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사랑이 많은 우리 하늘 아버지(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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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06-30 10:58 조회5,153회 댓글1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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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1과
사랑이 많은 우리 하늘 아버지
7월 5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7분
기억절 :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개역).
도입)
오늘부터 새로운 한 기가 시작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포괄적인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오늘 제목은 사랑이 많은 우리 하늘 아버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제목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제목이 사랑이신 우리 하늘 아버지라 하면 더 좋을 듯 싶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사랑이 많은 분이 아니라 사랑이신 분이시다. 그분의 품성 자체가 사랑이시다. 크고 작은 양으로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조차 안되는 사랑이신 분이시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였다. 사도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심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은 곧 사랑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분의 속성인 것이다. 수량으로 그분의 사랑을 표기할 수 없는 사랑 자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느 간호사가 쓴 수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 모녀가 정형외과를 찾았다. 60이 넘어 보이는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다며 자신의 왼손을 내놓고 넷째 손가락을 잘라 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이끌려온 듯한 어린 딸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딸의 왼손을 잡고 원장에게 애원했다. “제 딸이 초등학교 때 농기구에 다쳐서 왼손가락 다섯 개가 다 잘렸습니다. 다행히 네 손가락은 접합 수술에 성공했는데 하필이면 네 번째 손가락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딸이 이번에 시집을 갑니다. 못생긴 제 손가락을 딸에게 줘 가락지를 끼워 주는 게 저의 소원입니다.” 딸은 말도 안 된다며 펄펄 뛰었지만 의사는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수술 후 처지가 바뀐 모녀는 서로의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수술을 도왔던 간호사는 이 모녀의 ‘손가락 사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큰 사랑을 새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손가락 하나의 사랑도 이럴진대 온몸을 다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연구 범위 : 마 7:9~11, 요 14:8~10, 눅 15:11~24, 마 6:25~34, 히 9:14.
*교사(리더)는 안내에 따라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를 인도해 주십시오.
*교과에서 제공하는 일몰 시간은 서울 기준입니다. 실제 일몰 시간은 지역마다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셨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백삼십 번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셨다. 예수님은 다양한 형용사를 붙여 하나님을 “하늘 아버지”(마 6:14), “살아 계신 아버지”(요 6:57), “거룩하신 아버지”(요 17:11), “의로우신 아버지”(요 17:25)라고 부르셨다. ‘아버지’란 이름은 우리와 하나님을 결합시키는 친밀한 유대감을 묘사한다.
전통적으로 ‘아버지’란 가족에게 사랑, 보호, 안전, 안녕과 정체성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가족 구성원을 함께 돌본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 모실 때 우리는 이런 것들을 포함하여 여러 복을 누리게 된다.
아버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일이지만 우리는 그분에 대한 지적이고 이론적인 지식만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그분과 얼마나 더 친밀한 관계를 맺겠는가?
이번 주에 우리는 우리 아버지와 우리를 향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떤 교훈을 주셨는지 탐구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들 하나님과 성령님과 맺은 친밀한 관계도 살펴보려고 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하늘 아버지의 핵심 속성을 더 심도 있게 이해한다.
➋ 느끼기 :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동정어린 돌봄을 개인적으로 경험한다.
➌ 행하기 : 한없이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주저 없이 삶을 맡긴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는 어떤 경험을 통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습니까?
❷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 아버지에 대해서 무엇을 알기를 바라셨다고 생각합니까?
❸ 하나님이 우리 하늘 아버지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믿음과 소망을 갖습니까?
❹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의 삶과 신앙은 어떤 모습이 될까요?
B. ❶ 그대는 어렸을 때 부모님에 대해 어떤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❷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오해하도록 노력할까요?
❸ 예수님의 사역과 생애에서 설명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우리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반사해야 할까요?
결론 : 모든 성경은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늘 아버지의 본성을 증언합니다. 사랑은 그분의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잘 묘사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제3기 활동반의 목표는 ‘추수’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토의합니다.
❷ ‘나의 구도자 명단과 기도 목록’을 함께 작성합니다.
❸ 교회 장막부흥회나 여름 캠프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첫째날(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6월 29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교사강해 1)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이 이 한마디~! 예수님의 가르침 속의 이 한마디에는 얼마나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자~!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대상이신 분이 어디 계신다고요? * 하늘~!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분이 누구 아버지시라고요? 누구 아버지? 우리~! 여러분의 아버지가 누구시라고요?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의 아버지~! 우리는 우리가 기도드리는 대상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 매우 친밀함을 느끼게 하시는 호칭이며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기도하는 것은 매우 친밀함을 나타내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버지’란 낯선 이름이 아니다. 구약은 몇 차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제시하였다(사 63:16, 64:8, 렘 3:4, 19, 시 103:13). 하지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이름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친이름은 ‘야훼’였다. 그 이름은 구약에서 무려 6,800회 이상 등장한다. 예수님이 ‘야훼’가 아닌 다른 하나님을 계시하러 오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의 사명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드러낸 계시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분은 하나님을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셨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태도를 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자녀의 필요를 돌보시는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있다. 이렇게 자상하신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신다. 수많은 천사가 그곳에서 그분을 거룩하고 전능하신 우주의 유일한 절대자로 경배한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자녀로서 확신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 한편 그분이 하늘에 계신다는 사실은 경외심을 가지고 그분께 경배해야 할 필요성과 그분의 초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이 가운데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만 강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왜곡된 관념을 갖게 되고 매일의 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마 7:9~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인간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의 속성을 얼마나 반영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많고 자상한 아버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여러 사정으로 인해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시며 하늘의 주권자로 경배 받아야 할 분이시다. 인간 아버지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분의 속성을 어렴풋이 반사한다.
부가적용)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를 만한가? 시편 139편에 보면 사람의 태아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139:13~16). 이 말씀의 깊은 과학적 진리는 당시의 과학으로는 제대로 이해하거나 밝혀낼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18세기까지 생물학자들은 정자 속에 이미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한 작은 아이가 들어있는 것으로 믿어왔다. 즉 크기만 현미경을 통해야 보일 정도로 작을 뿐 처음부터 이미 분화된 기관들을 가진 아이가 정자 속에 들어있어 난자와 결합하는 순간 양분을 공급받아 외형적으로만 성장해 가는 것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시편 139편 13절에 "하나님께서 내 장부를 지으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장부"란 말은 히브리어로 "캘라요쓰" 즉 신장을 뜻한다. 이 말씀은 이미 만들어진 신장이 모태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조직되어가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더욱 세밀한 표현이 16절에 기록되어 있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란 말씀에서 "형질"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고렘" 즉 태아 또는 배아에 해당되는 말로 원래 '형체를 갖기 전의 것(unformed mass)' 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말이다. 16절의 말씀 전체를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주의 눈이 내 형체가 생기기 전에 보셨으며, 아직 그중 하나도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 정한 날에 형성될 나의 모든 부분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나이다." 얼마나 놀라운 최신의 분자생물학적인 관찰인가. 1880년대에 와서야 겨우 정자와 난자에 있는 물질이 새로 태어날 아이를 위한 모든 것이며, 이 물질이 바로 염색체임을 밝혀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부터 70 여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이 물질의 근원이 DNA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형체를 갖기 전의 모든 유전정보를 가지고, 이미 정해진 부분들이 정해진 시간에 형성됨으로 인해 마침내 한 생명체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형체’즉 뼈가 모태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시작부터 조직하시고 지키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며 나가야 한다. 15절에서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형질’이란 태아를 의미한다. 모태에서 태아가 완전히 이루기 전에 하나님께서 다 보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를 다 보시는 분이시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은 시인의 출생일인지 죽는 날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이 시의 문맥으로 보아 출생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태아가 하나의 인간으로 형성되는 모든 과정을 책으로 기록하였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태어나는 모든 과정을 아시고 주관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우리의 출생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태어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에게 하늘 아버지는 얼마나 가깝고 좋은 분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지만 우리는 좋은 아버지란 어떤 것인지 안다. 게다가 좋은 아버지의 자화상이라 할 만한 사람들에 대해 알 수도 있다. 우리는 인간 아버지가 완전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우리도 자녀를 사랑할 뿐 아니라 비록 부족할지라도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주고자 노력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주실 수 있겠는가? 상상해 보라.
| 적용 |
그대는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영감의 교훈 : 애정이 넘치는 이름 -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고 애정이 넘치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그 이름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애정의 표이며, 그분의 부드러운 관심과 우리와의 관계를 보증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그리스도는 은혜의 후사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 그들은 결코 타락한 적이 없는 천사들보다 더욱 거룩한 관계를 하나님과 이루게 된다”(증언보감 2권, 336).
기 도 : 아버지! 항상 정다운 그 이름 불러 봅니다. 길 잃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 같은 인생살이, 아버지를 만나 눈물을 거두고 행복을 깨닫습니다. 영원히 아버지를 섬기며 따르렵니다. 저를 지켜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아들에 의해 계시됨
6월 30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교사강해 2)
하늘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라고 하셨다. 실제로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신다. 인간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볼 수 없는 존재를 인간의 가시적인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신 분이 곧 아들이라 일컫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후 4:4)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아들은 인간과 같은 생육을 통해 태어난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존재로 변화하신 존재이시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 보이신 분이라 하나님께 대한 빛을 드러내신 분이라 아들이라 이름하였으나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하나(요 10:30절 참조)이시다.
요한은 아버지에 대해 말하면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요 1:18)다고 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죄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기 원했지만 그분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그럼에도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생은 곧 아버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17:3).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렘 9:23~24 참고) 우리는 왜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하는가?
대쟁투에서 사탄의 주요 공격 목표는 하나님의 품성이었다.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기적이고 잔인하며 독단적인 신으로 생각하도록 전력을 다한다. 이런 비난을 반박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거짓을 증명하기 위해 그분이 직접 이 땅에 와서 사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성과 품성을 대변하고 사람들이 신성에 대해 발전시킨 왜곡된 개념들을 교정하기 위해 오셨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요 14:8~10을 읽어 보라. 3년 이상 예수님과 함께 지냈음에도 제자들이 얼마나 아버지에 대해 무지했는지 주목하라. 제자들의 부족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빌립의 질문을 듣고 예수님은 슬피 탄식하셨다. 그분의 나긋한 책망은 아둔한 제자들에 대한 그분의 참을성 있는 사랑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나와 함께 동행하고 나의 말을 듣고 군중을 먹이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보고도 어떻게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
교훈 :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의 품성을 곡해하도록 노력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바르게 계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의 품성을 나타내셨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시기를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요 10:30)라고 하셨다. 이는 그 자신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일으키게 되어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가장 큰 죄목은 바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한 것, 곧 그 스스로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죄목으로 미움을 받아 죽은 것이다. 사람이 되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속이는 참람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 학생들이나 젊은 사람들은 거짓말을 종종 뻥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대의 가장 큰 뻥쟁이(거짓말 장이)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이신지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것에 충격을 받았고 예수께서 너무나 큰 뻥(거짓말)을 친다고 돌을 던져 죽이려 했던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예수님을 통해 하늘 아버지의 어떤 모습을 깨달았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어떻게 나를 통해 이루신 아버지의 일을 보고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냐?’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아버지를 잘못 나타내셨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방법보다 완전한 방법으로 아버지를 계시하셨다. 그분은 그러한 자신의 사명을 성취했다고 확신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7, 9).
| 적용 |
예수님을 통해 본 하늘 아버지의 모습은 그대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분 -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셨을 때에도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일을 그치지 않으셨다. 비록 그분이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셨을지라도 신성은 여전히 그분의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만 인간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내실 수 있었으며, 제자들은 삼 년 동안이나 그 나타나심을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시대의 소망, 663).
기 도 : 하늘 아버지는 잘못하면 벌 주는 엄하고 무서운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삶에 오신 하늘 아버지, 감사하며 찬양드립니다.
셋째날(화) 우리 하늘 아버지의 사랑
7월 1일
교사강해 3)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하늘 아버지라 하는데 이는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아닌 하늘 아버지라는 말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하늘 아버지란 그분의 존재와 같은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늘 아버지라 부르는 존재이신 그분과 같은 모습을 가질 때에 비로서 우리는 그분을 하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호칭 뒤에 그리스도라는 말을 부친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고후 4:4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썩지 아니할 존재, 죽지 아니할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갈 3: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하고 계신데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닮은 존재가 되었기에 우리는 하늘 아버지라 일컫는 것이다. 바로 하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시려 하신 축복과 사랑은 우리로 썩지 아니할 존재, 영생을 가진 존재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 주신 사랑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이 이미 확정했던 사실 곧 아버지께서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오셨다(렘 31:3, 시 103:13).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광활한 우주를 통치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수천만의 은하 가운데서 작은 혹성에 사는 보잘것없고 불쌍한 죄인에게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셨다니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
아버지께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보여주신 최고의 증거는 무엇인가?(요 3:16~17 참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인류에 대해 동정심을 갖도록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았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십자가 사건은 오히려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보다 그분의 사랑을 증명할 더 큰 증거는 무엇이겠는가?
“아버지께서 이러한 큰 속죄 때문에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그러한 속죄를 제공하신 것이다”(정로의 계단, 13).
어떤 이들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마지못해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다고 해서 아버지에게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러한 말씀으로 그와 같은 잘못된 사상을 타파하셨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눅 15:11~24을 읽고 탕자의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에 대해 묵상해 보라.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사랑의 증거를 열거해 보라.
교훈 : 인간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가장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부가적용)
기독교에서 모두가 십자가를 가르치고 십자가를 설교한다. 인생들 모두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눈길을 이끌려고 한다. 왜 십자가가 중요한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골고다(해골의 곶) 즉 갈보리(골고다의 라틴어역)에서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 곧 해골의 골짜기이다. 아무도 죽음의 문빗장을 열지 못한 채 죽어 널브러진 해골의 골짜기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시는 사망의 문빗장을 열지 못한 채, 이 땅의 죄인들처럼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께서는 이 사망의 문빗장을 열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십자가는 더 이상 사망의 문빗장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두어 둘 수 없음을 보여주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십자가의 승리는 모든 인간이 삶에 대한 희망,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분은 모진 매를 맞으시고 채찍에 찢기시며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분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고 모든 싸움에서 사단에게 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 그리고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얼마나 큰 것인가?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아들이 자신의 몫을 챙겨 빨리 아버지 곁을 떠났을 때 그는 아버지의 간섭에서 빨리 벗어나야 더 큰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찾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맞아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하고 그냥 품꾼으로 살아갈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더 가슴 아픈 대목은 아버지 곁을 지켰던 첫째가 동생을 환영하는 아버지에게 공평하지 못하다고 이의를 제기한 부분입니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인가요? 설마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 적용 |
자신이 하늘 아버지께 받은 사랑의 증거를 기록해 봅시다.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 - “하나님의 아들밖에는 아무도 우리의 구속을 완성시킬 수 없나니 이는 아버지의 품에 있는 자만이 능히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음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는 자라야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무한한 희생이 아니고는 잃어버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것이 없는 것이다”(정로의 계단, 14).
기 도 : 아버지, 제가 혹시 저의 경건한 삶으로 천국을 얻기 바라는 첫째 아들과 같지는 않은지요.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다만 저를 사랑하셔서 구원을 주시려는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넷째날(수) 우리 하늘 아버지의 동정어린 돌봄
7월 2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교사강해 4)
하루는 마틴 루터가 크게 실망할 일이 생겨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밖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새 한 마리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터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서 잠시 지켜보기로 했는데, 마침 새는 노래를 마치고 나서 머리를 날개 틈 사이에 두고 잠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루터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순간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작은 새는 이미 저녁을 먹고 잠들 준비를 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얼마나 만족스러운가! 내일 무엇을 먹을 것과 어디에 거할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지. 이 새는 다윗과 같이 전능자의 그늘에 거하는구나. 새는 나뭇가지 위에서 얼마나 안식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온전히 그를 돌보시며 모든 것을 안배하시는구나.” 결국 작은 새 한 마리의 행동이 실망과 근심에 시달리고 있던 루터에게 다시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신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돌봄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무관심하거나 우리를 등한히 여길 수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우리를 돌보신다고 가르치셨다. 그분의 자비와 자상함은 인간의 성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처럼 들쑥날쑥하지 않다. 그분의 사랑은 상황과 관계없이 일정하며 변함이 없다.
마 6:25~34을 읽어 보라. 여기에서 용기를 주는 말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 말씀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더욱 신뢰할 수 있는가?
“우리의 경험 중에 너무나 흉악하여 그분이 보시지 않으시는 사건은 없고 너무 어려워 그분이 풀지 못하는 복잡한 문제도 없다. 당신의 자녀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당하는 어떤 재난이나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는 어떤 근심이나 기분을 좋게 하는 어떤 기쁨이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어떠한 진정한 기도라도 우리의 천부께서 못 본 체하시거나 직접 관심을 두시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 147:3)신다. 하나님과 각 사람의 관계는 마치 그가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는 주시지 않을 것처럼 특별하고 완전하다”(정로의 계단, 100).
여기에 있는 여러 용기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비극과 고난이 우리에게 닥치리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심지어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마 6:34)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모든 일이 항상 순조롭지만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불행과 서글픈 그 결과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교훈 :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으로 우리를 돌보신다. 우리는 비록 죄악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한다.
부가적용)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비단 인간들뿐 아니라 동·식물들도 먹이시고 적합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 그럼에도 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돌보심과 섭리로 인해 지금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있다. 물론 자연인들이야 하나님의 일들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부인할 수도 있지만(고전 2:14), 구원받은 성도들조차도 때로는 믿음이 약해져 늘 근심과 염려 가운데 인생을 허비하는 경우가 빈번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주변 생태계의 동·식물들을 예로 드시면서 그들을 돌보는 것처럼 우리도 돌보신다고 말씀하셨다.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앗을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곡물 창고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들이 새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 또 어찌하여 너희는 의복에 대해서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유의해 보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며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6,28).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보다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에게 더 관심을 두신다(창 1:27). 주님은 다른 누구보다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몸값으로 내어 주셨고(마 20:28), 그 사실을 믿은 사람들을 그분의 자녀로 삼아 주셔서 아버지가 자녀를 돌봄같이 우리를 매순간 인도하고 돌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피조물들보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더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지니고 지켜 주신다. 주님께서는 새들도 먹고 살도록 철두철미하게 돌보시는데 하물며 그분의 피 값으로 사신 그분의 자녀들을 더 돌보시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주님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며 두려움과 걱정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힘을 북돋워 주신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 중 한 마리도 하나님 앞에서는 잊혀지지 않느니라. 도리어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모두 세어 두셨느니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 12:6,7).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위기의 때에 그대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관건은 이런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특히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 앞에 제시한 선물과 복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불행이 분명 닥칠 텐데 그때 우리는 쉽게 좌절하고 말 것이다.
| 적용 |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번민하는 사람을 그대는 어떻게 돕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 낱낱이 돌보시는 하나님 - “사람들이 기도할 때는 물론이어니와 저희가 날마다의 저희의 일을 하러 나갈 때나 밤에 자리에 누울 때나 아침에 일어날 때나 부자가 저희의 화려한 집에서 잔치를 먹을 때나 가난한 사람이 자기 자녀들을 변변치 못한 식상에 둘러 앉혔을 때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낱낱이 돌보신다. 우리의 흘리는 눈물 중에 하나님께서 주목하시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 또 우리의 웃는 웃음 가운데 그가 보시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정로의 계단, 85).
기 도 : 그 일을 당했을 때, 아버지를 먼저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계시기는 한 것인지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을 바랄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위로와 소망을 줄 분은 우리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연약한 믿음을 붙잡아 주옵소서.
다섯째날(목)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7월 3일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골 2:2).
교사강해 5)
골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골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이곳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이고 모든 인생과 우주 탄생의 비밀의 영광이신 분이심을 알 수가 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 저와 여러분의 출생의 비밀 그리고 나아가 이 우주의 비밀을 알게 될 중요한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골 2:2-3절을 보라. 골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골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정말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신격을 구성하는 삼위의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하여 여러 방식으로 가르치고 예증하셨다. 비록 우리는 이 진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성경에 있는 여러 다른 진리와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골 2:2). 성경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지만 우리는 믿음과 순종, 기도로 진리를 찾고 연구하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신격의 삼위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활약하셨다. 아래의 사건 속에서 신격의 삼위가 담당했던 각각의 역할을 요약해 보라.
탄생 - 눅 1:26~35
침례 - 눅 3:21~22
십자가 - 히 9:14
예수님의 지상 봉사가 끝날 무렵 그분은 실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삼위께서 함께 일하시는 모습을 본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 요 14:26도 참고)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셨다.
예수님은 구원의 계획 속에서 삼위 사이에 완전한 조화와 협력이 있다고 설명하셨다. 아들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그분의 사랑을 증명하고(요 17:4), 성령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드러낸다(요 16:14).
교훈 : 삼위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신격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예수님의 삶 속에 나타났다. 삼위의 하나님은 완전한 조화 가운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신다.
부가적용)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본래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는 볼 수 없는 존재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형상(形象)”이나 “변화(變化)”라는 말은 두개의 철학적 개념이 합성된 복합어이다. “형(形)”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꼴”이다. 다시 말해 모양이라고 옮겨도 무방하다. 반면에 “象(상)”이라는 것은 꼴에서 엿볼 수 있는 내면의 모습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사람의 외모에서 그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착하고 순진하고 청순한 외모를 가진 여자가 있다고 하자. 대개 외모와 내면적인 품성은 일치한다. 그러나 만약에 한눈에도 지성적이고 교양 있게 생긴 숙녀가 천박한 말투와 경망스런 행동을 해댄다면 사람들은 형상을 가늠할 수 없어서 당황하게 될 것이다. 형과 상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형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변화라는 말의 의미도 알 수 있다. “변(變)”은 “형(形)”이 바뀌는 것이고, “화(化)”는 “상(象)”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존재의 형이 바뀐 것이고 하나님의 상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본래의 참 모습은 영이시다. 그런데 그분께서 인자 같은 이(단 7:13)로서의 형(形)을 취하셨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 존재의 변화를 취하셨지만 이 존재 속에 나타난 상(象) 본래의 하나님의 모습과 내면의 모든 모습은 본래의 하나님과 하나이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그 꼴, 즉 모양을 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모양 속에서 하나님의 상을 보는 것인데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내면을 그분을 통해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고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을 알고 이해하여야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양, 어떤 꼴을 가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을 볼 수가 없다. 인자 같은 이(단 7:13)라는 표현은 사람과 같은 모양을 취하신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이 가시적 세상을 열면서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모양을 취하시고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의 형상을 꼴 지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이 말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무지의 소치이다. 왜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
왜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 하였는가?
* 이 말씀을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피조물보다 먼저 태어나신 분처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먼저나신 분에 대한 의미가 탄생이 아닌 상태를 말한다”(2013년 제 1기 안교교과 16p 참조)고 안교교과는 말했다. 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 즉 상태의 변화를 가지고 존재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기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런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뿐만이 아니라 가시적인 세계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실 뿐이지 없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가시적인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려 자신의 존재의 상태를 알리셨는데 우리는 이 분의 변화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형상과 변화에 대한 개념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하는 그 하나님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만이 썩지 아니할 몸, 신령한 몸을 가지신 참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성육신 하신 모습을 통해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의 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그대는 어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까?
각자 ‘나’로 존재하는 이 세상은 분열과 분리, 대립과 갈등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세계에는 연합과 일치,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보다 그분의 삶의 방식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면 사랑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을 뿐 아니라 그분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도 확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 적용 |
우리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닮았다면 반드시 실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누림 -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율법을 범함으로 규정된 형벌을 되
돌리신다. 그때 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되며 하늘의 호의를 받게 되고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누리게 된다”(가려 뽑은 기별 3권, 191).
기도 : 아버지, 말로 다 표현 못해도 알 것 같습니다.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신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하나님이시라는 제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도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여섯째날(금)
7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교회증언 8권>, 263~278 “인격적인 하나님”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을 새 이름 곧 사람의 마음에 가장 친근성을 연상시키는 이름으로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하나님을 부를 때에 사용하는 이 이름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신뢰의 표가 되는 동시에 우리에게 대한 그분의 관심과 관계의 보증이 된다. 그분의 은혜와 축복을 구할 때 우리가 부르는 이 이름은 그분의 귀에 음악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외람되다고 생각지 않도
록 하기 위하여 그분은 이것을 거듭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이 명칭과 친밀하여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여기신다. 그는 우리를 이 혼잡한 세상에서 속량하시고 우리를 택하사 하늘 왕의 가족, 곧 하늘 임금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다. 그분은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는 것보다 더 깊고 강한 신념으로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기를 바라신다. 부모들은 자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보다 더 크고 더 넓고 더 깊다. 그 사랑은 측량할 수 없다”(실물교훈 141~14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만약 어떤 사람이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나쁜 경험 때문에 하나님을 하늘 아버지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겠습니까?
➋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알지만 세상에 고통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➌ 우주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창조하신 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 분이라는 사실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이 놀라운 소식으로 우리의 정신을 무장하고 매 순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며 살 수 있을까요?
사랑이 많은 우리 하늘 아버지
7월 5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7분
기억절 :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개역).
도입)
오늘부터 새로운 한 기가 시작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포괄적인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오늘 제목은 사랑이 많은 우리 하늘 아버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제목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제목이 사랑이신 우리 하늘 아버지라 하면 더 좋을 듯 싶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사랑이 많은 분이 아니라 사랑이신 분이시다. 그분의 품성 자체가 사랑이시다. 크고 작은 양으로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조차 안되는 사랑이신 분이시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였다. 사도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심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은 곧 사랑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분의 속성인 것이다. 수량으로 그분의 사랑을 표기할 수 없는 사랑 자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느 간호사가 쓴 수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 모녀가 정형외과를 찾았다. 60이 넘어 보이는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다며 자신의 왼손을 내놓고 넷째 손가락을 잘라 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이끌려온 듯한 어린 딸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딸의 왼손을 잡고 원장에게 애원했다. “제 딸이 초등학교 때 농기구에 다쳐서 왼손가락 다섯 개가 다 잘렸습니다. 다행히 네 손가락은 접합 수술에 성공했는데 하필이면 네 번째 손가락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딸이 이번에 시집을 갑니다. 못생긴 제 손가락을 딸에게 줘 가락지를 끼워 주는 게 저의 소원입니다.” 딸은 말도 안 된다며 펄펄 뛰었지만 의사는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수술 후 처지가 바뀐 모녀는 서로의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수술을 도왔던 간호사는 이 모녀의 ‘손가락 사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큰 사랑을 새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손가락 하나의 사랑도 이럴진대 온몸을 다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연구 범위 : 마 7:9~11, 요 14:8~10, 눅 15:11~24, 마 6:25~34, 히 9:14.
*교사(리더)는 안내에 따라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를 인도해 주십시오.
*교과에서 제공하는 일몰 시간은 서울 기준입니다. 실제 일몰 시간은 지역마다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셨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백삼십 번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셨다. 예수님은 다양한 형용사를 붙여 하나님을 “하늘 아버지”(마 6:14), “살아 계신 아버지”(요 6:57), “거룩하신 아버지”(요 17:11), “의로우신 아버지”(요 17:25)라고 부르셨다. ‘아버지’란 이름은 우리와 하나님을 결합시키는 친밀한 유대감을 묘사한다.
전통적으로 ‘아버지’란 가족에게 사랑, 보호, 안전, 안녕과 정체성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가족 구성원을 함께 돌본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 모실 때 우리는 이런 것들을 포함하여 여러 복을 누리게 된다.
아버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일이지만 우리는 그분에 대한 지적이고 이론적인 지식만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그분과 얼마나 더 친밀한 관계를 맺겠는가?
이번 주에 우리는 우리 아버지와 우리를 향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떤 교훈을 주셨는지 탐구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들 하나님과 성령님과 맺은 친밀한 관계도 살펴보려고 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하늘 아버지의 핵심 속성을 더 심도 있게 이해한다.
➋ 느끼기 :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동정어린 돌봄을 개인적으로 경험한다.
➌ 행하기 : 한없이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주저 없이 삶을 맡긴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는 어떤 경험을 통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습니까?
❷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 아버지에 대해서 무엇을 알기를 바라셨다고 생각합니까?
❸ 하나님이 우리 하늘 아버지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믿음과 소망을 갖습니까?
❹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의 삶과 신앙은 어떤 모습이 될까요?
B. ❶ 그대는 어렸을 때 부모님에 대해 어떤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❷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오해하도록 노력할까요?
❸ 예수님의 사역과 생애에서 설명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우리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반사해야 할까요?
결론 : 모든 성경은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늘 아버지의 본성을 증언합니다. 사랑은 그분의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잘 묘사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제3기 활동반의 목표는 ‘추수’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토의합니다.
❷ ‘나의 구도자 명단과 기도 목록’을 함께 작성합니다.
❸ 교회 장막부흥회나 여름 캠프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첫째날(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6월 29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교사강해 1)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이 이 한마디~! 예수님의 가르침 속의 이 한마디에는 얼마나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자~!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대상이신 분이 어디 계신다고요? * 하늘~!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분이 누구 아버지시라고요? 누구 아버지? 우리~! 여러분의 아버지가 누구시라고요?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의 아버지~! 우리는 우리가 기도드리는 대상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 매우 친밀함을 느끼게 하시는 호칭이며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기도하는 것은 매우 친밀함을 나타내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버지’란 낯선 이름이 아니다. 구약은 몇 차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제시하였다(사 63:16, 64:8, 렘 3:4, 19, 시 103:13). 하지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이름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친이름은 ‘야훼’였다. 그 이름은 구약에서 무려 6,800회 이상 등장한다. 예수님이 ‘야훼’가 아닌 다른 하나님을 계시하러 오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의 사명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드러낸 계시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분은 하나님을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셨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태도를 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자녀의 필요를 돌보시는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있다. 이렇게 자상하신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신다. 수많은 천사가 그곳에서 그분을 거룩하고 전능하신 우주의 유일한 절대자로 경배한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자녀로서 확신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 한편 그분이 하늘에 계신다는 사실은 경외심을 가지고 그분께 경배해야 할 필요성과 그분의 초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이 가운데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만 강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왜곡된 관념을 갖게 되고 매일의 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마 7:9~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인간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의 속성을 얼마나 반영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많고 자상한 아버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여러 사정으로 인해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시며 하늘의 주권자로 경배 받아야 할 분이시다. 인간 아버지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분의 속성을 어렴풋이 반사한다.
부가적용)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를 만한가? 시편 139편에 보면 사람의 태아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139:13~16). 이 말씀의 깊은 과학적 진리는 당시의 과학으로는 제대로 이해하거나 밝혀낼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18세기까지 생물학자들은 정자 속에 이미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한 작은 아이가 들어있는 것으로 믿어왔다. 즉 크기만 현미경을 통해야 보일 정도로 작을 뿐 처음부터 이미 분화된 기관들을 가진 아이가 정자 속에 들어있어 난자와 결합하는 순간 양분을 공급받아 외형적으로만 성장해 가는 것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시편 139편 13절에 "하나님께서 내 장부를 지으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장부"란 말은 히브리어로 "캘라요쓰" 즉 신장을 뜻한다. 이 말씀은 이미 만들어진 신장이 모태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조직되어가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더욱 세밀한 표현이 16절에 기록되어 있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란 말씀에서 "형질"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고렘" 즉 태아 또는 배아에 해당되는 말로 원래 '형체를 갖기 전의 것(unformed mass)' 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말이다. 16절의 말씀 전체를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주의 눈이 내 형체가 생기기 전에 보셨으며, 아직 그중 하나도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 정한 날에 형성될 나의 모든 부분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나이다." 얼마나 놀라운 최신의 분자생물학적인 관찰인가. 1880년대에 와서야 겨우 정자와 난자에 있는 물질이 새로 태어날 아이를 위한 모든 것이며, 이 물질이 바로 염색체임을 밝혀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부터 70 여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이 물질의 근원이 DNA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형체를 갖기 전의 모든 유전정보를 가지고, 이미 정해진 부분들이 정해진 시간에 형성됨으로 인해 마침내 한 생명체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형체’즉 뼈가 모태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시작부터 조직하시고 지키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며 나가야 한다. 15절에서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형질’이란 태아를 의미한다. 모태에서 태아가 완전히 이루기 전에 하나님께서 다 보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를 다 보시는 분이시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은 시인의 출생일인지 죽는 날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이 시의 문맥으로 보아 출생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태아가 하나의 인간으로 형성되는 모든 과정을 책으로 기록하였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태어나는 모든 과정을 아시고 주관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우리의 출생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태어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에게 하늘 아버지는 얼마나 가깝고 좋은 분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지만 우리는 좋은 아버지란 어떤 것인지 안다. 게다가 좋은 아버지의 자화상이라 할 만한 사람들에 대해 알 수도 있다. 우리는 인간 아버지가 완전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우리도 자녀를 사랑할 뿐 아니라 비록 부족할지라도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주고자 노력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주실 수 있겠는가? 상상해 보라.
| 적용 |
그대는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영감의 교훈 : 애정이 넘치는 이름 -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고 애정이 넘치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그 이름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애정의 표이며, 그분의 부드러운 관심과 우리와의 관계를 보증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그리스도는 은혜의 후사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 그들은 결코 타락한 적이 없는 천사들보다 더욱 거룩한 관계를 하나님과 이루게 된다”(증언보감 2권, 336).
기 도 : 아버지! 항상 정다운 그 이름 불러 봅니다. 길 잃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 같은 인생살이, 아버지를 만나 눈물을 거두고 행복을 깨닫습니다. 영원히 아버지를 섬기며 따르렵니다. 저를 지켜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아들에 의해 계시됨
6월 30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교사강해 2)
하늘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라고 하셨다. 실제로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신다. 인간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볼 수 없는 존재를 인간의 가시적인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신 분이 곧 아들이라 일컫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후 4:4)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아들은 인간과 같은 생육을 통해 태어난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존재로 변화하신 존재이시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 보이신 분이라 하나님께 대한 빛을 드러내신 분이라 아들이라 이름하였으나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하나(요 10:30절 참조)이시다.
요한은 아버지에 대해 말하면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요 1:18)다고 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죄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기 원했지만 그분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그럼에도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생은 곧 아버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17:3).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렘 9:23~24 참고) 우리는 왜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하는가?
대쟁투에서 사탄의 주요 공격 목표는 하나님의 품성이었다.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기적이고 잔인하며 독단적인 신으로 생각하도록 전력을 다한다. 이런 비난을 반박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거짓을 증명하기 위해 그분이 직접 이 땅에 와서 사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성과 품성을 대변하고 사람들이 신성에 대해 발전시킨 왜곡된 개념들을 교정하기 위해 오셨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요 14:8~10을 읽어 보라. 3년 이상 예수님과 함께 지냈음에도 제자들이 얼마나 아버지에 대해 무지했는지 주목하라. 제자들의 부족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빌립의 질문을 듣고 예수님은 슬피 탄식하셨다. 그분의 나긋한 책망은 아둔한 제자들에 대한 그분의 참을성 있는 사랑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나와 함께 동행하고 나의 말을 듣고 군중을 먹이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보고도 어떻게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
교훈 :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의 품성을 곡해하도록 노력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바르게 계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의 품성을 나타내셨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시기를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요 10:30)라고 하셨다. 이는 그 자신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일으키게 되어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가장 큰 죄목은 바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한 것, 곧 그 스스로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죄목으로 미움을 받아 죽은 것이다. 사람이 되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속이는 참람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 학생들이나 젊은 사람들은 거짓말을 종종 뻥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대의 가장 큰 뻥쟁이(거짓말 장이)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이신지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것에 충격을 받았고 예수께서 너무나 큰 뻥(거짓말)을 친다고 돌을 던져 죽이려 했던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예수님을 통해 하늘 아버지의 어떤 모습을 깨달았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어떻게 나를 통해 이루신 아버지의 일을 보고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냐?’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아버지를 잘못 나타내셨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방법보다 완전한 방법으로 아버지를 계시하셨다. 그분은 그러한 자신의 사명을 성취했다고 확신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7, 9).
| 적용 |
예수님을 통해 본 하늘 아버지의 모습은 그대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분 -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셨을 때에도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일을 그치지 않으셨다. 비록 그분이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셨을지라도 신성은 여전히 그분의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만 인간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내실 수 있었으며, 제자들은 삼 년 동안이나 그 나타나심을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시대의 소망, 663).
기 도 : 하늘 아버지는 잘못하면 벌 주는 엄하고 무서운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삶에 오신 하늘 아버지, 감사하며 찬양드립니다.
셋째날(화) 우리 하늘 아버지의 사랑
7월 1일
교사강해 3)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하늘 아버지라 하는데 이는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아닌 하늘 아버지라는 말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하늘 아버지란 그분의 존재와 같은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늘 아버지라 부르는 존재이신 그분과 같은 모습을 가질 때에 비로서 우리는 그분을 하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호칭 뒤에 그리스도라는 말을 부친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고후 4:4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썩지 아니할 존재, 죽지 아니할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갈 3: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하고 계신데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닮은 존재가 되었기에 우리는 하늘 아버지라 일컫는 것이다. 바로 하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시려 하신 축복과 사랑은 우리로 썩지 아니할 존재, 영생을 가진 존재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 주신 사랑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이 이미 확정했던 사실 곧 아버지께서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오셨다(렘 31:3, 시 103:13).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광활한 우주를 통치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수천만의 은하 가운데서 작은 혹성에 사는 보잘것없고 불쌍한 죄인에게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셨다니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
아버지께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보여주신 최고의 증거는 무엇인가?(요 3:16~17 참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인류에 대해 동정심을 갖도록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았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십자가 사건은 오히려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보다 그분의 사랑을 증명할 더 큰 증거는 무엇이겠는가?
“아버지께서 이러한 큰 속죄 때문에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그러한 속죄를 제공하신 것이다”(정로의 계단, 13).
어떤 이들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마지못해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다고 해서 아버지에게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러한 말씀으로 그와 같은 잘못된 사상을 타파하셨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눅 15:11~24을 읽고 탕자의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에 대해 묵상해 보라.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사랑의 증거를 열거해 보라.
교훈 : 인간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가장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부가적용)
기독교에서 모두가 십자가를 가르치고 십자가를 설교한다. 인생들 모두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눈길을 이끌려고 한다. 왜 십자가가 중요한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골고다(해골의 곶) 즉 갈보리(골고다의 라틴어역)에서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 곧 해골의 골짜기이다. 아무도 죽음의 문빗장을 열지 못한 채 죽어 널브러진 해골의 골짜기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시는 사망의 문빗장을 열지 못한 채, 이 땅의 죄인들처럼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께서는 이 사망의 문빗장을 열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십자가는 더 이상 사망의 문빗장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두어 둘 수 없음을 보여주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십자가의 승리는 모든 인간이 삶에 대한 희망,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분은 모진 매를 맞으시고 채찍에 찢기시며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분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고 모든 싸움에서 사단에게 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 그리고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얼마나 큰 것인가?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아들이 자신의 몫을 챙겨 빨리 아버지 곁을 떠났을 때 그는 아버지의 간섭에서 빨리 벗어나야 더 큰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찾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맞아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하고 그냥 품꾼으로 살아갈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더 가슴 아픈 대목은 아버지 곁을 지켰던 첫째가 동생을 환영하는 아버지에게 공평하지 못하다고 이의를 제기한 부분입니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인가요? 설마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 적용 |
자신이 하늘 아버지께 받은 사랑의 증거를 기록해 봅시다.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 - “하나님의 아들밖에는 아무도 우리의 구속을 완성시킬 수 없나니 이는 아버지의 품에 있는 자만이 능히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음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는 자라야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무한한 희생이 아니고는 잃어버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것이 없는 것이다”(정로의 계단, 14).
기 도 : 아버지, 제가 혹시 저의 경건한 삶으로 천국을 얻기 바라는 첫째 아들과 같지는 않은지요.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다만 저를 사랑하셔서 구원을 주시려는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넷째날(수) 우리 하늘 아버지의 동정어린 돌봄
7월 2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교사강해 4)
하루는 마틴 루터가 크게 실망할 일이 생겨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밖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새 한 마리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터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서 잠시 지켜보기로 했는데, 마침 새는 노래를 마치고 나서 머리를 날개 틈 사이에 두고 잠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루터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순간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작은 새는 이미 저녁을 먹고 잠들 준비를 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얼마나 만족스러운가! 내일 무엇을 먹을 것과 어디에 거할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지. 이 새는 다윗과 같이 전능자의 그늘에 거하는구나. 새는 나뭇가지 위에서 얼마나 안식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온전히 그를 돌보시며 모든 것을 안배하시는구나.” 결국 작은 새 한 마리의 행동이 실망과 근심에 시달리고 있던 루터에게 다시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신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돌봄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무관심하거나 우리를 등한히 여길 수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우리를 돌보신다고 가르치셨다. 그분의 자비와 자상함은 인간의 성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처럼 들쑥날쑥하지 않다. 그분의 사랑은 상황과 관계없이 일정하며 변함이 없다.
마 6:25~34을 읽어 보라. 여기에서 용기를 주는 말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 말씀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더욱 신뢰할 수 있는가?
“우리의 경험 중에 너무나 흉악하여 그분이 보시지 않으시는 사건은 없고 너무 어려워 그분이 풀지 못하는 복잡한 문제도 없다. 당신의 자녀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당하는 어떤 재난이나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는 어떤 근심이나 기분을 좋게 하는 어떤 기쁨이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어떠한 진정한 기도라도 우리의 천부께서 못 본 체하시거나 직접 관심을 두시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 147:3)신다. 하나님과 각 사람의 관계는 마치 그가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는 주시지 않을 것처럼 특별하고 완전하다”(정로의 계단, 100).
여기에 있는 여러 용기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비극과 고난이 우리에게 닥치리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심지어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마 6:34)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모든 일이 항상 순조롭지만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불행과 서글픈 그 결과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교훈 :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으로 우리를 돌보신다. 우리는 비록 죄악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한다.
부가적용)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비단 인간들뿐 아니라 동·식물들도 먹이시고 적합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 그럼에도 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돌보심과 섭리로 인해 지금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있다. 물론 자연인들이야 하나님의 일들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부인할 수도 있지만(고전 2:14), 구원받은 성도들조차도 때로는 믿음이 약해져 늘 근심과 염려 가운데 인생을 허비하는 경우가 빈번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주변 생태계의 동·식물들을 예로 드시면서 그들을 돌보는 것처럼 우리도 돌보신다고 말씀하셨다.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앗을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곡물 창고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들이 새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 또 어찌하여 너희는 의복에 대해서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유의해 보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며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6,28).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보다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에게 더 관심을 두신다(창 1:27). 주님은 다른 누구보다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몸값으로 내어 주셨고(마 20:28), 그 사실을 믿은 사람들을 그분의 자녀로 삼아 주셔서 아버지가 자녀를 돌봄같이 우리를 매순간 인도하고 돌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피조물들보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더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지니고 지켜 주신다. 주님께서는 새들도 먹고 살도록 철두철미하게 돌보시는데 하물며 그분의 피 값으로 사신 그분의 자녀들을 더 돌보시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주님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며 두려움과 걱정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힘을 북돋워 주신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 중 한 마리도 하나님 앞에서는 잊혀지지 않느니라. 도리어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모두 세어 두셨느니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 12:6,7).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위기의 때에 그대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관건은 이런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특히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 앞에 제시한 선물과 복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불행이 분명 닥칠 텐데 그때 우리는 쉽게 좌절하고 말 것이다.
| 적용 |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번민하는 사람을 그대는 어떻게 돕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 낱낱이 돌보시는 하나님 - “사람들이 기도할 때는 물론이어니와 저희가 날마다의 저희의 일을 하러 나갈 때나 밤에 자리에 누울 때나 아침에 일어날 때나 부자가 저희의 화려한 집에서 잔치를 먹을 때나 가난한 사람이 자기 자녀들을 변변치 못한 식상에 둘러 앉혔을 때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낱낱이 돌보신다. 우리의 흘리는 눈물 중에 하나님께서 주목하시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 또 우리의 웃는 웃음 가운데 그가 보시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정로의 계단, 85).
기 도 : 그 일을 당했을 때, 아버지를 먼저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계시기는 한 것인지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을 바랄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위로와 소망을 줄 분은 우리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연약한 믿음을 붙잡아 주옵소서.
다섯째날(목)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7월 3일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골 2:2).
교사강해 5)
골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골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이곳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이고 모든 인생과 우주 탄생의 비밀의 영광이신 분이심을 알 수가 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 저와 여러분의 출생의 비밀 그리고 나아가 이 우주의 비밀을 알게 될 중요한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골 2:2-3절을 보라. 골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골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정말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신격을 구성하는 삼위의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하여 여러 방식으로 가르치고 예증하셨다. 비록 우리는 이 진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성경에 있는 여러 다른 진리와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골 2:2). 성경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지만 우리는 믿음과 순종, 기도로 진리를 찾고 연구하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신격의 삼위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활약하셨다. 아래의 사건 속에서 신격의 삼위가 담당했던 각각의 역할을 요약해 보라.
탄생 - 눅 1:26~35
침례 - 눅 3:21~22
십자가 - 히 9:14
예수님의 지상 봉사가 끝날 무렵 그분은 실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삼위께서 함께 일하시는 모습을 본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 요 14:26도 참고)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셨다.
예수님은 구원의 계획 속에서 삼위 사이에 완전한 조화와 협력이 있다고 설명하셨다. 아들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그분의 사랑을 증명하고(요 17:4), 성령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드러낸다(요 16:14).
교훈 : 삼위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신격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예수님의 삶 속에 나타났다. 삼위의 하나님은 완전한 조화 가운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신다.
부가적용)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본래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는 볼 수 없는 존재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형상(形象)”이나 “변화(變化)”라는 말은 두개의 철학적 개념이 합성된 복합어이다. “형(形)”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꼴”이다. 다시 말해 모양이라고 옮겨도 무방하다. 반면에 “象(상)”이라는 것은 꼴에서 엿볼 수 있는 내면의 모습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사람의 외모에서 그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착하고 순진하고 청순한 외모를 가진 여자가 있다고 하자. 대개 외모와 내면적인 품성은 일치한다. 그러나 만약에 한눈에도 지성적이고 교양 있게 생긴 숙녀가 천박한 말투와 경망스런 행동을 해댄다면 사람들은 형상을 가늠할 수 없어서 당황하게 될 것이다. 형과 상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형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변화라는 말의 의미도 알 수 있다. “변(變)”은 “형(形)”이 바뀌는 것이고, “화(化)”는 “상(象)”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존재의 형이 바뀐 것이고 하나님의 상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본래의 참 모습은 영이시다. 그런데 그분께서 인자 같은 이(단 7:13)로서의 형(形)을 취하셨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 존재의 변화를 취하셨지만 이 존재 속에 나타난 상(象) 본래의 하나님의 모습과 내면의 모든 모습은 본래의 하나님과 하나이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그 꼴, 즉 모양을 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모양 속에서 하나님의 상을 보는 것인데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내면을 그분을 통해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고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을 알고 이해하여야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양, 어떤 꼴을 가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을 볼 수가 없다. 인자 같은 이(단 7:13)라는 표현은 사람과 같은 모양을 취하신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이 가시적 세상을 열면서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모양을 취하시고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의 형상을 꼴 지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이 말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무지의 소치이다. 왜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
왜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 하였는가?
* 이 말씀을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피조물보다 먼저 태어나신 분처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먼저나신 분에 대한 의미가 탄생이 아닌 상태를 말한다”(2013년 제 1기 안교교과 16p 참조)고 안교교과는 말했다. 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 즉 상태의 변화를 가지고 존재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기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런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뿐만이 아니라 가시적인 세계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실 뿐이지 없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가시적인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려 자신의 존재의 상태를 알리셨는데 우리는 이 분의 변화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형상과 변화에 대한 개념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하는 그 하나님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만이 썩지 아니할 몸, 신령한 몸을 가지신 참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성육신 하신 모습을 통해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의 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그대는 어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까?
각자 ‘나’로 존재하는 이 세상은 분열과 분리, 대립과 갈등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세계에는 연합과 일치,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보다 그분의 삶의 방식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면 사랑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을 뿐 아니라 그분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도 확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 적용 |
우리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닮았다면 반드시 실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누림 -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율법을 범함으로 규정된 형벌을 되
돌리신다. 그때 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되며 하늘의 호의를 받게 되고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누리게 된다”(가려 뽑은 기별 3권, 191).
기도 : 아버지, 말로 다 표현 못해도 알 것 같습니다.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신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하나님이시라는 제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도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여섯째날(금)
7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교회증언 8권>, 263~278 “인격적인 하나님”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을 새 이름 곧 사람의 마음에 가장 친근성을 연상시키는 이름으로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하나님을 부를 때에 사용하는 이 이름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신뢰의 표가 되는 동시에 우리에게 대한 그분의 관심과 관계의 보증이 된다. 그분의 은혜와 축복을 구할 때 우리가 부르는 이 이름은 그분의 귀에 음악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외람되다고 생각지 않도
록 하기 위하여 그분은 이것을 거듭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이 명칭과 친밀하여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여기신다. 그는 우리를 이 혼잡한 세상에서 속량하시고 우리를 택하사 하늘 왕의 가족, 곧 하늘 임금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다. 그분은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는 것보다 더 깊고 강한 신념으로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기를 바라신다. 부모들은 자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보다 더 크고 더 넓고 더 깊다. 그 사랑은 측량할 수 없다”(실물교훈 141~14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만약 어떤 사람이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나쁜 경험 때문에 하나님을 하늘 아버지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겠습니까?
➋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알지만 세상에 고통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➌ 우주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창조하신 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 분이라는 사실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이 놀라운 소식으로 우리의 정신을 무장하고 매 순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며 살 수 있을까요?
댓글목록
조춘호님의 댓글
조춘호 작성일안녕하십니까? 지난 2주 동안 과정을 못올려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 조금 바쁜 일이 있어야 이번에야 올리게 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기는 열심히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