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전 세계적인 반역과 믿음의 조상들(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1/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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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1-09 03:11 조회9,076회 댓글0건본문
1월 16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38분
기억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연구 범위: 창 4:1~15, 창 3:9~10, 창 4:9, 창 6:1~13, 시 51:1, 창 22:1~19, 창 28:12~15
에덴에서 시작된 타락 이후의 이야기들은 깊은 차원의 속임수와 파괴된 관계를 주제로 삼는다. 이 기간에 갈등은 전 세계로 확장되고 다각적인 양상을 띤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예배는 불화와 죽음의 기폭제가 되며 역사를 통해 이 주제는 반복된다.
아브라함의 경험은 하나님이 반역의 결과를 기꺼이 짊어지신다는 사실로 인해 투쟁 속에서도 큰 위안이 된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의 대속주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야곱과 에서 그리고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깨진 관계의 연속적인 상호작용이 가정과 사람들의 관계를 파괴하기 위해 사탄이 사용하는 수단이 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영원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그분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지키시기 때문이다.
※ 학습 목표
➊깨닫기 : 하나님이 그분의 계획을 수용하는 모든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이해한다.
➋느끼기 :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숨어있는 죄악을 불신한다.
➌행하기 :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모든 깨진 관계에 치유와 화해가 이르게 한다
A.
❷창세기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들은 어떤 투쟁을 경험해야 했습니까?
※ 가족 사이에 일어난 투쟁을 경험했다.
❸그들의 갈등과 불화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그분의 계획을 이루셨습니까?
※ 그들 중에 순복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구원의 섭리를 이루셨다.
❹우리가 투쟁 중에서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소망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영원한 구원의 언약이다.
B.
❷창세기에 형제들의 불화와 갈등을 다루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습니까?
※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야곱과 에서, 요셉과 그 형제들 등등.
❸믿음의 조상들은 어떻게 그러한 갈등과 상처를 극복하였습니까?
※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그 섭리를 받아들임으로 극복했다.
❹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 사이의 깨진 관계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그분의 인도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다.
결론: 죄악과 깨진 관계로 얼룩진 세상에서 신자들은 그들을 인도하며 그들에게 복이 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임재를 통해서 자신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하겠다는 목적을 달성하실 것입니다.
첫째날(일) 1월 10일
가인과 아벨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창 4:25).
1. 창 4:1~15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일화에서 죄가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 알 수 있는가?
[창4:1~15]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답: 살인하게 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가인을 출산할 때 하와는 대단히 기뻐했다. 그는 창 3:15에서 약속된 구속자를 낳았다고 확신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 4:1).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남자 곧 주를 만들었다’라고 읽을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하와가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자를 낳았다고 생각했음을 나타낸다(창 3:15참고).
가인이 성장기를 행복하게 보냈다든지 그 부모가 첫째 아이의 성장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 이야기의 흐름은 재빨리 두 번째 출산과 예배하는 두 청년의 기사로 건너뛴다. 그러나 예배의 차이점이 비극을 초래한다.
2. 창 3:9~10과 4:9을 읽어 보라. 아담과 가인이 각자 죄를 지은 이후에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그들이 나타낸 반응을 비교해 보라. 비슷한 점은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인가?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답: 아담은 하나님이 두려워서 숨었다고 대답했다. 가인은 아우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고 나아가서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고 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비슷한 점이고 아담은 단순히 두려워했으나 가인은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먼저 아담과 가인의 감정을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주목하라. 아담은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했으며 부끄러워했다(창 3:10). 반면 가인은 분노하고(창4:5), 냉소적이며 반역적이었다(창 4:9). 소심하게 핑계를 댔던 아담과 달리 가인은 뻔한 거짓을 말했다.
그러나 절망으로부터 큰 소망이 나왔다. 셋을 출산하면서 하와는 다시 약속된 자를 낳았다고 생각한다(창 4:25). ‘셋’이라는 이름은 ‘두다’ 또는 ‘놓다’라는 의미의 단어에서 유래했다. 동일한 말이 창 3:15에서 뱀과 맞서 그의 머리를 밟을 구속자에게도 사용되었다. 하와는 창 3:15과 더욱 유사한 방법으로 아벨을 대신할 그의 새 아들을 ‘씨’로 묘사한다.
그래서 깊은 절망과 비극 속에서도 그리고 선과 악의 대쟁투가 계속 확대되는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구원의 소망을 붙잡았다. 그것 외에 우리에게 무엇이 있겠는가?
<부가설명> 일반적으로 죄를 도덕성에서 찾고 정의하고 설명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사실도 순종과 불순종의 논리로 설명한다. 이런 설명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주 바르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런 설명으로 죄가 증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 증가하기 때문에 죄가 증가하고 증가하는 죄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도덕성을 더욱 타락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근본에 대한 문제이다. 즉 생명의 씨에 대한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에게서 태어났다. 아담은 이미 생명의 씨가 없어진 상태에 있다. 그가 벌거벗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떠났다는 증명이었다.(1,2과 부가설명 읽어보라) 다만 여자의 씨의 약속으로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수명(壽命)으로 받은 것뿐이다. 그것이 시간이다. 성경은 이것은 은혜 받을 때, 구원의 날이라고 가르친다.(고후6:1,2) 허락된 시간이 끝나기 전에 생명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시간이 끝나는 것과 함께 생명과 존재는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 아담의 씨는 사망의 씨이고 썩어질 씨이다.(고전15:22, 벧전1:23) 이 씨로 태어난 사람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다.(엡4:22) 세월이 갈수록 더욱 썩는 것, 부패가 심해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도덕적 죄가 증가하는 이유이다.
아벨은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을 인정하고 받으셨다. 그러나 가인은 속죄제를 드리지 않고 자기가 사망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자라야 드리는 감사제를 드렸다. 속죄제를 드리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앞에는 없는 자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로 보신다.(마8:21,22 참고) 없는 자의 제사는 그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받으실 수 없었다. 하나님은 가인을 받으시기 원하셨다. 그래서 죄를 다스리라고 요청하신 것이다. 가인은 거절하고 오히려 아벨을 죽였다. 사망의 세력에게 휘둘린 것이다. 지금도 사망의 세력이 생명을 가진 백성들을 그처럼 핍박하고 사망을 휘두른다. 그러나 생명이 승리할 것이다. 생명이신 예수께서 이미 이기셨다.(요16:33)
교훈: 하와의 기대와 달리 가인은 구속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절망과 비극 속에서도 소망은 절대 끊어지지 않았다.
둘째날(월) 1월 11일
홍수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6).
1. 창 6:1~13을 읽어 보라. 여기서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심각해진 선악의 대쟁투를 어떤 관점으로 보게 되는가?
[창6:1~13]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답: 교과 저자는 홍수 사건을 창조 사건의 반대 관점으로 보았다. 즉 창조의 역행으로 설명했다. 창조할 때 합당하게 나누었던 것을 홍수 때에 다시 나눔이 없어지고 혼돈으로 합쳐지는 상태로 보았다. 좋은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눔에는 질서가 있었는데 홍수로 이 질서가 완전히 무너졌다.
우리는 홍수를 통해 창조 행위와 반대되는 부분적인 역행을 본다. 하나님이 분리시키셨던 많은 것들이 다시 합쳐졌다.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 바다와 마른땅, 바다의 어류와 공중의 조류, 땅 위를 움직이는 모든 생물이 뒤섞인다. 지구는 “혼돈하고 공허”(창 1:2)했던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악의 세력에 의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그분은 다양한 요소들을 다시 분리시킴으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셨다. 우선 그분은 죄악이 크고 생각이 부패하며 포악한 당시의 백성으로부터 노아를 분리하신다(창 6:8~9와 창 6:5, 11~13을 비교해 보라). 그다음 하나님은 노아에게 거대한 배를 짓는 임무를 맡기신다. 그다음 하나님은 소수의 사람과 새, 동물을 분리시켜서 다가올 홍수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그들을 안전한 배에 두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초로 생명은 지속되고 새로운 세상이 옛 세상의 잔재로부터 일어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완전한 세계가 아니었다. 홍수가 끝나고 얼마 뒤에 노아와 그의 가정이 지상의 삶을 다시 시작했을 때에 인간 품성의 연약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노아는 술에 취했고 수치스러운 일이 발생했다(창 9:20~27). 믿음의 영웅에게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었다(히 11:7 참고). 대쟁투는 거대한 규모뿐 아니라 각 개인의 심령 속에서도 끊임없이 계속된다.
성경은 홍수를 모든 생명을 제거하는 사건으로 묘사한다(창 7:4).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비슷한 표현이 죄를 용서하시는 구속주의 행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사 25:8, 43:25, 시 51:1). 생명이 제거되든 죄가 제거되든 둘 중에 하나이다.
<부가설명> 교과 저자의 관점대로 홍수는 창조의 역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심판이 바로 창조의 역행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창조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심판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역시 창조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이 바로 그 심판의 말씀이다. 이렇게 보면 홍수가 완전히 창조를 역행한 것은 아니다. 한 번 사망이 세상을 지배한 결과가 어떤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마지막에 불로 세상을 소멸하면 죄의 결과를 볼 죄인들이 없어진다. 사단과 그의 추종 천사들도 없어진다. 홍수는 사망의 세력 일당들이 사망의 세력의 실상을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돌이키는 것은 아니다. 아담의 후손, 노아의 후손들이 이것을 거울삼아 죄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깨닫게 해서 창조주께서 주신 기회를 올바르게 사용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교훈을 삼도록 하신 것이다. 이런 교훈을 무시하고 구원의 기회를 무시하면 마침내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어지고 받아들이 사람들에게는 사망이 없어진다. 우리는 어디 서 있는가?
교훈: 홍수는 창조의 역행이었다. 하나님은 홍수로 파괴된 옛 세상의 폐허에서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셨다. 그러나 그 세상에서도 대쟁투는 계속되었다.
셋째날(화) 1월 12일
아브라함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창 17:19)
아브라함(본명 아브람)은 하나님께 신실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인생 경험은 오히려 그에게 신실했던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자손이 있을 것이라고 두 번이나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처음 이것을 언급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약 75세였다(창 12:2, 4). 그리고 10년쯤 뒤에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다(창 13:16).
아브라함은 시행착오를 거듭했지만 마침내 약속의 아들이 태어났고 하나님은 때로 갈팡질팡했던 종에게 그분의 신실함을 드러내셨다(창 17:19, 21, 창 21:3~5).
1. 창 22:1~19을 읽어 보라. 여기서 대쟁투 전체와 관련하여 드러난 소망은 무엇인가?
[창22:1~19]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답: 대쟁투에서 여자의 씨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그의 부활로 모든 인류가 생명의 소망을 가질 것임을 보여주신 사건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동시에 복음의 실재를 그의 마음에 새겨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 무서운 시련의 어두운 날 동안 그가 참은 고통은 그의 경험을 통하여 무한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구속하기 위하여 치르신 희생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려고 허락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고통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도록 내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치욕과 영혼의 고뇌를 목격한 천사들은 이삭의 경우처럼 중재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족하다’라고 부르짖는 어떤 음성도 없었다.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려고 영광의 왕께서 당신의 생명을 포기하셨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동정과 사랑에 대하여 이보다 더 강력한 증거가 주어질 수 있겠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부조와 선지자, 154).
“아브라함에게 요구된 희생은 그 자신의 유익이나 후대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늘 과 다른 세계들의 무죄한 지적 존재들을 교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싸움터, 곧 구속의 경륜이 실현되는 장소는 우주의 교과서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자 사탄은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가 언약의 조건을 따르지 못하였으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그를 비난하며 고소하였다. 하나님은 온 하늘 앞에서 당신의 종의 충성심을 증명하여 완전한 순종만이 받으시는 바 된다는 것을 나타내며 구속의 경륜을 그들 앞에 더욱 완전하게 밝히고자 하셨다”(부조와 선지자, 154~155).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실 때 뱀이 여자의 씨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나타내셨다. 아담부부가 그 뜻을 알았을 것이다. 여자의 씨로 오시는 구주가 아담에게 선고된 그 죽음을 대신 죽어주시므로 아담이 생명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교육했을 것이다. 아벨은 그것을 믿었으나 가인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왜 죽은 자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믿음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산 자가 드리는 감사 제사를 드렸다. 자신이 아버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희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거나 일부러 알지 않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희생이 직접적으로 어떤 것인지 가르쳐준 것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이다. 여자의 씨로 오시는 구주가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실 것이고 그가 오셔서 이처럼 죽임을 당할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주신 사간이다. 예수께서는 이때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다.(요8:56) 참담한 사건 안에 소망의 빛이 밝히 비친 것이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희생당하시는 것을 친히 본 것이다. 그가 얼마나 감사했겠으며 얼마나 믿음이 돈독하게 되었겠는가.
교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다. 또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를 통해 아들을 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온 세상에 가르치셨다.
넷째날(수) 1월 13일
야곱과 에서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창 27:42~43).
하나님의 목적과 개인적인 반역 사이의 충돌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속에서 한층 심화된다. 고대 사회에서는 장자가 아버지의 사망 전에 아버지의 축복(장자권)을 받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 권리 속에는 거의 모든 가족의 재산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장자는 가족의 생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에서는 그러한 큰 명예를 야곱에게 뺏긴 뒤로 그를 미워하여 아버지가 죽으면 그를 죽이기로 계획했다(창 27:41). 리브가는 며칠이 지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 지리라고 생각하여 안전을 위해 야곱을 멀리 보냈다(창 27:43~44). 그런데 그 며칠이 20년이 되었고 리브가는 다시는 야곱을 보지 못했다.
1. 창 28:12~15을 읽어 보라. 야곱의 꿈속에는 어떤 커다란 소망이 있었는가?
[창28:12~15]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답: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사다리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통하야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친교하시며 친히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보여주셨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약속을 다시 확인해 주셨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반복하심으로 하나님은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야곱에게 확인시키셨다. 비록 야곱의 행적은 하나님의 계획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와 함께하셨다. 야곱은 결혼과 품삯 문제로 삼촌에게 속으면서 20년을 참아야 했다(창 29:20, 23, 25, 27, 31:7). 그러나 야곱은 아내 라헬을 위해 일하는 세월을 며칠처럼 여겼고 그만큼 리브가가 야곱을 생각하는 시간도 흘러갔다(창 29:20).
야곱이 작정하고 귀향길에 올랐을 때 라반은 그를 추격했다(창 31:25~26). 그리고 에서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사백 명을 출동시켰다.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돕기 위해 두 번 모두 개입하셨다. 먼저 라반의 꿈속에 나타나셔서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창 31:24). 그리고 야곱과 씨름하여 다리를 절게 만드셨다(창 32:24~30).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는 야곱의 모습은 에서로 하여금 야곱의 자세가 위협적이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했다.
앞서 전달된 선물과 야곱의 조심스러운 말투는 두 형제의 불화를 치유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다음 이 두 인물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이삭의 장례식이었다(창 35:29). 장례를 마치면 야곱을 죽이겠다는 에서의 계획은 이미 망각되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성경역사에서 갈등 사건들을 기록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구원 사업에 사단이 어떻게 개입해서 방해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밭에 가라지 비유를 하시면서 밭은 세상이라고 하셨다. 좋은 씨를 뿌린 이는 예수님이시고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아담이 썩어질 씨가 되게 한 것이 바로 사단이다. 노아에게서 함이, 아브라함에게서 이스라엘이 이삭에게서 에서가 일어났다. 모두 사단이 뿌린 가라지 노릇을 하게 되었다. 사단이 그렇게 방해를 해도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에게 하신 여자의 씨를 통한 구원의 언약을 성취시킬 것이다. 이 사실을 계속적으로 상기시킨다.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중에도 야곱의 꿈을 통하여 구원의 언약이 성취될 것을 확인하셨다. 야곱이 비록 허물이 많아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시다. 아담에게 약속하신 것을 끝까지 친히 이루실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창조주이신 말씀하나님이 여자의 씨로 사람되어 세상에 오시고 구원 사업을 이루신 것이다.
교훈: 장자권을 둘러싼 야곱과 에서의 갈등은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분의 목적과 약속을 성취해 가셨다.
다섯째날(목) 1월 14일
요셉과 그의 형들
야곱이 에서를 대했던 방법 때문에 형으로부터 심한 고초를 겪었던 것처럼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편애 때문에 형제가 형제를 증오하는 상황을 본다(창37:3~4). 채색 옷은 그냥 줄무늬 천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원어는 그 옷이 다양한 장식과 색색의 바느질 작업으로 완성하는 데만 약 일 년이 소요되는, 왕족들이 입는 비싼 의복임을 암시한다.
요셉이 자신의 꿈에 대해 형들에게 말했을 때에 그는 자신에 대한 증오와 시기심을 더 증폭시켰다(창37:5~11). 그래서 형들은 기회가 오자 그를 제거하기로 모의했다(창37:19~20). 형들은 요셉을 쉽게 제거할 수 있어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년 뒤에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상황을 어떻게 사용하실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1. 창 45:4~11을 읽어 보라. 요셉은 어떤 큰 그림을 보았는가? 그의 주된 초점은 무엇이었는가?
[창45:4~11]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답: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의 섭리를 보았다.
뛰놀던 정든 고향 언덕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사슬에 묶여 낙타 뒤를 따라가는 어린 요셉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라. 경매장에서 입찰자들은 의심어린 눈초리로 값을 부르기 전에 그를 찔러보고 조롱한다. 많은 사람이 이보다 덜한 모욕과 고통에도 믿음을 저버린다.
요셉은 원한을 품고 하나님을 등지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에서 극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러한 모진 고난과 대쟁투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 나라에서 최고위급 군인의 집안일에 곧 적응하였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신임을 얻었다(창 39:1~4). 그리고 마침내 애굽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요셉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 자기 따에 오셔도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고 팔아버리는 사건을 예표하게 하셨다. 요셉이 형제들에 의하여 애굽으로 팔려가는데 노예의 값으로 팔렸다. 예수님도 노예의 값으로 팔렸는데 요셉 때 보다 은 10이 많았다. 요셉은 은 20에 팔렸는데 예수님은 은 30에 팔렸다. 이 금액은 스가랴 11:12에 예언되어 있다. 금액은 그렇지만 사건은 요셉의 사건으로 예표하셨다. 형제들이 요셉을 팔았지만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을 구하시고 야곱의 자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고 출애굽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도 팔려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므로 교회를 세우시고 많은 성도들을 이루게 하시고 애굽 같은 이 죄의 세상에서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신다. 요셉 사건과 출애굽 사건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사업이 어떻게 성취되면 반드시 성취 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예언적 사건이다.
교훈: 요셉은 편애로 말미암아 형제와 갈등을 겪고 불행 속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은 믿음을 지키는 그를 통해 형제들을 구원할 계획이셨다.
여섯째날(금) 1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번 주 일화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대쟁투 중에 있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언제나 우리가 바라는 방식대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팔에 안긴 두 아들이 자라서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죽이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십보라는 모세와 결혼함으로 자신이 그리던 미래를 얻지 못했다. 레아의 결혼 생활은 어린 소녀가 꿈꾸던 것과 같았을까? 젊은 예레미야의 기대와 야망에는 자기 민족에게 반대와 모욕을 당하고 반역자로 간주되는 상황이 포함되지 않았다. 다윗과 밧세바도 여과 없이 폭로되었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선호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어떠신가? 물론 예수님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진토로 나시고, 겟세마네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절규하시며, 매질과 멸시와 조롱을 당한 뒤 33세의 나이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인간적인 측면의 삶은 결코 아무도 희망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삶은 우리를 배신한다. 놀랄 일도 아니다. 타락하고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낙원인가? 에덴은 아주 멀어졌다. 그러나 에덴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지금의 삶과 그때의 삶 사이의 간극은 우리가 바랐던 것과 얻었던 것 사이의 간극보다 훨씬 클 것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형제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형제 사이의 큰 차이
점은 무엇일까요?
※ 창조주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사는 것과, 자기 스스로 무엇이든지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삶을 하나님의 인도에 맡기는 것과 자기가 스스로 하는 것.
➋형제자매의 경쟁심과 시기심은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들이 긍정적인 미래를 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교회를 이루고 있는 가족들이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큰 목적을 볼 수 있게 하려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 성경의 기록들의 신령한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며,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는 분명한 사실을 확신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➌그대의 교회에서 자신이 외톨이며 자신의 삶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 성경에 기록된 고독과 고난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돌보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도우ㅏ햐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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