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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안팎의 위기(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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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5-10-02 15:07 조회8,2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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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3분

 

기억절 :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

 

연구 범위 : 삿 2:1~15, 왕상 12:26~31, 대하 33:9~10, 렘 2:1~28, 렘 5:2~3

 

타락한 이후 인간의 상태를 한 마디로 묘사하자면 ‘위기’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를 보면 그 정도를 훤히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얼마나 심각한 위기였는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치른 엄청난 값을 보라.

성경의 수많은 일화들이 이런저런 위기를 배경으로 발생한다. 예레미야가 봉사했던 시대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은 대내적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러나 외국 군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더 큰 위기는 대부분 내부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내부의 위기는 단지 부패한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심각했지만, 백성들에게도 문제가 많았다. 그들의 심령은 너무 굳어졌고 죄와 배도로 훼손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재앙을 피하도록 그들에게 보내신 경고의 기별에 주의하기를 거절했다.

죄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죄로부터 돌아서기를 거부할 때 이르러 오는 위기는 더 심각한 문제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예레미야 시대까지 계속된 이스라엘의 배도의 역사를 확인한다.

➋ 느끼기 : 슬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모든 세대를 뒤덮은 하나님의 은혜를 느낀다.

➌ 행하기 : 우리의 삶을 철저히 반성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기로 결심한다.

 

A. 

❷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계속 실패를 반복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선민이라는 과잉 자의식으로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돌보지 않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❸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 내 구미에 맞지 않아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굴복해야 한다. 

❹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반복하지 말아야 할 잘못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말씀을 전적으로 순복하고 자기 신앙생활을 과신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B. 

❷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고통과 불행을 경험해야 했던 원인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❸ 예레미야 시대에 유다 백성들에게 닥친 내적 위기와 외적 위기는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 내적으로는 왕을 위시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외적으로는 강대국의 침략이다. 

❹ 오늘날 우리가 어떤 위기의식을 느낀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교회가 점점 세속화하는 경향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결론 : 예레미야의 기별은 끝내 바벨론 유수로 이어질 영적 위기를 다루었습니다. 이런 위기는 엄청난 은혜로 말미암아 수백 년간 유예되었지만 하나님의 길보다 인간의 길을 선택하는 배도로 인하여 점점 고조되었습니다.

 

 

첫째날(일) 간추린 역사

10월 4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삿 2:11).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 해 동안 광야에서 방황을 마치고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뒤에 오래지 않아 곤경이 시작되었다. “여호와를 알지 못”(삿 2:10)하는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자 문제가 일어났다. 영적 위기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여러 방면에서 역사 내내 그 민족을 감염시켰다. 그것은 또한 교회를 오염시킨 문제이기도 하다.

 

1. 삿 2:1~15을 읽어 보라. 위기를 초래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삿 2:11).

[삿2:1~15]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15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답: 주위 문화에 강한 영향을 받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이방의 신들을 섬긴 것이다. 결과는 재앙에 직면한 것이다.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오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행하기까지 그분에게서 서서히 멀어졌다.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의 위기가 지나면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면한 재앙으로부터 그들을 건지시기 위해 사사들을 보내셨다(삿 2:16). 

사사시대 후에 이스라엘 민족은 약 백 년간 사울, 다윗, 솔로몬이 다스렸던 소위 ‘통일 왕조’의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진입했다. 특히 다윗과 솔로몬 치하에 이스라엘은 지역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솔로몬 사망 이후에(약 기원전 931년) 나라가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나눠졌다. 대부분의 책임은 뛰어난 지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과오를 범한 솔로몬의 그릇된 통치에서 찾을 수 있다. “여러 지파들은 그들의 전 통치자의 압정 하에서 오랫동안 쓰라린 학대를 받아 왔었다. 그의 배도의 기간에 솔로몬 정부의 사치가 그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게 하고 천한 노역을 요구하게 하였다”(선지자와 왕, 88~89). 하나님의 선민에게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들마다 범한 그들은 결국 애처로운 결과를 되풀이했다.

 

<부가설명> 사사기 2장을 읽어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던 먼저 세대의 선조들이 자녀 손들에게 신앙을 올바르게 전수하는 일에 실패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2:10)라고 기록하였다. 또 주위 이방인들이 문화가 강하게 그들에게 밀려들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스라엘은 문화적으로 고립되었고 민족적으로 고독하였다. 그들이 주위 민족들과 교제하고 거래하면서 그들이 종교문화에 접하였는데,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그 하나님보다 신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절하고 종교행사를 흥미 있게 수행하는 것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며 차차 물들어갔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방인의 신을 섬기는 방법으로 섬기기 시작하다가 드디어 이방신을 섬기는 자리에 빠진 것이다. 

  오늘날 우리교회 현상이 이런 이스라엘의 경험을 따르고 있지 않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종교 문화적으로 고립적이다. 교회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다른 교회의 문화적 형식을 끌어들이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신앙적으로 고독하다고 느끼고 이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이방문화를 교회에 끌어들이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집회 문화, 특히 사경회나 특별 집회는 모두 아주 짧은 기간만 수행하고 있다. 예전에는 사경회를 1주일 했다. 그것도 밤낮 했다. 요즘은 어떤가? 사경회뿐만 아니다. 연말 기도주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름다운 신앙전통을 하나씩 버리고 편리를 따라가는 우리 현실이 사사기 시대 이스라엘과 닮아 있지 않는지?

 

교훈 :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새로운 세대가 일어난 이후에 하나님을 배신하는 역사를 반복했다.

 

 

둘째날(월) 두 왕국

10월 5일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왕상 12:28).

 

나라가 두 동강이 난 뒤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북방 왕국의 여로보암 왕은 오랫동안 악한 영향을 남길 끔찍한 영적 결정을 내렸다.

 

1. 왕상 12:26~31을 읽어 보라. 이것은 당장의 상황이 얼마나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가?

[왕상12:26~31]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31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답: 북방 왕이 된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남쪽 벧엘과 북쪽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라고 선언하고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 레위인이 아닌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선임하여 모세의 지시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우상숭배의 도입은 나라를 파국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여로보암의 통치 기간 중에 들어온 배도는 더욱 현저하게 되어 마침내 이스라엘 나라의 완전한 멸망을 초래하였다”(선지자와 왕, 107).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 왕 살만에셀은 북방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거주민들을 제국의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켰다(왕하 17:1~7 참고). 이 유배에는 귀환이 없었다. 한동안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방 왕국은 그렇게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북방 왕국과 마찬가지로 훌륭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북방 왕국이 당한 재난으로부터 그 백성들을 보호하시고자 했고 이제 바벨론의 침입으로부터는 지켜주시고자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거의 예외 없이 유다의 여러 왕들은 계속 나라를 더 깊은 배도로 이끌었다.

 

2. 다음의 성경절들은 유다 왕들의 통치에 대해 어떤 사실을 말하는가?(대하 33:9~10, 21~23, 왕하 24:8~9, 18~19)

[대하33:9,10, 21~23]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10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저희가 듣지 아니한 고로/ 21 아몬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 년을 치리하며 22 그 부친 므낫세의 행함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므낫세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여 섬겼으며 23 이 아몬이 그 부친 므낫세의 스스로 겸비함같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비치 아니하고 더욱 범죄하더니.

[왕하24:8,9, 18,19] 여호야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느후스다라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9 여호야긴이 그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18 시드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19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답: 역사가 진행되면서 왕들이 점점 더 우상숭배에 빠진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군주들은 형편없었지만 하나님은 나라의 심장을 좀먹는 죄와 배도로부터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해 선지자들을 파견하셨다. 예레미야서를 포함하여 성경의 여러 선지서들은 그러한 선지자들의 말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그들의 죄로부터 돌아서고 그러한 죄가 불가피하게 몰고 올 재앙에서 벗어날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지도 않은 채 그들을 포기하지는 않으실 작정이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쉬게 포기하지 않으셨다. 어떻게 하든지 그들이 돌이켜 모세와 선조들에게 지시하신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간청하셨다. 이 일을 위하여 선지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의 실상을 볼 수 있는 기별을 전하셨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좀처럼 기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들이 그랬다. 백성은 당연히 기별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더 멸망의 수렁으로 걸어 들어갔다. 또한 사단은 거짓선지자들을 양산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선지자들의 기별에 맞불을 놓았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지 않는 길이 바른 길인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별을 퍼뜨렸다. 백성들은 그 기별을 좋아하였다.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이르렀다. 오는 날 우리는 기록된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전통과 전통적 문화와 신학과 조직의 유산에 매여 성경에 기록한 본문에서 일탈하는 해석과 방식을 마치 성경 말씀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 않는지 깊이 점검할 일이다. 예수 이름으로 전한다고 반드시 성경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베뢰아 신자들처럼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신앙생활이 회복되어야 한다. 말씀에 맞지 않으면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말씀으로 말씀을 이해하는 성경이 제시한 그 길을 따라 말씀을 연구하고 굴복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왕국이 분열된 뒤로 북방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패망의 길을 걸었으며 남방 유다 역시 하나님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멸망에 가까워졌다.

 

 

셋째날(화) 두 죄악

10월 6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젊은 예레미야가 선지자로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백성들이 그 말씀에 주의한다면 멸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을 저버리면 멸망이 반드시 임할 것이었다. 

 

1. 렘 2:1~28을 읽고 다음의 질문에 답하라.

[렘2:1~2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3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 야곱 집과 이스라엘 집 모든 가족아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7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가증히 만들었으며 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9 그러므로 내가 여전히 너희와 다투고 너희 후손과도 다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 이같은 일의 유무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14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15 어린 사자들이 너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수리를 날려 네 땅을 황무케 하였으며 네 성읍들은 불타서 거민이 없게 되었으며 16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17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나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18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 길에 있음은 어찜이며 또 그 하수를 마시려고 앗수르 길에 있음은 어찜이뇨 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0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22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23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을 좇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너는 발이 빠른 젊은 암약대가 그 길에 어지러이 달림 같았으며 24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가 그 성욕이 동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성욕의 때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자들이 수고치 아니하고 그것의 달에 만나리라 25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말며 목을 갈하게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 26 도적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같이 이스라엘 집 곧 그 왕들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하였느니라 27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은 내게로 향치 아니하다가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28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뇨 그들이 너의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

 

1) 그 나라가 신실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는가?(2~3절) 

※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물이 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절대적 보호자가 될 약속.

2) 일부 제사장, 목자와 선지자들은 어떤 죄악을 범했는가?(8절) 

※ 제사장은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였고, 법 잡은 자와 관리들은 여호와를 알지 않고 항거했고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했다.

3) 백성들은 자기들의 영적 상태에 관하여 어떤 가증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기만했었는가?(23~24절)

※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고 바알을 따라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비록 유다는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치세에 영적 개혁을 경험했으나 백성들은 옛 습관으로 돌아갔고 더 심한 타락에 빠졌다. 예레미야는 최선의 사역을 펼치는 동안 모호하지 않은 언어로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말하였다.

특히 렘 2:13의 말씀이 흥미롭다. 백성들은 두 가지 죄악을 범했다. 그들은 생명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전혀 물을 담을 수 없는 쓸모없는 웅덩이를 스스로 팠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림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이 말씀은 요 4:10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 더 의미심장하다.

렘 2:5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분을 버리고 ‘헛된 것’을 좇다가 결국 ‘헛된 것’이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들은 전도서에서 ‘헛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와 동일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증기’ 또는 ‘(한)숨’을 뜻할 수도 있다.

 

<부가설명> 사람은 감각적이기 때문에 감각하는 것을 진실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수도 있고 전혀 아닐 수도 있다. 신앙하는 데 이 문제는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하였지만 후대에 그것은 다만 역사적 사실일 뿐 실제 생활에 감각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신들을 믿는 것은 종교행사 자체가 감각적이었다. 출애굽 당시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발람의 꾀를 따라 축제를 벌이고 감각적 행사에 이스라엘을 초청하여 그들을 우상 제사에 빠지게 하였다. 감각적인 것은 그 유혹이 강하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감각에 빠진 것 같다.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대신에 감각적 체험에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신들은 정말 감각적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유혹했고 감각에 자극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주 쉽게 거기 빠졌다. 오늘날 문화는 아주 감각적이다. 이런 문화가 기독교 안에 들어왔다. 그래서 옛날처럼 경건한 자세로 예배하는 것이 싱겁게 되었다. 모든 것이 동작과 감각을 동원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바뀌고 있다. 찬미도 동작과 율동을 곁들여야 신명이 나는 것 같다. 과히 나무랄 일이 아닌지 모르지만 감각에 익숙해지면 감각적이지 않은 것은 시시해진다. 우리의 신앙이 기록된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데서 인간의 감각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옛 이스라엘의 허물에 빠지게 될 위험의 수위는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

 

교훈 :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멸망을 모면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것을 좇은 죄에서 돌아서지 않는 이상 파국적 결말은 피할 수 없었다.

 

 

넷째날(수) 바벨론의 위협

10월 7일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렘 27:6).

 

예레미야가 활동했던 당시의 정치적 사건들과 그 배경은 다소 역사성이 결여되어 있다. 즉 구체적인 사실이 제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에 벌어진 사건들의 전체적인 윤곽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정보를 (고고학의 도움을 받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이 나라들이 영토와 권력과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울 때에 세상을 통제하는 존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한다.

 

1. 렘 27:6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렘27:6]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또 들짐승들을 그에게 주어서 부리게 하였나니.

 

답: 세상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레미야의 봉사의 초기에 작은 왕국 유다는 바벨론과 애굽 그리고 세력을 잃고 있는 앗수르 사이에서 벌어지는 군사적인 대결에 말려들었다. 기원전 7세기 후부터 앗수르 제국이 쇠퇴하자 애굽은 지역의 패권과 지배력을 되찾기 원했다. 그러나 기원전 605년 애굽은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패하고 바벨론이 새로운 강국이 되었다.

이 신생 강국은 유다를 속국으로 삼았다. 유다 왕 여호야김은 바벨론 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만 나라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유다의 많은 이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바벨론과 싸워서 독립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계획하신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유다의 배도로 인하여 그 나라를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실 작정이었다.

 

2. 렘 25:8~12을 읽어 보라. 유다 백성에게 보내는 예레미야의 기별은 무엇이었는가?

[렘25:8~12]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은즉 9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솟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 10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쳐지게 하리니 11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답: 유다는 그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죄가 그들을 삼킬 것을 지적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의 자비가 70년이 차면 회복하도록 이끌 것을 약속하셨다. 

 

예레미야는 계속하여 그들의 죄 때문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백성들에게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정치·종교 지도자들은 경고를 청종하지 않고 그냥 여호와께서 그들을 살려주시리라고 믿었다.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 아닌가?

 

<부가설명> 선민은 선민답게 생활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다. 사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선민이 되어 스스로 선민답게 생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민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전적으로 순복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끄시는 손길을 거절하면서 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에 순복하는 것을 자기 노력이라고 착각한다. 그것은 자기를 성령에게 굴복시키는 것이다. 굴복하는데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굴복하면 된다. 다만 자신이 죽은 존재라는 것을 속히 시인하는 것이다. 죽은 자는 스스로 아무것도 못한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어서 살게 할 때 그 생명 작용이 활동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이 생명 작용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이것을 성경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바울도 친히 갈라디아서 2:20에서 고백하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살피시고 섭리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교훈 : 유다는 신흥 강국 바벨론에게 복종하라는 선지자의 경고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랐으나 하나님은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작정이었다.

 

 

다섯째날(목) 거짓 맹세

10월 8일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 5:2).

 

예레미야서 5장 1절에서 여호와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두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기원전 4세기경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이야기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대낮에 시장 안을 거닐면서 정직한 사람 하나를 찾는다고 외쳤다.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의인 50명을 찾으면(10명까지 축소됨)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하시고자 했던 말씀의 요지는 배도와 죄가 그의 백성들 사이에 얼마나 만연했는지 드러내는 것이었다. 정말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찾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인가?

 

1. 렘 5:2~3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상황이 얼마나 나빠지고 있는가?(레 19:12 참고)

[렘5:2,3]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3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레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답: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행하였다. 그들은 생명의 감각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말씀은 책의 전반에 걸쳐 있는 핵심을 끄집어낸다. 그 나라가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했는지와 상관없이 대다수의 백성은 그들이 여호와를 여전히 신실하게 섬긴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분이 명령하신 “진실과 정의와 공의”(렘 4:2) 대신 ‘거짓으로’ 그렇게 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경고를 듣지 않고 마치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일상생활과 종교 행위를 지속했다. 그러나 실상 둘 사이의 관계에 온전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있는 자기기만의 심각성은 렘 7:4에 잘 나타나 있다. 백성들은 마치 성전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보증이 다 갖춰진 것처럼 ‘헤칼 야훼 헤칼 야훼 헤칼 야훼 헴마(이것은 여호와의 성전, 여호와의 성전, 여호와의 성전이로다)!’라는 말로 위안을 삼으려 했다.

그대는 먼저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만약 위기에 빠졌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사태는 매우 심각해진다. 그래서 스스로를 마지막 교회라고 부르는 우리는 항상 이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7~18).

 

<부가설명> 엘리 제사장 때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 언약궤를 전장에 가지고 갔다. 언약궤가 있으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까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궤를 메고 간 엘리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는 제사장이었다. 궤는 빼앗겼고 두 제사장은 죽었다. 예레미야 때에 이스라엘은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외치면서 하나님의 성전이 자기 들 중에 있으니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헛된 믿음을 고집한 것이다. 10절에 보면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조건이 되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상태가 아닌지 심히 송구스럽고 두렵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생활이 되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생명이 그를 생활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진짜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생명이 그의 생활에 전혀 작용하지 않으면 결국 구원받았다는 주장이 바로 죄를 짓는 구실이 되게 된다. 우리는 극히 조심하고 자신을 살펴서 바른 믿음으로 서 있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예레미야 당시의 예루살렘에는 죄와 배도가 편만하였다. 백성들은 선지자의 경고를 외면하고 그들의 신앙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자신을 기만했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0월 9일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신 12:8).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서 정직하게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신 13:18).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

이 말씀 속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명암이 존재한다. 특히 외부의 권위에 의하여 무엇을 행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결정하기를 거부하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여기서 두 세계관 사이의 명확한 대조를 본다.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은 것을 행한다. 역사적으로 드러난 첫째 견해의 문제점은 누군가의 관점에서는 옳은 것이 종종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것, 심지어 우리의 양심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해야 하는 이유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선량한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대는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예가 있습니까? 현대 사회는 과거에 일반적이었던 관습을 되돌아보고 경악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더불어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할 뿐 아니라 성경 해석에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신의 옳지 않은 행위를 성경을 통해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합니다. 이로 보건대 십계명이 우리의 신념에 얼마나 중요한 바탕과 토대가 되어야 할까요?

※ 하나님의 말씀 외에 옳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해야 한다. 해석도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 대로 수용해야 한다. 말씀이 말씀을 해석하는 원리를 깨닫기 위해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고 자기의 신발을 벗고 말씀 앞에 서야 한다. 

 

➋ 이번 기에 예레미야서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기만하고 실상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을까요? 그러한 역사를 통해 우리가 전해 들어야 할 기별은 무엇입니까?

※ 그들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자신을 기만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도 자신을 잘 살피되 철저히 말씀에 근거하여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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