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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계속되는 위기(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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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5-11-06 08:47 조회8,6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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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22분

 

기억절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연구 범위 : 렘 9장, 렘 10:1~15, 롬 1:25, 렘 26장, 행 17:30, 행 5:34~41

 

하나님의 종이 겪는 고역과 역경은 진행형이다. 사실 예레미야서의 상당 부분은 하나님이 사랑과 염려의 마음으로 전하시는 말씀을 백성들로 하여금 듣게 하기 위한 선지자의 도전과 노력을 다루고 있다.

만약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그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 보라. 만약 백성과 왕과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굴복했다면 최악의 위기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앞에 회개의 기회가 있었다. 아무리 많은 죄와 실수를 저질렀을지라도 구원의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그 문은 열려 있었다. 그들이 들어가기를 거절했을 뿐이다.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보고 우리는 쉽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고전 10:11)다. 우리 앞에 본보기가 놓여 있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성경적인 의미를 연구한다.

➋ 느끼기 :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슬픔을 애가의 형식으로 전한 이유를 이해한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잘못을 반성하고 회개한다.

 

A. 

❷ 그대는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 각자 대답해 보자.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❸ 참 하나님을 아는 종교와 우상숭배 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생명과 사망의 차이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오 창조주이시다. 우상은 생명 없는 물건이고 피조물이다.

❹ 어떻게 하면 우리가 창조주와 구속주에 대한 믿음을 나눌 수 있을까요?

※ 사람을 사귀고 성경을 잘 풀어줄 수 있도록 알고 확신으로 생활할 때 가능할 것이다. 

 

B. 

❷ 예레미야가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기별을 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렘 26:10~15)

※ 하나님께서 주신 기별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❸ 예레미야가 전하는 심판의 경고에는 하나님의 어떤 마음과 바람이 담겨 있습니까?

※ 회개하여 심판을 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❹ 우리가 담대하게 용기를 내서 전해야 할 기별 또는 완수해야 하는 사명은 무엇입니까?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며 생명이시며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 천사의 기별이 바로 이 기별이다. 

 

결론 :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앎 또는 무지는 우리 삶의 방식에 그대로 투영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행동으로 전환되는 관계적인 지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온갖 형태의 우상숭배가 자리를 잡은 곳에는 진정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첫째날(일) 자랑하는 자는…

11월 8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 9:23).

 

예레미야 9장에서 선지자는 애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나라와 백성에게 불어닥칠 불가피한 파멸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심판을 선고하셨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행하시는 분이다. 그들이 겪을 일들은 우연도 아니었고 간혹 생기는 처참하고 불가해한 일도 아니었다. 그들이 겪을 일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 될 것이었다. 예레미야가 그 같은 슬픔에 빠진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하나님이 느끼시는 고통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배경은 다르지만 다음의 인용문은 그러한 개념을 매우 잘 포착하고 있다. “십자가는 죄가 처음으로 생겼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느끼셨던 고통을 우리의 둔한 감각에 나타내 보이고 있다. 사람이 정의에서 떠날 때마다, 잔인한 행동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이상에 도달하지 못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슬픔을 느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난 데 대한 필연적인 결과로 그들의 원수에게 정복되고 잔학한 대접을 받으며 죽음의 재난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삿 10:16)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사 63:9)다”(교육, 263).

 

1. 예레미야서 9장에서 선지자의 비애에 찬 애가를 읽어 보라. 특별히 23, 24절을 주목하라.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연관성이 깊은 이유는 무엇인가?

[렘9:23,2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답: 여호와를 아는 것만이 참으로 자랑할 사실임을 가르친다. 여호와를 모르면 사망에 머물게 된다. 

 

죽음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성벽 없는 도성’과 같다는 말이 있다. 지혜와 능력과 부도 중요하다. 그러나 재앙이 닥치고,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그런 것들에 의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다.

파멸에 관한 모든 경고 가운데서 백성들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듣는다. 즉 그것은 스스로, 적어도 우리에게 가능한 수준에서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이해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의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 그밖에 무엇이 우리에게 소망과 위로가 되겠는가?

 

<부가설명> 죽는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장막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욥4:21) 죽음을 해결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친히 인도하시고 교육하신 여호와이시다. 구약에서는 자주 ‘여호와의 사자’라는 칭호로 나타나셨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올바르게 알았다면 자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심으로 그들의 하나님을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은 성경의 참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었다.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선지자들이 가르친 하나님이었다. 그 선지자들을 통하여 사악이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라고 호소하신다. 성경의 참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경배하는 것만이 자랑할 일인 것이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예레미야 시대 이스라엘 사람처럼 알고 있지 않는지?

 

교훈 : 하나님이 선고하신 심판을 앞두고 예레미야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부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의를 알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둘째날(월) 피조물 또는 창조주

11월 9일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렘 10:14~15).

 

앞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이교신앙과 우상숭배, 거짓 교훈에 푹 빠진 주변 민족들과는 다른 민족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모세오경은 특별히 주변 민족들의 행습을 따르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고했다. 대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창조주와 구속주라는 진리를 세상에 알리는 증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구약의 역사는 가까이하지 말라고 경고를 받은 그런 행습에 그들이 얼마나 자주 미혹되었는지 보여주는 실패의 역사가 되었다.

 

1. 렘 10:1~15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여기서 그분의 백성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만일 이와 동일한 경고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회와 정황 속에 주어진다면 어떻게 기록되겠는가?

[렘10:1~15]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3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4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 5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 6 여호와여 주와 같은 자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인하여 크시니이다 7 열방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치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열방의 지혜로운 자들과 왕족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음이니이다 8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도는 나무뿐이라 9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공장과 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감으로 그 옷을 삼았나니 이는 공교한 사람의 만든 것이어니와 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11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12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 13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14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5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답: 창조주와 우상, 곧 사람이 만든 형상을 대조하면서 피조물을 신으로 여기는 사상과 신앙을 책망했다. 오직 창조주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가르친다. 오늘날은 진화론과 창조론을 대조하여 책망하는 표현을 할 것이 아닐까?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이미 알고 있어야 했던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런 이방 신들은 인간의 창조물이자 마귀에 의해 뒤틀린 인간의 상상력이 지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바울도 수백 년 뒤에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롬 1:25)기는 자들에 대해 언급했다.

여기서 바울이 어떻게 피조물과 창조주를 대조시키는지 주목하라. 동일한 대조점이 예레미야서에도 나타난다. 예레미야는 참된 하나님과 비교하면서 이방 신들의 무능과 나약성을 지적한다. 예레미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런 우상들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백성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것들과 비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세상을 유지하신다(히 1:3 참고).

비록 이 말씀이 고대의 것일지라도 그 기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관련성이 있다. 우리는 사람이 만든 신상에 절하라는 유혹은 이길 수 있을 것이며 하늘에 나타난 징조 때문에 당황하거나 염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가 심판의 때에 그들을 구원하지 못할 우상을 의지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들을 의지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부가설명> 옛날부터 사람들은 자기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천연계 사물을 숭배하는 사상이 있었다. 사단은 피조물인데 스스로 숭배를 받고자 여러 가지를 고안하는 중에 피조물을 숭배하게 하므로 창조주를 떠나게 하고 그 배후에서 자신이 숭배를 받도록 한 것이다. 그런 사상은 소위 과학적으로 발전해서 진화론이라는 우상으로 둔갑을 했다. 진화론은 사단이 학문계를 통하여 만들어놓은 가장 탁월한 발명품이다. 땅 속에서 나온 이런저런 유물들을 정리하고 탄소 연대 측정법이라는 것과 지질학을 동원해서 동일과정설을 주창하게 하고 둘이 연대적으로 일치한다는 논리로 진화론을 믿을 수 있는 과학인 것처럼 포장을 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했다는 학문 시대에 창조주를 모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지혜 없는 사람들이(욥4:21)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愚蠢)하게 되어 피조물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숭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그렇게 이끌고 있다. 이것이 소위 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군림하고 있는 정치적 세력에게 용납되면서 종교계도 이것을 기정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 지금은 예레미야 시대 유대인과 다름없는 시대가 되었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능력도 없는 우상들을 숭배할 때에 몹시 슬퍼하신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유일한 창조주와 구속주를 전할 사명이 있다.

 

 

셋째날(화) 회개하라는 호소

11월 10일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렘 26:3).

 

1. 렘 26:1~6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여기서 백성들에게 어떤 희망을 주시는가?

[렘26:1~6]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와께로서 이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집에 와서 경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고하되 한 말도 감하지 말라 3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4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법을 행치 아니하며 5 내가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낸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가 만일 다시 듣지 아니하면 6 내가 이 집을 실로같이 되게 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답: “부지런히 보낸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가 만일 다시 듣지 아니하면” 다시 말씀을 듣지 않으면 이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는 기회와 듣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 .

 

이곳의 기별은 신구약 성경 전체의 기별과 동일하다. 그것은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구원을 발견하라는 호소이다.

 

2. 다음의 말씀들이 전하는 기별은 무엇인가?

[대하 6:37~39] “그들이…스스로 깨닫고…기도하거든…주의 백성을 용서하옵소서”

[겔 14:6]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행 17:30]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답: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선용하여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는 기별이다. 

 

“유다 거민들은 모두 무가치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들로 말미암아 그분의 성호가 이방인 중에 높임을 받아야 했고, 그분의 품성을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머지않아 하나님의 품성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인 선지자들에게 ‘너희는 각기 악한 길…을 돌이키라’(렘 25:5)는 기별을 주셔서 그들을 계속 보내시는 것은 자비로운 당신의 계획들을 알리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9, 11)고 선언하셨다”(선지자와 왕, 319).

신약이든 구약이든 우리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기별은 동일하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잘못을 행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방법을 마련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시인하고 무가치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요구하며 우리의 죄를 회개할 필요가 있다. 진실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의 삶에서 죄를 단념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심판은 형벌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정화(淨化)하고 회복기 위한 강한 권고이다. 그러나 그 권고를 거절하면 선고한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번 형벌을 선포하셨다. 그것은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돌이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었다. 마치 부모가 잘못하는 자녀들에게 징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뜻으로 읽지 않고 문자로만 읽으면 이런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모세의 글을 읽으면서 수건이 얼굴을 가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면 그 수건이 벗어진다. 예수님은 성경을 올바르게 읽고 깨닫게 하는 지혜의 안경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의 본성을 온전히 보여주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의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고 성경을 문자로 읽지 않고 영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것이다.(고후3:5~18) 

 

교훈 : 혹독한 심판의 경고 중에서도 하나님이 진심으로 바라셨던 것은 유다 백성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것이었다.

 

 

넷째날(수) 죽음을 요구함

11월 11일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렘 26:14~15).

 

현재의 관점에서 돌아보면 유다 백성들의 강퍅해진 마음을 믿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어제 교과에서 보았듯이 예레미야의 기별은 비록 혹독한 면이 있지만 여전히 희망으로 충만하다. 만약 그들이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축복과 저주의 언약에 기초하여 그들에게 임할 형벌을 막으실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하기만 했어도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복을 얻기만 했어도 모든 일이 잘 됐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며 치유하고 회복시키셨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마련된 대비책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고 회복시키기에 넉넉할 것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망의 기별과 구원의 약속인가!

 

1. 이러한 기별과 예레미야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렘 26:10~11)

[렘26:10,11] 유다 방백들이 이 일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와서 여호와의 집 새 문 어귀에 앉으매 11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방백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죽음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같이 이 성을 쳐서 예언하였느니라.

 

답: 죽음이 합당하다고 반응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오직 합법적으로 소집된 법정에서만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다. 다수결에 의해서만 사형 선고가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치명적인 혐의를 들어 예레미야를 기소하였다. 예레미야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를 정치범이나 반역자로 몰아가기를 원했다.

 

2. 예레미야는 어떻게 반응했는가?(렘 26:13~15)

[렘26:13~15]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고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14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소견에 선한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15 너희는 분명히 알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정녕히 무죄한 피로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거민에게로 돌아가게 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이르게 하셨음이니라.

 

답: 예레미야는 굳건히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 죽이려면 죽이라고 말했다. 

 

예레미야는 전혀 굽히지 않았다. 약간의 두려움은 있었겠지만 그는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받은 말씀의 수위를 조금도 낮추지 않았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에게 한마디도 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렘 26:2). 우리는 한때 투덜대고 불평하며 태어난 날을 저주했던 그의 모습과는 달리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서 있는 예레미야를 본다.

 

<부가설명> 주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리의 증인으로 설 수 없다. 세상을 해롭게 하지 않아도 핍박을 받는 무리들이다. 역대에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 세상을 해롭게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사상과 다르고 생활방식이 다르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우주의 주권자를 믿고 세상의 정권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를 주님으로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직접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핍박하고 죽였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유대 나라와 민족의 현재와 장래를 제시하였다. 예레미야가 형벌을 예언했지만 그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기를 원하는 예언이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레미야와 동일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고발한 사실을 참 참담한 사건이다. 오늘날도 어쩌면 성경 진리대로 증거하는 사람들을 매도하고 있지나 않는지 두렵다. 

 

교훈 :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심판의 경고뿐 아니라 용서와 회복의 소망을 주셨지만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의 기별을 거절하고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다섯째날(목) 예레미야의 석방

11월 12일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느니라”(렘 26:16).

 

어제 본 것처럼 예레미야는 그의 입장이 가져올 죽음의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자신의 두려움과 감정을 초월하여 굳건히 섰다. 그는 렘 26:15에서 그들이 자신을 죽이면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기소하는 혐의에 대하여 스스로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 렘 26:16~24을 읽어 보라. 예레미야는 어떻게 죽음을 모면했는가?

[렘26:16~24]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음이 부당하니라 17 때에 그 땅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 말하여 가로되 18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이 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19 유다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고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 생명을 스스로 크게 해하는 일이니라 20 또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을 쳐서 예언하매 21 여호야김 왕과 그 모든 용사와 모든 방백이 그 말을 듣고는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이를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22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내었더니 23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끌어내어 여호야김 왕께로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묘실에 던지게 하였다 하니라 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보호하여 예레미야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답: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옹호하고 보호하였다. 히스기야 시대의 미가 선지자의 예를 들어서 예레미야를 보호하였다.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할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변호하려고 나선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저항과 책망을 받았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예레미야에 앞서 백 년 전에 살았던 미가라는 선지자를 떠올렸다. 그 당시의 왕은 미가를 해치지 않고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국가 전체가 회개했으며 잠시 동안이나마 재앙을 모면했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시대에는 일반 백성이 지도자들보다 현명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는 큰 실수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원했다.

예레미야를 기소했던 혐의들에 대해 그가 무죄하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증오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들은 복수심에 불타올라 다른 기회에 모든 분노를 예레미야에게 퍼붓고자 했다. 그의 석방은 잠깐의 평안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는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사람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는 반면 어떤 사람은 역사의 교훈을 거절하는 실례를 본다. 그 후로 여러 세기가 지나서 비슷한 상황이 재현되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다른 지도자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행 5:34~41 참고).

 

<부가설명> 여기 제시된 사건을 보면 핍박은 소위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핍박할 줄 모른다. 아는 사람들이 핍박을 선동할 때 모르는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이끌려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내부고발자가 없으면 핍박이 일어나기 쉽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진리의 백성으로 굳게 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성정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다. 핍박을 받을지라도 진리에 굳게 서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줄 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마5:44, 롬12:14) 이런 정신은 핍박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게 하는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이다. 말세가 되었을 때,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관용, 곧 너그러움을 알게 하라고 가르친다.(빌4:5) 재림성도들은 좀 덜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나타나는 너그러움은 물질을 선선히 내어주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색하면 너그럽지 않다. 아무리 감정적으로 너그럽고 사람을 잘 수용하고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람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도 물질에 인색하게 보이면 너그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환난의 시대에 재림성도들을 너그러운 삶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역사에서 바른 교훈을 배울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교훈 :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시도에 반대했던 장로와 백성들은 역사를 돌아보면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했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1월 13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 비록 죄가 창조 세계뿐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읽을 우리의 능력까지 훼손하였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연과 인간관계 그리고 경이로운 창조 세계를 관찰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그러한 장막이 걷혔다. 세상은 그분의 사랑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명확한 계시를 받았다. 엘렌 G. 화잇은 그 사랑이 너무도 위대하여 그것을 “신성의 능력들이 분리됨”(화잇주석, 히 2:10)이라고 일컬었다.

신성의 능력이 분리되다니…

영원 전부터 서로를 사랑하셨던 신격의 각 위께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러한 ‘분리’를 견디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하셨던 주님의 음성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그러한 분리를 가장 명확하고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견디셔야 했던 고난과 고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타락한 존재로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흉내 낼 뿐이며 심지어 그러한 모방조차 우리의 이기심과 악한 욕망 때문에 종종 왜곡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보다 뛰어나다. 우리는 기름 덮인 진흙 웅덩이가 하늘을 반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할 뿐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우리는 더 이상 고대 사회처럼 우상을 섬기지 않지만 어떤 방식으로 여전히 우상을 만들

위험성이 존재합니까?

※ 자기 사상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주장하면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것이다. 문화적 시각으로 성경을 읽고 신앙하면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➋ 신자의 삶에서 회개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다시 말해서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

에서 했던 회개가 아니라 신앙생활 속에서의 회개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 날마다 죽는다고 말한 바울의 고백을 경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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