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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맨의 교과 지도 - 제 4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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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피맨 작성일09-10-22 03:19 조회3,1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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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과 나팔, 피, 구름, 불



기억절 고전 5:7

너희는 누룩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안식일 오후



제4과의 기억절이 누룩과 유월절을 말하고 있슴으로

누룩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자.



당시의 누룩은 전에 사용하던 반죽으로부터 남겨진

약간의 발효된 반죽을 의미했고 시큼한 맛이 나는 반죽이었다.



어떤 제물이든지 주님께 봉헌되는 제물에 있어서는

누룩과 같이 드려지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었으며(출 23:18, 34:25),

소제물에 누룩을 집어넣는 것도 금지되었다.(레 2:11)

요세푸스에 따르면 진설병의 덩어리에는 누룩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유월절 절기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교병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들의 소유 또는 집에 누룩이 있는 것까지도 금지되었다.

미국에서 자동차 안에 알코올이 있어도 음주 운전으로 ticket을 주는 주들이 있는데

그것은 언제든 가까이에 두고 있으면 음주 운전의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 때문이다.



유월절 기간 중에 무교병을 먹는 것은 유월절 사건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것과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삶의 태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출 12:39, 신 16:3)



누룩은 반죽의 덩어리를 변조시키고 부패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

발효가 부패의 과정에 대한 상징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특히 신약에서 누룩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불건전한 가르침(마 16:12)

혹은 외식(눅12:1)을 상징하였고

고린도 교회의 도덕적 방종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다.(고후 5:6-8, 갈 5:9)



고대 희랍인 들 중 플루타크와 로마의 풍자 문학가 페르시우스가

누룩(Fermentum)이란 단어를 도덕적 부패에 관련시켜 사용하였다.



랍비 문학에 있어서 누룩은 악한 욕망을 상징했다.

또한 그 상징은 유대교 신학에 있어서

인간 본성의 타고난 부패성을 표현하는데 널리 사용되었다.



누룩의 침투력과 발효성을 긍정적으로 사용한 예는

오직 한 가지 비유로(마 13:33, 눅 13:20-21)

하나님 나라의 은밀하고 꾸준한 성장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던 도덕적 타락과

그리스도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를 염려하였으며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묵은 누룩 – 즉, 거듭나지 못한 상태의 모든 흔적들-을 내어버리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떡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경고하였다(고전 5:6-8).



특히 유월절 희생 곧 예수님의 죽음의 원인이 바로 누룩이라는 암시를 던지며

그의 피로 죄가 완전히 제거된 “누룩없는 자”가 그리스도인임을 가리키고 있다.





일요일 - 나를 기념하여(민 9:1-5)



유월절은 유대 달력으로 정월 14일이다.

히브리어로는 아빕월(보리, 혹은 보리이삭)이라 하고

바벨론에서는 니산월이라고 불리는 봄철이다.

(태양력으로 3,4월)



1. 민 9:1-5, 출 12:1-29 절에서 얻는 영적 진리



출 12:1-29절은 430년의 노예 생활이 끝나고

출애굽이 감행된 바로 그 숨막히는 밤이었던

“여호와의 밤”(출 12:42)과 유월절 제정을 기록하고 있다.



민 9:1-5절은 광야에서 맞은 출애굽 1주년 기념일로서

애굽에서의 특별한 구출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구원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준수가 시행됨을 보여준다.



A. 유월절의 준수는 다음과 같았다.



1) 1월 10일에 흠없고 1년된 수컷, 어린양 혹은 염소를 선택해 두어야 했다. (출 12:5)

2) 1월 14일 해질녘에 양을 잡았다.(출 12:6)

3) 우슬초 묶음으로 피를 적셔 문인방과 좌우설주에 뿌렸다.

4) 아침까지 집 밖에 나가지 말아야 했다.

5) 고난의 떡(신 16:3)인 무교병과 쓴 나물을

14일 밤부터 21일 저녁까지 7일간(출 12:8) 먹어야 했다.

6) 이를 무교절이라 했고 마지막 21일에는 성회로 모였다.



B. 유월절의 초기 형태는 분명 가족 단위로만 이루어졌고

히스기야 왕의 개혁 이후 온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유월절 양을 잡고

다시 가족별로 유월절 만찬을 하면서 그 의미를 자녀에게 가르치면서

역사적인 해방의 기쁨과 감사를 드리는 형태로 변형되었다.





C. 특히 유월절은 구약에 언급된 세 번의 종교개혁과 관련이 있다.

첫번째는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이며(대하 30장),

두번째는 아빕월에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강화한

요시야의 종교개혁이다(대하 35장; 왕하 23장).

요시야의 종교 개혁 이전에 유월절은

오랫동안 규정대로 지켜지지 않았거나

바르게 지켜진 적이 없었다고 성경은 평가한다(대하 35:18; 왕하 23:22).

세번째는 에스라의 종교개혁이다(스 6 장).



이처럼 유월절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주요한 역사적 종교개혁의 핵심에 위치해 있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요

1888년 미네아 폴리스 총회에서 변화의 물결의 핵심이었던 것처럼

각 개인의 신앙의 개혁과 부흥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될 수 있다.





D. 사복음서와 유월절



사복음서는 유월절에 죽임당한 어린양을

예수 그리스도로 가리킴에 주저함이 없다.

특히 요한은 1:36절에 예수님의 등장에서부터

침례 요한의 외침을 통해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께서 성전 정결하시는 장면도 유월절과 관련시키고(2:13)

오병이어의 표적도 유월절과 연관짓는다.(6:4)

요 6:51절에서 자신의 살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을 기록하면서

무교절에 먹은 보리떡과 연결시킨다.



요 11:55절, 12:1절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을 가리키며

유월절의 예비일인 금요일에 재판을 받으시고

오전 6시에 빌라도 앞에 서시고

오후 3시 결국 성전에서 유월절 양잡는 때에 운명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되는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 문설주에 피를 발랐던 우슬초와

다리를 꺾지 않고 보존된 유월절 양의 표징이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의 죽으심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졌슴을 증거하고 있다.(19:29,36)



유월절 식탁에서의 고별 축도는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인데

예수님은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눅 22:40)라고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마침내 이 죄악 세상을 끝내시고

영원한 천국을 이루실 그 날을 당신의 유월절로 손꼽아 기다리고 계신다.



나의 유월절은 언제인가?

나의 출애굽은 언제인가?



재림교 성경 주석(출 12:1-14)



“유월절 양을 잡는 것으로는 넉넉하지 않았다.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하였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영혼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 뿐 아니라

우리 각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속죄의 희생의 공로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2. 유월절과 성만찬



유월절은 성만찬 예식으로 대체되었다.

표상과 그림자로 예시되었던 유월절 희생양은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시대의 소망 652-653 페이지



“성만찬 예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로 이루어진

큰 구원을 기념하기 위해 주신 바 되었다. …

이것을 통하여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분의 위대한 사업은

우리 마음 속에 항상 새롭게 간직된다.”



[참고] 성만찬 예식이 거행된 날에 대하여



공관복음이라 일컫는 3권의 마태(마26:17), 마가(막 14:12), 누가복음(눅 22:7)은

예수님의 성만찬을 “유월절 식사”가 이루어진 유월절(혹은 통칭으로 무교절) 첫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하였고 성만찬의 의미를 자세히 다루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유월절 전에”(요 13:1) 만찬이 이루어졌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유월절 전 날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세족 예식만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이 같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사이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성만찬은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개인의 체험으로 받아들이는 예식으로 초대 교회에서 인정되었다.



고전 11:23-29절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성만찬 예식을 보다 은혜롭게 거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먼저 자신을 깊이 살피는 것이다.





월요일 –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민 9:1-5)



광야에서 방랑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불과 구름기둥(히, 아무드)의 현상을 통해

갈 길을 인도받았다.(출 14:24)

보통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앞서 나아가며 그 길을 인도하였다.

애굽의 군대가 홍해까지 추격했을 때는

이스라엘과 애굽인 사이로 이동하여

애굽에는 어두움을 이스라엘에는 빛을 제공하기도 하였다.(출 14:19-24)



성경 본문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불가사의하고 초자연적인 것이며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실제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려고 했슴을 암시하고 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은폐하는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광야 생활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항상 동행했던 구름 기둥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인도하심을 나타내고

불기둥은 어둠 속에 감출 수 없는 빛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임재란 일시적으로 나타나심이나 방문이 아니다.

항상 함께 계심이다.

민 9:16절 “항상 그러하여”



구름 기둥이 임재의 상징이 아니라 임재의 실제였다는 말은

40년의 광야 생활 속에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구체적인 표현이다.



부조와 선지자 282 페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인도자의 군기가 항상 그들과 함께 있었다. 낮에는 구름이 그들의 여정을 인도하거나 군중 위에 천개처럼 덮여 있었다. 그것은 불타는 폭염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었고, 냉기와 습기는 목이 타고 끓는 사막 에서 그들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밤에는 그것이 불기둥으로 변하여 그들의 진영을 비춰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게 해주었다.”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 기둥으로 영광의 광채를 감추시면서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다.

이른바 숨어계신 하나님이시다.

430년 전의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구름기둥 속에 숨어서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친히 함께 하셨다.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하자.

성경에서 무려 200번이나 사용된 ‘항상’이란 단어를 주님은 이렇게 사용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화요일 – 은 나팔(민 10;1-10)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두 종류의 나팔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호용 도구였던 양각 나팔(쇼파르)와

성소에 속하여 오직 제사장들만 불었던,

민 10: 8절에 나타난 두 개의 은 나팔(하초츠라)가 있었다.





여기서는 하초츠라(트럼펫)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소리를 내는 관의 길이가 60센티미터도 안되기 때문에

고음이고 날카롭게 났슴이 분명하다.



이 은 나팔들은 한 덩어리의 은을 쳐서 만든 것으로

바람을 불어넣는 작용을 하도록 악기의 끝에 부리가 부착되었다.



고고학자들은 하스모네가의 주화들에 "예루살렘의 구원"이라는 표어와 함께

두 개의 트럼펫이 새겨진 것들을 발굴해 내었다.

또한 티투스 개선문에도 거룩한 트럼펫이 그려져 있다.

이 악기는 곧은 것으로 자연스런 고음을 낼 수 있었다.



사해 두루마기가 발견된 후에는

이 트럼펫이 음률의 고저를 정확히 조절할 수 있었슴이 확인되었다.

legato(이어불기), staccato(짧게 끊어 불기),

trill(한 음의 반 음정도를 위 아래로 왔다갔다 불기),

tonging(떨면서 불기) 등이 가능했다.



대하 5:12절에는 무려 120개의 트럼펫이 합주되고 있다.

특히 "한 입으로 부르듯이" 합주해야 했다.



집회용 트럼펫, 전투용 트럼펫, 살해시의 트럼펫, 잠복의 트럼펫 등

각기 사용에 따른 다른 명칭들이 있었다.



성전에서 트럼펫의 신호들은 모든 의식과 제사가 베풀어질 때마다 그 시작을 알렸다.

민수기의 10장의 은 나팔(트럼펫)은 다음의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 이스라엘 백성을 통솔함

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임재를 느끼도록 함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과 함께 계셨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시각적인 표징이었다.



그 구름 기둥이 떠 오를 때마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나 불 수 있는 양각 나팔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종들, 아론의 제사장들만이 부르도록 지정된 특별한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순서대로 질서있게 이동하였다.



이 나팔 소리가 울려퍼질 때에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 소리를 들으신다고 생각하고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는 말씀을 믿고 용기를 얻었다.

이 은나팔이 불린 것은

1) 전쟁에 나갈 때(9절)와

2) 매달 1일과 절기들에 제사를 드릴 때(10절)였다.



이른바 청각적 표징이었다.



대하 5장에 보면 레위인들은 노래와 악기들을 사용하고

120명의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어 함께 찬미하자

여호와의 전에 영광과 구름이 가득하여 제사장이 능히 섬기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다시 한번 시청각적 표징이 시연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시청각을 사용한 예배가 더욱 효과적인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감을 다 사용하여 느끼도록 전달하는 것을 교회는 연구해야 한다.



각종 악기를 사용하여 보다 아름답게 준비된 찬양,

짤막한 연극과 그날의 순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창조적 영화 들이 필요하다.

아직도 말로만 전달되는 설교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현대적 과제다.



더욱이 TV는 물론 Internet 등 멀티 미디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과제다.

지혜주시기를 기도하자.



우리의 예배에 보다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브사렐과 오홀리압같은 자들에게 임해야 한다.



하나님은 시청각 교육의 귀재이시다.



만나는 먹게 하시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보게 하시고

나팔 소리는 듣게 하셨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눈과 귀, 그리고

몸에 직접 체험하도록 명령하신 숱한 사례들을 보는데

하나님은 실로 기가 막힌 판토마임의 제작자이셨다.



렘 13:1 썩은 베띠의 교훈

렘 18:3 토기장이의 교훈

렘 19:10 깨어진 오지병의 교훈

렘 24:1 무화과 두 광주리의 이상

렘 27:2 줄과 멍에의 상징



호세아에게는 고멜이라는 창녀를 아내로 삼게 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셨고

에스겔은 좌편으로 누워 390일동안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고

우편으로 누워 40일동안 유다의 죄악을 담당하고

보리떡을 인분불에 구워먹도록 지시받았다가 소똥으로 대신 떡을 구워먹는다(겔 4 장).



베드로에게도 세번 씩이나 못 먹을 짐승들을 먹으라고 지시하심으로

이방인 고넬료 백부장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엄숙한 사명을 깨우쳐 주셨다.(행 10:12)



마지막 시대에 열린 책 다니엘과 요한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들이

신상, 네 짐승, 작은 뿔 등으로 형상화되고

하나님의 보좌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이

시청각적 기대감을 주고있는 것은 얼마나 역동적인 모습인가?



재림교 성경 주석 7권 909 페이지



“그리스도께서 신실한 사람들을 당신께로 모으시기 위하여 오실 때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질 것이다. 가장 높은 산들의 꼭대기에서부터 가장 깊은 동굴의 가장 낮은 곳에 이르기까지 온 땅이 그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불멸의 몸을 입고 그들의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무덤에서 나올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잘 살펴보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가시적인 보증을 주신다.

귀 귀울여 들어보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오감을 모두 열어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보자.

“숨어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수요일 –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민 10:29-32)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미디안 사람이었다.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소생이었다.

이드로는 르우엘(출 2;18), 또는 호밥(삿 4:11)이라 불리었다.

호밥이 이드로의 아들이었다고 보기에는 모호한 점이 많다

(삿 1:16절의 70인역에는 “장인 호밥”이라고 기록됨).



1. 모세가 그의 장인에게 동행을 요청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컸다고 본다.





왜냐하면 호밥이 장인 이드로와 동인이명이라면

모세는 그에게 처음부터 은혜를 입은 처지였고(출 3:1)

그의 동행을 요청하는 말도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고자 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민 10:29-32)



이드로가 거절하자 “우리의 눈이 되”어달라는 부탁의 말을 하지만

모세는 다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그 복을 나누겠다며 동행을 촉구했다.



물론 이드로가 모세의 재판에 대한 효과적인 제안을 한 것을

하나님이 용인하시는 장면 등을 통해

그의 지혜와 광야의 경험 등이 많은 조언과 도움이 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모세가 당면한 도전들을 헤쳐나감에 있어서

장인의 협력을 기대한 것은 연약성에 기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인 동정과 지지를 필요로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마 26:36-43)



잠들어버린 제자들 대신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에게 보내졌다.

“그들은 … 고통과 슬픔을 당하였기에 지상 생애에서

시련을 당하시는 구주를 동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대의 소망 422 페이지)



모세는 독불 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겸손히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할 줄 알았고

들은 바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이 겸손하므로 다른 이들의 협력을 얻고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그분의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업을 보다 효과적으로 진행해 나갈 수 있다.



[참고]



모세 5경은 장인이 모세와 가나안까지 함께 했는지에 대하여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드로에게 동행을 요청한 내용 뒤에 이드로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의 언약궤가 … 앞서 행하였다.”고 진술한다. (민 10:33-36)



가나안 여정에서 모세의 장인의 역할을 축소하기 위한 의도적 진술로 보이며

출 18:27에는 “모세가 그의 장인을 보내니 그가 자기 땅으로 가니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삿 1:16절과 삿 4:11절에는 장인이 모세와 함께 동행했슴이 분명해 보인다.



비록 장인 이드로가 그의 지혜와 경륜을 통해

광야 생활 중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자가 되셨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하다.







목요일 – 본향을 향하여? (민 10:11-36)



1.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본격적인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이동한 방식에 있어서 두드러진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지파별로 순서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움직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재림교 성경 주석(출 18:19-27)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늘에 관련된 사물마다 완전한 질서 가운데 있다.

복종과 철처한 훈련이 천사의 무리의 행동에 나타난다.

성공은 질서와 조화된 행동에만 따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시대 못지 않게 지금도 그분의 사업에 질서와 조직을 요구하신다.



시내산에서 가나안 접경인 가데스 바네아까지는 열 하룻길!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가까운 길인 블레셋 땅을 통과하는 해변길을 포기하셨다.



출 13:17절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출애굽을 시키신 하나님의 목적은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그토록 원망한 것처럼 “광야에서 죽게 하거나”

“나온 애굽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1) 하나님이 그 가깝고 좋은 길을 포기하신 것은

그분의 능력의 어떠함에 있지 않다.

백성들의 마음의 상태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나사렛에서는 (마 13: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본향을 향하여 가는 자들인가?

그저 형편따라 광야에서 그냥 버티다가 늙어 죽거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도 상관없는가?



목요일 교과의 제목 옆에 붙어 있는 ? 마크는 우리에게 강력하게 묻고 있다.

당신은 정말 본향을 향해 가고 있나?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길은 가장 좋은 길이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인생길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많은 협곡과 불모의 황야를 걸었던 것과 같을지 모른다.



그들의 행진은 느리고 고통스러웠고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의 입에서 쉴새없이 불평과 원망이 터져나온 것을 우리는 본다.



그러나 백성들의 상태를 정확히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최소한 “전쟁”을 피해가게 하셨다.

최소한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제공하셨다.

최소한 갈 방향과 때를 정확히 알려주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무도 살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을 광야 길을 선택하신 것은

a. 백성들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고

b.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실 능력이 있으셨기 때문이었고

c. 목적지는 오직 가나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진정한 목적지는 과연 어디인가???

오늘 나의 삶이 광야처럼 참으로 고되고 힘들다고 생각될지라도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광야 길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실 자신이 있으시다!

우리의 목적지도 오직 하늘 가나안이라면…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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