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사도들과 율법(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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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06-10 11:54 조회5,048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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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11과 사도들과 율법
6월 14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4분
기억절 :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도입)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 구원에 불필요하고, 그저 오직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되고 그래서 안전하다고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율법 없이는 인간이 죄를 자각하지 못하며, 회개할 필요도 못 느낀다.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진정한 회심에서 하나의 동인(動因)이다. 죄에 대한 자각 없이는 참된 회개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그리고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선언한다. 죄인들이 자기의 죄를 알기 위해서는 의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표준으로 성품을 시험해 봐야 한다. 결함을 발견하려면 하나님의 법이라는 거울에 비춰 봐야 한다. 그런데 율법이 그들의 죄를 드러내지만 그 죄의 처방은 내놓지 못한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용서를 제공한다. 용서받은 자로 서기 위해서, 죄인들은 율법을 범한 자들이므로 반드시 하나님께 회개하고, 구속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연구 범위 : 롬 3:31, 롬 6:15, 행 10:9~14, 요 15:1~11, 약 2:1~26, 히 3:7~19, 유 5~7.
지속적인 율법의 유효성에 대한 수많은 증거를 보면서 왜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까? 첫째, 어떤 이들은 율법의 기능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책망하는 일부 성경절을 보고 문제가 율법 자체에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 결과 그들은 새 언약 아래 있는 자들에게 십계명은 의무 사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둘째, 어떤 이들은 안식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이 없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모든 계명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한다.
셋째, 어떤 이들은 다른 아홉 계명은 유효하지만, 제칠일 안식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지키는 일요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위의 견해들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율법에 대한 사도들의 태도를 살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폐지되거나 수정되었다면, 사도들도 필히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과반이 서로 기도해 주고 돌봐 주는 친밀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사도들의 기록이 율법의 변경이나 폐지를 증명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한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의 율법을 증언하기 위해서 매일 사랑하는 삶을 산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거짓이 사실로 둔갑하는 사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예, 크리스마스, 부활절 등등)
❷ 율법이 폐했다는 오해가 기독교 내에서 진실인 것처럼 자리를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❸ 신약의 저자들은 이런 오해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합니까?(미리 요일별로 과제를 맡김)
❹ 진정으로 계명을 지키는 신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B. ❶ 나, 내 가족 또는 내 영역의 일에 대해 나도 모르는 사실이 소문처럼 퍼져 곤란했던 적이 있습니까?
❷ 율법이 폐했다는 말을 듣는다면 신약의 저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❸ 특히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오해하는 자들을 위해 어떤 설명을 주려고 할까요?
❹ 마지막 때에 주의 형제 유다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우리에게 어떤 믿음과 경건의 생활이 필요할까요?
결론 :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율법이 변경되거나 수정되었다고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기보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오늘 또는 내일 있는 소그룹 모임을 최종 점검합니다.
❷ 우리가 소그룹 모임에서 손님들을 위해 어떻게 배려해야 할지 이야기합니다.
❸ 구도자와 소그룹 모임을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바울과 율법
6월 8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28, 31)
교사강해 1)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인(justification)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문자적 의미는 "기쁜 소식")을 믿는 신앙에 의한 의인을 대조했다. 바울이 율법에서 의미하는 것은 구약의 제사의식과 도덕적 계명, 이방인에게까지 알려진 인간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었다. 이 율법의 의도는 인간이 창조자를 감사한 마음으로 신뢰하게 하는 것과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통하여 고심 중에 얻은 것은 인간이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를 의롭게 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아들 관계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졌던 율법은 교만과 자랑의 기초가 되었다. 바울이 복음을 이해하고 판단한 것은 인간은 율법의 외적인 행위의 수단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인간의 불용납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용납하신다는 것이었다. 신앙은 이 복음에 복종하는 것이고 또한 복종함으로써 인간은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완성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 특히 루터(1483-1546년)는 이러한 바울의 구별을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루터는 율법과 복음 사이의 구별이 "모든 기독교 교리의 개요를 포함한다"라고 말했다. 루터는 모세의 율법이나 자연법이나 산상설교에 나오는 "할지니라"라는 율법에서 인간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전적 요구를 발견했다. 이러한 율법의 요구는 완전한 사랑이었다. 율법이 이러한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에 죄 많은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루터는 믿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의 죄를 악화시킬 뿐이며 인간을 하나님과 교제시키는 대신에 절망시킨다.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지만 죄를 치료하지는 못한다.
기독교의 진정한 설립자는 바울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틀린 말이다. 바울이 신약 27권에서 13권을 기록하는 등 기독교 교리와 신학적 이해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그의 기록에서 나타난 많은 교훈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 반면 어떤 이들은 바울이 ‘새 종교’를 설립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주된 이유는 그들이 율법과 은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성경절을 살펴보라. 롬 3:28, 6:14, 7:4, 갈 3:24~25. 사람들은 왜 이 말씀들이 율법을 무효화시킨다고 생각할까? 그 이유를 찾기란 왜 어렵지 않은가?
따로 읽으면 이 말씀들은 분명 율법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가 없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바울이 정말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 성경절들을 포함하는 더 넓은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위의 성경절들이 있는 본문을 검토하라. 롬 3:31, 6:15, 7:7~12, 갈 3:21을 특별히 주목하라. 이 말씀들을 문맥과 더불어 보면 우리는 율법에 관한 바울의 요점을 어떻게 더 잘 이해하게 되는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개념을 모르는 자들을 위해 바울은 스스로 모순되려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이 자신과 관계를 맺기 원하는 자들에게 의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의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면 백성들은 의에 미치지 못하고 도리어 율법의 정죄를 받는다.
교훈 :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라고 강권한다.
부가적용)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는가? 율법을 통한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왜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을까? 아담과 하와가 틀림없이 선악과를 범할 줄 알면서도 따먹지 말라며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아심에도 주셨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율법이 곧 하나님이 정하신 도덕적 표준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 12절을 보면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라고 한다. 비록 우리가 절대치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그 기준은 필요하다. 기준과 표준이 없으면 혼란이 발생한다. 무엇이 참되고 진실한지 분간이 안 된다. 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지수를 가늠하고, 사회적 정의와 선을 판단하고 평가하기 위해 그 절대적 규범과 기준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이다. 율법은 곧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뜻하는 것이기에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은 성도의 최대 과제는 성화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모르면 성화를 달성할 수 없다.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심의 표준으로 주신 것이 십계명이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율법의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로마서 3장 20절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전 인류가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체험적으로 시인하고 고백하게 한다. 우리는 그 어떤 율법조항도 충족시킬 수 없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규정한다. 이것이 율법의 결정적 기능이다. 율법은 우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흠 없다 주장할 수 없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율법이 필요한 이유를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율법이 구원의 수단이라면 영생을 기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소망을 찾는다. 그분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켰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신자들이 자신의 의를 나누어 갖게 한다(롬 8:3~4). 한편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정죄를 제거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로운 양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른다(롬 7:25~8:2).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는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지키도록 강권한다.
| 적용 |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동시에 율법을 존중하는 신앙이란 어떤 것일까요?
영감의 교훈
예수님의 사명 - “예수님의 사명은 사람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어 하늘의 율법의 원칙과 조화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율법은 높여진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장 31절)고 말한다”(산상보훈, 50).
기 도
아버지, 제게 주신 믿음의 기회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니 더욱 그 은혜를 힘입어 아버지 뜻에 순종하는 자녀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베드로와 율법(벧전 2:9)
6월 9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교사강해 2)
구원은 어두운 데서 주님의 불러냄을 입어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경험이다. 이전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이제는 그 기이한 빛 안에서 사는 것이다. 기이하다고 했다. 놀라운 빛이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빛이다. 구원은 그리하여 우리에게 경이와 감격과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이전과 인생이 동일하지 않다.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인생이 아니다. 새로운 것도 없고 늘 그렇고 그런 인생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이후에 우리 인생에 기이한 빛의 경험이 없다면 이것은 진정한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 할 것이다. 어두운 데서 이제는 기이한 빛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고백이어야 한다. 이런 기이한 빛의 경험이 있는가? 이제 그 기이한 빛을 볼 수 있도록 주께 나아가자. 주님이 주시는 빛은 이 세상에서 이미 알고 있는 빛이 아니다. 인생의 어둠도 있고 밝은 빛도 있지만 주님이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내어 빛으로 인도하신 것은 이런 세상에서의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것이다. 우리가 주께 기대할 빛은 기이한 빛이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기이한 일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이다. 아직 그 놀라운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기적의 경험이다. 이제까지 인생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 기이한 일을 경험하고 엄청난 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저 경험적으로 교회생활을 통해서 알고 있는 그런 구원에 대한 이해는 핵심을 놓치고 있다. 어떤 특별한 체험이 신앙이 아니고 늘 습관적으로 행해 나가는 신앙의 행위들이 신앙이 아니다. 기적의 경험이다.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다. 이전의 어둠과 구별되고 또 이전에 알고 있는 빛과는 구별되는 전혀 다른 빛으로 들어가 그 빛 가운데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 빛이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비추게 된다.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주님의 빛의 경험이 바로 이런 기이한 빛에로 들어가는 우리의 경험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주의 빛을 경험하고 인생이 달라지게 된다. 인생은 이제 이 빛 가운데 사는데 의미를 두게 된다. 이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다. 처음 선택된 제자들 가운데서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수많은 주요 사건 현장에 있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선포했던 것도 베드로였다.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고 심문을 받으셨던 밤에 가야바의 집까지 구주를 따라갔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아침,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특별한 지침을 받은 사람도 베드로였다. 첫 신자들의 무리가 오순절에 모였을 때 베드로는 선임 대표자였다. 만약 율법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변경되었다면 베드로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행 10:9~14를 읽어 보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어떻게 유대인들의 율법을 고수하였는가? 베드로가 음식에 관련된 율법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했다면 십계명의 영속성에 대해서 그가 어떤 견해를 가졌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몇 년 뒤에 이상을 받았다. 제자들의 전도 활동의 결과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한 때였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기별 가운데 율법을 거부하라는 어떤 지시가 포함되었음을 암시할 만한 내용이 없다. 사도행전 10장의 사건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적 기원에 매우 충실하였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증명한다.
벧전 2:9을 출 19:6과 비교해 보라. 출 19:6의 배경은 무엇인가?
교훈 : 베드로는 예수님의 최측근이었고, 승천하신 이후에도 교회의 대표자 역할을 감당했지만 여전히 율법에 충실한 언약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부가적용)
베드로의 인간성은 모든 사람의 선생이 되게 한다. 그의 충동적인 행동, 그의 잦은 질문, 그의 열성적인 고백, 그에게 주어진 칭찬과 꾸지람, 때로 용감하고 때로 비겁한 행동, 그의 맹세와 비통한 눈물, 이 모든 것은 동료 인간들과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베드로로 하여금 위대한 선생이 되게 하였다. 아마 실패의 그 날 밤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교훈적인 밤일 것이다.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눌 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면을 벗겼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실패에 대해 예견하자 그는 “주여 나는 주님과 함께 감옥이나 죽음에도 같이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진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스러운 가식이었다. 선천적인 강함은 불이익이 될 수 있다. 특히 영적인 문제에서는 더 그렇다. 베드로의 운명적인 가식도 예수님을 위한 그의 의도적 사랑에 의해 더해졌다.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 어떤 환경아래서는 그렇게 실망시킬 수 있었을까? 그러나 베드로는 역시 순진했다. 그러나 죄 많은 사람이 실제로 교회의 기둥이 되었다. 베드로는 그 생애 동안 결코 완전해지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그럴 수 없다. 갈라디아서 2:11-14에는 베드로의 불완전한 증거가 나타나있다. 베드로는 곧 우리 자신이다. 베드로의 경험은 바로 우리 경험이다. 베드로를 회개시켜 회복시키고 겸손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 우리도 생의 연약함을 통해 우리를 회개시키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완전할 길을 가게 할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목적과 오늘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같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베드로가 그의 독자들을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로 불렀을 때, 그들은 바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던 기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속자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언약의 조건을 따라야 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의 지위를 상기시킨 다음에 즉시 그들에게 의로운 삶을 살라고 촉구한다(벧전 2:11~12). 그는 또한 율법 없는 복음을 퍼트리는 거짓 교사들을 조심하도록 자신의 독자들에게 경고한다(벧후 2:21, 3:2).
| 적용 |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받은 백성으로 그대가 나타내야 할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 나라의 백성 -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가? 그분의 뜻을 행하는 모든 사람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들을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당신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찬송하게 될 선택된 세대, 특별한 백성, 거룩한 나라이다.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그들은 산 돌,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권면, 422).
기 도
아버지, 제 삶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 생활이 하늘의 기이한 빛과 하나님의 아름다운 품성을 선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를 만난 사람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셋째날(화) 요한과 율법
6월 10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교사강해 3)
우린 ‘계명’이라는 말씀을 대하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조목조목 실천하는 것으로 떠올린다. 안식일을 지키라든지 십일조를 하라든지 기도를 하라든지 봉사를 하라는 등등의 실천 항목을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계명을 말씀하신 적이 없다. 12절에 보면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한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계명을 사랑하는 것으로 결론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7절에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9절에서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한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문제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으로 조금 구체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요 15:10절에서는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함으로써 무엇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고, 12절에서 계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내 안에 거한다는 문제가 확실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신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12절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구절을 봐도 예수님의 사랑은 이미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 하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하늘의 사랑을 받은 자답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 그것으로 너희가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이 확증되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며 살게 되어지다는 것이다. 사랑은 아무나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바울 다음으로 신약 성경에 많은 책을 남기는 데 기여하였다. 복음서와 세 편의 서신 그리고 계시록의 저자가 모두 같은 요한이다.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그도 예수님께 부름을 입은 첫 제자에 속했으며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예수님과의 친밀성 때문에 그는 종종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불린다. 요한복음 말미에서 미뤄볼 때(요 21:25),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사실을 많이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지하셨다면 요한처럼 예수님과 가까웠던 사람은 그 사실을 반드시 알았을 것이다.
요 15:1~11과 요일 2:3~6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지상 생애의 막바지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아버지의 계명에 충성하였고 그 결과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였다고 증언하실 수 있었다(요 15:10). 예수님은 계명을 잊거나 폐기해야 할 부정적인 장애물로 여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계명을 하나님 그리고 타인과의 사랑의 관계를 위한 지침으로 여기셨다. 실제로 요한은 사랑이 언제나 율법의 본질이었다고 이해했다(요이 6 참고). 그래서 하나님 또는 다른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율법을 지킨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가 우리의 동료를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정신의 모든 힘과 활동은 그 목적에, 즉 많은 선을 행하는 일에 바쳐져야 한다.… 고귀한 영혼의 선물을 소유함으로 타인에게 능력을 가지고 증언하게 될 자들은 그 시여자를 얼마나 기쁘시게 하겠는가!”(원고 20권, 138).
교훈 :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친근한 제자로서 계명의 정신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반복하여 가르침으로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부가적용)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성품이 없다. 사랑한다고 해봐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이성에 대한 사랑이다. 다시 말해서 나를 욕하고 핍박하는 자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성품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나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깨달음에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핍박하고 주님을 배척하는 자로 살아가는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사랑이 참으로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사랑 안에서 비로소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이며 그리스도의 정신과 하늘의 속성을 드러낸다. 과시하지 않는 거룩함의 능력은 가장 유능한 설교보다 더 웅변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며 단순한 언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공개한다”(원고 20권, 138).
| 적용 |
그대가 특별히 사랑해야 할 대상은 누구이며,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죄인의 마음속의 위대한 변화 -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고 하였다. 거듭남으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됨과 동시에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 위대한 변화가 죄인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면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성결로, 범죄와 반역에서 순종과 충성으로 옮겨지게 된다”(각 시대의 대쟁투, 468).
기 도
십계명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봅니다. 온 세상을 사랑하시고, 죄인까지 사랑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닮기까지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고귀한 뜻을 받들겠습니다.
넷째날(수) 야고보와 율법
6월 11일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7~9).
교사강해 4)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인 프란쯔 무쓰너(Franz Musner)는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서 서로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고 보았다. 유대 정통에 있는 야고보와 헬라 정통의 문화권에 있는 바울이 서로를 공박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주석 학자인 영국의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두 서신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조화를 지녔다고 하였다. 즉 바울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공격한 것이나 야고보는 복음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 것이므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행함으로 인한 의를 부르짖었으나 야고보는 사람 앞에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약2:18). 바울과 야고보 모두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도 바울의 교리가 야고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였다. 즉 행함 없는 믿음이란 이신득의와 모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춘 자가 당연히 행해야 할 바를 행치 않을 때 그것은 믿음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성경에 야고보가 남긴 기록은 야고보서뿐이다. 저자는 야고보가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그 서신의 발신자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라고 알려져 있다. 야고보는 처음에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의심했을 것이다(요 7:5). 그러나 마침내 신약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다(행 15:13, 갈 1:19).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지할 의도가 있었다면 그분의 형제는 필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약 2:1~26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의 바탕 기별은 무엇인가? 왜 야고보는 7~9절에서 율법을 요약하고 나서 바로 모든 계명을 다 지켜야 한다고 말했는가? 이 말씀은 사랑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의 관계를 어떻게 보여주는가?
어떤 이들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다보니 율법의 역할에 대하여 야고보와 바울의 입장이 정반대라고 주장한다. 핵심 쟁점은 구원에 있어서 행위의 위치이다. 바울은 우리가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 얻는다고 선언한다(엡 2:8~9). 반면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강조한다(약 2:26).
하지만 이 두 진술은 서로 상반되지 않는다. 바울이 율법을 무효화하지 않는 은혜에 대하여 여러 번 이야기했던 것을 야고보는 단지 조금 강한 방식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롬 13:9에서 바울이 설명했던 것과 같이 야고보도 하나님의 율법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약 2:8). 사랑을 실천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진실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주장할 수 없다.
교훈 : 주의 형제인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계명의 본질인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을 강조하였다.
부가적용)
오늘날 믿음이 남용되고 있음을 누구나 인식한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는 생각을 은혜를 남용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본 회퍼(Bon hoeffer)는 '값싼 은혜'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싸구려로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에의 순종과 행함의 믿음이 필요하다. 야고보는 바울의 신학(이신득의)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에게 행함의 중요성을 보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행함은 복음에 대한 순종적인 행함이다. 이신득의를 남용하여 행함이 없는 이들에게 야고보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질 것을 가르친다. 참된 믿음이란 자연적으로 행함이 뒤따르게 된다고 루터(Luther)도 언급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믿음은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어 있습니까?
성경은 행위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단지 행위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경계할 뿐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으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거듭남의 증거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의 진실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적용 |
그대가 거듭난 양심으로 실천하고 싶은 선행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함께 가는 믿음과 행함 - “믿음과 행함은 손을 맞잡고 함께 간다. 그것들은 승리의 사업에 조화를 이루어 활동한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죽은 것이며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정결케 하는 믿음이다. 분노와 의심 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손을 드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의 길을 지혜롭게 걸어갈 것이다”(믿음과 행함, 48).
기 도
교회만 오가고 말로만 외치는 신앙에 저도 지칩니다. 아버지, 제 믿음에 생명력을 더해 주옵소서. 제 마음속에 봉사와 섬김과 나눔에 대한 열망을 심어 주시고, 그 속에서 진실한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유다와 율법
6월 12일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4).
교사강해 5)
유다서의 목적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공동체 안에 악한 마음으로 가만히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다.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이와 같은 자들은 자고로 공동체 가운데 분리되어 심판을 받았다.(출애굽 백성들 중에도 있었고, 천사들 중에도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 중에도 있었다.) 이들은 육체를 더럽히는 자들(방탕한 삶)이고, 교회의 치리를 받지 아니함으로 권위를 업신여기는 자들인 듯하다. 그리고 함부로 비방하여 가인의 길로 혹은 발람의 길로 가는 자니 결국은 멸망에 이를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암초요 삯꾼이요 열매 없이 껍데기에 불과한 사람이라 뿌리까지 뽑힌 나무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마지막 때에 사도들이 일찌감치 일러준 대로 이런 사람들을 경계하고, 거룩한 믿음과 사랑,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림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힘쓰라. 주님은 너희를 능히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그 영광 앞에서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분이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 가운데 하나인 유다서는 예수님의 또 다른 형제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이 야고보의 형제임을 밝힌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네 형제 가운데 야고보와 유다를 언급하기 때문에(마 13:55) 이 짧은 서신은 일반적으로 주의 형제 유다의 기록으로 인정된다. 앞에서 공부한 성경의 다른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다도 예수님이 율법을 폐했다면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비록 유다는 율법이나 계명을 언급한 적이 없지만, 전체 서신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율법을 범한 결과에 대해 다루고 있다.
유다서 4절을 읽어 보라. 우리의 전체 토론 주제와 관련하여 그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 죄가 없었다면 은혜가 불필요하기 때문에 은혜를 말한다는 것은 율법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롬 5:18~6:15).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것은 너무도 그릇된 것이어서 유다는 그것을 주를 부인하는 것과 동일시하였다.
히 3:7~19은 유 5~7을 조명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이 두 성경 말씀은 순종과 믿음의 관계를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주는가?
유다는 자신만의 고어체로 독자들에게 이집트의 속박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의 경험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분의 율법을 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그분과 분리되는 상태에서 비롯된 끔찍한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교훈 : 주의 형제 유다는 그의 짧은 서신에서 구원의 은혜를 빌미로 방종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경건한 삶을 촉구했다.
부가적용)
바울은 주로 율법주의자와 논쟁하면서 사역을 했고, 또 그들을 대항하며 편지들을 작성했다는 것을 그의 서신서들을 통해서 보게 된다. 반면 재미있게도 히브리서 이후로 나오는 야고보서부터는 율법적인(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는 내용들이 이어진다. 베드로의 서신도 그렇고 요한의 서신은 교회를 힘들게 했던 이단에 대한 경계를 다루는데, 이 이단이라는 것은 <육체를 방종하게 했던> 이단으로 보여진다. 유다서도 마찬가지 이단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들을 이단으로 보고 이들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 이후 서신들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바울은 율법주의자(행위 구원)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구원>을 강조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던 무리중 독버섯이 자랐다. 바로 <은혜를 빙자하여 방탕한 삶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성경은 이들에게 대해서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인이라고 규정한다.(요일 5장) 이들과는 상종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구분되어야 함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은 언제나 특정 정황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바울의 서신의 입장에서만 복음을 배워온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본다. 야고보나 베드로나 요한, 유다의 서신들도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은혜의 복음을 왜곡시킨 이단들을 경계함으로 복음의 본질을 잊지 않게 하고 있는데 말이다. 바울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바울의 신학만이 신학의 전부인 것처럼 가르치고 배웠던 것도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유다서에서 어떤 경고와 어떤 위로를 발견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유다는 사람들이 정말 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배도하는 자들은 심판을 당할 것이다.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순종의 생애로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다서는 성경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입장이 분명하다.
| 적용 |
자신을 위하여 신앙의 자유와 방종을 구별하려면 어떤 기준이 필요할까요?
영감의 교훈
예수를 부인하는 것 - “그리스도의 정신에 배치되는 정신은 그 공언하는 바가 어떠하든지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험담을 하거나 어리석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진실하지 못하고 불친절한 말로써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있다. 생애의 부담을 회피하고 헛된 향락을 추구함으로써 예수를 부인할 수 있다. 세상을 본받음으로써, 무례한 행동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사랑함으로써, 자아를 정당화시킴으로써, 의심을 품고 부질없이 걱정을 하고 흑암 중에 거함으로써 예수를 부인할 수 있다”(시대의 소망, 357).
기도
주님, 저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엄청난 대가를 잊은 채 은혜를 값 싼 선물로 취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경건한 삶을 꿈꾸며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유 20) 설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6월 13일
“사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 회개하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죄인이 하늘 아버지와 마찰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을 범하였으므로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다음에 할 일은 무엇인가?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분의 피만이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정죄할 뿐 범죄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해야 한다. 자비로운 우리의 구주께서는 ‘그로 하여금 나와 화목할 수 있도록 내 팔을 붙잡게 하라. 그러면 그가 나와 화목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일수록 많이 사랑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자신이 죄로 오염됐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는 자신에게 단지 용서가 필요함을 느낄 것이다”(영문시조, 1886년 8월 5일).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의 엘렌 G. 화잇의 글을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이 인용문은 우리가 이번 기에 배우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어떤 빛을 비춰줍니까? 죄인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➋ 유다서 4절에 기록된 경고를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신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들이 주님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을 폐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의미입니까?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실제 무엇을 제거하려는 것입니까?
➌ 사탄이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때에 율법을 부인하거나 심지어 계명 가운데 하나를 부인하는 사람은 얼마나 사탄의 손에 놀아나는 것입니까?
6월 14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4분
기억절 :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도입)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 구원에 불필요하고, 그저 오직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되고 그래서 안전하다고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율법 없이는 인간이 죄를 자각하지 못하며, 회개할 필요도 못 느낀다.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진정한 회심에서 하나의 동인(動因)이다. 죄에 대한 자각 없이는 참된 회개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그리고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선언한다. 죄인들이 자기의 죄를 알기 위해서는 의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표준으로 성품을 시험해 봐야 한다. 결함을 발견하려면 하나님의 법이라는 거울에 비춰 봐야 한다. 그런데 율법이 그들의 죄를 드러내지만 그 죄의 처방은 내놓지 못한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용서를 제공한다. 용서받은 자로 서기 위해서, 죄인들은 율법을 범한 자들이므로 반드시 하나님께 회개하고, 구속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연구 범위 : 롬 3:31, 롬 6:15, 행 10:9~14, 요 15:1~11, 약 2:1~26, 히 3:7~19, 유 5~7.
지속적인 율법의 유효성에 대한 수많은 증거를 보면서 왜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까? 첫째, 어떤 이들은 율법의 기능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책망하는 일부 성경절을 보고 문제가 율법 자체에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 결과 그들은 새 언약 아래 있는 자들에게 십계명은 의무 사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둘째, 어떤 이들은 안식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이 없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모든 계명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한다.
셋째, 어떤 이들은 다른 아홉 계명은 유효하지만, 제칠일 안식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지키는 일요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위의 견해들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율법에 대한 사도들의 태도를 살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폐지되거나 수정되었다면, 사도들도 필히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과반이 서로 기도해 주고 돌봐 주는 친밀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사도들의 기록이 율법의 변경이나 폐지를 증명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한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의 율법을 증언하기 위해서 매일 사랑하는 삶을 산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거짓이 사실로 둔갑하는 사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예, 크리스마스, 부활절 등등)
❷ 율법이 폐했다는 오해가 기독교 내에서 진실인 것처럼 자리를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❸ 신약의 저자들은 이런 오해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합니까?(미리 요일별로 과제를 맡김)
❹ 진정으로 계명을 지키는 신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B. ❶ 나, 내 가족 또는 내 영역의 일에 대해 나도 모르는 사실이 소문처럼 퍼져 곤란했던 적이 있습니까?
❷ 율법이 폐했다는 말을 듣는다면 신약의 저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❸ 특히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오해하는 자들을 위해 어떤 설명을 주려고 할까요?
❹ 마지막 때에 주의 형제 유다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우리에게 어떤 믿음과 경건의 생활이 필요할까요?
결론 :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율법이 변경되거나 수정되었다고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기보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오늘 또는 내일 있는 소그룹 모임을 최종 점검합니다.
❷ 우리가 소그룹 모임에서 손님들을 위해 어떻게 배려해야 할지 이야기합니다.
❸ 구도자와 소그룹 모임을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바울과 율법
6월 8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28, 31)
교사강해 1)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인(justification)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문자적 의미는 "기쁜 소식")을 믿는 신앙에 의한 의인을 대조했다. 바울이 율법에서 의미하는 것은 구약의 제사의식과 도덕적 계명, 이방인에게까지 알려진 인간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었다. 이 율법의 의도는 인간이 창조자를 감사한 마음으로 신뢰하게 하는 것과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통하여 고심 중에 얻은 것은 인간이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를 의롭게 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아들 관계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졌던 율법은 교만과 자랑의 기초가 되었다. 바울이 복음을 이해하고 판단한 것은 인간은 율법의 외적인 행위의 수단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인간의 불용납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용납하신다는 것이었다. 신앙은 이 복음에 복종하는 것이고 또한 복종함으로써 인간은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완성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 특히 루터(1483-1546년)는 이러한 바울의 구별을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루터는 율법과 복음 사이의 구별이 "모든 기독교 교리의 개요를 포함한다"라고 말했다. 루터는 모세의 율법이나 자연법이나 산상설교에 나오는 "할지니라"라는 율법에서 인간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전적 요구를 발견했다. 이러한 율법의 요구는 완전한 사랑이었다. 율법이 이러한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에 죄 많은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루터는 믿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의 죄를 악화시킬 뿐이며 인간을 하나님과 교제시키는 대신에 절망시킨다.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지만 죄를 치료하지는 못한다.
기독교의 진정한 설립자는 바울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틀린 말이다. 바울이 신약 27권에서 13권을 기록하는 등 기독교 교리와 신학적 이해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그의 기록에서 나타난 많은 교훈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 반면 어떤 이들은 바울이 ‘새 종교’를 설립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주된 이유는 그들이 율법과 은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성경절을 살펴보라. 롬 3:28, 6:14, 7:4, 갈 3:24~25. 사람들은 왜 이 말씀들이 율법을 무효화시킨다고 생각할까? 그 이유를 찾기란 왜 어렵지 않은가?
따로 읽으면 이 말씀들은 분명 율법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가 없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바울이 정말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 성경절들을 포함하는 더 넓은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위의 성경절들이 있는 본문을 검토하라. 롬 3:31, 6:15, 7:7~12, 갈 3:21을 특별히 주목하라. 이 말씀들을 문맥과 더불어 보면 우리는 율법에 관한 바울의 요점을 어떻게 더 잘 이해하게 되는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개념을 모르는 자들을 위해 바울은 스스로 모순되려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이 자신과 관계를 맺기 원하는 자들에게 의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의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면 백성들은 의에 미치지 못하고 도리어 율법의 정죄를 받는다.
교훈 :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라고 강권한다.
부가적용)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는가? 율법을 통한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왜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을까? 아담과 하와가 틀림없이 선악과를 범할 줄 알면서도 따먹지 말라며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아심에도 주셨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율법이 곧 하나님이 정하신 도덕적 표준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 12절을 보면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라고 한다. 비록 우리가 절대치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그 기준은 필요하다. 기준과 표준이 없으면 혼란이 발생한다. 무엇이 참되고 진실한지 분간이 안 된다. 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지수를 가늠하고, 사회적 정의와 선을 판단하고 평가하기 위해 그 절대적 규범과 기준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이다. 율법은 곧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뜻하는 것이기에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은 성도의 최대 과제는 성화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모르면 성화를 달성할 수 없다.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심의 표준으로 주신 것이 십계명이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율법의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로마서 3장 20절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전 인류가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체험적으로 시인하고 고백하게 한다. 우리는 그 어떤 율법조항도 충족시킬 수 없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규정한다. 이것이 율법의 결정적 기능이다. 율법은 우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흠 없다 주장할 수 없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율법이 필요한 이유를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율법이 구원의 수단이라면 영생을 기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소망을 찾는다. 그분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켰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신자들이 자신의 의를 나누어 갖게 한다(롬 8:3~4). 한편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정죄를 제거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로운 양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른다(롬 7:25~8:2).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는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지키도록 강권한다.
| 적용 |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동시에 율법을 존중하는 신앙이란 어떤 것일까요?
영감의 교훈
예수님의 사명 - “예수님의 사명은 사람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어 하늘의 율법의 원칙과 조화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율법은 높여진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장 31절)고 말한다”(산상보훈, 50).
기 도
아버지, 제게 주신 믿음의 기회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니 더욱 그 은혜를 힘입어 아버지 뜻에 순종하는 자녀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베드로와 율법(벧전 2:9)
6월 9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교사강해 2)
구원은 어두운 데서 주님의 불러냄을 입어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경험이다. 이전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이제는 그 기이한 빛 안에서 사는 것이다. 기이하다고 했다. 놀라운 빛이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빛이다. 구원은 그리하여 우리에게 경이와 감격과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이전과 인생이 동일하지 않다.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인생이 아니다. 새로운 것도 없고 늘 그렇고 그런 인생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이후에 우리 인생에 기이한 빛의 경험이 없다면 이것은 진정한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 할 것이다. 어두운 데서 이제는 기이한 빛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고백이어야 한다. 이런 기이한 빛의 경험이 있는가? 이제 그 기이한 빛을 볼 수 있도록 주께 나아가자. 주님이 주시는 빛은 이 세상에서 이미 알고 있는 빛이 아니다. 인생의 어둠도 있고 밝은 빛도 있지만 주님이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내어 빛으로 인도하신 것은 이런 세상에서의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것이다. 우리가 주께 기대할 빛은 기이한 빛이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기이한 일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이다. 아직 그 놀라운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기적의 경험이다. 이제까지 인생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 기이한 일을 경험하고 엄청난 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저 경험적으로 교회생활을 통해서 알고 있는 그런 구원에 대한 이해는 핵심을 놓치고 있다. 어떤 특별한 체험이 신앙이 아니고 늘 습관적으로 행해 나가는 신앙의 행위들이 신앙이 아니다. 기적의 경험이다.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다. 이전의 어둠과 구별되고 또 이전에 알고 있는 빛과는 구별되는 전혀 다른 빛으로 들어가 그 빛 가운데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 빛이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비추게 된다.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주님의 빛의 경험이 바로 이런 기이한 빛에로 들어가는 우리의 경험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주의 빛을 경험하고 인생이 달라지게 된다. 인생은 이제 이 빛 가운데 사는데 의미를 두게 된다. 이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다. 처음 선택된 제자들 가운데서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수많은 주요 사건 현장에 있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선포했던 것도 베드로였다.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고 심문을 받으셨던 밤에 가야바의 집까지 구주를 따라갔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아침,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특별한 지침을 받은 사람도 베드로였다. 첫 신자들의 무리가 오순절에 모였을 때 베드로는 선임 대표자였다. 만약 율법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변경되었다면 베드로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행 10:9~14를 읽어 보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어떻게 유대인들의 율법을 고수하였는가? 베드로가 음식에 관련된 율법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했다면 십계명의 영속성에 대해서 그가 어떤 견해를 가졌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몇 년 뒤에 이상을 받았다. 제자들의 전도 활동의 결과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한 때였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기별 가운데 율법을 거부하라는 어떤 지시가 포함되었음을 암시할 만한 내용이 없다. 사도행전 10장의 사건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적 기원에 매우 충실하였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증명한다.
벧전 2:9을 출 19:6과 비교해 보라. 출 19:6의 배경은 무엇인가?
교훈 : 베드로는 예수님의 최측근이었고, 승천하신 이후에도 교회의 대표자 역할을 감당했지만 여전히 율법에 충실한 언약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부가적용)
베드로의 인간성은 모든 사람의 선생이 되게 한다. 그의 충동적인 행동, 그의 잦은 질문, 그의 열성적인 고백, 그에게 주어진 칭찬과 꾸지람, 때로 용감하고 때로 비겁한 행동, 그의 맹세와 비통한 눈물, 이 모든 것은 동료 인간들과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베드로로 하여금 위대한 선생이 되게 하였다. 아마 실패의 그 날 밤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교훈적인 밤일 것이다.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눌 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면을 벗겼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실패에 대해 예견하자 그는 “주여 나는 주님과 함께 감옥이나 죽음에도 같이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진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스러운 가식이었다. 선천적인 강함은 불이익이 될 수 있다. 특히 영적인 문제에서는 더 그렇다. 베드로의 운명적인 가식도 예수님을 위한 그의 의도적 사랑에 의해 더해졌다.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 어떤 환경아래서는 그렇게 실망시킬 수 있었을까? 그러나 베드로는 역시 순진했다. 그러나 죄 많은 사람이 실제로 교회의 기둥이 되었다. 베드로는 그 생애 동안 결코 완전해지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그럴 수 없다. 갈라디아서 2:11-14에는 베드로의 불완전한 증거가 나타나있다. 베드로는 곧 우리 자신이다. 베드로의 경험은 바로 우리 경험이다. 베드로를 회개시켜 회복시키고 겸손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 우리도 생의 연약함을 통해 우리를 회개시키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완전할 길을 가게 할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목적과 오늘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같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베드로가 그의 독자들을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로 불렀을 때, 그들은 바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던 기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속자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언약의 조건을 따라야 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의 지위를 상기시킨 다음에 즉시 그들에게 의로운 삶을 살라고 촉구한다(벧전 2:11~12). 그는 또한 율법 없는 복음을 퍼트리는 거짓 교사들을 조심하도록 자신의 독자들에게 경고한다(벧후 2:21, 3:2).
| 적용 |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받은 백성으로 그대가 나타내야 할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 나라의 백성 -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가? 그분의 뜻을 행하는 모든 사람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들을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당신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찬송하게 될 선택된 세대, 특별한 백성, 거룩한 나라이다.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그들은 산 돌,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권면, 422).
기 도
아버지, 제 삶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 생활이 하늘의 기이한 빛과 하나님의 아름다운 품성을 선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를 만난 사람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셋째날(화) 요한과 율법
6월 10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교사강해 3)
우린 ‘계명’이라는 말씀을 대하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조목조목 실천하는 것으로 떠올린다. 안식일을 지키라든지 십일조를 하라든지 기도를 하라든지 봉사를 하라는 등등의 실천 항목을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계명을 말씀하신 적이 없다. 12절에 보면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한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계명을 사랑하는 것으로 결론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7절에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9절에서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한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문제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으로 조금 구체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요 15:10절에서는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함으로써 무엇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고, 12절에서 계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내 안에 거한다는 문제가 확실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신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12절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구절을 봐도 예수님의 사랑은 이미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 하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하늘의 사랑을 받은 자답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 그것으로 너희가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이 확증되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며 살게 되어지다는 것이다. 사랑은 아무나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바울 다음으로 신약 성경에 많은 책을 남기는 데 기여하였다. 복음서와 세 편의 서신 그리고 계시록의 저자가 모두 같은 요한이다.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그도 예수님께 부름을 입은 첫 제자에 속했으며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예수님과의 친밀성 때문에 그는 종종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불린다. 요한복음 말미에서 미뤄볼 때(요 21:25),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사실을 많이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지하셨다면 요한처럼 예수님과 가까웠던 사람은 그 사실을 반드시 알았을 것이다.
요 15:1~11과 요일 2:3~6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지상 생애의 막바지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아버지의 계명에 충성하였고 그 결과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였다고 증언하실 수 있었다(요 15:10). 예수님은 계명을 잊거나 폐기해야 할 부정적인 장애물로 여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계명을 하나님 그리고 타인과의 사랑의 관계를 위한 지침으로 여기셨다. 실제로 요한은 사랑이 언제나 율법의 본질이었다고 이해했다(요이 6 참고). 그래서 하나님 또는 다른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율법을 지킨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가 우리의 동료를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정신의 모든 힘과 활동은 그 목적에, 즉 많은 선을 행하는 일에 바쳐져야 한다.… 고귀한 영혼의 선물을 소유함으로 타인에게 능력을 가지고 증언하게 될 자들은 그 시여자를 얼마나 기쁘시게 하겠는가!”(원고 20권, 138).
교훈 :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친근한 제자로서 계명의 정신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반복하여 가르침으로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부가적용)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성품이 없다. 사랑한다고 해봐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이성에 대한 사랑이다. 다시 말해서 나를 욕하고 핍박하는 자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성품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나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깨달음에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핍박하고 주님을 배척하는 자로 살아가는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사랑이 참으로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사랑 안에서 비로소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이며 그리스도의 정신과 하늘의 속성을 드러낸다. 과시하지 않는 거룩함의 능력은 가장 유능한 설교보다 더 웅변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며 단순한 언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공개한다”(원고 20권, 138).
| 적용 |
그대가 특별히 사랑해야 할 대상은 누구이며,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죄인의 마음속의 위대한 변화 -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고 하였다. 거듭남으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됨과 동시에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 위대한 변화가 죄인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면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성결로, 범죄와 반역에서 순종과 충성으로 옮겨지게 된다”(각 시대의 대쟁투, 468).
기 도
십계명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봅니다. 온 세상을 사랑하시고, 죄인까지 사랑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닮기까지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고귀한 뜻을 받들겠습니다.
넷째날(수) 야고보와 율법
6월 11일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7~9).
교사강해 4)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인 프란쯔 무쓰너(Franz Musner)는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서 서로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고 보았다. 유대 정통에 있는 야고보와 헬라 정통의 문화권에 있는 바울이 서로를 공박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주석 학자인 영국의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두 서신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조화를 지녔다고 하였다. 즉 바울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공격한 것이나 야고보는 복음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 것이므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행함으로 인한 의를 부르짖었으나 야고보는 사람 앞에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약2:18). 바울과 야고보 모두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도 바울의 교리가 야고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였다. 즉 행함 없는 믿음이란 이신득의와 모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춘 자가 당연히 행해야 할 바를 행치 않을 때 그것은 믿음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성경에 야고보가 남긴 기록은 야고보서뿐이다. 저자는 야고보가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그 서신의 발신자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라고 알려져 있다. 야고보는 처음에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의심했을 것이다(요 7:5). 그러나 마침내 신약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다(행 15:13, 갈 1:19).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지할 의도가 있었다면 그분의 형제는 필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약 2:1~26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의 바탕 기별은 무엇인가? 왜 야고보는 7~9절에서 율법을 요약하고 나서 바로 모든 계명을 다 지켜야 한다고 말했는가? 이 말씀은 사랑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의 관계를 어떻게 보여주는가?
어떤 이들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다보니 율법의 역할에 대하여 야고보와 바울의 입장이 정반대라고 주장한다. 핵심 쟁점은 구원에 있어서 행위의 위치이다. 바울은 우리가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 얻는다고 선언한다(엡 2:8~9). 반면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강조한다(약 2:26).
하지만 이 두 진술은 서로 상반되지 않는다. 바울이 율법을 무효화하지 않는 은혜에 대하여 여러 번 이야기했던 것을 야고보는 단지 조금 강한 방식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롬 13:9에서 바울이 설명했던 것과 같이 야고보도 하나님의 율법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약 2:8). 사랑을 실천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진실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주장할 수 없다.
교훈 : 주의 형제인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계명의 본질인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을 강조하였다.
부가적용)
오늘날 믿음이 남용되고 있음을 누구나 인식한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는 생각을 은혜를 남용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본 회퍼(Bon hoeffer)는 '값싼 은혜'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싸구려로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에의 순종과 행함의 믿음이 필요하다. 야고보는 바울의 신학(이신득의)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에게 행함의 중요성을 보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행함은 복음에 대한 순종적인 행함이다. 이신득의를 남용하여 행함이 없는 이들에게 야고보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질 것을 가르친다. 참된 믿음이란 자연적으로 행함이 뒤따르게 된다고 루터(Luther)도 언급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믿음은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어 있습니까?
성경은 행위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단지 행위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경계할 뿐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으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거듭남의 증거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의 진실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적용 |
그대가 거듭난 양심으로 실천하고 싶은 선행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함께 가는 믿음과 행함 - “믿음과 행함은 손을 맞잡고 함께 간다. 그것들은 승리의 사업에 조화를 이루어 활동한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죽은 것이며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정결케 하는 믿음이다. 분노와 의심 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손을 드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의 길을 지혜롭게 걸어갈 것이다”(믿음과 행함, 48).
기 도
교회만 오가고 말로만 외치는 신앙에 저도 지칩니다. 아버지, 제 믿음에 생명력을 더해 주옵소서. 제 마음속에 봉사와 섬김과 나눔에 대한 열망을 심어 주시고, 그 속에서 진실한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유다와 율법
6월 12일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4).
교사강해 5)
유다서의 목적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공동체 안에 악한 마음으로 가만히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다.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이와 같은 자들은 자고로 공동체 가운데 분리되어 심판을 받았다.(출애굽 백성들 중에도 있었고, 천사들 중에도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 중에도 있었다.) 이들은 육체를 더럽히는 자들(방탕한 삶)이고, 교회의 치리를 받지 아니함으로 권위를 업신여기는 자들인 듯하다. 그리고 함부로 비방하여 가인의 길로 혹은 발람의 길로 가는 자니 결국은 멸망에 이를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암초요 삯꾼이요 열매 없이 껍데기에 불과한 사람이라 뿌리까지 뽑힌 나무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마지막 때에 사도들이 일찌감치 일러준 대로 이런 사람들을 경계하고, 거룩한 믿음과 사랑,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림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힘쓰라. 주님은 너희를 능히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그 영광 앞에서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분이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 가운데 하나인 유다서는 예수님의 또 다른 형제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이 야고보의 형제임을 밝힌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네 형제 가운데 야고보와 유다를 언급하기 때문에(마 13:55) 이 짧은 서신은 일반적으로 주의 형제 유다의 기록으로 인정된다. 앞에서 공부한 성경의 다른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다도 예수님이 율법을 폐했다면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비록 유다는 율법이나 계명을 언급한 적이 없지만, 전체 서신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율법을 범한 결과에 대해 다루고 있다.
유다서 4절을 읽어 보라. 우리의 전체 토론 주제와 관련하여 그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 죄가 없었다면 은혜가 불필요하기 때문에 은혜를 말한다는 것은 율법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롬 5:18~6:15).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것은 너무도 그릇된 것이어서 유다는 그것을 주를 부인하는 것과 동일시하였다.
히 3:7~19은 유 5~7을 조명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이 두 성경 말씀은 순종과 믿음의 관계를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주는가?
유다는 자신만의 고어체로 독자들에게 이집트의 속박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의 경험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분의 율법을 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그분과 분리되는 상태에서 비롯된 끔찍한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교훈 : 주의 형제 유다는 그의 짧은 서신에서 구원의 은혜를 빌미로 방종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경건한 삶을 촉구했다.
부가적용)
바울은 주로 율법주의자와 논쟁하면서 사역을 했고, 또 그들을 대항하며 편지들을 작성했다는 것을 그의 서신서들을 통해서 보게 된다. 반면 재미있게도 히브리서 이후로 나오는 야고보서부터는 율법적인(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는 내용들이 이어진다. 베드로의 서신도 그렇고 요한의 서신은 교회를 힘들게 했던 이단에 대한 경계를 다루는데, 이 이단이라는 것은 <육체를 방종하게 했던> 이단으로 보여진다. 유다서도 마찬가지 이단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들을 이단으로 보고 이들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 이후 서신들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바울은 율법주의자(행위 구원)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구원>을 강조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던 무리중 독버섯이 자랐다. 바로 <은혜를 빙자하여 방탕한 삶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성경은 이들에게 대해서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인이라고 규정한다.(요일 5장) 이들과는 상종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구분되어야 함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은 언제나 특정 정황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바울의 서신의 입장에서만 복음을 배워온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본다. 야고보나 베드로나 요한, 유다의 서신들도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은혜의 복음을 왜곡시킨 이단들을 경계함으로 복음의 본질을 잊지 않게 하고 있는데 말이다. 바울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바울의 신학만이 신학의 전부인 것처럼 가르치고 배웠던 것도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유다서에서 어떤 경고와 어떤 위로를 발견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유다는 사람들이 정말 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배도하는 자들은 심판을 당할 것이다.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순종의 생애로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다서는 성경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입장이 분명하다.
| 적용 |
자신을 위하여 신앙의 자유와 방종을 구별하려면 어떤 기준이 필요할까요?
영감의 교훈
예수를 부인하는 것 - “그리스도의 정신에 배치되는 정신은 그 공언하는 바가 어떠하든지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험담을 하거나 어리석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진실하지 못하고 불친절한 말로써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있다. 생애의 부담을 회피하고 헛된 향락을 추구함으로써 예수를 부인할 수 있다. 세상을 본받음으로써, 무례한 행동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사랑함으로써, 자아를 정당화시킴으로써, 의심을 품고 부질없이 걱정을 하고 흑암 중에 거함으로써 예수를 부인할 수 있다”(시대의 소망, 357).
기도
주님, 저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엄청난 대가를 잊은 채 은혜를 값 싼 선물로 취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경건한 삶을 꿈꾸며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유 20) 설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6월 13일
“사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 회개하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죄인이 하늘 아버지와 마찰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을 범하였으므로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다음에 할 일은 무엇인가?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분의 피만이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정죄할 뿐 범죄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해야 한다. 자비로운 우리의 구주께서는 ‘그로 하여금 나와 화목할 수 있도록 내 팔을 붙잡게 하라. 그러면 그가 나와 화목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일수록 많이 사랑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자신이 죄로 오염됐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는 자신에게 단지 용서가 필요함을 느낄 것이다”(영문시조, 1886년 8월 5일).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의 엘렌 G. 화잇의 글을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이 인용문은 우리가 이번 기에 배우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어떤 빛을 비춰줍니까? 죄인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➋ 유다서 4절에 기록된 경고를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신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들이 주님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을 폐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의미입니까?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실제 무엇을 제거하려는 것입니까?
➌ 사탄이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때에 율법을 부인하거나 심지어 계명 가운데 하나를 부인하는 사람은 얼마나 사탄의 손에 놀아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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