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높임 받으신 예수님의 권능(질문, 대답, 설명) 07/15/23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07-08 04:27 조회5,650회 댓글0건본문
제3과 높임 받으신 예수님의 권능
(7월 15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53분)
연구 범위: 엡 1:15~23, 엡 3:14~21, 살전 1장 5:16~18, 신 9:29, 고전 15:20~22, 시 110:1
기억절: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19~20).
인간은 항상 더 강한 힘을 갈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데벨 자동차(Devel Motors)는 16기통 12.3리터 엔진을 장착하여 5,000마력 이상의 출력을 내는 “데벨16”의 견본을 선보였다. 그것뿐이겠는가? 3개의 프랫 앤 휘트니(Pratt & Whitney J34~48) 제트 엔진을 장착한 피터빌트 트럭을 보라. 36,000마력을 자랑하는 이 트럭은 6.5초 만에 400미터를 달리고, 순간 시속은 557Km에 도달하는 강력한 힘을 자랑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울은 에베소의 신자들이 그들 문화의 다양한 힘과 신들을 동경하려는 유혹 속에서도,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실 수 있는 능력의 광대함을 경험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 신성한 힘은 마(馬)력이나 마술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변화시키는 네 가지 구원의 역사적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예수님의 부활, (2) 하나님의 보좌에 오르심, (3) 만물이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됨, (4) 교회의 머리로 그리스도가 주어짐(엡 1:19~23).
이 네 가지 사건을 묵상할 때, 신자들은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행사하시는 능력의 광대한 범위를 파악하고 경험하기 시작할 수 있다.
*학습 목표
- 깨닫기: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가 세상 권세를 이기게 하는 기도의 능력의 근원이 되신다.
- 느끼기: 세상의 시험과 어려움보다도 그리스도의 권능이 더 큰 것을 느낀다.
- 행하기: 기도 가운데 항상 그리스도와 연결된 능력있는 삶을 산다.
TMI 위로
2.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어떻게 기도하라는 의미일까요?(살전 5:17)*답: 기도가 삶이고 삶이 기도가 되도록 살라는 뜻이다.
3. 바울이 기도를 강조하는 것은 무엇을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까?(엡 1:18~19)
*답: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
4. 기도 가운데 발견하는 모든 복과 능력은 무엇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까?(엡 1:20~22)
*답: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있다.
5. 바울이 모든 권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엡 1:21)
*답: 에베소 지방의 현실을 직시하고 예수님 만이 최고의 권세임을 깨닫게 하려고.
6. 어떻게 하면 세상 권세를 이기는 그분의 권능이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까?(엡 1:16~19)
*답: 기도.
7. 그리스도의 높이 올리심은 그분의 권세에 대해 무엇을 말해줍니까?(히 1:6, 계 5:12)
*답: 그분이 최상의 권세자이심을 말해준다.
결론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떤 권세보다도 높으신 권능의 주님을 보여준다. 복과 능력은 그분의 높임 받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더 깊이 그리스도와 연결되며, 그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7월 9일(일) 기도와 감사
에베소 신자들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번성하고 있다는 소식(엡 6:21, 22, 아마도 디도가 전한 소식일 것이다)에 감동받은 바울은 그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보고한다.
엡 1:15~23과 엡 3:14~21에 기록된 바울의 두 기도 보고서를 비교해 보라. 이들의 공통 주제는 무엇인가?
[엡1:15~23]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3:14~21]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답: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공통 주제이다.
우리의 기도의 분위기가 이런저런 세상 문제를 슬퍼하거나 고통을 호소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에베소서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본래 어조는 감사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복을 인해 그분께 감사한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시기를 간구하고 우리 삶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한다. 우리는 높으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엡 1:20~23)을 찬양하며, 우리가 만나고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복 주신 그분께 감사한다. 기도에 관한 바울의 혁신적인 비결이 여기에 있다. 기도는 찬양과 감사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바울은 "기도할 때에 너희에 관하여 말하며 너희로 인해 감사드리는 것을 그치지"(엡 1:16, 흠정역) 않는다고 했다(빌 1:3, 4, 살전 1:2, 5:16~18 참조).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복을 받아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열린 마음으로, 그분께 감사할 단서를 찾으며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삶의 문제를 내려놓고, 삶의 우여곡절 가운데서 하나님의 조언을 구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소원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하며 항상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기도를 편할 때만 하는, 제자도의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 바울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기도 중에 그들로 인해 감사하고(엡 1:16, 1:3~14), 신자들을 위해서 중보한다(엡 1:17~23, 3:14~21).
바울에게 기도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요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과업이다.
이 구절들은 기도에 대한 바울의 헌신을 통해서 우리도 자신의 "기도 사역"을 소중히 하라는 감동적인 기도의 요청으로 우리를 부른다.
<교훈> 기도는 제자도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삶의 문제를 내어놓고 조언을 구하며 그분의 임재에 항상 열려있는 것이다.
<부가설명> 증언은 기도가 영혼의 호흡이라고 가르친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향한 영혼의 호흡인 기도의 정신을 품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교증 4권 443.1)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영적 힘을 얻는 비결이다. 다른 어떠한 은사도 기도를 대신하지 못하며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게 하지 못한다.”(기도 12.4). 성도든 기도가 호흡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기도에는 진정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다니엘은 왕 외에 누구에게든지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진다는 왕의 칙령이 반포된 것을 알면서도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을 열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우리는 기도할 때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생명 호흡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하는 말보다는 무엇인가 주시기를 요청하는 내용으로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아닌지 모르겠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신자들의 믿음을 듣고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질 칙령이 내렸음에도 감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다. 우리의 감사는 언제 하는가? 오늘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찬양과 감사하는 내용이 전 기도에 충일하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7월 10일(월) 성령의 지혜를 체험하기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6, 17).
자신의 기도 보고서를 통해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보좌 앞에 드리는 중요한 간구를 기록한다. 그는 신자들이 회심할 때 성령이 그들의 삶 속에 오셨다고 이미 언급했지만(엡 1:13, 14), 이제는 예수님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영적 지혜를 얻기 위한 성령의 새로운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그분을 알게 하시고” 엡 1:17. 흠정역).
바울은 어떤 세 가지 주제에 대해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특별한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는가?(엡 1:17~19 참조)
[엡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답: “그의 부르심의 소망에 대한 지혜”, “성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에 대한 지혜”, “믿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한 영적 통찰력”을 간구했다.
바울은 "그의 부르심의 소망"(엡 1:18)에 대한 지혜를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이미 행하신 일들(엡 1:3~9, 11~13)과 그들을 위해 계획하신 영광스러운 미래(엡 1:10, 14)에 대해 알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성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엡 1:18, 우리말)에 대한 지혜를 구하는 바울의 기도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구약의 개념을 상기시킨다(신 9:29, 32:9, 슥 2:12; 엡 1:11과 비교).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유산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원한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께 어떤 가치를 지닌 존재인지 알기 바란다.
바울이 "믿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엡 1:19)에 대한 영적 통찰력을 달라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능력의 광대함을 새롭게 이해하게 하시고 그것을 그들의 삶 속에 실현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이 모든 기도에서 바울은 이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스스로 경험하기를 간구한다.
<교훈> 기도는 우리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과 그 영광스러운 미래, 하나님의 유업의 풍성함과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 능력을 보게 한다.
<묵상> 바울이 기록한 "믿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어떻게 하면 더 잘 경험할 수 있을까요?"
*답: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깨달으며 알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면 경험하게 된다.
<부가설명> 성경을 깨닫는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다. 세상의 학문도 아니다. 이것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지혜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5~8).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없는 세상 지혜를 갈구하고 있지 않는지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세상 지혜는 철학적이다. 철학이라고 번역된 헬라어가 ‘필라소피아’이다. 이 말은 ‘사랑’이라는 말이 필레오와 지혜라는 말인 소피아가 합친 말로 지혜 사랑이다. 그런데 성경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2:8)라고 경계하였다. 오직 기록된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아 아는 하나님의 지혜로 말씀을 깨닫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면 성령으로 이 지혜가 우리 안에 능력으로 역사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7월 11일(화) 부활의 능력을 맛보기
기도에 관한 엡 1:20~23의 나머지 구절에서 바울은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주시기를 바라는 세 번째 지혜, 즉 신자들을 대신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광대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두 가지 구속사적 사건, 즉 (1)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과 (2) 예수님이 우주의 보좌에 오르신 것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엡 1:20).
하나님의 권능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가?(엡 1:20, 고전 15:20~22, 빌 3:8~11, 히 13:20, 21, 벧전 1:3)
[엡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고전15:20~22]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빌3:8~11]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히13:20,21]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벧전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답: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부활로 일으키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서 타협할 수 없는 믿음이다(고전 15:14, 17).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신실한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것을 고대한다(고전 15:20~2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포함한 복음의 모든 축복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엡 1:20)셨다는 표현은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인 시편 110:1에서 가져온 것이다(여기 인용한 성경 구절들이 모두 이 구절을 기반으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높임 받으심은 에베소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엡 2:6)는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의 교회에 은사를 주시는 일의 서곡으로 여긴다(엡 4:8~11 참조).
엡 4:8~1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보좌에 계신 단순한 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구하면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온 세상에 나아가 정복하고 또 정복하시는 역동적인 신약의 장면"을 제시한다"(브루스, F. F. Bruce, 골로새, 빌레몬, 에베소에 보내는 서신들, 1984, 133).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관식을 단순히 신자들에게 제공되는 신성한 권능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그 권능의 원천으로 나타낸다.
<교훈> 부활하신 그리스도, 보좌에 높이 앉아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은 하나님의 능력의 광대하심을 가장 잘 보여준다.
<부가설명> 성경의 종교는 부활의 종교다. 부활의 종교는 생명의 종교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졌다(히9:27). 한 번 죽게 된 것은 아담 안에서 다 사망이 되었기 때문이다(고전15:22). 그러나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고전15:45) 사망을 폐하시고 부활하셨으므로(딤후1:10)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이데 한 번 죽는다는 사실이 생겼다. 만일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사망을 폐하고 부활하시지 않았으면 한 번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망을 혜하시고 부활하셨기에 한 번 죽고 예수님을 믿을 때 부활하게 된다. 이 부활을 진리로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진짜로 믿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 부활을 강조한다.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다.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구원과 상관없고 예수님을 믿어도 소용없다(고전15:17~19). 베드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선출할 때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을 선출한다고 했다(행1:21,22). 부활이 있으므로 둘째 사망이 있다. 둘째 사망이 있기 때문에 한 번 죽는 것이라고 해서 첫 사망이라는 개념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첫 사망은 당하지만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 사망을 잠자는 것이라고 하셨다. 아멘.
7월 12일(수) 모든 능력 위에 계신 그리스도
바울은 아버지와 함께 우주의 보좌에 앉아 높이 들리신 예수님을 찬양했다.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그리스도의 위치를 정의한 뒤("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 1:20), 바울은 예수님과 "권세들"과의 관계를 정의한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으로서 모든 권세들보다 "훨씬 위(엡 1:21, 흠정역)"에 계시다.
엡 1:21, 엡 2:2, 엡 6:12에서 바울이 악한 영적 권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비교해 보라. 바울이 이러한 권세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엡1: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답: 당시 에베소에서는 영들을 불러 주술을 행하는 것이 유행하는 신앙행위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예수님이 가장 뛰어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에베소 교인들이 깨닫기를 원하는 사랑의 마음이다.
행 19:11~20에 등장하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이야기는 바울 당시 에베소가 주술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헬레니즘 세계 전역에서 주술 행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사실상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주술사의 역할은 도움이 되는 영과 해로운 영을 구별하고, 영의 고유한 작용과 상대적인 힘과 권위를 배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식을 통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영혼을 조종할 수 있는 수단(말 또는 글로 된 주문, 부적 등)을 만들 수 있었다. 적절한 주문을 사용하면 영으로 인한 질병을 치료하거나 전차 경주에서 이길 수 있었다"(클린턴 아놀드, 권능과 주술, 18).
신과 권능들의 이름을 주문으로 부르는 것에 대한 관심이 에베소의 종교 생활의 특징이었으며(행 19:13 참조), 오늘날에도 그런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권세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존귀하신 예수님은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엡 1:21)보다 단연 뛰어나시다.
그의 청중들이 예수님의 주권 외에는 다른 어떤 권세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도록 바울은 신들의 이름을 주문으로 부르는 관행에 대한 암시(“세상에서 불리는 모든 이름보다 훨씬 위에," 엡 1:21, 흠정역)를 덧붙인다.
공간의 차원에서 시간의 차원으로 전환하면서, 바울은 존귀하신 예수님의 다스리심이 무한함을 강조한다. 모든 권세를 다스리시는 그분의 통치는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엡 1:21) 도 적용된다.
<교훈> 예수님을 권세들과 비교한 것은 그분이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신 분이시며 그는 이 세상을 넘어, 다가올 세상까지 다스리시는 주님임을 증거하기 위해서이다.
<부가설명> 오늘날 과학이 고도로 발달해서 이런 영의 작용을 미신으로 여기는 지식인들이 많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지금도 이런 영의 활동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학문으로 설명할 수 없는지 모르지만, 영들의 활동은 사람들의 삶 속에 너무나 확실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한국에서는 신내림이라는 현상이 사회에 분명히 있다. 신이 내리면 거부할 수 없는 힘에 굴복하게 된다고 신내림을 받은 사람들이 말한다. 배우 하다가 신내림으로 무당이 된 사람이 여럿이 있지 않은가? 성경은 이런 현상을 이론으로 증명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다. 사울 왕이 엔돌의 신접한 여자를 찾아간 것은 가장 현저한 예다.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이런 자들은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셨다.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20:27). 바반드시 죽이라는 이유는 그들은 창조주를 배반하게 하고 사탄을 믿도록 하는 사탄의 전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13:5). 오늘날 AI를 통하여 사탄은 본격적으로 과학적으로 이 활동을 하면서 창조주를 떠나게 하려는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지 않은지? 이것을 좋게 활용하기 위하여서는 대단한 연구와 노력에 절대적으로 기도와 말씀의 확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7월 13일(목) 예수, 만물, 그리고 그의 교회
초기 기독교인들은 시 110:1에서 예수님의 높임에 대한 예언을 보았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그들은 시편 8편도 같은 방식으로 읽었는데,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의 발 아래"(시 8:6), 즉 "인자"(시 8:4)의 발 아래 두셨다고 단언하였다. 하늘에 있는 어둠의 권세가 자신들을 머리 위에서 위협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그 권세가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있다는 진리를 붙잡았다.
"만물을 그[예수]의 발 아래”에 두신 아버지께서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엡 1:22)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이것을 "그분을 모든 것 위에 머리가 되게 하사 교회를 위해 주셨"(흠정역)다와 비교해 보라.
"만물"은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용어이지만, 바울은 여전히 엡 1:21에 언급된 "권세"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우주적, 초자연적, 영적인 힘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의 발아래 있으며 그분께 복종한다.
그리스도를 우주의 보좌로 높이심과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것이 그분의 교회에 어떤 유익을 제공하는가?(엡 1:22, 23)
[엡1:22,23]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답: 교회가 세상을 이긴다는 확실한 보증을 제공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모든 악한 권세를 이기게 하셨다.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동일시되고 그분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는 교회에는 그 원수들에 대한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부활 그리고 모든 우주적 권세들보다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이 교회를 위해 역사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몸이라고 불릴 만큼 그분과 연합되어 있는 교회에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주셨다.
우리 신자들이 어떻게 하면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알고,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을까? 바울은 이것이 일어나는 작용원리나 전략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구절이 "기도 보고서"의 일부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믿는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그 능력이 신자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역사하기를 간구한다.
<교훈> 모든 권세를 이기시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삶에 나타난 권능이 그를 머리로 삼은 교회에도 역사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연결되어 있다.
<적용> 일상의 기도가 어떻게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에 더 가까이 이끌 수 있겠습니까?
*답: 기도는 하늘 창고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을 가져오기 위하여 하늘 권능의 창고를 열 수 있다.
<부가설명> 우리의 구주 예수님은 우주의 왕이시다. 그분에게 권세와 능력이 있다. 사탄이 감히 넘보지 못할 권세가 있다. 우리는 계시록 12장 7절에서 미가엘과 용이 전쟁하는 내용의 계시를 보면서 사탄인 용이 예수님이신 미가엘과 견주려할 만큼 능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건들을 바르게 이해하면 계시록의 장면도 바르게 알 수 있다. 심지어 2000이나 되는 귀신도 예수께서 나가라고 한마디 하실 때 우루루 다 쫓겨났다. 계시록 12장 장면은 계시적 장면인데 하늘에서 사탄이 반역해서 감히 말씀 하나님께 대든 사실을 전쟁으로 묘사하여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전쟁으로 대든다는 것을 각인 시키는 장면으로 묘사된 것이다. 아마겟돈에서도 예수님은 입에 나오는 검으로 싸우신다(계19:15). 입에서 나오는 검은 능력의 말씀이다. 있으라 하면 있는 말씀의 권능에 사탄과 그 무리는 2000 귀신이 삽시간에 도망치듯이 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주님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은 이런 권세이시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연약한 것을 보지 않고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 안에 있는 승리가 나의 승리, 교회의 승리임을 믿고 기도와 말씀으로 전진해야 할 것이다.
7월 14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엘렌 화잇의 글에서 그리스도의 높임에 관한 다음 두 가지 묘사를 공부해 보라.
"하늘문으로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시며 보좌에 오르셨다. 이 예식이 마쳐지자마자 성령은 풍성하게 제자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영원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모든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셨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주의 취임식이 끝났다는 하늘의 통고였다. 그분은 당신의 약속에 따라 하늘로부터 성령을 그의 제자들에게 보내셨는데 이것은 왕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분이요, 따라서 그의 백성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시라는 증거였다"(사도행적 38, 39).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팔로 아들을 안으시고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6)라고 말씀하신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으로 주관자들과 정사와 권세가 다 생명의 왕의 최상권을 인정한다. 온 하늘 궁정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라는 즐거운 함성으로 충만하게 되는 동시에 천군들은 그리스도 앞에 부복한다.
하늘에 기쁨과 찬송이 흘러넘칠 때까지 승리의 노래는 천사들의 거문고 선율과 한데 어우러져 퍼진다. 사랑이 승리했다. 잃어버렸던 자들은 찾은 바 되었다. 하늘은 큰 음성으로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라고 선포하는 소리로 진동한다“(시대의 소망, 834, 83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의 높임 받으심에 있어서 "지금"과 "아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만물"의 주님이시며, 마귀의 권세도 ”지금“ 그분께 복종합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분의 만물에 대한 완전한 통치는 "아직" 미래를 향한 것입니까?(고전 15:24~28 참조)
*답: 하나님은 하늘 여호와 회의에서(렘23:18) 정한 플렌에 따라 일하신다. 계12:12은 마귀가 자기 때가 있다고 하셨다. 그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신다.
2. 여러분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지금 어느 정도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세력의 권세, 곧 타락한 세력의 권세, 무너져서 사라지게 될 권세 아래 살고 있습니까? 어느 편이 옳은 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패배가 확실하지만 이 세상에 여전히 만연한 악의 권세로부터 그대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육체를 가진 현실에서 지체가운데 죄의 법에 끌려 갈 때가 많다. 그러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는 것을 경험하도록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경험을 날마다 해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