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계속되는 투쟁(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1/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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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1-23 07:48 조회9,099회 댓글0건본문
1월 30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3분
기억절: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느 2:18).
연구 범위: 삼상 17:43~51, 삼하 11:1~17, 왕상 18:21~39, 왕하 19:21~34, 에 3:8~11, 느 1장
다윗, 엘리야, 히스기야, 에스더, 느헤미야의 삶을 비교해 보면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악의 조류를 되돌리신다는 비슷한 주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들의 일화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사실은 거대한 장애가 있다고 할지라도 악의 홍수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을 성취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굳게 설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권능 안에서 인내하면 악의 세력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반면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 안에서 기뻐하는 삶은 신앙의 주안점이자 도전이기도 하다. 간혹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우리 자신보다 훨씬 크게 보이는 엄청난 문제들 때문에 이것이 항상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이 온전히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기뻐하는 생활은 우리 삶의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논리적인 결과라기보다는 믿음과 예배의 행위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가 유일하게 나타낼 수 있는 논리적인 반응이다.
※ 학습 목표
➊깨닫기 : 하나님은 신실한 백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우는 분임을 깨닫는다.
➋느끼기 : 때가 되면 하나님이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리라고 확신한다.
➌행하기 : 기도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현재의 의무에 충실한다.
A.
❶‘정신력 싸움’이란 말이 가장 어울리는 분야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신앙 투쟁이다.
❷다윗이 골리앗과 상대할 때보다 더 정신적으로 무장해야 했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 그가 왕으로 있을 때였다.
❸엘리야나 히스기야의 경험은 대쟁투가 영혼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한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❹우리가 사탄에 맞서 투쟁할 때 필요한 영적 무기들은 무엇입니까?
※ 말씀과 기도와 충성이다.
B.
❷에스더는 유다 민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사탄의 위험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섰고 온 유대인은 이 일을 위해 기도했다.
❸느헤미야가 수많은 난관과 원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❹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끝까지 싸워야 할 영적인 전쟁은 무엇입니까?
※ 진리를 바르게 깨달아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일이다.
결론: 우리는 한두 번쯤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반대에 부딪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첫째날(일) 1월 24일
다윗, 골리앗, 밧세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인생은 복잡하다. 왜냐하면 인간인 우리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상상해 보라. 창조주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타락하였다. 물론 우리는 잠재적으로 선이든 악이든 놀라운 수준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고 어떤 사람들이 훌륭한 수준의 선에 도달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극단적인 부패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양 극단이 한 사람 안에서 나타날 수 있다. 감사하게도 한때 최악의 상황에 있던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과 인류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해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높은 차원에 있던 사람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사탄은 실존하며 대쟁투도 현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 중 최고의 인물들도 원수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벧전 5:8).
1. 삼상 17:43~51을 읽어 보라. 다윗의 입술에서 그의 승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어떤 진술이 흘러나왔는가? 다른 한편으로 삼하 11:1~17을 읽어 보라. 동일한 인물로부터 어떤 뚜렷한 대조점이 보이는가? 무엇 때문에 그런 차이점이 생겼는가?
[삼상17:43~51]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 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삼하11:1~17]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2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3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4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니라 6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7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의 어떠한 것을 묻고 8 저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9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잔지라 10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우리아가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11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12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유하니라 이튿날 13 다윗이 저를 불러서 저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때에 저가 나가서 그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14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16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의 있는 줄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17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답: 다윗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그러나 밧세바 사건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잊어버렸다.
거인 골리앗을 무찌른 동일한 다윗이 자신의 욕정과 거만함에 패했다. 그는 이미 많은 여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여인을 더 바라보았다. 그것도 결혼한 여인이었다. 갑자기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삼상 17:47),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삼상 17:46)라는 구호가 종적을 감췄다. 그가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전쟁에 나서야 했던 때가 있었다면 그것은 엘라 골짜기의 전쟁터에 있었을 때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의 마음 구석에서 대쟁투가 벌어지고 있었을 때였다.
밧세바와의 아찔한 일탈을 경험한 이후에 다윗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지만 남은 평생 슬픔과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통회하며 시편51편을 기록했다. 거기서 그는 정결한 마음을 구했고(시 51:10)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도했다(11~12절). 우주적인 대쟁투의 관점에서 보면 능력이 많은 사람도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처럼 연약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진실로 회개하는 모든 자들과 함께 일하고자 하신다.
<부가설명> 다윗은 가장 번영할 때 사단의 공격에 넘어졌다. 다윗이 소년시대 목동으로 일할 때나 골리앗을 이길 때나 사울을 피해서 도망 다닐 때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난의 시기가 지나고 왕이 되어 나라가 번영하고 강국이 되었을 때 그는 의지하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욕망에 노예가 되었다. 다윗이 워낙 느슨해지니까 사단이 그이 눈에 정욕의 안경을 씌우고 하필 그의 눈앞에 밧세바가 나신을 목욕하는 것을 보이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윗이 그런 여자를 봤을지라도 그는 속이 눈을 돌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숨겼어야 했다. 예수님은 오른 눈이 범죄하면 그 눈을 빼버리는 거시 낫다고 하셨다. 오늘날 성도들도 범사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바르게 다스려야 한다. 솔로몬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라고 권하였다.(잠3:6) 번사, 곧 모든 일에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하자.
교훈: 한때 성공했던 인물도 영적으로 크게 실패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나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둘째날(월) 1월 25일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
디셉 사람 엘리야는 성경에서 가장 다채로운 인물이 되어야 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왕 앞에 나타나 삼(수 년) 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왕상 17:1).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이나 그에게서 빠져나오는 것 모두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가죽 띠를 맨 이 털 많은 사람(왕하 1:8)은 경비대를 뚫고 들어가서 하나님의 기별을 전한 다음 12킬로미터 떨어진 산까지 내달렸다.
당시 북방 이스라엘의 상황은 난감하였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왕상 19:10) 대신 풍요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비가 오지 않으리라는 예언은 곡식을 자라게 하고 가축들을 번식시켜서 농부들에게 번영을 약속하는 신이었던 바알에 대한 전면 도전이었다. 당시의 유행하는 종교 의식들의 초점도 풍요와 소출이었다.
삼 년 동안 풍요의 신들은 무능했다. 그러자 엘리야는 다시 왕에게 나타나 바알과 아세라(풍요의 여신)의 모든 선지자들과 자신 사이에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1 대 850의 대결이었다(왕상 18:17~20).
날이 이르러 군중이 갈멜산에 집결하자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 18:21). 번제를 위해 황소들이 준비되었다. 백성들은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응답할 수 있는 신이 누구인지 지켜보았다. 황소는 고대로부터 풍요를 약속하는 종교의 대표적인 사물이었다. 따라서 풍요의 신들이 꼭 그들의 힘을 보여주어야 했다.
1. 왕상 18:21~39을 읽어 보라. 명백하게 대쟁투가 벌어지는 상황임에도 엘리야는 이스라엘 가운데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정말 보고 싶었는가? 그것이 오늘날에도 우리와 관련이 깊은 이유는 무엇인가?
[왕상18:21~39]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23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답: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기 원했다. 오늘날 우리는 참 하나님을 성경에서 바르게 만나서 참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왕상 18:37에서 모든 것이 밝혀진다. 매우 인상적인 기적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성실성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셨던 분이 누구신지 주목하라. 여호와께서는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마음을 돌이키도록 강제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성령을 보내신다. 그리고 성령께 반응하는 백성은 먼저 그분께 돌아가기로 결심을 내리게 된다. 그런 다음에야 그들은 그분의 능력으로 결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모든 심장이 뛰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을 따르도록 단 하나의 심장도 강제하지 않으신다.
<부가설명> 바알을 섬기는 자들은 바알이 번개와 비를 주장하는 신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선전했다. 농사를 짓는 데는 반드시 비가 있어야 한다. 비는 때도 번개를 동반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자 전쟁의 신인 여호와 대신에 농사의 신인 바알을 섬기는 것이 풍요롭게 하는 길이라고 선전했을 것이다. 아합은 바알을 주신으로 숭배하는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으면서 이세벨은 지참금처럼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에 퍼뜨리기 위하여 바알 선지자 450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을 대동하고 온 것이다. 이 선지자들은 왕궁의 권력을 업고 포교했고 이스라엘은 솔깃하게 넘어갔다. 엘리야가 비가 온다고 말하기까지는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알이 헛된 것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활에서 체험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다. 비를 주관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또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신이 참 신이라고 한 것도, 바알을 번개의 신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택한 방법이었다. 바알을 번갯불을 내리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비와 번개와 해를 다 주관하시고 농사를 잘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증거하고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하였다. 오늘날도 거짓 신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은 것 같다. 우리는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성경적으로 성경을 깨닫고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올바르게 경배해야 할 것이다.
교훈: 엘리야의 예언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잡고 있던 풍요의 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하셨다.
셋째날(화) 1월 26일
비방의 말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왕하 19:19).
신흥강국 앗수르가 북방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그 백성들을 메소포타미아 지역 곳곳에 흩었을 당시에 유다의 왕은 히스기야였다(왕하 18:9~12). “그분은 그들을 이방인 중에 흩으심으로 그 선조들의 땅에서 그들을 통하여 더 이상 행하실 수 없었던 일을 성취하고자 하셨다. 인류의 구주를 통하여 용서받기를 선택할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계획은 성취되어야 하였고 이스라엘에게 이르러 온 고통 중에서 그분은 세상 열국에게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길을 준비하고 계셨다”(선지자와 왕, 292).
몇 년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유다에 눈을 돌려 요새화된 모든 성을 점령하고 무거운 조공을 부과했다(왕하 18:13~15). 히스기야가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털어냈음에도 앗수르 왕은 만족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의 항복을 받기 위해 사신들을 보냈다.
앗수르인들은 유다 백성들을 현혹했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신들도 그 백성들을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하지 못했다고 경고했다. 그 말은 유다 백성의 신이라고 더 나을 것이 있겠느냐는 뜻이었다(왕하 18:28~30, 33~35).
히스기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했다. 즉 그는 기도했다(왕하19:15~19).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 그에게 용기를 주셨다(왕하 19:6). 그리고 선지자를 다시 한 번 보내신다.
1. 왕하 19:21~34을 읽어 보라. 특히 21~22을 자세히 읽어 보라. 최악의 위기에 놓인 백성에게 하나님은 어떤 기별을 주셨는가?
[왕하19:21~34]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2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훼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23 네가 사자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지경 끝에 들어가며 그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24 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렸노라 하였도다 25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상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26 그러므로 그 거한 백성의 힘이 약하여 두려워하며 놀랐나니 저희는 마치 들의 풀 같고 나물 같고 지붕의 풀 같고 자라기 전에 마른 곡초 같으니라 27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 28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에 꿰고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29 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명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 삼 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30 유다 족속의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가 서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저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답: 아수를 왕이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을 향하여 멸시하는 말을 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들의 신과 같은 정도로 폄하한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에게 대든 것이라고 하셨다. 결국 아수르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라는 기별을 주셨다.
이 모든 결과는 거대한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 성곽 둘레에 진을 쳤을 때에 일어났다. 겁에 질린 예루살렘 백성이 아침에 일어나 본 것은 방어벽을 뚫고 들어오는 정복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이 본 것은 죽음의 적막 속에서 벌판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적군의 주검이었다(왕하 19:35). 망신을 당한 앗수르 왕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두 아들의 손에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왕하 19:36~37).
<부가설명> 아수르의 예루살렘 침공과 하룻밤에 그 많은 군사가 죽은 사실은 계시록 20장의 곡과 마곡이 새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일어나는 결과가 어떨 것인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표상이 된다. 여호와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은 무기를 들고 세상에서 싸우는 그런 류의 싸움이 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한 천사가 하룻밤에 십팔만 오천 명을 죽게 하였다. 사단이 히스기야를 공격한 것은 실제로는 히스기야가 경배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공격한 것이다. 말로 공격했다. 사단과 그리스도의 싸움은 말로 하는 공격이다. 사단은 거짓말로 예수님을 공격하고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대하신다. 이 싸움은 오늘날 교회가 하는 싸움이다. 우리는 전도로 사단을 공격하고 사단은 거짓으로 교회를 공격한다. 전도를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단의 진영에서 예수님께로 오는 것이고 듣지 않는 사람들은 사단의 진영에 그냥 남는 것이다. 전도할 때 전도를 받는 사람 마음은 대쟁투의 전장이 된다. 성령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강제하는 사단에게 사람들이 더 잘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과 성령이 일대일로 투쟁하면 사단이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전적으로 성령께 굴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겨놓은 것이다.
교훈: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앗수르 군대는 하나님을 비방하며 항복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앗수르 대군을 물리치셨다.
넷째날(수) 1월 27일
사망의 조서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에 3:13).
오늘날 우리가 에스더 이야기에서 전개되는 고대 페르시아의 전통과 관습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그 제국을 사용하셨다(창 12:1~3, 사 45:1, 대하 36:23).
젊은 유다 처녀 에스더는 왕비가 되었다. 물론 그의 신분상승은 애굽의 요셉 또는 바벨론의 다니엘과는 사뭇 다른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그녀 역시 요셉과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곳에 있었다.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그녀를 사용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 속에서 대쟁투의 주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가 되었다.
1. 에 3:8~11을 읽어 보라. 유다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를 염두에 둔다면 특히 메시아의 오심과 관련하여 이 조서의 성공이 가져올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에3:8~11]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도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보다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9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저희를 진멸하소서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부쳐 왕의 부고에 드리리이다 10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며 11 이르되 그 은을 네게 주고 그 백성도 그리하노니 너는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라 하더라.
답: 하나님의 율법을 걸고 시험을 하여, 유대인을 멸절하므로 메시야가 오실 길을 차단하려고한 사단의 전략이었다.
“왕은 이 조서를 발효(發效)함으로 일어날 큰 결과를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그 음모의 숨은 선동자인 사탄은 참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보존할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제거하고자 노력하였다”(선지자와 왕, 600~601). 그리고 이 사람들을 통해 세상의 구주가 오실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 문제는 경배와 관련해서 시작되었고 일부 유별난 집단은 권세를 가진 자들의 법과 전통을 따르기를 거부했다(에 3:5, 8 참고). 물론 종말의 시대와 상황이 다를지라도 그 배후의 실상 즉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대쟁투는 여전히 동일하다. 하나님께 충성하려는 자들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있었던 비슷한 일들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구 역사의 막바지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계 13:15)라는 명령이 반포되리라는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된 한 가지 사실은 사람들이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가설명> 에스더 때의 사건은 하나님의 법과 국가의 법의 대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라는 말도 여호와라는 말도 없는 책이 두 권인데 에스더서와 아가서이다. 아가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노래한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부부간에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에스더서는 유대인이 환난을 당하는 사건이다. 당연히 유대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데도 하나님이라는 말도 여호와라는 말도 없다. 꼭 그 말이 나오게 되어 있는 장면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고 기도하라고 할 때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표현이 없다. 이것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대 환난 때의 사정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야곱의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세상 법 사이에서 표적이 될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성소에서 봉사를 마치셨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으로 호소하는 우리의 기도가 성소에 상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믿음으로 주 안에 서 있는 그 상태로 사단의 세력을 대해야 하는 것이다. 승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의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은 이것을 예표 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사단은 온 역사를 통하야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온 역사에서 대쟁투가 이어지는 것이다.
교훈: 페르시아에서 유다 백성을 말살시키기 위한 조서는 여러 면에서 종말의 시기에 하나님께 충성하려는 자들이 겪게 될 대쟁투의 실상을 예표한다.
다섯째날(목) 1월 28일
느헤미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느 2:17).
느헤미야의 이야기 역시 이스라엘 민족이 더 이상 정치적인 세력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남은 자들이 이방 땅에 흩어져 살 때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비록 언약의 목적에 맞게 사는 데 실패했을지라도 자신이 약속한 언약에 항상 충실하셨다.
1. 느헤미야 1장을 읽어 보라. 그는 어떤 배경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는가? 그의 기도는 어떤 면에서 단 9:4~19에 나오는 다니엘의 기도를 떠올리게 하는가? 두 기도의 쟁점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전체 대쟁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느1:1~1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 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더니 2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3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답: 느헤미야와 다니엘은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고 또 그들도 조상과 같이 하나님의 법을 범했기 때문에 이방에 포로가 되었고 하나님의 성전이 황폐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그 성전과 성이 회복되게 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같다. 두 기도의 쟁점은 예루살렘 회복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충심으로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왕의 은혜를 입은 느헤미야는 고향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첫 몇 주 동안 주변 상황을 둘러보았다. 그는 밤에 도성을 조사하고자 했지만 무너진 성벽의 잔해가 너무 거대해서 멀리 가지 못했다(느 2:14). 그래서 성 밖으로 나가 성벽을 살펴보았다(느 2:15).
2. 느 2:16~18을 읽어 보라. 백성의 지도자들이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시작하였다. 그대는 느헤미야가 어떻게 그들을 설득했다고 생각하는가? 느헤미야는 오늘날의 교회에 무엇을 가르치는가?
[느2:16~18]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인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고하지 아니하다가 17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18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답: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오게 된 경위를 알아듣도록 잘 설명하고 왕이 그렇게 허락한 것 자체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일임을 납득시키고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설득했고 그들은 마음을 함께 모았다. 오늘날 교회도 이렇게 온 교회가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의 일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느헤미야는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그곳에 온 이유를 처음부터 밝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온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예루살렘을 개선하기 위한 계획을 최선을 다해 방해하는 이들이 있었다(느 2:10, 19~20). 성벽을 보수하는 사업이 시작되자(느 3장), 이방인 관원들은 “크게 분노”(느 4:1)하였으며 그런 노력을 비웃었다(2~3절).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지하게 일을 진척시키는 것을 보고 심히 분노하여 공격을 감행할 계획을 세웠다(6~8절).
유다 백성의 계획은 쉽게 좌절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온갖 술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성벽 중건을 준비하며 원수의 위협은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느 6:14~15).
<부가설명> 느헤미야는 바사 왕궁의 왕의 술을 맡은 관원 장이었다. 왕의 술을 맡았다는 것은 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술에 독을 타서 왕을 시해할 수 있기 때문에 술 맡은 관원은 절대적으로 신임을 받지 않으면 임명되지 않는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을 왕은 예루살렘 수보를 위해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함께 온 사람들과 에스라와 같이 와서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격려해서 성벽을 쌓는데 분담을 시켰다. 각자가 맡은 지역에서 자기에게 해당되는 부분을 쌓았다. 52일 만에 완성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교인 각자와 교회의 조직의 여러 부분을 맡은 사람들이 자기가 맡은 일을 충성스럽고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다. 그 일을 수행하는 중에 옆에 성벽을 쌓는 사람과 잘 맞추어야 했다. 똑 같이 교회에 각 부서를 맡은 사람들은 다른 부서를 맡은 사람과 잘 맞추어서 함께 교회를 든든히 해야 한다. 성벽을 혼자 쌓은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한 사람이 이끄는 것이 아니다. 지체된 모든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각 지체가 완전한 협력으로 일해야 한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되듯이 교회의 사업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교훈: 느헤미야는 여러 난관과 원수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우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음으로 완수하였다.
여섯째날(금) 1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가 이번 주에 공부한 것처럼 성경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누누이 계시한다. 물론 많은 경우에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는 그분의 성실하심이 언제나 명확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펴본 기사들에서 우리는 사건의 전말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가운데 포함된 인물도 있고 헷 사람 우리야처럼 포함되지 않은 인물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공부했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분명히 대쟁투에 개입되어 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사실 성경에 기록된 자들처럼 이 땅에 태어났지만 일이 잘 해결되는 것을 못&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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