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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유다의 마지막 다섯 왕(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0/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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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5-10-09 15:39 조회10,2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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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53분

 

기억절 :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2:16).

 

연구 범위 : 대하 34장, 렘 22:1~19, 렘 29:1~14, 대하 36:11~14, 렘 23:2~8

 

저명한 러시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1800년대에 반체제 활동으로 인하여 4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후에 그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면서 과거의 끔찍한 행위를 전혀 후회하지 않는 죄수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몇 년이 지나도 나는 그들에게서 회개의 징후를 전혀 보지 못했다. 자신들의 범죄를 곱십으며 의기소침해지는 기미가 전혀 없을 뿐더러 그들 대부분은 속으로 자신을 절대적으로 옳게 여겼다.”―Joseph Frank, Dostoevsky, the Years of Ordeal, 1850-1859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p. 95.

도스토옙스키의 말은 요시야 왕을 제외한, 예레미야 시대에 유다를 통치했던 다섯 왕들에게도 적용된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에게 경고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재앙을 불러온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짐에도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이스라엘에 왕을 두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번 주 교과를 통해 그 이유를 더욱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환영 받지 못하는 사역을 펼치는 동안 예레미야가 겪은 극도의 압박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유다의 마지막 왕들이 자초한 비극적인 역사를 살펴본다.

➋ 느끼기 : 왕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을 때 선지자가 느낀 좌절감을 이해한다.

➌ 행하기 :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남은 백성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A. 

❷ 요시야 왕이 선한 왕으로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고 나라를 그렇게 개형했기 때문이다. 

❸ 요시야 이후에 유다 왕조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인 멸망에 이르렀습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백성들을 그릇되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❹ 멸망 직전의 유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개인이나 교회가 기록된 말씀을 바르게 듣고 깨닫고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B. 

❷ 요시야 왕은 직전 선조들의 악한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습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라 안에 모든 우상적 요소들을 다 타파하고 말씀대로 충실히 살 것을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❸ 하나님이 유다 왕조의 마지막 역사에서 보여주신 자비와 소망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남은 자를 두실 것과 그들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나타나고 회복될 것을 보여주셨다. 

❹ 마지막 남은 백성으로 우리가 마음에 간직해야 할 ‘미래와 희망’은 무엇입니까?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안과 구원의 확신으로 재림의 소망을 간직하는 것이다. 

 

결론 : 유다의 마지막 선한 왕 요시야와 최후의 악한 왕 4인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원전 587/586년 예루살렘은 정치적인 술책, 우상숭배 그리고 사회적인 불의로 인해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종말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소망의 기별이 됩니다.

 

 

첫째날(일) 요시야 왕의 치세에서

10월 11일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대하 34:33).

 

요시야는 기원전 640~609년에 남방 유다를 다스린 16번째 왕이다. 그의 조부 므낫세와 부친 아몬은 유다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다. 약 반 세기 동안 도덕적, 영적 쇠퇴를 초래한 그들의 통치가 끝나고 8세의 요시야가 왕좌에 올랐다. 그의 치세는 31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을지라도 그의 선조들과 다르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왕하 22:2)였다.

“요시야는 악한 왕의 자녀로 태어나서 그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는 유혹에 싸여 있었을 뿐 아니라 그를 바른길로 가도록 격려해 주는 모사(謀士)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지난 세대의 잘못을 통해서 경고를 받은 그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빠졌던 죄악과 타락의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는 대신에 의를 행하기로 선택하였다. 그는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그는 중책을 맡은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주셨던 교훈을 순종하기로 결심하였고 그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그를 당신께 영광을 돌릴 그릇으로 사용하실 수 있게 하였다”(선지자와 왕, 384).

 

1. 대하 34장을 읽어 보라. 요시야의 개혁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이었는가? 집단이든 개인이든 영적 개혁을 일으키려는 시도에 그 요소들이 중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34장은 33절까지 있다. 독자들이 성경을 찾아 읽어 보기 바란다.]

 

답: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수리 중에 발견한 율법책을 읽고 그 책의 내용을 따라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서약하고 백성들을 그렇게 인도하였다. 교과 저자가 제시한 두 가지 요소는 첫째 우상의 기미가 있는 것은 샅샅이 다 찾아 제거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도록 하나님과 언약하고 백성들을 그렇게 살도록 격려하고 인도하는 것이었다. 

 

요시야의 개혁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그것은 우상숭배의 기미가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최대한 제거하는 것이다. 즉 그는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악한 행습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첫걸음에 불과했다. 악하고 그릇된 행습이 사라진다고 저절로 좋은 일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둘째, 율법책을 발견한 후에 왕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대하 34:31)고 하며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부가설명> 요시야는 뜻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이다. 이사야와 같은 뜻이다. 요시야가 일어나서 개혁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300여 년 전에 보시고 예언하셨다.(왕상 13:2) 하나님께서 예언했기 때문에 요시야가 개혁한 것이 아니고 요시야가 그때 왕이 되어 개혁하는 것을 미리 보시는 하나님께서 예언하게 하신 것이다.(사46:10) 과연 요시야는 비록 8세에 왕이 되었지만 성전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기로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 일을 추진하고 성취하여 나아갔다. 그 이름의 뜻대로 그의 통치 시대에 여호와께서 유다를 구원하셨다. 이때 요시야가 읽은 율법책을 학자들은 신명기라고 생각한다. 신명기는 출애굽기부터 민수기까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의 내용을 다시 이스라엘에게 상기시키는 모세의 설교이다. 신명기(申命記)의 申은 다시 申자이기도 하다. 다시 명령한다는 뜻이다. 요시야는 이 명령을 따르기로 하나님께 마음을 바쳤다. 

 

교훈 : 요시야는 직전의 악한 선조들과 달리 유다 나라에서 우상숭배의 요소들을 제거하고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는 왕이 되었다.

 

 

둘째날(월)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

10월 12일

 

“여러 민족들이 이 성읍으로 지나가며 서로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읍에 이같이 행함은 어찌 됨인고 하겠고 그들이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까닭이라 하셨다 할지니라”(렘 22:8~9).

 

여호아하스(또는 살룸)가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좌에 올랐을 때의 나이는 23세였다. 그의 통치 기간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애굽의 정치를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는 대신 여호아하스의 형제를 왕으로 세웠다.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끌려가 거기서 죽었다(대하 36:4, 왕하 23:31~34 참고).

여호아하스를 이어 왕이 된 여호야김은 기원전 609년부터 598년까지 유다를 통치했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 그는 성전의 기명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예레미야는 새로운 왕이 나라를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고 백성들에게 경고했다.

 

1. 렘 22:1~19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여호야김의 어떤 문제들 때문에 그같이 신랄하게 책망하셨는가?

[렘22:1~19]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서 이를 선언하여 2 이르기를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4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마는 5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6 나 여호와가 유다 왕의 집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꼭대기 같으나 내가 정녕히 너로 광야와 거민이 없는 성을 만들 것이라 7 내가 너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그들이 각기 손에 병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 8 여러 나라 사람이 이 성으로 지나며 피차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에 이같이 행함은 어찜인고 하겠고 9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라 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10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서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니라 11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 아비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 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가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2 잡혀간 곳에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15 네가 백향목으로 집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17 그러나 네 눈과 마음은 탐람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강포를 행하려 할 뿐이니라 18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19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지우고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20 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니라.

 

답: 여호야김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망해가는 나라에서 자기를 위하여 새 궁전을 짓게 했다. 그는 백성들의 안위에 대하여 무관심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부패하고 욕심 많은 이 통치자에게 매우 날카로운 말씀을 전하셨다. 여호야김은 애굽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유다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는 강압적이고 탐욕스러운 군주였다(왕하 23:35). 설상가상으로 그는 노동의 대가에 대하여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레 19:13)라고 명한 율법을 무시하고 강제 노역을 동원하여 호화스러운 궁전을 건축했다. 또한 그의 부친과 달리 이방 종교 의식이 유다에 성행하도록 허용했다.

렘 22:16은 강력한 기별을 전한다. 하나님은 여호야김과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비교하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렘 22:16).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곤궁한 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며, 우리가 자아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갚을 수 없는 자들을 돕기 위해 나아갈 때에 이르러 온다.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뿐 아니라 가난하고 가련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보게 된다.

 

<부가설명> 여호야김은 자기만 먹이는 목자였다. 요시야가 선한 정치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을 행하기로 굴복했는데 그 아들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이기심에 노예가 되어서 권력을 잡았을 때 자기 사치와 안위에 빠졌다. 올바른 지도자는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지도력과 감화가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치는지 요시야와 그 자녀 손들의 모습에서 역력히 보여준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의 사적에서 바른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평신도 지도자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지도자 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의 행적에서 바른 교훈을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예언적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후대의 교훈을 위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고전10:11, 롬15:4)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의 생활과 성품과 사건의 상태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서 있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요시야처럼 될 것인가? 여호야김처럼 될 것인가?

 

교훈 : 요시야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가난한 자들을 변호했지만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백성을 억압하며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왕이었다.

 

 

셋째날(화) 여호야긴의 짧은 통치

10월 13일

 

“그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왕하 24:15).

 

유다의 19대 왕은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었다. 그는 다윗의 보좌에서 겨우 3개월 반 동안 유다를 통치했다. 기원전 598년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18세의 왕과 왕모, 왕비들과 여러 왕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포로 생활 37년째인 기원전 561년에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의 후계자 에윌므로닥에 의해 사면되었다. 그는 바벨론 왕의 식탁에서 먹고 자신의 왕복을 입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왕하 25:27~30, 렘 52:31~34 참고). 그의 아들들도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었는데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르면 그들은 다윗의 보좌를 포기하게 될 것이었다.

 

1. 렘 29:1~14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여호야긴과 그의 가족이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간 뒤에 예레미야를 통해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이러한 비극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어떻게 드러났는가?

[렘29:1~14]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겨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벡성에게 보내었는데 2 때는 여고니야 왕과 국모와 환관들과 및 유다와 예루살렘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3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의 손에 위탁하였더라 일렀으되 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 선지자들에게와 복술에게 혹하지 말며 너희가 꾼 바 꿈도 신청하지 말라 9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답: 편지를 보내어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지속된 것인지 말씀하시면서 그곳에서 일단은 안정된 생활을 하라고 하셨고, 70년이 차면 그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아울러 하나님의 생각은 그들을 향한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성경절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이 말씀에는 배경이 있다. 그것은 바벨론의 정복자에 의하여 완전히 삶을 유린당한 유다의 포로들에게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상황이 아무리 비참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그들의 유익만을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기를 바라셨다. 물론 참혹한 상황을 고려해보면 그들은 그러한 약속과 희망의 말씀을 환영했을 것이다. 엄청난 경고와 위협 중에도 백성들에게 여전히 ‘미래와 소망’의 약속이 주어졌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그러한 약속과 보증을 품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했겠는가?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가 되게 하신 것은 형벌과 고통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이 평안할 때에 배우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복하는 것을 고통 중에라도 배우게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안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살 때에 고통으로 인하여 영원한 소망이 확실해 진다면 그 고통은 복이 되지 않겠는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당하면서도 이것을 배우지 못하면 그 고난은 참으로 형벌의 고난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시인처럼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이 된다면 그 고난은 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평안한 중에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이방에 전하는 사명을 저버렸을 때 고난의 포로 생활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방에 전하게 하셨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그 일을 잘 수행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났고 에스더 모르드개 등으로 또 이방에 하나님을 드러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연구하고 깨닫는 자들에게는 이런 복이 이를 것이다. 

 

교훈 : 여호야긴은 짧은 통치 후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포로로 끌려가는 백성들에게 소망의 보증을 주셨다.

 

 

넷째날(수) 막다른 길의 끝

10월 14일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대하 36:11).

 

1. 대하 36:11~1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최종적인 몰락 직전의 유다의 마지막 왕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되는가? 이 말씀은 배교에 대하여 어떤 영적 원칙들을 제시하는가?

[대하36:11~14] 시드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을 치리하며 12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의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였으며 13 느부갓네살 왕이 저로 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케 하였으나 저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강퍅케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14 제사장의 어른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그 전을 더럽게 하였으며.

 

답: 그는 선지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느부갓네살과 맺은 언약도 배반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언약은 지켜야 하는 것임을 가르친다. 이것을 배반하는 것이 바로 배도이다.

 

시드기야(또는 맛다니야)는 21세에 왕좌에 올랐다. 느부갓네살은 그를 꼭두각시 왕으로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이전 왕들에게 일어난 일들로부터 많은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그 나라에 더 큰 파멸을 가져왔다.

대하 36:14은 여러모로 배도의 중심을 관통하는 매우 심오한 사실을 진술한다. 시드기야의 통치하에서 행해지는 죄악의 목록을 보면 유다는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따라”(대하 36:14) 행한다고 했다.

 

2. 그들은 출애굽하여 열방의 빛과 등대가 되어야 할 언약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고(신 4:5~8) 수백 년 동안 그곳에 거주했지만 아직도 주변 국가의 문화와 종교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이방의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답: 오늘날 사회문화와 기독교의 일반적인 문화가 재림교회를 물들이고 있는지 잘 살피고 올바른 길로 가도록 거듭거듭 주의를 기우려야 할 것이다. 

 

3. 렘 38:14~18을 읽어 보라. 왕은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물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렘38:14~18] 시드기야 왕이 보내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집 제 삼문으로 데려오게 하고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한 일을 물으리니 일호도 내게 숨기지 말라 15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왕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이 단정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16 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고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붙이지도 아니하리라 17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입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18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답: 예레미야의 대답에 미루어보면 왕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님의 뜻인가를 물었던 것 같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 권고를 듣지 않았다. 

 

하나님은 유다가 바벨론의 통치에 굴복해야 하며 이는 그들의 죄악에 대한 형벌임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기 거부하고 느부갓네살과 맞서기 위한 군사 동맹을 결성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군사적 승리에 많은 것을 걸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기원전 597년 바로의 군대를 무찔렀다. 이 패배로 예루살렘과 유다의 운명이 확정되었다. 회개와 개혁과 부흥의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유다는 그 모든 기회를 거절했다.

 

<부가설명> 사람은 때때로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기의 생각과 욕망을 실현하려고 한다. 시드기야가 예레미야를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물은 것은 자기의 생각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때 나라의 상태는 대단히 위기였을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곧 들이닥칠 찰라 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왕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계획에 맞추기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우리는 이런 사실에 빠지고 있지 않는지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시드기야는 자기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이때까지 순종하지 않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예레미야를 비밀히 불러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왕이 충분히 알 수 있도록 기별을 자세하고도 확실하게 전해 주셨다. 그러나 왕은 한 번도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예레미야를 가두고 핍박했다. 이때도 여전히 그는 선지자의 말을 따르지 못했다. 묵상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그는 자신과 주위의 상황을 극복하지 못했다. 

 

교훈 : 시드기야는 회개와 개혁의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별을 무시하고 바벨론에 대항하다가 유다의 파멸을 불러왔다.

 

 

다섯째날(목) 암흑의 세월

10월 15일

 

1. 하나님의 기별을 거절한 후에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어떻게 됐는가?(렘 39:8~9) 

[렘39:8,9] 갈대아인들이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고 9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바벨론으로 잡아 옮겼으며.

 

답: 예루살렘은 불탔고 왕은 사로잡혀갔으며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일어나리라고 경고하신 모든 일이 정확히 일어났다. 그 경고를 제아무리 믿고 싶지 않을지라도 모든 일이 닥친 후에는 그들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행하지 말라’ 또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경고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고집하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신 일이 일어난다.

 

2. 렘 23:2~8이 주는 기별은 무엇인가? 백성들은 여기서 어떤 소망을 얻었는가?

[렘23:2~8]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8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방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거하리라 하시니라.

 

답: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며 다윗의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릴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나라는 폐허로 변했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그들의 통치자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예루살렘 도성은 돌무더기가 되었다. 그들과 같은 경험을 했던 수많은 나라들이 그러했듯이 유다 국가와 민족은 역사에서 사라져야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들이 있어서 그들의 귀환을 통해 언약이 성취되리라는 소망을 주셨다. 죽음과 파멸의 경고 중에도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마지막 소망을 주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전하는 예언의 말씀 중에 격려가 없었다면 유다 왕국의 종말을 고하는 파멸과 죽음의 어두운 세월 동안에 가장 심지가 굳은 사람들까지도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 궁정에서는 다니엘을 통하여, 그발 강가에서는 에스겔을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은혜롭게도 당신의 영원한 목적을 밝히시고 모세의 책에 기록된 약속들을 당신의 택하신 백성에게 성취시키기를 기뻐하신다는 보증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하신 바를 당신께 충성할 자들을 위하여 행하실 것이며 분명히 성취시키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 살아 있고 항상 있’(벧전 1:23)느니라”(선지자와 왕, 464).

 

<부가설명> 유대인이 이 지상에 생존하고 나라가 유지된다는 것은 역사적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소수만족이 강대국에게 망한 후에 그 민족과 나라가 존속한 예가 얼마나 있는가? 더구나 자기 나라의 땅에서 멀리 옮겨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북방 이스라엘 10 지파는 사실상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남방 유다 왕국 사람들은 수 천 년 흩어져 이방에 떠돌아다녔는데도 지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그 민족이 살아 있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에서 성취된 좋은 예가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셨다. 메시아가 와서 인류를 구원하는 그 일이 성취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과 야곱고 유다의 후손을 역사에서 보존하신 것이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메시아 예수께서는 예언한 대로 여자의 씨로 세상에 탄생하시고 태초에 예언한 그 구원의 약속을 이루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셔서 이제는 영적 이스라엘을 세상에 두셨다. 이들이 세상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옛 이스라엘에게 맡긴 그 사명이 교회 이스라엘에게 맡겨졌다. 특히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에게 맡겨졌다. 우리는 예레미야 당시의 유대 같이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의 경고를 거절한 유다 백성에게 최후의 재난이 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남은 백성에 대한 소망을 주셨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0월 16일

 

“유다의 배도의 말년에 선지자들의 권고는 거의 무용한 것처럼 보였으며 갈대아인 군대가 세 번째로 와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에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 희망은 사라졌다. 예레미야는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였고 그가 항복을 주장한 까닭에 마침내 투옥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 성읍에 남아 있는 충실한 사람들을 아무런 희망 없이 절망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다. 예레미야가 그의 기별을 조롱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감금되어 감시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즐겨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새로운 계시를 그에게 주셨는데

그 계시는 그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교회에 끊임없는 위안의 근원이 되었다”(선지자와 왕, 466).

“하나님께서는 즐겨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구절을 보라. 기꺼이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하려는 하늘의 뜻이 계시되었음을 곰곰이 묵상해 보라. 오직 십자가만이 이런 자발성에 대해 우리에게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우리는 예언의 신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았다.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하려는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해 어떤 다른 통로가 필요하겠는가?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백성들이 다가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렘 42:2). 렘 23:3과 더불어 이 말씀은 예레미야서에 등장하는 ‘남은 무리’의 주제에 대해 어떤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까?

※ 남은 무리는 많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42장의 남은 자손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므로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자들이 되었다.(렘42:20)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한다. 

 

➋ 현재의 관점에서 성경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의 백성의 실수와 잘못과 영적 타락을 깨닫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당시의 상황과 문화 속에서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행하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영적 상태에 대해 얼마나 무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과정에서 십자가가 항상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우리의 영적 삶의 중심에 계속 두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기를 살펴야 하며 예언의 지도를 따라 역사적 시점에 있어야할 그 믿음을 확인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에 항상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하여 우리의 믿음은 인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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