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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광야에서의 승리(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2/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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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1-30 09:53 조회8,0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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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6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00분

 

기억절: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연구 범위: 마 1:20~23, 요 9:39, 마 3:7~12, 마 4:1~10, 신 34:1~4, 계 21:10

 

  “사탄은 자기와 여인, 자기의 자손과 여인의 자손 사이에 증오심이 있게 되리라는 것을 들었을 때 인간 본성을 타락시키려는 자신의 사업이 방해를 받을…것을 알았다. 그러나 구원의 경륜이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났을 때 사탄은 사람을 타락시킴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그분의 높은 지위에서 끌어 내릴 수 있다고 그의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였다. 그는 여기까지는 그의 계획이 지상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자진해서 인성을 취하실 때 그분 또한 패배를 당할 것이며, 이렇게 하여 타락한 인류의 구속은 저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부조와 선지자, 66).

  이번 주에 광야에서의 유혹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는 아마도 이전에 성경에서 그처럼 명확하게 계시된 적이 없는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필사적인 대쟁투를 보게 될 것이다. 사탄은 세상이 자신의 소유라고 선언했고, 그리스도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오셨다. 세상을 되찾는 것은 구원의 계획의 핵심이었다. 예수님 탄생 이후에 그분을 죽이려는 계획에 실패함으로 사탄은 인류의 구원을 방해할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광야의 유혹에서 이것이 펼쳐진다.

 

※ 학습 목표

➊깨닫기 :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통치권을 되찾고, 사탄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죄인을 구원하며, 우주에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임을 이해한다.

➋느끼기 :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구원을 누린다.

➌행하기 :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모신다.

 

A. 

❶많은 지도자들이 있음에도 세상이 점점 더 큰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사단이 왕 노릇하고 죄인 안에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이다. 

❷그대는 예수님이 어떤 면에서 궁극적인 세상의 구세주가 되신다고 생각합니까?

※ 예수님이 사망을 처리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셔서 예수 안에 모든 사람이 사망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히2:14,15, 딤후1:10)

❸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다는 사실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 그리스도인이 예수 안에서 사단을 넉넉히 이긴다는 보증이다. 

❹현재 우리가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이겨야 할 사탄의 시험은 무엇일까요?

※ 개인적 문제도 있을 것이고, 교회적으로는 진리를 왜곡시키고 교회를 혼란하게 하면 침체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B. 

❷예수님은 사탄에게 어떤 종류의 시험을 받으셨으며 어떻게 그것들을 이기셨습니까?

※ 먹는 것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경배하는 문제였고, 기록된 말씀으로 이기셨다. 

❸예수님이 이기신 시험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하는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 우리도 기록된 말씀에 철저히 서서 예수 안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❹우리는 끊임없이 찾아오는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 있을까요?

※ 말씀과 기도로 물리칠 수 있다. 

 

  결론: 예수님은 아담이 에덴에서 상실한 것들을 되찾고, 마귀와 그 무리들을 심판하며,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인류와 온 우주에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을 계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첫째날(일) 1월 31일

구원하러 오신 임마누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1, 23).

 

1. 마 1:20~23을 읽어 보라. 예수님께 붙여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마1:20~23]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답: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고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첫째, 그분은 아담이 잃은 통치권을 되찾기 위해 오셨다(롬 5:12, 15). 예수님이 군중들을 감동시키시고(오천 명이 그분을 왕으로 세우기 원함), 아이들이 호산나(백성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할 자에게 바쳐지는 찬양의 형태)를 노래했을 때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왕다운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이 그분의 능력으로 퇴락한 인간을 온전한 존재로 회복시키시고(예를 들어 선천적인 맹인과 열두 해 혈루병을 앓은 여인을 고치심) 또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바람과 파도를 명하여 잠재우시는 등 천연계와 피조물을 지배하시는 그분의 권세를 볼 수 있다.

  둘째, 그분은 마귀의 일을 멸하고 그를 심판하기 위해 오셨다(요 9:39, 요일3:8). 우리는 자주 마귀가 번영하는 이유에 대해 의아해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의의 문제를 다루시며 곧 끝이 이를 것이라고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마귀들도 자신들을 능가하는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자주 그분의 진정한 정체를 외치곤 하였다. 때로는 예수님이 정체를 밝힐 준비를 하시기 전에 그렇게 하였다. 그분은 귀신들린 백성들을 고쳐주셨고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 도망가려고 할 때에 그들의 정신을 온전하게 회복시키셨다.

  셋째, 예수님은 잃은 자들을 찾아 구원하고 그들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눅 19:10, 요 1:29).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셔서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히 2:17).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 우리에게 은혜, 용서, 칭의, 영광을 주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동일했던 언약의 목적이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N. T. Wright, Justification: God's Plan and Paul's Vision (InterVarsity Press. Kindle Edition).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분의 참성품을 대쟁투를 지켜보는 온 우주와 우리에게 계시하기 위해 오셨다(요 14:9).

 

<부가설명> 예수님은 그 이름이 탄생을 전하러 온 천사 가브리엘에 의하여 제시된 이름이다. ‘여호와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뜻이다. 여호수아라는 히브리 이름을 헬라어로 적어서 헬라 발음으로 읽으면 예수가 된다. 나는 여호와는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여호와라고 풀이하기를 좋아한다. 예수님은 구원하시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사야가 예언한 바로 그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였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말씀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은 하나님이신 사람이요 또 사람인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할 수 없다. 그분은 100% 하나님이고 또 100% 사람이시다. 하나님이 사람 중에 계시는 일은 일찍이 성소를 지으라고 하실 때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25:8) 옛날 성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거하시기 위하여 지으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임마누엘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사업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구원사업을 건축물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이 성소의 원형이 바로 임마누엘 예수님이시다. 성소와 그 기구와 성소봉사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구원사업을 설명하는 것들이다. 원형 성소를 하늘에 있는 건물에서 찾기보다는 임마누엘에서 찾는 것이 구원의 역사에서 더욱 성경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님이 죄인과 함께 거하면 죄인은 그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 하나님이 그들 중에 거하시겠다고 한 것은 그들의 죄를 사하여주시겠다는 의미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죄 사함이 오직 예수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죄 사함 안에 있는 것이고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생명 싸개 안에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교훈: 예수님은 잃은 지구의 통치권을 되찾고, 마귀를 심판하며,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고,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을 계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둘째날(월) 2월 1일

예수님의 침례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침례 요한의 등장은 유다 지역에 흥분의 물결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의 용모는 선지자 엘리야와 비슷했다(마 3:4, 왕하 1:8 참고). 백성들이 사백 년 만에 처음으로 그에게서 선지자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이 이전에 그처럼 오랫동안 침묵하신 적은 없었다. 이제 그분은 백성들에게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분명 뭔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었다.

 

1. 마 3:7~12을 읽어 보라. 왜 침례 요한은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임박한 진노(7절), 나무뿌리에 놓인 도끼(10절), 타작마당의 철저한 소제(12절), 꺼지지 않는 불에서 타는 쭉정이(12절)와 같은 심판의 주제를 그분과 연결시키려고 했는가?

[마3:7~12]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답: 예수께서 오신 것이 세상의 심판이 된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심판이 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당시의 백성들은 그들이 종말의 시대를 산다고 믿었다. 그때 요한이 광야에서 나타나 그들에게 침례를 받고 요단강을 건너가라고 권유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새로운 출애굽이었다. 그리고 (마른 강 바닥을 걷는 것보다) 물에 젖는 것은 메시아가 로마를 무찌르고 선지자들이 말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문으로 인도할 때에 그와 함께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정결과 준비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적어도 이것이 많은 사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요한과 예수님 모두 정치적인 운동을 이끌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구원의 사건이었다. 요한의 행보에 대한 누가의 설명은 이사야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거기서 그는 포로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길을 예비하시는 방법을 묘사하고 있다(눅 3:3~6). 예레미야는 그렇게 특별한 길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맹인, 다리를 저는 사람, 잉태한 여인, 아이를 안은 어머니 등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자들을 위한 것이며,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렘 31:7~9).

  물론 백성들은 요한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은 자신도 하나님의 큰 날을 위해 준비될 수 있고 곧 그날이 그들에게 임하리라는 소망에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날은 그들 대부분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왔다. 그것은 그들이 그 사실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눅 24:25~27).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요12:47, 3:17) 그러나 성경은 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이라고 기록했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친히 심판하시기 않지만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사실 자체가 세상에 심판이 임한 것과 같다.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러 갔을 때에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이런 심판에 대하여 예언적으로 말했다.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눅2:34,35)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 받는 다는 말과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낸다는 말이 다 심판에 대한 말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사실과 그분이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을 폐하시고 부활하여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셔서 세상에 선포하셨으니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믿지 않는 결정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사망을 당한다. 그것이 심판이다. 침례요한은 이 사실을 선언한 것이다. 

 

  교훈: 침례 요한은 초림을 심판과 연결시켰다. 주님의 오심이 많은 사람의 예상과 다르게 보였던 이유는 그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날(화) 2월 2일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1. 마 4:1~3을 읽어 보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왜 이런 일이 필요했는가? 여기서 벌어지는 대쟁투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마4:1~3]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답: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셨을 때 마귀가 나타나 시장한 예수께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라고 하였다. 마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예수께서 시험받으시기 위하여 광야로 이끌리셨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성령에게 이끌리셨다. 그는 시험을 자초하지 않으셨다. 그는 홀로 계셔서 자기의 사명과 사업을 묵고하시기 위해 광야로 가셨다. 그는 금식과 기도로 그가 걸어가야 할 피묻은 길을 위하여 자신을 무장할 것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구주께서 광야로 가신 것을 알았으며 그는 이것이 예수에게 접근할 가장 적당한 때라고 생각했다”(시대의 소망, 114).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사건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순례 경험 사이에는 뚜렷한 공통점들이 있다. 침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님은 광야로 가셨다. 그곳에서 그분은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40일 동안 금식하셨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도 홍해를 지나 양식이 없는 광야로 들어가서 40년 동안 그곳에서 지냈다. 그 경험이 신명기에서는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주목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신 8:2~3).

  복음서는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하여 주리셨다고 말한다(마 4:2). 그때 욥을 위로했던 친구들처럼 ‘솔깃한’ 조언을 해 줄 존재가 나타났다. 사탄이 위기의 때에 도움을 주러 온 사람처럼 묘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스가랴 3장은 바벨론 유수 이후에 예루살렘을 중건하는 시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환상 중에 스가랴는 하나님 앞에 섰고 그 우편에 누군가 나타났다. 우편에 서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잠재적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가장 신뢰할 만한 친구이다.

  그러나 스가랴 3장에 등장하는 우편의 인물은 신뢰할 만한 친구를 가장한 고발자였다. 예수님이 광야에 계실 때에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돕기 위해서 온 자는 자신을 드러내며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고 말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천사라면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마 4:4)이 어떻게 출애굽의 상황과 연결되는지 주목하라.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부가설명> 예수께서 광야에 나가신 것은 증언의 말씀대로 친히 이루어야 하는 구원사업을 깊이 명상하며 아버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교과 저자가 말한 대로 광야에 나가신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옛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다가 나온 사건은 예수님이 애굽에 들어갔다가 나올 사실을 표상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난 것은 예수께서 40일 광야에 계실 것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 이것은 오직 예수 안에서 참된 이스라엘이 성립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옛 이스라엘도 예수 안에 있을 때에 비로소 참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광야를 여행한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봉사를 통하여 구주를 진정으로 바라보고 믿은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참 이스라엘이 되었지만 형식적인 제사를 드린 사람들은 참 이스라엘로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40일 금식한 사람에게 돌들로 떡을 만들라고 한 것은 음식이 시험의 도구가 되는 것을 잘 나타낸다. 에덴동산에서도 그랬다. 증언의 말씀은 이것을 두고 예수께서 아담이 실패한 바로 그 시점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다고 설명하였다.(소망 117) 광야에서 예수님은 사단과 직접 직면하여 투쟁하셨다. 하늘에서 있었던 투쟁보다 훨씬 위험한 순간이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로 많은 시험이 이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기록한 말씀으로 승리하셨다. 

 

  교훈: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이스라엘의 40년 순례 생활과 공통점이 많다. 사탄은 친구로 가장하여 그분을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셨다.

 

 

넷째날(수) 2월 3일

두 번째 시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마 4:6).

 

  첫 번째 시험은 출애굽과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 근원은 창세기 2장의 타락에 있다. 식욕보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에 우선권을 두심으로 예수님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잃었던 입지를 되찾으셨다. 그러나 인류가 아담 시대 이후로 쇠퇴해 온 간극을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두 번째의 시험도 치르셔야 했다.

  마태복음을 보면 두 번째 시험에서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모셔간다. 그곳은 아마도 가파른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성전 남동쪽 모서리일 가능성이 크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유혹하는 말이 다시 시작된다. 이는 유혹자가 결코 예수님의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1. 여기서 사탄이 정말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정말 뛰어내리셨다면 뭔가가 증명됐을까?(마 4:5~7)

[마4:5~7]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답: 마귀가 얻으려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뛰어내리면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 신분을 의심한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예수님은 얄팍한 설정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하나님께 대한 그분의 신뢰심은 진실한 것이지 억지로 남에게 감동을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전적인 믿음은 그분이 하늘을 떠나 인간이 되어서 분노와 오해, 공개적인 모욕과 불의한 죽음을 견디심으로 증명되었다(빌 2:5~8 참고). 이것이 그분의 운명이었다. 그분은 그것을 감내할 준비를 하셨다. 그분의 사명은 아담과 그의 자손들이 잃어버린 세상을 되찾는 것이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언약은 성취되었으며 세상은 구원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그의 경험을 출애굽과 연관시키시면서 신명기를 인용하여 “기록되었으되”로 응수하셨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신 6:16). 맛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여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을 공급했던 장소였다.

  이 경험을 평가하면서 모세는 백성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출 17:7)다고 진술했다. 이번에는 마귀도 “기록되었으되”(마 4:6)하며 성경을 인용했지만 예수님은 그 말씀의 의미를 더 잘 아시기 때문에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셨다.

 

<부가설명> 맛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시험했다. 마귀의 시험이 바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예수께서는 간파하시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셨다. 마귀는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에 여호와는 계시지 않는다고 속삭인다. 예레미야 때에 이스라엘이 이런 시험에 푹 빠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아니하니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렘5:12) 오늘날 이 세상은 여호와는 계시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교회에도 이런 사상의 물이 스며들었다. 그래서 다원주의가 나오고 도덕주의가 지배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 사람들을 선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종교적 권면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한 말은 거짓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상으로 교회를 포장하였다. 영혼불멸 교리이다. 예수님이 뛰어내렸으면 예수님 스스로가 자기 신분에 대한 의심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받아들이는 시험에 자기를 내어 맡기지 말아야 한다. 

 

  교훈: 사탄은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신성을 증명하도록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두 번째 시험을 물리치셨다.

 

 

다섯째날(목) 2월 4일

마귀 숭배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

 

  마태복음을 보면 첫 번째 시험은 식욕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시도였으며, 세 번째는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즉 그분의 왕권과 지상에 오신 궁극적인 사명에 관한 것이었다.

 

1. 마 4:8~10, 신 34:1~4, 계 21:10을 읽어 보라. 사탄이 예수님을 이끌고 간 “지극히 높은 산”은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가?

[마4:8~10]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신34:1~4]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계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답: 세상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이다. 영적인 안목과 관련된 표현일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있는 아무리 높은 산이라고 한꺼번에 천하만국을 다 볼 수 없다.

 

  성경이 만국을 바라보기 위해 지극히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른다는 식의 주제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미뤄볼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여행이 단순한 관광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각본에는 예언적인 환상이 첨부되어 있다. 높은 산에 올라 모세는 약속의 땅을 보았고 요한은 미래의 새 예루살렘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고대 로마 제국에 포함된 나라들 너머를 보셨다. 사탄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다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러나 그는 죄와 고통, 불의는 감추고 풍요와 화려함만 보여주었다.

  그리고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고 말하였다.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갈망하도록(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에도) 아담과 하와를 속였던 동일한 방식으로 사탄은 자신이 하나님인 양 만국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으며 작은 존경의 표시만 해도 그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쉽게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했다(눅 4:6 참고, 시 2:7~8 비교).

  이 시험의 초점은 충성에 있었다. 인류는 누구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가?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충성했을 때 그들은 실제로 그들의 첫째 충성심을 사탄에게 바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은 이후의 세대에게도 전염되어 신속하게 확장되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이 없었다면 대쟁투는 사탄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면 인류는 지상의 삶조차 지속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위험성은 그만큼 높았다. 예수님은 보디발의 아내를 대하는 요셉처럼 악이 그분의 근처에 머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하셨다. 요셉은 그렇게 할 수 없어 잠재적인 죄악의 현장에서 자신이 물러갔다(창 39:11~12). 우리에게 얼마나 분명하고 단순한 교훈인가!

 

<부가설명>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은 태초에도 있었다. 이 세 시험은 식욕, 정욕, 명예욕에 대한 자극이다. 여자가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나무를 보니 먹음직하고, 이것은 식욕이다. 보암직하고 이것은 눈의 욕심이다. 정욕, 또는 색욕이다. 지혜를 얻을 만하게 탐스러운지라. 이것은 명예욕이다. 마귀는 예수님께 먹으라, 만국을 보이며, 뛰어내리라는 세 가지 시험을 했다. 뛰어내려도 완전히 정상이면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이것은 경제문제, 종교문제, 정치문제에 대한 시험이기도 한다. 유명하게 되면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게 된다. 간단한 시험이었지만 인간적 욕망에 직결된 다양한 시험이 함축되어 있는 내용이다. 또 이 시험에는 신앙을 논리적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것도 포함된다. 오늘날 논리는 가설, 실험, 증명, 사실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학문의 기본 틀이다. 마귀는 예수님께 맨 먼저 가설, 혹은 가정을 제시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것이 가정이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것이 실험이다. 다음으로는 돌들이 떡덩이가 되면 증명이 된다. 그러면 가정이 사실이 되는 것이다. 즉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진짜다.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40일 전에 침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친히 아들이라고 선포하셨다. 그런데 또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증명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아들로 친히 오신 것이다. 사단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을 실험으로 증명하라고 한다. 우리는 오직 기록한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한다.

 

  교훈: 사탄은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여섯째날(금) 2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수백 년에 걸쳐 대쟁투의 주제에 영감을 불어넣은 작가가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일부 복음주의 교회가 오늘날 그 주제를 더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다 할지라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만큼 심도 있고 체계적인 대쟁투 세계관을 가진 이들은 없다.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문자적, 물리적, 도덕적, 영적 투쟁은 재림교회 사상의 중요한 특징이다. 당연하다. 어떤 복음주의 저자가 말했듯이 ‘우주 전쟁의 주제’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광야의 시험을 다룬 이번 주 교과에서처럼 때로 그러한 주제는 매우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선악간의 쟁투 개념은 심지어 뚜렷한 종교적인 환경 밖에서도 나타난다. 시인 T. S. 엘리엇은 그의 시 “Choruses of the Rock”에서 “세상이 돈다 세상이 변한다 / 내 평생 변하지 않은 한 가지,… / 끝없는 선과 악의 투쟁”이라고 썼다. 독일의 무신론자 프리드리히 니체도 이렇게 말했다. “결론을 내리면, 선과 악이라는 두 적대적인 가치가 수천 년 동안 지상에서 진행된 무서운 투쟁에 개입되어 왔다.”—On the Genealogy of Morals and Ecce Homo (Vantage Books Edition: Random House, Inc., 1967), p. 52. 성경은 예언의 신과 더불어 이 투쟁과 영원한 문제들의 진상밖에 우리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없는 것처럼 계시한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유혹은 우리 각자의 상황에 맞게 철저하게 설계되어서 다양한 형태와 규모와 양식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을 유혹할 수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유혹거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명백한 죄 말고 우리는 어떤 문제 때문에 더욱 미묘한 방법으로 시험을 받을 수 있을까요?

※ 인간적 사고방식으로 볼 때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문제가 닥칠 때 미묘한 방법으로 시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자기 마음에 드는 쪽을 합리화 할 수 있다. 

 

➋예수님이 받으셔야 했던 유혹과 멸시에 대해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 참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셨으며 그분을 통해 만물이 창조되었다(요 1:3)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서운 투쟁을 견디셨다는 이 놀라운 개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우리의 이해로는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다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라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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