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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불평에서 배교까지(도입예화와 부가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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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9-10-22 13:20 조회5,7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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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불평에서 배교까지
10월 31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35분)

도입)
어느 날 호랑이가 먹이를 찾아다니다가 어설프게 쭈그리고 앉아있는 토끼를 보고 단번에 낚아챘다. 그런데 이 토끼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호랑이를 째려보면 이렇게 말했단다. “이거 놔 임마!”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충격을 받아 놀란 호랑이는 그만 그 토끼를 놓아주고 말았다. 다음 날 아직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방황하던 호랑이 앞에 또 한 마리의 토끼가 나타났다. 호랑이는 이번에도 역시 간단하게 한발로 토끼를 낚아챘다. 그러자 토끼가 이러는 것이다. “나야 임마!” 그 토끼는 바로 어제 그 토끼였던 것이다. 깜짝 놀란 호랑이는 얼른 그 토끼를 또 놓아 주었다. 호랑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다시는 저 무서운 토끼를 알아보지 못하는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날도 그 호랑이는 후들거리는 네 다리를 억지로 이끌고 자신의 굴로 들어가 쉬었다. 다음날 또 토끼를 잡았다. 이번엔 그 토끼가 아닌 분명 다른 토끼였다. 그런데 호랑이는 그 토끼가 한 말 때문에 쇼크를 받아 그만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았단다. 도대체 이 토끼가 호랑이에게 뭐라고 말한 것일까? 그 토끼가 호랑이에게 한 말은 바로 “소문 다 났어 임마!” 였다. 이 유머는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는 교훈이 있다. 독사가 이빨이 빠지고, 독수리가 날개가 꺾이면 그들은 더 이상 살아갈 수도 존재 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 꺾이고, 믿음이 파산되었다면 더 이상 성도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우리 보다 강한 대적을 만날지라도 위의 토끼와 같은 담력을 갖는다면 우리의 원수 마귀도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우리가 연약하다고 스스로 부정적이 되면 약하게 될 것이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고 살자.

기억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4~15)

연구범위: 민 11~14장

안식일 오후
구름기둥이 시내산 성막에서 떠오르며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출발했을 때 모세는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민 10:35)라고 탄원하였다. 그것은 승리의 외침과 같았으며, 이스라엘의 거대한 군대는 사기가 충천하여 여행을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게 된 것이다!
직접 하나님의 가시적인 임재를 목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해 보라! 오래 전에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갈 때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리라고 다짐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일은 망쳐지고, 의심과 불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며, 배은망덕한 일이 계속 생겨났다. 이번 주 교과를 공부할 때에 우리는 더 위대한 약속의 성취(히 11:40)를 기다리는 백성으로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을 마음속에 간직하자.

일요일(10월 25일)
배은망덕의 죄(민 11장)

도입)
민수기에 소개되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광야가 결핍과 부족의 땅이요(20:5), 따라서 불평과 원망의 땅임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가 있기는 했지만(출 16장) 40년 광야 생활에 비하면 너무도 불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광야가 시련과 고통의 자리요 사람들에게 불평과 원망을 불러일으키는 땅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곳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을 통과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곳이었다.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은 사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추시고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사용한 중요한 수단이었다(신 8:1-3).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러한 훈련과 연관된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했다. 그들은 만족스러운 삶의 조건이 전혀 주어지지 못한 광야 유랑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태도를 배워야 마땅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용납하시고 그들을 약속으로 땅으로 인도하셨다.

민수기 11장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1. 이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인도하신 손길을 잊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까?
답:

2. 우리는 이 기사에서 식욕을 절제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이 불만스런 사람들을 묘사한 히브리어의 표현은 "악한 불평자"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들이 무슨 악한 불평을 했는지 짐작할 뿐이지만,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닌 죽음의 함정이 있는 광야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그들은 애굽에서의 기적들과 홍해를 건넌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의 소리를 점점 더 높여갔다. 그들의 악한 감화는 주변 사람들에게 퍼져나갔고 아직 연약한 이 민족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내려와 진의 끝 부분을 살라버렸다(1절). 오직 모세의 중보 기도만이 그 불을 끌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식사에 대해 불평할 필요가 없었다. 만나를 다양한 형태로 요리할 수 있었는데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며, 가마에 삶기도 하였다(출 16:23, 민 11:8). 모든 인류를 위해 온갖 맛있는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의 백성에게 구미에 맞지도 않는 것을 주시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그들은 양과 염소와 소의 젖을 얻을 수 있었고, 이것으로 버터를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신 32:14). 그리고 서원의 예물이나 감사의 예물, 혹은 자원하는 예물로 드려지는 여러 가지 '화목제물'들은 모두 제사장과 제물을 바친 자와 그의 가족과 종들, 그리고 초청받은 레위인들이 그 고기를 나누어 먹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배고플 일이 없었던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 불평이 터져 나온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은혜를 잊어버리는지를 보여 준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괜히 그들을 고생시키시려고 불타는 사막 길을 통과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의 믿음을 성장케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한 본성을 치료하시기 위해서였다. 애굽을 떠난 지 두 달 반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애굽에서 가지고 온 양식으로 살았는데, 그 양식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 양식이 떨어지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저들이 불평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무슨 말인가? 분명히 여호와의 뜻은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은 것인데, 모세와 아론이 공연히 쓸데없는 일을 하여, 이곳으로 끌고 와서 굶어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애굽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애굽의 노예생활이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가는 길이 정상적이며, 바른 길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생활은 정상적인 삶이 아니며, 바른 길이 아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시므로 애굽과 철저하게 분리시키신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애굽을 두려워하거나 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워하고 돌아가야 할 최소한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불평이 나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아직 애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애굽을 마음을 두고 있으니, 홍해를 건넌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라에서 하나님께서 물로 치료하시고, 그들의 상한 몸을 치료하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이 세상에 대해서 진절머리가 나기까지는 아무리 기적을 체험하고 병이 낫는 것을 체험해도 진정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월요일(10월 26일)
지도력에 대한 압박(민 11:10~15)

도입)
모세는 성경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가장 위대한 지도자중의 한사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 중에 우상(금송아지)숭배로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모세는 자신의 "구원(영생)"을 걸고 기도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대신에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백성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다. 지도자가 자신의 생명과 영생까지도 희생하려는 이것이 지도자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세와 부귀와 영화를 유지하기 위해 종종 부하들과 백성들을 희생시킨다. 참 지도자는 백성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자이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생축)이 되셨다(고린도전서5:7,에베소서5:2). 그러므로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십자가의 진리(도)를 알아야 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누가복음9:23,14:27) 진정한 지도자는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희생하는 자이며, 희생의 모범(본)을 보이는 자이다.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변명으로 일관했던 형 아론과는 달리 영원한 삶조차도 포기하고 내놓을 만큼 자신의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죄악을 저지른 사실을 시인하고 자신의 생명을 걸고 용서를 간구한다. 모세의 가슴 타는 중재로 이스라엘 백성은 진멸의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더라도 이 백성을 구해달라고 하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이 시대에 절실한 상황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도 신속히 우상숭배와 금송아지 숭배로 돌아갔을 때, 모세는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라고 기도하였다.

1. 후에 사람들이 장막 문에서 울며,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민 11:4)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모세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왜 그의 태도는 옳지 못했습니까?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냈습니까?(10~15절)
답:

2. 민수기 11:21~23을 읽으십시오. 여기에는 모세의 믿음 없음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답:
모세의 실수와 그의 믿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모세가 지고 있던 짐을 가볍게 하시기 위해 70명의 장로들을 임명하심으로 그의 일을 돕게 하셨다(16~17절). 70인의 경험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오순절에 가졌던 성령 강림의 역사와 유사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았다.
“만일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목격하였던 증거에 합당한 믿음을 나타냈더라면 그들은 결코 선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거의 잊어버리고 자신의 부담과 봉사를 과장하였다. 그는 잠시나마 이스라엘의 저주가 되었던 불평의 정신에 빠진 데 대하여 변명할 수 없었다.”(부조와 선지자, 380)

교훈: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지고, 자신에게 불평을 쏟아놓는 것을 본 모세는 자신의 부담을 하나님께 털어 놓았다. 그분께서는 70인의 장로들을 세워 그를 돕게 하셨다.

부가적용)
시기(jealousy)는 남을 크게 해치고 자신에게 큰 손상을 입히는 심리상태이다. 콜튼(Charles Colton)은 “남이 불행해질 때 진심으로 동정하는 사람이 한 사람쯤 있다면 남이 성공할 때 시기하는 사람은 천 명쯤 된다”라고 했다. 또 “남이 성공할 때 시기하지 않고 존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한 사람도 있다. 시기심을 극복하지 않으면 큰 축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께 큰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도 없다. 모세를 돕는 70인 장로들이 모세가 받은 성령을 다 받고 예언도 했는데 그 중에도 엘닷과 메닷이란 사람은 회중에 나오지도 않고 장막 안에 있다가 성신을 받고 예언을 했다. 이때에 장차 모세의 후계자가 될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이르기를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민11:28) 하고 못하게 하라고 했다. 아마도 후계자가 될 여호수아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혹 그 자리를 넘보지 않을까 시기하는 마음이 생겼던 모양이다. 이때 모세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고 대답했다. 모세는 시기심을 극복한 위대한 지도자임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모세를 도울 장로들의 수가 꼭 70이었다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는 이 70이라는 수는 민족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수의 선택은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의 대표자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누가복음에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방에 들어가시면서 70인의 전도인을 파송하도록 지시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도할 것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열두 제자를 파송한 사실과는 비교되는 것이다.

화요일(10월 27일)
유쾌하지 않은 가족 문제(민 12장)

도입)
이드로라는 사람은 출애굽의 주인공이자 영웅인 모세와의 관계 속에서 간단히 등장하는, 그야말로 조연 내지 엑스트라급에 속한다. 그러나 모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출애굽의 시작과 끝에 등장함으로 거대한 구속사의 큰 물결 속에서 잠깐 등장하지만, 중요한 시점에 포함되는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드로가 출 18장 1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듣고는 기뻐했지만, 여기에서는 '모세가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는 '좋지 못하다'고 평가한 점이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그대와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출 18:17~18)고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선하지 못하다"는 뜻은 도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이 아니라 원어로 보면 "좋지 않다"(not good)라는 뜻으로 모세의 하는 일이 비능률적이며, 효율성이 전혀 없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비록 이방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역사를 듣고 가장 모범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모세의 삶에 있어서 어려울 때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출 2장), 또한 큰일을 치른 후에 가족들을 데려옴으로 위로와 평안함을 안겨 주었으며, 모세의 행정 능력의 부족함을 지적하여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하는 데에 중요한 조직력을 부여해 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인물로 등장한다. 조금 가볍게 표현하자면 "모세는 장인 한번 잘 둔 셈"이다.

애굽에 재앙이 내리던 때에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두 아들들과 함께 "미디안 제사장"인 친정아버지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 정착한 후에 이드로는 십보라와 모세의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십보라는 자기 남편이 일에 지쳐 있는 것을 보고 이드로에게 알렸고, 이드로는 모세의 집행 방법을 유심히 살핀 다음 천부장과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임명하여 조직을 개편하도록 제안하였다. 이드로는, 작은 일은 그들이 재판하게 하고 모세는 큰 일만 하나님께 가져가라고 제안했다. 모세는 그 제안에 동의하였고, 이 선택된 사람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였다(출 18:13~26). 모세의 이러한 결정은 마침내 미리암과 아론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1. 민수기 12장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미리암과 아론의 어떤 인간적 약점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들의 죄는 모세의 태도와 성품과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룹니까?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미리암과 아론의 야비한 행동을 어떻게 보셨음을 말해 줍니까?
답:
“비방하다”(1절)라는 동사는 여성 단수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미리암이 먼저 비난을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십보라가 아버지 이드로를 통해 모세로 하여금 재판할 사람들을 임명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 비난하였다. 미리암은 십보라를 구스인(Cushite)이라 하였는데, 아마도 그녀의 검은 피부색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십보라는 미디안 사람이었는데 이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족속으로, 아브라함과 그두라 사이에서 태어난 미디안의 후손이었다. 또한 구스인들이 시내 반도 동쪽과 아라비아의 아카바 만 동쪽에 거주한 미디안 족속과 섞여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십보라는 미디안 사람 또는 구스인으로 불릴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독일 사람의 후손이 미국에서 태어나면 독일사람 혹은 미국 사람으로 불릴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미리암이 십보라를 구스인이라고 부른 것은 경멸하는 태도가 깔려 있었다.

교훈: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말을 듣고 재판할 사람들을 임명하자 자신들의 입지가 약해짐을 느끼고 모세의 아내 십보라를 비방하였다.

부가적용)
모세의 삼남매 중 첫째가 미리암이고 둘째가 아론이고 막내가 모세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족속들이 여호와신앙으로 하나가 된 신앙공동체였다. 광야에서 항상 불평불만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믿음의 뿌리가 약한 잡족들이었다. 모세는 잡족들을 잘 포용하는 정책으로 잡족인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 일로 형 아론과 동생 미리암은 모세를 비방하면서 이것을 빌미로 모세의 지도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의 지도력을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쿠테타를 일으켰다. 모세는 개인적으로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심각한 지도력의 위기를 맞이했고, 백성들에게는 가나안복지를 향한 일정이 지체되는 위기를 맞이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고 은근히 시기하고 미워하던 차에 아프리카 흑인 여자를 얻었을 때 이때가 기회다 하고 아론과 합세하여 비방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12:2)라고 했고 그 다음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민12:2)고 하셨고 8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하시고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주모자 되는 미리암을 쳐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하여 일주일 후에 고쳐 주셨지만 자기 동생으로만 알고 영적 지도자인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병에 걸렸던 것이다. 시기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도력을 인정해 주시고 거기에 대항한 미리암은 징벌로 문둥병에 걸려 진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온유한 방법으로 문제를 처리했다(민수기12:1-3). 문둥병에 걸린 자기 대적을 위해 7일 동안 금식기도 했다. 그러자 미리암이 7일 만에 회복되어 다시 진중에 돌아오고 가나안을 향한 행진이 계속되었다. 지도자는 사람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다(전도서8:2-4). 주님의 온유한 성품을(마태복음11:29) 닮았던 다윗을 하나님은 세계복음화와 평화를 위해 강력한 지도자로 세워주셨다(사무엘하22:36,시편18:13).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의미는 땅을 다스리는 자(행정장관)가 된다는 뜻이다.(시편37:11,마태복음5:5) 온유한 자에게 땅을 다스리는 지도력을 주신다(시편25:9,45:4).

수요일(10월 28일)
가나안 접경에서(민 13장)
도입)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입성을 위해 정탐꾼을 보냈다. 이들이 돌아와서 가데스바네아에서(민1:28, 13:28)보고한 것 가운데 가나안 원주민들에 대한 보고였다. 그중에 가장 주시해야할 자손이 있는데 아낙자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에 대해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게 하시면서 너희들 힘으로는 도저히 정복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인도할 것이니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먼저 주지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하셨다. ‘들으라’는 말씀은 주의 깊게 들으라, 경청하라는 뜻이다. 결국 가나안땅은 너희들의 손에 들어오겠지만 그 전에 명심할 사항은, “그 성읍들은 크다”(1절). “그들이 적의 침투를 위해 쌓아놓은 성벽은 하늘에 닿았다” “그중에 크고 많은 백성은 너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아낙 자손인데 그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며 싸워주실 것이다.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3절). 내가 힘든 일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상황일 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가시며 내가 힘들고 버거워하는 일들을 제거해 주신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추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출13:21-22). 우리 하나님께서는 위기 앞에서 뒷전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언제나 앞서 가신다. ‘앞서 가신다’는 말씀은, 함께하시고,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승리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언제나 앞서가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바란다.

아마도 9월경이었을 것이다. 포도는 무르익었고 무화과도 익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남방 접경 지역인 가데스바네아에 이르기까지는 겨우 11일이 걸렸을 뿐이다. 그들이 그토록 꿈꾸어 오던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거대한 군중 가운데 환희와 감격의 물결이 일어났을 것이 분명하다.

1. 신명기 1:19~23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어떤 실수가 기록되어 있습니까?
답:

2. 민수기 13장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정탐꾼을 보내도록 허락하셨으나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답:

3. 하나님의 능력을 그토록 많이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탐꾼들의 보고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답:
백성은 그들의 새로운 터전이 될 땅이 풍요롭다는 사실에 대해 당연히 즐거워했다. 그들은 두 명의 정탐꾼이 메고 온 커다란 포도송이를 보고 놀랐다. 그곳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늘 그러하듯이 이 죄악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이끄심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항상 따라오기 마련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땅에 이방 사람들이 거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역사하실 것을 생각지 못했단 말인가? 그분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잊어버리고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을 보면서, 갈렙과 여호수아의 호소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른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이야기만 듣고 슬퍼하며 두려운 생각에 휩싸이게 되었다.

교훈: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를 떠나 11일만에 가나안 접경 지대인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했으나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 정탐꾼들의 말만 듣고 절망에 빠졌다.

부가적용)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지금 그들이 장차 들어가서 얻을 땅의 형편을 듣기 위해서 구름같이 모여 정탐꾼들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12정탐꾼들의 보고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먼저 그 땅에 자라는 열매를 보고했다. 그 땅에 자라는 열매는 우리가 일찌기 본 적이 없는 참으로 훌륭한 것이라고 보고 할 때 백성들은 환호하고 빨리 그 땅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 관해보고 할 때 백성의 간담은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 땅에는 키가 크고 신체가 장대한 사람이 살고 있다는 보고에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그만 하나님을 욕하고 불신앙에 사로 잡혔던 것이다. 하나님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아무도 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좋은 땅에 큰 장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복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 사건은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보면서도 자기의 복을 만들지 못하며 하나님의 복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복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복은 모든 사람이 귀로 들을 수는 있어도 자신의 복으로 삼는 이는 매우 적다. 우리는 너무도 많이 하나님의 복에 관하여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그 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너무나 많다. 그 이유는 우리가 열 정탐꾼과 같은 부정적인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목요일(10월 29일)
애굽으로 돌아가려 함(민 14장)

도입)
열두 명이 올라가서 똑같은 것을 보고 왔다. 그런데 열 명은 불가능하다고 했고 두 명은 가능하다고 했다. 이유는 해석의 잣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신앙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상황을 해석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불신앙으로 상황을 해석한다. 이들은 힘든 상황만 보았지 그 상황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상황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을 봤다. 문제만 본 사람과 문제의 해결자를 본 사람의 차이이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만 보지 말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을 봐야 한다. 문제를 싸안고 이리저리 굴리면서 키워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절망해서 죽고 싶다는 결론에 이른다. 공포심은 나를 메뚜기처럼 작아지게 만든다. 문제를 실제보다 과장해서 생각하게 한다. 인생의 가장 큰 적 가운데 하나는 근거 없는 공포심이다. 한번 절망에 빠진 사람은 계속해서 부정적인 해석만을 하게 되어 있다. 100%의 긍정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객관적인 사건과 상황은 늘 나에게 일어난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잘 해석해 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결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1. 민수기 14장을 읽으십시오.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와 같은 일을 저지릅니까?
답:
그들이 한 말들 중에 가장 무서운 최악의 말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다(3~4절). 애굽은 죄의 속박과 종살이, 죽음,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원(疎遠)함을 상징하는데, 그처럼 놀라운 구원을 경험한 후에 나타낸 이 백성의 행동은 도무지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불충실한 정탐꾼들은 큰 소리로 갈렙과 여호수아를 중상하고, 그들을 돌로 치자고 소리쳤다. 미친 듯한 폭도는 저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죽이려고 던질 것을 집어 들었다. 그들이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 나갈 때에 갑자기 그들의 손에서는 돌이 떨어지고, 무서운 침묵에 압도되어 그들은 공포에 떨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으로 그들의 살인 계획을 막으셨다. 타오르는 빛과 같은 그분의 임재의 영광이 성막을 비췄고 … 아무도 감히 그들의 반항을 계속하지 못하였다.”(부조와 선지자, 390)

2.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배역한 이들에게도 그분의 자비와 은혜가 어떻게 베풀어졌습니까?
답:
받은 형벌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보라.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거절하고 스스로 그 일을 행하고자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했다. 만일 그들이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신뢰했더라면 그들에게 닥친 재난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슬프게도 죄는 언제나 범죄한 당사자 뿐 아니라,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무고한 이들까지도 고통당하게 한다.

교훈: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을 체험한 이들 가운데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이들이 있었는데, 이는 불신의 극치를 보여주는 태도였다.

부가적용)
누구든지 약속의 땅을 차지하려면 잘 볼 줄 알아야 한다. 건강한 눈과 올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람은 사물을 판단할 때에 눈으로 보는 것이 87%의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예수님도 “눈은 몸의 등불이니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은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마6:22에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가나안을 정탐한 10명과 출애굽의 1세들은 노쇠의 탓도 아니요. 거친 광야의 모래바람의 영향으로 안질이 걸린 것도 아닌데 그들은 모두 전염성이 큰 불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2명의 정탐꾼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 외에 10명은 하나님은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불모지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거인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강대한 거인들만 보았던 것이다. 믿음의 거인들은 모두 잘 보는 자들이었다. 다윗은 블레셋의 명장 골리앗을 볼 때 넓은 얼굴과 이마 어느 곳에 던져도 다 맞을 것이라고 보았으나 이스라엘 군사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심히 아름다운 땅으로 보았고(민14:7) 그들을 밥이라고(민14:9)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병들지 않은 건강한 영적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악평하는 사람들은 사실을 다르게 본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것과 반대되게 보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자초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매사를 개인적인 안목으로 보는 주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객관적으로 보는 훈련을 하고 그렇게 보도록 사고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금요일(10월 3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부조와 선지자, 제33장 '시내에서 가데스까지'(374~394), 제34장 '열두 정탐꾼'(387~394).

“이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접어들자 갈렙과 여호수아는 물론, 모세와 하나님께 대하여, 고집스럽게 반대하였다. … 그들의 유해한 영향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사실을 왜곡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것은 불길한 보고일 뿐 아니라 허위 보고였다. 그것은 그 자체에 모순이 있었다. 정탐꾼들은 처음에 그 땅은 비옥하고 번영하는 땅이요, 그 곳 백성들은 키가 크다고 보고했는데, 만일 그 땅이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곳 기후가 건강을 해친다면 위에 말한 모든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을 불신에 굴복시킬 때에는 자신을 사단의 지배 아래 두게 되며, 사단이 그들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부조와 선지자, 38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직면하든지 주님께 감사와 찬양의 자세를 갖는 것은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감사와 찬양의 정신은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해 줍니까?

2. 비평과 불평의 정신이 쉽게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을 얼마나 조심해야 할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시내에서 가나안 접경에 있는 가데스바네아까지의 열 하룻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 만나에 대한 불만이 거세게 터져 나오자 모세는 자기를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모세의 지도력에 대한 미리암과 아론의 명백한 저항은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마침내 정탐꾼들의 악한 보고를 들은 후 온 백성은 넘지 말았어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그 결과로 그들은 40년 간 광야를 방황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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