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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하나님의 법과 그리스도의 법(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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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05-19 10:35 조회5,5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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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하나님의 법과 그리스도의 법

5월 24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1분

기억절 :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도입)
보스톤 트리니티 교회의 설교자로 계셨던 필립 브룩스(Philip Brooks)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에게는 로버트 잉거솔(Robert Ingersoll)이라는 무신론자 친구가 있었다. 브룩스는 아주 절도 있고 철저한 시간 계획을 따라 사는 분이었지만, 이 무신론자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서 자주 자신의 시간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다. “그렇게까지 자네가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물음 앞에 그는 “내가 그를 참으로 사랑하고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원한다면 내 시간표가 아닌 그의 시간표를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브룩스가 말년에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 그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면회사절’이라는 푯말을 걸어두곤 했다. 그런데 그는 만일 잉거솔이 찾아오면 예외로 만나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잉거솔이 그 사실을 알고 “왜 나에게만 자네가 예외로 하고 만나주느냐?”는 물음에 브룩스 목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이야 다시 천국에서 만나겠지만 자네에게는 그런 보장이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 실화는 참으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많은 교훈을 준다, 우리를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복음을 위해 사랑과 섬김의 자발적인 종이 되시기를 권면하시는 것이다.

연구 범위 : 마 19:16~22, 요 13:34~35, 갈 6:1~5, 행 17:31, 요 5:30.

대부분의 나라마다 법의 단계가 존재한다. 최상위에는 국가 기관이 제정한 법이 있다. 국가의 법은 국토 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이 있다. 그 아래에는 지방 거주자에 해당하는 지방 차원의 법이 있다. 그 아래에는 가장 작은 단위의 지역을 통제하는 지역법이 있다. 나라 안에 여러 지역마다 자체 헌장에 조화되는 법을 만들 수 있지만, 국가의 법과 충돌하는 법을 제정할 수는 없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는 같은 법을 다른 방법으로 적용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그 적용이 법의 취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우주의 최고 지도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위한 법을 제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셔서 아버지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생애를 사셨다(빌 2:5~11).
그래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과 그분이 주신 새 계명까지 그분이 가르치신 모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법과 완전히 조화로웠다.

*교과는 읽고 밑줄만 쳐도 공부가 됩니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의 법은 온전히 사랑의 원칙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➋ 느끼기 :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자 재판장이 되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➌ 행하기 : 삶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각자 사랑이란 무엇인지 정의해 보십시오.
❷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합니까?
❸ 사랑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모습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사랑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서로 도와야 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B. ❶ 사랑이 빠진 결혼, 사랑이 없는 가족과 교회가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봅시다.
❷ 예수님이 제시하신 새 계명과 명령들은 십계명과 어떤 관계라고 생각합니까?
❸ 계명이 심판의 표준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어떤 면을 살핀다는 뜻일까요?
❹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 각자 이야기해 봅시다.

결론 :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을 포함하여 그분이 가르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완전히 조화롭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지난 친교 모임에 대하여 좋았던 점과 보완해야 할 점 등을 이야기합니다.
❷ 친교 모임에 온 손님들을 어떻게 안교반(소그룹)에 초청할지 토의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율법과 선지자
5월 18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교사강해 1)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명령을 "황금률"이라고 부른다. 황금률은 이웃사랑의 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 남이 먼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남에게 대접 받기 원하는 대로 우리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황금률이 "율법과 선지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나오는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의미한다. 개역 성경은 구약성경을 4부분으로(모세 오경,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구약성경은 구약성경을 2부분(율법과 선지자), 또는 3부분으로(모세 오경, 선지서, 시편) 구분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을 둘로 구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황금률이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황금률이 구약성경의 요약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황금률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말했을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의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전체에 걸쳐서 율법학자들의 그릇된 율법관을 바로 잡는 데 큰 관심을 쏟고 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정신보다 문자에 치우치는 일이 많았다. 또 그들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기보다, 소극적으로 어떤 일을 금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남의 생명을 해치지만 않으면 6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생각했고, 부정한 성관계만 갖지 않으면 7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생각했다. 또 그들은 남의 물건에 손만 대지 않으면 8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생각했고, 법정에서 거짓 증언만 하지 않으면 9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율법은 문자보다 그 율법을 주신 정신을 이해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율법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에 모든 율법을 바르게 실천할 수 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의 정신을 잃어버린 채 율법의 문자에 매달리면 율법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다. 율법 안에는 금령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단지 십자가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지, 은혜의 신약 시대에는 구속력이 없다고 믿는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옛 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대교 전통을 이어받은 자들만이 여전히 옛 법을 지키면 된다고 믿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율법을 범할 면허를 주었다고 말한 성경 말씀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죄를 지어도 된다는 면허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성경은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조항을 율법이 새겨진 돌판 위에 계시하셨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십계명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세부적인 사항을 다루는 수많은 명령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끝에 랍비들은 십계명에 기초한 613개의 율법을 성경에서 발견했다. 그런데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님을 천명하셨을 때에 예수님은 랍비들보다 더 넓게 생각하셨던 같다(마 5:17). 즉 하나님의 법은 십계명으로 요약되었지만 선지자들에게 또는 그들을 통해 말씀하신 모든 거룩한 명령도 다 포함한다.
마 19:16~22과 22:34~40을 비교해 보라. 두 말씀은 예수님과 십계명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물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계시한 수많은 명령이 있지만, 십계명은 다른 여러 법에 적용할 수 있는 견고한 원칙을 제공한다.

교훈 : 십계명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법의 기초이며, 모든 율법에 내포되어 있는 원칙 곧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제시한다.

부가적용)
제 1-4계명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할 것인지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모독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5-10계명은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지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부모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공경하며 순종해야 한다(5계명). 또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보호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이웃의 생명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6계명).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정이 보호되기를 원하면 우리가 먼저 이웃의 가정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우리 재산이 보호 받기를 원하면 우리도 이웃의 재산에 손대지 말아야 한다(8계명). 또 우리가 거짓 증언에 의해 해를 받기 원치 않으면 우리 역시 이웃을 해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야 한다(9계명).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소유를 보호 받고 싶으면 우리 역시 남의 소유를 탐내는 일을 금해야 한다(10계명). 이와 같이 십계명은 남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주어진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래서 예수님은 젊은 부자 법관에게 말씀하실 때에 십계명 중 다섯 계명을 언급하셨다. 심지어 신 6:5과 레 19:18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더 축약한 계명이 등장한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고 선언하셨다. 궁극적으로 예수님과 하늘 아버지는 두 분이 서로 사랑하시는 것처럼 피조된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라고 권유하려는 목적에 있어서 하나가 되신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순종은 그러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의 기초이다.

| 적용 |
그대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둘로 요약되는 십계명 -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한 큰 계명으로 요약된다. 나머지 여섯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다른 계명 가운데 포함된다. 이 두 계명이 다 사랑의 원칙의 표현이다. 둘째 계명을 범하면서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첫째 부분을 범하면서 둘째 부분을 지킬 수 없다”(시대의 소망, 607).

기 도
아버지, 제가 사랑 없는 율법의 준수자가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며 겸손하게 아버지께 경배하는 사랑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사랑의 ‘규범들’(요 15:10)
5월 19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교사강해 2)
사랑은 기독교의 표지요,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세상에 증거한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한일서 2:8)고 하였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을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들 형제간에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아본다. 특히 내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된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사 생명까지 드린 사랑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들을 사랑할 때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도 정말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사랑의 단서가 붙게 되면서 새 계명이 된다. 그 단서는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함같이”라는 단서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로마서 5장을 보면, 내가 연약하였을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로 행하였을 때 나를 사랑하셨다. 따라서 이 사랑이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이방인에게는 불가능한 사랑이다. 오직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만 가능한 사랑으로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거듭난 우리에게 계명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사랑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가짜 그리스도인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법에 충성하셨던 많은 경우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눅 2:49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으신 것으로 보이나 그분이 가족의 행렬에서 이탈해서 마리아가 속상한 감정을 표현하자 겸손하게 부모와 집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순종하셨다(눅 2:51). 또한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에 사탄에게 절하기를 거절하셨다. 왜냐하면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눅 4:8). 그 밖에 예수님이 안식일을 준수하신 예도 있다(눅 4:16 참고). 바울은 예수님이 평생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애를 사셨다고 기록했다
(빌 2:5~11). 히브리서도 그분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전혀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히 4:15).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요 15:10)였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요 13:34~35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어떤 의미에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님은 계명의 준수와 사랑 사이에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셨다. 물론 우리는 사랑의 ‘규범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지만, 실제로 십계명이 그러한 규범이다. 십계명은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 그래서 제자들에게 계명을 주심으로써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에게서 기원한 사랑의 율법을 확대하셨다(요 13:34~35, 요 3:16).
이제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을 초월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

교훈 : 예수님은 십계명의 정신이 사랑이며 사랑은 계명의 준수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새 계명을 주셨다.

부가적용)
요한은 참 빛이 그 영혼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진리가 그 영혼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사람에게 있으면 그 영혼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있다 하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이다. 만일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빛 가운데 있는 자가 아니라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이다. 왜냐하면 진리와 빛은 ‘사랑으로’ 그 진리와 빛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명하고 분명하다. 사랑 가운데 거하면 거리낌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감이 있다. 그의 인생길은 빛 가운데 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목표가 있는 삶이 되며 따라서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다. 그러나 미움 가운데 거하는 자는 어두움에 있다. 그의 인생길은 어두움 가운데 있기에 날마다 좌충우돌하게 된다. 사랑은 빛을 향하여 달리고 미움은 어두움을 향하여 달린다. 사랑을 하고 있는 상태이면 빛에 있는 상태요, 미움의 상태이면 어두움의 상태이다. 사랑하면 더 환한 빛 가운데 거하게 된다. 이는 인생길에 있어서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미움은 더 어두움 가운데 거하게 한다. 그러므로 미움에 속한 삶은 계속 넘어지는 인생이 된다.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는 이유는 계속 미움의 어두움 가운데서 넘어지기 때문이다. 미움은 어두움이다. 어두움을 향하여 스스로 걸어가는 것이 미움이다. 미워하는 한 계속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 빛이 없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11).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요?
현대인들은 사랑을 자칫 정서적인 것에 국한하여 이해할 소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객관적 특성을 무시한 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주관적인 감정에 판단을 맡기기 쉽습니다. 물론 사랑은 감정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을 계명이라는 객관적인 언어로 표현하셨습니다. 사랑은 감정을 초월한 대원칙입니다. 우리는 객관성을 잃은 감정이나 상황윤리를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과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 적용 |
그대는 어떻게 원칙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새 계명의 의미 -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목격한 후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후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이 상호간에 지녀야 할 그 사랑의 성질을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사도행적, 547).

기 도
아버지, 제가 그 동안 사랑을 핑계로 저질렀던 수많은 잘못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제 마음과 생각 속에 사랑의 원칙이 분명하게 새겨지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에 거하’였다고 하신 주님의 고백이 저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셋째날(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됨
5월 20일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21).

교사강해 3)
성경은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하여『....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21) 라고 증거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은 의문으로 행하는 법이므로 죽이는 법이요 그리스도의 율법은 영으로 행하는 믿음의 법이므로 살리는 법이다. 기록된바『....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하신 증거와 같다. 또한 성경은 모세의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 하고 그리스도의 율법을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 한다. 기록된바『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하신 증거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모세의 율법 곧 죄와 사망의 법이 그리스도의 율법 곧 생명의 성령의 법과 만나는 곳은 바로 십자가이다. 여기에서 두 강도가 만나 한 강도는 모세의 율법으로 사망하고 한 강도는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은 것과 같다. 기록된바『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하신 증거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곧 두 사람이 십자가에 함께 달렸으나 하나는 버려두시고 하나는 데려가신 것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종의 율법만 율법인 줄 알고 변역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아들의 율법은 모르므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율법주의자들이라고 비방한다. 이는『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하신 말씀에서 “은혜와 진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율법임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고전 9:19~23에 나오는 율법에 대한 언급을 자세히 살펴보라. 여기서 바울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율법에 대해 그와 같이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바람은 모든 사람이 영생의 선물을 받고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는 자신의 방법을 드러낸다. 그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결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문화적 장벽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울은 그들을 구원하려는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전도할 집단의 문화에 기꺼이 적응하였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 될 자들은 모두 그분의 율법에 순종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재빠르게 자신이 비록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혁신적인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항상 하나님의 법의 요구 아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고 하나님의 법을 양보하도록 허용할 수는 없다. 그는 최상위 법과 충돌되지 않는다면 문화적인 법에 적응하였다. 그의 방식을 지배하는 원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이었다(고전 9:21).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선택 받은 소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에 기초한 방법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율법을 하나님의 법의 대안으로 삼을 의도가 없었다. 그 둘은 조화롭게 작용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을 사랑의 하나님의 법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잃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감내할 모든 내용을 설명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율법”에 계시된 자기희생적인 사랑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예이다.

교훈 : 그리스도의 율법에 나타난 사랑은 잃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와 사회에 맞는 방법을 따르는 동시에 하나님의 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부가적용)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양심에 비추어 죽어가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랑의 종이 되라고 권면한다. 사랑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하다. 교회 내에서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절제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혹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 음식들이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라고 밝히면 그것을 먹을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게 한 자와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린도전서 10장 29절)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절제가 필요하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같이, 율법 없는 자는 율법 없는 자같이,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들 같이 된다는 말은 사랑에 근거한 자유함의 절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방식, 자신의 스타일도 포기하고 이웃을 섬기겠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하겠다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으로 보내신 방식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같은 인간의 모습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처럼, 우리가 가진 신앙적 지식의 허울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우리의 이웃을 얻기 위한 낮아짐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리켜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절제요 희생이며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정신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은 율법을 모르는 자들을 위해 율법이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무법한 자처럼 비도덕적으로 행동했다는 뜻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문화의 틀을 벗고 이방인들에게 친근하게 접근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바울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을 떠나 인간의 모습으로 사셨던 예수님의 모본을 따랐다는 증거이며 진실로 그리스도의 율법이 가르치는 정신을 실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훌륭한 예입니다.

| 적용 |
구원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해 그대는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방법을 달리한 바울 - “이와 같이 바울은 때와 경우에 따라 일하는 방법과 기별 전하는 법을 달리하였다. 바울은 인내하여 일한 결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진리를 받지 아니한 자도 많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어떠한 방법으로 진리를 소개하든지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들은 가장 좋은 방법을 연구하여 반감이나 논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복음교역자, 118).

기 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하신 우리 주님, 저도 그와 같이 진정한 사랑의 모본을 따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나를 부인하고 기꺼이 생명을 줄 수 있도록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함(갈 6:2)
5월 21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교사강해 4)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이 사랑의 법은 “서로의 짐을 지”(갈 6:2)라는 것이다. 로마서 13:8-10에서 바울은 보다 명시적으로 십계명 중 5, 6, 7, 8 계명을 반복하고 그 계명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 사람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 법은 물론 “성령의 법”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그의 사랑의 계명이다(요 13:34). 그것은 율법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그의 창조적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의 원칙이다. 여기의 ‘法’(Law)이라는 낱말에는 풍자적인 뜻이 있다. 즉 이전에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짐을 졌으나 이제는 그 짐을 벗고 그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라는 짐을 지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을 가장 극명하게 대조시킨 대목이다. 노모스(Law, 율법)는 바울과 그의 대적자들이 아주 직접적 관심을 가지는 유대인의 토라(Torah)이다. “서로 남의 무거운 짐을 져줍시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룰 것입니다”(갈 6:2). 서로 사랑하라는 사도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사랑 실천의 구절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내 몸을 불 속에 던져서 비록 남을 도와주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다만 어떤 의무감에 의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서에 또는 천연계에 계시된 하나님의 법은 이해력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공개한다(롬 1:20, 2:12~16).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의 기본적인 요구를 몰랐다고 주장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롬 3:23)했고 그 결과 멸망할 운명에 처했다(롬 6:23, 겔 18:4). 그러나 모두가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부활을 통해 저주가 영생의 선물로 바뀌었다(엡 2:8).
비록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마땅히 할 만큼 순종하며 신실하게 살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에 따르면 은혜는 신자로 하여금 순종의 생애를 살도록 힘을 준다(롬 6:15, 엡 2:10, 딛 2:11~14).
갈 6:1~5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법”을 나타내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누구나 연약한 순간에 유혹에 빠져 죄에 굴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타락한 동료 신자를 곧바로 정죄한다는 것은 몰인정한 처사이다. 예수님은 비록 죄를 지은 적이 없지만 죄에 빠진 자들을 기꺼이 돕고자 하셨다. 엘렌 G. 화잇은 예수님이 “인간의 약점을 비난하지 않으셨다”(시대의 소망, 353)고 기록하였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회복의 목적을 위해 도움을 주라고 권면하였다(갈 6:1). 다시 말해 죄를 지은 자는 다시 하나님의 율법의 교훈을 따르도록 격려를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자비에 따라 움직인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생이 가능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연약한 순간 이후에 다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신실한 자들에게 보상이 주어진다. 동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법을 하나의 운반 수단으로 사용해서 회개한 죄인들이 사랑의 법 영역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야 한다.

교훈 :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비의 법에 따라 범죄한 신자가 다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부가적용)
건강한 인간, 건강한 사회, 건강한 교회는 서로 짐을 진다.  어느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짐을 지게 하지 않는다.  부부사이도 그렇다. 남편이나 아내 혼자 짐을 지게 하면 안 된다.  이런 가정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부모와 자녀 사이도 그렇고, 모든 대인관계도 그렇고, 기관과 기관 사이-국가와 국가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한편의 희생만을 요구하지 않고 서로 짐을 질 수 있어야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서로 짐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법은,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일컫는다. 요한복음13:34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이야말로 모든 법을 완성하는 것이고, 우리 주님이 친히 이 법을 완성하셨다. 우리 주님이 어떻게 사랑하심으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는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서로 짐을 지되, 먼저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권면한다. 이 정신이 중요하다. 서로 짐을 지는데 있어서 기본정신이 바로 이것이다. 서로 짐을 지되, 먼저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한다. 짐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무거워 질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자기가 질 수 있는 짐마저 지지 않는다면 그 정신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기가 질 수 있는 짐을 지지 않는 자는 게으르고 태만한 자이다. 사도 바울은 짐을 서로 지라고 말한다. 이것도 현실 교회에서 너무도 소중한 말씀이다. 갈 6:2절이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 6:5절에도 짐이라는 말이 나오는 짐이라는 말은 갈라디아서 6장 2절과 5절에 나온다. 2절의 짐은 원어로 <바레>이다. 큰 짐이다. 5절의 짐은 <프홀티온>이라 해서 작은 짐이다. 2절의 짐은 서로 나누어 져야 감당이 되는 짐이다.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반드시 져야 하는 절대량의 짐이 있다. 그래야 교회가 유지된다. 그러므로 이 짐은 모든 교인이 조금씩 나누어 져야 한다. 이게 2절의 <바레> 곧 큰 짐이다. 어떤 사람은 지고, 어떤 사람은 안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 성원임을 자처하면서도 짐을 안지는 것이다. 지는 사람만 무겁고 벅차게 질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안지면 지는 사람의 부담이 그만큼 커지는 것다. 절대치의 짐 <바레>를 남이 지겠지 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각자가 지는 짐은 자기 선에서 책임을 지라는 겁니다. 이게 5절의 <포르티온>이다. 이것도 팽개치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신자들과 짐을 서로 지는 관계 속에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서로를 잡아주고 끌어주는 신자들의 관계를 봅니다. 그들은 유혹을 받아 넘어지더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서로 손을 내밀어 줍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죄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태도야말로 그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적용 |
지금 그대가 영적인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 -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교제 안에서 연합한 자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공의롭게 행동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고, 긍휼을 사랑하기로 스스로 서약할 때, 큰 축복이 그들에게 임한다. 만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했다면 그들은 회개와 고백과 손해 배상의 일을 계속하고, 피차간에 선을 행하는 위치에 완전히 서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교회증언 7권, 262).

기 도
아버지, 하늘 본향으로 가는 이 길이 외롭지 않도록 믿음의 형제와 자매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질 때, 함께 돕고 붙잡아 주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많이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섯째날(목) 율법과 심판(요 5:30)
5월 22일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교사강해 5)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이 하실 것인데 그 기준이 당신의 말씀이고 그 말씀을 예수께서 대언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는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의 권위대로 심판하시는 말씀이 된다. 물론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러 오셨다. ‘...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결국 마지막 때 심판의 말씀이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목사가 설교를 하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전도를 했을 때 그 말씀을 듣지 않으면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므로 마지막 날 그 말씀이 심판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비록 자비의 법이라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것을 심판의 표준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그분에게 충성을 다짐할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하셨다. 그러나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 22:11)는 음성이 울려 퍼질 때가 오고 있다. 이 선언은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전조이다.
여러 성경절이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 말하는 반면(예를 들면 행 17:31, 딤후 4:1, 고후 5:10), 계 14:7에서는 첫째 천사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요 5:30은 심판의 기간 동안 예수님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비록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을 때 자신의 신성을 내려 놓으셨지만(빌 2:5~11),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셨다. 종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신성모독죄로 고소했을 때, 그분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특별한 사명을 행할 권위를 주셨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심판이라는 사실을 공표하셨다(요 5:19~30).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책임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낸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와 같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은 공정하게 심판하실 수 있다. 인간의 경험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분은 아무도 부당하게 정죄하시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정죄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하나님의
명령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할 때 자신을 정죄할 뿐이라고 말씀하신다(요 12:48).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이 어떤 내용인지는 익숙한 반면 어떻게 지켜야 할지는 잘 모른다.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점검 목록이 아니라 다양한 사랑의 원칙을 설명하는 수단이다.

교훈 : 하나님의 율법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행위가 아닌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나눈 사랑의 정도를 측정하는 심판의 표준이 될 것이다.

부가적용)
예수님의 심판이 의로운 것은 아버지께서 다 맡기신 심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심판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심판이 의로웠던 것은 나의 원함을 빼고 아버지의 원대로 심판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육체로 계시는 동안 육체의 원함이 전혀 없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예수님에게도 육체의 원함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육체의 원함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였다. 죄가 없으신 분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죄를 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분이셨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원함의 비밀 때문이다. 예수님은 원함조차 자신의 원함을 내세우지 아니하였다. 오직 아버지의 원대로만 하였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당신이 무슨 일을 행하시든지 그 일이 다 의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처럼 의롭다 함을 받는 자 되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예수님이 행하셨던 그대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의 심판은 분명 의로운 심판이다. 예수님처럼 무엇을 판단할지라도 분명 의로운 판단이 되려면 나의 원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부터 깨달아야 한다. 나의 원함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의로움은 상실될 수밖에 없다. 나의 원함이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의 원함만이 들어가야만 아주 작은 일을 판단할지라도 그 판단조차 의로울 수 있다. 예수님은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까지 하셨는데 예수님을 좇는 제자라는 자들조차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자들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것을 나타내지도 않으셨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도 능히 마귀를 물리칠 지혜를 가지셨지만 자신의 지혜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셨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예수님이 전능하셨던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결정을 듣고 그대로 결정하셨다. 할 수 없는 자가 되면 듣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된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듣는 자는 가장 위대한 자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게 얼마나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율법을 지키라는 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면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을 초청한다. 심판의 표준이 되는 율법은 각자가 하나님과 인류에게 나눈 사랑의 정도를 측정하는 역할을 한다. 최후의 심판을 베푸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의 율법을 심판의 표준으로 사용하실 것이다(약 2:12).

| 적용 |
그대가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할 대상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심판의 표준인 율법 - “신의 성품을 나눠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의의 표준 곧 그분의 거룩한 율법에 일치하게 될 것이다. 율법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헤아릴 때 사용하는 표준이다. 이것이 심판 때에 사람의 품성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실물교훈, 314).

기 도
아버지, 이 마지막 때에 사랑의 정신으로 충만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고 이웃을 위해 이타적으로 봉사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 대열 가운데 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5월 23일

<교회증언 7권>, 260~264 “교회의 징계”, 265~266 “서로를 존중하라”를 읽어 보라.

“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1~2). 여기에 다시 우리의 의무가 우리 앞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영감으로 주어진 이 명령을 어떻게 그처럼 경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조금밖에 모르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도 별로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가 피차간에 나타내야 할 그 귀중한 동정을 그처럼 조금밖에 간직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이 연약하고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실수하는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형제가 방심한 결과 유혹에 넘어져 그의 평소의 처신과는 달리 어떤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럴 때 그에게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위대하고 선한 사업을 이루어 오신 사람들이 중한 죄를 지은 것을 성경에서 알게 된다.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견책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신 적도 없고, 그분께서 당신의 종들을 버리지도 않으셨다. 그들이 회개했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을 자비롭게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시고,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셨다. 가련하고 연약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그들의 형제들로부터 받아야 할 동정과 인내의 필요가 얼마나 절실한지 생각해 보도록 하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는지 조심하도록 하라”(치료봉사, 21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성경의 인물 가운데 죄에 빠졌지만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계속 사용하셨던 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러한 예에서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➋ 죄를 범한 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교회의 징계를 집행하는 동시에 은혜와 자비를 보일 수 있을까요? 왜 우리는 징계와 은혜를 서로 반대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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