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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전우(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2/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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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2-13 06:29 조회8,3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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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16분

 

기억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연구 범위: 눅 5:6~8, 11, 막 3:14, 마 8:23~27, 막 4:35~41, 막 9:33~37, 마 20:20~28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은 홀로 일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봉사하는 일에 참여할 사람들을 선택하셨다. 비록 사복음서가 그분의 생애와 죽음, 부활에 주로 초점을 맞추지만 그분의 최측근이었던 제자들의 문제에도 자주 관심을 기울였다.

  대쟁투가 예수님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것처럼 제자들을 둘러싸고도 일어났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도다”라고 외칠 때까지 사탄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았다. 그러나 그분의 추종자들은 훨씬 쉬운 사냥감이었다. 그들의 품성적인 결함은 원수가 그들을 쉽게 이용해먹을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자존심, 의심, 고집, 자만, 옹졸함 등 그들의 결함은 사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에게 있었던 문제의 절반은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않고 그들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뼈저린 교훈들을 배워야 했다. 우리 역시 그들처럼 배워야 할 교훈들이 많다.

 

※ 학습 목표

➊깨닫기 : 예수님의 실체에 대한 사람들(제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비교한다.

➋느끼기 : 연약한 인간성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도록 불러주심을 감사히 여긴다.

➌행하기 :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A. 

❷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그분과 함께 있게 하셨습니까?

※ 예수님을 올바르게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그 다음에 예수님을 올바르게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❸예수님은 종종 의심과 시험에 빠진 제자들의 믿음을 어떻게 되살리셨습니까?

※ 기록된 말씀으로 확신을 심어주시려고 했다. 

❹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맡겨야 할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우리의 믿음과 교회의 운영과 교회의 장래가 아닐까?

 

B. 

❷예수님은 종종 천연계에 대한 그분의 지배력을 어떻게 보여주셨습니까?

※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시는 등등, 천연계 이적으로 보여주셨다. 

❸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는 무엇을 가지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습니까?

※ 성경말씀으로 뜨겁게 하셨다. 

❹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하늘의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까?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말씀에 굳게 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해야만 할 때가 아닐까? 그것도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기대해야 한다.

 

결론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밝히신 뒤에 우리에게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택의 자유에 따라 구원을 받을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는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각자가 무엇인가 결정을 내릴 때에 그들은 대쟁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

 

첫째날(일) 2월 14일

베드로를 부르심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대쟁투라는 엄청난 문제를 감안한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처럼 흠이 많은 이들을 택하여 그분의 사역을 돕도록 하셨다는 사실이 놀랍다. 물론 타락한 인류의 상태를 고려한다면 그분이 선택한 자들은 어쨌든지 도덕적 결함이 있을 것이었다.

  추종하는 군중들 앞에서 갈릴리 북쪽 호숫가를 따라 거니셨던 예수님은 밤새 헛수고하고 배를 정리하는 두 어부를 주목하셨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속해 있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던 적이 있었고 그때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에 탄복했었다(눅 4:31~32). 그분은 그곳에서 귀신들린 자도 고치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놀라워했다(33~36절). 그들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서 그 장모를 고치시는 모습을 보았고(38~39절) 그날 저녁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시는 장면도 목격했었다(40~41절).

  그러니 군중들이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이 당연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배를 뭍에서 조금 떨어뜨려 달라고 요청하신 후에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눅 5:3). 말씀을 마치신 후에 그분은 베드로에게 깊은 물로 가서 막 정리해 놓은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별 소득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말씀대로 행하였다.

 

1. 눅 5:6~8을 읽어 보라. 베드로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그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또한 베드로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를 선택하신 이유에 대해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눅5:6~8]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답: 질문이 애매하다. ‘그에 대하여’라는 그가 베드로를 가리키는 말인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인지 우리 문장으로는 너무 애매하다. 베드로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그가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예수님의 신성에 대하여 알 수 있다. 

 

 베드로의 반응은 놀라웠다. 어쩌면 그것은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달은 경험과 같았다(창 32:24~30). 베드로는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알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게 되었다.

  자신의 죄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고백은 예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시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을 죄인으로 몰아갔던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과는 확연한 대조를 이루었다(요 9:24 참고). 눅 5:11에는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았지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2.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별은 무엇인가?

 

답: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귀하신 분이며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세상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자신의 죄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고백은 예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시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을 죄인으로 몰아갔던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과는 확연한 대조를 이루었다(요 9:24 참고). 눅 5:11에는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았지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별은 무엇인가?

 

<부가설명> 이 사건이 있을 때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의 제자였다. 이 사건은 침례요한이 잡혀서 옥에 갇힌 후에 일어난 사건인데 예수께서 유대지방에서 활동하시다가 침례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셨다.(마4:12절 이하) 누가복음 5장은 갈릴리 호수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안드레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그의 형제 시몬을 예수님께 인도했고, 그때 예수님은 시몬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게바라고 지어주셨는데, 헬라어로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유대 지방에서 안드레, 요한과 함께 아주 일찍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어부생활을 하면서 틈이 날 때 예수님께 다니며 제자노릇을 한 것이다. 그런데 침례요한이 잡힌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셔서 고기잡이 하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네 사람을 부르셨는데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다. 이제는 시간 있을 때 와서 배우는 제자가 아니고 아주 예수님과 동고동락 동거하면서 본격적인 제자수업을 하라는 부르심이었다. 누가복음 5장은 마태복음 4장 18~22절의 사건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 아주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베드로는 이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그의 생업도 버렸다. 이후 베드로의 생업은 사람 낚는 어부였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 사람들로서 대쟁투의 전우로서 우리 존재와 생활하는 모든 수단이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극대화 하는데 바쳐져야 할 것이다. 

 

  교훈: 베드로는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주의 임재 앞에서 자신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였고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갔다.

 

 

둘째날(월) 2월 15일

그분과 함께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이미 악을 능가하는 그분의 권세를 목격하였다. 그들은 그분이 마귀를 내쫓고(눅 4:34~36), 병든 자들을 고치며(눅 4:38~41), 천연계를 다스리고(눅 5:4~6), 죄를 드러내시며 베드로에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을 주시는 모습을 보았다(눅 5:`10).

  얼마 후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신 뒤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그리스어로 ‘아포스톨로스’,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라 칭하셨다(눅 6:12~13). 예수님은 그들을 보내시기 전에 그들에게 얼마 동안 행동수칙을 가르치셨다(눅 9:1~5). 후에 70인 제자들에게 비슷한 명령을 주셨다(눅 10:1~16).

 

1. 막 3:14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기 전에 그들과 무엇을 하기 원하셨는가? 여기서 우리 모두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기별은 무엇인가?

[막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답: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셨다. 오늘 우리도 사도, 즉 보냄을 받아 일하기 전에 예수님과 충분히 함께 있으면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한다.

 

  현대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보다 그분을 위해 일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나가 임무 목록을 가지고 질주하는 동안 우리는 세상의 구주를 간과하고 그분을 우리 자신으로 대체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이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망각하고 마치 세상의 구원이 우리 손에 달린 것처럼 생각하는 ‘메시아 콤플렉스’에 사로잡힌다.

  아마도 기독교 역사의 많은 부분이 예수의 이름을 고백하지만 그분을 만나지도, 그분을 알지도, 그분을 통해 변화되지도 않은 자들에 의해 더렵혀졌다고 말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 곁에 맴돌고 있지만 그분과 함께해본 적이 없는 자들은 세상과 교회에 전혀 필요가 없다. 대쟁투에서 사탄이 꾸미는 가장 큰 계략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공언하는 자들을 끌어들여 그 이름을 더럽히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보내기에 앞서 그들이 자신 곁에서 지내며 자신에게서 배우기를 원하셨다.

 

<부가설명>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세 번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가 요한복음 1장이다. 예수께서 40일 금식을 마치시고 침례요한이 봉사하는 곳을 나오실 때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쳐 소개하였다. 그 이튿날에 두 제자와 함께 있을 때에 예수께서 다시 요한이 있는 곳을 오셨는데 요한은 또 세장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소개했다. 그때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께 갔고 안드레는 베드로를 요한은 그의 형 야고보를 예수께 인도하였다. 그 다음 날에는 빌립을 부르셨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불렀다. 이렇게 여섯 제자가 예수님 광야 금식을 마친 후 며칠 사이에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침례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가셔서 이미 유대 지방에서 제자가 되었던 그들을 다시 불렀다. 이제는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생업이 되게 하신 것이다. 다음으로 하신 것이 12제자를 택하시고 사도라고 사명 이름을 주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 동거 동행하면서 예수님을 배우고 마침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세상 현장에 나아가서 복음 사역을 하게 되었다. 우리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께 충분히 배워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세우시고 가장 먼저 그들이 그분과 함께 있게 하셔서 그분을 통해 배우고 변화되기를 원하셨다.

 

 

셋째날(화) 2월 16일

천연계를 다스리심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마 8:24)

 

1. 마 8:23~27, 막 4:35~41, 눅 8:22~25을 읽어 보라. 이 말씀 속에 드러난 대쟁투의 실상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마8:23~27]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막4:35~41]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눅8:22~25]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 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답: 사단은 천연계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바다에 빠져 죽게 하려고 계획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도 함께 포함되었다. 사단은 대쟁투에서 천연계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사탄이 어느 정도까지 천연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욥의 일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경은 그의 영향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욥 1:18~19 참고). “사탄은 지금도 바다와 땅에 재난을 가져와 가능하다면 많은 사람의 운명을 봉인하기 위해 노력한다”(In Heavenly Places, 348). 엘렌 G. 화잇의 이 언급도 이 영역에서 그가 가진 권세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다. 거의 쉴 새 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재해 속에서 우리는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대쟁투의 실상을 보고 있다.

  예수님은 긴 교육 시간을 마치고 날이 저물어 가자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자고 제안하셨다. 그런데 항해 도중 갑자기 매서운 폭풍이 몰아닥치더니 물이 배 안으로 들이쳤다(막 4:37). 예수님은 너무 지치셔서 선미에 누워 곤하게 잠드셨다. 제자들은 폭풍과 씨름하느라 정신이 팔려 시간이 지나서야 예수님이 잠드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그분께 절규했을 때에 그분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닥친 곤경을 설명하기 위해 설교하지도 않으셨고 제자들이 그 상황을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단지 일어나 손을 들고 마치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다루듯이 바람과 파도에게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막 4:41)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많다. 특히 우리는 예수님의 권세의 범위를 깨닫고 어떤 문제든지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필요성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가설명> 천연계의 운행은 고유한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나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셨다. 창조주께서는 친히 창조하신 우주 만물의 운행을 친히 담당하신다. 한 순간이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주를 돌보는 손길을 놓는다면 우주의 질서는 무너질 것이다. 성경은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시119:91)라고 선언하였다. 사단은 이런 하나님의 운행에 딴죽을 걸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자기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천연계를 이용하여 창조주께 도전한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사단은 자기가 천연계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하여 활용하였다. 이런 상태는 역사적으로 아주 잦았다. 인류에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주는 천연계의 재난들은 대부분 사단이 저지르는 사태일 수 있다. 그런 것으로 창조주를 사람들에게 그릇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영원한 생명은 결코 억지로 빼앗지 못한다. 우리는 사단이 저지르는 일로 우리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비난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영생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훈: 대쟁투 속에서 사탄은 인류를 해하기 위해 천연계를 이용하지만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더 큰 권세로 천연계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신다.

 

 

넷째날(수) 2월 17일

누가 더 큰가?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막 9:33).

 

1. 막 9:33~37을 읽어 보라.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치셨는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에게 배워야 할 기별은 무엇인가?(마18:3~5 참고)

[막9:33~37]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마18:3~5]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답: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기는 것이 천국의 윤리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오늘날 성도들도 마땅히 이것을 배워야 한다. 

 

  제자들 사이에 벌어진 이 같은 논쟁은 미래에 대한 그들의 관점과 관련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다윗 왕국을 회복시켜서 솔로몬 시대에 그 민족이 누렸던 찬란한 영광 속에서 새로운 왕으로 통치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측근으로서 당연히 새로운 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들 중에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될지 알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가 높은 곳에 오르기를 원했던 루스벨과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사14:14).

 

2. 마 20:20~28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이러한 요청에 어떻게 답변하셨는가? 그분의 핵심 요지는 무엇인가?

[마20:20~28]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답: 하나님의 나라는 섬기는 자들이 큰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이 한심스러운 사건의 배경을 생각해 보면 더 절망적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실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배반을 당하여 사형 선고를 받고 조롱과 채찍질을 당한 뒤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시리라고 알려주셨다(마 20:18~19).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말씀하시자마자 누가 가장 큰가에 대한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도 않았다. 듣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자신들의 사적인 야망에 눈이 어두워 더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오지 않을 지상왕국에 대한 거짓 개념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곧 있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분이 제공하시려는 영원한 왕국에 대한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가설명> 제자들이 누가 크냐하는 논쟁을 벌인 것은 사단의 공격에 넘어간 것이다. 오늘날도 사단은 교회 안에서 이런 공격을 한다. 특히 연말 직원선거철이 되면 사단은 힘을 다해 날뛰고 교인들은 사단의 날뛰는 힘에 놀아난다. 교회 기관의 선거철에도 마찬가지이다. 섬기는 자는 실력이 있는 자이다. 실력이 없으면 섬길 수 없다. 약한 자를 섬기려면 강해야 한다. 무지한 자를 섬기려면 유식해야 한다. 가난한 자를 섬기려면 재물이 있어야 한다. 아픈 자를 섬기려면 건강해야 한다. 우리는 섬기는 자가 약한 자요 낮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가장 강한 분이시다. 그분은 죄로 사망이 된 세상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살려주시려는 생명으로 오신 분이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은 예수 안에서 참으로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나는 그렇게 깨닫는다. 참으로 거듭난 성도로서 예수의 제자 된 사람들은 이 사망의 세상에서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산 자들이 되도록 섬겨야 한다. 이 섬김을 하려면 실제로 봉사해야 한다. 가난한 자에게 동정과 사랑으로 필요를 공급하고 연약한 자들을 실제로 돌보아야 한다. 이런 사랑의 봉사를 할 때에 섬김을 받는 사람들이 섬기는 성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그렇지 않은가?

 

  교훈: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오르는 도중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주목하지 않고 사탄의 정신에 휘말려 누가 더 크냐는 논쟁을 일으켰다.

 

 

다섯째날(목) 2월 18일

말씀과의 거룩한 만남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사흘만의 일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그들은 그분께서 로마를 무찌를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대신 로마가 그분을 이긴 것처럼 보였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많은 제자들이 사도들과 함께 만났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의 여인들이 일요일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갔다. 누가는 여인 세 명의 이름을 밝혔지만 거기에는 갈릴리에서부터 그분을 따라 온 다른 여인들도 있었다(눅 23:55, 24:1, 10).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가…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눅 24:9) 그들이 무덤에서 보았던 빛난 옷을 입은 두 남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가는 일요일 오후에 예루살렘에서 2~3시간 거리에 있는 엠마오로 가는 두명의 제자들에 대해 기록했다(눅 24:13). 그들은 지난 주말에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낯선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를 묻지 않았더라면 절대 그를 알아차리지 못할 뻔 했다(눅 24:17).

  그분의 질문은 글로바라고 불리는 제자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어떻게 그 나그네가 예루살렘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그토록 무지한지 의아해 했다. 그 나그네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눅 24:19).

 

1. 눅 24:19~35을 읽어 보라. 그들의 말은 그들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나타내는가?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에게 진리를 설명하셨는가?

[눅24:19~35]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답: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을 드러내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록된 말씀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셔서 믿게 하셨다. 

 

  예수님의 초점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광야에서 사탄과 씨름하며 성경의 권위를 회복시키셨던 것처럼 그분은 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서 바로 성경을 사용하셨다.

  그분은 자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사명에 대한 기초를 가르치신 다음에야 그들에게 그러한 가르침에 버팀목이 될 만한 경험을 제공하셨다. 첫째, 그분은 자신을 드러내시며 그분이 정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했음을 보여주셨다. 둘째, 그분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눅 24:31).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에 대한 완전무결한 성경의 가르침과 생생한 경험을 얻은 두 제자에게는 충분한 믿음의 근거가 있었다.

 

<부가설명>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확실한 근거를 전적으로 기록된 성경말씀에 두고 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셨을 때 친히 부활하신 자기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부활을 증거하지 않으셨다. 구약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그들이 부활을 믿도록 이끄셨다. 이유는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한 실체를 확인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한다면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부활하신 실체를 우리가 체험하도록 나타나셔야 할 것이다. 도마가 그렇게 하기를 원했을 때 도마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이신 후에 부활한 실체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오늘 우리가 도마보다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도 비유 중에 아브라함의 입을 통하여 모세와 선지자를 믿지 않으면 죽은 자가 부활해서 그들에게 가도 믿지 않는다고 단언하셨다. 모세와 선지자는 위에 인용한 누가복음을 보면 구약성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에서 부활을 확인하고 성경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 성경은 기록된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사단은 성경을 확신하지 못하게 하는 사조와 해석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승리해야 한다. 

 

  교훈: 주님의 죽음에 실망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의심을 이기고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은 부활의 주께서 알려 주신 말씀에 대한 확신이었다.

 

 

여섯째날(금) 2월 1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마귀를 쫓으시고(눅 6:18), 절망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셨으며(눅 6:20~23),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 수 있는지 보여주셨고(눅 6:27~49), 백부장의 종을 고치셨으며(눅 7:2~10),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고(눅 7:12~16), 폭풍을 잠잠케 하셨으며(눅 8:22~25), 거라사인 지방의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하셨고(눅 8:26~39),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 받던 여인을 치유하셨으며(눅 8:43~48),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셨고(눅8:41~42, 49~56),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요 11:39~44). 이 모든 기적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분을 믿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배우고 이해하는 데 더뎠다. 그분에 대한 애정과 그분의 성품에 대한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데 주저하였다. 조상의 전통에 대한 그들의 빈번한 언급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지속적인 오해는 그들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었다”(Manuscript Releases, vol. 18, p. 116).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 선물을 거부할 수 있다. 그것은 사탄과 대쟁투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가 의심과 불신에 빠지도록 노력한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들에 대한 믿음을 통해 발견된다. 사탄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믿음에서 떠나도록 모든 시도를 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이 마귀보다 훨씬 강하시다. 우리가 그분께 매달려 있는 이상 사탄은 우리를 침범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천연계를 다스리신다면 왜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자연재해의 피해자가 되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대는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대쟁투의 실재성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얼마나 적합합니까?

※ 사단이 실재한다는 것과 그가 바로 그가 질문하는 그런 사상을 사람들에게 심기 위하여 천연계의 재난을 활용한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 욥의 예는 좋은 예이다. 

 

➋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근거는 무엇이며, 성경이 그분에 대해 말하는 것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왜 항상 이러한 이유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 성경말씀이 확실하고 그 말씀대로 예수님이 이루실 것을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생명이시며 구주이심을 증명한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이 사실을 기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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