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과 그리스도와 모세의 법(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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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04-07 10:46 조회4,924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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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2과 그리스도와 모세의 법
4월 12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분
기억절 :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
도입)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5:46)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모세와 같은 선지자 혹은 예언자, 그리고 무수히 많은 구약의 말씀들을 통해 예언된 기사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지목한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구약전문의 중심이요, 신구약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가 되신다.
연구 범위 : 눅 2:21~24, 출 13:2, 12, 눅 2:41~52, 마 17:24~27, 요 8:1~11, 신 22:23~24.
*기억절 낭독·노래 MP3를 이용하면 기억절을 더욱 잘 외울 수 있습니다.(안교·선교 홈
페이지 안교자료실)
많은 기독교인은 예수님과 유대교의 관계가 부정적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수 세기 동안 반유대주의를 양산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안타까운 오해에 불과하다. 예수님이 종교적 남용에 대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셨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유대교의 창시자이셨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다룬 복음서의 기사들은 그분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태어나서 죽기까지 유대 문화에 완전히 몰입되었던 충실한 유대인이었음을 보여준다.
1세기의 모든 충성스러운 유대인과 같이 예수님도 모세의 법을 따르셨다. 신실한 유대인 부모의 밑에서 자라셨기에 그분은 하나님의 섭리에 뿌리를 둔 풍성한 지상의 유산을 온전히 존중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이 직접 그분의 뜻을 반영하고 열국의 등대 역할을 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모세에게 영감을 주어 율법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분은 율법의 조항을 충실하게 고수하셨다. 할례와 성전 방문 그리고 세금에 대한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언젠가 자신의 죽음과 하늘 봉사로 인해 완성될 제도에 대하여 변함없이 충실한 태도를 유지하셨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분이 예수님이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율법을 하나님의 긍정적인 선물로 받아들인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의 법 안에서 역동적으로 사셨던 예수님의 모본을 따른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어른이 어린이보다 준법정신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❷ 예수님이 율법을 준수하신 예를 들어보십시오.
❸ 그럼에도 예수님이 율법을 반대한다는 오해를 받으셨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❹ 최근에 우리가 율법의 교훈을 곡해하거나 무시하고 있다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요?
B. ❶ 사람들이 쉽게 위반하는 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❷ 예수님은 얼마나 성실한 율법의 준수자이셨습니까?
❸ 예수님은 율법의 본 취지를 밝히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셨습니까?
❹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와 능력으로 성실한 율법의 준수자가 될 수 있을까요?
결론 : 예수님은 율법의 시여자임과 동시에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이셨습니다. 비록 율법의 정신을 훼손시키는 인간의 규례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셨지만, 그분은 율법을 존중하셨고, 자신의 사역을 통해 율법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능력에 관한 교훈들을 강조하셨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안교반 또는 소그룹에 초청하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서로 소개합니다.
❷ 그들을 위해 각자가 그리고 안교반(소그룹)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이야기합니다.
❸ ‘나의 구도자 명단과 기도 목록’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할례와 봉헌식(눅 2:21~24)
4월 6일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제사하려 함이더라”(눅 2:21~24).
도입)
할례는 매우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 속에 하나님께서 창 17장에서 99세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끊어지리라(창17:14)고 하셨다. 우리는 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해야 했을까를 보아야 한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할례를 행한 것은 저들의 육적인 몸을 벗는 예식이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1)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고 하셨다. 성경의 이야기, 곧 복음의 이야기는 생명의 약속(딤후 1:1)에 대한 이야기이다. 할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적인 몸을 벗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표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99세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약속하셨지만 사라의 몸에서 날 후사를 아브라함은 99세, 사라는 90세가 되도록 주지 않으셨다. 여자의 생리가 끊어진 것을 안 사라는 이제 자신의 힘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자 사라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주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얻고자 시도하여 이스마엘을 얻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육적인 힘이 남아 있어 얻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기에는 부족한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식기능을 통해 태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태어난 아들을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셨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약속을 성취시킬 표상이 되어야 하였다. 이 할례는 남자의 성기의 표피를 베어 버리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남자의 성기의 청결을 위해 행하는 의식만이 아니다. 이것은 저들이 육신의 자녀로 태어난 것을 부인하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곧 육적인 몸을 벗는 행위였던 것이다.(골 2:11) 모든 인간은 육적인 출생을 통해서 남녀의 관계를 통해서 태어난다. 그러나 남자 없이 아담이 물려준 죽을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살려주시는 영(고전 15:45)이신 마지막 아담이신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표로 할례를 행하여야 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생식기의 일부인 표피를 잘라 내 저들의 씨로는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저들의 생식기의 일부를 제거하였고, 이를 통해 저들은 그 자신들의 육적인 몸을 벗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표시하는 행위를 한 것이다. 이는 또한 둘째 사망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할례를 통해 새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둘째 사망 곧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의미하며 할례는 바로 이 대속적 죽음, 곧 피를 흘리며 육체 가운데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상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며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창 17:4). 하나님이 이 언약을 세우셨을 때, 99세의 아브라함은 막 이스마엘을 낳았을 뿐 아직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지 못했을 때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집안에 속한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고 이후 그의 집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남아는 생후 8일째에 할례를 받도록 명령하셨다(창 17:9~12). 이 증표는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생후 8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이어도 할례는 행하여졌다(레 12:3, 요 7:22).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생후 8일째 되던 날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복음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그들의 경건한 생애로 인해 예수님의 지상 부모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 마리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로 묘사되었다(마 1:19, 눅 1:30).
아기 예수가 생후 8일이 되던 날에 그의 부모는 과거 무수한 히브리 남자들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작명과 할례를 위한 의식을 거행했다.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수백 년 전에 친히 제정하신 의식을 따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출 13:2, 12과 레 12:1~8의 말씀에 비추어 눅 2:21~2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무엇을 더 알게 되는가?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모본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교훈 : 예수님의 부모로 선택된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이 명하는 대로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행하고 그를 하나님께 봉헌했으며 산모를 위한 정결예식을 치렀다.
부가적용)
왜 할례는 태어 난지 팔일 만에 행하는가? 물론 할례를 팔일 만에 행하는 것은 가장 통증이 적고 빨리 아물게 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는 더 큰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날은 안식 후 첫날 곧 여덟 번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다. 이 땅에 태어남과 동시에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신 것은 그가 육적인 몸을 벗고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가 되시는 표상인 것이다. 죽을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실 부활의 몸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표상하고 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1-12). 할례와 침례는 같은 사건을 달리한 모습이다. 할례 역시 육적 몸을 벗고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 자들을 인친 사건이다. 바로 침례는 우리가 육신이 죽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의미로서의 육신의 장례식과 새 생명인 부활의 자녀로 태어나는 의미가 침례식이다. 할례와 침례는 그 영적인 의미에 있어 동일하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때에 하늘이 열린 사건은 예수께서 인간이 죽으면 다시는 볼 수 없는 하늘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늘 문을 여신 사건이 침례를 통해서 그려졌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둘째사망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받아야 할 그 심판의 죽음을 대신 받아 죽으신 그 죽음을 통한 대속의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의 받을 심판을 유월하게 될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믿음이 우리로 다시 생명을 얻게 할 믿음인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둘째 사망의 값을 치르신 십자가의 대속이 우리로 다가 올 하나님의 크신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낼 구원인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나 충실하기를 원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을 때 마리아는 처녀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녀의 자궁을 연 첫째 아기였다. 출애굽기 13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초태생(사람이든 가축이든)은 여호와께 바쳐야 했다. 또한 레 12:2~5에서 율법은 남아 출생 후 40일 또는 여아 출생 후 80일 동안 산모가 의식(儀式)적으로 부정하다고 규정했다. 기간이 끝나면 산모는 제사장에게 가서 제물을 드려야 했다.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법이 정한 의무를 철저하게 준수하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언약의 증표를 간직하도록 했다.
| 적용 |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그대가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율법의 모든 조목을 따르신 그리스도 -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지 약 40일 후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를 주께 바치고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이것은 유대인의 법에 따른 것으로 인간의 대속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모든 조목을 따라야 하였다. 그는 율법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으로서 이미 할례를 받으셨다”(시대의 소망, 50).
기 도
아버지, 저에게 알려주신 소중한 기별과 명령들을 겸손하게 따르며 살아가기를 원하오니 성령으로 저를 지도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보시기에 ‘의로운 자’요, 아버지께 ‘은혜 입은 자’ 되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유대인의 명절(요 5:1)
4월 7일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요 5:1).
교사강해 2)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은 매우 의미심장한 의미가 있다.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는데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유월절 양이 되셔야 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기 위해 모든 인생이 부활할 것이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은 백성이 되느냐 둘째 부활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느냐의 우리 인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엄숙한 심판이 곧 미래에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 심판을 통과할 수 있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 하나님의 계명인 십계명에 비추어 인간의 죄가 심판이 된다면 인간은 아무도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킨 사람이 없기에 죽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심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3-26)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 양, 곧 화목제물로 세우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심판이다. 우리의 죽고 사는 운명이 어떻게 갈라지게 될 것인가?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신32:39) 바로 죽이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시는 바로 그분이 누구이신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3-24)고 하신 바로 우리를 살리실 구주이신 것이다. 내 죄를 위해 둘째 사망, 곧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살게 될 것이고 죽음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무시무시한 둘째 사망, 곧 우리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우리의 죄로부터 넘어가게 할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유대력에서 첫 번째 큰 절기는 유월절로 시작하는 7일간의 무교절이다. 이 날은 죽음의 천사가 문틀에 피를 바른 집을 넘어가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한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유월절을 보내신 세 번의 경우를 기록하였다(눅 2:41~43, 요 2:13~23, 마 26:17~20).
유월절 이후 50일이 지나면 히브리어로 ‘샤부오트(Shavuot)’라 불리는 오순절이 이르러온다. 성경은 왜 오순절을 지켜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랍비들은 그날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사건을 기념한다고 믿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오순절을 지키셨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승천하시기 전에 그분은 성령의 침례를 받기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행 1:4~5). 그 일은 정확히 오순절에 일어났다(행 2:1~4).
유대력에서 초막절과 속죄일은 마지막 절기에 해당한다. 속죄일은 진중에서 죄를 도말하고 백성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날을 의미한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초막 생활을 했던 시절을 기념한다.
모세의 법이 정한 명절 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역사적인 개입을 기념하는 두 개의 명절을 더 지냈다. 첫째는 에스더가 페르시아 왕에게 간청하여 유대인들이 종족 학살로부터 구원을 얻은 날을 기념하는 부림절이다. 둘째는 수전절로 알려진 ‘하누카(Hanukah)’이다(요 10:22). 이날은 기원전 164년 마카비 군대가 그리스 군대로부터 얻은 승리를 기념한다.
물론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성경의 절기들은 오래전에 폐지되었다.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절기들을 연구함으로 그것들이 담고 있는 기별 외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절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구속의 능력에 관한 교훈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교훈 : 성경에 나타난 절기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으로 이미 성취되었지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해 여전히 많은 교훈을 가르친다.
부가적용)
유월절과 더불어 우리가 무교병을 먹으며 무교절을 지내는 것은 인간의 죄를 간과하여 넘어 가신 유월절 양 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가 없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죄를 소멸하시는 불이 되셔서 죄인에게 오셨다. 우리가 무교병을 먹는 것은 누룩 없는 자 곧 죄가 없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7-28)고 하셨다. 우리가 어떻게 죄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어주신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죄와 상관이 없어지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침례 받을 때, 우리는 둘째 사망을 당한 것이다.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산 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딤후1:7)라고 하였다.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의 심판을 대신 져주신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자유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로서(요일 5:1)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에 감사하며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절제, 곧 근신하며 살아가야 한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8-10)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우리의 영원한 사망, 곧 둘째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 우리는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시여~! 우리의 둘째 사망을 폐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 구원의 감격을 세상에 전하자. 조사심판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지 안 믿는지를 구별하는 심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증거인 사랑과 절제로 근신하며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특별한 신앙 강조 주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구약의 절기들을 지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모두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독교 절기들도 지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이교 관습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경회, 전도회, 춘계 기도 주일, 연말 기도 주일 같은 신앙 강조 주간이 있습니다. 또 성만찬 예식도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우리는 이런 기회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 적용 |
그대는 앞으로 신앙 강조 주간을 어떻게 보내기로 결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진리를 선포하는 절기들 -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같은 그들의 절기와 또 이 회집의 행사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위탁하신 진리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집에서 백성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내며 그들의 특권과 그들의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접대에 감사를 표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을 의뢰하는 사람들을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었다”(하늘, 232).
기 도
아버지께서 우리의 신앙을 위해 세심하게 설계해 놓으신 계획들을 겸손하게 따르기를 원합니다. 흐트러진 신앙을 되잡고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셋째날(화) 예수님과 성전
4월 8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눅 2:49).
교사강해 3)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들은 마치 연인을 사모하듯이 성전을 사모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여겼다. 성전은 그들의 안식처요, 상한 심령이 치료받는 곳이요, 꿈을 꾸는 곳이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행복을 얻었다. 따라서 그들은 성전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고 기뻐서 감격어린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곤 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올라갈 때 마치 천국에 올라가는 것처럼 기뻐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신앙 고백 시 가운데서 성전에 대한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시편 26편 8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편 27편 4절)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였도다"(시편 122편 1절) 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로 성전은 예수님의 표상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19-21)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성장기에 대해 많은 정보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눅 2:41~52에는 큰 통찰을 주는 한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과 그의 부모가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야기이다. 그 기사를 읽고 다음의 질문에 답하라.
이 기사는 복음서에 나타난 뚜렷한 유대교적 특성을 어떻게 예증하는가? 그리고 발생하는 모든 일에 종교가 얼마나 핵심적인 의미였는지를 보여주는가?
이 사건이 유월절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님의 부모는 며칠 동안 아들을 찾지 못했는가? 여기서 그대는 어떤 교훈을 배우는가?
예수님은 순종적인 자녀였지만 여기서 부모에게 했던 대답은 거의 책망에 가까워 보인다. 그분의 대답에는 어떤 요점이 담겨 있는가? 이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최우선 순위로 삼아야 할지 말해 주는가?
눅 2:51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부모에게 순종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낮추셨는지 보여주는가? 이 말씀은 때와 장소에 맞게 순종할 필요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교훈 : 12살이 되던 해 유월절에 예수님은 성전을 방문하셨다. 그의 부모는 그 일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지만 그분은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깨달았다.
부가적용)
세상에는 죄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죄는 온 세상에 가득하였다. 세상에는 전혀 희망이 없었다. 더 깊은 죄의 수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사람과 세상은 사랑할 대상이 못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외면하지 않았다. 출애굽기 25장 8절을 보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가득한 세상에다 성소를 짓게 하시고 그곳을 거처로 삼으셨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외면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성소를 거처로 삼으셨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든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겔할더스 보스는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 분 자신을 동일시하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며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관심의 표현이다"고 하였다. 성전은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의 구약적 표현이다. 지극히 높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어 이 땅에 거처를 두시고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을 지극히 사모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성전에서 경험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일화는 그분이 구약의 명령에 충실한 유대인 공동체의 일원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의무를 마치고 떠난 부모와 다른 일행과 달리 예수님은 성전에 더 머무셨습니다. 그러는 사이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을 시야에서 놓쳤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실하다 할지라도 의무에 급급한 신앙을 하다보면 예수님을 놓칠 우려가 있습니다. ‘내 할 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하나님 만나기’를 바라며 조금 더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는 것이 어떨까요?
| 적용 |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대는 어떤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성전에서 공개된 구주의 사명의 신비 - “소년 예수께서 처음으로 성전을 바라보셨다.… 그는 그 감명적인 유월절 예식들을 목도하셨다. 그는 날마다 그 예식들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셨다. 의식의 모든 행사는 자신의 생명과 관련이 있는 듯이 보였다. 새로운 충동이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조용하고 열심히 어떤 큰 문제를 풀어내시려고 하는 듯이 보였다. 당신의 사명의 신비가 구주에게 공개되고 있었다”(시대의 소망, 77~78).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를 아버지 품 같은 성전으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의 사물에 어두워진 제 마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아버지의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가난한 마음이 주를 만난 기쁨으로 채워지게 하옵소서.
넷째날(수) 세금(마 17:24~27)
4월 9일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마 17:25).
교사강해 4)
출애굽기 30장 12절을 보면, 출애굽 시켜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드린 ‘생명의 속전’으로 유대인 남자들은 20세 이상이 되면 성전 유지와 관리를 위한 세금을 매년 반 세겔씩 내야 했다. 그동안 유대의 사회,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안식일 논쟁을 벌였고(마 12:1-13), 바알세불 논쟁을 벌였고(마 12:22-37), 장로들의 유전(遺傳, 傳統)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마15:1-20) 이어서 오늘 본문은 성전세를 거두는 직원을 앞세워서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계획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었다. 이에 베드로는 베드로답게 주님께 납세 여부도 묻지도 않고 단정적으로 ‘내신다!’고 대답을 해버렸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갔을 때, 주님이 먼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v.25)하고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베드로는 ‘타인에게니이다.’(v.26)라고 대답했다. 이에 주님은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v.26)고 하셨다. 이상은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주님은 성전을 깨끗케 하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7)는 말씀을 인용하셨다.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또한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세상의 임금들이 아들에게 세금을 받지 않고 백성들에게 받듯이 주님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 성전의 주인이심으로 자신도 성전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주인은 여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지난 과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모세의 법은 사회적인 요소와 제의적인 요소를 포괄한다. 제의적인 측면에서 성전은 유대교의 중심지였다. 사실 1세기의 성전은 유대인들이 국가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현존 건축물이었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은 예수님 당시에 개축 공사 중이었다. 헤롯 대왕이 기원전 20년에 시작한 거대한 계획은 기원후 66년까지 완공되지 못했다. 유대인들에게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그들에게 성전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세금을 거둘 수 있도록 허용했다. 20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 남자는 경제적 지위와 관계없이 반 세겔의 세를 내야 했다(출 30:13, 38:26).
마 17:24~27을 읽어 보라.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할 원칙은 무엇인가?
성전세 징수원은 모든 남자가 법적 의무를 이행하도록 지방을 순회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징수원에게 보였던 베드로의 반응은 예수님이 정규적으로 성전세를 내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마 17:24~25).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이 아버지 집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하셨다.
“예수께서 만일 한 마디의 항의도 없이 성전세를 바치셨더라면 그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사실상 승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신성도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요구에 응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셨으나 그 주장을 하게 된 근본 문제에 대해서는 부인하셨다. 세를 지불하실 돈을 준비하심으로써 그는 자신의 신적인 신분에 대한 증거를 보이셨다.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자요 그러므로 그 나라의 일개 시민처럼 세를 내실 의무가 없으시다는 것이 명백하여졌다”(시대의 소망, 434).
교훈 : 예수님은 다른 이의 실족을 막기 위해 모든 유대인 남자가 지불해야 할 성전세를 냈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입장에서 그 요구의 정당성은 거절하셨다.
부가적용)
주님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셔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주님은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마 15:27)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주님을 성전세를 내지 않고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로 오해하지 않도록 세금을 내셨다는 뜻이고, 나아가 사람들이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의심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세금을 내셨다는 뜻이다. 즉 메시야의 사명을 다 하시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세금을 내셨다는 뜻이다. 일찍이 주님은 죄가 없으심으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지 않으셔도 아무 문제가 없으셨으나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침례를 받으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성전세를 내셨다. 주님은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시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절제하셨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위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게 알맞게 이방인에게는 그들에게 알맞게 복음을 전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았고 믿음이 강한 자들 앞에서는 담대히 행했다. 즉 자신의 자유를 절제했다. 이것이 겸손이요 이것이 지혜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나의 권리와 자유를 절제하는 것이 지혜이다. 복음을 위해 나의 권리와 자유를 절제하는 것이 지혜이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예수님의 성실한 성전세 납부는 그대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그 권위를 인정하시고 베드로에게 그가 잡은 첫 번째 물고기의 입에서 동전을 꺼내 세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하셨다. 물고기의 입에서 꺼낸 세겔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를 내고 남는 액수였다.
| 적용 |
자신의 헌금 생활이나 세금 납부에 불찰이 있지 않나 돌아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할 수만 있으면 논쟁을 피하라 - “예수께서는 당신이 세를 바칠 의무가 없음을 명백히 하시는 한편 그 문제에 대해서 유대인들과 쟁론하시지 아니하였는데 그 까닭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곡해하고 그 말씀으로 자기를 적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한 가지 원칙이라도 희생시켜서는 안 되지만 어느 때에든지 할 수만 있으면 논쟁을 피해야 한다”(시대의 소망, 434).
기 도
아버지, 교회의 재정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제게 청지기 직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세속 정부가 요구하는 세금도 정직하게 납부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어떤 누도 끼치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섯째날(목) 법 집행(마 5:17~20)
4월 10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교사강해 5)
예수께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십계명은 폐할 수 없는 영원한 도덕법이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3:7-8)고 사도바울은 말한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이 무엇인가? 십계명의 의문 곧 글자의 직분은 죄인들을 죽게 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다. 십계명이 폐하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십계명은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직분을 가졌다. 모든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십계명의 의문의 직분이 사람을 죽게 한다면 의의 직분, 곧 사람을 살리는 언약, 곧 의의 직분을 가진 의가 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3:7-9)고 되어 있다. 모든 옳은 동기와 옳은 의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으면 우리는 의를 행할 수도 없고 의롭게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모시어 우리의 구주가 되도록 하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심비에 새겨서 우리를 깨우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올바로 지킬 수 없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우리로 정죄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들, 그분을 믿는 자들은 의롭게 되며 의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구주이시다.
예수님은 목숨이 위태롭더라도 유대인 남성의 의무를 다한 충실한 시민이었다(요 7:1, 25~26, 10:31 참고). 실제로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다(마 5:17~20).
그렇다면 신 22:23~24, 24:1~4에 비춰볼 때 우리는 요 8:1~11과 마 19:1~19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예수님이 율법의 파괴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간음의 현장에서 붙잡은 여인을 데리고 와서 모세라면 돌로 쳐 죽이라고 했을 텐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으셨다. 대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는 대답으로 모세의 법을 인정하셨다. 그분은 그녀가 돌로 맞아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다. 여인의 석방은 모세의 법에 맞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고소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신 17:6).
이혼과 재혼에 관한 논쟁에서 예수님은 원래 이혼을 정당화할 근거는 없다는 주장을 펼침으로 모세의 법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다(마 19:4~6). 바리새인들이 신 24:1~4에 있는 모세의 명령을 지적하자, 예수님은 시야를 확대하셨다. 사실 모세는 이혼해야 한다고 명령한 적이 없다. 단지 백성들의 완고함 때문에 이혼을 허용했을 뿐이다(마 19:8). 따라서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절대 그것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모세의 법을 고수하는 충실한 유대인이셨다.
교훈 : 예수님은 결코 모세의 법을 무시하거나 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히려 모세의 법을 충실히 지키는 유대인이셨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계명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하셨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540)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영생의 조건이 요 17: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또한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4-45)고 말씀하셨다. 십계명을 선포하여 모세에게 이 계명을 주신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에 모시어지게 될 때, 우리는 이 십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십계명을 지킬 수도 이룰수도 없다. 예수님의 모든 의의 원천이시며 모든 의가 되신다. 고후 3:7-18절을 보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7-18) 돌에 써서 새긴 이 의문의 율법(고후 3:7)인 십계명 조차도 그 영광이 커서 모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는데, 그 보다 더 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분을 모시게 되면 우리의 마음에 의로운 생각, 의로운 마음이 시작이 된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자. 이것이 곧 의가 시작되는 첫 걸음이다. 그분은 우리의 의이시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대립하시는 모습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에 비춰진 예수님의 모습을 오해합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께서 기존 법과 질서를 허무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들의 파괴적인 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자신이 제정하신 법과 질서의 취지를 다시 바르게 세우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려면 파괴적인 접근이 아니라 건설적인 접근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 적용 |
우리의 법이나 제도 가운데 부정하고 폐할 것이 아니라 보완하고 완전하게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법 - “그분께서 의의 원칙들을 밝히실 때, 바리새인들은 그분의 가르치심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계명과 반대된다고 서로 속삭였다. 구주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신앙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동요케 할 말씀은 전혀 안 하셨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인 그가 백성들에게 전달해 준 거룩한 빛의 모든 광선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산상보훈, 47).
기 도
아버지, 제가 개혁을 외치면서 교만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제 자신을 개혁할 수 있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본래의 가치를 바르게 세우는 도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4월 11일
<시대의 소망>, 447~454 “초막절에서”, 455~462 “함정 가운데서”를 읽어 보라.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번씩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이도록 명령을 받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의 인도자께서 구름기둥에 싸여 이 모임에 관한 지시를 주셨다. 유대인의 유수(幽囚)기간에는 이 기념일들이 준수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하자 그 절기들은 또다시 준수되기 시작하였다. 이 기념일들이 백성들의 마음에 당신을 상기시켜 주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시대의 소망, 447).
“예수의 부모가 그를 그들의 자식으로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는 날마다 그들과 같이 살고 그의 생애는 여러 가지 점으로 다른 아이들과 같았으므로 그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그들에게 세상의 구주와 같이 살게 하신 축복을 감사하지 않을 위험이 있었다. 그와 헤어짐으로 그들이 괴로워한 일이나 그가 은근히 책망한 말은 그들에게 그들이 맡은 책임의 신성성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시대의 소망, 8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예수님이 법의 창시자이시면서 인성을 입고 법 아래 계셨다는 놀라운 진리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➋ 그대가 요셉과 마리아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어떻게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할 수 있을까요?
➌ 우리가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자가 있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힌트 : 여러분은 다음의 질문으로 답변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절기 준수는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성전이 파괴되고 피 흘리는 제사가 중단됐는데 어떻게 절기들을 지키려고 합니까?’)
4월 12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분
기억절 :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
도입)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5:46)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모세와 같은 선지자 혹은 예언자, 그리고 무수히 많은 구약의 말씀들을 통해 예언된 기사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지목한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구약전문의 중심이요, 신구약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가 되신다.
연구 범위 : 눅 2:21~24, 출 13:2, 12, 눅 2:41~52, 마 17:24~27, 요 8:1~11, 신 22:23~24.
*기억절 낭독·노래 MP3를 이용하면 기억절을 더욱 잘 외울 수 있습니다.(안교·선교 홈
페이지 안교자료실)
많은 기독교인은 예수님과 유대교의 관계가 부정적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수 세기 동안 반유대주의를 양산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안타까운 오해에 불과하다. 예수님이 종교적 남용에 대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셨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유대교의 창시자이셨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다룬 복음서의 기사들은 그분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태어나서 죽기까지 유대 문화에 완전히 몰입되었던 충실한 유대인이었음을 보여준다.
1세기의 모든 충성스러운 유대인과 같이 예수님도 모세의 법을 따르셨다. 신실한 유대인 부모의 밑에서 자라셨기에 그분은 하나님의 섭리에 뿌리를 둔 풍성한 지상의 유산을 온전히 존중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이 직접 그분의 뜻을 반영하고 열국의 등대 역할을 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모세에게 영감을 주어 율법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분은 율법의 조항을 충실하게 고수하셨다. 할례와 성전 방문 그리고 세금에 대한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언젠가 자신의 죽음과 하늘 봉사로 인해 완성될 제도에 대하여 변함없이 충실한 태도를 유지하셨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분이 예수님이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율법을 하나님의 긍정적인 선물로 받아들인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의 법 안에서 역동적으로 사셨던 예수님의 모본을 따른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어른이 어린이보다 준법정신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❷ 예수님이 율법을 준수하신 예를 들어보십시오.
❸ 그럼에도 예수님이 율법을 반대한다는 오해를 받으셨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❹ 최근에 우리가 율법의 교훈을 곡해하거나 무시하고 있다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요?
B. ❶ 사람들이 쉽게 위반하는 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❷ 예수님은 얼마나 성실한 율법의 준수자이셨습니까?
❸ 예수님은 율법의 본 취지를 밝히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셨습니까?
❹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와 능력으로 성실한 율법의 준수자가 될 수 있을까요?
결론 : 예수님은 율법의 시여자임과 동시에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이셨습니다. 비록 율법의 정신을 훼손시키는 인간의 규례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셨지만, 그분은 율법을 존중하셨고, 자신의 사역을 통해 율법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능력에 관한 교훈들을 강조하셨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안교반 또는 소그룹에 초청하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서로 소개합니다.
❷ 그들을 위해 각자가 그리고 안교반(소그룹)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이야기합니다.
❸ ‘나의 구도자 명단과 기도 목록’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할례와 봉헌식(눅 2:21~24)
4월 6일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제사하려 함이더라”(눅 2:21~24).
도입)
할례는 매우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 속에 하나님께서 창 17장에서 99세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끊어지리라(창17:14)고 하셨다. 우리는 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해야 했을까를 보아야 한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할례를 행한 것은 저들의 육적인 몸을 벗는 예식이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1)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고 하셨다. 성경의 이야기, 곧 복음의 이야기는 생명의 약속(딤후 1:1)에 대한 이야기이다. 할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적인 몸을 벗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표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99세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약속하셨지만 사라의 몸에서 날 후사를 아브라함은 99세, 사라는 90세가 되도록 주지 않으셨다. 여자의 생리가 끊어진 것을 안 사라는 이제 자신의 힘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자 사라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주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얻고자 시도하여 이스마엘을 얻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육적인 힘이 남아 있어 얻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기에는 부족한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식기능을 통해 태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태어난 아들을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셨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약속을 성취시킬 표상이 되어야 하였다. 이 할례는 남자의 성기의 표피를 베어 버리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남자의 성기의 청결을 위해 행하는 의식만이 아니다. 이것은 저들이 육신의 자녀로 태어난 것을 부인하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곧 육적인 몸을 벗는 행위였던 것이다.(골 2:11) 모든 인간은 육적인 출생을 통해서 남녀의 관계를 통해서 태어난다. 그러나 남자 없이 아담이 물려준 죽을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살려주시는 영(고전 15:45)이신 마지막 아담이신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표로 할례를 행하여야 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생식기의 일부인 표피를 잘라 내 저들의 씨로는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저들의 생식기의 일부를 제거하였고, 이를 통해 저들은 그 자신들의 육적인 몸을 벗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표시하는 행위를 한 것이다. 이는 또한 둘째 사망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할례를 통해 새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둘째 사망 곧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의미하며 할례는 바로 이 대속적 죽음, 곧 피를 흘리며 육체 가운데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상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며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창 17:4). 하나님이 이 언약을 세우셨을 때, 99세의 아브라함은 막 이스마엘을 낳았을 뿐 아직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지 못했을 때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집안에 속한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고 이후 그의 집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남아는 생후 8일째에 할례를 받도록 명령하셨다(창 17:9~12). 이 증표는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생후 8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이어도 할례는 행하여졌다(레 12:3, 요 7:22).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생후 8일째 되던 날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복음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그들의 경건한 생애로 인해 예수님의 지상 부모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 마리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로 묘사되었다(마 1:19, 눅 1:30).
아기 예수가 생후 8일이 되던 날에 그의 부모는 과거 무수한 히브리 남자들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작명과 할례를 위한 의식을 거행했다.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수백 년 전에 친히 제정하신 의식을 따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출 13:2, 12과 레 12:1~8의 말씀에 비추어 눅 2:21~2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무엇을 더 알게 되는가?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모본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교훈 : 예수님의 부모로 선택된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이 명하는 대로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행하고 그를 하나님께 봉헌했으며 산모를 위한 정결예식을 치렀다.
부가적용)
왜 할례는 태어 난지 팔일 만에 행하는가? 물론 할례를 팔일 만에 행하는 것은 가장 통증이 적고 빨리 아물게 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는 더 큰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날은 안식 후 첫날 곧 여덟 번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다. 이 땅에 태어남과 동시에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신 것은 그가 육적인 몸을 벗고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가 되시는 표상인 것이다. 죽을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실 부활의 몸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표상하고 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1-12). 할례와 침례는 같은 사건을 달리한 모습이다. 할례 역시 육적 몸을 벗고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 자들을 인친 사건이다. 바로 침례는 우리가 육신이 죽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의미로서의 육신의 장례식과 새 생명인 부활의 자녀로 태어나는 의미가 침례식이다. 할례와 침례는 그 영적인 의미에 있어 동일하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때에 하늘이 열린 사건은 예수께서 인간이 죽으면 다시는 볼 수 없는 하늘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늘 문을 여신 사건이 침례를 통해서 그려졌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둘째사망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받아야 할 그 심판의 죽음을 대신 받아 죽으신 그 죽음을 통한 대속의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의 받을 심판을 유월하게 될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믿음이 우리로 다시 생명을 얻게 할 믿음인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둘째 사망의 값을 치르신 십자가의 대속이 우리로 다가 올 하나님의 크신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낼 구원인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나 충실하기를 원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을 때 마리아는 처녀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녀의 자궁을 연 첫째 아기였다. 출애굽기 13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초태생(사람이든 가축이든)은 여호와께 바쳐야 했다. 또한 레 12:2~5에서 율법은 남아 출생 후 40일 또는 여아 출생 후 80일 동안 산모가 의식(儀式)적으로 부정하다고 규정했다. 기간이 끝나면 산모는 제사장에게 가서 제물을 드려야 했다.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법이 정한 의무를 철저하게 준수하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언약의 증표를 간직하도록 했다.
| 적용 |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그대가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율법의 모든 조목을 따르신 그리스도 -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지 약 40일 후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를 주께 바치고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이것은 유대인의 법에 따른 것으로 인간의 대속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모든 조목을 따라야 하였다. 그는 율법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으로서 이미 할례를 받으셨다”(시대의 소망, 50).
기 도
아버지, 저에게 알려주신 소중한 기별과 명령들을 겸손하게 따르며 살아가기를 원하오니 성령으로 저를 지도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보시기에 ‘의로운 자’요, 아버지께 ‘은혜 입은 자’ 되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유대인의 명절(요 5:1)
4월 7일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요 5:1).
교사강해 2)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은 매우 의미심장한 의미가 있다.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는데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유월절 양이 되셔야 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기 위해 모든 인생이 부활할 것이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은 백성이 되느냐 둘째 부활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느냐의 우리 인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엄숙한 심판이 곧 미래에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 심판을 통과할 수 있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 하나님의 계명인 십계명에 비추어 인간의 죄가 심판이 된다면 인간은 아무도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킨 사람이 없기에 죽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심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3-26)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 양, 곧 화목제물로 세우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심판이다. 우리의 죽고 사는 운명이 어떻게 갈라지게 될 것인가?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신32:39) 바로 죽이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시는 바로 그분이 누구이신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3-24)고 하신 바로 우리를 살리실 구주이신 것이다. 내 죄를 위해 둘째 사망, 곧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살게 될 것이고 죽음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무시무시한 둘째 사망, 곧 우리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우리의 죄로부터 넘어가게 할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유대력에서 첫 번째 큰 절기는 유월절로 시작하는 7일간의 무교절이다. 이 날은 죽음의 천사가 문틀에 피를 바른 집을 넘어가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한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유월절을 보내신 세 번의 경우를 기록하였다(눅 2:41~43, 요 2:13~23, 마 26:17~20).
유월절 이후 50일이 지나면 히브리어로 ‘샤부오트(Shavuot)’라 불리는 오순절이 이르러온다. 성경은 왜 오순절을 지켜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랍비들은 그날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사건을 기념한다고 믿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오순절을 지키셨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승천하시기 전에 그분은 성령의 침례를 받기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행 1:4~5). 그 일은 정확히 오순절에 일어났다(행 2:1~4).
유대력에서 초막절과 속죄일은 마지막 절기에 해당한다. 속죄일은 진중에서 죄를 도말하고 백성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날을 의미한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초막 생활을 했던 시절을 기념한다.
모세의 법이 정한 명절 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역사적인 개입을 기념하는 두 개의 명절을 더 지냈다. 첫째는 에스더가 페르시아 왕에게 간청하여 유대인들이 종족 학살로부터 구원을 얻은 날을 기념하는 부림절이다. 둘째는 수전절로 알려진 ‘하누카(Hanukah)’이다(요 10:22). 이날은 기원전 164년 마카비 군대가 그리스 군대로부터 얻은 승리를 기념한다.
물론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성경의 절기들은 오래전에 폐지되었다.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절기들을 연구함으로 그것들이 담고 있는 기별 외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절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구속의 능력에 관한 교훈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교훈 : 성경에 나타난 절기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으로 이미 성취되었지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해 여전히 많은 교훈을 가르친다.
부가적용)
유월절과 더불어 우리가 무교병을 먹으며 무교절을 지내는 것은 인간의 죄를 간과하여 넘어 가신 유월절 양 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가 없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죄를 소멸하시는 불이 되셔서 죄인에게 오셨다. 우리가 무교병을 먹는 것은 누룩 없는 자 곧 죄가 없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7-28)고 하셨다. 우리가 어떻게 죄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어주신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죄와 상관이 없어지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침례 받을 때, 우리는 둘째 사망을 당한 것이다.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산 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딤후1:7)라고 하였다.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의 심판을 대신 져주신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자유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로서(요일 5:1)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에 감사하며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절제, 곧 근신하며 살아가야 한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8-10)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우리의 영원한 사망, 곧 둘째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 우리는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시여~! 우리의 둘째 사망을 폐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 구원의 감격을 세상에 전하자. 조사심판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지 안 믿는지를 구별하는 심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증거인 사랑과 절제로 근신하며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특별한 신앙 강조 주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구약의 절기들을 지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모두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독교 절기들도 지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이교 관습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경회, 전도회, 춘계 기도 주일, 연말 기도 주일 같은 신앙 강조 주간이 있습니다. 또 성만찬 예식도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우리는 이런 기회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 적용 |
그대는 앞으로 신앙 강조 주간을 어떻게 보내기로 결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진리를 선포하는 절기들 -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같은 그들의 절기와 또 이 회집의 행사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위탁하신 진리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집에서 백성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내며 그들의 특권과 그들의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접대에 감사를 표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을 의뢰하는 사람들을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었다”(하늘, 232).
기 도
아버지께서 우리의 신앙을 위해 세심하게 설계해 놓으신 계획들을 겸손하게 따르기를 원합니다. 흐트러진 신앙을 되잡고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셋째날(화) 예수님과 성전
4월 8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눅 2:49).
교사강해 3)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들은 마치 연인을 사모하듯이 성전을 사모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여겼다. 성전은 그들의 안식처요, 상한 심령이 치료받는 곳이요, 꿈을 꾸는 곳이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행복을 얻었다. 따라서 그들은 성전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고 기뻐서 감격어린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곤 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올라갈 때 마치 천국에 올라가는 것처럼 기뻐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신앙 고백 시 가운데서 성전에 대한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시편 26편 8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편 27편 4절)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였도다"(시편 122편 1절) 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로 성전은 예수님의 표상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19-21)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성장기에 대해 많은 정보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눅 2:41~52에는 큰 통찰을 주는 한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과 그의 부모가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야기이다. 그 기사를 읽고 다음의 질문에 답하라.
이 기사는 복음서에 나타난 뚜렷한 유대교적 특성을 어떻게 예증하는가? 그리고 발생하는 모든 일에 종교가 얼마나 핵심적인 의미였는지를 보여주는가?
이 사건이 유월절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님의 부모는 며칠 동안 아들을 찾지 못했는가? 여기서 그대는 어떤 교훈을 배우는가?
예수님은 순종적인 자녀였지만 여기서 부모에게 했던 대답은 거의 책망에 가까워 보인다. 그분의 대답에는 어떤 요점이 담겨 있는가? 이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최우선 순위로 삼아야 할지 말해 주는가?
눅 2:51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부모에게 순종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낮추셨는지 보여주는가? 이 말씀은 때와 장소에 맞게 순종할 필요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교훈 : 12살이 되던 해 유월절에 예수님은 성전을 방문하셨다. 그의 부모는 그 일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지만 그분은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깨달았다.
부가적용)
세상에는 죄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죄는 온 세상에 가득하였다. 세상에는 전혀 희망이 없었다. 더 깊은 죄의 수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사람과 세상은 사랑할 대상이 못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외면하지 않았다. 출애굽기 25장 8절을 보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가득한 세상에다 성소를 짓게 하시고 그곳을 거처로 삼으셨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외면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성소를 거처로 삼으셨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든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겔할더스 보스는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 분 자신을 동일시하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며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관심의 표현이다"고 하였다. 성전은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의 구약적 표현이다. 지극히 높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어 이 땅에 거처를 두시고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을 지극히 사모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성전에서 경험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일화는 그분이 구약의 명령에 충실한 유대인 공동체의 일원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의무를 마치고 떠난 부모와 다른 일행과 달리 예수님은 성전에 더 머무셨습니다. 그러는 사이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을 시야에서 놓쳤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실하다 할지라도 의무에 급급한 신앙을 하다보면 예수님을 놓칠 우려가 있습니다. ‘내 할 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하나님 만나기’를 바라며 조금 더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는 것이 어떨까요?
| 적용 |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대는 어떤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성전에서 공개된 구주의 사명의 신비 - “소년 예수께서 처음으로 성전을 바라보셨다.… 그는 그 감명적인 유월절 예식들을 목도하셨다. 그는 날마다 그 예식들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셨다. 의식의 모든 행사는 자신의 생명과 관련이 있는 듯이 보였다. 새로운 충동이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조용하고 열심히 어떤 큰 문제를 풀어내시려고 하는 듯이 보였다. 당신의 사명의 신비가 구주에게 공개되고 있었다”(시대의 소망, 77~78).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를 아버지 품 같은 성전으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의 사물에 어두워진 제 마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아버지의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가난한 마음이 주를 만난 기쁨으로 채워지게 하옵소서.
넷째날(수) 세금(마 17:24~27)
4월 9일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마 17:25).
교사강해 4)
출애굽기 30장 12절을 보면, 출애굽 시켜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드린 ‘생명의 속전’으로 유대인 남자들은 20세 이상이 되면 성전 유지와 관리를 위한 세금을 매년 반 세겔씩 내야 했다. 그동안 유대의 사회,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안식일 논쟁을 벌였고(마 12:1-13), 바알세불 논쟁을 벌였고(마 12:22-37), 장로들의 유전(遺傳, 傳統)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마15:1-20) 이어서 오늘 본문은 성전세를 거두는 직원을 앞세워서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계획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었다. 이에 베드로는 베드로답게 주님께 납세 여부도 묻지도 않고 단정적으로 ‘내신다!’고 대답을 해버렸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갔을 때, 주님이 먼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v.25)하고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베드로는 ‘타인에게니이다.’(v.26)라고 대답했다. 이에 주님은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v.26)고 하셨다. 이상은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주님은 성전을 깨끗케 하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7)는 말씀을 인용하셨다.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또한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세상의 임금들이 아들에게 세금을 받지 않고 백성들에게 받듯이 주님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 성전의 주인이심으로 자신도 성전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주인은 여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지난 과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모세의 법은 사회적인 요소와 제의적인 요소를 포괄한다. 제의적인 측면에서 성전은 유대교의 중심지였다. 사실 1세기의 성전은 유대인들이 국가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현존 건축물이었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은 예수님 당시에 개축 공사 중이었다. 헤롯 대왕이 기원전 20년에 시작한 거대한 계획은 기원후 66년까지 완공되지 못했다. 유대인들에게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그들에게 성전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세금을 거둘 수 있도록 허용했다. 20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 남자는 경제적 지위와 관계없이 반 세겔의 세를 내야 했다(출 30:13, 38:26).
마 17:24~27을 읽어 보라.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할 원칙은 무엇인가?
성전세 징수원은 모든 남자가 법적 의무를 이행하도록 지방을 순회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징수원에게 보였던 베드로의 반응은 예수님이 정규적으로 성전세를 내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마 17:24~25).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이 아버지 집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하셨다.
“예수께서 만일 한 마디의 항의도 없이 성전세를 바치셨더라면 그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사실상 승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신성도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요구에 응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셨으나 그 주장을 하게 된 근본 문제에 대해서는 부인하셨다. 세를 지불하실 돈을 준비하심으로써 그는 자신의 신적인 신분에 대한 증거를 보이셨다.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자요 그러므로 그 나라의 일개 시민처럼 세를 내실 의무가 없으시다는 것이 명백하여졌다”(시대의 소망, 434).
교훈 : 예수님은 다른 이의 실족을 막기 위해 모든 유대인 남자가 지불해야 할 성전세를 냈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입장에서 그 요구의 정당성은 거절하셨다.
부가적용)
주님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셔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주님은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마 15:27)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주님을 성전세를 내지 않고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로 오해하지 않도록 세금을 내셨다는 뜻이고, 나아가 사람들이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의심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세금을 내셨다는 뜻이다. 즉 메시야의 사명을 다 하시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세금을 내셨다는 뜻이다. 일찍이 주님은 죄가 없으심으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지 않으셔도 아무 문제가 없으셨으나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침례를 받으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성전세를 내셨다. 주님은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시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절제하셨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위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게 알맞게 이방인에게는 그들에게 알맞게 복음을 전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았고 믿음이 강한 자들 앞에서는 담대히 행했다. 즉 자신의 자유를 절제했다. 이것이 겸손이요 이것이 지혜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나의 권리와 자유를 절제하는 것이 지혜이다. 복음을 위해 나의 권리와 자유를 절제하는 것이 지혜이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예수님의 성실한 성전세 납부는 그대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그 권위를 인정하시고 베드로에게 그가 잡은 첫 번째 물고기의 입에서 동전을 꺼내 세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하셨다. 물고기의 입에서 꺼낸 세겔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를 내고 남는 액수였다.
| 적용 |
자신의 헌금 생활이나 세금 납부에 불찰이 있지 않나 돌아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할 수만 있으면 논쟁을 피하라 - “예수께서는 당신이 세를 바칠 의무가 없음을 명백히 하시는 한편 그 문제에 대해서 유대인들과 쟁론하시지 아니하였는데 그 까닭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곡해하고 그 말씀으로 자기를 적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한 가지 원칙이라도 희생시켜서는 안 되지만 어느 때에든지 할 수만 있으면 논쟁을 피해야 한다”(시대의 소망, 434).
기 도
아버지, 교회의 재정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제게 청지기 직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세속 정부가 요구하는 세금도 정직하게 납부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어떤 누도 끼치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섯째날(목) 법 집행(마 5:17~20)
4월 10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교사강해 5)
예수께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십계명은 폐할 수 없는 영원한 도덕법이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3:7-8)고 사도바울은 말한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이 무엇인가? 십계명의 의문 곧 글자의 직분은 죄인들을 죽게 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다. 십계명이 폐하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십계명은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직분을 가졌다. 모든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십계명의 의문의 직분이 사람을 죽게 한다면 의의 직분, 곧 사람을 살리는 언약, 곧 의의 직분을 가진 의가 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3:7-9)고 되어 있다. 모든 옳은 동기와 옳은 의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으면 우리는 의를 행할 수도 없고 의롭게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모시어 우리의 구주가 되도록 하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심비에 새겨서 우리를 깨우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올바로 지킬 수 없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우리로 정죄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들, 그분을 믿는 자들은 의롭게 되며 의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구주이시다.
예수님은 목숨이 위태롭더라도 유대인 남성의 의무를 다한 충실한 시민이었다(요 7:1, 25~26, 10:31 참고). 실제로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다(마 5:17~20).
그렇다면 신 22:23~24, 24:1~4에 비춰볼 때 우리는 요 8:1~11과 마 19:1~19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예수님이 율법의 파괴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간음의 현장에서 붙잡은 여인을 데리고 와서 모세라면 돌로 쳐 죽이라고 했을 텐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으셨다. 대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는 대답으로 모세의 법을 인정하셨다. 그분은 그녀가 돌로 맞아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다. 여인의 석방은 모세의 법에 맞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고소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신 17:6).
이혼과 재혼에 관한 논쟁에서 예수님은 원래 이혼을 정당화할 근거는 없다는 주장을 펼침으로 모세의 법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다(마 19:4~6). 바리새인들이 신 24:1~4에 있는 모세의 명령을 지적하자, 예수님은 시야를 확대하셨다. 사실 모세는 이혼해야 한다고 명령한 적이 없다. 단지 백성들의 완고함 때문에 이혼을 허용했을 뿐이다(마 19:8). 따라서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절대 그것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모세의 법을 고수하는 충실한 유대인이셨다.
교훈 : 예수님은 결코 모세의 법을 무시하거나 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히려 모세의 법을 충실히 지키는 유대인이셨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계명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하셨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540)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영생의 조건이 요 17: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또한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4-45)고 말씀하셨다. 십계명을 선포하여 모세에게 이 계명을 주신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에 모시어지게 될 때, 우리는 이 십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십계명을 지킬 수도 이룰수도 없다. 예수님의 모든 의의 원천이시며 모든 의가 되신다. 고후 3:7-18절을 보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7-18) 돌에 써서 새긴 이 의문의 율법(고후 3:7)인 십계명 조차도 그 영광이 커서 모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는데, 그 보다 더 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분을 모시게 되면 우리의 마음에 의로운 생각, 의로운 마음이 시작이 된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자. 이것이 곧 의가 시작되는 첫 걸음이다. 그분은 우리의 의이시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대립하시는 모습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에 비춰진 예수님의 모습을 오해합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께서 기존 법과 질서를 허무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들의 파괴적인 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자신이 제정하신 법과 질서의 취지를 다시 바르게 세우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려면 파괴적인 접근이 아니라 건설적인 접근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 적용 |
우리의 법이나 제도 가운데 부정하고 폐할 것이 아니라 보완하고 완전하게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법 - “그분께서 의의 원칙들을 밝히실 때, 바리새인들은 그분의 가르치심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계명과 반대된다고 서로 속삭였다. 구주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신앙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동요케 할 말씀은 전혀 안 하셨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인 그가 백성들에게 전달해 준 거룩한 빛의 모든 광선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산상보훈, 47).
기 도
아버지, 제가 개혁을 외치면서 교만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제 자신을 개혁할 수 있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본래의 가치를 바르게 세우는 도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4월 11일
<시대의 소망>, 447~454 “초막절에서”, 455~462 “함정 가운데서”를 읽어 보라.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번씩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이도록 명령을 받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의 인도자께서 구름기둥에 싸여 이 모임에 관한 지시를 주셨다. 유대인의 유수(幽囚)기간에는 이 기념일들이 준수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하자 그 절기들은 또다시 준수되기 시작하였다. 이 기념일들이 백성들의 마음에 당신을 상기시켜 주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시대의 소망, 447).
“예수의 부모가 그를 그들의 자식으로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는 날마다 그들과 같이 살고 그의 생애는 여러 가지 점으로 다른 아이들과 같았으므로 그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그들에게 세상의 구주와 같이 살게 하신 축복을 감사하지 않을 위험이 있었다. 그와 헤어짐으로 그들이 괴로워한 일이나 그가 은근히 책망한 말은 그들에게 그들이 맡은 책임의 신성성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시대의 소망, 8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예수님이 법의 창시자이시면서 인성을 입고 법 아래 계셨다는 놀라운 진리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➋ 그대가 요셉과 마리아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어떻게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할 수 있을까요?
➌ 우리가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자가 있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힌트 : 여러분은 다음의 질문으로 답변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절기 준수는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성전이 파괴되고 피 흘리는 제사가 중단됐는데 어떻게 절기들을 지키려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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