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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예레미야서의 교훈(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2/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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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5-12-18 11:49 조회8,890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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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6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20분

 

기억절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연구 범위 : 렘 2:13, 6:20, 렘 7:1~10, 마 9:12, 신 6:5, 렘 10:1~15, 렘 23:1~8

 

우리는 예레미야서 연구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것은 하나의 탐험과 같았다. 선지자의 일화 속에서 여러 극적인 사건들과 감정과 열정이 쏟아져 나왔다.

다른 모든 선지자들처럼 예레미야도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선지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었다. 예레미야서는 특정 시간과 공간과 상황 아래에 있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기별이었다.

그가 처했던 상황이 지금 우리의 상황 또는 예레미야서를 읽었던 다른 세대들의 상황과 상당히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시된 핵심 기별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과 그분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며, 자기만족에 빠지게 하는 공허한 종교 의식과는 다른 참된 심령의 신앙이고, 때로 듣고 싶어 하는 내용뿐 아니라 견책에도 귀를 기울이는 자발성이며, 인간의 팔이 아닌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붙잡는 믿음 같은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백성들의 행동이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레와 같이 경고하면서도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중심으로 예레미야서의 핵심 주제를 살펴본다.

➋ 느끼기 : 예레미야서의 ‘남은 무리’ 주제가 가르치는 진지한 의미를 이해한다.

➌ 행하기 : 진정한 행복과 영생의 유일한 통로인 ‘심령의 종교’ 개념을 수용한다.

 

A. 

❷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어떤 오해들과 씨름하셨습니까?

※ 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멸망시킬 수 없다는 사상과 씨름하셨다.

❸ 그대는 그들의 오해가 오늘날 어떤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 남은 자손이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B. 

❷ 종교의식에 의존했던 유다 백성들의 신앙에는 어떤 허점이 있었습니까?

※ 그 의식(儀式)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유지한다는 사고방식이다. 

❸ 구원의 개인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집단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어떤 문제가 나타납니까?

※ 개인이 집단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활하게 된다. 

 

결론 : 예레미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품성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오해와 편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다른 것으로는 만족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것에 미치지 않은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첫째날(일) 예레미야의 하나님

12월 20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신자들은 대쟁투의 중심에 ‘하나님의 품성은 무엇이며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사탄의 주장처럼 변덕스러운 폭군인가? 아니면 오직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바라시며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이신가?’라는 중대한 쟁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질문들은 진실로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이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고 비열하고 자의적이며 가학적인 존재라면 우리의 형편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하나님이라면 차라리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나을 것이다.

따라서 그 질문들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행히도 우리는 답을 안다. 그것은 십자가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광대한 우주의 무수한 세계들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그분, 그룹과 영광의 스랍들이 즐겨 경배하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 하늘의 왕께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낮추시고 죄의 치욕과 슬픔을 지시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숨겨진 채 마침내 잃어버린 세상의 죄 때문에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심장이 터지고 생명이 떠나간 사실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온 우주의 창조자시며 모든 운명의 결정자께서 인류를 위한 사랑 때문

에 당신의 영광을 버리시고 스스로를 낮추셨다는 것은 영원히 우주의 경이와 존경을 자아낼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51).

 

1. 예레미야서의 다음 성경절에는 하나님의 본질과 품성이 어떻게 계시되고 있는가? 이 말씀들은 그분에 대해 무엇이라고 증언하는가?

렘 2:13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라고 계시한다.

렘 5:22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 하나님은 천연계를 관리하여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게 하신다.

렘 11:22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한다.

렘 31:3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계시한다. 

렘 3:7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예레미야서의 수많은 표현과 비유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분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위대한 창조주이시고, 심판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로부터 돌이키도록 거듭 거듭 호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부가설명>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에 대한 말을 잘하는 편이다. 아마 다른 교단보다 훨씬 많이 이 표현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피조물이 감히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이사야가 지적한 것처럼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아비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났느냐 어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사45:9,10)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나님은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다.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 스스로 계신다는 말은 생명자체라는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생명이신데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신 생명이시다. 그분이 창조한 것은 사랑의 발현이다. 사랑이 없으면 생산이 되지 않는다. 생명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성경이 계시한 것은 그분이 생명이라는 말과 같다.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나타내는 생명현상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한 이기심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사망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 생명 죽음과 정반대인 생명은 그 본질이 사랑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기를 원하는 생명의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이 생명을 얻는다. 이 생명,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참 생명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 생명의 성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은 생명차제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또 사랑 자체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교훈 :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의 본성과 품성에 대해 많은 것을 증언한다. 무엇보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시다.

 

 

둘째날(월) 종교의식과 죄

12월 21일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렘 7:9~10).

 

“이 세상에는 조직화되어 있는 종교와 부단히 투쟁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바로 성경이라고 알려진 책이다.”―Terry Eagleton,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Yale University Press, 2010), Kindle Edition, p. 8.

위의 말이 완전히 진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종교, 즉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종교는 언제나 조직화된 종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레미야서를 보면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냉담하고, 죽어 있는, 심지어 매우 조직화되어 있는 종교의식, 즉 그들의 죄를 가려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종교의식들로부터 백성들을 분리시키시려 하신다.

이미 언급했지만 반복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 말한다. 예레미야가 치열하게 씨름했던 문제는 대부분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에 관한 것이었다. 정말 안쓰러운 자기기만이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의 입장에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갈 3:29).

 

1. 예레미야서의 다음 성경절들은 어떤 기별을 전하는가? 우리는 그 원칙들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렘 6:20, 7:1~10)

[렘6:20]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요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렘7:1~10]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거하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8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답: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형식적인 예배행사를 하는 것은 가증한 일이고 자기들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을 경계한다. 

 

렘 7:9~10을 읽어 보라. 만약 누군가 ‘값싼 은혜’라고 불리는 개념에 적합한 상황을 찾기 원한다면 그 용어를 적용할 만한 곳이 바로 여기 있다. 백성들은 각종 죄악을 저지르고 성전에 가서 참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다.

하나님은 조롱을 받을 분이 아니다. 백성들이 그들의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특히 그들 가운데 약자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들은 호된 심판을 맞이해야 할 것이었다. 그들은 기만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동시에 언약의 조건을 무시한 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계속 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러한 죄 가운데 머물 수 있었던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부가설명> 교과 저자는 마태복음 9:12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의인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나타낸 말씀인데, 이 저자는 예레미야 당시의 유대인들이 스스로 의인으로 생각해서 의원이 쓸데없다는 사고방식을 살아가는 것을 나다내는데 인용하고 있다. 그렇게 인용할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우리도 스스로 노력하고 의롭게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구속은 날마다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한 번 구원받았으면 됐다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날마다 속죄를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이 유대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다. 우리도 예수 안에서 자아가 날마다 죽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자아가 활동하는 한 예수께서 일하실 수 없다. 사실 자아는 아담 안에서 썩어질 씨로 태어난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부패를 좀 지연시키는 것 외에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자기 생각을 합리화라지 않아야 한다. 오직 기록된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주님께 굴복하고 항상 정결케 하시는 주님의 보혈에 깨끗함을 받아야 할 것이다. 

 

교훈 : 예레미야가 씨름했던 유다 백성의 문제는 언약의 조건은 무시한 채 그들이 죄를 범해도 종교 의식을 통해 죄가 사해질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었다.

 

 

셋째날(화) 심령의 종교

12월 22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예레미야서는 대체로 민족 전체를 향해 전하는 기별이다. 예레미야는 자주 이스라엘과 유다를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최상급 포도나무(렘 2:21)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렘 11:15, 12:7)로, 하나님의 소유(렘 12:7~9)로, 그분의 포도원(렘 12:10)으로 그리고 그분의 양떼(렘 13:17)로 설명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우리는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집단적인 특성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자주 집단적인 의미로 이해된다(엡 1:22, 3:10, 5:27 참고).

그러나 구원은 공동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이다. 우리는 일괄 거래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신약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유다 나라도 개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진짜 심각한 문제는 개인의 차원에서 발생했다. 유명한 성경 구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기별은 비록 민족 전체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2인칭 단수로 적혀 있다. 즉 모든 경우에 ‘너’는 단수이며 하나님은 각 개인을 부르고 계신다는 뜻이다. 결국 우리는 각 개인이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개념을 예레미야서에서도 발견한다. 

물론 신약과 구약성경이 모두 교회의 집단적인 성격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진정한 믿음은 매일 하나님께 굴복하며 믿음과 순종으로 그분과 동행하기로 선택하는 각 개인의 문제이다.

 

1. 다음의 말씀들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렘 17:7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 개인적으로 여호와를 의지하고 의뢰해야 한다.

렘 17:10 “나 여호와는…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 심판은 각 개인이 받는다.

렘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각 개인이 해야 한다. 

렘 9:23~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 여호와를 깨닫고 믿는 것은 개인이 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셨으나 그 구원을 적용하는 것은 이 세상에 생활하고 있는 각 개인 사람이다. 범죄 자수 기간이 국가적으로 선포되었어도 그 자수하는 것은 자수할 것이 있는 국민 각 개인이다. 구원도 그와 같다. 세상을 구원하셨으니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집단으로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각 개인이 세상에 베푼 구원을 받아들일 때 구원이 그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기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시84:7) 우리가 교회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특히 남은 자손인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교회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각 개인의 구원의 보증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각 개인이 남은 자손에게 제시된 진리를 받아들여야 개인적으로 남은 자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속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훈 : 예레미야를 포함하여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백성을 집단적으로 취급하지만 구원은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개인의 문제이다.

 

 

넷째날(수) 우상들의 황혼

12월 23일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렘 10:14~15).

 

1. 예레미야가 계속 다뤄야 했던 백성들의 큰 죄는 무엇이었는가?(렘 10:1~15)

[렘10:1~15]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3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4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 5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 6 여호와여 주와 같은 자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인하여 크시니이다 7 열방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치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열방의 지혜로운 자들과 왕족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음이니이다 8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도는 나무뿐이라 9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공장과 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감으로 그 옷을 삼았나니 이는 공교한 사람의 만든 것이어니와 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11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12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 13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14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5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답: 열방의 길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흥미로운 것은 우상들이 무가치하고 어리석으며 쓸모없음을 보여주는 선지자의 설명뿐 아니라 그것들을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조하는 그의 진술 방법이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와 대조적으로 우상들은 능력도 소용도 없으며 공허한 거짓일 뿐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반면 우상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에게 경배하며 우리의 삶을 바쳐야겠는가? 무능하고 나약하며 공허하고 거짓된 우상에게 그렇게 해야겠는가? 아니면 우주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능력과 권세가 크신 하나님께 그렇게 해야겠는가? 답은 자명하다.

그러나 답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물론 우리가 예레미야 시대의 백성들이 섬겼던 우상을 숭배하지는 않겠지만, 현대인의 삶에도 거짓 신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현대의 우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경배하면 그것은 우리의 신이 되고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된다. 경배란 꼭 어떤 대상을 찬양하고 그것에게 기도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것들이 우리의 우상이 될 소지가 있는가? 디지털 장비, 돈, 명예 또는 특정 인물은 어떤가?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나열하고 그것들이 그대에게 진정한 구원을 제공하는지 스스로 물어보라.

물론 우리는 이런 것들이 경배 받을 가치조차 없다는 사실을 지적으로 알고 있다. 또한 이 세상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어떤 것도, 우리가 우상으로 삼는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을 뿐더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할지라도 부주의하여 항상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과 그 이유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예레미야가 그토록 격렬하게 비판하였던 우상숭배와 유사한 현대판 우상숭배에 쉽게 휩쓸려 갈 수도 있다.

 

<부가설명> 성경이 말하는 가장 큰 우상은 창조주를 부인하는 것이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여호와라 이름하신 스스로 계시는 생명의 하나님을 전심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선악의 대쟁투는 생명과 사망의 투쟁이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존재를 두고 투쟁하는 것이다. 피조물이 자기를 피조물로 인정하지 않고 창조주를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투쟁이다. 하늘에서 루시퍼가 시작한 싸움의 핵심내용이다. 오늘날 세상에 가장 큰 우상은 진화론이고 그 우상 사제들은 진화론을 주장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이다. 더 나아가서 피조물인 인간의 영생불사를 가르치는 종교도 가장 큰 우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우상이다. 영혼불멸을 르치고 믿는 것은 생명이 오직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역시 생명과 존재문제이다. 모든 종교가 이 일에 앞장서고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영혼불멸을 믿고 가르치는 종교는 우상을 섬기는 종교이고 그것을 가르치는 목회자들과 사제들과 승려들, 등등은 다 우상의 사제들이다. 

  생명의 하나님 자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오늘의 우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생명의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고 알고 있는지 스스로 진지하게 물어볼 일이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상이라는 진부한 정의에 만족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면 우상에 걸려들게 된다.

 

교훈 : 예레미야 시대의 백성들이 아무 능력도 없는 우상에 의지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의하지 않으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현대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

 

 

다섯째날(목) 남은 자들

12월 24일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렘 23:3~4).

 

“유다의 배도의 말년에 선지자들의 권고는 거의 무용한 것처럼 보였으며 갈대아인 군대가 세 번째 와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에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 희망은 사라졌다. 예레미야는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였고 항복을 주장한 까닭에 마침내 투옥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 성읍에 남아 있는 충실한 사람들을 아무런 희망 없이 절망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다. 예레미야가 그의 기별을 조롱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감금되어 감시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즐겨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새로운 계시를 그에게 주셨는데 그 계시는 그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교회에 끊임없는 위안의 근원이 되었다”(선지자와 왕, 466).

만연한 배도와 불행 중에도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하나님 편에는 항상 신실한 백성이 있었다.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백성들의 배도와 불충에 강조점을 두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러한 죄로부터 백성들을 건져내기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 내내 충성스러운 남은 무리를 두셨다. 물론 남은 무리의 존재는 마지막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계 12:17 참고).

 

1. 렘 23:1~8에는 남은 무리의 개념이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가? 이것은 신약 시대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렘 33:14~18 참고)

[렘23: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2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8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방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거하리라 하시니라.

[렘33:14~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1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18 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를 항상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답: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고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일컬음을 받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역사의 종말에 남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칭하게 될 것을 예표한다.

 

학자들은 5~7절을 하나님께서 신실한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메시아적인 예언으로 이해했다. 그것이 사실이었지만 바벨론 유수 이후에 남은 자들의 귀환은 그렇게 영광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이 다윗의 혈통 즉 언젠가 세상을 통치할 “의로운 가지”를 통하여 성취될 것이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마 1:1, 21:7~9, 요 12:13 참고). 그것은 하나님의 진실한 남은 자들이 평화와 안녕 가운데 영원토록 살게 될 날이 이르는 재림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처음에 출애굽으로 상징되었던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영원히 성취될 것이다.

 

<부가설명>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다.’라고 확실히 대답했다.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까지 이스라엘은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준행하지 못했다. 그들의 역사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역사이다. 바울은 이런 이유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질을 받을 때 준행하게 된다. 하나님의 성질은 예수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된다. 베드로는 이것은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4)라고 설명했다. 여기 성품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퓌시스’인데 본성이라는 뜻이다. 예수 안에서만 이것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남은 자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것을 가리키고 있다. 계시록은 출애굽기의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 것을 계시한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5,6) 계시록 5:9,10도 읽어보라. 예수님은 우리의 의이시다. 

 

교훈 :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희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 편에는 언제나 그분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남은 무리들이 존재해 왔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2월 25일

 

수년 전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W. D. 프레이지 목사는 ‘승자와 패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삶을 간추리면서 각자에 대해 ‘그는 승자인가 아니면 패자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예를 들어 그는 광야에서 외롭게 살았던 침례 요한을 살펴보았다. 나중에는 추종자를 두었지만, 그렇다고 수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나중에 나타난 예수님을 추종하는 무리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축축한 감옥에서 보냈으며 종종 의심에 시달렸고 급기야 참수되었다(마 14장). 이런 사실들을 언급한 뒤에 프레이지 목사는 침례 요한이 승자인지 패자인지 물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어떠한가? 그의 삶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 그는 고생을 많이 했고, 그런 사실에 대해 주저 없이 불평하며 신음했다. 거의 예외 없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왕뿐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마저도 그가 전해야 했던 기별을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것에 대단히 분개했다. 그는 자기 민족들의 눈에 반역자로 비쳐졌다. 백성들이 그의 말을 지속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마침내 그가 삶을 바쳐 경고했던 멸망과 죽음이 이르렀다. 그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고 그의 민족이 포로가 되어 처참하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인간의 관점에서 예레미야의 삶은 그다지 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매우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승자입니까? 아니면 패자입니까? 그대의 대답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만약 승자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세상의 기준으로 실재를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옳고 그름, 선과 악, 성공과 실패를 판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기준을 사용해야 합니까?

※ 영생을 얻은 자가 승자이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 뜻 안에서 충성하다가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은 그냥 잠시 쉬는 것일 뿐이다. 

 

➋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은 어떤 방식으로 예레미야의 삶과 사역 속에 표상되었습니까? 둘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기별을 전하여 백성을 하나님 뜻대로 존재하게 하려고 하다가 고통당하고 처참하게 죽은 것이다. 

 

➌ 우리는 이번 주에 심령의 변화가 없는 종교 의식의 거짓을 살펴보았습니다. 예레미야가 경고하는 값싸고, 가치 없고 심지어 기만적인 은혜와 달리 참된 은혜는 어떤 것입니까?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생명을 얻고 그 생명작용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댓글목록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김명호 목사님, 일년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은퇴하신 이후에도 바쁜 일정이 많지만 빠지지 않고 교과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 주셔서 교사와 학생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새해도 주님 안에서 강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한용님의 댓글

이한용 작성일

목사님 지난 일년동안 감사드립니다.
어떤때는 너무 늦게 오려서 마음 조리게 하시기도 하셨지만 늘 해박한 신학적인 눈높이로 부가설명을 잘
이해하도록 도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행복 하시고 늘 건강 하세요. 이한용 드림

김명한님의 댓글

김명한 작성일

우연히 들렀다가 처음엔 그냥 주마간산으로 읽다가 점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새해에도 늘 목사님의 가정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최성현님의 댓글

최성현 작성일

목사님의 영감넘치는 '부가설명'과 일일히 다 적어 놓으신 성경구절 및 해답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새해 더욱 영육간 건강하시며 더 크신 은혜 받으셔서 더 영감넘치는 설명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김명호님의 댓글

김명호 작성일

댓글 주신분들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진리 안에서 복된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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