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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낯선 땅에서 부르는 여호와의 노래 (질문, 대답, 설명) 02/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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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1-25 22:56 조회4,0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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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낯선 땅에서 부르는 여호와의 노래 

(2월 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57분)

 

연구 범위: 시 79:5~13, 88:3~12, 69:1~3, 22:1, 시 77:, 73:1~20, 벧전 1:17

 

기억절: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편 137:4).

 

시편은 죄와 악, 고통과 죽음이 가득한 불완전한 이 땅에서 기록되었다. 주님의 다스리심과 그의 의로운 법으로 운영되는 조화로운 창조세계는 악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당한다. 죄가 세상을 차츰 더 타락시키면서 이 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점점 더 "낯선 이방 땅"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시편 기자를 괴롭게 한다. 어떻게 이방 땅에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인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영원하고 변함없는 피난처이시며 환난 중에 도움이 되심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시편 기자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당혹스러워한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거나 주님이 계시는데도 악이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곤란한 경험이다. 우리도 그렇게 느낄 때가 종종 있지 않은가? 기도문으로서 시편의 역설적 성격은 하나님의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 대한 그들의 응답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만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죄와 악이 번성하는 땅이지만 주님은 살아계시고 만물을 회복하실 것이다. 

느끼기: 과거에 역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그분의 나라를 이루실 것을 믿는다. 

행하기: 살아계신 주님을 믿음으로 이방 땅 같은 현실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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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떤 심각한 질문을 야기합니까?(시 79:1)

*답: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왜 이런 일이 있도록 허락하십니까?

3. 극한 불평을 쏟게 하는 죽음 같은 고난 중에도 소망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시 88:11) 

*답: 주님의 선하심을 선포하려면 치료외 부활의 은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시편 기자는 어떻게 믿음을 지탱합니까?(시 10:12)  

*답: 하나님께서 일어나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일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5. 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고통이 되었습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무엇입니까?(시 77:11)  

*답: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이런 일이 있을까 하기 때문이고 그 대답은 옛적에 베푸신 일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6. 악인들이 형통하는 뒤집힌 듯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만물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답: 성경을 깨닫고 죄와 악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때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7. 하나님의 통치가 불확실해 보일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무엇입니까?(시 89:2) 

*답: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성실한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다.

 

결론: 시편은 불완전하고 죄와 악이 가득하여 이방 땅이 되어 가는 듯한 현실 속에서 기록되었다. 주님의 종들은 악이 번성하며 그분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문제 속에서 갈등하며 곤란해 한다. 그러나 고통 중에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며 그분께서 일하실 것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만물의 실상, 곧 회복하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이방 땅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한다.  

 

1월 28일(일) 악이 득세하는 날에 

 

시편 74:18~22, 79:5~13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어떤 위기를 말하고 있는가?

[시74:18~22]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19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 20 그 언약을 눈여겨 보소서 무릇 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나이다 21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22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시79:5~13]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6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7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8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10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11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12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13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답: 이방이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고 더럽히는 것을 참으시는 하나님께 속이 보응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보존하시고 아울러 그의 백성도 구원하기를 호소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과 악의 세력 사이의 대쟁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인내와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바라본다.

시편에서 악의 문제는 주로 신학적인 문제이며,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질문과 연결된다.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모독할 기회를 주었기에 이는 하나님의 문제로 여겨졌다. 하나님의 기업인 이스라엘 백성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언약의 상징이었다(신 4:32~38, 32:8, 9).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개념은 언젠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어 그분을 섬길 것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맥락도 포함한다. 그런데 열방이 하나님의 기업을 침범하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위협받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시편 기자는 백성들의 죄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더럽히고 이 모든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다(시 79:8, 9). 백성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과 죄의 속죄를 통한 언약 관계의 회복에 달려 있다. 주님이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언약하신 구원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대한다(시 79:9).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옹호하는 것이다(시 79:9). 열방의 악행을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무능한 분처럼 보일 것이다(시 74:18~23, 83:16~18, 106:47).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야 그분의 이름도 의롭게 되고 높여질 것이다.

오늘날도 동일한 원리가 작용한다. 우리의 죄, 타락, 악은 단순히 우리 자신만 아니라 우리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하나님께 더 큰 불명예를 가져다 준다. 

우리의 잘못된 행동은 우리의 증거와 사명에도 해악을 끼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갔는가?

 

<교훈> 이스라엘의 환난은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주님의 언약과 그 이름에 불명예를 가져왔다. 우리의 잘못이 사명과 증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기억해야 한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은 처하여 사는 세상의 실상을 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는 환경인 이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정상적인 상태의 환경이 아니다. 변질된 환경이다. 시조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아담(호6:7) 때문에 ‘땅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창3:17) 땅으로 변질 되었다. 이 구절은 아담이 언약을 어긴 결과를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아담은 생명에서 사망이 되었고, 세상은 낙원에서 지옥(탈타로스)가(벧후2:4) 되었다. 이 탈타로스 지옥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다. 여기는 생명이 생명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생명의 사람들이다. 생명이 사망의 땅에 생활하는 것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이땅에서 생명의 존재인 그리스도인은 사망의 존재인 생명 없는 사람들에게(요일5:11,12). 생명의 실상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품성이다. 이것은 베드로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것이라고 했다(벧후2:4)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예, 그리스도의 명예는 당신의 백성의 품성을 온전케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시대의 소망, 671)라고 설파했다. 오늘 우리는 기도와 말씀으로 이런 생명의 작용을 드러내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1월 29일(월) 죽음의 문턱에서

 

시편 41:1~4, 88:3~12, 102:3~5, 11, 23, 24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어떤 경험을 묘사하고 있는가? 그대는 이곳에 언급된 내용의 어떤 점을 공감할 수 있는가?

[시41:1~4]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2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시88:3~12]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시102:3~5,11,23,24]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4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5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11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23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24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답: 심한 질병으로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떠는 상태에서 부르짖는 기도다. 질병의 고통을 당할 때 이런 부르짖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까?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세상의 고통에서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다. 시편 기자는 끔찍한 고통을 말한다. 그는 힘이 없고, 풀처럼 시들고, 먹지 못하고, 죽은 자들과 함께 취급되고, 무덤에 죽은 자처럼 누워 있으며, 친구들에게 어떠한 동정도 받지 못하고, 고통과 절망에 빠져 있다. 그는 야위어 뼈가 피부에 달라붙어 있다. 

많은 시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주께서 고난을 허락하셨다고 말한다. 죄가 질병을 가져온 것을 알고 있기에 시편 기자는 치유보다 용서를 먼저 말한다(시 41:3, 4). 그러나 시편 88편과 시편 102편과 같은 일부 시편은 이해할 수 없는 무고한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 또한 엄연한 현실임을 인정하고 있다.

시편 88편은 기자를 죽음 직전까지 이르게 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다(시 88:6~8). 그러나 주님이 그 주권으로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라면 평안하게 회복하시는 것 또한 그분의 주권 아래 있으므로 대담한 불평을 쏟아 낸다고 하더라도 이런 탄식 또한 분명 믿음의 행위라는 점에 유의하자. 

시편 기자는 무덤의 문턱에서 하나님의 경이로우심과 인자하심,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기억한다(시 88:10~12).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신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매달린다. 그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지 않으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임을 알고 있다. 이러한 간구는 시편 기자가 고난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개인적이고 생생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고난과 은혜는 무조건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허용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도 모두 그분의 궁극적인 주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경 가운데에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소망을 싹트게 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추어 시편 88편을 읽을 때, 우리는 인류를 대신해서 기꺼이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셨던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에 경외감을 느낀다. 

 

<교훈>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도 치유보다 용서가 먼저 필요한 것을 알았다. 그것이 그분의 주권 가운데 온 것이면 은혜 또한 주실 것을 믿고 주께 간절히 기도했다. 

 

<부가설명> 이사야 선지자는 53장에서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이렇게 예언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3~5).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우리를 치료하고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분을 믿는 자들의 고난은 반드시 치료되고 회복되는 고난일 수밖에 없다. 시인들은 이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호흡이 끊어져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부활의 아침에 가장 건강한 상태로 일으키실 것이다. 이것은 사망의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기쁜 소망이다. 하나님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을 때 이 고난과 시련의 시간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1월 30일(화) 하나님, 어디에 계시나요

 

시편 42:1~3, 63:1, 69:1~3, 102:1~7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에게 큰 고통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시42:1~3] [고라 자손의 마스길(교훈),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63:1]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69:1~3]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소산님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2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시102:1~7]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2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3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4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5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6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7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답: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서 자기를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이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겪는 고통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의 고난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시편 기자에게 더 큰 괴로움이었다. 하나님이 부재하신 것처럼 보일 때 기자는 메마른 땅의 극심한 갈증(시 42:1~3, 63:1)과 죽음의 고통(시 102:2~4)을 느낀다. 기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고 느끼며 자신을 외로운 새에 비유한다.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시 102:6, 7).

광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의미한다. "지붕 위의 외로운" 새는 자신의 안식처인 둥지 밖에 있다. 시편 기자는 마치 거센 물결에 휩쓸려 "깊은 수렁" 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시 69:1~3, 시 130:1). 이는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벗어날 수 없는 숨막히는 상황을 묘사한다.

 

시편 10:12, 22:1, 27:9, 39:12을 읽어 보라.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부재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시10: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시22: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아얠렛샤할(사슴이란 곡조)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27: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시39: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답: 그분이 계신다는 확신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며 오셔서 도우시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도 침묵하지 않는 기자들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기도는 살아계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편 기자들은 상황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여전히 그분은 거기 계시다. 하나님께서 동일하고 변함없으시기에 과거에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던 그분이 오늘도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그들에게 가득하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때 시편 기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고백과 겸손한 간구로 하나님을 찾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침묵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시편은 삶의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소통이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교훈> 그분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때도 그 침묵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에 고백과 겸손한 간구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분은 변함없으시며 여전히 함께하신다. 

 

<부가설명> 성경은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말씀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라고 제시한다(요13:19, 14:29).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안다고 가르친다(히11:3).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오직 기록한 계시의 말씀에 의해서다.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고 구원의 도리를 알 수도 없다. 당연하 창조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증거로 예언과 그 성취를 지적하셨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의 근거로 제시한다(행17:31). 창조, 예언과 성취, 예수님의 부활 등 이것은 다 역사적이고 현실적이다. 이것을 부인하면 모든 것이 흑암에 묻힌다. 우주가 어떻게 있었는지 그냥 장님 코끼리 더듬듯이 더듬으면서 추측과 상상을 믿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천연계와 예언의 성취를 바라보고 깨달음으로 날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또한 자기의 존재와 청조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알도록 하려고 성경에 족보를 많이 기록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다. 그 믿음의 기초가 성경 말씀이다(롬10:17). 그러니 성경 부지런히 연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같이 느껴질 때 더욱 감사와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 앞에 나가자.

 

1월 31일(수) 하나님의 약속은 영구히 폐하였는가?

 

시편 77편을 읽어 보라. 시편 기자는 어떤 일을 경험하고 있는가?

[시77:1~20]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2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4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5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6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7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9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11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12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13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14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15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 16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17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18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20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답: 과거에 하나님의 인도를 기억하면서 현재 곤경에 처한 자기를 건지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기도다. 그러나 과거 일을 기억하며 소망으로 끝난다.

 

시편 77편은 과거에 대한 애통과 고통스러운 기억 가운데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시 77:1~6). 시편 기자의 전 존재가 슬픔에 가득하여 하나님만 바라본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외에 어떤 위로도 거부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그의 괴로움을 더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시 77:3). “상하도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마(hamah)는 종종 맹렬히 포효하는 물소리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시 46:3). 그처럼 시편 기자의 전 존재는 극심한 불안 상태에 빠져 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그렇게 강한 고통의 원인이 되는가? 이어지는 뼈아픈 질문들은 그 원인을 보여준다(시 77:7~9). 하나님께서 변하셨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배신할 수 있는가? 과거에 하나님이 구원하셨던 역사와 지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현실 사이의 극명한 차이는 시편 기자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기게 한다. 시편 기자가 고군분투하면서 거부하고 있는 결론이지만 정말 하나님이 변하셨다면 그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런 와중에도 주께서 계속 깨우시기 때문에 그는 잠들 수 없었다고 말한다(시 77:4). 이는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잠들지 못하게 하셨던 성경 속 다른 사람들을 연상하게 한다(창 41:1~8, 에스더 6:1, 단 2:1~3).  잠 못 이루는 길고 긴 밤을 지나면서 시편 기자는 주님의 과거 구원의 행적을 새롭게 마음으로 마주한다(시 77:5, 10). 

시편 기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확신은 그의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해결이 아니라 욥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믿음직하심에 대한 확증이다. 

시편 기자는 주님이 과거 이스라엘에게 기적을 행하신 바로 그분이심을 알고 믿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도록 격려받는다(시 77:11~18).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시 77:19)라는 솔직한 시편 기자의 고백은 인간의 눈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상황과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마침내 깨달은 것을 나타낸다. 그는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시면서 동시에 숨기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신비로우시며 주권적인 그분의 역사를 찬양한다.

 

<교훈> 지난 은혜의 경험과 오늘 고난의 차이가 괴롭게 하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았다. 상황은 그대로지만 그가 신실하심을 알기에 여전히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부가설명>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부인하려고 해도 사람은 창조주의 창조물 안에서만 존재하고 생활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묻는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 우리는 창조주로부터 받은 것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한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8). 그분에 베푸신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잠시도 생존할 수 없다. 호흡할 수 있는 대기와 햇빛과 땅과 물과 나무와 풀과 어느 것 하나 창조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누군가 있게 했기에 있는 것이다. 그분이 창조주 여호와이시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첫 걸음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곧 성경에서 난다. 믿음도 창조주로부터 받은 것이다. 우리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믿음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사람 사이에도 상대를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믿을 수 있게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은 자기 것이 아니다. 상대가 주는 선물이다. 이것을 거절하는 것이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므로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20). 그래서 이 믿음을 지켜야 한다.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고 고백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그날까지 잘 지키도록 하자.

 

2월 1일(목) 악인들이 개가를 부르는 날에 

 

시편 37:1, 8, 49:5~7, 94:3~7, 125:3을 읽어 보라. 시편 기자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인가?

[시37:1,8] [다윗의 시]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시49:5~7]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시94:3~7]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4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5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하며 6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 7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시125: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답: 악인에게 둘러 싸여 고난을 겪고 있다. 악인이 이겼다고 승리의 노래 개가를 부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 시편은 악인들이 형통한 현실과 이것이 의인들에게 주는 난관에 대해 비통해하고 있다. 악인들은 형통할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압제하기도 한다. "악인의 홀"(시 125:3)이 세상을 지배하는 동안 "의인의 홀"(시 45:6)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분명 당혹스러운 문제이다. 그렇다면 그냥 포기하고 차라리 다른 사람들처럼 악을 받아들이는 게 나은 것인가?

 

시편 73:1~20, 27을 읽어 보라. 시편 기자가 위기를 극복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헛된 것을 의지하는 자의 마지막은 무엇인가(벧전 1:17)?

[시73:1~20,27]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벧전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답: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당하는 이유를 몰라서 낙심하다가 성소에 들어가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주님을 멀리하는 자는 망한다.

 

현재 세상의 죄악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큰 그림을 볼 수 없었다. 악의 형통함이 그의 신앙에 제기하는 문제는 압도적이었기에 믿음이 쓸모없다는 주장조차 매우 타당하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시편 73편은 “시편 전체의 요약인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이 시편의 첫 구절을 무시하는 자들을 꾸짖는”다(요하네스 부겐하겐, Johannes Bugenhagen, Reformation Commentary on Scripture, 2018, p1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장소인 성소로 인도되어서야 '오늘' 하루는 모자이크의 한 조각에 불과하며 악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종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 

시편 기자가 이 진리를 성소에서 깨닫고 이전의 어리석음을 고백한 것은 만물의 실상은 인간의 논리가 아닌 영적인 통찰력으로만 바르게 파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교훈> 세상에서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물의 실상은 인간의 논리가 아닌 영적인 통찰력으로 종말까지를 살펴볼 때에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부가설명> 성경은 성도가 악인과 싸우면 진다고 기록했다. 세상은 악인, 곧 참 생명이 없는 자들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판이 필요하고 심판하셔서 의인들을 신원해주신다고 했다(단7:21,22). 결국은 악인은 망하고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얻는다. 성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이 진리의 질서를 잘 깨달아야 한다. 너무 고통스러워 낙심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곧 다시 일어서는 믿음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사탄은 성도가 낙심하면 기뻐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낙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같은 시험을 당해도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진정 하나님이라면 아브라함처럼 과감하게 약속을 믿고 아들을 향하여 칼을 치켜든 것처럼 악을 대항하는 믿음, 곧 성령의 검을 치켜들고 일어서야 할 것이다. 마침내 심판장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자라고 판결하신다. 그리고 나라를 상속하게 하신다. 이것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이 주셨고 그런 믿음을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라고 했다(유20절). 이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기도하며 낯선 땅에서도 주님의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자. 

 

2월 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편 56편, 정로의 계단 13장 "주 안에서 기뻐함"을 읽어 보라. 

 

각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도 자주 낯선 땅에서 어떻게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주님의 통치에 대한 믿음은 때때로 심각하게 도전을 받으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그분이 능하시고 선하신 분인지 고민하게 된다. 믿음은 종종 그 자신감과 확신만큼이나 불확실성과 긴장감을 시사한다. 특히 악이 창궐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의 불확실성과 긴장감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아무리 불확실한 때일지라도 하나님과 그분이 사랑이시고 의로우시며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신 것을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시편 기자들은 미래가 불확실한 것 같은 때에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간구했다(시 36:5~10, 시 89:2, 8). 

우리도 그들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그대의 모든 힘을 다하여 역경 중에 위를 쳐다보고 밑을 내려다보지 말라. 그리하면 그대는 결코 도중에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구름 뒤에서 그대를 도와주기 위하여 손을 뻗고 계시는 예수님을 머지않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단순한 믿음으로 그대의 손을 그분께 내어 드림으로 그분께서 그대를 이끌게 하는 것만이 그대가 해야 할 모든 일이다. 그대가 신뢰하게 될 때 그대는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희망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5, 578).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때가 기도의 효력을 약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시편 기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과거 구원 행위를 기억하며, 고백과 겸손한 간구로 하나님께 나아갔다(시 77:10~12, 시 89:46~52). "의심과 반대의 세력으로 더불어 투쟁하는 중에 믿음은 굳건하게 자란다.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 얻은 체험은 가장 값비싼 진주보다도 더욱 가치가 있다"(교회증언 3, 555).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시편 기자들은 악에 직면하여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가? 그대는 이와 유사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대처했는가? 

*답: 질병과 위협과 공격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기도로 대처했다. 다른 대답은 각각 해보자.

2.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고난으로 시험받거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도전받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가?

*답: 오직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특히 시편이 좋은 대답을 제공한다.

3.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유지하신다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흔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이 도전에 대답하는 데 대쟁투의 주제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도움을 주는가?

*답: 이 대답은 3,4,5과 부가설명에 여러번 말했다. 찾아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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