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해설] 2024년 2기 6과. 두 증인 - 이주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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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주환 작성일24-05-03 14:57 조회1,190회 댓글3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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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섭님의 댓글
이동섭 작성일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5/7 교과에 대해 문의를 드립니다
교과가 "이교 로마 제국은 서기 538년에 무너졌다." 라고 시작을 하는데요
역사적으로 확인된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이교로마로 부르는 동고트는 538년에 무너지지 않았으며
538년은 동로마의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536년 로마를 수복한 후 동고트가 다시 로마를 1년간 포위했다가 후퇴한 년도일뿐입니다
그리고
"동로마황제 유스티아누스는 통치권과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모두 교황 바질리오에게 넘겨주었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것도 역사적 사실과 다릅니다
유스티아누스는 538년도 아니고 537년 3월 29일에 비질리오를 서로마의 주교로 임명하였을 뿐입니다 서로마주교에겐 통치권이나 정치적 권위는 없었습니다
AD533년12월16일에 공포된 로마법대전의 학설휘찬에 "교황은 모든교회의 머리"라는 칙령이 있다고 우리교회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만 이 이야기에서 조차 통치권이나 정치적 권위는 찾을 수 없고 538년이 되서야 이 법령이 제대로 실행됐을거라는 우리교단의 설명(바램?)과는 다르게 Digesta는 역사적으로 533년 12월 30일에 시행되었습니다 이 또한 538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교회가 근거로 제시하고있는 학설휘찬의 내용 중 어디에 교황이 모든 교회의 머리라는 내용이 있는지 확인을 부탁드립니다(라틴어 사본만 검색이되며 영어나 한글판을 인터넷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Chat GPT조차 (Digesta는 재산, 계약 및 기타 민사 문제와 관련된 법적 문제를 다루지만 기독교 교회의 계층 구조나 리더십 구조와 같은 교회 문제는 다루지 않습니다.)라고 나옵니다 이건 로마법대전인 Corpus Juris Civilis로 검색했을때도 마찬가지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오래전에 오도아케르 그리고 동고트에게 연속적으로 주권을 상실한 서로마의 실질적 통치권이나 정치적 권위는 군대를 보내서 로마를 수복한 동로마 황제인 유스티아누스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질리오 바로전 교황이었던 실베리오는 로마를 지키던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직권으로 폐위시키고 유배를 보낼만큼 권위 자체가 없었습니다
이 또한 538년과는 상관없는 537년의 일 입니다
우리 교단이 1260일 시작점으로 이야기하는 538년은 교황의 박해가 시작된 년도라고 주장하기에는 역사적 근거가 너무나도 빈약합니다 물론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 수 없는 기록되지 않는 분명한 시작의 근거가 있을것이라 확신합니다만
538년은 교황의 치세가 정확하게 끝난 1798년을 기준으로 1260년을 역산해서 나온 연대라고 설명하는게 현재로선 맞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찾아본 우리교단의 538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내놓은 근거들은 근거 자체가 빈약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 외에 남들이 보기에 억지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고견을 기다립니다 수고하십시요
이주환님의 댓글
이주환 작성일
질문자의 역사적인 호기심과 학문적인 연구 방법에 대하여 주의 깊고도 진지한 면면들을 발견하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쌍방이 신원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질문하고 답하는 지적 훈련 과정은 학문하는 방법 중 추천하는 바이고, 어떤 공동체의 지적 수준을 높이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한편이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이 지적 영역 안에서 동등하게 교제하는 가운데 더욱 효과적이리라 생각합니다. 이에 질문 자체는 제게도 기존의 정보를 확인한다든지, 한번 더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기에 감사합니다.
교과 원문이 동고트의 "멸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교회 내에 일반적인 가르침으로서 같은 용어를 빈번히 사용하여 이것이 관례가 되어 있는데, 사실 전쟁의 끝과 동고트 족속의 멸망은 평가하는 방법에 따라 질문자의 연구 결과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역사 사건을 해석하는 입장은 언제든 해석자의 주관적 관점이 전제되어 있기에 조금씩 다를 수 있는 것이 역사 해석에 대한 입장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봅니다.
질문자의 요점 중 하나는 1798년의 사건은 확정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연대이기에, 이를 1260년 예언 연대의 마지막으로 정하다 보니 1260년의 기산점이 538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동고트가 멸망한 것은 역사 교과서 어디에도 538년이라고 확정하여 말하는 곳이 없기에 기준점 설정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내 교육자들이 "동고트 멸망"이라는 단어를 실제적, 역사적 연대처럼 사용하는 것은 관용적인 표현이기에 고칠 부분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음과 같이 확인하면서,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1260일의 끝인 1798년은 베르티어 장군이 로마 교황청에 입성하여 당대의 교황을 포로 잡는 사건의 해였습니다. 그리고 교황은 1799년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1799년을 적용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이러한 충격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인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적용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1798년을 해당 연도로 삼은 것은 세속 군대의 교황청 진입과 교황의 체포라는 실질적인 권력의 종말을 상징하기에 그 해석으로서 더 없이 합리적이고 실체적이기에 예언 적용 사건으로 용납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동고트의 멸망은 몇 사건을 더 겪은 후에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538년은 동고트족이 로마에 대한 정복 전쟁을 더 이상 시도할 수 없는 종국적인 패배와 로마를 포기하고 패퇴하던 사건의 연도인 것입니다. 이는 곧 교황권의 재기와 권력으로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는 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1260년의 시작과 끝에 대한 내면적 실상을 바라본다면 538년을 1260년의 기점으로 삼으려는 예언 해석의 연대 계산은 다소간 이해를 한다면 비역사적이고도 비상식적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아래 내용은 538년에 대한 여러 역사적 자료입니다. 구글 검색에 따르면 538년에 대한 아티클들이 다수 있는 중, 재림교회가 설명해 놓은 538년 기사들도 많이 있지만, 아래의 자료들은 철저히 비재림교회의 역사가들이 진술해 놓은 내용들입니다. 참조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너 가지 이유로 인하여 혹이나 교과에 대한 내용에 질의가 있다면 앞으로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 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혹이나 조만간에 구독해야만 하는 성경 연구 과정을 위한 채널을 공지하는데, 그 모든 것이 유튜브를 통하여 이루어질 에정입니다. 유튜브 채널 "SSLCA, 교과해설 아카이브" 또는 "교과해설 이주환"으로 검색하시면 확인됩니다. 저 역시 538년에 대한 좋은 공부가 되었기에 즐거웠습니다.
"537–538년, 동로마인들은 오스트로고트족 군대에 대항한 1년 동안의 포위전에서 성공적으로 도시를 방어했고, 결국 라벤나도 점령했습니다." Bury, J. B. (2011),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University of Chicago, §4, Vol. I, Chap. XII.
"아리미눔 함락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고트족은 즉시 그들의 진영의 궁전들을 불태우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그들이 그대로 두지 않았다. 그는 그들 중 약 절반 정도가 밀비아 다리를 건널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공격했다. 그들의 손실은 컸다.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티베르 강에서 익사했다. 그리하여 1년 9일 동안 지속되었던 로마 포위전은 서기 538년 3월 중순경 끝났다. 그것은 위티기스에게 그의 무능함을 보여줄 기회를 제공했고, 벨리사리우스는 그의 지략을 보여줄 기회를 제공했다." Bury, J. B. (1923), "The Reconquest of Italy (I)," in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Macmillan & Co., Ltd., Chapter XVIII
"전세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벨리사리우스는 오스트로고트족의 상태가 더욱 악화될 때까지 기다렸다. 절망한 상태에서, 고트족은 도시를 급습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들은 아우렐리아 장벽과 카스텔 산탄젤로를 방어하는 벨리사리우스의 소수의 병력을 희생시켰지만, 더 많은 병력을 잃고 패배했다." Encyclopædia Britannica, s.v. "Siege of Rome Italian history [537–538]"
"고트족은 포위군에서 포위군으로 전환되었고, 538년 3월 1년 9일 만에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향했다. 벨리사리우스는 그들을 쫓아갔고, 적군의 절반이 밀비아 다리를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강에서 익사했고, 고트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뒤따랐다." Byzantine Chronicle, s.v. "First Siege of Rome"
"고트족과의 전쟁 중 제1차 로마 공성전은 537년 3월 2일부터 538년 3월 12일까지 1년 9일 동안 지속되었다. 그 도시는 그들의 왕 비티게스가 이끄는 오스트로고트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고, 방어하는 동로마인들은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로마 장군들 중 한 명인 벨리사리우스에 의해 지휘되었다. 그 포위전은 두 반대파 군대 사이의 첫 번째 주요 만남이었고, 그 후의 전쟁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Marisa Ollero, "The End of the First Siege of Rome, 12 March 538 AD", VCoins Community
"황제 유스티아누스와 교황 비질리우스의 관계," Encyclopædia Britannica, s.v. "Vigilius,"와 s.v. "Ecclesiastical policy of Justinian I" 에 따르면 유스티아누스 치세 때에 교황에 오르나, 그는 이전 교황들이 갖지 못했던 계략과 권력으로 유스티아누스와 대척점에 서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 위상은 로마교회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의 결의에 대하여 비길리우스의 후계자들은 공의회의 칙령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610년까지 지속되는 분열이 발생했다.
이동섭님의 댓글
이동섭 작성일
감사합니다 교수님
538년 동고트의 로마 포위전이 큰 전투는 맞습니다만
동고트는 그렇게 끝난것이 아니었고
동고트는 546년 다시 로마를 포위해서 함락시켰습니다
그 이후 다시 동로마에 뺏겼다가
동고트는 549년에 한번더 로마를 포위한게 마지막이었고
그것으로 망한게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몇번이고 군대를 보내서 로마를 해방시킨건 명백하게 동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움직인것이지
어떤 힘도 능력도 없었던 서로마주교가 한 일이 아닙니다
아래 역사적 사실에 비춰볼때 서로마 주교의 권력이란것도 어떤 역사적 의미를 둘수있는지 근거가 빈약합니다
교황 비질리오와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갈등은 그리스도론 이라는 신학적 해석에 있었습니다(단성론:그리스도의 성질이 하나라는설, 양성론: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 모두를 가지고 있다는설)
유스티아누스는 제국내 단성론과 양성론이 나뉘어 갈등이 발생하자 단성론을 지지하는 사람들까지 포용하려 했고 교황 비질리오는 여기에 반대 의견을 냈다가 콘스탄티노플로 545년 바로 송환됐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에서 8년 동안 영욕의 세월을 보낸 끝에 이도저도 아닌 결론을 내리고서야 555년 봄에 로마로 돌아갈수있었다는게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것도 로마로 돌아가는 중에 죽었죠
그리고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선 자신의 처지가 난처해지자 칼게돈으로 도망가버린 사람이 비질리오교황입니다
반대 한번 했다가 압송되서 8년동안 잡혀있었고 입장을 밝혀야만 했던 공의회에선 도망도가고 애매한 결론만 내고 쫏겨난걸 우리교단은 교황의 권력이었다고 해석해야 되는것인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남들 보기에 역사적 팩트(나무를 보던 숲을보던)로 보기에 해석이 억지스럽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 글을 남기는 이유는 유튜브에 이런글 남겼다가 교수님처럼 우리교단이 난처한 입장이 될까봐 그런것입니다
무신론자나 다른 교단이 모니터링 할 리가 없는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것이 훨씬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인터넷도 안되던 예전에는 우리교단에서 인쇄해준 예언해석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인터넷에 Chat GPT까지 정보가 난무하는 시대에 우리 교단은 아직까지도 1980년대에 모든게 고정되 있다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렇습니다
요즘은요 천주교에서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천주교회가 토요일을 일요일로 바꿨다는 내용이 있는것을 아느냐고 물어보면요 그런 내용이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세월이 지나도 절대 안바꿀것 같은 천주교회도 꾸준히 외부의 비판과 시대에 맞춰 업그레이드를 합니다
우리교단은 누가 이런일을 해야하는지를 모르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