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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그리스도와 율법의 마침(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5/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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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5-08 02:20 조회8,8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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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7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6분

기억절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연구 범위 : 롬 5:12~21, 롬 6:15~23, 롬 7:13~25, 롬 9:30~10:4, 갈 3:19~24.

한 유명 잡지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전면 광고가 실린 적이 있다. ‘불멸을 얻으십시오! (농담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농담 같은 그 광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영원히 당신의 이름으로 유산을 남길 방법을 찾는다면 우리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안내 책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수천 년 동안 저술가, 학자, 철학자, 신학자들은 죽음의 문제와 그것이 우리의 삶에 주는 의미에 대해 씨름했다. 그래서 위의 광고는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어떻게 다룰지 돕는 영리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정말 불멸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불멸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은혜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결과로 실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주에 계속해서 율법과 은혜에 대하여 연구하려고 한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이해한다.
➋ 느끼기 :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➌ 행하기 :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경건하고 신실한 삶을 추구한다.

A.
❷ 롬 7:24~25에서 자신에 대하여 탄식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어떤 상태라고 생각합니까?
※ 거듭난 사람이지만 죄의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경험으로 인하여 죄의 공격을 받고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❸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를 위한 복음이 되셨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셔서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기 때문에 복음이시다.
❹ 어떻게 하면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결과로 율법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 구원받은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죽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나 이제 생명을 받아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생명의 도(道)인 계명을 따라 생활하게 된다.

B.
❶ 어떤 경우에 엄격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 성장하는 과정에 필요하다. 그러나 율법이 몽학선생이 된 것은 성장하는 과정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사망에서 처한 사실을 지적하여 구주를 찾아가게 하는 훈련이다.
❷ 율법이 어떻게 엄격한 초등교사 또는 보호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하여 구주에게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❸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 즉 목적이 되신다는 말은 어떤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셨고, 또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룰 수 있다고 하는 뜻이다.
❹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고,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은혜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결론 :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은혜와 상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결과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날(일) 죄가 더한 곳에(롬 5:12~21)
5월 11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비록 율법은 죄를 지적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무력함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신 예수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1. 롬 5:12~2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롬5:12~21]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답: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되고 결과는 사망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길을 찾게 될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그 길이 열린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생명이요 죄가 더한 곳에 더해진 은혜로서 세상에 오셔서 죄와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어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넘치는 은혜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구절이다.

이 말씀 속에서 죄와 죽음 사이의 굳은 결속을 주목하라. 그것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에는 죽음이 따르기 때문이다.
롬 5:20을 읽어 보라. 율법이 들어오자, 율법이 죄가 무엇인지 정의한다는 의미에서 범죄가 늘었다. 그런데 죄의 자연스런 결과인 죽음 대신에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아무리 나쁜 죄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은혜는 죄를 해결하기에 넉넉하다.
“죄는 불법”이라는 요일 3:4의 말씀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이 죄를 십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좀 더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죄는 ‘무법적인 것’(anomia)이다.”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원칙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죄이다.
그래서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에 아직 십계명이 계시되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고(창 2:17), 결과적으로 죄를 범하였다. 죽음의 저주가 인류의 모든 세대에 영향을 미쳤던 이유는 아담의 죄 때문이었다(롬 5:12, 17, 21).
하나님의 법에 대한 아담의 불충성과는 달리 예수님의 충성은 영생의 소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예수님도 비록 유혹을 받았지만, 결코 죄에 굴복하지는 않으셨다(히 4:15).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님의 의로운 순종을 찬미한다(롬 5:18~21). 예수님의 순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죽음의 저주를 깨셨다. 그분의 의는 이제 신자들의 의가 될 수 있다. 첫째 아담의 죄를 물려받음으로 죽음의 저주 아래 있던 자는 이제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임으로 생명의 선물을 품을 수 있다.

<부가설명> 6과 목요일 부가설명에서 불법이라고 했을 때 그 법의 실상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했다. 요일3:4에 죄는 불법이라고 번역한 구절은 “헤 하마르티아 에스틴 헤 아노미아”이다. “그 죄는 그 아노미아이다.”라는 뜻인데 “아노미아”에 “아”는 not이라는 뜻이다. 즉 무법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죄는 법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라는 뜻이다. 교과 저자가 지적한대로 불법이라고 하니까 십계명을 범한 것이라고 제한하기 쉬운데 훨씬 범위가 넓은 표현이다. 더구나 요한 그의 서신인 요한 일, 이, 삼서에서 율법이라는 말 “노모스”를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노미아(아노모스)는 십계명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라고 단정하기 힘 든다. 그러므로 본문의 “불법”은 제한적으로 성문화된 율법을 범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려는 인간의 본성적인 불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
한은 여기서 자기 자신들이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실상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법이 없는 분으로 여기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성문화되고 조문화되었든지 불문율이든지 말씀으로 선포된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존재하게 한 그것을 무시하는 사상이나 행동을 그 생명과 존재를 상실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교훈 : 율법이 있음으로 더 많은 죄가 밝혀지지만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여 이룬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는 그만큼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린다.

둘째날(월) 율법과 은혜(롬 6:15~23)
5월 12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을 위해서 율법의 역할이 계속된다는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1. 신자가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의 능력을 받아들임으로 의로움을 얻었다면, 계속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율법의 정죄에서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을 범함으로 정죄 받지 않는 삶을 살게 되어야 한다. 율법은 구원받은 사람이 범법하면 여전히 법을 범한 자라고 정죄한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다시는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 준법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아래 설명에 교통법규 위반자의 예를 잘 생각해보라.

이 질문은 다시 한 번 핵심을 강조할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율법으로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정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속도를 위반한 자가 면죄되었다고 해서 계속 속도를 위반할 수 없는 것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하는 우리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롬 6:12, 15~23에 따르면 은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특별히 롬 6:12, 15, 17을 참고하라.
은혜와 율법은 반대말이 아니다. 이 말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은혜가 반대하는 것은 죽음이지 율법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그것을 범함으로 기인하는 영원한 죽음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약속 받은 은혜의 선물을 죄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하지 말도록 경고한다(롬 6:12, 15). 죄는 율법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할 때, 그는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율법을 지키고 계명에 순종하도록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율법을 높였다. 그는 율법에는 사람들을 불순종의 형벌에서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행악자들은 저희 죄를 회개하고, 그분의 율법을 범함으로 그분의 공의로우신 분노를 일으킨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해야 하며 또한 죄 사함을 받는 유일의 방법인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행사하여야 한다”(사도행적, 393).

<부가설명> 율법과 은혜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의 눈을 도덕성에 고정시키고 순종에 고정시키면 해결이 안 된다. 이것은 사망과 생명에 대한 이해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문제는 개미 체 바퀴 돌듯이 빙빙 돌아 언제나 제자리로 온다. 독자들이 이 말을 이해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근본적인 정죄는 사망의 존재라는 것이다. 아담의 씨로 태어난 사람들은 이미 사망의 존재들이다.(고전15:22) 그런 상태에서 율법을 문자적으로 다 지킨다고 해도 그렇게 지키는 그 행위가 그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육신에 있는 자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근본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망을 폐하셨다. 부활하심으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9,10) 이제 아담의 후손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 이제 그들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법을 생명의 도라고 가르친 것이다.(행7:38) 이것은 선악과를 먹고 사망이 된 아담부부와 그의 후손이 생명과를 먹을 수 없었으나 이제 예수 안에서 영생의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생명과를 먹을 자격을 얻은 것이다.(계2:7, 22:14) 그처럼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은 다시는 선악과를 먹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다시는 범법하지 않고 산다는 뜻이다. 이것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6:4~7)고 설파하였다. 이것이 율법과 은혜의 관계다.

교훈 : 은혜와 율법은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율법은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가르치며,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셋째날(화) 곤고한 사람(롬 7:21~25)
5월 13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1. 롬 7:13~25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울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는 회심한 사람들의 경험인가? 그대는 자신의 대답에 어떤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롬7:13~25]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답: 나의 개인적 이해로는 회심한 사람의 상태라고 믿는다. 이유는 22절이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회심했으나 죄의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죄의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기 때문에 곤고한 상태에 있고, 우리의 몸은 그런 공격에 약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용서가 선포되어 있기 때문에 감사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언급하는 대상이 누군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은 그대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신학자들도 이 문제로 씨름해 왔다.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 그래서 비신자일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데 죄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이길 힘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성경주석은 양측의 주장을 살펴본 후에 “이 구절에서 바울의 주요 목적은 구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죄에 대항하여 벌이는 진지한 투쟁을 위해 깨어 있는 사람과 율법 그리고 복음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의 기별은 비록 율법이 그러한 투쟁을 촉발시키고 격렬하게 만들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승리와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성경주석 11권, 667).
이 말씀을 어떻게 보든지 우리는 죄와 씨름하는 이 사람이 여전히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바울의 모든 약속은 무의미하게 된다. 마태복음 5장에서 드러났듯이 죄는 종종 행위가 일어나기 이전에 시작된다. 사람은 죄와 관련된 것을 생각만 해도 율법을 어기게 된다. 실제로 이런 사실은 고뇌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 사람은 곤경에 빠져있으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율법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저주로부터 해방된다는 사실을 꾸준히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롬 7:24~8:2).

<부가설명> 로마서의 이 구절은 사용한 단어의 시제와 관련하여 학자들의 토론을 일으키고 이해를 양극화시킨다. 고민하고 있는 부분의 시제가 과거시제이거나 완료형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심하기 전 상태를 진술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심하고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바울이 회심한 후에는 다시는 율법을 범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우리도 회심한 후에는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율법을 범하지 않는 삶을 완전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완전론주의 자들인 것 같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답에 기록하였듯이 7장이 회심 전의 사건이라고 하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할 수 없다. 회심 전에는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없기 때문이다. 새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생각과 마음에 새기는 것인데, 회심하기 전에 어떻게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어서 그것을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이유로 7장은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 현실적인 사망의 골짜기에서 부딪히는 삶의 곤란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부딪힐지라도 예수 안에서 승리가 보증되었다는 은혜의 기별을 전하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 7장의 이런 고민에 대한 답이 바로 8장이다. 그래서 은혜는 죄보다 더 크다. 예수의 은혜가 사유하지 못할 죄는 세상에 결코 없다. 나는 이 사실을 인하여 감격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교훈 : 구원의 과정에서 율법을 통해 심각한 영적 투쟁에 빠진 사람은 속절없는 자신의 상황을 탄식할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넷째날(수) 율법의 마침(롬 9:30~10:4)
5월 14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이번 과 교과의 제목은 롬 10:4에서 왔다. “그리스도는…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진 많은 사람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쓸모없게 만드셨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율법의 지속적인 타당성을 논의하는 로마서와 다른 신약 저서의 내용과 어긋난다.

1. 롬 9:30~10:4을 읽어 보라. 여기서 구원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바울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롬9:30~10: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답: 율법을 의지하여 의를 얻으려는 것은 부딪힐 돌에 부딪혀서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결과에 이르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고 율법의 마침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여타 로마서의 기별과 마찬가지로 이 말씀에서 바울의 목적은 참된 의의 기원을 드러내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지목하는 역할을 하지만 사람을 의롭게 할 능력은 없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의 역설을 소개한다. 의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이방 민족들은 그것을 얻은 반면, 의로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이스라엘 백성은 의를 얻지 못했다. 바울은 의에서 유대인을 배제시키려는 것도 모든 비유대인의 의로움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율법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죄인에게 의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많은 유대인이 진실하게 의를 갈망했지만 그들의 탐색은 소용이 없었다(롬 10:2).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지만 그들 방식대로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목표로 삼았지만 그것을 구원의 근원되시는 분과 혼돈하였다. 율법은 선하지만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죄악을 밝히고 의에 대한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그것이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이라고 설명한 이유이다. 그분은 율법을 끝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의 ‘목적’이라는 의미에서 ‘마침’이시다.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면 회개한 죄인은 구원을 위해 그분을 주목한다. 율법은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롬 10:4).

<부가설명> 율법의 마침이라는 표현은 성경적으로 볼 때 두 가지 경우가 포함된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다니엘 9:27에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수께서 모세 율법에 명한 제사와 예물을 금지시키셨다. 그 제사와 예물은 예수께서 이루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실 희생을 상징하는 것인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희생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제도적 율법을 끝내신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고, 또 그 율법들이 가르치는 목적을 이루셨기 때문에 율법의 목적이 성취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이 주신 그 생명, 곧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은 이 율법의 정죄에서 건져내시고 생명의 능력으로 율법이 삶과 인격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그의 생활방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의 목적이시다. 이제는 조문에 매여서 율법을 지키는 의미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내용이 그의 생명의 생리가 되었기 때문에 지켜지게 하셨다는 것이다. 구원받아 생명을 받은 사람들의 생활을 정리하여 간단히 적어보면 바로 십계명이 된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어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교훈 : 그리스도는 율법을 끝내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사람들이 율법을 통해 발견해야 할 목적이 되신다.

다섯째날(목) 엄격한 교사(갈 3:19~24)
5월 15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바울은 로마서와 보조를 맞추어 갈라디아서에서도 율법이 죄를 정의하되 사람을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잊지 않고 명시한다(갈 3:19, 21).

1. 갈 3:23~24을 읽어 보라. 바울은 율법의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은유를 사용하는가? 그대는 그러한 은유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갈3:23,24]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답: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서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번역에 따라 율법은 ‘초등교사’, ‘작업 감독’, ‘가정교사’, ‘관리인’ 등 여러 명칭으로 비유된다. 그리스 원어는 부자의 아들을 훈육하기 위해 고용된 종을 가리킨다.
아들의 수양은 가정교사의 책임이었다.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가정교사는 주인의 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필요하면 어떤 일이든 행할 권한이 있었으며 심지어 체벌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어른이 되면, 가정교사는 더 이상 그를 지도할 권한이 없었다.

2. 가정교사의 역할에 대한 설명에 비추어 볼 때, 그대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율법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답: 가정교사는 그 가정에서 맡은 자녀가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교육하는 역할을 한다. 그처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도록 교육한다. 자녀가 장성하여 스스로 바른 길을 따라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면 가정교사는 자기 임무를 다 한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아들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아도 그동안 가르친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생활하기 때문이다. 율법과 믿음은 이와 같은 관계에 있다.

비록 가정교사는 성인이 된 아들을 더 이상 지도할 권한이 없지만 아들이 그동안 배운 교훈들을 통해 그가 성숙한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성숙에 도달한 사람처럼 더 이상 정죄하는 율법의 권능 아래에 있지 않지만,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율법의 원칙에 맞게 자기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율법은 또한 가정교사로서 “믿음이 오기 전에” 신자를 지켜주는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갈 3:23).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과 목적이 되심을 보게 된다.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이점을 명확히 한다(24절).

<부가설명> 하나님의 율법은 십계명이나 의식(儀式)법이나 모두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십계명은 사람이 그 내용을 다 행할 수 없는 존재로서 정죄아래 놓였다는 것을 지적하지만, 의식법들은 사람이 그렇게 정죄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속죄를 위하여 구주께 나아가라고 가르친다. 성소제도와 함께 주어진 모든 제사제도도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구주께 나아가서 죄 사함을 받으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3,4) 제사들은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죄를 소할 구주께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것을 이 구절은 지적한다. 죄 사함을 받는 다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정죄 아래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는 뜻이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예수 안에서 사망의 정죄에서 용서받고 해방되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의식법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의 생명의 도가 바로 십계명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십계명이 가르치는 원칙을 따라 사랑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자는 사랑하게 되어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요일3:14,15)

교훈 : 율법은 엄격한 원칙을 제시하며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까지 지켜 주는 초등교사와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5월 16일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함으로 용서와 화평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피하게 한다.… 십계명의 율법은 금제(禁制)의 면에서보다도 자비의 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율법의 금제성(禁制性)은 순종에 따르는 행복의 확실한 보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일 때에 율법은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기쁨을 줄 품성의 순결성을 이루도록 역사할 것이다. 순종하는 이들에게 율법은 보호의 장벽이 된다. 우리는 이 율법 안에서 인간에게 의의 불변의 원칙을 나타내시고 범죄의 열매인 악에서 인간을 보호하시려고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게 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34~23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갈 3:21에 나오는 놀라운 소망에 대해 이야기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의 복음을 얼마나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율법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책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갈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율법이 사람을 살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➋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경건한 삶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완전’에 이를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교리를 가진 자들은 자기 충족을 구원의 수단으로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죄 많은 인간 본성의 실상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로 기울어지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구원의 표준으로서 얼마나 바르게 행동하고 있는지 자신을 늘 돌아보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절망감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이 지니는 거룩성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경건하고 신실한 삶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덮으시는 그리스도의 의 외의 다른 것에 구원의 소망을 두는 어떤 종류의 신학에도 빠지지 않도록 얼마나 조심해야겠습니까?
※ 우리는 복음의 진상을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노력으로 이루는 경건과 의로움과 완전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노력의 복음에서 생명의 복음으로 발상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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