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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책망과 보복(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0/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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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5-10-13 09:57 조회9,00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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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44분

 

기억절 :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렘 17:14).

 

연구 범위  : 렘 17:5~10, 렘 17:1~4, 요 3:19, 렘 11:18~23, 렘 12:1~6, 렘 14:1~16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자들에게 경고와 책망의 기별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선지자들의 생애와 사명에 관해서라면 특별히 더 맞는 말씀이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의 말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할 영적 지도자들로부터 종종 격렬한 반대, 심지어 보복을 당해야 했다. 예수님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23:29~30)고 하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예레미야의 고난을 살펴볼 것이다. 그의 사역은 책망과 보복으로 얼룩졌다. 그가 책망하면 지도자들은 그에게 보복하였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인류의 마음에 침투한 죄의 무게와 그것이 사회에 미친 영향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기별을 전하기 위한 예레미야의 노력과 그가 경험한 저항을 이해한다.

➌ 행하기 : 모든 형태의 죄를 혐오하며 주님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기로 결심한다.

 

A. 

❷ 사람을 믿는 자에게 저주가 있겠다는 렘 17:5의 말씀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  이 구절에는 사람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히브리어가 세 개 등장한다. 순서대로 살펴보면, 맨 처음 '사람'으로 번역된 '아담'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인간을 뜻하며, '혈육'으로 번역된 '바사르'는 범죄로 육체뿐인 사람을 나타낸다.(시78:39) 그리고 마지막의 '사람'에 해당하는 '게베르'는 '강한 자', '용사'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여호와를 떠난 그 사람이 바로 게베르인데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는 존재를 뜻하는 표현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사람을 의지할 때에 사망의 환난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❸ 렘 17:1과 렘 14:1~10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부패했습니까?

※ 금강석 끝 철필로 단 뿔에 기록되었고 결과를 안타까워하면서 원인을 도외시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❹ 그대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기 위해 내려놓아야 할 세상의 수단은 무엇일까요?

※ 각자가 대답해보자.

 

B. 

❷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을 위해 사역했지만 어떤 고초를 당해야 했습니까?

※ 사망을 당할 고통에 직면했다.

❸ 예레미야의 삶은 어떤 면에서 예수님을 예표 한다고 생각합니까?

※ 하나님의 뜻을 전하다가 고통당하는 것이 그렇다. 

❹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받을 때에 우리는 그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이 세상이 죄와 사단이 주관하는 세상임을 알면 문제를 이해하게 된다. 

 

결론 : 죄는 우리 삶의 각 부분에 침투합니다. 예레미야는 그가 전하는 기별 때문에 목숨이 위협을 받을 때 그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그는 믿음에 대한 그의 갈등을 표현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말과 함께 경주할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을 주셨습니다.

 

 

첫째날(일) 두 갈래의 길

10월 18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우리에게 삶의 방식에 관해 단 두 가지의 선택 사항만을 제시한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따르든지 아니면 그렇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23)고 말씀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곤란해 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또는 상식보다 영적 실재에 대해 훨씬 명확한 진술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대쟁투에 관한 주제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전혀 새롭거나 극단적인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랬다.

 

1. 렘 17:5~10을 읽어 보라. 특히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대쟁투에 비춰볼 때에 우리가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영적 원칙들은 무엇인가?

[렘17:5~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답: 여호와를 떠나는 사람은 환난을 당하고 여호와를 의지하고 의뢰하는 사람은 형통하다.

 

이 말씀의 직접적인 배경은 아마도 유다의 정치적인 관계들을 반영하는 듯이 보인다. 하나님은 그들의 유일한 도움이 정치나 군사 강국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그들이 깨닫기를 바라셨다. 후에 그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비록 하나님도 우리를 돕기 위해 다른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지만 결국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동기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만큼은 언제나 알 수 있다.

렘 17:9은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인간의 마음에 내재해 있는 거짓에 대해 경고한다.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기만적이다. 죄가 가져온 물리적인 영향은 참담하지만 도덕적, 영적인 영향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문제는 우리 마음이 이미 거짓되기 때문에 죄의 영향들이 정말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예레미야는 인간의 의도가 얼마나 악한지 곧 직접 목격할 것이었다.

 

<부가설명> 예레미야 17:9은 유명한 기억절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사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그들이 다 썩어질 씨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패하는 것은 도리가 없다. 사도 베드로는 거듭나지 않는 사람들은 다 썩어질 씨로 났다고 계시한 것을 기록했다.(벧전1:23) 이렇게 된 것은 시조가 뱀, 곧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그리스도를 떠났기 때문이다.(고후11:3) 선악과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는 행위였다. 그리스도가 생명이기 때문에 그분을 떠나면 생명을 잃고 썩게(부패)된다. 그래서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은 다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자가 되었고(롬8:21)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 되었다.(엡4:22) 그래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존재가 된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이 부패가 극도에 달하고 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상이 교육과 도덕과 종교로 방부제를 치려고 하지만 근본이 부패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육도 도덕도 종교도 그 자체가 부패하고 있다. 누가 말리겠는가. 진정을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여 거듭날 때만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부패가 재림교회 안에도 스며들고 있으니 염려가 태산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진정으로 마땅히 거듭난 사람이어야 한다.

 

교훈 :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은 가장 믿지 못할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한다.

 

 

둘째날(월) 유다의 죄

10월 19일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

늘”(렘 17:1).

 

필히 예레미야의 임무는 녹록치 않을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일에서 왜곡된 쾌락을 얻을지 모르나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런 일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특히 그들이 전하는 말이 유발하는 반응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그 책망이 매우 정곡을 찌르는 강렬한 인상을 줄 때 일부는 회개하거나 개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사실 다른 모든 선지자들처럼 예레미야의 기별도 정곡을 찌르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1. 예레미야 17:1~4을 읽어 보라.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어떤 경고의 기별을 주었는가? 

[렘17:1~4]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2 그들의 자녀가 높은 메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3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지경의 죄로 인하여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4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대적을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로 맹렬케 하여 영영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니라.

 

답: 유다의 죄가 금강석 끝 철필로 그들의 마음 판과 단 뿔에 새겨졌다고 경고했다. 결과로 그들이 대적에게 굴복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죄의 형상은 특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타락의 깊이를 보여준다. 죄는 그냥 연필 같은 것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도구를 사용한 것처럼 우리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다. 이런 교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의 조상들에게 주신 다음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훨씬 강력해진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30:9~10; 시 40:8, 렘 31:33과 비교해 보라). 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에 순종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죄악 즉 불법(요일 3:4)이 그들의 마음에 새겨졌다.

“어느 누구도 계명에 대하여 표면상으로 나타내는 경의가 그들을 하나님의 공의의 처벌에서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악에 대하여 책망 받기를 거절하지 말며 행악의 마당을 청소하기에 너무나 열심이라고 하나님의 종들을 비난하지 말라.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지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불의에서 떠나기를 요청하신다”(선지자와 왕, 416).

 

<부가설명> 우리가 성경이 계시하는 죄와 구원과 심판에 대한 성경적 시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일반적 도덕적 사고방식이 모든 의식을 주관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죄와 구원과 심판을 도덕적 시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시각으로 성경을 읽으면 진정으로 성경이 계시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도덕적 선악을 가르치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게 한 사단이 하는 핵심 사업이다. 사단이 먹도록 유혹한 나무 이름이 선악과이다. 그 과실을 먹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떠나서 근본적으로 부패하는 존재가 되었는데 부패를 방지하려고 도덕적 선악을 강조하고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면 부패가 멈추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속이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속임수이다. 그런데 성경으로만 진리를 깨닫는다고 주장하는 재림교회에서도 성경이 가르치는 생명과 사망에 대한 것이 아니고 도덕적 선악을 중심으로 죄와 구원과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 시각은 도덕적 선악이 아니고 생명과 사망에 대한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고 인간이 왜 그렇게 부패한지 이유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굳이 거듭남이 필요 없다. 도덕적 수양과 노력으로 선을 쌓으면 될 것이다. 

 

교훈 :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율법에 자원하여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죄의 영향이 더 깊게 새겨져 있었다.

 

 

셋째날(화) 예레미야에게 주신 경고

10월 20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예레미야의 이야기가 더 안타까운 이유는 그가 겪는 반대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구원하려는 자들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곧 불어 닥칠 재난에서 그들을 구하기 원하셨다. 그러나 문제는 백성들이 들어야 할 말씀을 듣기 싫어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악하고 타락한 욕망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1. 렘 11:18~23을 읽어 보라.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 비유들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렘11:18~23]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9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정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22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23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답: 예레미야를 어린양같이 죽이려고 했고 산 자의 땅에서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아나돗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예수님을 대하는 세상과 그렇게 하는 세상에 재앙이 임할 것에 대한 예표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한 자들은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가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했다는 어떤 암시도 없다. 대신 그들은 선지자가 침묵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선지자가 꼭 해야 할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성경 본문은 그들이 어떻게 선지자를 죽이고자 음모를 꾸몄는지 말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학자들은 아나돗 사람들이 음독 살해를 고려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아나돗은 예레미야의 고향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의 기별을 거절하고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초에 불과했다. 예레미야는 훨씬 광범위하게 유다 민족의 ‘남은 무리’를 제외한 모두에게 거부를 당할 것이었다.

물론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19절)을 포함한 모든 비유는 예수님의 희생을 상기시킨다. 동물 희생과 같은 표상은 아니였지만 어떤 의미에서 예레미야도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그도 예수님처럼 도와주려는 대상으로부터 거센 반대를 당했다. 예레미야의 생애에 펼쳐진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이 초기 사역에서 경험하셔야 했던 일들을 또렷이 떠올리게 한다(눅 4:14~30).

 

<부가설명> 19절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는 표현은 이사야서의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53:8)라는 말과 연결이 된다. 이렇게 연결시켜 볼 때에 예레미야에게 당한 일들이 예수님에게 행할 일들의 예표적 사건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 아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모든 기록들은 부분적으로 구주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세사에 오셨을 때에 당하실 경험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는 아담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인류가 예수 안에서 살아나라고 간절히 권고하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 산 자의 땅에서 끊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셔서 모든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구주가 되셨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 안에서 이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산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예레미야는 자기 고향 사람들을 포함하여 동족에게 거부를 당하고 어린 양처럼 희생을 당하신 예수님을 예표하였다.

 

 

넷째날(수) 애가

10월 21일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19).

 

예레미야서의 초반부에 하나님은 그분의 종에게 선지자의 사역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다. 부름을 받을 때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 왕자, 제사장 그리고 백성들이 그를 칠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다(렘 1:19). 여호와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그의 반대자들이 그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지만(렘 1:19) 대부분의 백성이 자신을 대적하여 싸울 것이라는 소식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아직 실체의 반도 알지 못했다. 실제로 환난이 닥쳤을 때 분노하고 마음 아파한 것은 당연했다.

 

1. 비록 예레미야가 자신의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렘 12:1~4에서 선지자는 어떤 우주적인 문제로 씨름하고 있었는가? 자신을 해하는 자들을 대하는 선지자의 태도는 어떠한가? 이 말씀은 가장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도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주는가?

[렘12:1~4]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하옵소서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답: 악인이 형통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항의하고 그들을 형벌하라고 호소한다. 이것은 세상에 사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아직은 사람 중에 하나로 연약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렘 12:1은 구약의 법적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의’, ‘변론하다’, ‘정의’는 모두 법적인 상황에서 등장한다.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 몹시 화가 난 선지자는 하나님께 소송사건을 가지고 온다(신 25:1 참고). 물론 그의 불평은 평범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자신은 그 같은 환난을 당하는데 악한 자들이 형통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도 예레미야가 보인 연약성을 안다. 그는 자신에게 악을 행한 자들이 징벌을 받기 원한다. 여기서 그는 신학자처럼 말하지 않고 단지 은혜를 필요로 하는 한 명의 타락한 인간처럼 말한다. 그는 욥과 여러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처럼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반역한 백성에게 진리를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가 자기 고향 사람의 반역적인 계략에 왜 굴복해야 한단 말인가?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러나 그는 왜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임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세상은 사망의 음침한 땅이다. 죽은 자의 땅이다. 온 세상이 이런 환경이기 때문에 산 자가 살아가기에 두렵고 불편한 것이다. 시체가 가득한 환경에 산 사람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 또 얼마나 무서울 것인가. 에스겔은 이런 세상을 해골 골짜기 환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해골들에게 살아나라고 명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했을 때에 해골들이 살아나서 산 존재가 되었다. 예레미야는 해골 같은 유다 백성들에게 힘을 다해 외쳤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였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사망이 그분을 붙들어 두지 못했다. 부활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시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셨다.(딤후1:10) 우리도 이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고난을 당해서 때로 그들에게 벌하라고 호소하는 마음이 생길지라도 전해야 한다. 

 

교훈 : 미리 경고를 받았지만 실제로 그가 당한 반대와 어려움 때문에 예레미야는 왜 악인은 형통하며 자신은 고초를 겪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었다.

 

 

다섯째날(목) 절망적인 상황

10월 22일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렘 14:3).

 

1. 렘 14:1~10을 읽어 보라.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렘14:1~10]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곤비하여 땅에 앉아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에 오르도다 3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며 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 머리를 가리는도다 5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어 버리며 6 들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시랑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아득하여 하는도다 7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같이 하시나이까 9 어찌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

 

답: 가뭄이 온 땅에 임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가뭄이 온 땅을 덮었다. 모든 도성과 마을과 촌락이 고통을 겪었다. 고통을 겪기는 부자나 가난한 자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야생짐승도 물 부족을 견디지 못했다. 귀족들은 하인들이 물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성문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샘들은 이미 말라버렸다. 물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비참한 상황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백성들은 상복을 입고 다녔으며 눈은 맥이 풀렸다. 그때 그들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간절히 부르짖고자 했다.

그와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금식하고 하나님께 특별한 제물을 바치는 것이 관습이었다(욜 1:13~14, 2:15~17).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절실함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구하는 것은 여호와가 아니라 물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현실은 선지자를 더욱 슬프게 했다. 예레미야도 기도했지만 물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임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예레미야는 이것이 다가올 환난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심령을 보시고 그분이 가뭄을 제하여 주시면 회개의 정신도 사라지리라는 것을 아셨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베옷을 입고 기도하고 금식하며 제물을 바치는 등 상황을 바꾸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 가지 즉 진정한 회개와 회심은 잊고 있었다. 그들은 문제의 본질인 그들의 죄와 불순종이 아닌 오직 문제의 결과를 제거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예레미야가 먼저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렘 14:7) 하며 위대한 중보 기도의 예를 제시했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 경우에 시작과 끝을 아시는 하나님은 백성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예레미야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고 미래도 아신다.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심지어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신약성경의 훈계는 여기서 전혀 효력을 상실하지 않는다.

 

2. 렘 14:11~16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렘14:11~16]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12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13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15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16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인하여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입을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 아내와 그 아들과 그 딸도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

 

답: 이것은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의 기간을 다 거절한 결과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부가설명> 성경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적 심판과 형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요즘 매일의 양식도 재림 직전에 있을 악인에 대한 환난과 형벌에 대한 사건을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정말 작위적(作爲的) 형벌을 하시는 것인가? 성경 여러 곳에 그런 표현이 있다. 그러나 또 부작위적(不作爲的) 형벌에 대한 기록도 있다. 부작위적이라는 말은 직접 형벌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19)고 말씀하셨다. 즉 사람이 여호와를 버리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것이 악이요 그것이 고통이라고 하신 것이다. 악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것이며 그 결과가 고통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가하시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을 때 그것 자체가 고통이 된다는 것이다. 호세아는 “혹 저희가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저희를 떠나는 때에는 저희에게 화가 미치리로다.”(호9:12) 여호와께서 그들을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화가 되는 것이라고 계시하였다. 이런 사실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때 여호와께서 악인들에게 형벌을 가하시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애가에서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하시며 살륙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애3:43)고 하여 하나님의 진노는 자신을 숨기시는 것이라고 계시하였다. 모세도 “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신31:17,18)고 분명히 기록하였다. 형벌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숨기는 것이다. 결과 형벌이 임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형벌과 심판에 대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잘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반생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 

 

교훈 : 가뭄을 겪은 백성들은 금식하며 기도했지만 그들이 진정 찾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물이었고 그들의 죄와 불순종에 대한 진심어린 회개는 없었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0월 23일

 

예레미야는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로 씨름하였다. 우리는 악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 심지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일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죄의 시작은 그 존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다.…죄는 하나의 무단 침입자이다. 그것이 나타나게 된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죄는 오묘한 것이며,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다. 만일 죄의 원인과 그 존재 이유를 밝힐 수 있으면 죄는 죄가 될 수 없다”(각 시대의 대쟁투, 492~493). 죄를 악으로 대치해도 된다. ‘악의 시작은 그 존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다.… 악은 하나의 무단 침입자이다. 그것이 나타나게 된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악은 오묘한 것이며,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다. 만일 악의 원인과 그 존재 이유를 밝힐 수 있으면 악은 악이 될 수 없다.’

비극이 닥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해할 수가 없고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당연히 우리는 그것을 모를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어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계획에 적합하다면 그것은 그렇게 악한 것이 아니다. 합리적인 목적을 제공하는 것은 그다지 비극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죄악이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죄가 야기한 불가해한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보여주는 십자가가 있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죄와 고통은 이해할 수 없고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개념에 대해 더 숙고해 보십시오. 그것이 더 나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뭔가 끔찍한 비극이 닥쳤다고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어떤 어린 아이가 몇 년 동안 불치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합시다. 정말 우리는 여기에 어떤 적절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믿기를 바랍니까? 그냥 그것을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당할 수 있는 끔찍한 죄악의 결과라고 여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토론해 보십시오.

※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애쓰지 말고 결과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이 옳다. 하나님께서 죄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십자가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발생한 이유를 모를 뿐이지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발생한 이유를 모르실 리가 없다. 그것을 우리가 굳이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계시하지 않으셨을 뿐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그것을 해결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치를 오해하지 말자.

댓글목록

김현식님의 댓글

김현식 작성일

항상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상세한 설명으로 부족한 이해를 도우시니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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