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선지자로 부름받은 예레미야(질문,대답,부가설명)1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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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5-09-30 18:48 조회9,641회 댓글0건본문
10월 3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13분
기억절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연구 범위 : 사 1:19, 렘 7:5~7, 왕상 2:26, 렘 1:1~5, 사 6:5, 렘 1:6~19, 마 28:20
예레미야의 생애는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의 생애보다 많이 알려져 있다. 예레미야서의 자서전적 요소는 그의 선지자 사역을 더욱 잘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된다. 예레미야는 예수님 시대에도 존경받는 인물이었을 정도로 역사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하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선지자로서 그의 사역은 소기의 성공을 거두는 것에 그쳤다. 수십 년간의 열정적인 경고와 호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대체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전하는 기별을 청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반대를 당할지라도 타협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이 아닌 여호와의 능력으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렘 1:18)처럼 섰다.
예레미야의 삶은 여러모로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신의 소명으로 말미암아 고난과 재앙과 거절 심지어 투옥을 경험해야 했다. 더 뼈아픈 것은 그가 옳은 방향을 가리키며 돕고자 했던 백성에게서 이러한 수난이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의 경험은 수백 년 후에 예수님이 동일한 나라에서 받을 대우를 예표하였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부르심에 대한 부담이 그 임무에 대한 자격 조건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자신을 부적합하게 여기는 자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세심함을 느낀다.
➌ 행하기 :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더 귀 기울여 듣기로 결심한다.
A.
❶ 정말 하기 싫지만 꼭 할 수밖에 없는 일은 무엇입니까?
※ 생리에 관계된 일들이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화장실 가는 일들. 생리와 생명 유지에 관계 되는 것들은 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 유지에 관계 된 일들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라.
❷ 그대는 선지자가 얼마나 어려운 직책이라고 생각합니까?
※ 목숨을 내어놓고 수행해야 하는 직책이다.
❸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 과정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❹ 그대가 지금 어렵더라도 수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각자 생각해보자. 달란트를 따라서 주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무엇을 감당해야 할는지 심사숙고해보자.
B.
❷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나기 전부터 선지자로 구별하셨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나기 전부터 그가 수행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아신다는 뜻이다.
❸ 부름을 받은 사람이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전적인 신뢰와 헌신과 충성이다.
❹ 우리 교회 또는 소그룹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성취해야 할 사명
은 무엇입니까?
※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과 주님의 몸인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이다.
결론 : 예레미야는 자신이 마주할 어려움을 예상하고 자신이 그런 도전에 적합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심하게 그를 대하셔서 그의 두려움을 잠재우시고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그에게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첫째날(일) 선지자들
9월 27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렘 11:2).
그들의 소명에 따르면 선지자들은 단호한 율법의 수호자들이었다. 그들은 언약과 십계명의 기초 위에 섰다(렘 11:2~6). 미 3:8은 선지자의 임무를 “야곱의 허물”을 고하고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물론 죄의 개념은 율법을 제외하면 의미가 없다(롬 7:7).
1. 백성들에게 보내는 선지자의 기별은 무엇이었는가? 그 기별은 어떻게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가?(사 1:19, 렘 7:5~7, 겔 18:23, 마 3:7~11 참고)
[사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렘7:5~7]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마3:7~11]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답: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권고하고 책망하며 또 신실한 자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가르쳐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하지는 않다. 그러나 백성들이 그들의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이 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악행에 익숙해져 있다면 변화가 쉽지 않다. 사람들은 한때 충격을 받던 죄악에도 익숙해진다. 선지자들의 기별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악이 얼마나 나쁜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돌아서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이르러 올지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기별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다.
선지자들은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는지 또는 어떻게 들었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종종 하나님은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셨고 때로 성령께서 꿈과 이상으로 또는 “세미한 소리”(왕상 19:12)를 통해 그들에게 영감을 주셨다. 기별이 그들에게 어떻게 왔든지 상관없이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일반 백성에게 전달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그것을 왕, 황제 그리고 장군들에게 알려야 할 사명이 있었다.
그들의 임무에는 큰 책임이 따랐다. 만약 그들이 진실을 말한다면 권세 있는 자들이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리를 전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 있었다.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감당하기 버거운 부름이다. 성경을 보면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그것을 심각하게 여겼다. 다만 그들이 소명을 받아들였다니 다행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기별이 성경에 기록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기별은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다. 문제는 예레미야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과연 들을 것인가?’에 있다.
<부가설명>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선지자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나비’이다. 이 말은 선지자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대언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안 된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만 정확하고 정직하게 전해야 한다. 백성들을 선지자들을 말을 선지자 개인의 말로 들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청종하지 않았다. 선지자들은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지금도 성경을 통하여 그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는다. 그냥 종교문서로 생각하고 한 종교의 경전으로만 본다. 심지어 교회에서 성경을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는다. 신학과 전통과 풍습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도 되는 것으로 여기는 풍토가 되었다. 우리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말씀을 준행하고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씀대로 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수호하며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께 받은 기별을 백성들에게 때로는 왕들에게 전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있었다.
둘째날(월) 예레미야의 가정환경
9월 28일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렘 1:1).
1. 왕상 1장과 왕상 2:26을 읽어 보라. 아비아달이 그의 고향 아나돗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왕상1:7,25]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25 저가 오늘 내려가서 수소와 살진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군대 장관들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청하였는데 저희가 아도니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아도니야 왕 만세를 불렀나이다.
[왕상2:26] 왕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네 고향 아나돗으로 가라 너는 마땅히 죽을 자로되 네가 내 부친 다윗 앞에서 주 여호와의 궤를 메었고 또 내 부친이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너도 환난을 받았은즉 내가 오늘날 너를 죽이지 아니하노라 하고.
답: 아도니아의 반역에 가담했기 때문에 아나돗으로 쫓겨났다.
솔로몬은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한 아도니야와의 갈등을 종결하고 왕권을 강화한 후에 제사장 아비아달의 직위를 박탈하여 그를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그의 고향 아나돗으로 쫓아냈다. 예레미야의 부친 힐기야는 아나돗에 사는 제사장 가문의 일원이었다.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의 가족이 아비아달의 후예일지 모른다고 추측한다. 어쨌든 렘 1:1에 따르면 선지자는 훌륭한 가문의 출신이다. 선지자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목동, 교사, 어부, 제사장 등 각계각층의 사람을 부르셔서 선지자로 삼으셨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을 맡을 사람 중 하나인 예레미야는 그가 모태로부터 ‘열방의 선지자’가 되도록 세움을 받았다는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에 그는 자기의 무가치함에 대한 느낌으로 압도되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라고 부르짖었다”(선지자와 왕, 407).
제사장들은 국가의 도덕적, 영적 지도자들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국가의 모든 영적인 분야에 감화를 주어야 하는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어떤 제사장들은 그런 임무에 충실했던 반면 어떤 이들은 그들의 지위를 남용하여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명을 거역하였다. 예레미야서에서 읽겠지만, 그는 이렇듯 불충한 제사장들에 대해 매우 강한 어조로 말하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위탁된 책임과 부름에 합당하지 못함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부가설명> 선지자와 달리 제사장은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다. 그렇더라도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받으시는지를 잘 알아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대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의 허물을 속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죄를 간구하는 일이 중심이지만 성경은 제사장이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책임이 있다고 계시한다. 그런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아도니아 편을 들어서 결국 제사장의 직무를 정지당하고 고향으로 쫓겨났다. 학자들 중에는 예레미야가 아비아달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예레미야가 아나돗의 제사장이라는 표현으로 그렇게 단정하는 것 같다. 그럴지라도 예레미야는 자기 직무를 충성으로 수행하였다.
교훈 :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 출신이지만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나라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할 제사장들을 강하게 책망해야 했다.
셋째날(화)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
9월 29일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1. 렘 1:1~5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예레미야의 소명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렘1:1~5]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3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일 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 잡히니라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답: 하나님께서 그를 모태에서 부르셨다고 말씀하셨다.
구약성경의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또한 신약성경의 바울과 마찬가지로, 갈 1:1, 롬 1:1 참고) 예레미야는 자신을 부르신 분에 대하여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는 위의 성경절뿐 아니라 책 전체에서 자신이 하는 말은 그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물론 이러한 뜨거운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맹렬한 반대와 역경,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기원전 627/626년에 해당하는 요시야 13년의 일이다. 우리는 그가 몇 년도에 태어났고 몇 살 때에 사역을 시작했는지 모른다. 다시 살펴보겠지만 그는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에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 여겼다.
2. 렘 1:4~5을 읽어 보라. 그는 이 말씀을 통해 어떤 확증과 위로를 얻어야 했는가?
[렘1:4,5]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답: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예레미야를 복중에 짓기 전에 태어서 나오기 전에 선지자로 세웠다는 확신으로 위로를 받고 충성하였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선지자로 선택하셨다. 그분은 그가 잉태되던 순간부터 선지자의 역할을 위해 그를 구별하셨다. “성별하였고”(5절)라고 번역된 말은 ‘거룩하게 하다’, 다른 것들로부터 ‘성스럽게 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비롯됐다. 그것은 신성하고 종교적인 의미를 암시하며 성소 봉사와 관련이 있다. 실제로 ‘성소’라는 말도 같은 어원에서 유래한다. 그 말은 어떤 사물이나 인물이 ‘거룩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개념을 내포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위해 계획하신 것이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예레미야의 선재성이나 예정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지이다.
<부가설명> 이 말씀은 예정론 자들이 사용하기를 좋아하는 구절이다. 복중에 짓기 전에 선지자로 세웠다는 표현이 예정하셨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과 저자의 말 대로 이것은 예정론이 아니고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일을 맡을 때에 충성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를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종말을 처음부터 아시는 분이신데(사46:10)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것만이 아니고 모든 개인데 대한 것도 아신다.(시139편)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예정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성장하고 행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기 때문에 미리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언이다. 예언은 예정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스스로 하나님께 굴복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예정된 것이다. 또 그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할 사람들이 될 것도 예정된 것이다.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전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참 성도들은 다 예레미야처럼 예수 안에서 예정을 입은 사람들이다.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확신할 수 있다. 감사하지 않는가!
교훈 :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선지자로 성별하셨다. 이런 확신을 통해 그는 수많은 어려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넷째날(수) 주저했던 선지자들
9월 30일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렘 1:6).
이 일을 위해 선택을 받았다는 여호와의 보증에도 불구하고 그 젊은이는 두려워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백성들의 형편없는 영적 상태와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그 임무를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1. 렘 1:6을 사 6:5, 출 4:10~15과 비교해 보라. 이 일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렘1: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사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출4:10~15]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4: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4: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4:13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4: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4: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답: 주님의 선지자(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두려워하고 부담스러워 한 사실이 공통적이다.
사정이야 어쨌든 그들은 모두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같이 중요한 사명에 대하여 자신의 부적합성과 무능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선지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일지도 모른다. 창조주의 대변인이 되라니! 적어도 처음에 그런 사명 때문에 위축되는 것은 당연하다.
예레미야가 부름을 받은 이후 보인 첫 반응을 주목하라. 그는 모세처럼 즉시 부족한 언변의 능력에 대해 말했다. 이사야도 자신의 입술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부르심이 언어와 소통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기별을 받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할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이었다. 웹사이트를 제작하고 문자를 보낼 수 있는 오늘날과 달리 그들은 대체로 얼굴을 마주하고 의사소통해야 했다. 적대적인 지도자나 무례한 백성들 앞에 서서 날카로운 책망과 경고의 기별을 제시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면 곧바로 선지자가 되기를 주저하는 것도 당연하다.
2. 렘 1:7~10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일에 부르셨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그러한 반응에서 어떤 희망과 약속을 찾아야 하는가?
[렘1:7~10]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답: 부르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담대하게 하고 책임을 수행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하신 것이다.
<부가설명>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영예일 수 있겠지만 세상의 사람들 앞에서 그 직무를 충성으로 수행하는 데는 온갖 고난이 따르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별이 사람들의 구미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썩어져가는 구습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태에 있는데,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별을 받아서 썩지 않는 삶을 살라는 기별이 달가울 리가 없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무슨 보수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성경에 선지자의 보수에 대한 기록이 없다. 생활을 위하여 다른 생업을 가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목회자는 옛날 선지자 같지 않다.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사명보다는 생업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성경의 선지자들의 상태와 다르게 직업의 하나처럼 되었다. 목회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평신도들도 받은 기별을 따라 생활하면서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복음은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게 전파할 임무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교훈 : 예레미야는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기별을 백성에게 전해야 할 선지자의 사명에 큰 부담을 갖고 주저했다.
다섯째날(목) 살구나무 가지
10월 1일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렘 1:11).
선지자는 하나님의 증인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위해 말해야 한다. 예레미야는 국가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찾거나 백성들이 따르고자 하는 위대한 인물이나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전달하라는 하나의 사명을 받았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인간이나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통치와 권세에 관한 것이다. 선지자는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되시는 여호와를 바라보게 해야 했다. 하나님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되신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다.
1. 예레미야의 첫 번째 이상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가?(렘 1:11~19)
[렘1:11~19]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1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면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 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 18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19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답: 북방에서 유다를 침공하는 세력에 대한 계시였다.
대부분의 번역 성경들은 11절의 히브리어 표현을 ‘살구나무 가지’로 번역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히브리식 언어유희를 살리지 못한다. ‘살구나무’로 번역된 말은 12절에 등장하는 ‘지키다’라는 동사와 어근이 같다. 여기서 여호와는 당신께서 자신의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렘 1:11~12에 예레미야서 전체의 핵심 기별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될 법도 하다. 언젠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그들의 죄에서 돌아서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은혜와 용서를 베푸신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순종과 치유를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예레미야서에서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말씀이 이뤄진 것처럼 심판과 형벌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보다시피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백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직접 말씀하시면서 그가 직면할 반대에 대비하도록 경고하셨다. 어떤 일이 생기든지 예레미야는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하신 하나님께 보증을 얻을 수 있었다. 앞으로 보겠지만 그는 그 보증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부가설명> 11절의 ‘살구나무’는 히브리어로 ‘샤케드’이다. 또 12절에 ‘내 말을 지켜’라는 말 중에 ‘지켜’는 ‘샤카드’이다. 발음이 비슷할 뿐만 아니다. 어근(語根)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지키실 것을 지킨다는 말과 발음이 비슷한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주셔서 직접 말로하지 않아도 무슨 뜻이지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이런 상징적 형상을 보여주셔서 그 뜻을 알게 하시는 것을 통하여 천연계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별을 듣게 되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나타내신 것 같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비유하실 때에 땅의 것을 통하여 하늘을 볼 수 있게 하신 것이 바로 선지자들에게 이렇게 나타내신 사실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피조물들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기별을 듣는 귀와 보는 눈을 가지도록 간구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닐까?
교훈 : 선지자는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보증을 믿고 반드시 성취될 그분의 말씀을 전하며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되시는 하나님을 가리켜야 했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0월 2일
마르틴 루터는 그의 예레미야서 주석 서론에서 예레미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예레미야는 한탄스럽고 어려운 시대를 산 슬픔의 선지자였다. 완고하고 기질이 나쁜 백성들과 씨름하며 싸워야 했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무엇보다 극도로 까다로웠다. 그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원수들이 얼마나 더 악해졌는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러 번 선지자를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그를 강하게 압박했을 뿐 아니라 몇 차례 채찍질을 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나라가 황폐화되고 그분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직접 볼 때까지 생존할 것이었다.”
“40년간 예레미야는 진리와 의의 증인으로서 백성 앞에 서야 했다. 미증유의 배도의 시대에 그는 생활과 품성으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모본을 보여야 하였다. 무서운 예루살렘의 포위 기간에 그는 여호와의 대변자가 되어야 하였다. 그는 다윗의 집의 몰락과 솔로몬이 건축한 아름다운 성전의 파멸을 예언하여야 했다. 그의 두려워할 줄 모르는 발언 때문에 투옥되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산당의 죄악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야 하였다. 사람들에게 멸시와 증오와 거절을 당한 그는 결국 절박한 운명에 대한 자신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목격하고 명이 다한 성읍의 멸망에 뒤따를 슬픔과 괴로움에 동참해야 하였다”(선지자와 왕, 40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가장 슬픈 사실이면서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서 우리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예레미야가 자기 백성들로부터 큰 반대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렘 1:17~19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그를 대적하여 싸울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어떤 엄숙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지 않은 선지자의 기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합니까? 위의 엘렌 G. 화잇의 인용문은 참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야 할 자들이 오히려 그분의 대리자들을 매도하고 공격하며 싸우려고 했다는 두려운 진실을 설명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 교회의 구성원들이 참된 기별을 반대할 것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다. 교회 구성원이라고 할 때 재림교인일 수도 있고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구성원일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참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하나님의 기별을 증거하고 생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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