세가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하시고 15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이 바로 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라고 하신 그분이다. 예수님이신 것이다. 구약에는 삼위가 각각 “여호와,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의 신”이라고 표현해서 각각 개체를 가지신 존재임을 계시하시고 그 세분이 같은 여호와이심을 계시하셨다. 그분들은 존재에 있어서 동일하게 여호와이신 것이다. 그래서 마태 28:19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오직 한 이름을 가지셨다고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이 구절에서 “이름”은 단수이다. 예수님은 바로 여호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을 요한 8:58에서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자신의 선재성을 증거하셨으며 자신을 하나님으로 인식한 자들의 경배를 거부하지 않으셨다.


다섯째날(목) 그리스도의 사명
7월 10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러 오셨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
사탄은 하나님을 비난하였다. 예수님은 그런 비난을 반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품성을 대변하고 여러 사람이 발전시켜온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을 바로잡으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기를 바라셨다. 왜냐하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요 17:3).
그러나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지식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에게 구세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야훼는 구원이시다.’(마 1:21). ‘예수’라는 이름은 그 의미를 정확히 담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매우 분명한 언어로 묘사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인류는 에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거룩함, 집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잃었다. 반면 예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를 재정립시키시고(요 1:51),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마 26:28), 우리에게 삶의 모본을 보여주시고(벧전 2:21), 물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요 3:16).

1.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본질을 어떻게 정의하셨는가?(요 10:11, 마 20:28)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답: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시며 그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밝히셨다.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 했는가? 왜냐하면 그분께서 자원하여 우리 대신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롬 3:10~12, 6:23).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대가는 너무 컸다. 오직 하나님 아들의 생명만이 그 대가를 지불하기에 넉넉했다.

<부가설명> 인류의 죄를 처리하기 위하여 왜 하나님께서 죽으셔야만 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법은 결코 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법을 범한 대가를 누군가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이 설명은 맞는 설명이지만 정확하게 이해하게 하는 설명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이 인류의 죄를 처리하기 위하여 죽게 된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이다. 이것을 짧은 말로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죄는 단순히 십계명을 범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다. 성경이 오해할 수 없도록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죄는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사건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그것을 먹었을 때 죽은 자, 곧 죽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영생하는 상태에서 사망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제 사람은 스스로 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 죽은 자가 스스로 노력해서 살아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생명이 있는 누군가가 죽은 자를 살려주어야 한다. 그렇기 위하여 죽은 자의 그 사망을 처리해야 하였다. 이미 죽은 사람은 그것을 처리할 수 없다. 죽음의 지배하게 죽어야할 뿐이다. 그래서 생명 자체이신 분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의 죽은 그 죽음을 대신 죽어서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셔야 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이신 분이 우리에게 주신바 될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망을 처리하신 것이다.(히2:14) 그리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이 일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이나 피조물 중에 어느 누구도 자기가 죽고 스스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람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누구든지 예수께서 행하신 이 사실을 믿으면 그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요5:24, 25)

교훈 :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을 뿐 아니라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의 형벌을 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었다.


여섯째날(금)
7월 1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화잇 주석>, 요 1:1~3, 14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갖고 계신 구주”를 읽어 보라.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증거할 뿐 아니라 주님의 선재성에 관하여서도 결정적인 증언을 하고 있다. 말씀은 거룩하신 존재자이시며 하늘 아버지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존재하셨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요 1:3)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만물이 있기 이전에 존재하신 것이 틀림없다. 이 문제에 관하여 하신 모든 말씀은 너무나 결정적인 것이어서 아무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적으로 또한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 하나님이셨다. 주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은 만유를 주관하시며 영원토록 찬양을 받을 분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뚜렷한 하나님의 개성을 가지고 존재하셨으며 하늘 아버지와 하나이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4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마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막 1:24), “하나님의 아들”(막 3:11),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막 5:7)이라는 사실을 알며 고백합니다. 약 2:19을 보십시오. 왜 이 정도의 시인만으로는 구원 얻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단지 지적으로 영접하는 것에 만족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분을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그분이 우리의 죽음을 대신 처리하셔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셔서 그것을 믿는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분임을 진정으로 믿고 고백해야 한다. 마귀는 이 고백을 하지 못한다. 그들 자신이 사망자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루시퍼와 그 부하들의 영원한 죽음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의 승리이며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➋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셨는지 십자가 바로 앞에서 보았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은 십자가 아래입니다. 그대는 그곳에 얼마나 자주 갑니까? 언제 그곳에 마지막으로 갔습니까? 지금 잠시 그대의 구원을 위해 바쳐진 무한한 희생을 묵상해 보십시오.
※ 날마다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기 위하여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➌ 예수님 시대의 많은 사람이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오늘날도 그분에 대한 편견과 오해 때문에 그분께 삶을 맡기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인지 볼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 아담의 후손으로서 인간의 처지와 예수님의 상태를 잘 비교해서 설명하도록 성경공부를 하여 구원의 도리에 익숙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일상생활을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생활함으로 그들에게 예수님을 반영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