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그리스도와 율법의 마침(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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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05-14 11:40 조회4,938회 댓글0건본문
제7과 그리스도와 율법의 마침
5월 17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6분
기억절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도입)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라는 말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다. 이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구원파에 속한 지도자들의 신학적 주장에 다양성이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구원파에 속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 단번에 거듭나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에 대해 슬퍼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 성화 과정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끊임없이 감당해야 할 잔존하는 죄에 대한 회개와 자백, 그리고 죄와의 영적 싸움의 필요성을 거부한다. 이런 주장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고, 선행의 무용성, 무의미성, 무가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발견된다. 이런 구원파적 방종주의의 다른 복음이 많은 한국 개신교회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삶의 표준을 약화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고, 세월호와 같은 참사를 일으킨 한 원인이 기도 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우리 선교의 안방에 들어와 있는 이 같은 방종주의를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복음 진리를 바르게 회복하였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순수한 은혜의 복음은 뒤틀림과 왜곡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 무용주의의 등장이다. 여기서 율법폐기론이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과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율법은 이제 완전 폐기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삶에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율법폐기론은 윤리적 방종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윤리적 방종주의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율법의 정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어떻게 살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오늘의 주제를 통해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분의 속죄사역과 율법을 어떻게 지켜 행하여야 할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연구 범위 : 롬 5:12~21, 롬 6:15~23, 롬 7:13~25, 롬 9:30~10:4, 갈 3:19~24.
한 유명 잡지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전면 광고가 실린 적이 있다. ‘불멸을 얻으십시오! (농담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농담 같은 그 광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영원히 당신의 이름으로 유산을 남길 방법을 찾는다면 우리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안내 책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수천 년 동안 저술가, 학자, 철학자, 신학자들은 죽음의 문제와 그것이 우리의 삶에 주는 의미에 대해 씨름했다. 그래서 위의 광고는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어떻게 다룰지 돕는 영리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정말 불멸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불멸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은혜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결과로 실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주에 계속해서 율법과 은혜에 대하여 연구하려고 한다.
*안교·선교부 홈페이지에 다양한 교과 토의 자료가 있습니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이해한다.
➋ 느끼기 :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➌ 행하기 :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경건하고 신실한 삶을 추구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어려서는 말썽을 많이 일으켰지만 커서는 효자 효녀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❷ 롬 7:24~25에서 자신에 대하여 탄식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어떤 상태라고 생각합니까?
❸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를 위한 복음이 되셨습니까?
❹ 어떻게 하면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결과로 율법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B. ❶ 어떤 경우에 엄격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❷ 율법이 어떻게 엄격한 초등교사 또는 보호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❸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 즉 목적이 되신다는 말은 어떤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고,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결론 :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은혜와 상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결과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오늘 저녁 또는 내일 있을 친교 모임을 최종 점검합니다.
❷ 이번 모임에서 구도자들에게 어떤 감화를 주어야 할지 이야기합니다.
❸ 친교 모임과 오후 활동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죄가 더한 곳에(롬 5:12~21)
5월 11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교사강해 1)
율법폐기론적인 방종주의와 더불어 선행 무용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선행 무용주의란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결코 아니다’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아주 극단적으로 밀고 가서,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선행은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선행 무용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구원인데, 그 구원을 오직 믿음과 은혜로 받았다면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내가 고민할 이유가 무엇이며, 또 이미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인데 왜 내가 선행에 대해 고민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가?”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된다. 선행이 구원을 받는 데 아무런 유익도, 가치도, 의미도 없다면, 구원받은 이후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도 당연히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모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 무용주의는 결코 성경이 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은혜의 왜곡이요 복음의 타락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 무용주의는 성경과 복음에 대한 깊은 무지와 터무니없는 오해에서 나온, 심각한 오류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율법은 죄를 지적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무력함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신 예수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롬 5:12~2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 말씀 속에서 죄와 죽음 사이의 굳은 결속을 주목하라. 그것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에는 죽음이 따르기 때문이다.
롬 5:20을 읽어 보라. 율법이 들어오자, 율법이 죄가 무엇인지 정의한다는 의미에서 범죄가 늘었다. 그런데 죄의 자연스런 결과인 죽음 대신에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아무리 나쁜 죄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은혜는 죄를 해결하기에 넉넉하다.
“죄는 불법”이라는 요일 3:4의 말씀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이 죄를 십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좀 더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죄는 ‘무법적인 것’(anomia)이다.”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원칙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죄이다.
그래서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에 아직 십계명이 계시되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고(창 2:17), 결과적으로 죄를 범하였다. 죽음의 저주가 인류의 모든 세대에 영향을 미쳤던 이유는 아담의 죄 때문이었다(롬 5:12, 17, 21).
하나님의 법에 대한 아담의 불충성과는 달리 예수님의 충성은 영생의 소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예수님도 비록 유혹을 받았지만, 결코 죄에 굴복하지는 않으셨다(히 4:15).
교훈 : 율법이 있음으로 더 많은 죄가 밝혀지지만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여 이룬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는 그만큼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린다.
부가적용)
바울은 로마서 4장과 5장에서도 이신칭의의 복음을 역설하고, 이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혜택들을 논의한다. 그리고는 5장 마지막 부분을 아래와 같은 말로 결론짓는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여기서 바울은 율법이 범죄를 더하게 한다고 선포한다. 율법의 본질적 의미는 어떻게 살면 죄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기능이다. 법이 없다면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며 죄로 정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은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 기능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범죄를 더 하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더 많은 죄를 짓게 되는데 범죄의 유형이 더 다양해지고 더 복잡해지고 더 넓어지게 되어 율법의 조문은 늘어나 더욱 다양한 죄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결국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역할에 충실하여야 하기 때문에 늘어난 율법은 더 많은 범죄로 넘쳐나게 되었다. 그러나 은혜가 넘쳤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를 인간은 잘 모른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율법을 통해 죄인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지 그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므로 인간은 마음에 숨겨진 죄까지 깨닫기 시작한다. 지금 자신들이 저지른 죄들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지를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보게 하신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바울은 증거한다. 이는 무슨 말인가? 이는 죄를 더 많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죄를 거저 값없이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느끼는 경험으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넘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님의 의로운 순종을 찬미한다(롬 5:18~21). 예수님의 순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죽음의 저주를 깨셨다. 그분의 의는 이제 신자들의 의가 될 수 있다. 첫째 아담의 죄를 물려받음으로 죽음의 저주 아래 있던 자는 이제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임으로 생명의 선물을 품을 수 있다.
| 적용 |
그대가 받은 은혜에 반응하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두 아담 - “아담은 창조될 때에 지구를 통치할 지위에 세워졌으나, 유혹에 굴복함으로 그는 사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사람이 사탄의 포로가 되었을 때 그가 가졌던 통치권은 그의 정복자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희생으로 죄의 형벌의 값을 치르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구속하실 뿐 아니라 사람이 잃었던 통치권도 되찾으실 것이었다. 첫째 아담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둘째 아담이 회복하실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67).
기 도
아버지, 세월이 흐를수록 제가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여길 줄 몰랐던 과거를 용서해 주옵소서. 남은 세월 넘치는 은혜를 나눠주며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율법과 은혜(롬 6:15~23)
5월 12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교사강해 2)
문제는 위대한 복음 진리를 오해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 왔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에 더욱 거하자. 우리가 죄에 더 거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아질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게 된다. 아주 전형적인 방종주의적·선행무용론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반박한다. 그렇다.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 원리적으로 죄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은 새로운 피조물은 결코 죄 가운데 더 살 수 없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을 위해서 율법의 역할이 계속된다는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신자가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의 능력을 받아들임으로 의로움을 얻었다면, 계속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다시 한번 핵심을 강조할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율법으로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정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속도를 위반한 자가 면죄되었다고 해서 계속 속도를 위반할 수 없는 것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하는 우리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롬 6:12, 15~23에 따르면 은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특별히 롬 6:12, 15, 17을 참고하라.
은혜와 율법은 반대말이 아니다. 이 말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은혜가 반대하는 것은 죽음이지 율법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그것을 범함으로 기인하는 영원한 죽음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약속 받은 은혜의 선물을 죄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하지 말도록 경고한다(롬 6:12, 15). 죄는 율법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할 때, 그는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율법을 지키고 계명에 순종하도록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율법을 높였다. 그는 율법에는 사람들을 불순종의 형벌에서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행악자들은 저희 죄를 회개하고, 그분의 율법을 범함으로 그분의 공의로우신 분노를 일으킨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해야 하며 또한 죄 사함을 받는 유일의 방법인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행사하여야 한다”(사도행적, 393).
교훈 : 은혜와 율법은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율법은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가르치며,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부가적용)
우리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여기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결국 선한 일, 선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3:8]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목적이, 바로 새 생명 가운데 선한 일과 선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임을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롬 6장 12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무용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논박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은혜를 입은 그대는 율법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얼마나 느낍니까?
우리는 분명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려는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고 거룩함의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7, 22)
| 적용 |
그대가 더욱 순종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율법이나 계명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은혜로 순종할 수 있는 율법 - “돌판에 새겨진 같은 율법이 성령에 의하여 마음판에 기록된다.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려 하는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로서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수 있다”(부조와 선지자, 372).
기 도
아버지, 아무 공로 없는 저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할 능력조차 없어 단지 순종하고픈 저의 마음을 드리오니 받아주시고 저도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셋째날(화) 곤고한 사람(롬 7:21~25)
5월 13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교사강해 3)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며 절규하고 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같은 절규를 하고 있다. 우리도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는 죄를 여전히 짓고 있다. 그런데 본문 25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한다. 금방은 절규하던 바울이 뜬금없이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한다. 롬 7:25절 이하를 보아도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런데도 감사한다고 한. 8장 1-2절이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를 믿은 후에도 위대한 사도가 된 후에도 죄 때문에 절망하던 바울이 갑자기 여기에서 무릎을 치며 감사한 것은 바로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결코’ 라는 말은 ‘절대’(absolute)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임재는 살려주시는 영이 함께 하시는 경험이다.(고전 15:45)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인치신 백성들이다. 이 말은 피뢰침 아래에 있으면 살인자도 벼락을 맞지 않지만, 피뢰침 없는 곳에 있으면 성자도 벼락을 맞을 수밖에 없다. 내가 십자가 아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벼락을 맞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이어서 죽음의 그림자가 지나간 것이 아니다. 그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었기에 그 집을 넘어간 것이다. 만약 유대인이 어린 양의 피를 칠하지 않았다면 그도 죽었을 것이다. 만일 애굽 사람이 어린 양의 피를 칠했다면 그 사람은 살았다. 그 사람이 누군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이다. 십자가가 중요하다. 주님의 보혈이 중요하다. 여전히 죄는 짓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그 죄 값을 절대 묻지 않으신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보혈로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고 우리를 대속 하셨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게는 하나님이 죄 값을 묻지 않으신다. 주님이 이미 우리의 죄 값을 갚아 주셨기 때문이다.
롬 7:13~25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울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는 회심한 사람들의 경험인가? 그대는 자신의 대답에 어떤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이 말씀이 언급하는 대상이 누군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은 그대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신학자들도 이 문제로 씨름해 왔다.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 그래서 비신자일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데 죄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이길 힘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성경주석은 양측의 주장을 살펴본 후에 “이 구절에서 바울의 주요 목적은 구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죄에 대항하여 벌이는 진지한 투쟁을 위해 깨어 있는 사람과 율법 그리고 복음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의 기별은 비록 율법이 그러한 투쟁을 촉발시키고 격렬하게 만들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승리와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성경주석 11권, 667).
이 말씀을 어떻게 보든지 우리는 죄와 씨름하는 이 사람이 여전히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바울의 모든 약속은 무의미하게 된다. 마태복음 5장에서 드러났듯이 죄는 종종 행위가 일어나기 이전에 시작된다. 사람은 죄와 관련된 것을 생각만 해도 율법을 어기게 된다. 실제로 이런 사실은 고뇌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교훈 : 구원의 과정에서 율법을 통해 심각한 영적 투쟁에 빠진 사람은 속절없는 자신의 상황을 탄식할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를 버리고 그분을 고의적으로 떠나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스스로가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연약성 때문에 죄에 떨어지는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죄에 떨어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고의로 주님 앞에 우리가 죄를 짓고 죄의 길로 나아가 주님을 떠나지 않는 한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께 나아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야 한다. 주님의 영향력이 우리의 삶에서 멀어지면 언제나 죄의 먹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우리의 보호자이신 그리스도의 구원을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날마다 적용하여 우리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여전히 유효한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지금 어떤 종류의 죄 때문에 내적으로 투쟁하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러나 로마서 7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 사람은 곤경에 빠져있으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율법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저주로부터 해방된다는 사실을 꾸준히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롬 7:24~8:2).
| 적용 |
그대가 죄와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영적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어린양을 보라 - “그는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순결과 의로 갈망하여 부르짖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하였다. 이러한 부르짖음은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죄의 짐에 눌린 자들의 마음에서 발하는 부르짖음이다. 이런 모든 부르짖음에 대한 대답은 다만 하나뿐이니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 함이다”(정로의 계단, 19).
기 도
아버지, 연약한 제 육신에서 싸움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가 이겼음을 믿고 의지합니다. 죄가 저를 지배할 권한이 없음을 주장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제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라고 간구합니다.
넷째날(수) 율법의 마침(롬 9:30~10:4)
5월 14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교사강해 4)
예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를 의롭다 인정해 주시려고 율법의 끝마침이 되셨다 그 뜻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고 종결되었다 그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 장 7 절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는 뜻은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 말씀이다. 율법의 골자가 무엇인가? 마가복음 12 장 29 절에서 31 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하여 특히 십자가를 통하여 율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말씀을 이루셨다. 보통 사람들은 율법을 이룰 수 없고 성취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인해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의 공로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로마서 5 장 1 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번 과 교과의 제목은 롬 10:4에서 왔다. “그리스도는…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진 많은 사람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쓸모없게 만드셨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율법의 지속적인 타당성을 논의하는 로마서와 다른 신약 저서의 내용과 어긋난다.
롬 9:30~10:4을 읽어 보라. 여기서 구원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바울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여타 로마서의 기별과 마찬가지로 이 말씀에서 바울의 목적은 참된 의의 기원을 드러내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지목하는 역할을 하지만 사람을 의롭게 할 능력은 없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의 역설을 소개한다. 의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이방 민족들은 그것을 얻은 반면, 의로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이스라엘 백성은 의를 얻지 못했다. 바울은 의에서 유대인을 배제시키려는 것도 모든 비유대인의 의로움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율법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죄인에게 의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많은 유대인이 진실하게 의를 갈망했지만 그들의 탐색은 소용이 없었다(롬 10:2).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지만 그들 방식대로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목표로 삼았지만 그것을 구원의 근원되시는 분과 혼돈하였다. 율법은 선하지만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죄악을 밝히고 의에 대한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그것이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이라고 설명한 이유이다. 그분은 율법을 끝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의 ‘목적’이라는 의미에서 ‘마침’이시다.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면 회개한 죄인은 구원을 위해 그분을 주목한다. 율법은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롬 10:4).
교훈 : 그리스도는 율법을 끝내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사람들이 율법을 통해 발견해야 할 목적이 되신다.
부가적용)
율법의 기능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밝히는 기능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셨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범하지 않은 철저히 무죄하신 분이심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 율법은 여전히 정죄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함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인데 무죄하신 분의 피를 나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속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우리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율법이 마친바 되었다고 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마쳤다고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그분은 율법에 비추어 무죄하신 분이시다. 이 율법으로도 예수님을 정죄하지 못했다. 그런 그분이 이제는 당신을 믿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에게 이제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데 이는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율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셔서 우리는 언제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를 죽일 수 있는 기능인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하는가? 아니다. 이 율법 때문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 때문에 이 율법을 더 높이고 이 율법이 가진 더 높고 깊고 넓은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율법의 정죄의 기능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사라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의 대속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마음대로 도덕적인 타락을 하면서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율법의 수여자이신 그분이 주신 율법을 해석하신 뜻을 따라 산상수훈에 나타난 교훈을 따라 더 높은 뜻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가 받은 율법의 정죄를 십자가로 해결하셨다. 율법은 우리를 더 이상 정죄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 율법을 폐할 수 있느냐? 아니다. 이 율법을 주시고 수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라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기에 우리는 그분의 뜻을 행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도리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얼마나 예수님을 닮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자 하는 의의 목적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의의 목적 역시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으로는 그 목적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의로움을 얻을 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분의 의가 우리의 삶 속에 실현되기를 여전히 갈망합니다. 그분은 영원히 우리의 목적이 되십니다.
| 적용 |
그대는 특별히 어떤 면에서 예수님처럼 되기를 바랍니까?
영감의 교훈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우리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는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히시므로 우리들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며 의인들처럼 취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로서 바라보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4).
기 도
주님, 제 안에 계셔 주옵소서. 제 자아는 죽고 오직 예수님의 품성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로 저를 덮으시고, 거룩하고 순결하신 주님 닮게 해 주옵소서.
다섯째날(목) 엄격한 교사(갈 3:19~24)
5월 15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교사강해 1)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죄를 짓는 사람에게 어떤 형벌이 가하여 지게 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율법은 죄를 범한 죄인이 이 율법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정죄와 더불어 인간이 이 죄값을 받아야 한다는 절망을 보여준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선언한다. 어떤 누가 하나님의 율법의 표준에 맞게 그 뜻을 이루며 살 수 있을까? 죄인은 모두가 한 가지로 절망할 수밖에 없고, 이 절망감 속에 빠진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라고 탄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하시고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율법의 정죄로 살 수 없는 자를 살게 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비추어준다. 율법은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과 저의 죄를 보여주며 우리가 살 길이 없다고 정죄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분은 죽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모든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죄없이 달리셨다. 그분은 무죄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그분이 죽으셨다. 율법이 무죄하신 분을 정죄하여 죽였으므로 이 무죄한 결과로 인간의 대속물이 될 수 있으셨다. 죄인을 정죄할 수 있는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는 길은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누군가 대신 죽어야 내가 살 수 있다. 바로 율법의 정죄가 이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분과 하나 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율법의 정죄로부터 죄가 없는 인간이 된다. 죄와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무죄하신 분이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마음을 받아 들이는 자들에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그분이 옮겨주셨기 때문이다. 율법은 정죄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석방하신다.
바울은 로마서와 보조를 맞추어 갈라디아서에서도 율법이 죄를 정의하되 사람을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잊지 않고 명시한다(갈 3:19, 21).
갈 3:23~24을 읽어 보라. 바울은 율법의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은유를 사용하는가? 그대는 그러한 은유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번역에 따라 율법은 ‘초등교사’, ‘작업 감독’, ‘가정교사’, ‘관리인’ 등 여러 명칭으로 비유된다. 그리스 원어는 부자의 아들을 훈육하기 위해 고용된 종을 가리킨다.
아들의 수양은 가정교사의 책임이었다.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가정교사는 주인의 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필요하면 어떤 일이든 행할 권한이 있었으며 심지어 체벌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어른이 되면, 가정교사는 더 이상 그를 지도할 권한이 없었다.
가정교사의 역할에 대한 설명에 비추어 볼 때, 그대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율법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비록 가정교사는 성인이 된 아들을 더 이상 지도할 권한이 없지만 아들이 그동안 배운 교훈들을 통해 그가 성숙한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성숙에 도달한 사람처럼 더 이상 정죄하는 율법의 권능 아래에 있지 않지만,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율법의 원칙에 맞게 자기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율법은 또한 가정교사로서 “믿음이 오기 전에” 신자를 지켜주는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갈 3:23).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과 목적이 되심을 보게 된다.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이점을 명확히 한다(24절).
교훈 : 율법은 엄격한 원칙을 제시하며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까지 지켜 주는 초등교사와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부가적용)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제 나를 정죄하던 그 율법이 나를 더 이상 정죄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무죄하신 분이 나를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아니다. 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때에 이미 제정하신 것이며 그분께서 친히 주신 법이며 하늘의 통치이념이다.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람의 정신의 최고봉인 이 법은 영원히 폐하지 않고 존속되어야 할 영원한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이 율법을 범한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고귀한 희생에 감사하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법의 정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얼마나 깊고 높고 넓고 고상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지.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고 욕하는 자마다 또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하였다고 말한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저주인 사망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분의 높은 뜻을 이해하고 더 높은 계명의 정신을 소유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엄격한 신앙을 선호한다면 초보적인 것입니까?
만약 엄격한 신앙의 의미가 ‘타율에 의한 신앙’이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차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시를 받으며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도록 강요받는 영혼은 진정으로 마음을 돌이켜 성령의 지도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이의 심령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엄격함을 요구하는 것은 영적 승리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됩니다.
| 적용 |
그대가 율법의 원칙에 맞게 자기 행동을 통제할 필요성이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께 이끄는 교사 - “죄인이 도덕을 투영(投影)시키는 큰 거울을 바라볼 때 그는 자기 품성의 결함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흠과 점이 많으며 더럽고 정죄를 받은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율법이 어떤 방법으로도 죄를 벗게 할 수도 없고 범죄자를 용서해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죄인에게는 율법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율법은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학교 교사다. 죄인은 죄를 담당하신 구세주를 바라보아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13).
기 도
아버지, 저에게 자원하는 마음과 자발적인 신앙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 가르쳐주신 원칙과 정신을 기쁨으로 순종하며 매일의 삶에 적용하기를 즐겨하는 자녀로 성장시켜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5월 16일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함으로 용서와 화평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피하게 한다.… 십계명의 율법은 금제(禁制)의 면에서보다도 자비의 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율법의 금제성(禁制性)은 순종에 따르는 행복의 확실한 보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일 때에 율법은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기쁨을 줄 품성의 순결성을 이루도록 역사할 것이다. 순종하는 이들에게 율법은 보호의 장벽이 된다. 우리는 이 율법 안에서 인간에게 의의 불변의 원칙을 나타내시고 범죄의 열매인 악에서 인간을 보호하시려고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게 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34~23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갈 3:21에 나오는 놀라운 소망에 대해 이야기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의 복음을 얼마나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율법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책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➋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경건한 삶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완전’에 이를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교리를 가진 자들은 자기 충족을 구원의 수단으로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죄 많은 인간 본성의 실상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로 기울어지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구원의 표준으로서 얼마나 바르게 행동하고 있는지 자신을 늘 돌아보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절망감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이 지니는 거룩성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경건하고 신실한 삶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덮으시는 그리스도의 의 외의 다른 것에 구원의 소망을 두는 어떤 종류의 신학에도 빠지지 않도록 얼마나 조심해야겠습니까?
5월 17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6분
기억절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도입)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라는 말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다. 이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구원파에 속한 지도자들의 신학적 주장에 다양성이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구원파에 속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 단번에 거듭나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에 대해 슬퍼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 성화 과정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끊임없이 감당해야 할 잔존하는 죄에 대한 회개와 자백, 그리고 죄와의 영적 싸움의 필요성을 거부한다. 이런 주장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고, 선행의 무용성, 무의미성, 무가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발견된다. 이런 구원파적 방종주의의 다른 복음이 많은 한국 개신교회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삶의 표준을 약화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고, 세월호와 같은 참사를 일으킨 한 원인이 기도 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우리 선교의 안방에 들어와 있는 이 같은 방종주의를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복음 진리를 바르게 회복하였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순수한 은혜의 복음은 뒤틀림과 왜곡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 무용주의의 등장이다. 여기서 율법폐기론이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과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율법은 이제 완전 폐기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삶에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율법폐기론은 윤리적 방종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윤리적 방종주의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율법의 정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어떻게 살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오늘의 주제를 통해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분의 속죄사역과 율법을 어떻게 지켜 행하여야 할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연구 범위 : 롬 5:12~21, 롬 6:15~23, 롬 7:13~25, 롬 9:30~10:4, 갈 3:19~24.
한 유명 잡지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전면 광고가 실린 적이 있다. ‘불멸을 얻으십시오! (농담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농담 같은 그 광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영원히 당신의 이름으로 유산을 남길 방법을 찾는다면 우리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안내 책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수천 년 동안 저술가, 학자, 철학자, 신학자들은 죽음의 문제와 그것이 우리의 삶에 주는 의미에 대해 씨름했다. 그래서 위의 광고는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어떻게 다룰지 돕는 영리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정말 불멸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불멸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은혜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결과로 실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주에 계속해서 율법과 은혜에 대하여 연구하려고 한다.
*안교·선교부 홈페이지에 다양한 교과 토의 자료가 있습니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이해한다.
➋ 느끼기 :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➌ 행하기 :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경건하고 신실한 삶을 추구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어려서는 말썽을 많이 일으켰지만 커서는 효자 효녀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❷ 롬 7:24~25에서 자신에 대하여 탄식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어떤 상태라고 생각합니까?
❸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를 위한 복음이 되셨습니까?
❹ 어떻게 하면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결과로 율법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B. ❶ 어떤 경우에 엄격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❷ 율법이 어떻게 엄격한 초등교사 또는 보호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❸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 즉 목적이 되신다는 말은 어떤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고,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결론 :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은혜와 상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결과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오늘 저녁 또는 내일 있을 친교 모임을 최종 점검합니다.
❷ 이번 모임에서 구도자들에게 어떤 감화를 주어야 할지 이야기합니다.
❸ 친교 모임과 오후 활동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죄가 더한 곳에(롬 5:12~21)
5월 11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교사강해 1)
율법폐기론적인 방종주의와 더불어 선행 무용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선행 무용주의란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결코 아니다’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아주 극단적으로 밀고 가서,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선행은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선행 무용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구원인데, 그 구원을 오직 믿음과 은혜로 받았다면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내가 고민할 이유가 무엇이며, 또 이미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인데 왜 내가 선행에 대해 고민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가?”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된다. 선행이 구원을 받는 데 아무런 유익도, 가치도, 의미도 없다면, 구원받은 이후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도 당연히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모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 무용주의는 결코 성경이 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은혜의 왜곡이요 복음의 타락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 무용주의는 성경과 복음에 대한 깊은 무지와 터무니없는 오해에서 나온, 심각한 오류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율법은 죄를 지적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무력함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신 예수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롬 5:12~2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 말씀 속에서 죄와 죽음 사이의 굳은 결속을 주목하라. 그것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에는 죽음이 따르기 때문이다.
롬 5:20을 읽어 보라. 율법이 들어오자, 율법이 죄가 무엇인지 정의한다는 의미에서 범죄가 늘었다. 그런데 죄의 자연스런 결과인 죽음 대신에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아무리 나쁜 죄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은혜는 죄를 해결하기에 넉넉하다.
“죄는 불법”이라는 요일 3:4의 말씀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이 죄를 십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좀 더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죄는 ‘무법적인 것’(anomia)이다.”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원칙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죄이다.
그래서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에 아직 십계명이 계시되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고(창 2:17), 결과적으로 죄를 범하였다. 죽음의 저주가 인류의 모든 세대에 영향을 미쳤던 이유는 아담의 죄 때문이었다(롬 5:12, 17, 21).
하나님의 법에 대한 아담의 불충성과는 달리 예수님의 충성은 영생의 소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예수님도 비록 유혹을 받았지만, 결코 죄에 굴복하지는 않으셨다(히 4:15).
교훈 : 율법이 있음으로 더 많은 죄가 밝혀지지만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여 이룬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는 그만큼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린다.
부가적용)
바울은 로마서 4장과 5장에서도 이신칭의의 복음을 역설하고, 이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혜택들을 논의한다. 그리고는 5장 마지막 부분을 아래와 같은 말로 결론짓는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여기서 바울은 율법이 범죄를 더하게 한다고 선포한다. 율법의 본질적 의미는 어떻게 살면 죄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기능이다. 법이 없다면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며 죄로 정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은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 기능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범죄를 더 하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더 많은 죄를 짓게 되는데 범죄의 유형이 더 다양해지고 더 복잡해지고 더 넓어지게 되어 율법의 조문은 늘어나 더욱 다양한 죄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결국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역할에 충실하여야 하기 때문에 늘어난 율법은 더 많은 범죄로 넘쳐나게 되었다. 그러나 은혜가 넘쳤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를 인간은 잘 모른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율법을 통해 죄인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지 그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므로 인간은 마음에 숨겨진 죄까지 깨닫기 시작한다. 지금 자신들이 저지른 죄들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지를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보게 하신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바울은 증거한다. 이는 무슨 말인가? 이는 죄를 더 많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죄를 거저 값없이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느끼는 경험으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넘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님의 의로운 순종을 찬미한다(롬 5:18~21). 예수님의 순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죽음의 저주를 깨셨다. 그분의 의는 이제 신자들의 의가 될 수 있다. 첫째 아담의 죄를 물려받음으로 죽음의 저주 아래 있던 자는 이제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임으로 생명의 선물을 품을 수 있다.
| 적용 |
그대가 받은 은혜에 반응하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두 아담 - “아담은 창조될 때에 지구를 통치할 지위에 세워졌으나, 유혹에 굴복함으로 그는 사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사람이 사탄의 포로가 되었을 때 그가 가졌던 통치권은 그의 정복자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희생으로 죄의 형벌의 값을 치르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구속하실 뿐 아니라 사람이 잃었던 통치권도 되찾으실 것이었다. 첫째 아담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둘째 아담이 회복하실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67).
기 도
아버지, 세월이 흐를수록 제가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여길 줄 몰랐던 과거를 용서해 주옵소서. 남은 세월 넘치는 은혜를 나눠주며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율법과 은혜(롬 6:15~23)
5월 12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교사강해 2)
문제는 위대한 복음 진리를 오해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 왔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에 더욱 거하자. 우리가 죄에 더 거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아질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게 된다. 아주 전형적인 방종주의적·선행무용론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반박한다. 그렇다.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 원리적으로 죄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은 새로운 피조물은 결코 죄 가운데 더 살 수 없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을 위해서 율법의 역할이 계속된다는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신자가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의 능력을 받아들임으로 의로움을 얻었다면, 계속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다시 한번 핵심을 강조할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율법으로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정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속도를 위반한 자가 면죄되었다고 해서 계속 속도를 위반할 수 없는 것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하는 우리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롬 6:12, 15~23에 따르면 은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특별히 롬 6:12, 15, 17을 참고하라.
은혜와 율법은 반대말이 아니다. 이 말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은혜가 반대하는 것은 죽음이지 율법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그것을 범함으로 기인하는 영원한 죽음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약속 받은 은혜의 선물을 죄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하지 말도록 경고한다(롬 6:12, 15). 죄는 율법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할 때, 그는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율법을 지키고 계명에 순종하도록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율법을 높였다. 그는 율법에는 사람들을 불순종의 형벌에서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행악자들은 저희 죄를 회개하고, 그분의 율법을 범함으로 그분의 공의로우신 분노를 일으킨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해야 하며 또한 죄 사함을 받는 유일의 방법인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행사하여야 한다”(사도행적, 393).
교훈 : 은혜와 율법은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율법은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가르치며,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부가적용)
우리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여기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결국 선한 일, 선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3:8]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목적이, 바로 새 생명 가운데 선한 일과 선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임을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롬 6장 12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무용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논박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은혜를 입은 그대는 율법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얼마나 느낍니까?
우리는 분명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려는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고 거룩함의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7, 22)
| 적용 |
그대가 더욱 순종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율법이나 계명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은혜로 순종할 수 있는 율법 - “돌판에 새겨진 같은 율법이 성령에 의하여 마음판에 기록된다.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려 하는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로서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수 있다”(부조와 선지자, 372).
기 도
아버지, 아무 공로 없는 저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할 능력조차 없어 단지 순종하고픈 저의 마음을 드리오니 받아주시고 저도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셋째날(화) 곤고한 사람(롬 7:21~25)
5월 13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교사강해 3)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며 절규하고 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같은 절규를 하고 있다. 우리도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는 죄를 여전히 짓고 있다. 그런데 본문 25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한다. 금방은 절규하던 바울이 뜬금없이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한다. 롬 7:25절 이하를 보아도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런데도 감사한다고 한. 8장 1-2절이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를 믿은 후에도 위대한 사도가 된 후에도 죄 때문에 절망하던 바울이 갑자기 여기에서 무릎을 치며 감사한 것은 바로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결코’ 라는 말은 ‘절대’(absolute)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임재는 살려주시는 영이 함께 하시는 경험이다.(고전 15:45)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인치신 백성들이다. 이 말은 피뢰침 아래에 있으면 살인자도 벼락을 맞지 않지만, 피뢰침 없는 곳에 있으면 성자도 벼락을 맞을 수밖에 없다. 내가 십자가 아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벼락을 맞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이어서 죽음의 그림자가 지나간 것이 아니다. 그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었기에 그 집을 넘어간 것이다. 만약 유대인이 어린 양의 피를 칠하지 않았다면 그도 죽었을 것이다. 만일 애굽 사람이 어린 양의 피를 칠했다면 그 사람은 살았다. 그 사람이 누군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이다. 십자가가 중요하다. 주님의 보혈이 중요하다. 여전히 죄는 짓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그 죄 값을 절대 묻지 않으신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보혈로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고 우리를 대속 하셨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게는 하나님이 죄 값을 묻지 않으신다. 주님이 이미 우리의 죄 값을 갚아 주셨기 때문이다.
롬 7:13~25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울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는 회심한 사람들의 경험인가? 그대는 자신의 대답에 어떤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이 말씀이 언급하는 대상이 누군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은 그대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신학자들도 이 문제로 씨름해 왔다.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 그래서 비신자일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데 죄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이길 힘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성경주석은 양측의 주장을 살펴본 후에 “이 구절에서 바울의 주요 목적은 구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죄에 대항하여 벌이는 진지한 투쟁을 위해 깨어 있는 사람과 율법 그리고 복음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의 기별은 비록 율법이 그러한 투쟁을 촉발시키고 격렬하게 만들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승리와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성경주석 11권, 667).
이 말씀을 어떻게 보든지 우리는 죄와 씨름하는 이 사람이 여전히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바울의 모든 약속은 무의미하게 된다. 마태복음 5장에서 드러났듯이 죄는 종종 행위가 일어나기 이전에 시작된다. 사람은 죄와 관련된 것을 생각만 해도 율법을 어기게 된다. 실제로 이런 사실은 고뇌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교훈 : 구원의 과정에서 율법을 통해 심각한 영적 투쟁에 빠진 사람은 속절없는 자신의 상황을 탄식할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를 버리고 그분을 고의적으로 떠나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스스로가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연약성 때문에 죄에 떨어지는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죄에 떨어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고의로 주님 앞에 우리가 죄를 짓고 죄의 길로 나아가 주님을 떠나지 않는 한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께 나아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야 한다. 주님의 영향력이 우리의 삶에서 멀어지면 언제나 죄의 먹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우리의 보호자이신 그리스도의 구원을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날마다 적용하여 우리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여전히 유효한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지금 어떤 종류의 죄 때문에 내적으로 투쟁하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러나 로마서 7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 사람은 곤경에 빠져있으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율법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저주로부터 해방된다는 사실을 꾸준히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롬 7:24~8:2).
| 적용 |
그대가 죄와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영적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어린양을 보라 - “그는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순결과 의로 갈망하여 부르짖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하였다. 이러한 부르짖음은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죄의 짐에 눌린 자들의 마음에서 발하는 부르짖음이다. 이런 모든 부르짖음에 대한 대답은 다만 하나뿐이니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 함이다”(정로의 계단, 19).
기 도
아버지, 연약한 제 육신에서 싸움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가 이겼음을 믿고 의지합니다. 죄가 저를 지배할 권한이 없음을 주장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제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라고 간구합니다.
넷째날(수) 율법의 마침(롬 9:30~10:4)
5월 14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교사강해 4)
예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를 의롭다 인정해 주시려고 율법의 끝마침이 되셨다 그 뜻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고 종결되었다 그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 장 7 절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는 뜻은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 말씀이다. 율법의 골자가 무엇인가? 마가복음 12 장 29 절에서 31 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하여 특히 십자가를 통하여 율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말씀을 이루셨다. 보통 사람들은 율법을 이룰 수 없고 성취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인해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의 공로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로마서 5 장 1 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번 과 교과의 제목은 롬 10:4에서 왔다. “그리스도는…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진 많은 사람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쓸모없게 만드셨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율법의 지속적인 타당성을 논의하는 로마서와 다른 신약 저서의 내용과 어긋난다.
롬 9:30~10:4을 읽어 보라. 여기서 구원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바울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여타 로마서의 기별과 마찬가지로 이 말씀에서 바울의 목적은 참된 의의 기원을 드러내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지목하는 역할을 하지만 사람을 의롭게 할 능력은 없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의 역설을 소개한다. 의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이방 민족들은 그것을 얻은 반면, 의로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이스라엘 백성은 의를 얻지 못했다. 바울은 의에서 유대인을 배제시키려는 것도 모든 비유대인의 의로움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율법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죄인에게 의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많은 유대인이 진실하게 의를 갈망했지만 그들의 탐색은 소용이 없었다(롬 10:2).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지만 그들 방식대로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목표로 삼았지만 그것을 구원의 근원되시는 분과 혼돈하였다. 율법은 선하지만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죄악을 밝히고 의에 대한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그것이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이라고 설명한 이유이다. 그분은 율법을 끝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의 ‘목적’이라는 의미에서 ‘마침’이시다.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면 회개한 죄인은 구원을 위해 그분을 주목한다. 율법은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롬 10:4).
교훈 : 그리스도는 율법을 끝내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사람들이 율법을 통해 발견해야 할 목적이 되신다.
부가적용)
율법의 기능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밝히는 기능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셨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범하지 않은 철저히 무죄하신 분이심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 율법은 여전히 정죄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함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인데 무죄하신 분의 피를 나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속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우리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율법이 마친바 되었다고 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마쳤다고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그분은 율법에 비추어 무죄하신 분이시다. 이 율법으로도 예수님을 정죄하지 못했다. 그런 그분이 이제는 당신을 믿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에게 이제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데 이는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율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셔서 우리는 언제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를 죽일 수 있는 기능인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하는가? 아니다. 이 율법 때문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 때문에 이 율법을 더 높이고 이 율법이 가진 더 높고 깊고 넓은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율법의 정죄의 기능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사라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의 대속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마음대로 도덕적인 타락을 하면서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율법의 수여자이신 그분이 주신 율법을 해석하신 뜻을 따라 산상수훈에 나타난 교훈을 따라 더 높은 뜻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가 받은 율법의 정죄를 십자가로 해결하셨다. 율법은 우리를 더 이상 정죄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 율법을 폐할 수 있느냐? 아니다. 이 율법을 주시고 수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라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기에 우리는 그분의 뜻을 행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도리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얼마나 예수님을 닮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자 하는 의의 목적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의의 목적 역시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으로는 그 목적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의로움을 얻을 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분의 의가 우리의 삶 속에 실현되기를 여전히 갈망합니다. 그분은 영원히 우리의 목적이 되십니다.
| 적용 |
그대는 특별히 어떤 면에서 예수님처럼 되기를 바랍니까?
영감의 교훈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우리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는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히시므로 우리들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며 의인들처럼 취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로서 바라보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4).
기 도
주님, 제 안에 계셔 주옵소서. 제 자아는 죽고 오직 예수님의 품성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로 저를 덮으시고, 거룩하고 순결하신 주님 닮게 해 주옵소서.
다섯째날(목) 엄격한 교사(갈 3:19~24)
5월 15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교사강해 1)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죄를 짓는 사람에게 어떤 형벌이 가하여 지게 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율법은 죄를 범한 죄인이 이 율법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정죄와 더불어 인간이 이 죄값을 받아야 한다는 절망을 보여준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선언한다. 어떤 누가 하나님의 율법의 표준에 맞게 그 뜻을 이루며 살 수 있을까? 죄인은 모두가 한 가지로 절망할 수밖에 없고, 이 절망감 속에 빠진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라고 탄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하시고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율법의 정죄로 살 수 없는 자를 살게 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비추어준다. 율법은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과 저의 죄를 보여주며 우리가 살 길이 없다고 정죄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분은 죽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모든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죄없이 달리셨다. 그분은 무죄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그분이 죽으셨다. 율법이 무죄하신 분을 정죄하여 죽였으므로 이 무죄한 결과로 인간의 대속물이 될 수 있으셨다. 죄인을 정죄할 수 있는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는 길은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누군가 대신 죽어야 내가 살 수 있다. 바로 율법의 정죄가 이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분과 하나 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율법의 정죄로부터 죄가 없는 인간이 된다. 죄와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무죄하신 분이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마음을 받아 들이는 자들에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그분이 옮겨주셨기 때문이다. 율법은 정죄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석방하신다.
바울은 로마서와 보조를 맞추어 갈라디아서에서도 율법이 죄를 정의하되 사람을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잊지 않고 명시한다(갈 3:19, 21).
갈 3:23~24을 읽어 보라. 바울은 율법의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은유를 사용하는가? 그대는 그러한 은유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번역에 따라 율법은 ‘초등교사’, ‘작업 감독’, ‘가정교사’, ‘관리인’ 등 여러 명칭으로 비유된다. 그리스 원어는 부자의 아들을 훈육하기 위해 고용된 종을 가리킨다.
아들의 수양은 가정교사의 책임이었다.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가정교사는 주인의 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필요하면 어떤 일이든 행할 권한이 있었으며 심지어 체벌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어른이 되면, 가정교사는 더 이상 그를 지도할 권한이 없었다.
가정교사의 역할에 대한 설명에 비추어 볼 때, 그대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율법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비록 가정교사는 성인이 된 아들을 더 이상 지도할 권한이 없지만 아들이 그동안 배운 교훈들을 통해 그가 성숙한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성숙에 도달한 사람처럼 더 이상 정죄하는 율법의 권능 아래에 있지 않지만,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율법의 원칙에 맞게 자기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율법은 또한 가정교사로서 “믿음이 오기 전에” 신자를 지켜주는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갈 3:23).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과 목적이 되심을 보게 된다.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이점을 명확히 한다(24절).
교훈 : 율법은 엄격한 원칙을 제시하며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까지 지켜 주는 초등교사와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부가적용)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제 나를 정죄하던 그 율법이 나를 더 이상 정죄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무죄하신 분이 나를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아니다. 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때에 이미 제정하신 것이며 그분께서 친히 주신 법이며 하늘의 통치이념이다.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람의 정신의 최고봉인 이 법은 영원히 폐하지 않고 존속되어야 할 영원한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이 율법을 범한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고귀한 희생에 감사하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법의 정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얼마나 깊고 높고 넓고 고상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지.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고 욕하는 자마다 또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하였다고 말한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저주인 사망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분의 높은 뜻을 이해하고 더 높은 계명의 정신을 소유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엄격한 신앙을 선호한다면 초보적인 것입니까?
만약 엄격한 신앙의 의미가 ‘타율에 의한 신앙’이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차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시를 받으며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도록 강요받는 영혼은 진정으로 마음을 돌이켜 성령의 지도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이의 심령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엄격함을 요구하는 것은 영적 승리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됩니다.
| 적용 |
그대가 율법의 원칙에 맞게 자기 행동을 통제할 필요성이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께 이끄는 교사 - “죄인이 도덕을 투영(投影)시키는 큰 거울을 바라볼 때 그는 자기 품성의 결함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흠과 점이 많으며 더럽고 정죄를 받은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율법이 어떤 방법으로도 죄를 벗게 할 수도 없고 범죄자를 용서해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죄인에게는 율법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율법은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학교 교사다. 죄인은 죄를 담당하신 구세주를 바라보아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13).
기 도
아버지, 저에게 자원하는 마음과 자발적인 신앙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 가르쳐주신 원칙과 정신을 기쁨으로 순종하며 매일의 삶에 적용하기를 즐겨하는 자녀로 성장시켜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5월 16일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함으로 용서와 화평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피하게 한다.… 십계명의 율법은 금제(禁制)의 면에서보다도 자비의 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율법의 금제성(禁制性)은 순종에 따르는 행복의 확실한 보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일 때에 율법은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기쁨을 줄 품성의 순결성을 이루도록 역사할 것이다. 순종하는 이들에게 율법은 보호의 장벽이 된다. 우리는 이 율법 안에서 인간에게 의의 불변의 원칙을 나타내시고 범죄의 열매인 악에서 인간을 보호하시려고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게 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34~23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갈 3:21에 나오는 놀라운 소망에 대해 이야기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의 복음을 얼마나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율법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책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➋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경건한 삶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완전’에 이를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교리를 가진 자들은 자기 충족을 구원의 수단으로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죄 많은 인간 본성의 실상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로 기울어지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구원의 표준으로서 얼마나 바르게 행동하고 있는지 자신을 늘 돌아보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절망감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이 지니는 거룩성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경건하고 신실한 삶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덮으시는 그리스도의 의 외의 다른 것에 구원의 소망을 두는 어떤 종류의 신학에도 빠지지 않도록 얼마나 조심해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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