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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그리스도와 산상수훈에 나타난 율법(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4/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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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4-21 10:45 조회9,448회 댓글0건

본문

4월 26일
일몰:오후 7시 17분

기억절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
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개역, 마 5:17~18).

연구 범위 : 마 5:17~20, 눅 16:16, 마 5:21~32, 롬 7:24, 마 5:33~37, 마 5:38~48.

산상수훈을 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동적으로 ‘팔복’을 떠올린다(마 5:1~12). 그러나 산상수훈은 세 장에 걸쳐 기록되었으며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팔복이 첫째 부분이다. 둘째 부분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소금과 빛으로 설명하셨다(마 5:13~16). 그리고 셋째 부분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하여 새롭고 심오한 관점을 제시하신다(마 5:17~18).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긴 넷째 부분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대하여 명확한 가르침을 베푸신다(마 6:1~7:23).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비유’로 산 위에서 주신 모든 설교를 마치신다(마 7:24~27).
이 가운데서 우리는 마 5:17~48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셋째 부분을 공부하려고 한다. 신학자들은 여기에 극명한 대조가 나타난다 해서 이 부분을 ‘반명제들(antitheses)’이라고 부른다. 이번 주에 우리는 그것이 율법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볼 것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예수님이 율법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본질을 밝히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율법이 강조하는 것은 단지 행위가 아닌 동기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➌ 행하기 : 표면적인 준수보다 성령에 이끌리는 행동, 사고 그리고 동기를 나타낸다.

A.
❷ 예수님이 죄를 이해하는 차원은 바리새인과 어떻게 달랐습니까?
※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인 것을 보고 판단했으나 예수님은 마음의 의도를 따라 판단하신다.
❸ 산상수훈을 따르는 사람의 신앙과 생활에는 어떤 특색이 있을까요?
※ 그들은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❹ 우리가 예수님이 요구하는 의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B.
❷ 행위를 중요시하는 신앙과 마음의 동기를 중요시하는 신앙은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 행위를 중요시하는 신앙은 율법 조문을 따라 행동하고 조문에 없으면 할 필요가 없는 격식에 매이지만 마음의 동기를 중요시하는 신앙은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이 이루어진다.
❸ 산상수훈의 기준으로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수준을 말하는 것일까요?
※ 하나님의 계명이 그 사람의 인격자체가 되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❹ 우리가 진정한 천국 백성으로 살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 진정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생명과 마음을 품어야 한다.

결론 :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분이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율법을 높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성령이 필요함을 보여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첫째날(일) 일점일획
4월 20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1. 마 5:17~20을 다시 읽어 보라. 예수께서 율법을 그토록 강조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그분도 율법을 크게 강조하셨다니 정말 흥미롭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율법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마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답: 성경의 율법은 사람이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또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시작부터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보증하신다(마 5:17).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이 성경을 뜻한다는 언급은 없지만, 많은 사람이 그 말을 전체 구약 성경을 말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여긴다(마 7:12, 11:13, 22:40, 눅 16:16, 행 13:15, 24:14, 롬 3:21 참고). 반대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계시하는 성경을 공격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분의 목적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시는 것이었다.
‘이루다’라고 해석된 그리스어 ‘플레로(plero)’는 문자적으로 ‘채우다’, ‘완성하다’라는 뜻이 있으며 어감상 ‘넘치도록 가득 채우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루다’를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성경을 성취하는 분으로서 예수님께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예, 눅 24:25~27, 요 5:39).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예수님이 성경을 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본질을 나타내시기 위해 오셨다는 문맥에 있다.
자신의 종합적인 의도를 밝히기 위해 예수님은 일반적인 의미의 구약성경에서 특정 의미의 율법으로 강조점을 바꾸셨다. 마치 언젠가 백성들이 율법을 폐하는 자로 그분을 고소할 것을 아신 것처럼 그분은 하늘과 땅이 남아 있는 한 율법이 다 이루어지는 때까지 존재하리라고 경고하셨다(마 5:18).
예수님은 이 진술을 통해 율법의 항구성을 확증하셨다. 율법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 교훈을 어기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의 행위에 잘못이 있다는 뜻의 표현 방식이다. 예수님은 곧바로 그분이 장려하는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공허한 의가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 원하는 심령에서 비롯된 의라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부가설명> 마5:17~20에서 18절에 있는 이루리라는 말은 “플레로”가 아니고 “기노마이”이다. 이 단어는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17절에 완전케 한다는 말이 “플레로”이다. 18절은 성경의 모든 기록은 반드시 기록된 그대로 된다는 말이니까 이룬다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완전케 하러 왔다고 번역한 “플레로”는 충만하게 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율법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율법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율법이 완전한 것은 마치 집을 완전하게 짓고 모든 가구를 다 갖추어놓은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집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완전하지 않다고 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집에 주인이 없으면 그 집은 충만한 집이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주인이시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을 충만하게 하신 것이다. 율법의 진짜 내용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예수 안에서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기노마이”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율법을 이룬 사람으로 여김을 받는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이룬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밝히고 그 뜻을 완성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둘째날(월) 살인(마 5:21~26)
4월 21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예수님은 율법을 높이려는 의도를 밝히신 후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는 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먼저 제6계명을 인용하셨고(출 20:13), 법을 위반할 경우 받을 형벌을 요약하셨다(출 21:12, 레 24:17).
제6계명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모든 경우를 포괄하지 않는다. 과실치사의 경우 가해자는 도피성으로 달아나 일시적인 보호를 받았다(출 21:13, 민 35:12). 그러나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한 사람은 신속한 재판을 받았다. 예수님은 이것을 설명하면서 행위 자체보다는 행위자의 동기와 의도에 초점을 맞추셨다. 우발적으로 생명을 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살해 목적이 있는 자는 계획 단계를 거친다. 죄는 끔찍한 행위를 저지르기 전에 이미 발생한다. 수많은 잠재적 살인범들은 단지 기회를 놓쳐 단념할 뿐이다.

1.마 5:22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살인을 무엇과 동일시하셨는가? 요일 3:15은 이런 관점을 어떻게 강조하는가?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진정한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것에 대해 무엇을 배우는가?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답: 형제에게 노하는 것, 라가라(욕)하는 것,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과 같다고 하였다. 마음 동기에 대한 것을 지적하셨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마음의 태도가 하나님의 법과 일치하게 되는 것임을 배워야 한다.

성경은 종종 말의 능력에 대해 언급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더 깊은 차원에서 그 주제를 다루신다. 험담과 저주의 유일한 목적은 피해자에게 부정적 감정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예수님의 관점은 매우 분명하다. 살인죄는 범죄를 저지른 자들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 험담을 하거나 살인할 생각을 품은 자들에게도 해당한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품은 자들에게 제단에 오기 전에 피해자들과 화해하라고 권유하신다(마 5:23~26).

<부가설명> 어린아이들을 보면 순진무구한 것 같은데도 이기심이 아주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때에 썩어질 씨로 태어나서(벧전1:23)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엡4:22) 인간의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2:3)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어른들이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그렇게 자연발생적인 모습으로 동생을 떠밀어 넘어뜨리고 가장 적당하게 거짓말을 한다. 그 생명의 성질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명체들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성질을 따라 행동을 하게 된다. 가시나무는 가시나무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가시나무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본질상으로 지킬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아주 혐오한다. 본질상으로 지킬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 같은 상태로 오셔서 율법을 다 지켰기 때문에 우리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 보여주셔서 죄인인 우리의 모본이 되셨다고 한다. 이것은 엄청난 오해이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고 단언하였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셨다.(요3:6)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탄생하셨기 때문에 영이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신이라고 하였다.(요3:31) 그러나 아담의 후손들은 다 아래서 난 자들이라고 하였다.(요8:23, 고전15:47,48) 그러므로 그 상태로는 결코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 거듭난 사람들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으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들의 모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형제에게 화를 내며 욕하거나 살인을 생각하는 것도 살인죄라고 말씀하셨다.

셋째날(화) 간음(마 5:27~32)
4월 22일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예수님은 그다음 간음에 대한 계명을 예로 들면서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인용하셨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간음은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 외의 다른 사람과 성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발생한다. 율법은 간음을 저지른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시한다. 예수님은 제6계명을 설명하실 때처럼 이 계명에 대해서도 더 깊은 의미를 제시하셨다.
간음은 행위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살인이 한 개인에게 항구적인 상해를 가할 의도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간음은 기혼자든 미혼자든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대해 음욕을 품는 순간 시작된다.

1. 마 5:29~3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죄의 위험성을 어떻게 이보다 더 강경하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을 본 다음 롬 7:24을 읽어 보라. 어떤 중요한 진리가 있는가?
[마5:29,30]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답: 그보다 더 강경하게 설명할 말이 없는 것 같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음험한 눈으로 엿보기보다는 차라리 눈을 빼는 것이 낫다고 하신 것이다. 롬7:24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사망의 몸이라는 것과 이 사망의 몸은 대속만이 생명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폭로된 죄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신다. 그것은 죄에 끌려다니지 말고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예수님은 강력한 비유를 들어 문제를 안고 있는 자들이 만약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유하신다. 이는 다른 행동 경로를 택하거나 이전 관계를 단절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영원한 이득은 순간의 고통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앞서 보았듯이 모세는 이혼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아님을 알면서도 허용했다. 예수님은 한눈파는 자들에게 충동을 조절하도록 훈계하시면서 백년해로하도록 격려하신다.

<부가설명>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처음에 주신 영생하는 순수한 생명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사망이 된 것이다. 사망이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들이 죽은 것이 확실하다. 둘째는 그들이 창조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빛이 옷이 되게 하셨다.(시8:5, 부조와 선지자 45쪽) 그런데 그 빛이 바로 생명이 외부로 나타나는 모습이었다.(요1:4)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상실했기 때문에 빛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망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장 존재 자체를 상실하게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구원을 베풀기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렇지만 아담은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사망에 속한 자가 되었고 그에게서 태어날 후손들은 다 사망이 된 썩어질 씨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벧전1:23) 그래서 그들은 육체가 되었고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썩는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증오와 정욕이다. 이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들은 마음에 이런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진정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그 순순한 생명을 소유하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수양과 도야를 통하여 극복할 수 있지만 극복은 변화가 아니다. 의지를 활용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사항이지만 그것은 도덕적 노력이 이룬 훈련일 뿐이다. 그렇게 했다고 썩지 않을 씨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우리는 썩지 않을 씨로 거듭날 때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교훈 : 간음죄는 음욕을 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려면 우리는 죄를 유발하는 환경과 관계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넷째날(수) 맹세, 맹세…(마 5:33~37)
4월 23일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3, 37).

살인과 간음에 대한 첫째와 둘째 반명제(antithesis)는 십계명에 기초해 있다. 반면 이혼과 그 이후의 반명제들은 모세법의 다른 부분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거짓 맹세와 하나님께 서원을 행하는 문제이다.

1. 레 19:11~13을 읽어 보라. 이곳에 어떤 특별한 점이 있는가?(출 20:7 참고)
[레19:11~13]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13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출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답: 거짓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3계명을 범하는 것도 된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모세의 법은 여러 기만적인 행위를 정죄하는 레위기 한 부분에 열거되어 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관심은 확실히 내적인 의도에 있다. 약속을 지킬 의도가 없이 약속한 사람은 의식적으로 죄를 짓기로 작정한 것이다.
거짓 맹세를 금하는 명령이 다른 사람과의 약속에도 관련이 있지만 두 번째 명령은 하나님께 드린 약속에 관한 것이다.

2. 신 23:21~23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마 5:33~37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행 5:1~11 참고)
[신23:21~23]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22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마는 23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마5:33~37]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행5:1~1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답: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속히 갚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이 된다. 마땅히 자기의 분수에 합당한 언행을 해야 한다.

거짓 맹세를 한 사람의 잘못과 다르게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기로 맹세한 사람은 속일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을 아시고 나중에 후회할 약속은 하지 말도록 당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능력으로 지키기 힘든 약속을 하기보다 그의 대답이 ‘예’는 ‘예’이고, ‘아니오’는 ‘아니오’를 의미하는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가설명>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다.(엡2:3) 거짓의 아비에게서 났기 때문에(요8:44) 어쩌면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이 거짓으로 이루어지는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아이에게 거짓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데 좀 자라나면 가르치지 않은 거짓말을 얼마나 잘 하는지 부모들은 다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보다 약해보이는 아이를 깔보고 해롭게 하고 빼앗고 밀어붙이고 그렇게 자란다. 성인이 되어서도 역시 거짓투성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굴복해야 한다. 예수 안에서 비로소 정직해질 수 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수단은 결코 없다. 내가 바른말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속내를 다 아신다. 그러므로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 최선의 길이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32:3) 우리 주님은 그의 보혈로 우리의 허물을 씻어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교훈 : 지킬 마음이 없이 다른 사람과 약속하는 것은 죄이며, 하나님께 지키지 못할 서원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다섯째날(목) 탈리오 법칙(마 5:38~48)
4월 24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오늘의 주제는 보복이다(마 5:38~48). 이 주제는 모세의 법이 말하는 여러 명령과 관련이 있는데 그 명령들은 어떤 범죄에 대하여 동등한 형벌로 되갚는 원칙에 기초해 있다. 이런 개념은 라틴어로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 보복의 원칙)’라고도 불린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율법은 가해자로 하여금 피해자가 당한 동일한 고통을 겪도록 요구한다(출 21:22~25, 레 24:17~21, 신 19:21). 피해자가 눈, 팔, 발 또는 생명을 잃으면 가해자도 같은 것을 잃게 된다. 이와 같은 보복의 원칙은 여러 고대사회에서 통용되었다. 이 원칙은 단순한 정의의 원리를 나타낸다는 면에서 긍정적이다.
우리는 이 원칙이 보복을 제한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즉 이것은 사람들이 받은 피해에 대하여 앙갚음하도록 주어진 법적 권한 이상의 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법은 정의가 왜곡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장치였다.
그러므로 마 5:38~42에서 예수님은 범죄 사실에 대하여 어떤 사람에게 형벌을 요구하는 법의 정당성을 공격한 것이 아니다. 대신 그분은 자신들을 이용하려는 타인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에 초점을 맞추셨다. 그리스도인들은 보복의 기회를 구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그런 친절과 행위를 통해 ‘보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호소를 통해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 깊은 차원의 이해로 우리를 이끄신다.
마지막 반명제는 친구에 대한 사랑과 원수에 대한 증오를 장려하는 태도를 다룬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레 19:18에 있다. 하지만 원수를 미워하라고 요구하는 뚜렷한 말씀은 없다. 그나마 신 23:3~6도 그런 말은 없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로마의 군의 압재를 받고 그들의 땅에서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들은 로마의 박해를 받을 때마다 그들을 강압적으로 핍박하는 적군을 증오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비록 이상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더 잘 사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부가설명> 탈리오 법칙에 대하여 사회정의를 위한 장치라고 교과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뿐만 아니라 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신학자들이 다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틀린 이해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전적으로 법률적 시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복음적으로 이런 법이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탈리오 법칙은 사랑의 법칙을 반어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즉 이를 상하게 하면 상하게 한 사람도 이를 상하게 하고 눈을 상하게 하면 자기 눈도 상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곧 자기를 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자기 몸을 잘 보존하기를 바라는 그 같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몸도 보존하도록 하라는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하라는 제일 큰 계명 중에 두 번째 계명을 구체적으로 가르치시되 사람들이 당장 이해할 수 있도록 성문하여 주신 것이 탈리오 법칙이다. 복음적으로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과 같은 사상인 것이다. 우리는 이웃을 자기 몸을 돌보는 것처럼 돌봐야 한다. 이웃을 상하게 하면 자기도 그와 같이 상처를 받을 것이다. 자기가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 결코 이웃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법이 바로 탈리오 법이다. 예수님은 이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차라리 자신이 상처를 입을지언정 남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랑을 최고의 사랑으로 드러내셨다. 탈리오 법칙이 사랑의 소극적 실천이라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적극적이고 최고인 사랑의 법칙이다.

교훈 : 성경에서 보복의 법칙은 보복을 제한하기 위한 장치이며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초월하여 원수까지 사랑하도록 가르치셨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4월 25일

<시대의 소망>, 298~314 “산상수훈”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는 계명을 하나하나 들어서 강조하시고 그 요구의 깊이와 넓이를 설명하신다. 예수께서 그 계명의 효력을 조금도 제거하시지 않으시고 그 원칙이 얼마나 원대한가를 보여주시고 유대인들이 외관적으로 순종하는 체함으로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고 있음을 폭로하신다. 예수께서는 악한 생각이나 음탕한 모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율법이 범해진 바 된다고 선언하신다. 가장 작은 불의라도 그것과 관계하는 자는 율법을 범하고 자신의 도덕성을 저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살인은 먼저 마음속에 존재한다. 마음에 증오심을 품는 자는 자신의 발을 살인자의 길에 놓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드리는 예물을 몹시 싫어하신다”(시대의 소망, 310).

사랑은 하나님의 율법에 있는 통합적인 원칙이다. 각 반명제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원칙을 높이셨다. 사랑은 형제자매에 대한 증오를 품지 못하도록 막는다. 사랑은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되게 한다. 사랑은 다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정직하도록 요구한다. 사랑은 부당하게 대우를 받아도 친절하게 반응하게 한다. 사랑은 자신이 대접받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원수를 대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준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이번 주 교과에서 예수님은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하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하며 반명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옛 사람에게 했던 말이 구약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문제는 인용보다는 해석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우리도 깊은 의미를 놓친 채 너무 표면적인 것들만 볼 위험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 구약의 율법을 문자로만 읽으면 그 율법의 뜻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바울은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고 경고하였다. 여기 의문이라는 말은 직역하면 문자라는 말이다. 문자대로 읽으면 죽이는 것으로 생각할 내용이 많지만 영으로 읽으면, 즉 그 의미를 바르게 깨달으면 그것은 살리라는 뜻인 것을 깨달을 것이라고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➋ 많은 사람은 성경 한 절만 읽고 말씀을 해석하는 덫에 빠집니다. 예를 들면 마 5:48은 우리에게 아버지처럼 완전하라고 가르칩니다. 문맥을 고려하여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신중한 성경 연구의 중요성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이 말씀이 죄 없는 삶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 그 한 구절만 보면 사람이 하나님처럼 완전해져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를 두고 볼 때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달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죄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좋은 일이지만 이 구절이 그것을 가르치는 구절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체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 된다. 누가복음은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6:35,36)고 마태복음 5:48의 뜻을 해석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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