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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속제 : 정결제(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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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3-10-26 15:04 조회9,2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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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33분

기억절 :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연구 범위 : 대하 33:12~13, 삼하 14:1~11, 레 4:27~31, 렘 17:1, 레 10:16~18, 미 7:18~20.

제사 제도는 성소 봉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부분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직접적으로 가리키기 때문이다. 죄인을 위해 죽은 동물의 피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속죄제’를 제정하셔서 유일한 참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자신과 우리가 화해할 수 있는지 이해시키셨다. 그래서 이번 주 우리는 ‘속죄제’의 몇 가지 개념을 살펴보려고 한다. 간혹 이번 교과는 출산과 같이 ‘속죄제’를 필요로 하는 행위가 마치 도덕적인 과오라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 그 말 대신 ‘정결제(purification offering)’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한다(레 12:5~8). 여성의 의식적 부정을 위한 제사는 죄로 인한 제사가 아니기 때문에 정결제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속죄제(또는 정결제)의 표상학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속죄제에서 예표된 예수님의 사역을 인식한다.
➌ 행하기 : 속죄제가 예표했던 용서를 체험한다.

A.
❷ 성경에서 속죄제(정결제)는 죄를 옮기는 과정을 어떠한 행위들로 표현했습니까?
※ 죄인이 생축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죄를 고백하고 생축을 죽이고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서 제단 뿔에 바른다.
❸ 우리의 죄가 하늘 성소를 오염시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깨닫게 됩니까?
※ 우리가 정결하게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B.
❷ 왜 하나님은 성소가 죄로 오염되는 것을 허용하셨을까요?
※ 하나님께서 친히 죄를 담당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루시퍼가 죄의 창시자요 유혹자였음을 증거하는 재료로 사용한다.
❸ 우리의 죄를 속죄하고 용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품성을 보게 됩니까?
※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❹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속죄제(정결제)의 교훈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 우리는 서로 용서하는 정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결론 : 속죄제는 제물과 그리스도의 제사장 봉사를 통하여 회개한 죄인이 용서받는 과정을 예시합니다. 그것은 또한 하늘 성소가 용서된 죄의 기록으로 오염되는 과정을 미리 보여줍니다.


첫째 날(일) 죄와 자비
10월 27일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레 4:13~14).

주를 아는 사람이라면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인한 관계의 단절을 치유하고 우리를 그분께로 돌이키기 위한 제도를 두셨다. 물론 이런 제도의 중심에 바로 성소가 있다.
구약 성경에서 설명하는 죄는 기본적으로 세 종류이다. 죄는 범죄하는 순간 죄인이 그 사실을 얼마나 인지하느냐에 따라 각각 부주의하고 무의식적인 죄, 고의적이고 의식적인 죄 그리고 반역적인 죄로 나눠진다. 레 4:1~5:13에서 설명하는 ‘정결제(속죄제)’는 무의식적인 죄와 몇 가지 고의적인 죄에 적용되었다(레 5:1). 앞의 두 범주에는 제사가 가능했지만, 가장 극악한 죄의 종류였던 반역적인 죄를 위해서는 어떤 제사도 언급되지 않았다. 반역적인 죄는 교만하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범한 죄이기 때문에 반역자들은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형벌을 받아 마땅하였다(민 15:19~31). 그러나 므낫세 왕의 경우는 하나님이 용서를 베푸셨던 것으로 보인다(대하 33:12~13).

1. 신 25:1~2과 삼하 14:1~11을 읽어 보라. 삼하 14:9은 자비와 공의와 죄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드러내는가?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 정당한가? 어쨌든 불의한 죄인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신 25:1 참고)
[신25:1,2]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거든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죄의 경중대로 여수히 자기 앞에서 때리게 하라.
[삼하14:1~11]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2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 있는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주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같이 하고.3 왕께 들어가서 여차여차히 말하라고 할 말을 그 입에 넣어 주니라.4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할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가로되 왕이여 도우소서.5 왕이 저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대답하되 나는 참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6 아들 둘이 있더니 저희가 들에서 싸우나 말려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저가 이를 쳐죽인지라.7 온 족속이 일어나서 왕의 계집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 동생을 죽인 자를 내어 놓으라 우리가 그 동생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 사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저희가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끼쳐 두지 아니하겠나이다.8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9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비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10 왕이 가로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저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11 여인이 가로되 청컨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생각하사 원수 갚는 자로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려워하나이다 왕이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답: 재판장은 악인은 정죄하고 의인은 의롭다고 판결해야 한다. 그러나 압살롬의 경우 그가 범죄 했어도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용서받게 되었다.

드고아 여인의 이야기가 이런 질문에 답이 될 수 있다. 요압의 지시를 받고 과부처럼 가장한 여인은 다윗을 찾아가 재판을 요청한다. 요압은 그녀가 다윗에게 가서 형제를 죽인 아들에 대하여 말하도록 획책했다. 이스라엘 법은 살인자에게 죽음을 요구한다(민 35:31). 그가 가족의 유일한 남성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인은 재판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다윗에게 죄가 있는 아들을 면죄시켜주도록 간청하였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죄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삼하 14:9)라고 선언하였다. 다윗과 여인 모두 그 살인자를 면죄하면 왕이 살인자의 책임을 져야 하고 그의 통치와 명성이 위협을 받게 될 것을 알았다. 재판장은 판결의 도덕적 책임을 져야 했다. 그래서 여인은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라고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책임을 짊어지신다. 우리를 용서하려면, 하나님은 친히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당하셔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했던 법적인 이유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옳다 아니라 하라고 하셨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는 것이라고 하셨다.(마5:37) 아닌 것은 정죄 받고 죄에 합당한 형벌을 받아야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이야기 내용을 듣고 살아있는 아들의 생명은 건져주도록 판결하였다. 이유는 그 가문의 생명의 혈통을 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보존하기를 원하신다. 죄인에게 형벌을 가하게 하는 것은 형벌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형벌을 통하여 죽음에 처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다시는 그런 죄가 이스라엘 중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죄는 모두를 멸망시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영원히 파멸하는 죄를 없이하기 원하시는 것이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일벌백계가 되어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근절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을 용서하고 의로 여기기 위하여서는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예수께서 그 책임을 지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아들로 삼으셔서 영원히 함께 살기로 하신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은 무의식적이거나 고의적인 죄에 대하여 정결 과정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기 위해서는 책임을 지셔야 했다.


둘째 날(월) 손을 얹음
10월 28일

“만일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 그 속죄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화목 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레 4:27~31).

1. 레 4:27~31을 읽어 보라. 제사와 더불어 어떤 의식적인 절차가 행하여졌는가?
[성경 구절은 위에 다 기록되어 있음]

답: 죄인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안수) 자기의 죄를 고백한 후에 그 짐승을 죽이고 제사장을 그 피를 받아서 번제단에 서 속죄의 의식을 행하였다.

제사의 목적은 죄인으로부터 죄와 책임을 제거하고, 그것을 성소로 옮겨서, 죄인으로 하여금 용서받고 정결해진 상태로 가게 하는 것이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는 죄인이 정결제를 위해 일정량의 고운 밀가루를 가지고 올 수 있다. 이런 제사의 경우에 피가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히 9:22)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제사는 안수, 제물의 죽음, 피 흘림, 기름을 태움, 제물의 고기를 먹는 일을 포함한다. 제물을 가져온 죄인일지라도 오직 피의 제사 후에 용서를 받았다.
안수는 제사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과정이다(레 1:4, 4:4, 16:21).
제물이 죽으면, 흘린 피는 제단에서 속죄를 위해 사용한다(레 4:25, 17:11). 안수를 통해 죄가 제물에게로 옮겨졌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의 죽음이 대속적인 희생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죄인을 대신하여 동물이 죽은 것이다. 이는 왜 제사장이 아니라 죄인 또는 과실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 직접 제물을 죽여야 했는지 이유를 밝혀 준다.

<부가설명> 죄인은 희생 제물에 손을 얹고 구체적으로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해야 했다.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레5;5) 그리고 죄인이 희생의 짐승을 손수 죽여야 하였다. 그것은 죄인이 죽어야 하는데 희생의 짐승이 대신 죽어주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죄가 죄인을 죽인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게 죄인이 죽었기 때문에 그 죄인은 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죽게 된 그것을 예수께서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죄는 사망인데 생명을 얻은 것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것이다.(고후5:21)

교훈 : 죄인은 제물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하여 죄를 제물에게로 옮긴 뒤에 제물을 직접 죽여서 피를 흘리고 그 피로 속죄를 받아야 했다.


셋째 날(화) 죄의 이동
10월 29일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렘 17:1).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제물을 죽인 후에는 피를 처리하는 과정이 남는다. 제사장은 희생의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른다. 피가 포함되어 있는 이 행위는 속죄와 관련되어 있다(레 17:11). 죄인이 평민이나 지도자였다면 피는 번제단으로 옮겨졌다(레 4:25, 30). 죄인이 대제사장이거나 회중 전체였다면 피는 성소 내부의 분향단으로 옮겨졌다(레 4:7, 18).
피를 제단 뿔에 바르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뿔은 제단의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구원의 수직적 차원을 나타냈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피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옮겨졌다.
피를 바른 뿔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려면 렘 17:1을 잘 봐야 한다. 여기서 유다의 죄는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다. 비록 본문은 우상 숭배와 관련된 제단을 언급하고 있지만 원칙은 동일하다. 제단은 백성들의 도덕적 상태를 반영한다. 피는 죄의 책임을 옮긴다. 제단의 뿔에 바른 피는 죄를 죄인으로부터 성소로 옮긴다. 이 중요한 진리는 우리가 구원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상 성소에 계시되었으며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한다.
피가 죄를 옮기기 때문에 성소는 더럽혀진다. 예를 들어 정결제(속죄제)의 피가 우연히 옷에 묻었을 때에 그 옷을 빨되 아무데서가 아닌 오직 “거룩한 곳”(레 6:27)에서만 빨아야 한다. 그리고 제단에서 기름을 태우는 과정은 정결제(속죄제)와 관련된 모든 것이 여호와께 속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레 3:16). 이런 제사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했다. 우리의 죄는 우리에게서 떠나 그분에게 그리고 하늘 성소로 옮겨졌다. 이것이 구원의 계획의 핵심 개념이다.

<부가설명> 죄의 이동에 대한 진리는 올바르게 잘 이해해야 한다. 죄인이 머리에 안수한 희생 제물의 피는 성소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분형단 뿔에 바른다. 평민 개인의 죄의 사유를 위한 제물의 피는 번제단 뿔에 바르고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이렇게 하여 죄는 성소로 옮겨진다. 성소로 옮겨진다는 것은 예수께 죄가 옮겨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자기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21)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지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속죄일의 성소정결 진리이다. 속죄일에 비로소 성전에 옮겨진 죄가 정결하게 되는 레위기 16장의 진리에 대하여 우리 죄가 성소로 옮겨져서 정결해질 때를 기다린다는 것인데, 이것은 죄인의 정결과 다른 차원의 내용이다. 죄인은 속죄제를 드림으로 용서를 받고 정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죄의 장본인인 루시퍼는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 속죄일에는 루시퍼가 사람들을 죄 짓게 한 모든 책임을 물어서 정죄하기 위하여 죄를 기록으로 남겨둔다. 그것은 루시퍼를 정죄하기 위한 증거자료가 될 것이다. 그래서 속죄일에 대제사장을 기록된 모든 죄를 가지고 나와서 아사셀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광야로 보낸다. 아사셀 염소는 루시퍼를 상징한다. 모든 죄를 죄의 창시자인 루시퍼에게 제시하고 그 책임을 지고 영원히 존재를 상실한다. 그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죄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교훈 : 제물의 피를 제단의 뿔이나 분향단에 바르는 행위는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 성소로 옮기는 과정을 상징하였다.


넷째 날(수) 죄를 담당함
10월 30일

“이 속죄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레 10:17).

1. 레 6:25~26과 10:16~18을 읽어 보라. 여기에 어떤 중요한 진리가 있는가?
[레6:25,26]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 26 죄를 위하여 제사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곧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레10:16~18]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가로되 17 이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뇨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18 그 피를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였으니 그 제육은 너희가 나의 명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할 것이니라.

답: 성소에 들여가지 않은 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 먹어서 죄를 담당해야 했다.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 먹으면 안 되었다. 성소의 휘장도 죄를 담당하는 예수님을 표상하기 때문이다.(히10:20) 동일한 죄를 두 번 담당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거룩한 곳에서 제물을 먹음으로써 집전 제사장은 범죄자의 죄를 담당한다. 제물의 고기는 제사장 봉사의 대가라기보다는 속죄의 핵심적인 과정이었다. (그것이 대가라면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여 모세가 아론의 아들들에게 그토록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물을 먹는 행위가 어떻게 속죄의 과정에 기여하는가? 제물의 고기는 오직 피가 성소에 들어가지 않은 경우에만 먹도록 요구되었다. 즉 지도자와 평민의 정결제인 경우이다. 성경은 제사장들이 희생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죄를 담당하고 죄인을 위해 속죄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죄인의 죄를 담당한다는 말은 죄인이 이제 자유롭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히브리어로 보면 출 34:7에서 하나님은 “악을 가져가신다.” 이 두 마디는 죄를 옮기는 제사장의 행위가 죄인에게 용서를 가져오는 것으로 묘사된 레 10:17에도 똑같이 사용되었다. 만약 죄의 이동이 없다면 죄인은 자신의 죄를 담당하고(레 5:1) 결국 죽어야 한다(롬 6:23).
다른 사람의 죄를 담당하는 제사장의 사역은 정확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 성소에서 이루어진 제사장의 사역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표상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죄책을 짊어지시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속죄제를 드렸을 때 그 피는 반드시 성소로 가지고 가서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려야 했다. 그렇게 한 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 먹을 수 없다. 그리고 평민들이 속죄제를 드린 고기는 제사장이 먹어야 했고 그 피는 성소에 가지고 가지 않고 번제단 뿔에 바르고 번제단 사면에 뿌렸다. 그리고 나머지는 불살랐다. 답에서 말했고, 저자가 설명한 것과 같이 이것은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다는 것을 표상한다. 죄는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죄의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죄는 관념적이거나 사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죄라는 실체가 없어져야 한다. 그것은 소멸되어서 없어진다. 그래서 죄는 사망이다. 희생 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는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을 대신 당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으로 사망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며,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도 죽임을 당하므로 사망인 죄가 영원히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히2:14,15)

교훈 : 제사장들이 희생의 고기를 먹어야 했던 이유는 죄인의 죄를 담당하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표상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섯째 날(목) 용서
10월 31일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미 7:18~20).

1. 미 7:18~20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가?
[성경구절은 위에 기록되어 있다.]

답: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과 성실의 하나님이시다.

미가서의 마지막 세 절은 하나님과 남은 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왜 비할 데 없는 분인지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용서하시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 때문이다. 미가서에서 드러난 것처럼 용서의 자발성은 하나님의 현저한 속성이다. 미가는 하나님의 속성(18절)과 업적들(19~20절)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속성과 업적들은 출 34:6~7에 이스라엘의 신조로서 설명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가장 사랑받는 성경적 묘사이다.
흥미롭게도 미 7:18~20에 사용된 몇 주요 단어들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종의 노래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는 용서의 수단이 백성을 위해 고통당하시는 분에게서 유래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불행히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값싼 것도 자동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충성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미가서의 핵심 성경절인 미 6:8에서 본 것과 같은 인자함에 반응한다. 하나님이 “인애를 기뻐하시”(미 7:18)는 것처럼 그분은 남은 자들에게도 “인자를 사랑하”(미 6:8)도록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품성을 모방하며, 그들의 삶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친절을 반사할 것이다.
성경에서 용서를 강조하는 미 7:18~20 다음에는 즉시 심판을 강조하는 나 1:2~3이 나온다. 이는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두 가지 차원을 드러낸다. 그분은 회개한 자들은 용서하시고 악인들은 벌하신다.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분은 구원자이고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의 품성을 설명하는 이 두 측면은 보완적이지 상충적이지 않다. 자비하신 하나님이 공의로운 하나님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그분의 사랑과 용서 그리고 그분의 궁극적인 공의를 확신할 수 있다.

<부가설명> 죄는 남에게 전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죄를 희생 짐승에게 전가하거나 제사장이 죄를 담당한다는 것은 그 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나 사상(思想)에 대한 것이 아니다. 바로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다. 내가 죽을 것을 대신 죽어주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세상에도 종종 있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에 치일 위험에 처한 것을 발견한 사람이 그를 급히 밀어내다가 밀려나간 사람은 살고, 그를 밀어낸 사람이 죽는 경우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의 사망을 대신 당하셔서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시고 생명을 얻게 하셨는데, 사람은 대신 죽은 그 사람이 살아날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이신 예수께서는 스스로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승리를 드러내셨고 그 예수님의 이런 속죄를 믿는 사람들은 다 예수 안에서 삶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부활이며, 그것이 바로 의의 실상이다.(홈
4:23~25, 고후5:21 참고)

교훈 : 하나님은 회개한 죄인을 기꺼이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도 그분의 품성을 본받기 바라신다.

여섯째 날(금)
11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343~358 “성막과 그 봉사”를 읽으라.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회개한 신자를 위해 자기의 피로 탄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는 것처럼 제사장도 매일의 봉사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희생 제물의 피를 성소에 뿌렸다.
그리스도의 피가 회개한 죄인을 율법의 정죄에서 풀어 줄 것이었지만 죄를 완전히 없이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 죄는 최종적 속죄 때까지 성소의 기록에 남아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형에 있어서도 속죄 제물의 피는 회개한 사람에게서 죄를 제거하였으나 그것은 속죄일까지 성소에 남아 있었다”(부조와 선지자, 35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어떤 이들은 대속의 개념이 불공평하다고 주장합니다. 왜 무죄한 사람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어야 합니까?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진리일 뿐 아니라 성경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비난에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런 ‘불공평함’은 우리에게 용서를 주시기 위해 나타난 은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다시 말해, 이런 ‘불공평함’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자비롭고 정말 사랑이 많으신지 보여줍니까?
※ 죄를 도덕적 상태로 이해하면 이 불공평에 대한 답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죄는 사망이기 때문에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 대신 사망을 당하여 사망을 처리한 후에 그가 부활로 생명을 드러내셔서 사람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게 하셨기 때문에 불공평은 은혜와 자비의 공평함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얼마나 절묘한 사랑이며 은혜인가!

➋ 교과반에서 미 6:8을 읽어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말씀을 듣습니까? 우리는 이 분명한 명령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는 명령은 어떻게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하라는 명령으로 바꿀 수 있습니까?
※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나타낸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자들이 겸소한 자들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웃에게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지킬 때 함께 동행하는 것이 된다.

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열렸다는 사상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놀라운 진리는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리고 왜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노력이 마치 정결한 고기를 만들 수 있다는 소망으로 돼지를 씻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용없는 일입니까?
※ 죄는 사망이기 때문에 사망에 속한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여 생명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자가 노력해서 살아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사망을 처리하고 생명을 주실 때에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➍ 심판의 날 하나님의 앞에 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대는 그대의 선한 행위로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의지할 유일한 희망은 무엇일까요? 그대의 대답을 가지고 복음의 관점에서 토론해 보십시오.
※ 교과 저자의 말대로 돼지고기를 씻어서 정결한 고기로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망이 된 사람이 선한 행위로 자기에게 생명이 발생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생명이신 예수님을 으지할 수밖에 없다. 그분이 생명이기 때문에 유일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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