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대쟁투와 초기 교회(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2/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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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2-20 05:23 조회8,646회 댓글0건본문
2월 27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23분
기억절: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 4:13).
연구 범위: 행 1:6~8, 행 2:5–2, 창 11:1~9, 행 4:1~30, 행 7:54, 행 10:12~29
예수님이 제자들에게서 마주했던 가장 큰 걸림돌은 그들의 선입견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 그들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셔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도 제자들은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해방되는 때에 대해 여전히 질문하였다. 그들의 지배적인 선입견이 진리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열흘 동안 기도와 친밀한 교제를 경험한 뒤였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 이후 찾아온 첫 번째 오순절에 놀라운 사건들이 발생할 길이 놓였다.
물론 교회는 여전히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그들이 예수님을 저지했던 것처럼 교회의 활동도 중단시키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번 주에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대쟁투의 주제를 살펴 볼 예정이다. 우리는 그것이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사탄의 감화를 받아 진리를 억압한다. 우리는 또한 그것이 더 교묘한 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영역인 인간의 심령에 작용하는 것을 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➊깨닫기 : 선입견이 어떻게 하나님께 반응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다.
➋느끼기 : 성령께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선입견을 지도해 주시도록 자신을 맡기는 것이 중요함을 느낀다.
➌행하기 : 선입견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방해하는지 살펴보며 각자의 마음을 면밀히 점검하기로 결심한다
A.
❷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까지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 예수께서 유대를 세계 최고 강국을 만들어 로마를 진멸해야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졌다.
❸베드로와 고넬료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민족적인 선입견을 제거하고자 하셨습니까?
※ 베드로가 로만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셨다.
❹우리가 마지막 시대에 복음의 문을 활짝 열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선입견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별이 너무 폐쇄적이라는 생각이 아닐까? 우리의 기별이 가장 성경적이라는 자부심이 실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B.
❷오순절 성령 강림은 바벨탑 사건과 어떻게 대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 바벨탑은 언어가 하나라서 하나님을 대적하였는데, 오순절을 모든 사람이 자기 언어로 복음을 듣게 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
❸성령은 어떻게 사도들과 초기 교회가 마주했던 박해와 반대를 오히려 복음 전파의 기회로
바꾸셨습니까?
※ 사울을 바울사도가 되게 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문을 열었다.
❹우리가 지금 선교를 위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성령께 간구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 다른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 개인주의와 문화적 성벽을 열어주시기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결론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우리 자신의 선입견을 극복할 수도, 악의 세력을 견딜 수도 없습니다.
첫째 날(일) 2월 21일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심어주셨다(행 1:3, 고전 15:4~7).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모여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최고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로마를 정복하실 때가 되었는지의 여부였다(행 1:6).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지나치게 강렬한 나머지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에 주의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교사에게서 받은 삼 년 반 동안의 친밀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버려야 할 잘못된 견해들이 많았다.
1. 행 1:6~8을 읽어 보라. 그와 같은 무지한 질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셨는가?
[행1:6~8]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답: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가 지금인가 물었을 때,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너희가 알 것이 아니라 하시고 성령이 임하시면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라하심,
예수님은 모든 오해를 수정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실질적인 사안에 집중하셨다. 정치적인 토론보다 성령의 권능이 더 중요하였다.
예수님이 구름 속으로 올라가 종적이 사라지는 것을 본 뒤에 제자들은 그들 곁에 두 남자가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리라고 말하였다. 그분은 정복의 왕으로 하늘의 영접을 받았던 것처럼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의 날을 물었을 때에 그들이 꿈꿨던 왕과 정복자의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그들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중동의 한 작은 나라의 왕이 아닌 온 세상의 왕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열한 제자는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머리에는 여러 기억이 맴돌았고 그들의 가슴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적어도 그들이 이해한)로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성령의 침례를 받기까지 며칠 동안 기다리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행 1:4~5). 원수는 패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명을 완수할 하늘의 능력이 필요했다.
<부가설명> 앞에 8과 깊이 생각할 문제에서 증언의 말씀은 제자들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데 실패했다고 말했는데, 부활하신 후에 40일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교육을 받고도 그들의 고정관념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대 제국을 그리고 있었다. 그들이 오순절 경험한 후에 비로소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지 못한다. 예수께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령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성경 이야기는 다 올바를 수 없다. 그들은 성경을 바르게 깨닫게 하는 성령을 부인하기 때문에 성경을 올바르게 깨닫는 길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함당한 바른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고 있는지 스스로 자주 물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하나님께서 깨닫기를 워하는 대로 깨닫고 있는가?
교훈: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정치 문제보다 성령과 사명에 집중하도록 이끄셨다.
둘째날(월) 2월 22일
오순절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 2:3).
예수님의 제자들은 열흘 동안 기도하면서 성경에 비추어 예수님과 나눴던 경험을 돌아보고 서로에 대한 동정과 용납의 정신을 나타냈으며 마침내 성령께서 진리를 각인시키도록 그들의 마음을 그분께 맡겼다. 창조 과정의 초기에 하나님의 영께서 깊음의 수면 위를 운행하셨던 것처럼 성령은 갈라진 불의 혀 모양으로 각제자 위에 머무셨다(행 2:2~3).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자 새로운 창조였다.
1. 행 2:5~12을 읽어 보라. 여기서 발생한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을 창11:1~9과 비교해 보라.
[행2:5~12]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답: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능력으로 임하셔서 다 방언을 하게 하셨다. 그 방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
[창11:1~9]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답: 한 언어뿐이었는데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여러 방언이 생겼다.
방언이 달라져서 의견의 통일을 보는 것이 어려워졌는데, 오순절에 성령이 주시는 방언으로 모두 생명의 복음을 자기들의 방언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대홍수 이후에 지구의 거주민들은 하늘에 이르는 탑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창11:1~9). 이런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노력(그들이 앞으로 계획하는 새로운 악행을 포함하여)을 제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공통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그들을 온 지면 위에 흩으셨다(창 11:7~9).
그러나 하나님은 오순절에 정반대의 일을 행하셨다. 그분은 또 다른 바벨탑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악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복음을 선포할 일단의 무리를 보셨다. 그날 백성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행 2:5, 바벨탑에서 흩어졌던 사건과 비교해 보라).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들은 제자들이 각 지역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행 2:6~11).
베드로는 이것을 그들에게 설교할 기회로 삼았다. 그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백성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해 말했다(행 2:17~21). 그는 메시아의 진정한 사명을 지적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잘못을 꾸짖었다(행2:23). 그들은 마음이 찔렸다(행 2:37). 그리고 삼천 명이 침례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행 2:41).
<부가설명> 언어는 사상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언어가 없으면 생각을 전달하는데 무척 어려울 것이다. 민족은 혈통보다 언어로 분리 되는 것 같다. 같은 한국 혈통이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다른 민족처럼 느껴진다. 미국에서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손자들과 영어를 전혀 못하는 조부모는 한 핏줄인데 다른 인종 같이 된다. 바벨탑에서 같은 노아의 후손이 언어가 달라져서 언어 따라 흩어지면서 다른 민족으로 변화 발전한 것이 오늘날 인종이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어이다. 말씀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만난다. 그런데 같은 글을 읽으면서 다른 방언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다. 우리는 같은 뜻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같은 말을 해야 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4:2) 생각이 같으면 같은 말을 하게 된다. 재림성도들은 진정으로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사상 같은 언어 같은 행동으로 진리를 증거해야 한다. 이것이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이루게 하신 일이다.
교훈: 하나님이 바벨탑 앞에서 인류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던 것과 반대로 복음을 선포할 제자들에게는 여러 언어로 소통할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 주셨다.
셋째날(화) 2월 23일
사두개인들과 마주하여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20).
1. 행 4:1~30을 읽어 보라. 여기서 대쟁투의 주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이것은 대쟁투가 모든 역사를 통해 전개된다는 예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는가? 여기서 우리는 사탄의 활동과 하나님의 활동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행4:1~30] 베드로와 요한을 대제사장과 관원들이 잡아들여서 심문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답: 사단은 종교지도자들을 통하여 진리를 박해하는 것을 보여주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보호하고 이기도록 활동하신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같은 내용이 다른 형태로 나타날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증언해야 한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보다 더 칭송을 받으시는 것을 보았다.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하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은 만일 사도들이 부활한 구주를 전파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도록 내버려둔다면 부활이 없다는 그들의 교리가 모든 사람에게 거절당할 것이며, 머지않아 사두개 교파는 멸절되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였다”(사도행적, 78).
이 지도자들을 특별히 분노케 한 것은 주께서 베드로를 통해 행하신 치유였다(행 3:1~10 참고).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제사장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보고 “본래 학문 없는 범인”(행 4:13)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제자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서로 상의하였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하면 제자들이 순순히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다(행 4:18).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틀렸다.
오히려 제자들은 돌아가서 다른 제자들과 만나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다(행4:24).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손을 펼치어 더 많은 치유를 일으켜 주시도록 담대하게 기도하였다(행 4:29~30). 그들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제자의 수가 점점 많아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병자들을 거리에 내려놓고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그들 위에 지나가기를 바랐다(행 5:15). 인근으로부터 군중들이 몰려들었고 병자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다(행 5:16).
우리는 여기서 대쟁투가 전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진리를 억누르려는 파렴치한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성경을 읽고 거룩한 능력을 구하는 신실한 백성들도 있었기 때문에 질병은 치유를 받고 영혼들은 구원을 받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상황이 언제나 그때처럼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대쟁투가 어떻게 진행되리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이루신 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부가설면> 베드로는 그들의 심문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고 대답하였다. 우리가 증거하기 위하여 보고 들은 것이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것을 증거해야 한다. 사두개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해서 놓아 보냈다. 그들은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기도할 때에 시편 2편에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시2:1~3)는 말씀을 인용하여 기도했다. 그들은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24~28) 이 기도는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選民)의 자격을 상실하고 이방인과 동일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내용이 이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이 된 참된 진리교회가 하나님의 선민의 자리에 섰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사단은 참 이스라엘을 역사의 끝까지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된 것이다.
교훈: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선포하는 진리를 억압하려고 했지만 사도들은 압력에 굴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복음을 더 담대하게 전파하였다.
넷째날(수) 2월 24일
스데반의 순교
사도들 외에도 교회 초기에 종교 지배층의 반대를 당한 자들이 있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행 6:8)했던 스데반도 그들 앞에 끌려갔다. 그의 증언은 사실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다. 원수들은 그를 범죄자로 만들 거짓 이야기를 꾸며서 공회 앞에 끌고 갔다(행 6:9~14).
1. 행 7:2~53에서 스데반은 자신을 고소한 자들에게 강력한 기별을 제시한다. 행 7:54을 읽어 보라. 그들은 양심에 찔렸다. 그의 말은 그들을 정죄하였다. 행2:37~41에서도 베드로의 책망을 듣고 양심에 찔린 자들이 있다. 비슷한 책망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이 달랐는가? 이로 보건대 하나님께 굴복하는 마음은 얼마나 중요한가?
[행7:54]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답: 2장에서는 듣는 자가 회개하였으나, 7장에서 스데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돌로 스데반을 쳐 죽였다. 7장은 종교지도자들이 중심에 된 무리들이고 2장은 천하 사방에서 온 평민들이 중심이 된 무리다. 종교지도자들이 훨씬 더 진리를 거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사도들은 지도자들을 잘 상대해 왔다. 그러나 스데반이 동일한 일을 시도하자 분노한 폭도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스데반의 죽음은 새로운 운동을 말살시키려는 사탄의 결연한 노력의 신호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학대와 위협을 당했을 뿐이지 죽임을 당한 것은 스데반이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상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탄이 예수님을 처형하도록 그 지도자들을 조종했었기 때문에 제자들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위험을 예상해야 했다. 물론 대쟁투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거의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자주 승리를 가져다 주셨다. 그러한 도움은 여기서도 다르지 않았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 사울은 그때의 공로가 참작되어 산헤드린 공회원에 선출되었다. 한동안 사울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반역을 수행하는 사탄의 수중에든 유력한 도구였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아니하여 이 잔인한 박해자는 그가 지금 헐고 있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종사하게 될 것이었다. 사탄보다 더 능력이 크신 분께서 사울을 택하셔서 순교한 스데반을 대신하여…당신의 피를 통한 구원의 기별을 멀리 그리고 널리 전하도록 하실 것이었다”(사도행적, 102).
<부가설명>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전파되는 새 종교를 두려워했다. 예수 이름은 그냥 말로만 전파되지 않고 이적이 따랐다. 사람들은 말의 잔치보다 실제적인 도움과 유익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불치병 환자가 완치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을 볼 때에 제도 속에 갇혀서 말로만 진리라는 것을 전하고 권력을 잡고 있는 이들의 종교는 감화력을 아주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들은 능력 없는 종교의 권위와 자기들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이 신흥 종교의 초라한 지도자들을 자기들의 지위와 제도로 억압하고 새 종교 새 신앙을 없애려고 하였다. 이런 마음이 가득한 종교지도자들이 중심이 된 군중이 스데반의 호소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마음에 거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찔려도 분을 내어 스데반을 처치할 구실을 찾았을 뿐이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 앞에 자기 체면이나 지식이나 지위, 신분 등을 내세우면 증거하는 사람을 죽이게 된다.
교훈: 스데반은 초기 교회의 성장을 가로막으려는 사탄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순교를 통해 사울을 복음의 도구로 삼으셨다.
다섯째날(목) 2월 25일
태도를 바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선입견과 씨름할 뿐 아니라 민족적인 편견도 공유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마실 물을 구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일례이다. 제자들은 그분이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요 4:27).
민족적인 편견은 가이샤라에 주둔했던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일화에서도 수면 위로 부상한다. 고넬료는 경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지역 백성에게 크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집으로 청하라고 지시하였다(행 10:2, 22, 3~8 참고).
한편 그때 베드로는 기도하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갔다(9절). 그늘 아래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마음이 느긋해지면서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괴이한 이상을 본다. 하늘이 열리고 네 귀가 끈에 묶인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 왔다. 그 안에는 그가 부정하고 더럽게 여기는 동물들이 득실거렸다. 그는 그것을 잡아먹으라는 명령을 받았다(11~14절).
1.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명령에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이 이상의 의미는 무엇인가?(행 10:12~29)
[행10:12~29]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15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23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답: 베드로는 음식 문제에서 성경과 유대인의 전통에서 벗어난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먹을 수 없다고 반응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계시였다.
이 이상을 통해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셨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하나님이 식사법을 변경하여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도록 허용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가 이상을 통해 받은 교훈이 아니다. 우선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 했다. 즉 처음에는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았다(행 10:17).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가야한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행10:22~23).
고넬료를 만나자 베드로는 그 이상의 의미를 말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구주시다. 이방인들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구원하려는 소중한 영혼들이다(행 10:34~48). 우리가 여전히 배워야 할 교훈을 베드로도 배우고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장벽은 무너져 내렸고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백성 사이의 차별은 사라졌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행 10:35)은 다 하나님이 받으신다.
<부가설명>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여러 지방에서 온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전한 베드로도 아직 이방인에 대한 편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고정관념과 편견은 집착적이다. 이런 베드로의 편견을 깨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기발한 계시를 준비하셨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은 부정한 동물처럼 여기는 것이다. 접촉도 함부로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방인과는 한 자리에서 음식을 먹어도 안 되었다. 이런 편견에 매여 있는 베드로에게 부정한 동물을 잡아먹으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더럽다고 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이방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동등하게 구원에 참여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오히려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이 구원과 더 먼 거리에 있었다. 모든 사람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도록 되어 있다. 그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전해주어야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책임이 그에게 있다. 교회는 이 직무를 성령의 역사로 수행해야 한다.
교훈: 초기 교회는 여전히 민족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통해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졌다.
여섯째날(금) 2월 2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러시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비록 성경이 예언한 대로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글을 썼다. 그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악을 행하였던 종교재판소로 재림하신다. 종교재판소장은 비천한 농노로 오신 예수님을 체포하여 지하 감옥에 가둔다. 그날 밤 그는 감옥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가 인류에게 자유를 준 것에 대해 그분을 책망한다. “그대는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자유를 주었도다! 그러나 그대는 인간들이 선악의 지식 속에 있는 선택의 자유보다 평화, 심지어 죽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인간들에게 양심의 자유만큼 매혹적인 것도 없지만 그만큼 고통스러운 것도없다.” 뻔뻔하고 냉소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 인간들이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 보라. 고통, 악행, 죄, 불행, 죽음… 이 모든 것이 자유로부터 또는 그것을 남용함에서 생겼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사랑하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어야 했다. 이 세상에서 전개되는 대쟁투는 대체로 인류가 거룩하고 매우 값비싼 자유라는 선물(십자가가 그 대가를 보여준다)을 가지고 무엇을 행하느냐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이번 주에 본 것처럼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렸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복음을 듣고 그 기별자를 죽였다. 자유는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행할지 매우 조심해야 한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신약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매우 위대한 사상이며 당시로서도 혁명적인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인종과 민족적인 편견이라는 가장 심각한 죄악이 아직 존재합니다. 아마도 하나님만이 이 죄악이 초래하는 폐해의 정도를 아실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죄악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이런 태도는 복음의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가르침과 어떻게 모순됩니까?
※ 복음은 존재와 생명이 창조주와 구원의 주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어떤 존재든지 이 문제에 있어서 동등하다. 그런데 존재와 생명 문제를 떠나서 도덕적 선악과 율법적 문제로 신앙과 구원을 이야기하게 되면 편견을 극복할 수 없다. 분명히 죄의 세상에 현 상태는 차등이 있고 구분이 있다. 그러나 존재와 생명 자체에는 차등과 구분이 없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근본적 사실을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교과 저자는 자유의지를 엄청 강조한다. 성경은 현세의 사람들이 자유가 없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예외 없이 죄의 종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신학과 신조는 자유의지가 있어야 도덕적이라고 열심히 주장한다. 자유의지가 있어야 사랑이 있다고 열심히 말한다. 독자들은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 죄의 종이고 자유가 없다. 진리가 자유를 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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