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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그리스도와 종교 전통(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5/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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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4-11 12:25 조회9,1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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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1분

기억절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8~9).

연구 범위 : 마 23:1~7, 마 15:1~6, 사 29:13, 마 5:17~20, 롬 10:3.

감리교의 설립자 존 웨슬리는 신학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믿음, 이성, 성경 그리고 전통 이렇게 4가지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4가지 모두 다 동등한 권위가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성경이 가장 기본이며, 그다음으로 개인의 믿음과 사고 능력 그리고 성경 해석에 영향을 주는 신앙 전통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지금 웨슬리가 환생한다면 오늘날 웨슬리 신학 계열의 학자들(물론 다른 신학자들도)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보다는 이성과 전통 그리고 개인의 견해를 더 가치 있게 여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교리의 바탕으로 삼았던 종교 전통에 대해 연구한다. 최초로 이런 전통을 기록한 랍비들은 성경을 절대적으로 존중하였기 때문에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지위보다 높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열성적인 그들의 제자들이 기별과 방법을 혼동함에 따라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에서 인간의 전통으로 강조점이 옮겨졌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종교적인 전통이 결코 하나님의 법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하나님의 법이 전통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➌ 행하기 : 우리 속에서 시작된 의로운 일들이 더 진전되도록 성령께 마음을 맡긴다.

A.
❷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종교적인 전통을 만든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 원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잘 준행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❸ 목적과 달리 사람이 만든 전통에 초점을 맞춘 신앙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었습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해하게 된다.
❹ 우리가 성경의 의도에 맞게 재수립해야 할 전통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성경말씀과 일치하는 전통을 수립해야 한다.

B.
❷ 바리새인들은 어떤 종교적인 전통을 만들었습니까?(부탁 받은 반생이 미리 조사해 옴)
※ 고르반, 손 씻는 전통, 안식일 지키는 방법을 만든 전통(병도 못 고치게 함) 등등.
❸ 예수님이 전통을 중시하는 신앙을 경계하셨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준행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전통을 말씀보다 중하게 여기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❹ 성경의 명령에서 벗어난 기독교의 전통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런 전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 일요일 준수, 영혼불멸설, 영원지옥설, 세례, 성경에 없는 종교절기 등등.

결론 : 피조물은 하나님의 법을 변경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분의 법은 바꿀 수도 변경할 수도 없습니다.


첫째날(일) 모세의 자리
4월 13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2~3).

항상 함께 언급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분리된 계파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의 일부분이었던 것 같다(행 23:9 참고). 바리새파는 그리스제국 통치하에 등장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카비 혁명기에 그리스와 맞서 싸웠던 ‘하시딤’이라는 경건한 유대교 종파의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바리새’라는 이름은 ‘나누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바라스’에서 유래했다. 많은 유대인이 이교 문화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시절, 바리새인들은 모든 유대인 남자가 율법을 배우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나의 위대한 분’ 또는 ‘나의 스승’이라는 의미의 ‘랍비’라는 계급을 만들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언급하심으로 백성들의 교사로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하셨다(마 23:2~3). 왜냐하면 적어도 백성들이 율법의 길을 배우도록 보장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1. 마 23:1~7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마23:1~7]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답: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언행이 일치하였다.

복음서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다는 아니지만 많은 수가 예수님의 죽음을 공모했고 제자들을 핍박했으니 그런 부정적 시선은 당연하다. 그들은 길모퉁이나 나무 뒤에 숨어 법을 집행하기 위해 백성들이 실수하기를 기다리는 자들 같았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이미지는 성경에서 빈번하게 등장해서 마치 그 말이 율법주의자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사용될 정도였다.
마 23:1~7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제기하신 커다란 문제점은 다른 이들에게는 모세의 법을 지키기를 바라면서 정작 그들 스스로는 그것을 지키려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들이었다. 설령 그들은 옳은 일을 해도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그렇게 했다.

<부가설명>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당시 사회에서 민중들에게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의 위선적인 삶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두려워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그들의 교훈은 꽤나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교훈과 삶이 일치하지 않으면 교훈이 그들을 위선자로 만드는 것이 된다. 오늘날 우리도 성경의 진리를 말하고 행하지 않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책망을 들을 것을 암시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을 생활하려는 정신이 투철해야 한고 그 정신이 최소한이라도 생활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들의 위선을 나무라신 예수님의 음성은 지금 우리들의 위선을 나무라는 음성으로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가.

교훈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스승으로서 율법을 가르칠 의무가 있었지만 예수님 당시에 그들의 신앙은 많은 경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다.

둘째날(월) 사람의 계명
4월 14일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지만 종교적 교훈을 가르칠 그들의 권위는 그 원천이 구약성경을 벗어나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사용하는 법은 뛰어난 랍비들의 성경 해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해설의 의도는 성경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입으로 회자되었지만, 나중에 서기관들이 수집하여 책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최초의 공식적인 랍비의 법은 기원후 2세기 말엽 랍비 ‘예후다 하나시(유다 왕자)’가 <미쉬나>를 출판하면서 비로소 등장하였다. <미쉬나>에 기록된 법들은 랍비들이 4백 년 동안 성경을 해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많은 랍비들이 <미쉬나>에 기여한 인물이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랍비는 ‘힐렐’과 ‘샴마이’였고 바울의 스승이자 힐렐의 손자였던 ‘가말리엘’도 있었다.

1. 마 15:1~6을 읽어 보라. 여기서 쟁점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어떤 잘못을 교정하려고 하셨는가?
[마15:1~6]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답: 쟁점은 유전을 지키는 것으로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그들의 주장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유전보다 계명이 우위에 있으며 우선적이라는 것을 깨우치려 하셨다.

제1과에서 우리는 랍비의 법을 ‘행하다’라는 의미에서 ‘할라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배웠다. 랍비들은 어떤 사람이 하위 법들을 따라 행하면 저절로 상위법도 지키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위 법들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면서부터 성경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규율을 만들었다고 해서 예수님이 문제를 삼으셨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규율을 교리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태도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으셨다. 사람은 종교적인 규제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 수준으로 격상시킬 권위가 없다. 이는 교인 집단이 공동체의 행실을 통제하기 위해 규칙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훈령은 백성들이 법을 지킬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것이 법의 지위를 대신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부가설명> 성경은 행위를 중심으로 기록된 책이기보다는 구원과 중생의 생명의 기능을 중심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학자들은 산상보훈을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윤리를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담의 자손으로 썩어질 씨로 태어난 그 상태에서는 불가능의 윤리가 맞다. 예수께서 그런 교훈을 하신 것은 썩어질 씨로 태어난 상태에서 노력해서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이 되면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산상보훈 중에 예수님은 “옛 사람에게 말한 바”라는 말을 두 번 하셨는데(마5:21, 33) 이 표현은 옛날에 산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복음적으로 영적으로는 옛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을 뜻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라고 한 그 옛 사람이다. 옛 사람에게 말한 것은 다 도덕이요 수양이다. 그러나 산상보훈의 중심 교훈은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3,24)고 한 그 새 사람에게 하신 교훈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전혀 몰랐고 오직 옛 사람이 노력으로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도록 도우려고 구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그만 하나님의 계명을 밀어낸 것이다. 옛 사람이 하는 것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훈 :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한 하위의 법을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인간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셋째날(화) 장로들의 전통
4월 15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 15:1~2).

앞서 보았듯이 어떤 랍비들은 모세의 법을 지키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수립한 규율과 전통들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둘 사이를 구분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런 사이에 랍비의 말은 경전의 지위를 획득했고 백성들은 랍비의 말이 성경만큼 구속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랍비들이 처음 주석을 기록했을 때는 성경에 덧붙일 의도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열성적인 제자들은 이러한 특별한 해설을 일반 백성에게 전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1. 마 15:1~2을 읽어 보라. 그 전통은 모세오경 가운데 어떤 말씀에 기초해 있는가? 그대의 대답은 어떤 중요성을 담고 있는가? 막 7:3~4과 마 15:11도 참고하라.
[마15:1,2, 1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막7:3,4]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답: 그들의 주장은 모세오경에 없다. 다만 사람이 유출병에 접촉했을 때 반드시 씻으라고 하였을 뿐이다.(레15:11) 그리고 부정한 것에 접촉한 자는 옷을 빨고 몸을 씻으라고 하였다. 그들이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는 규정이 성경에는 없다. 예수님은 손을 씻는 것보다 마음을 씻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다.

성경에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씻을지니라’는 명령은 없다. 그렇다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런 반론에 기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과 논쟁할 때에 제자들이 범한 것은 모세의 법이 아니라 장로들의 전통임을 명백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기한 문제의 강도에 따르면 이것은 바리새인들에게 심각한 종교적 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강 전문가나 부모들은 바리새인들이 과도할 정도로 손 세척을 강요했던 위생학적 또는 심리학적 이유를 대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은 진정한 쟁점은 제의적 부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이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그들을 더럽힐 물체에 접촉했을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였다. 그래서 만약 손을 씻지 않고 음식물을 집어 먹으면 제의적으로 오염되었다고 보았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트집을 잡았던 사실에서 미루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이 그러한 관습을 어기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막 7:3). 그럼에도 그분은 바리새인들이 사소한 문제를 지나치게 확대하고 있음을 아셨다.

<부가설명> 후손들이 선조들의 유훈을 준행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종교와 교리에 관해서라면 조심해야 한다. 그런 전통이 성경과 충돌하게 되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과 교리가 아니라 다른 종교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명하지 않은 것을 유전과 전통으로 만들었다. 목적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성심을 다해 준수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이 지나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밀어내고 유전과 전통이 하나님의 명령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런 사상과 이런 상태를 고쳐주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신앙적 우상이 되었다. 고치려 하지 않았다.
오늘 재림교회도 이런 점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교회의 현상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의 현상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약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 준행하기 위하여 미쉬나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전서를 가지고 있고, 이것을 올바르게 깨닫고 실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예언의 신의 증언을 가지고 있다. 우리교인들 중에 꽤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성경보다 증언을 우위에 두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를 탐지하는 놀라운 탐지기이다. 모든 진리는 그것으로부터 와야 한다. 성경은 모든 교리와 신앙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어떤 사람의 견해일지라도 성경과 비교해보지 않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경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신적 권위이다.” (EGW to Brethren, Aug. 5. 1888)”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않아야 한다.

교훈 :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에 치중하여 손 씻는 의식 같은 장로의 전통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넷째날(수) 사람의 교훈
4월 16일

“너희는…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5~6).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교훈으로 대체하는 일은 그쳐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조상의 유전에 기초를 둔 것이나 다름없는 제도와 관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단순히 인간의 권위에만 기초를 둔 이와 같은 제도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제도를 대신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유전에 집착하고 관습을 존중하며 그들의 오류를 보여 주려고 하는 자들을 증오한다.… 하나님은 소위 교부들의 권위 대신에 천지의 주 되시는 영원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받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시대의 소망, 398).

1. 마 15:3~6을 읽으면서 동시에 출 20:12, 신 5:16, 마 19:19, 엡 6:2을 참고하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어떤 두 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하셨는가?
[마15:3~6]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신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엡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답: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과 부모를 훼방하는 자는 죽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 드리면 부모에게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은 바로 부모를 훼방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바리새인들이 손 세척의 문제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일 때, 그들은 그분이 자신들의 비난에 바로 응하시리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특유의 방식대로 쟁점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으로 그들에게 대응하셨다. 예수님은 문제가 손을 씻거나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가 아닌 인간이 만든 규범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규범 위로 격상시키려는 데 있음을 그들이 깨닫기 바라셨다.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는 의식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부모보다는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자원을 쏟아 붓는 것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행위에 대한 논리적 동기를 마련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방식대로 그분을 사랑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그들이 훈육과 거룩한 삶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바람직했지만 그런 관심이 하나님의 뜻을 가려서는 안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법에 기록된 613개의 법이 모순되지 않고 조화롭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했다. 어떤 법도 다른 법으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적어도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화시켰다(마 15:6). 그들은 자신을 율법의 수호자라고 여겼건만,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더 잘 지키도록 돕는다던 바로 그 전통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심지어 소용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책망을 들었으니 틀림없이 충격을 받고 수치를 느꼈을 것이다.

<부가설명>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도움이 될는지? 나는 간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방문을 갔을 때 음식 내어오는 것을 하지 않도록 부탁을 했다. 그러나 교우들은 목회자를 사랑해서 대접할 것을 준비한다. 심방예배를 마치고 나면, “목사님, 과일 준비했는데요.”라고 말한다. 참 난처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분들의 정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과일은 두시고 물 한 컵을 주시지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교우는 얼른 부엌으로 가서 과일과 주스가 가득 담긴 유리컵을 쟁반에 담아서 내온다. 나는 웃으며 먹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때 문득 하나님 앞에 나의 모습을 본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나의 원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교인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대접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대로 나를 대접한 것이다. 내 뜻대로라면 물 한 컵을 대접하면 된다. 그런데 교우의 마음은 자기가 준비한 것을 내가 먹어야 기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섬기는 것은 아닌가? 내 뜻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자기 종교를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바로 그랬다.

교훈 :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사람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문제점을 지적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뜻대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다섯째날(목) 더 나은 의(마 5:20)
4월 17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1. 마 5:17~20을 읽어 보라. 이번 주 교과의 문맥을 살펴볼 때 마 5:20에 나오는 예수님의 권고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롬 10:3도 참고해 보라.
[마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롬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답: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았다. 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하나님의 의이다. 그것은 거듭나는 것이다.

한 절만 본다면 마 5:20은 마치 바리새인이 아닌 자들에게 바리새인처럼 하라는 권유로 보인다. 심지어 그들보다 더 열심히 행하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다행히도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어제 교과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심심찮게 관습적인 법을 하나님의 법 위로 격상시켰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결과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있음을 그들에게 말해 주셔야 했다.
월요일 교과에서 언급한 것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교훈은 좋았으나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위선적인 삶을 살았다.
이런 문맥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진의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분은 앞 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 5:19) 했던 말씀을 언급하셨던 것일 수도 있다. 바리새인들은 너무나 인간에 기원을 둔 법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파괴하고 말았다. 그들의 의는 그들 자신의 노력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결함이 있었다. 이사야는 오래전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하였다(사 64:6).
예수님이 장려하는 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종류의 의이다. 손 씻는 의식에 대한 논쟁에서 예수님은 사 29:13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다. “이 백성이…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 29:13). 하나님이 추구하는 의는 눈에 보이는 행위 이상의 깊은 차원이 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바리새인들이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의를 능가한다. 진정한 의는 행위 목록을 일일이 점검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를 위한 그분의 의를 주장함으로 그 의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완전한 자기 굴복에서 비롯되며, 우리에게 우리의 대속물이자 모본이신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뜨거운 자각에서 이르러 온다.

<부가설명> 더 나은 의는 로마서 10:3에 말씀대로 하나님의 의이다. 문자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범하지 않고 다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고 있으면서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생활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켜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하여 더 나은 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가르쳐주었고 그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날 때 옛 사람에게 한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생명이 솟아나는 능력으로 지켜지는 생명력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거듭나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생활해야 더 나은 의로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4,5) 예수의 생명은 바로 그분의 부활하신 그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바리새인의 의와는 다른 성격의 의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완전한 율법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바로 하나님의 생명, 그분의 사랑이 그들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을 통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의도 얻게 될 것이다”(산상보훈, 55).

교훈 : 예수님은 인간이 노력하여 이룬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훨씬 능가하는 의, 즉 자아를 굴복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요구하신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4월 18일

<시대의 소망>, 395~398 “유전”, 610~620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음”과 마태복음 23장을 읽어 보라.

“인간의 권위, 교회의 관습 혹은 조상들의 유전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하신 말씀에 내포된 경고에 유의하도록 하라”(시대의 소망, 39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따르는 전통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들을 인정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전통들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며 공동체 생활 속에서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보편적인 중요성이 있는 전통은 무엇이며 지역과 문화적 요인에 기초한 전통은 무엇입니까?
※ 우리교회는 예언의 신의 증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대로 교회를 올바르게 지도하는 길잡이 노릇을 한다. 그리고 교회를 통일시키고 성경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우는 역할을 한다.

➋ “신자들은 때때로 그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사업의 발전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했어야 할 바로 그때에 원수가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도록 허락했다.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의의 길에서 멀리 떠나 방황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평과 흠을 찾는 정신, 바리새인적인 경건과 교만의 정신을 품음으로써 하나님의 영을 슬프시게 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의 사업을 크게 방해했다”(교회증언 9권, 125). 우리는 어떻게 “모르는 사이에” 의의 길에서 멀리 떠나게 됩니까? 자기 의의 틀에 갇히지 않으려면 어떤 단계를 밟아야 합니까?
※ 우리는 계속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깨닫기 위하여 헌신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면 의의 길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➌ 우리 교회 예배 순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는 왜 그런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까? 기원, 송영, 대표기도 등과 같은 각 순서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전통이 우리 신앙생활에 얼마나 깊숙이 맞물려 있는지 보여주는 교회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동시에 우리는 단지 전통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면 그것이 나쁜 것인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 교회 예배 순서에는 순서의 신학이 있다. 우리는 순서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조화하는지 잘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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