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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바울의 배경과 소명(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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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5-09-05 05:57 조회8,6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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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46분

 

기억절 :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연구 범위 : 행 9:1, 빌 3:6, 8, 고전 15:9~10, 행 9:1~22, 행 26:16~18, 갈 2:1~17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원래 다소 사람 사울이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바울은 기독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그분의 백성을 이방인들로부터 건져낸 반면 바울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그분의 말씀을 이스라엘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가져다주었다.

바울은 다른 1세기 그리스도인들보다 알려진 것이 많다. 그는 특히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선교에 영향을 준 훌륭한 사역으로 유명하다. 지중해 주변 민족들에 대한 바울의 선교 방문과 활동은 후대의 기독교 선교에 중요한 모본을 남겼다.

유대인들의 삶은 유대교의 시민법, 의식법, 도덕법과 깊이 얽혀 있었다. 그래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관습과 그들이 열방에게 전할 하나님의 영원한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사이에는 거의 차이점이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유대교 문화로부터 성경 진리들을 드러낸 업적을 세웠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주에 신약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인물, 바울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바울의 과거 생애와 경험이 이방 선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본다.

➋ 느끼기 : 그가 경험한 은혜와 용서가 어떻게 그의 선교적 동기가 되었는지 이해한다.

➌ 행하기 :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들을 회상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르기로 재 헌신한다.

 

A. 

❷ 바울은 어떻게 기독교의 박해자에서 기독교의 전도자로 변할 수 있었을까요?

※ 예수님이 직접 그를 부르셨다. 

❸ 바울의 배경과 과거의 경험은 그의 선교적인 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 당연히 영향을 주었다. 그의 경험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합리적인 방법을 알게 하였을 것이다. 

 

B. 

❷ 바울의 선교 사업의 핵심과 특징적인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문화적 배경을 깊이 고려하였다. 

❸ 바울은 이방인에게 전도하면서 절대적인 진리와 문화적 요소를 어떻게 구별했습니까?

※ 진리에 배치되지 않는 문화적 요소는 다 수용하였다. 

❹ 우리 교회가 선교적인 확장을 위해 구별해야 하는 절대적인 진리와 문화적인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절대적인 진리를 성경이 제시한 진리 그대로이고 문화적 요소는 의식주와 기타 생활방식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생활방식이 성경진리와 충돌할 때에는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결론 :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에서 얻은 힘과 비신자들에 대한 친숙한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이방인들과 더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날(일) 다소 사람 사울

9월 6일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행 22:3).

 

사울은 시리아와 서아시아 사이의 무역로에 자리를 잡은 다소에서 출생했다(행 22:3). 다소는 산업과 교육이 발달한 다문화 중심지였으며 한때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웅변가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키케로의 집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사울의 부모는 베냐민 지파 출신의 ‘디아스포라(이스라엘 땅 밖으로 흩어진)’ 유대인이었다. 그의 본명은 사울(히브리어로 ‘하나님께 구하다’라는 뜻)이었지만 이방인 선교를 시작한 뒤에 바울(라틴어로 ‘파울루스’, 로마에서 유명한 가족명)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행 13:9). 그는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아내가 있었을 테지만 우리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사실 그의 누이의 아들(생질)에 대한 언급 외에 우리는 그의 가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행 23:16). 바울은 또한 로마 시민권자였다(행 22:25~28).

사울은 아마도 12세까지 다소에 있는 회당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후에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명한 라반(‘우리의 스승’이란 뜻의 경칭) 가말리엘에게서 랍비 교육을 받았다(행 22:3). 대부분의 유대인 남성들이 실업 교육을 받는 것처럼 바울도 천막 제조를 배웠다(행 18:3).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바울은 바리새인이었다(빌 3:5).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과 마찬가지로 서기관들에 의해 여러 세대에 걸쳐 구전된 율법도 모든 유대인에게 구속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엄격한 애국주의와 유대법에 대한 세부적인 순종은 동료 유대인들의 눈에 위선적이고 비판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그의 아버지가 바리새인이었음을 숨기지 않았다(행 23:6).

바리새파였던 바울의 배경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 사역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한 배경 때문에 바울은 초기 기독교의 유일한 경전이었던 구약에 대해 세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또한 구약 율법을 확대 해석한 추가 자료들에도 친숙했다. 따라서 바울은 성경에 기초를 둔 절대적인 진리와 구속력이 없어 이방인 신자들과 관련이 없었던 유대 문화의 부산물을 식별할 자질을 가장 잘 갖춘 사도였다. 이 문제는 초기 교회 사회에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교회 내에서 문화의 역할은 교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부가설명> 바울은 유대와 헬라로 대표되는 이방을 연결하는 준비된 교량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바울이 된 사울이 하나님을 위한 충심을 아셨다. 그가 교회를 핍박했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이었다. 그는 일반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불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 유대인인 바울이 이방의 사도가 된 것이다. 결과로 복음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나가게 되었다. 

 

교훈 : 바울은 ‘흩어진 유대인’ 가족의 후손이자 엄격한 바리새파의 제자로서 성경의 진리와 유대 문화의 부산물을 구별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도였다.

 

 

둘째날(월) 인간 바울

9월 7일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6).

 

개성은 한 사람을 둘러싼 가정과 문화와 교육 환경에 대한 그의 독특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성품은 한 개인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구성하는 특성과 자질과 능력의 조합이다.

 

1. 행 9:1, 빌 3:6, 8, 고전 15:9~10, 딤전 1:16, 갈 1:14, 고후 11:23~33을 읽어 보라.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성품과 개성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행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빌3:6,8]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고전15:9,10]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딤전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고후11:23~3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답: 바울의 성품은 자기가 옳다고 깨달은 것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서라도 수호하고 충성하는 성품이고 개성은 아주 열렬한 사람이었다. 솔직하였다. 자기의 과오를 정직하게 인정하였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했다. 

 

바울은 분명 열성과 확신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중생의 경험 이전에 그는 자신의 열성을 초기 교회를 박해하는 데 사용했다. 그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데 동조했고(행 7:58), 남자든 여자든 그리스도인들을 투옥시키는 데 앞장섰으며(행 8:3), 제자들의 목숨을 위협했고(행 9:1), 외국의 그리스도인들을 급습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행 9:2, 갈 1:13).

우리는 또한 극심한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의 열성과 열의가 복음을 전하는 데 생명을 바칠 만큼 선을 위해 사용되었는지도 본다. 자신이 믿는 것에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만이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 이 말은 쓰레기처럼 쓸모없는 물건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바울은 인생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이해했다.

바울은 또한 겸손한 사람이었다. 여기에는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과오가 일부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하늘의 부름을 입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의 의를 설교했던 자로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죄가 많은지 알고 있었다. 그와 같은 지식은 그로 하여금 겸손하고 순종적이며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게 했다.

 

<부가설명> 바울은 자기가 깨달아서 믿는 바에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확신에 찼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히브리 사상에 해박한 사람이었고 또한 헬라 사상도 깊이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복음을 헬라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에 전파하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대교의 교훈을 자기가 배운 대로 이해하여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헌신했으나 예수님을 만나고 구약의 모든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을 깨달은 다음에는 예수님을 전파하는데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처음에 유대교를 위하여 나타냈던 같은 열정이 예수님을 전파하는 열정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지만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도리를 깨닫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전에 모든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이 해롭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버렸다. 깨달은 사람이 취하는 결단이다. 우리는 바울의 이런 믿음을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은가?

 

교훈 : 바울은 처음에 자신의 열성과 확신을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데 사용했지만 주님을 알고 난 뒤에는 겸손하게 자신의 열정을 복음을 위해 사용했다.

 

 

셋째날(화) 사울에서 바울로

9월 8일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1. 바울의 회심 기사를 다루는 행 9:1~22을 읽어 보라. 이 경험은 그의 선교 소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행 26:16~18 참고)

[행9:1~2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행26:16~18]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답: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택한 그릇이라고 알려주셨다. 

 

처음부터 주님은 바울을 사용하여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계획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바울이 선교사와 신학자로 준비되는 과정에서 그의 회심만큼 중요한 사건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종종 그의 경험을 간증하곤 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행 26:16). 바울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며 주님에 대한 지식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교하고 가르쳤다(롬 1:1~2 참고).

 

2. 행 26:18을 읽어 보라. 바울의 사역은 어떤 결과를 맺을 것이었는가? 

[행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답: 아래 교과의 대답을 보라.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선교 사역의 다섯 가지 결과를 볼 수 있다.

1. 백성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과 예수님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며 능동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2. 어둠에서 빛으로, 무지에서 앎으로 옮긴다(복음의 핵심 주제, 눅 1:78~79 참고)

3.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 돌이킨다.

4. 죄 사함을 받는다. 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 이것이 살아있고 치유의 능력이 있는 기독교의 핵심 기별이다.

5. 성화된 무리 가운데 자리를 얻는다. 이는 인종, 성별, 국적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이다.

 

<부가설명> 사울은 ‘요구하는 자’ 또는 ‘구절하는 자’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 “여호와께 구하는 자”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로 개명하였다.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가 바리새인으로 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자로서 스스로 큰 자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기가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그는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았고 충성하는 예수의 증인이 된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바로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갈1:17) 아라비아 광야에서 성령의 지도로 전에 알았던 구약이 잘못 깨달은 것을 배우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경을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에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다 해로운 것을 알았고 배설물로 버린 것이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결과 이전에 스스로 복음이 주는 결과를 체험하고 그것을 말씀에 입각하여 경험과 연결하여 바른 복음을 전한 것이다. 위에 기록한 다섯 가지 결과는 우리 스스로 경험해야 할 것이고 복음을 받은 사람에게도 일어나야 할 것이다. 

 

교훈 : 사울을 바울이 되게 한 것은 어떤 수련 과정이나 사전 지식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만난 회심의 경험이었고 그것은 다양한 선교적 결실로 나타났다.

 

 

넷째날(수) 선교 현장에서의 바울

9월 9일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

 

1. 어떤 종류의 선교 사업이든 우리가 위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고전 1:23, 2:2, 갈 6:14, 빌 1:15~18 참고)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빌1:15~18]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답: 바울은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의 선교적 노력에 관하여 확실한 한 가지는 어디를 가든지 그가 전하는 기별의 핵심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예수님에 대해 전파하라는 처음 부르심을 충실히 지켜나갔다. 오늘날 우리가 전해야 할 선교 기별도 분명하다. 우리는 무엇을 설교하고 가르치든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세상에게 전해 주어야 할 것이 너무 많지만) 항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우리의 전도 활동과 선교 사업의 머리와 중심이 되게 해야 한다.

바울은 결코 예수님을 하나의 객관적인 진리인 것처럼 전한 다음, 자기가 기뻐하는 길로 가지 않았다. 그의 핵심 사역은 교회를 세우고 그에게 맡겨진 지역의 고을마다 가능한 곳은 어디든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사역은 ‘교회 개척’이었다.

바울의 선교 사업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었다.

 

1. 골 1:28을 읽어 보라. 바울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가? 이것은 전도인가 제자훈련인가?

[골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답: 바울은 각 개인에게 복음을 확실히 가르쳤다. 그들로 그들이 있는 곳에서 복음의 전파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의 여러 서신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의 서신들이 선교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즉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서신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기존의 교회 공동체에게 보내기 위해 기록되었다. 즉 그의 선교적 노력은 기존 교회를 위한 목양이나 훈련과 양육을 포함했다.

따라서 바울의 선교적 활동에는 예수님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며, 기존 교회를 양육하는 이 세 가지 중심 요소가 있었다.

 

<부가설명> 전쟁에는 여러 공격방법이 있다. 보병이 진군하고 적군과 직접 대면하여 전투하는 것이 있고 해군의 함포 사격이 있다. 공군의 폭격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병이 점령한 적기를 발로 밟는 것이다. 그래서 낙하산 투하가 있고 상륙 작전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폭탄을 투하하고 함포 사격을 해서 젖기를 초토화 했다고 해도 보병이 그곳을 발로 밟아 점령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전도도 같다. 전도지를 전하고 방송을 하고 편지를 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결국은 개인적으로 구도자를 예수님께 이끌어 안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어렵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교회가 조직되어야 하고 교회가 말씀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에는 양성된 지도자가 있어서 교인들을 진리로 양육해야 한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전도는 하나의 도로가 되고 말 것이다. 바울이 수행한 방법이 고전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훈 :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가 있었고 그의 선교적 노력 속에는 말씀 선포, 교회 개척, 교회 양육이 포함되었다.

 

 

다섯째날(목) 선교와 다문화주의

9월 10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갈 2:15).

 

옥스포드 사전에 따르면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란 말은 1960년대에 처음 활자로 등장한 비교적 최신 용어이다. 고대 사회에서 인류의 범주는 두 종류뿐이었다. ‘우리’ 아니면 ‘그들’, 또는 ‘우리 부족’ 아니면 ‘다른 부족’이었다. 그리스인들(the Greeks)은 모든 비그리스인들을 ‘야만인’이라 불렀고 유대인들은 모든 비유대인들을 ‘이방인’이라고 불렀다.

이미 보았듯이 이방 선교의 성공은 신생 교회와 그 지도자들로 하여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분열 문제를 해결하도록 압박했다. 문제의 핵심은 이방인이 먼저 유대인이 되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1. 갈 2:1~17을 읽어 보라.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이 기사는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다문화주의’의 도전을 어떻게 예증하고 있는가?

[갈2:1~17]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답: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한 자리에서 먹다가 유대주의자들인 그리스도인이 왔을 때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그 자리를 피하였다. 이것은 당시 문화적 충돌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지금도 이런 사실은 있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복음에 합당하게 행해야 할 것이다. 

 

“후에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하였을 때에, 그는 이방인 개종자들에 대한 그의 신중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의 신임을 얻었다. 한동안 그는 하늘에서 받은 빛에 따라 행하였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이방인 개종자들과 식탁에 앉는 문제에 대하여 가졌던 그의 타고난 편견을 극복하였다. 그러나 의문의 율법에 대하여 열심히 있는 어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왔을 때에 베드로는 이교에서 개종한 이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지각없이 변경시켰다.… 지도자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사람 편에서 이와 같이 약점을 드러낸 것은 이방인 신자들의 마음에 가장 고통스러운 인상을 남겼다. 교회는 분열될 위험에 직면했다”(사도행적, 198).

바울은 그 문제로 베드로와 대면했고, 그 당시의 다문화교회를 위해 확고히 섰다. 그의 이방인 회심자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었다.

경건한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문하생, 로마 시민권자, 박해를 가하는 근본주의적인 애국자 그리고 마침내 회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의 복잡한 배경은 그로 하여금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와 임시적이고 문화적인 종교 수단을 구분할 자격을 갖추게 했다.

 

<부가설명>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앉을 때에 특히 식탁에 함께 앉을 때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고 양보할 한계를 우리는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 한계가 진리의 원칙에 굳게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함께 한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처신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잘 감당한 것 같다. 성령의 지혜로 그렇게 한 것 같다. 고린도전서 9장에 기록한 바울의 처신을 자세히 읽으면 바울은 결코 원칙을 범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을 위하여 바른 태도로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문화 시대에 재림성도들은 말씀의 원칙 위에 굳게 서서 또한 문화적인 환경에 올바르게 처신하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해서 바르게 전도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이방인 선교의 성공으로 교회가 다문화적 성격을 띠면서 분열의 위험에 노출되자 바울은 문화적 요소가 아닌 절대적인 진리의 원칙에 굳게 섰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9월 11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고전 9:19~23을 읽어 보라. 현대 선교학은 ‘상황화(contextualization)’라는 용어를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선교 접근법에 적용한다. ‘상황화’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그것은 해당 지역의 문화적 맥락에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와 행위로 복음을 전한다든지 또는 그런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려는 시도로서 사람들의 깊은 필요를 충족시키고 그들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제시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문화 속에서 머물며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 Darrell L. Whiteman, “Contextualization: The Theory, the Gap, the Challenge,”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 vol. 21(January, 1997), p. 2.

 

“예루살렘은 유대 나라의 수도였으므로 거기에는 최대의 독선과 고집이 있었다. 성전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연히 한 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이 가진 특별한 특권들로 마음이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대교의 의식과 유전에서 떠나는 것과 유대인의 풍습 속에 담겨진 그 특별한 신성성이 새로운 신앙의 빛 가운데서 곧 소멸될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변화를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바울에게 분개하게 되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모두 그 회의의 결정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의문의 율법에 대하여 열심이 있었으므로 바울이 유대인 율법의 의무에 대해 느슨한 원칙을 가졌다고 생각하여 그를 냉대하였다”(사도행적, 19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고전 9:20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선교 활동을 하거나 또는 전도나 증언을 하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고 상황화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 [고전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목적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 인도하기 위하여 비 성경적 생활방식을 취하는 것은 마치 성경을 읽기 위하여 남의 초를 후쳐서 불을 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 기록은 신중히 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원칙은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해서 진리의 원칙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바울의 방법을 바르게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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