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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온 세상이 들어야 할 기별(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9/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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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5-09-18 17:45 조회7,8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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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6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24분

 

기억절 :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연구 범위 : 행 4:12, 시 87:4~6, 요 10:16, 롬 2:12~16, 요 14:6, 롬 1:18

 

수세기 동안 많은 사람이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계획을 알지 못한 채 죽었다. 지금까지 살았던 대다수의 사람이 구속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알지 못했다. 이는 두 가지 까다로운 질문을 야기한다. 첫째, 심판날에 하나님은 그분을 알지 못했던 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실 것인가? 둘째,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구원의 계획을 모르는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기독교 내의 한 교단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답할 것이다. 반면 어떤 이들은 모든 종교가 동등하게 하나님과 영생으로 가는 데 적합한 안내자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품성을 계시하셨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는 그분의 열망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어떻게 결정을 내리시든지 하늘에서는 이러한 함성이 있을 것이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 15:3).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의 구원은 특정한 집단이나 사회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➋ 느끼기 :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➌ 행하기 :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웃이나 친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단계를 배운다.

 

A. 

❶ 사람들이 기독교를 배타적인 종교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예수를 믿는 것 외에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❷ ‘우리 교회’ 또는 ‘우리 교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구원관에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 우리교회, 우리교리가 아니라 오직 성경 오직 예수 믿음이어야 한다.

❸ 반면 하나님이 종교나 교리와 관계없이 모두를 구원하신다는 주장은 왜 잘못됐습니까?

※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모두를 구원하셨지만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에서 자기를 제외하는 것이다.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❹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만민에게 해당하는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가 접촉할 수 있는 범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B. 

❷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알아야 하는 필수적인 지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님이 유일한 구주라는 진리와 지식이다. 

❸ 우리가 타종교, 타교단의 신자에게 복음을 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그들을 정죄하지 말 것이다. 

❹ 어떻게 하면 우리가 마지막 시대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요?

※ 성경의 진리를 생활하는 것이다. 

 

결론 :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선교에 참여하도록 권유를 받습니다.

 

 

첫째날(일) 천하에 다른 이름이 없음

9월 20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어떤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듣고 긍정적으로 반응한 자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배타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하나님께 반역하는 타락한 인간들의 조직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비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밖에 있다고 믿는다.

심지어 어떤 기독교인들은 더 나아가 기독교 신자일지라도 특정 교단 또는 교리적 체계를 벗어나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과 다른 교리를 가진 교단들은 하나님의 보호 밖에 있는 것이며 천국에 들어갈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302년에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칙령 ‘우남상탐(Unam Sanctam: 하나의 거룩한 교회)’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모든 인간은 반드시 로마 교황에게 복종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했다. 일부 개신교도들도 그들의 교단에 관하여 유사한 것을 가르친다.

 

1. 행 4:12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은 무엇에 관한 말씀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답: 성경구절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을 얻을 길이 없다.

 

이 성경 말씀은 매우 명확하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천하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그것이 스스로 밝히고 있는 구체적인 의미 이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화재가 난 건물 속에 어떤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건물을 탈출하기 전에 그는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었다. 소방관이 바닥에 쓰러진 그를 발견해 업고 밖으로 나온다. 그러면 응급차가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그는 의식을 되찾는다.

이 사람은 누가 자신을 구원했는지 모른 채 구원을 받았다.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이든지 후이든지 그리고 그분의 이름이나 구원의 계획을 들었든지 못 들었든지 구원을 받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부가설명> 교과 저자는 아마도 세상을 화재가 난 건물로 비유하는 것 같다. 별로 나쁜 비유는 아니다. 소방관은 전도자들을 비유하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화제가 난 거물이기보다는 시체들이 쌓여 있는 건물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있는 사람들의 처소라고 생각하고 구원의 도리를 말한다. 사람들이 살아 있는데 그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건물에 불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을 끄는 일과 그 안에 질식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병원에 보내는 일을 같이 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세상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하였고 사망의 땅이라고 하였다.(시23:4, 마4:16) 이 사망의 땅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은 자라고 하였다.(고전15:22) 그러므로 불을 끄고 질식한 사람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고 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구원이고 선교 사업이다. 이 일은 오직 생명이시며 창조주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 피조물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천하 인간의 다른 이로서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불난 건물에서 사람을 데리고 나와 병원에 보내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질식했어도 그에게 생명이 있으니까. 그러나 죽은 시체라면 생명의 주이시며 창조주 외에는 살릴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이 진수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구원받은 사람은 오직 예수님에게 구원받은 것이다. 본인이 알았든지 몰랐든지 그렇다. 본인이 모르고 구원받은 경우, 영원한 나라에서 자기가 거기 있는 이유가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교훈 :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은 기독교 배타주의가 아니라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가 누구신지를 강조한다.

 

 

둘째날(월) 얼마나 많이 알아야 하는가?

9월 21일

 

일요일에 중단했던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구원의 유일한 수단이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구원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의 공로를 적용하실 수 있고 기꺼이 그러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모르고 복음을 접해본 적도 없지만 성령의 감화를 받아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한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제 교과의 ‘영감의 교훈’도 이 같은 사실을 암시한다(욥과 멜기세덱을 생각해 보라).

 

1. 다음의 말씀은 이러한 개념에 대해 어떤 빛을 비추고 있는가?

1) 시 87:4~6 “나는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 시온(거기가 시온이다. 87편 전체를 읽으면 안다.)에서 난 자들이라고 계시하였다. 이것은 예수 모르고 구원받은 사람에 대한 구절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다. 

2) 요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 이 구절도 유명한 구절인데 이 구절도 예수 모르고 구원받은 사람들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 우리는 이스라엘이다. 이방인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3) 행 14: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 이 말씀은 천연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창조주를 알 수 있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지라도 천연계를 통하여 창조주를 깨달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굴복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행 17:26~28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 이 구절도 3)번 구절과 같은 의미이다. 

5) 롬 2:12~16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 이 구절은 예수님을 모르고도 양심을 따라 살면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이미 앞에서 말한대로 예수님을 몰랐어도 그가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구원봉사가 없었으면 결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받은 사람이 그것을 세상에 있을 동안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런 사람도 예수님 때문에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예수 없이 자기 양심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결코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6~7). 바울은 여기서 생명의 원리(레 18:5 참고)에 순종한 결과로 기독교 밖에서도 영생을 얻을 자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양심의 증거로 인해 율법의 요구가 마음에 기록되어 있음을 보이는 이방인들은(롬 2:15)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하신 성령께 반응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심판 날에 은혜를 얻을 것이다.

 

<부가설명> 기독교 밖에서라고 표현할 때 이 세상에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 밖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조직으로서 기독교 밖에서 구원받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이름 없이 구원받을 사람은 결코 한 사람도 없다. 본인이 예수를 알았든지 몰랐든지 상관없이 구원받은 사람은 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 죄를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고 부활하여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신 사실에 근거하여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없이 구원받을 사람은 결코 한 사람도 없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구원받는다. 이 사실에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다원주의는 결코 없다.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 구원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있는 것이다. 롬2:6,7절이 예수 없이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면 그것 때문에 구원 얻는 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사업의 결과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오해의 논리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전제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가르치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사실을 이해하면 이런 오해는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교훈 : 성경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을 알지 못할지라도 성령의 감화에 양심적으로 반응하여 구원을 얻을 자가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셋째날(화) 보편적 구원론과 다원주의

9월 22일

 

어떤 이들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었든지 어떻게 살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마침내 모두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보편적 구원론(universalism)’이란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믿지 않았어도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신념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요 3:16)신다. 하나님이 모두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한 사람이라도 멸망을 당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멸망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면 더욱이 하나님이 그들의 멸망을 두고 보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태우실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의 잘못된 교리(영원한 고통)가 다른 오류(보편적 구원론)로 이어지는지 볼 수 있다.

보편적 구원론과 관련하여 ‘다원주의(pluralism)’는 모든 종교가 동등하게 유효하며 하나님과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신념이다. 이 신학에 따르면 처음부터 다른 종교보다 더 훌륭하거나 우월한 종교는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어떤 목사는 교회 홈페이지에 자신의 신자들은 “기독교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믿지 않는다.”고 적었다.

다원주의자들에게 넓은 범주의 종교적 의식과 신념, 상징과 비유는 모든 종교의 유사한 핵심을 감추는 표면적인 차이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다원주의자들은 대부분의 종교가 신에 대한 사랑과 동료 인류에 대한 사랑, 일정한 형태의 황금률과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은 모든 신앙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기독교 신앙을 타종교 신자에게 주입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광신적이며 거만한 것이다.

물론 보편적 구원론과 다원주의는 성경과 배치된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며 모든 신앙이 구원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1. 성경은 보편적인 구원론과 다원주의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요 14:6, 계 20:14~15, 21:8, 단 12:2, 요 3:18, 마 7:13~14, 살후 2:9~10)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계20:14,15]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단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요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살후2:9,10]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답: 이 모든 구절들은 보편적 구원론과 다원주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부가설명> 만인 구원설과 다원주의는 모두 사람이 살아있는데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바탕에 깔고 있다. 성경은 도덕적 선을 추구하라고 하는 기별이 결코 아니다. 성경은 이미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다 죽었다는 사실을 단호히 가르친다. 구원은 이 죽은 사람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업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사망을 폐하셨다.(딤후1:10) 그래서 아담 안에서 죽은 어떤 사람도 아담 안에서 죽은 그 죽음으로 죽을 이유도 필요도 없게 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하셨다.(고전15:22) 이것은 예수님이 구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아담 안에서 죽은 그 상태에 그냥 머물기로 하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호흡이 끊어질 때까지 이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기간을 구원받을 날 은혜 받을 때라고 하는 것이다.(고후6:1,2) 호흡이 끊어지기 전에 정신이 혼미한 일이 생기기 전에 이 사실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스스로 예수의 생명을 거절했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죽은 그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신 것이다.(요16:9) 우리는 구원에 대해 오해하지 말자. 성경의 복음을 오해하지 말자. 

 

교훈 : 하나님이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며 모든 종교가 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넷째날(수)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

9월 23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1. 이 말씀 속에는 모든 인류를 위한 어떤 큰 소망이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이 중요한 진리를 먼저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 말씀을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동기로 삼을 수 있는가?

 

답: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주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으면 된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잘 전달하도록 성령의 은사를 구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롬 3:23) 하나님은 모두가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바라신다(행 17:30, 26:20, 벧후 3:9, 딤전 2:4). 에덴동산의 타락 때부터 하나님의 목적은 죄와 반역이 가지고 온 파괴와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 이상의 어떤 증거가 더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에게 노골적으로 반역하는 자들을 구원하지 않으실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1. 창 6:11~13, 롬 1:18, 살후 2:12, 계 21:8, 22:15을 읽어 보라.

[창6:11~13]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살후2: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이 말씀에 얼마나 강한 경고가 있는가? 

 

답: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도리를 은혜의 기간 동안 분명히 거절한 사람들은 자기가 거절한 상태로 결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주는 구절들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며 이 은혜는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었다. 그분은 교회가 이런 은혜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도록 요구하신다.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이다. 교회는 봉사를 위하여 조직되었으므로, 그 사명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의 보고(寶庫)이므로 종국에는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위자들에게’(엡 3:10, 새번역)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완전하게 나타날 것이다”(사도행적, 9).

 

<부가설명> 성경의 구원은 산 죄인들을 죽을 상태에서 죽지 않을 자리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살려내는 것이다. 우리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산 죄인을 죽음의 형벌을 면하고 계속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성경의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번 말하지만 성경의 구원은 이미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죽은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하얗게 마른 해골들이다.(겔37장) 그런데 생명 자체이신 말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망을 폐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시므로 모두 살게 하신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죽어서 해골처럼 말라버린 인류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다 살게 해 놓으셨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살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모든 사람을 살리신 하나님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호흡하고 의식이 있을 동안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조롱하고 불의로 진리를 막고 대적하면서 이 생명을 거절한 죽은 자들은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이렇게 살아나지 못한 죽은 자들을 사랑의 하나님은 눈물을 머금고 사랑과 자비로 장례식을 엄숙하게 하신다. 화장(火葬)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불 못이다. 우리는 성경의 계시를 올바르게 깨닫도록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로 구원의 도리를 바르게 깨닫고 믿고 전파해야 할 것이다. 

 

교훈 : 모든 사람은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에 교회는 그분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

 

 

다섯째날(목) 선교적 소명

9월 24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1. 여기서 바울은 어떤 중요한 원칙을 지지하는가? 우리는 이와 동일한 태도를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하는가?

 

답: 상대방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그들과 같은 처지에 서서 복음을 전하는 지혜를 나타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선교의 주께서는 지혜로써 용서와 구원의 기별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인간들을 통해 일하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선택하여 성령과 천사들과 협력하게 하셨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일정한 빛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자주 그 빛을 “말 아래에”(마 5:15) 두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복은 그들 안에 감춰졌다. 그들은 열방과 더불어 복을 나누기보다는 동화되지 않기 위해 그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세계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다음 계획은 가서 제자를 삼기 위해 소금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었다(마 28:19, 막 16:15, 20, 행 1:8). 기독교 선교 역사는 소금이 되어 세상으로 나아가 생명의 복음을 개인과 사회에, 때로는 민족 전체에 전한 자기희생적인 선교사들의 이야기들로 빛난다.

고대 이스라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선교적 성공은 선교사들 자신과 포괄적인 선교 계획의 결함으로 방해를 받아왔다. 그러한 결함은 다음을 포함한다. ⑴ 빈약한 선교 활동 계획과 임무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 ⑵ 복음 전파를 무색하게 하는 교육, 건강관리, 재난 구조, 개발 사업에 불과한 선교에 초점을 맞춤, ⑶ 파견 기관의 빈약한 재정과 인력 지원, ⑷ 임무에 적합하지 않은 선교사들, ⑸ 복음 전파를 금지하는 국가들. 물론 ‘앞으로 선교가 쉬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던 시대는 없다. 우리는 대쟁투 중에 있다. 원수는 우리의 지역사회에서든지 세상의 땅 끝에서든지 우리의 선교적 노력을 방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실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다음의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능력을 주시겠다는 위대한 약속과 하나님이 땅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부가설명> 우리가 전도할 대상의 상태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전도할 대상들은 아주 다양하다. 우리가 그 모든 다양성에 적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 다양성에 적응한다는 것이 그들과 같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셨다. 사람과 같은 처지에 임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죄에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고 물들지도 않았다. 바울이 다양한 상태에 처했다는 것도 이와 같은 원칙에 입각해서 한 것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같이 술을 마셔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창녀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창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극단적인 예는 쉽게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이지 않지만 우리가 이처럼 조심해야 할 대상이 참으로 많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다양성에 대한 표현을 조심스럽게 세밀히 살펴서 우리가 스스로 진리의 원칙에서 떠나면서 상태를 진리대로 살도록 이끌 수 있다는 망상을 조심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결코 바울의 태도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록할 때 조심했다. “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20,21)이 표현을 주의해서 보라. 율법아래 있는 자에게 자기는 율법아래 있지 않은 원칙을 지키면서 그들의 처지에 섰다는 것이고 율법 없는 자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서 있으면서 그들의 처지에 섰다는 것이다. 이런 바울의 기록을 잘 따라야 한다. 스스로 원칙에서 떠나면서 상대를 진리대로 살도록 이끌 수 없다.

 

교훈 : 하나님은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구원의 기별을 전하기 위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9월 25일

 

<시대의 소망>, 633 “감람산 위에서”, <교회증언 6권>, 23 “외방 선교지의 사업 확장”을 읽어 보라.

신약성경은 기독교 선교의 세계적 확장을 설명하기 위해 ‘모든’이라는 형용사를 동반한 두 개의 그리스어 명사를 사용한다. “온 천하(kosmos, 코스모스)에”(마 26:13, 막 14:9, 16:15)와 “온 세상에(oikoumene, 오이쿠메네)”(마 24:14)이다. 일반적으로 질서를 갖춘 존재의 영역을 가리키는 ‘코스모스’가 지구를 의미하는 반면(신약 성경에서 약 150회 등장함) ‘오이쿠메네’는 더 구체적으로 이 세상의 인간 거주지에 초점을 맞춘다.

1세기 기독교인들에게 ‘온 세상’은 얼마나 넓었을까? 십자가 사건 이후 불과 몇 년 안에 그들은 오늘날의 키프로스, 레바논, 시리아, 터키,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탈리아에 복음을 전했다. 그들이 북쪽으로는 남부 러시아(고대 스키타이)와 남쪽으로는 에티오피아, 동쪽으로는 인도 그리고 서쪽으로는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파했다는 증거가 있다.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은 그들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했다고 믿었는가? 사도행전에 따르면 기독교의 생일인 오순절에 성령은 여러 나라와 지방과 종족들로부터 온 방문객들에게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하기 시작했다(행 2:5~11). 기독교 역사의 첫 날부터 교회는 그들에게 부여된 선교 사명의 세계적 범위를 깨달았다. 그 시대의 신자들이 그 같은 사실을 이해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 사실을 얼마나 더 분명히 이해해야 하겠는가?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온 세상’의 범위에 대한 교회의 이해는 오순절 이후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마 28:19)으라는 예수님의 선교 명령은 그분이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의 현대 진리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계 14:6~12에 나오는 세 천사의 기별을 선포하는 사명은 어떻게 대사명과 조화됩니까?

※ 세 천사의 기별도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이다. 같은 대 사명이다. 

 

➋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복음을 듣지 않고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 궁극적으로는 천연계를 통해서도 복음이 전파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하셨다. 로마서 1:19이하와 10:18절 이하에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속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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