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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지혜로운 자들의 겸손(질무과 대답과 부가설명)03/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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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5-03-15 00:27 조회8,8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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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44분

 

기억절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개역).

 

연구 범위 : 잠 30장, 눅 18:9~14, 욥 38:1~40:2, 요일 1:9, 계 3:14~18, 시 104:24.

 

겸손은 성경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된다. 위대한 선지자 모세는 지면에서 가장 겸손한 자로 지목되었다(민 12:3). 미 6:8에 따르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우리의 주요한 의무는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마 18:4)라고 말씀하시면서 겸손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단언하셨다.

결국 우리가 자랑할 것은 무엇인가? 매 호흡과 맥박, 모든 은사와 재능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며 우리는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행 17:28)한다. 심지어 우리의 의조차 십자가에 비춰보면 “다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 그런데 어떻게 자랑할 수 있겠는가?

이번 주 잠언의 주제는 겸손이다. 우리의 형편을 생각해 볼 때 겸손하지 못하고 우쭐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성공적인 삶을 위해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지혜의 가치를 깨닫는다.

➋ 느끼기 : 하나님의 방법을 배우고 그분이 주시는 복을 찾고자 열망한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구한다.

 

A. 

❷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❸ 정말 겸손한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피조물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까요?

※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❹ 그대가 하나님을 안다면 어떤 대상에게 또는 누구에게 좀 더 겸손하게 행동해야 할까요?

※ 모두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B. 

❷ 잠언 30장에서 여러 생물을 언급하는 아굴은 어떤 면에서 겸손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 천연계의 미물들을 보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며 창조주를 경외하는 태도이다.

❸ 아굴이 드린 기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7~9절)

※ 영육 간에 균형진 인격을 이루고 그렇게 생활할 것을 배워야 한다.

 

결론 : 잠언 30장은 창조주의 청사진에 기초한 삶의 방식과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복을 제시하면서 하늘에 이르기 전이지만 창조주와 교제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첫째날(일) 3월 15일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잠 30:32).

 

1. 잠 30:1~3, 32~33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이 하려는 말은 무엇인가?

[잠30:13, 32,33]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32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33 대저 젖을 저으면 버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답: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되라는 권고이다. 교만한 마음과 태도는 화를 초래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이 말씀에 나타난 자기부정은 자신의 지혜와 업적, 군사적 승리들을 자랑했던 고대 중동 군주들의 자화자찬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는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컸다고 기록되었다(왕상 10:23, 전 2:9). 느부갓네살 왕도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잠언의 기자는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랑을 미련한 것이라고 일컫는다. 미련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나발’은 어리석은 교만함의 실례였던 구약 인물 나발의 이름이기도 하다(삼상 25장). 교만을 암시하는 그와 같은 자랑은 모욕, 분노, 갈등의 화근이 된다. 사도 바울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며 심지어 그것을 자랑하는 신자들을 어리석다고 일컬었다(고후 11:18~19).

 

2. 눅 18:9~14을 읽어 보라. 우리가 생각보다 바리새인처럼 되기 쉬운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가장 미묘한 방식으로라도 절대 그와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으리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눅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답: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표준이 되면 함정에 빠진다. 우리의 눈을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께 고정시켜야 한다. 

 

우리는 자랑하는 자들에 대해 안타까워해야 한다. 자랑은 불안함을 가리는 행위이다. 그들은 정말 무지하며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

 

<부가설명> 썩어질 씨로 태어난 육체의 소욕은(벧전1:23, 갈5:16,17) 무언가 잘 했다는 의식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자랑하려고 한다. 교과저자의 말대로 그런 정신은 자기의 약점을 가리려는 마음이 밑바탕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약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창조주께서 공급해주지 않으면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이 가장 근본적인 이치를 망각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재물을 쌓아 부하게 되었을 때 자기 능력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고 가르치면서 하나님은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8:12~14, 17,18) 모든 것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 참된 겸손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성경이 가르치는 교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습2:3)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시119:85)

 

교훈 :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하지만 자기과시와 자랑을 앞세우는 사람은 미련하고 어리석다.

 

둘째날(월) 3월 16일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잠 30:4).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일어난다. 반대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자는 겸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보다 무한히 위대하신 분과 끊임없이 접촉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주의 규모를 고려한다면, 그리고 그런 우주를 창조하신 분을 경배할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이 예수의 이름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고 교만의 문제로 씨름할 수 있을지 이해하기 어렵다.

 

1. 잠 30:3~6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과 신비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잠30:3~6]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6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답: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 잠잠하고 겸손해야 한다.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다섯 번의 수사학적 질문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를 인정하도록 요구한다.

 

2. 잠 30:4의 질문들을 읽어 보라. 이 질문들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잠30: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답: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첫 네 질문) 우리의 이해력 너머에 계신다(다섯 째 질문). 욥기에서도 하나님은 유사한 질문으로 문제를 제기하신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하나님 또는 그분의 길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욥 38:1~40:2).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학자들이 언제나 질문하는 것처럼 우리가 기록된 그분의 계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천연계의 미물에 대해서조차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불명확성으로 가득한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거슬리는 작은 부분이 있을지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부가설명> 이미 잠언 25장 2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일을 숨기는 것이 영화라는 말씀을 공부했다. 그 말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고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이다. 어떻게 다 알겠는가! 그런데 마치 하나님을 제쳐놓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엄청난 교만이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11:7,8)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11: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모든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에서 평등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평등하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겸손으로 생활하는 것이 마땅하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생각과 삶이 바로 겸손한 삶이다. 

 

교훈 :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의식하고 그분과 교제하며 천연계를 관찰하는 자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그분의 계시와 교훈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셋째날(화) 3월 17일 너무 많게도 너무 적게도 마소서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7~8).

 

잠 30:7~9은 잠언에서 유일한 기도를 담고 있다. 이 기도가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확언(4절)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한 약속(5절) 직후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1. 잠 30:7~9을 읽어 보라. 왜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인가?

[잠30:7~9]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8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답: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그분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지만 계시하신 사실을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의지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에 우리는 그분과 우리의 관계가 확고한지에 대해 확신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거짓을 말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죄의 고백은 용서의 전제 조건이다(요일 1:9).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그분은 우리를 정확하게 감찰하신다.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티끌 속의 주검처럼 땅에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외심과 겸양의 의미뿐 아니라 그분 앞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헐벗음을 자각한다는 의미이다(애 3:29).

잠 30:8에서 기자는 하나님께 부도 가난도 아닌 것을 주시도록 요청한다. 성경에서 ‘주다’라는 동사가 인간과 관련하여 처음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사하시는 음식과 관계가 있었다(창 1:29). 이는 여러 사회에서 음식이 전통적으로 기도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이유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이런 기본적인 필요는 기도 생활을 생존의 핵심적인 위치에 놓는다.

두 가지 요청은 단지 인간 품성의 균형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들은 한 가지 목표 즉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합쳐진다. 우리의 소유가 너무 적으면 우리는 물건을 훔치거나 하나님을 원망할지도 모른다. 반면 소유가 너무 많으면 하나님의 필요성을 못 느끼며 심지어 그분의 존재를 부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후자의 조건에서 하나님과 단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전자의 조건에서는 계속 그분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 주의 기도 역시 이중적인 관심사를 나타낸다. 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는 우리의 필요를 제시하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않으며 ⑵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 6:13)는 우리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인다.

 

<부가설명> 사실 기도는 자기는 기도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의존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고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이다. 어느 종교든지 이 원리는 동일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분은 창조주시며 모든 피조물을 친히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돌보시는 은혜를 떠나서 피조물을 생존할 수 없다. 기도는 이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신앙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쉴 수 없다. 그것은 영적 생명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호흡이 멈추면 생명이 중지된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생명은 기도와 말씀으로 풍성하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호흡하듯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필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생명을 주시고 생활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신앙고백과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안심하고 맡기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교훈 : 겸손한 현자의 기도는 거짓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분의 필요성을 잊지 않도록 너무 가난하거나 너무 부하게 되지 말게 해 달라는 것이다.

 

넷째날(수) 3월 18일 거만한 자의 행동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잠 30:11).

 

겸손은 긍정적인 결과와 복을 가져다주는 반면 겸손의 부족은 위태로운 결과와 저주를 가겨다 준다. 잠언 30장은 겸손의 상급과 열매를 보여줌으로 그 덕목을 권장한 후에 자만심에서 비롯되는 위험성을 엄중하게 경고한다.

부모를 저주함(잠 30:11, 17). 아굴 왕은 이 영역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자녀가 생명의 근원을 멸시하는 태도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교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축복하는 것은 생명의 약속과 관련이 있는 유일한 계명이며(출 20:12, 엡 6:2~3), 이를 어기는 죄에 대해서는 죽음으로 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출 21:15, 17).

자기 의(잠 30:12, 20).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죄인의 상태는 심각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 가운데 살면서 자신이 무죄하며 용서 받을 필요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용서를 받는 데에 있어서 죄의 고백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요일 1:9).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었음을 모른 채 자신에게 부와 지식과 의복이 있다고 주장하는 라오디게아 신자들은 그들의 가련한 상황을 극복할 수단을 하나님께로부터 구하도록 권고를 받았다(계 3:14~18).

“바로 여기에 영적 지식과 우월성을 가졌노라고 자랑하는 한 백성이 상징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과분한 축복에 대하여 전혀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하는 정신과 감사하지 않는 마음과 망각하는 태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랑이 많고 기꺼이 용서를 베푸는 아버지가 배은망덕하고 불순종하는 아들을 다루는 것처럼 그들을 취급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였고 거룩한 특권들을 남용하였으며…인색한 정신으로 배은망덕하고 공허한 형식주의와 위선적인 불성실에 빠져 있는 것에 만족하여 왔다”(믿음과 행함, 83).

경멸(잠 30:13~14). 거만한 자들에 대한 묘사는 아름답지 않다. 그들의 얼굴은 자부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거만함은 거기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자신들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보이는 경멸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앞니’와 ‘어금니’의 은유는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매정한지 보여준다.

 

<부가설명> 출애굽기 21:15,17은 부모를 저주하는 자와 부모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다. 이유는 교과 저자가 설명했듯이 “자녀가 생명의 근원을 멸시하는 태도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교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부모를 치는 것이다. 저주하는 것은 자기의 존재 근원을 치고 저주하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자기의 존재를 저주하고 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존재를 부인하는 정신의 발로가 된다. 그런 자녀들은 자기가 선택한 결과를 당할 것인데, 그것이 곧 존재를 상실하는 것이다. 죽이라는 말은 그들이 스스로 자기 존재를 거절했기 때문에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죽이라는 겻이다 멸절하라는 것은 모두 이런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님을 정말 이런 정신으로 공경해야 한다. 그처럼 우리의 존재와 생명의 진짜 근원이신 창조주를 경외해야 한다. 그래서 4계명과 5계명이 함께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창조주를 경배하는 신앙이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나를 존재하게 하는 직접적인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19:3)고 가르친다.

 

교훈 : 거만한 정신에 물들어 부모를 멸시하고 자기 의를 주장하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경멸하는 자들은 그들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위험에 빠져 있다.

 

다섯째날(목) 3월 19일 천연계에서 얻는 교훈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잠 30:18~19).

 

성경 전체에 걸쳐 천연계 사물들이 영적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잠언도 천연계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겸손에 관한 교훈을 가르친다.

 

1. 잠 30:18~19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인간의 이해력의 한계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잠30:18,19]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9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한 자취며.

 

답: 천연계의 현상이나 인간 활동의 면면들을 사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런 것들은 다 인간 지식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아굴 왕은 여러 ‘평범한’ 사물에서 신비로움을 본다. 그가 여기서 제시하는 것은 매우 환상적인 신비의 배합이다. 앞의 두 가지 예는 동물이다. 하나는 하늘을 유유히 나는 독수리이고, 다른 하나는 스르륵 땅 위에서 움직이는 뱀이다. 아굴 왕은 그다음 두 가지 인간의 행동으로 시야를 옮긴다.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와 여인과 함께 눕는 남자이다. 심지어 과학 지식이 범람하는 오늘날에도 신비한 것들이 많다. 우리는 생명의 심오함과 장엄함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있다면 우리는 줄곧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다.

 

2. 잠 30:24~28을 읽어 보라. 기자의 관심과 경외심을 이끌어낸 또 다른 천연계의 신비는 무엇인가?

[잠30:24~28]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25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26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27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28 손에 잡힐만 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답: 개미, 사반, 메뚜기, 도마뱀의 생활방식을 사람이 온전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다 약한 것들이다. 그런데도 살아가는 방법들이 참으로 기이한 것을 고백한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성경절이 인간의 어리석음과 거만함, 악행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잠 30:20~23). 그다음 그는 동물의 세계로 시선을 옮겨 작고 미약한 창조물을 가리키며 인간 또는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할 때 사용했던 ‘지혜롭다’라는 의미의 동일한 히브리어를 동물들에게 적용한다(잠 3:13, 욥 12:13, 시 104:24).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이 동물들의 행동 방식은 우리의 이해력 너머에 있다.

하물며 그 시대에 동물들의 생태가 이 현자를 얼마나 당황하게 했겠는가? 그가 정말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지혜의 가장 분명한 징표가 바로 아주 작고 평범한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이런 생물들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그것들이 다 창조주의 섭리 안에 생존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곧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 사는 모습을 대조하고 있다. 전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에 맡기고 살아가는 생물들이 약하지만 천연계에서 생존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시는 섭리의 사랑 때문인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자기의 욕망과 스스로 지혜 있다는 태도로 주위를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괴롭히면 생활하는 것을 단순하게 대조하고 있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미약한 미물들에 대하여 지혜롭다고 표현한 것은 그것들이 연약한 미물이지만 창조주를 전적으로 의지해서 생존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피조물이든지 창조주에게 의존되어 있는 상태를 버리지 않는 한 지혜안에 머물러 있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교훈 :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아무리 하찮은 사물일지라도 하나님의 피조물로부터 창조 세계의 신비와 위대함을 깨닫는다.

 

여섯째날(금) 3월 2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숭(尊崇)히 여겨야 한다. 성경에 대해 숭경의 뜻을 나타내야 하며, 이를 범속한 일에 사용하거나 조심성 없이 취급해서는 결코 안 된다. 성구를 농담으로 쓴다거나 무슨 약빠른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고쳐 쓰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잠 30:5, 시 12:6)”(교육, 244).

 

“산상에서 백성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최초의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었다. 예수께서는 영적 빈곤을 인식하고 구속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복음은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복음은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에게가 아니라 겸손하고 죄를 뉘우치는 자들에게 계시되었다.…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모든 자부심을 벗어버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기 전에는, 주께서는 사람의 회복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그때에야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기 위하여 준비하신 선물을 받을 수 있다. 필요를 느끼는 영혼에게 주지 않고 보류하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시대의 소망, 299~30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요구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구원의 계획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심히 타락하고 부패했으며 악하기 때문에 거듭남만으로는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변화되고 회복된다고 해도 그러한 거듭남과 회복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법적으로 우리를 대신 대속하고 자신의 의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세워줄 수 있는 대속주가 필요합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같이 타락한 존재에게 거만과 교만이 최악의 죄가 되는 이유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줍니까?

※ 거듭남과 회복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은 비성경적이다. 저자가 무엇인가 착각하지 않았을까? 거듭나는 것이 대속주의 대속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대속주 없아 거듭나는 일과 변화되고 회복되는 일이 또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요3:3~6) 거만과 교만은 대속주를 거절하는 태도가 된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교만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거듭난 생명력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➋ 잠 30:7~9의 기도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기서 추구하는 균형을 보십시오. 우리는 행하는 모든 것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습니까? 이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우리는 균형진 상태로 주님의 자녀의 신분을 유지하고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정로로 걷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복할 때 가능하다.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사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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