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과 아 들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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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4-07-03 13:42 조회4,773회 댓글0건본문
제 2 과 아들
기억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첫째 날(일) 인자
*도입질문: “인자” 라는 호칭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예수님은 “인자”라는 칭호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원래 위치는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사람의 아들은 더더욱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원래 위치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사9:6, 눅3:38))
예수님의 원래 위치가 영존하시는 아버지였던 근거는 예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요1:3, 요1:14)
예수라는 이름도 처음부터 있었던 이름이 아니라 죄가 발생한 이후에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본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이 하나님의 이름이 되었는데, 그 이름은 여호와이고 여호와란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주어진 이름이었습니다.(출3:14-15)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계신 분만을 가리키는 영원한 이름이며 고유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죄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이름도 추가 시켰습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를 선택한 아담으로 인해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첫 번째 아담과 대비되는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셨습니다.(롬5장)
예수님의 성육신은 창조주가 피조 된 존재가 되는 사건이고, 아버지가 아들의 위치가 되는 사건입니다.
다윗의 창조주로서 다윗이 주라고 불렀던 분께서 구속의 경륜을 위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마22:41-46)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한 하나님의 아들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선택의 자유로 하나님을 떠나 사단을 선택함으로 하나님 입장에서 아들을 잃어버렸고,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아들의 위치로 오셔서 아담이 선택한 영원한 죽음을 두 번째 아담의 모습(롬8:3)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선택의 결과를 해결하셨습니다.
아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사람이 되셨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 뿐만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란 위치도 즐겨 받아들였습니다.
“인자”라는 호칭 속에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책임지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둘째 날(월)하나님의 아들
*도입질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이 왜 복된 일일까요? (마16:16-17)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예수님의 원래 위치는 창조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창조주로서 영존하시는 아버지께서 아들인 아담의 선택의 결과인 영원한 죽음을 아버지가 대신 책임지시기 위해 이 땅에 아담의 위치인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에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창조주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대속하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달을 때 사랑의 감동에 사랑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그 반응이란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시는 분은 나를 창조하신 나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는 선택이고, 그런 아버지의 대속을 통해 나의 구원자가 된다는 사실에 대한 선택입니다.
그 선택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해 생명이 연결됩니다.(요일5:11-12)
셋째 날(화) 예수님의 신성-1
*도입질문: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신성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와 증거는 무엇이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신성은 예수님의 변하지 않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성에 육신 즉 인성을 덧입으셨습니다.(요1:14)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100%인간이면서도 동시에 100%신성이셨습니다.
두 가지 속성이 예수님께 완벽히 내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셨던 증거는 예수님께서 인간과 똑 같이 배고프셨고 주무셔야 했고, 피곤하신 것 등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셨던 증거는 이적이나 사람을 살리신 일이 아닌 사단에 의해 시험받으신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4:3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는 요구가 왜 예수님께는 시험거리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능력이 있었고, 그런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첫 번째 아담을 대신하는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모습과 다름으로 첫 번째 아담의 선택의 결과를 대속하는 결과가 되지 못하고 그것은 결국 구원을 이룰 수 없는 것이므로 사단은 예수님에게 있는 신성을 사용하여 두 번째 아담의 위치에서 벗어나게 하여 구원을 막고자 한 것이었기에 그것은 예수님께 큰 시험이었습니다.
아예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라고 해도 될 수가 없다면 사단의 시험은 시험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라고 하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는 신성이 있기에 예수님께는 시험거리가 됩니다.
예수님에게 있는 신성을 사용하게 함으로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자격에 문제가 있게 하여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자 했던 사단의 또 다른 시험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또 다시 시도되었습니다.
마27:39-42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달렸던 강도에게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할 필요조차 없었던 이유는 강도들에게는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런 능력이 없었던 이유는 강도들에게는 신성의 능력이 없는 순수한 인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큰 시험거리가 된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신성이셨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행하신 모든 이적과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신성을 사용한 결과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것들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행위의 도구가 되었을 뿐이었고 실제는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행10:38)
넷째 날(수) 예수님의 신성-2
*도입질문: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 하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의 선재성을 드러내셨습니다.
“내가 있느니라” 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도 익숙한 표현법으로 야훼 즉 여호와의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요10:7)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요6:35)....
만물이 존재하기 전에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기에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었습니다.(요1:4)
다섯째 날(목) 그리스도의 사명
*도입질문: 그리스도의 사명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오해하고 있던 하나님의 품성을 바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로 하나님과의 분리를 선택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분리가 사망(죄)이므로 하나님의 품성을 바로 보게 하여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절대적 사랑에 대한 감동이 사랑으로 반응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생명이므로 예수님은 오해된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 주신 최고의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인간의 선택을 인정하실 뿐만 아니라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창조주께서 대신 자신의 생명으로 지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 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게 될 때, 그 사랑이 에너지가 되어 깊은 감동을 일으키고, 그 감동으로 하나님을 개인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선택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생명입니다.
기억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첫째 날(일) 인자
*도입질문: “인자” 라는 호칭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예수님은 “인자”라는 칭호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원래 위치는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사람의 아들은 더더욱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원래 위치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사9:6, 눅3:38))
예수님의 원래 위치가 영존하시는 아버지였던 근거는 예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요1:3, 요1:14)
예수라는 이름도 처음부터 있었던 이름이 아니라 죄가 발생한 이후에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본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이 하나님의 이름이 되었는데, 그 이름은 여호와이고 여호와란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주어진 이름이었습니다.(출3:14-15)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계신 분만을 가리키는 영원한 이름이며 고유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죄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이름도 추가 시켰습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를 선택한 아담으로 인해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첫 번째 아담과 대비되는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셨습니다.(롬5장)
예수님의 성육신은 창조주가 피조 된 존재가 되는 사건이고, 아버지가 아들의 위치가 되는 사건입니다.
다윗의 창조주로서 다윗이 주라고 불렀던 분께서 구속의 경륜을 위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마22:41-46)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한 하나님의 아들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선택의 자유로 하나님을 떠나 사단을 선택함으로 하나님 입장에서 아들을 잃어버렸고,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아들의 위치로 오셔서 아담이 선택한 영원한 죽음을 두 번째 아담의 모습(롬8:3)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선택의 결과를 해결하셨습니다.
아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사람이 되셨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 뿐만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란 위치도 즐겨 받아들였습니다.
“인자”라는 호칭 속에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책임지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둘째 날(월)하나님의 아들
*도입질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이 왜 복된 일일까요? (마16:16-17)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예수님의 원래 위치는 창조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창조주로서 영존하시는 아버지께서 아들인 아담의 선택의 결과인 영원한 죽음을 아버지가 대신 책임지시기 위해 이 땅에 아담의 위치인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에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창조주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대속하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달을 때 사랑의 감동에 사랑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그 반응이란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시는 분은 나를 창조하신 나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는 선택이고, 그런 아버지의 대속을 통해 나의 구원자가 된다는 사실에 대한 선택입니다.
그 선택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해 생명이 연결됩니다.(요일5:11-12)
셋째 날(화) 예수님의 신성-1
*도입질문: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신성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와 증거는 무엇이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신성은 예수님의 변하지 않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성에 육신 즉 인성을 덧입으셨습니다.(요1:14)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100%인간이면서도 동시에 100%신성이셨습니다.
두 가지 속성이 예수님께 완벽히 내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셨던 증거는 예수님께서 인간과 똑 같이 배고프셨고 주무셔야 했고, 피곤하신 것 등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셨던 증거는 이적이나 사람을 살리신 일이 아닌 사단에 의해 시험받으신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4:3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는 요구가 왜 예수님께는 시험거리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능력이 있었고, 그런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첫 번째 아담을 대신하는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모습과 다름으로 첫 번째 아담의 선택의 결과를 대속하는 결과가 되지 못하고 그것은 결국 구원을 이룰 수 없는 것이므로 사단은 예수님에게 있는 신성을 사용하여 두 번째 아담의 위치에서 벗어나게 하여 구원을 막고자 한 것이었기에 그것은 예수님께 큰 시험이었습니다.
아예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라고 해도 될 수가 없다면 사단의 시험은 시험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라고 하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는 신성이 있기에 예수님께는 시험거리가 됩니다.
예수님에게 있는 신성을 사용하게 함으로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자격에 문제가 있게 하여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자 했던 사단의 또 다른 시험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또 다시 시도되었습니다.
마27:39-42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달렸던 강도에게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할 필요조차 없었던 이유는 강도들에게는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런 능력이 없었던 이유는 강도들에게는 신성의 능력이 없는 순수한 인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큰 시험거리가 된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신성이셨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행하신 모든 이적과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신성을 사용한 결과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것들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행위의 도구가 되었을 뿐이었고 실제는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행10:38)
넷째 날(수) 예수님의 신성-2
*도입질문: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 하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의 선재성을 드러내셨습니다.
“내가 있느니라” 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도 익숙한 표현법으로 야훼 즉 여호와의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요10:7)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요6:35)....
만물이 존재하기 전에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기에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었습니다.(요1:4)
다섯째 날(목) 그리스도의 사명
*도입질문: 그리스도의 사명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오해하고 있던 하나님의 품성을 바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로 하나님과의 분리를 선택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분리가 사망(죄)이므로 하나님의 품성을 바로 보게 하여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절대적 사랑에 대한 감동이 사랑으로 반응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생명이므로 예수님은 오해된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 주신 최고의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인간의 선택을 인정하실 뿐만 아니라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창조주께서 대신 자신의 생명으로 지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 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게 될 때, 그 사랑이 에너지가 되어 깊은 감동을 일으키고, 그 감동으로 하나님을 개인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선택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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