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대쟁투(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2/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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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2-06 07:16 조회9,514회 댓글0건본문
2월 13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8분
기억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우리는 대쟁투 주제를 크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생각한다. 즉 그것은 하나의 큰 그림이다. 우리는 그러한 주제를 ‘거대담론’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제한된 범위의 대상을 설명하는 지엽적인 주제나 이야기와 달리 더 큰 범위의 실재를 다루고 해석해 주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논개의 일화는 ‘미시담론’이고 그것의 배경이 되는 임진왜란은 ‘거대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쟁투의 주제가 아무리 거대하고 포괄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땅 위에 사는 개인의 삶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유혹에 대처하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과정에서 매일 일어난다. 사람들의 매일의 삶이 종종 커다란 정치·경제적 사건에 상당히 영향을 받는 것처럼 우리 각자는 대쟁투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번 주 교과에서는 우리가 대쟁투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겪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문제에 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떠한지를 부분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➊깨닫기 : 예수님이 개인과 매일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대쟁투를 어떻게 드러내셨는지 연구한다.
➋느끼기 : 예수님이 그분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의 확실성을 경험한다.
➌행하기 : 신앙생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주신 교훈의 원칙을 실천한다.
A.
❷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사탄은 우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어떤 장애물들을 사용합니까?
※ 마음을 딱딱하게 하고 핍박과 환난, 세상의 욕심을 가지도록 한다.
❸집을 짓는 자의 비유에서 우리의 생존을 결정짓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생명을 얻고 말씀을 준행하거나 말씀을 깨닫지 않기 때문에 듣고도 준행하지 않는 것이다.
❹현재 우리가 대쟁투에서 생존하며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해 필요한 결심은 무엇일까요?
※ 자아를 예수님께 전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다.
B.
❷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쉼 또는 안식이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 안에서 얻는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다. 마음이 예수님 마음과 같이 될 것이다.
❸남을 비판하는 정신과 태도는 본인에게 얼마나 해로운 것입니까?
※ 자기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이다. 스스로 심판하는 것이다.
❹우리가 일상에서 벌어지는 대쟁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예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성령으로 우리를 전적으로 주관하도록 하시는 것을 구해야 할 것이다.
결론 대쟁투는 우리가 매일 내리는 결정과 선택의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홀로 싸우며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날(일) 2월 7일
여러 종류의 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1. 예수님의 멍에를 메면 어떻게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있는가?
답: 사망의 공포가 없어지기 때문에 안식이 있다.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 죽어도 사는 부활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이러한 제안은 백성들을 원수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예수님의 거대한 사명 중 개인적 차원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주변 나라의 이교 신앙을 떠나 선조의 믿음으로 돌아온다면 심령에 안식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한 예레미야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렘 6:16 참고).
성경에서 안식의 개념은 매우 다양하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그분은 창조 사업을 마치고 안식하셨다(창 2:2). 그분의 안식은 일주일 주기로 기념되는 안식일 휴식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연례적인 절기에도 휴식이 주어졌다(레16:31 참고). 매 칠 년마다 토지의 안식년이 있었고(출 23:11), 오십 년마다 노예가 해방되고 부채가 탕감되는 희년이 돌아왔다(레 25:10).
안식은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계실 때에 진가가 드러난다(출 33:14). 왜냐하면 그래야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왕상 5:4)으며 적군도 사라지기 때문이다(신25:19).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이 주시는 땅에서 안식을 누렸다(수 1:13). 그것은 특히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백성들의 경험이었다(렘 30:10). 또한 안식은 나그네가 대접을 받을 때(창 18:4) 그리고 안정적인 가족생활을 누릴 때에(룻 1:9, 잠 29:17) 제공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였을 때는 안식이 없었다(출 5:4~5, 애 1:3). 요동하는 바다와 같은 악인들에게는 안식이 없다(사 57:20).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은 죽음과 무덤뿐이다(욥 3:11, 13, 16, 17~18). 계 14:11도 마지막 때에 대쟁투의 다른 편에 서는 자들에게는 쉼이 없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한다.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안식은 매우 넉넉한 선물 꾸러미와 같다. 거기에는 창조주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안식일의 선물도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시는 안식은 우리가 잃어버린 지위까지 고려하며 모든 면에서 우리를 회복시킨다. 설령 실수를 저지를지라도 우리는 구주의 편에 있는 안식의 처소를 여전히 보장받는다.
<부가설명> 사람이 그냥 쉬면 안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일곱째 날에는 창조주께서 친히 안식하시는 것으로 안식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안식을 창조하지 않으셨으면 안식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창조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게 된다. 그분이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고 쉼을 얻으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는다. 그분 안에 있을 때 아무도 정죄하지 못한다.(롬8:33,34) 정죄 받지 않는 인격이 되면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이 없을 때 진정한 안식이 온다. 이 두려움은 사람들을 거짓으로 이끈다. 거짓을 하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즉 안식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신 그 복음이 우리 안에 확신을 주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온전히 주장할 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현실에 닥치는 모든 일에 항상 평안하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을 살면서 현실적으로 닥치는 어려움에 직면하면 두려움이 엄습하고 그럴 때 현실적으로 쉼을 잃을 수 있지만 그러나 영구한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자. 영어로 포기한다는 말이 give up이 아닌가. 위에 주라는 말이다. 위에 계신 하나님께 주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예수께서 맡으실 것이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이것이 give up이다.
교훈: 성경에서 약속하는 풍성한 안식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하실 때에 경험할 수 있는 선물이다.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진정한 안식과 쉼이 없다.
둘째날(월) 2월 8일
심고 거둠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마 13:3~4).
대쟁투의 주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복음에 반응하는 네 가지 유형은 세상에 ‘선인’과 ‘악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인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자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주의할 필요가 있다.
1. 마 13:3~8과 18~23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 속에서 대쟁투의 실상은 얼마나 뚜렷하게 나타나는가?
[마13:3~8]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13:18~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답: 말씀을 마귀가 와서 빼앗아간다. 또 듣고 기뻐하지만 곧 환난과 핍박을 닥치게 해서 포기하게 한다. 또 세상의 욕심을 부추겨서 포기하게 한다. 마귀는 이렇게 말씀이 열매 맺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대쟁투이다.
영혼을 둘러싼 전쟁은 실재한다. 원수는 사람들을 구원에서 돌이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예를 들어 길가에 떨어진 씨앗에 관하여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기록했다. “사탄과 그의 부하들은 전도 집회에 참석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명을 주도록 힘쓰는 반면에 사탄은 그 말씀이 아무 효과도 나타내지 못하도록 재빨리 활동한다. 그는 깊은 원한을 갚기 위해 나타내는 악착같은 열심으로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영혼들을 이끌고 계시는 반면에 사탄은 마음에 감동을 받고 구주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려고 애쓴다”(실물교훈, 44).
‘길가에 씨를 던진 농부는 왜 낭비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았을까? 왜 그는 더 부지런히 일하여 돌들을 파내지 않았을까? 왜 그는 잡초를 더 열심히 뽑지 않았을까’ 하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복음의 씨를 뿌릴 때 인간의 노력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 우리는 무엇이 좋은 토양인지 나쁜 토양인지 판단하는 재판관이 아니다. 잡초가 난다는 것은 우리가 예기치 못한 부분에서 자라나는 악을 예방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구원 받을 자들이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시는 분은 뒤에서 일하는 추수장이신 주님이시다.
<부가설명> 씨 뿌리는 비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마음의 상태가 어떤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모든 과정에 사단이 개입하는 것을 보여준다.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고 있을 대 사단은 속히 와서 말씀을 빼앗아 간다.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은 사단이 사람의 마음을 세속적인 것과 믿음으로 살기에 힘들게 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투쟁에서 우리의 마음 밭은 옥토가 되어야 한다. 예레미야는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렘4:3)고 권고한다.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세상의 잡다한 가시덤불을 말끔히 걷어내고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결실이 30, 60, 100배가 될 것이다. 이렇게 걷어내고 옥토가 되면 사단은 거기에 가라지를 뿌려서 또 방해한다. 생명과 사망의 투쟁은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의 마음에서나 이 세상에서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예수님께 굴복하여 오직 예수님의 생명이 풍성하여지도록(요10:10) 기도해야 할 것이다.
교훈: 씨를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영혼을 둘러싼 치열한 대쟁투가 벌어지며 구원을 보증해 주시는 분은 추수장이신 예수님임을 보게 된다.
셋째날(화) 2월 9일
반석 위에 지음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6).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를 보면 우리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우주적인 전쟁에서 우리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의 문제는 매우 개인적인 사항이다.
1. 마 7:21~27을 읽어 보라. 이 비유를 읽을 때 매우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마7:21~27]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답: 주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해야 한다. 준행하지 않으면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를 상상해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반석은 어디에 있고 모래는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모래가 해변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해변에 있는 거주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될 만한 장소는 대부분의 마을이 위치한, 골짜기 한쪽의 낮은 구릉 지역일 것이다.
예수님은 그냥 지표면에 세워진 집과 암반 위에 기초를 세운 집을 비교하셨다(눅 6:48). 언덕에 비가 내리고 계곡에서 급류가 떠내려올 때까지는 두 집의 차이점을 알 수 없다. 한 건축가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초를 견고하게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건축가에게는 문제가 생긴다. 튼튼한 기초가 없이 표면 위에 세워진 집은 소용돌이치는 홍수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아시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심각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도움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생존할 가능성이 없다. 예수님은 죄악을 이기셨다. 이것이 그분을 반석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투쟁은 오직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분 위에 굳건하게 세울 때에만 이길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분에게 순종해야만 그분 위에 집을 세울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문제는 단순하다. 믿음이 아무리 중요한 요소라고 할지라도 성경에 따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17, 20, 26). 이 비유에서 우리는 그러한 믿음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본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의 상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준행할 능력이 없다. 이유는 사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고보서를 행함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면 그것은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강조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교과 저자가 인용한 야고보 2:17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고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을 보고 행함을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이 구절은 행함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보다는 생명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죽은 자는 행할 수 없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산 믿음, 즉 생명이 있는 사람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상태 곧 생명이 없는 것이다. 생명 있는 자는 행함이 있고 생명이 없는 자는 행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예수님의 이 교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은 사람은 그의 일상생활에서 말씀을 준행하여 매사가 반석에 건축되지만 생명이 없는 사람은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어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준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교과의 영감의 말씀이 이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라.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생명은 그분의 말씀 가운데 있다. 그대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순종할 능력을 주게 될 것이다.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빛에 유의할 때, 더 큰 빛이 오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집을 짓고 있으므로 품성이 그리스도의 품성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될 것이다”(산상보훈, 150).
교훈: 말씀에 순종함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불순종함으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 중에 어느 편에 설지 영혼을 둘러싼 치열한 대쟁투가 벌어진다.
넷째날(수) 2월 10일
비판하지 말라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마 7:5).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 산상보훈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과히 혁명적인 내용이었다. 처음부터 그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보통 사람들도 소중하고 복되다고 말씀하셨다(마 5:3~12). 그리고 그들을 매우 가치 있는 두 사물 곧 소금과 빛으로 비유하셨다(마 5:13~16). 그분은 또한 율법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남에게 보이려는 선행은 경고하셨다(마 5:17~20). 물론 행동을 조심해야 하지만(마 5:29~30) 예수님은 한 사람의 도덕성은 그의 행위가 아니라 생각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르치셨다(마 5:12~28). 산상보훈을 모두 읽은 사람은 예수님이 인간의 삶과 관계를 전반적으로 다루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마 5장~7:27).
1. 마 7:1~5을 읽어 보라. 이 말씀 속에서 대쟁투의 실상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여기서 선과 악의 상호작용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마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답: 사단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게 한다. 이것이 죄의 속성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비판하는 사람이 자기가 비판하는 사람과 같은 일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자기를 정죄하는 것이다. 먼저 자신을 분명히 살피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말씀하신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낫게 생각하거나 자신을 그들의 심판관의 자리에 두지 말라. 그대는 동기를 식별할 수 없으므로 남을 능히 판단할 수 없다. 남을 비판함으로 그대는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가 형제를 참소하는 자인 사탄과 한통속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곧 우리가 할 일이다”(시대의 소망,314).
청중들에게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셨다. 첫째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와 동일한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마 7:1~2). 즉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리가 비판하는 자를 바라보게 해서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또 다른 점은 우리가 보는 형제자매의 잘못은 우리 자신의 문제에 비하면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문제를 인지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쉽게 보지만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부가설명> 비판하지 말라고 했을 때 헬라어는 ‘크리노’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정죄’ 또는 ‘심판’이라고 자주 번역된 말이다. 타인을 비판하는 것은 그를 정죄하여 심판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심판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시는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또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을 속속들이 아시는 것처럼 알지 못한다. 나타난 행동만 보고 정죄하고 심판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잘못 증거하는 것이 된다. 교과 저자의 말대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기의 허물을 덮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도 생각해 볼 말이다. 사단은 우리의 의식에 깊이 관여하여 사단의 시각으로 사람을 보도록 유혹하고 자아 중심으로 생각하고 생활하려는 강한 경향 때문에 사단의 이 계략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우리가 사물에 대하여 또는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바른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동기를 온전히 파악하기 전에 나타난 모습만으로 쉽게 판단하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할 일이다. 비판하기 보다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그대의 의견, 의무에 대한 그대의 견해, 성경에 대한 그대의 해석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표준으로 삼지 말고, 그들이 그대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속으로 그들을 정죄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며, 그들의 동기에 관해 추측하지 말고, 그들을 판단하지 말라”(산상보훈, 124).
교훈: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인간의 삶과 관계에 대하여 폭넓고 심오한 원칙을 제시하셨고 우리가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을 비판하는 모순을 지적하셨다.
다섯째날(목) 2월 11일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1. 마태복음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가장 확신에 가득 찬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이 말씀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갈등하고, 실망하며, 실수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우리를 저버리시는 것같이 느껴질 때에 어떤 의미인가?
답: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주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라고 권고하신다. 우리가 일이 잘 안 되고 또 스스로 생각할 때 주님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된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흥미롭게도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비슷한 언어로 시작한다. 믿음의 선조들을 열거하고 마리아와 요셉을 차례로 방문한 천사의 일화를 소개한 후에 마태는 태어날 아기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마1:23).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여러 번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이삭과 야곱과 예레미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창26:24, 28:15, 렘 1:8, 19, 사 41:10, 43:5). 이런 약속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공감되었던 고난과 억압의 시대에 주어졌다.
위 말씀들과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는 성경절이 또 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그리고 몇 구절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이러한 약속도 수차례 반복되었다. 그것은 처음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지도력을 양도하는 장면에서 나왔다(신 31:6, 8). 하나님은 모세가 죽은 뒤에 여호수아에게 그 구절을 되풀이하셨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 1:5). 다윗이 솔로몬에게 왕국을 위탁할 때에 그도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그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시리라고 말하였다(대상 28:20).
절대 변하지 않으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은 믿음의 선조들에게 강한 확신을 주셨다. 그들은 고난과 시험을 겪고 최고의 난관에 부딪힐 뻔했으나 계속되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확신을 잃지 않았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 이러한 확신이 필요하다.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가서 가르치고 침례를 주어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 가운데 나왔다. 따라서 우리는 대쟁투 끝에 패배할 진영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 내는 기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부가설명>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때도 함께 하신다. 함께 하신다는 말씀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말 그대로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이시다. 이 같은 의미가 마태복음 마지막 구절이다. 내가 괴로울 때에나 형통할 때에나 함께 하신다. 예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실 때는 결코 한 순간도 없다는 뜻이다. 둘째는 예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내 생각, 말, 감정, 행동이 예수님 앞에서 하는 것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예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감정을 폭발시키고 행동한다. 항상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정말 인식한다면 우리의 사언행(思言行)이 예수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하려고 애쓰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일상생활에 사언행이 어떤가? 예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나타내지 않는가. 어려울 때, 사업을 할 때 그때 예수님이 함께 하시도록 간구할 것이 아니라 일상에 함께 계심을 믿고 바른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사단은 이것을 잊어버리도록 항상 옆에서 우리의 의식에 작용하고 있다. 정말 엄청난 대쟁투이다.
교훈: 예수님은 믿음의 선조들 때부터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반복하셨다. 비록 고난과 시험이 올지라도 우리는 이 약속을 끝까지 믿을 수 있다.
여섯째날(금) 2월 1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미국 작가 리안 위젤티어(Leon Wieseltier)는 자신이 읽은 책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름이 ‘S. B.’로 시작하는 한 영국인이 있었다. 그는 선천적인 맹인이었다. 그런데 52세에 각막이식을 받고 난생 처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늘 펼쳐져 있었지만 가려졌던 세상을 마침내 본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위젤티어가 인용한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칙칙한 세상을 보았다. 그리고 군데군데 벗겨진 페인트칠과 얼룩 때문에 당황했다.… 그는 점점 세상의 불완전함에 주목하며 페인트칠이나 목재의 작은 흠이나 자국도 넘겨보지 못했다. 분명 더 완전한 세상을 기대했으나 얻은 것은 혼란뿐이었다. 그는 밝은 빛을 좋아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면 우울함에 잠겼다. 그의 우울한 감정은 점점 고착되고 일상화되었다. 그는 서서히 적극적인 삶을 포기하더니 3년 뒤에 숨졌다.”―www.newrepublic.com/article/113312.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납득이 된다. 이 세상은 크게 손상을 입었다. 6천 년 동안 여기서 대쟁투가 벌어지고 있다. 6천 년의 전쟁이 훑고 지나간 곳마다 수많은 잔재가 남는다. 우리가 이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궤도를 옳은 방향으로 수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실 세상은 더 나빠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약속이 필요하다. 그것은 오직 대쟁투에서 이기신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 그분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보증되었고 우리에게 값없이 제공되었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S. B. 의 이야기에서 여러분은 어떤 교훈을 깨달았습니까?
※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상상하는 세상과 마침내 눈으로 확인하는 세상은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그는 세상이 죄로 얼룩진 것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세상은 죄가 주관한다는 것과 인간이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는 것 같다.
➋화요일 교과에서 보았듯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는 자들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강조점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과 사물은 무엇입니까? 이 대답을 통해서 그들이 그토록 자기기만적인 이유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 예수의 이름을 자기들이 행한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이런 사상에 아주 익숙하다.
❸그대에게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는 친구나 가족이 있다면 그 문제를 비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어떻게 다루겠습니까?
※ 기도하면서 함께 의논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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