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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우리의 제물 되신 그리스도(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1/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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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3-11-12 10:11 조회9,0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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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21분

기억절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연구 범위 : 사 53:2~12, 히 2:9, 히 9:26~28, 히 9:12, 출 12:5, 히 4:15.

가톨릭의 막스밀리안 콜베 신부는 그레이터 폴란드 주 난민과 이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죄목으로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는 죄수 한 명이 막사에서 증발되면(아마도 탈옥하면),
남아 있는 열 명의 죄수를 굶겨 죽였다. 마침 보복의 대상으로 선택된 한 사람이 울며 말했다. “아, 불쌍한 아내와 내 자식들. 이제 다시는 못 보겠구나!” 그때 콜베가 망연자실한 그 남자 대신 자신이 굶겠다고 자청하였다. 깜짝 놀란 나치 장교는 그 제안을 수용하였다. 그렇게 그는 한 사람을 살리고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의 대열에 섰다.
콜베의 희생은 매우 감동적이지만 우리를 대신하셨던 분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하다. 성소 봉사는 예수님의 그런 행위를 상징하였다.
신약 성경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두 가지 핵심 요소를 예수님께 적용한다. 그분은 우리의 제물이시며(히 9~10장),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히 5~10장).
이번 주 우리는 그리스도의 궁극적 희생의 여러 측면들을 연구하면서 단번에 드리신 그분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자기희생과 백성들을 향한 무조건적이고 무아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한다.
➋ 느끼기 :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에 대하여 감사한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굴복하고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시는 그분을 찬양하며, 그분이 우리를 섬기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섬기기로 결심한다.

A.
❷ 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위대한 어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희생이 필요했을까요?
※ 아무리 위대한 어떤 사람이라도 아담의 후손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고전15:22) 우리의 사망을 대신 당해 줄 수 없다. 그래서 생명 자체이신 분이 사람으로 오셔서 대신 죽어주지 않으면 아무도 사람의 사망을 대신 할 수 없다.
❸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보다 주님의 피가 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우리의 행위는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은 썩어져가는 구습을(엡4:22) 단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주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사망을 처리하는 증거이고 그래서 그 피를 믿음으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다.

B.
❶ 사회에서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떠넘기는 수단으로 어떤 사람을 희생시킨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의 희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❷ 어떻게 예수님의 대속적 희생은 위와 같은 잔인한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릅니까?
※ 예수님의 희생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자원하신 희생이다. 어떻게 감히 그런 것과 비교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❸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갖추셔야 했던 조건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 흠도 없고 점도 없어야 한다. 이것은 수요일 문제와 부가설명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그처럼 깨끗하게 살아갈 것을 가르치는 교훈이기도 하다.

결론 :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받아들이면,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지위를 바꿔 주시며, 우리에게 복 주시고, 우리를 새로운 인생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첫째 날(일) 이사야 53장이 그리는 예수님
11월 10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1. 사 53:2~12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는가?
[사53:2~1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답: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고난을 대신 당하셨으며 우리의 사망을 대신 당하셔서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으로 옮기도록 하셨다고 계시한다.
자세한 것은 교과 저자가 잘 설명했으니 잘 읽어보기 바란다.

사 52:13~53:12은 세상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렬하게 그린다. 이 말씀 속에 몇 가지 요소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형벌을 받는 대속물 형식의 속죄였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이는 그분이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받았고, 그들을 위한 대속물로서 죽으셨음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질고와 슬픔(4절), 불의와 죄악(5, 6, 8, 11절)과 죄(12절)를 담당하셨다.
2. 그분은 고난을 당해야 했던 자들에게 평화와 나음(5절) 그리고 의(11절)와 같은 큰 유익을 가져다 주셨다.
3.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상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10절).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 죄악을 담당하게 하셨다(6절).
4. 예수님은 강포나 거짓을 행하지 않은 의로운 분이다(9, 11절).
5. 그분은 죄를 속죄하기 위한 속건 제물이셨다(10절).

2. 눅 22:37, 행 8:32~35, 벧전 2:21~25을 읽어 보라. 신약의 기자들은 이사야 53장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눅22: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행8:32~35]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벧전2:21~25]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답: 산약의 기자들은 예수께서 이사야 53장의 예언을 확실히 이루셨다고 기록하였다. 예수께서도 친히 이사야의 예언이 자기의 고난을 예언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신약 성경은 예수께서 이사야 53장의 예언을 성취하셨다고 확신한다. 심지어 예수님도 그 인물을 자신과 동일시하셨다(눅 22:37). 그리스도는 우리를 용서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부가설명> 세상의 어떤 종교에서 그들이 믿는 신이 그들의 사망의 죄를 대신하여 사망을 당했다고 가르치는가? 성경의 종교 외에는 그런 종교가 없다. 영원하신 아버지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분이 아들의 신분으로 세상에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되어 사람들 중에 사시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보여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생명으로 오셔서 그분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면 그분과 같이 살게 된다는 것을 생활로 증거하여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사망이 된 사람들의 사망을 대신 취할 수 있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사망이 된 사람 대신 십자가에서 사망이 되셨다. 그래서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셨다. 그리고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망에서 놓아 생명으로 옮길 수 있게 하셨다.(히2:14,15)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 생명을 확실히 얻어야 하고 이 생명을 얻으면 예수께서 사신 것과 같이 살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이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롬6:4)

교훈 : 이사야 53장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건 제물로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둘째 날(월) 충분한 대속물
11월 11일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1. 히 2:9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히 2:17, 9:26~28, 10:12 참고)
[히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히9:26~28]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답: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 친히 죽으셨다는 뜻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망의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는 뜻이며, 맛보았다는 것은 사망이 그를 영원히 지배한 것이 아니고 부활하셨다는 뜻이 포함된 말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그분이 희생 제물로 자신의 생명을 주셨을 때에 그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히 4:15). 오히려 그분은 “백성의 죄를 속량하”(히 2:17)고 죄를 영원히 없이하시려고(히 9:26)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히 9:28)셨다.
히 2:9에 따르면 예수님을 천사보다 못하게 하신 목적은 죽음의 고난을 당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죽음은 그분이 높임을 받는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께서 죽으셔야 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 말씀에서 성육신의 목적은 아들 하나님의 죽음이다. 오직 죽음의 고난을 통해서만이 예수님은 구원의 주가 되실 수 있었다(히 2:10).

2. 하나님은 어떤 합당한 이유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난을 받게 하셨는가?
[히2:14~18]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답: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려는 이유로 고난을 받게 하셨다. 그래서 사망에 매인 인류를 사망에서 놓아주려고 하셨다.

히 2:14~18의 문맥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은 악마와 죽음의 공포와 속박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건져 내고, 그분으로 하여금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17절)이 되게 한다. 간단히 말하면 십자가가 있어야 면류관도 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셔서 산 자로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기로 하셨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그 영원한 생명을 잘 관리하도록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특별히 명령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경고해주셨다. 그런데 사람은 선악과를 먹었고 결과는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그 생명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생명의 사람을 다시 생명으로 살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는 선악과를 먹은 결과인 사망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사람 대신에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이 대신 그 죽음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서 생명이 사망을 이기는 사건이 있어야 하였다. 그래서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서 사람 대신 죽으셔서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 잡은 마귀를 멸하시고 부활하시므로 죽기를 무서워하는 모든 사망의 종 된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아멘.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교훈 :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오직 아들 하나님이 우리의 대속물이 되셔야 했다. 그런 죽음의 고난을 통해 그분은 우리의 구속주가 되셨다.


셋째 날(화) 그리스도의 피
11월 12일

구속적인 피의 개념은 성경 전반에 스며 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최초의 제사로부터 시작해서 동물 희생 제사가 있을 때는 항상 피가 있었다. 피의 제의는 이스라엘 제사 제도의 특징으로 피 없이는 우리가 사함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갈 기회도 없다는 중대한 진리를 설명한다. 피는 하나님의 자비를 얻고 그분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1.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와 구약 제사의 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아래의 성경절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피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히 9:14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 9: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히 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10:19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2:24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3:12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20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

답: 피는 생명이라고 말했다.(레17:11)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돌아가셨다. 이것은 생명을 잃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피는 그분의 생명을 의미하기보다는 그분의 대속적 죽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대속적 죽음의 기능적 측면을 묘사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역할을 한다. 그분의 피는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고, 속죄를 베풀며, 죄 사함과 성화를 제공하고, 부활의 근거가 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다른 피보다 훨씬 낫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대비시킨다. 사실 다른 피로는 사함을 얻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십자가 이전이든 이후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히 9:15). 그리스도의 피 흘림과 그 결과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이었으며 그분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한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말을 할 때에, 죽었다는 표현은 일상적인 표현일 수 있다. 즉 일반적인 죽음으로 생각하게 되는 표현일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담 후손들인 사람들이 죽는 것과 전혀 다른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피를 흘려 죽으셨다는 표현은 생명 자체를 잃었다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생명 자체로 세상에 오셨고, 아담의 후손인 인류들은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담의 죽은 그 죽음, 곧 영생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그 죽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3:15)라고 표현하였다. 피를 흘렸다는 표현들은 이런 깊은 구속사적 복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동물들은 죽을 때 피를 쏟지만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피가 아니다. 예수는 생명의 주님이시데 피를 흘렸다는 것은 바로 그 생명을 잃는 경험을 하셨다는 뜻이다.

교훈 :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유일한 수단으로써 그분의 죽음이 대속적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넷째 날(수) 흠 없는 제사
11월 13일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출 12:5).

1. 희생 제물은 어떤 표준을 만족시켜야 하는가?(출 12:5, 레 3:1, 4:3)
[출12: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레3:1]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레4: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한 죄를 인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답: 양이나, 소나 염소를 드리되 흠이 없어야 한다.

희생 제물의 선택은 큰 주의를 요했다. 아무 동물이나 제물로 삼을 수 없었다. 제사의 종류에 따라 제물은 몇 가지 표준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런데 모든 제물이 반드시 만족시켜야 하는 표준이 하나 있었다. 그것들은 흠이 없어야 했다. 히브리어 ‘타밈’은 ‘온전하다’, ‘상처가 없다’, ‘과실이 없다’, ‘완전하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것은 최고의 표준을 만족시킨다는 개념을 표현한다. 오직 최고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표준이었다.
또한 백성과 관련하여 그 말은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가 흠 없이 ‘완전’한 특징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6:9, 17:1).

1. 다음의 말씀은 예수님을 어떻게 묘사하는가?(히 4:15, 7:26, 9:14, 벧전 1:18~19) 왜 예수께서 죄가 없다는 사실이 중요한가?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답: 예수님은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분이라고 묘사했다. 예수님이 죄가 있으면 죄인의 죄를 대신 질 수 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죄 없으심이 중요하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신 예수님은 흠 없는 제물로서 구약의 표준을 완벽하게 만족시키셨다. 그분의 순결한 생애는 그분이 완전한 제물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로써 우리의 구원이 보증되었다. 왜냐하면 오직 죄 없는 분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지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든 심판 때이든 우리를 덮어주는 것은 그분의 완전한 의이다. 그 의가 우리의 구원의 희망이다.
또한 ‘흠이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는 예수님과 그분의 흠 없는 제사뿐 아니라 그 제자들의 품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봉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자로 제시된다(유 24). 이것은 오직 흠 없는 분께서 우리를 대신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부가설명> 예수님이 흠이 없다는 것은 두 방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생명 문제이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였고 다만 죽을 날을 모르고 있는 사형수와 같은 상태에 있는 존재들이다. 구주가 아담, 곧 남자의 후손 즉 남자의 씨로 태어날 수 없는 것은 남자 곧 아담의 씨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으로 오는 자는 다 죽은 자이고 썩어질 씨로 태어난 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남자와 상관없는 순결한 처녀에게 당신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씨로 하여 탄생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니다. 그분은 썩어질 씨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의 씨, 곧 썩지 않을 씨로 탄생하신 것이다. 이것은 흠이 없다는 첫 번째 뜻이다. 그리고 그 생명을 생활하시는 동안 율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결코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생각으로도 죄를 범치 않으셨다. 이것이 흠이 없는 두 번째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분으로 우리의 사망을 대신하셨고, 또 우리의 모든 썩어져가는 구습들을 대신하신 것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교훈 : 제물이 되려면 흠이 없어야 했다. 이는 인간을 대속하기 위한 제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와 품성을 상징하며 우리도 닮아야 하는 특징이다.


다섯째 날(목) 큰 위험
11월 14일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하여 신학적 이해에 집중할 뿐 아니라 몇 가지 실천적인 의미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는 여러 곳에서 이 희생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 준다.

1. 히 6:4~6과 10:26~31을 읽어 보라.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에 관하여 경고하는가? 그는 어떤 종류의 태도에 대해서 설명하는가?
[히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10:26~31]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답: 이 경고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위한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감사와 감격이 사라지고 그냥 그렇거니 하고 진리를 따라 굴복하는 생활을 하지 않을 때의 위험에 대한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은 십자가의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정신이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위대하며, 그분은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고, 신자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무엇을 하고 계신지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가 꼭 언급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점점 당연하게 취급받을 위험성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위험성을 목표로부터 “흘러 떠내려”간 것이라고 묘사하였다(히 2:1). 바울의 언어는 방향을 선회하여 목표 항구에 이르지 않는 배를 그린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한다. 그들의 삶은 복음을 받은 후에도 이전과 다르지 않다. 사실 이들의 죄를 위한 제사는 없다(히 10:26~31). 물론 노골적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하거나 그런 행동을 마음에 두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그래도 바울은 경고의 소리를 발한다. 무시와 방치의 진정한 위험성은 그것이 교묘하게 점진적으로 진행된다는 데에 있다. 그 과정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봉사를 감사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 에서가 그의 장자권을 더 이상 감사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도 이것과 비슷하다(히 12:15~17).
바울은 그의 독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마음은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결과를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그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긍정적인 면에서 그는 신자들이 구원의 모든 선한 것들을 굳게 붙잡고(히 3:6, 14, 10:23), 그들의 눈을 예수께 고정시키도록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히 12:2).

<부가설명> 위에 인용한 두 성경 구절들은 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이다. 예수를 믿다가 낙심하면 다시는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인가 하여 어렵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의미가 아닌 것 같다. 예수님의 희생을 당연하고 예사로운 것으로 취급하는 위험에 대한 경고이다. 교회에 다녀도, 예수를 믿어도 예수님의 희생이 “당연히 할 것을 해 준 것인데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그러느냐.”라는 생각의 위험을 경고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올바르게 알지 못하면 이런 생각에 빠져들 수 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신 아버지시다.(사9:6) 그런 분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과 같이 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전적으로 우리를 사망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하신 것이다. 얼마나 엄청난 희생인가. 우리가 아무리 상상해도 그 희생의 크기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런 희생으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구원하신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소홀히 여기겠는가. 그렇게 하면 흘러 떠내려가는 신앙을 하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희생을 자세히 깨닫게 하는 것이 성소의 진리이다.

교훈 :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그 가치를 소홀하게 여기면서 점점 그분의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섯째 날(금)
11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당신의 받으실 만한 대접을 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대우를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신 우리의 죄를 인하여 정죄함을 받으신 것은 우리로 우리가 아무런 공헌도 한 바 없는 당신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시대의 소망, 25).

“그리스도의 죽으심만큼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효험 있게 만드는 것은 없다. 우리가 즐거움으로 그분의 재림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분의 죽으심 때문이다.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의 소망의 중심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그 위에 고정시켜야 한다”(시대의 소망, 66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어떤 이는 예수께서 우리의 희생 제물이라는 개념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그런 개념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피에 굶주리고 복수심에 불타는 고대 이방신처럼 보이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일부는 성경에서 사용된 제사와 피와 관련된 언어들이 이교 개념을 반영한다고 주장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이런 견해에는 어떤 중대한 오점이 있습니까? 죽음, 희생, 피의 개념은 죄의 심각성과 그 결과를 어떻게 보여줍니까? 죄의 대가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서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게 합니까?
※ 예수께서 희생 제물이라는 개념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를 도덕적으로 잘못하는 것으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그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희생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면 그런 하나님은 정말 고대 이방신과 다를 것이 없다. 성경이 지적하는 죄는 사망이다.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는 것으로 하나님의 주신 생명을 분명히 거절한 결과이다. 그러나 사람은 영생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 생명을 생명 자체이신 예수께서 대신 그 생명을 잃어주신 것이다. 이것이 희생이고 죽음이고 피 흘림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우리의 영원한 죽음을 대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부활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회복할 수 있게 하셨다. 얼마나 큰 희생이며, 엄청난 사랑인가!

➋ 어떤 사람들은 행위와 구원의 관계로 씨름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분이 그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행위로 얻는 구원’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돕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시면서 이루신 일들 위에 과연 우리의 행위가 무엇을 더할 수 있을까요?
※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죽은 자가 스스로 노력하는 행위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사상과 동일한 것이다. 구원은 생명이신 분께서 사망이 된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실 때만 이루어진다. 그 다음은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이 우리를 그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는데 순응하면 된다. 이 원리를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롬6:1~4 참고)

➌ 엘렌 G. 화잇은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의 생애와 특히 마지막 장면들을 생각하며 명상하는 시간을 보낸다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그분이 이루신 일들을 감사히 여기게 할 뿐 아니라 우리와 그분의 관계를 어떻게 강화시킬까요?
※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희생과 사랑을 깊이 마음에 새기게 하기 때문에 감사와 사랑의 굴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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