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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애굽으로 돌아감(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2/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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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5-12-11 23:45 조회9,2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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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6분

 

기억절 :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렘 42:5).

 

연구 범위 : 렘 40:7~16, 렘 41~43장, 출 16:3, 민 16:13, 렘 44장

 

이번 주에 우리는 선지자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부분을 다룬다. 그러나 그 결말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주의 연구 범위는 예레미야서의 상당 부분과 더불어 은혜의 제한성을 예증한다고 요약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은혜를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제공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고, 보호하고, 건져주며, 평화와 번영을 주겠노라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소수의 신실한 남은 무리를 제외한 모두는 그분의 제의를 경멸하고 묵살하였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어떻게 됐는가? 겉으로만 봤을 때 그의 생애와 사역은 결실이 없어 보였다. 눈물의 선지자에게는 울 일이 많았다. 그가 경고한 모든 일들이 지나간 뒤에도 백성들은 여전히 그들의 죄와 이방 신앙, 배도에 집착하면서 노골적으로 선지자를 거역하며 그들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였다. 

우리도 조심해야 한다. 은혜는 합당치 않은 자들에게 베풀어지기 때문에 은혜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암살, 음모로 얼룩진 유다의 마지막 역사를 연구한다.

➋ 느끼기 : 역사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과 죄의 실체에 혐오감을 느낀다.

➌ 행하기 : 역사로부터 배우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려는 버거운 교훈도 수용하기로 결심한다.

 

A.

❷ 이스마엘은 왜 그다랴를 암살했을까요? 그가 놓쳤던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 그다랴가 바벨론의 앞잡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다.

❸ 애굽으로 내려간 백성들의 선택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마음을 택한 것이다. 

❹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세상의 답이 아니라 하늘의 답을 찾아야 할까요?

※ 모든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특히 생명과 사망 문제가 그렇다. 

 

B. 

❶ 그대는 조금 배고프더라도 무엇이 충족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 평안한 상태가 아닐까?

❷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다가 다시 그분의 뜻을 거역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❸ 유다의 남은 백성들은 어떤 이유와 핑계로 하나님께 계속 반항하였습니까?

※ 이방신을 섬길 때가 더 부유했다고 주장했다. 

❹ 우리가 신자로서 정말 추구해야 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구하고 그 생명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결론 : 예레미야서 40~44장은 슬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들은 인간의 본성이 죄의 노예가 되기까지 얼마나 더 깊이 타락해 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애굽으로 돌아간 유다 백성의 이야기가 한 가지 예입니다. 그러나 한 줄기 희망이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의 백성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첫째날(일) 정치적 혼란

12월 13일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 있던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의 왕의 그 땅을 위임했던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이스마엘이 또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모든 유다 사람과 거기에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렘 41:2~3).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였다. 처절한 패배를 맛본 백성들은 교훈을 얻을 법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 렘 40:7~16을 읽어 보라. 백성들에게 어떤 기별이 다시 주어졌는가? 11절에 나오는 ‘남겨 둔’이라는 말에는 어떤 중요한 뜻이 있는가?

[렘40:7~16] 들에 있는 군대 장관들과 그들의 사람들이 바벨론 왕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이 땅 총독으로 세우고 남녀와 유아와 바벨론으로 옮기지 아니한 빈민을 그에게 위임하였다 함을 듣고 8 그들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두 아들 요하난과 요나단과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느도바 사람 에배의 아들들과 마아가 사람의 아들 여사냐와 그들의 사람들이 미스바로 가서 그다랴에게 이르니 9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그들과 그들의 사람들에게 맹세하며 가로되 너희는 갈대아인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거하여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10 나는 미스바에 거하여 우리에게로 오는 갈대아인을 섬기리니 너희는 포도주와 여름 실과와 기름을 모아 그릇에 저축하고 너희의 얻은 성읍들에 거하라 하니라 11 모압과 암몬 자손 중과 에돔과 모든 지방에 있는 유다인도 바벨론 왕이 유다에 사람을 남겨둔 것과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그들의 위에 세웠다 함을 듣고 12 그 모든 유다인이 쫓겨났던 각처에서 돌아와 유다 땅 미스바 그다랴에게 이르러 포도주와 여름 실과를 심히 많이 모으니라 13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들에 있던 군대 장관들이 미스바 그다랴에게 이르러 14 그에게 이르되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가 네 생명을 취하려 하여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낸 줄 네가 아느냐 하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믿지 아니한지라 15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미스바에서 그다랴에게 비밀히 말하여 가로되 청하노니 나로 가서 사람이 모르게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죽이게 하라 어찌하여 그로 네 생명을 취케 하여 네게 모인 모든 유다인으로 흩어지며 유다의 남은 자로 멸망을 당케 하랴 16 그러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 이르되 네가 이 일을 행치 말 것이니라 너의 이스마엘에 대한 말은 진정이 아니니라 하니라.

 

답: 바벨론 왕을 섬기면 안정이 된다는 기별을 주었다.

 

평화의 기별과 보장된 번영에도 불구하고(렘 40:12 참고), 모두가 그런 현상 유지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2. 렘 41장을 읽어 보라. ‘남은 자’에게 어떤 새로운 문제가 생길 것이었는가?

[렘41:1~18] 칠월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냐의 아들 왕의 장관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2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한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 왕의 그 땅 총독으로 세운 바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3 이스마엘이 또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한 모든 유다인과 거기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4 그가 그다랴를 죽인 지 이틀이 되었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더라 5 때에 사람 팔십 명이 그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을 상하고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에서부터 와서 여호와의 집으로 나아가려 한지라 6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서 울며 행하다가 그들을 만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가자 하여 7 그들이 성 중앙에 이를 때에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로 더불어 그들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니라 8 그 중에 열 사람은 이스마엘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우리를 죽이지 말라 하였으므로 그가 그치고 그들을 그 형제와 함께 죽이지 아니하였더라 9 이스마엘이 그다랴에게 속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 시체를 던진 구덩이는 아사 왕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를 두려워하여 팠던 것이라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 죽인 시체로 거기 채우고 10 미스바에 남아 있는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 곧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위임하였던 바 미스바에 남아 있는 모든 백성을 사로잡되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사로잡고 암몬 자손에게로 가려 하여 떠나니라 11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대 장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의 행한 모든 악을 듣고 12 모든 사람을 데리고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싸우러 가다가 기브온 큰 물가에서 그를 만나매 13 이스마엘과 함께 있던 모든 백성이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한 모든 군대 장관을 보고 기뻐한지라 14 이에 미스바에서 이스마엘에게 포로되었던 그 모든 백성이 돌이켜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로 돌아가니 15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여덟 사람과 함께 요하난을 피하여 암몬 자손에게로 가니라 16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하는 모든 군대 장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이고 미스바에서 잡아간 모든 남은 백성 곧 군사와 여인과 유아와 환관을 기브온에서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서 17 애굽으로 가려 하여 떠나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머무렀으니 18 이는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바벨론 왕의 그 땅 총독으로 세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였으므로 그들이 갈대아인을 두려워함이었더라.

 

답: 그다랴가 암살되고 암살자 이스마엘은 도피하였고 백성들은 요하난과 그 무리가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암살의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왕의 종친”과 “왕의 장관”(렘 41:1)들의 소행이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지도층에서 선민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통치에 굴복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그다랴가 바벨론 왕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렘 40:5 참고) 그들은 그다랴를 민족에 충성하지 않는 반역적인 꼭두각시이자 궁궐에서 제거되어야 할 자로 간주했을 것이다.

이후에 우리는 이 남은 자들에게 새로운 위기가 닥치는 것을 본다. 사건을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바벨론인들은 그다랴와 바벨론 병사들의 죽음을 복수하려고 할 것이었다(렘 41:3 참고).

이스마엘과 그 무리의 죄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공포를 야기했다. 

 

3. 이 일화는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우리의 죄와 관계없는 자들에게까지 고통과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교훈을 말해주는가?

 

답: 죄는 주위에 영향을 미친다. 

 

<부가설명> 도덕적으로 죄를 논하면 어떤 사람의 죄는 다른 사람에게 관계없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죽은 문제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존재 문제이다. 우리는 죄를 도덕적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관념이다. 그래서 각 개인이 죄를 짓는 것과 관련해서 죄를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죄는 도덕적 문제 이전에 생명과 존재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문제를 깨닫지 못하면 죄의 보편성을 이해할 수 없다. 교과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스마엘의 암살한 사건이 그 죄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이 짓는 죄가 그 죄와 관계없는 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그런 정도로 이해하려고 하게 된다. 그래서 영향은 받지만 실제적으로는 죄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문제이다. 그러나 생명과 존재 문제는 조상이 생명의 씨를 잃으면 후손이 태어날 수 없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은 잃었지만 육체의 생명을 허락받아서 생육하고 번성하는데, 그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는 썩은 생명의 씨로 태어나는 것이다.(벧전1:23) 그 후손들은 썩어질 씨로 태어나서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다가(엡4:22) 마침내 완전히 썩어 없어지는 것이다. 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구원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 없다.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 전에는 아담 안에서 사망이더니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구원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교훈 ; 그다랴의 지도 아래서 유다의 남은 백성은 안정과 평화를 누리는 듯했지만 일부 세력이 그다랴를 암살함으로 백성들은 다시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둘째날(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함

12월 14일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렘 42:3).

 

렘 42장을 읽어 보라. 여기에 그들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모든 자들을 위한 어떤 강력한 기별이 있는가?

[렘42:1~22(13~22)]13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복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이 땅에 거하지 아니하리라 하며 14 또 말하기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식물의 핍절도 당치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 하면 잘못되리라 15 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16 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17 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1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의 노와 분을 예루살렘 거민에게 부은 것같이 너희가 애굽에 이른 때에 나의 분을 너희에게 부으리니 너희가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치욕거리가 될 것이라 너희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도다 19 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 일로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날 너희에게 경계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 20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고하라 우리가 이를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21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에게 명하신 말씀을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고하였어도 너희가 그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치 아니하였은즉 22 너희가 가서 우거하려 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줄 분명히 알지니라.

 

답: 마음과 말이 동일해야 한다. 이들은 마음으로 이미 애굽에 갈 것을 작정하고 그들의 생각과 같은 선지자의 말을 듣기를 원해서 마음과 다른 요청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이중적 상태에 결토 빠지면 안 된다. 

 

바벨론인들을 두려워하여 백성들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제야 그들은 예레미야가 참으로 하나님의 선지자이며 그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거나 명령하든지 행하겠노라고 서약했다. 그들은 교훈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뿐 아니라 그것을 따르기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렘 42:6)라고 했던 그들의 말은 감동적인 신앙 고백이었다. 수많은 일을 겪다보니 이런 날도 온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초기 기별과의 공통점을 찾아보라. ‘이방의 국가들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러면 그분이 너희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며 때가 되면 너희를 건져내실 것이다. 구원은 다른 곳에서, 다른 이에게서 비롯되지 않는다. 이방 나라들은 이전에도 너희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성향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경고하셔야 했다. 그분은 그들이 필요한 보호를 얻기 위해 애굽으로 돌아갈 생각임을 아셨다. 그래서 여호와는 그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명령을 주셨다. 그런 행로는 그들에게 멸망을 가져다 줄 뿐이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생명과 평화를 얻을 것인지 아니면 믿음과 순종의 부족으로 불행과 사망에 이를 것인지 우리 모두는 냉엄한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한다. 환경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결국 우리 모두에게 문제는 동일하다. 유다 백성만큼 항상 구체적이면서 명확한 경고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도 동일한 경고를 받는다.

 

<부가설명> 유대인들이 예레미야의 기별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목도하고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든지 따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을 때에는 기쁘게 따랐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다른 말씀이 주어지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예레미야 42장의 사건이 그렇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날 명분상의, 방편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태도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데 자기 마음대로 예수를 믿는 경향이 많다. 예수님 마음대로 믿지 않는다. 많은 경우에 그렇다.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매 순간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성령의 음성이 내게 그런 대답을 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에 맞든지 아니든지 합리적이든지 아니든지 시세에 맞든지 아니든지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교훈 : 사태가 악화되자 두려움에 빠진 백성들은 결국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청하며 어떤 명령이든지 따르겠다고 서약했다.

 

 

셋째날(화) 애굽으로 돌아감

12월 15일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렘 43:3).

 

미리 읽지 않았다면 예레미야 42장은 매우 흥미로울 수 있다. 백성들은 무엇을 할 예정인가? 그들은 믿음으로 손을 내밀고 순종으로 믿음을 나타내며 유다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애굽에서 맞게 될 어려움을 경고하는 렘 42장 후반부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분명한 경고 대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함으로 과거에 저지른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

 

1. 렘 43:1~7을 읽어 보라. 그들은 무엇을 행했는가?

[렘43:1~7]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게 하신 이 모든 말씀을 다 말하매 2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및 모든 교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는 애굽에 거하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3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꼬드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인의 손에 붙여 죽이며 바벨론으로 잡아가게 하려 함이니라 하고 4 이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대 장관과 모든 백성이 유다 땅에 거하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5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대 장관이 유다의 남은 자 곧 쫓겨났던 열방 중에서 유다 땅에 거하려 하여 돌아온 자 6 곧 남자와 여자와 유아와 왕의 딸들과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영솔하고 7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이러하였더라.

 

답: 기어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계획이나 욕망과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유다 백성과 지도자들도 예레미야를 의심하였다. 상황은 분명히 변했으나 백성들의 심령과 사고방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공격함으로 그들의 서약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연로한 예레미야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를 원치 않았다.

대신 그들은 예레미야의 친구이자 서기관이었던 바룩을 원망했다. 그들은 그가 선지자를 부추겨 그들을 배반하게 했다고 주장하면서 그에게 분노를 쏟았다.

 

2. 출 16:3과 민 16:13을 읽어 보라. 백성들이 예레미야에게 했던 말과 그들의 조상들이 모세에게 했던 말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존재하는가?

[출16: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민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답: 애굽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자기들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줄 안다고 한 사실이 공통점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불러내었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모세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듯이 이 당시 유대인들은 바룩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언제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원망할 대상을 찾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할 핑계거리를 찾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바룩은 그의 동족 모두가 바벨론 사람의 손에 죽든지 그곳의 포로로 끌려가기를 바랐다는 죄목을 쓰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한 이후에 모세가 그들이 광야에서 죽기를 바랐다고 오해했던 이유에 대해 성경이 설명하지 않는 것처럼 렘 43:1~7을 보면 바룩이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다고 백성들이 생각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감정과 격정의 노예가 되어서 백성들은 건전한 사고를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격정과 감정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부가설명>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다 성경을 가지고 있다. 읽든지 아니 읽든지 가지고 있다. 교회에 가지고 다닌다. 설교를 들을 때 성경을 편다. 설교자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면서 설교를 한다. 고라의 무리가 자기들이나 회중이 다 거룩하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사상이다. 그들은 철학과 정치와 문화를 강론하면서 설교라고 주장한다. 예수님과 그 복음이 빠지면 설교가 아니다. 윤리와 도덕 강론은 되겠지만 설교는 아니다. 회중들은 이런 말을 듣기 좋아한다. 그런 내용에는 인간의 요구를 수용하는 재료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성경복음은 인간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를 인간에게 가르치는데 그것은 궁극적인 인간의 목적이다. 영원한 생존, 곧 영생의 생명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주신 생명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회복시키려고 하신다. 사람은 죽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예레미야 당시의 유대인처럼 죽을 자리를 평안의 자리로 알고 믿고 그리로 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들의 현재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한치 앞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모든 것을 아시고 처음부터 종말을 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굴복해야 할 것이며 선지자들은 이것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교훈 : 그들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선지자 대신 바룩을 원망하며 결국 애굽으로 내려갔다.

 

 

넷째날(수) 포로로 잡혀감

12월 16일

 

“그가…벧세메스의 석상들을 깨뜨리고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사르리라”(렘 43:13).

 

1. 렘 43:8~13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렘43:8~13] 다바네스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9 너는 유다 사람의 목전에서 네 손으로 큰 돌들을 가져다가 다바네스 바로의 집 어귀의 벽돌 깔린 곳에 진흙으로 감추고 10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오리니 그가 그 보좌를 내가 감추게 한 이 돌 위에 두고 또 그 화려한 큰 장막을 그 위에 치리라 11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12 내가 애굽 신들의 집에 불을 놓을 것인즉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불사르며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요 목자가 그 몸에 옷을 두름같이 애굽 땅을 자기 몸에 두르고 평안히 그 곳을 떠날 것이며 13 그가 또 애굽 땅 벧세메스의 주상들을 깨뜨리고 애굽 신들의 집을 불사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답: 애굽이 바벨론 왕에게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바네스는 이집트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이다. 유다 백성들은 대단한 방어시설을 갖춘 그곳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다시 한 번 상징적인 행위로 예언하기를 바라셨다. 물론 언어의 힘도 강력하지만, 때로는 어떤 것들이 목전에서, 일상의 삶 속에서 행해질 때 기별의 요점이 우리 마음속에 더욱 강하게 각인된다.

예레미야가 얼마나 정확하게 바로의 궁전 입구에서 돌을 묻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요점은 분명하다. 아무리 바로라고 해도 하나님을 당할 수는 없다. 그분은 그분이 말씀하신 것들을 그대로 성취하실 것이었다. 애굽으로 내려가면 안전을 보장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난민들은 애굽 군대가 오면 안전을 보장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들만큼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렘 37:7~8). 애굽 신들은 왜곡된 상상력이 창조해 낸 쓸모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그 신들은 진리에 대해 무지하도록 백성들의 눈을 어둡게 하는 가증한 우상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정한 안전과 보호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자기부인이 우리 신앙의 일부가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눈에 안약을 바를 때에 우리는 그분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순종의 길이 유일하게 안전한 길임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빛이 그들의 지성을 밝힌 정도에 비례하여 그 백성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그분의 율법의 요구는 정당하며 타당하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우리가 그분의 요구를 성취하리라고 기대하신다”(더 리뷰 앤드 헤럴드, 1890년 2월 25일).

 

<부가설명> 성경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는 예언이 있고 성취되지 않기 위하여 주신 예언도 있다. 예레미야에 기록된 유다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성취되지 않기를 바라고 주신 예언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면 예레미야가 예언한 멸망은 성취되지 않을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예언이 성취되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리라는 예언은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생각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요나서의 내용도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 주신 예언이 성취되지 않기를 바라신 것을 너무나 확실히 보여주신 사건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 않으면 예언대로 될 수밖에 없다. 다바네스로 도망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한 예언대로 유다가 망하는 예언 성취를 보았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께서 바라지 않는 예언이 성취되고 말았다. 영원한 심판도 동일하다. 결국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살도록 하신 복음을 거절하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이라는 예언이 성취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어느 예언의 성취를 기대하는가?

 

교훈 : 애굽으로 내려간 자들은 그곳의 신과 군대로부터 어떤 안전도 보장받지 못할 것이었다. 진정한 안전과 보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만이 찾을 수 있다.

 

 

다섯째날(목) 노골적인 반항

12월 17일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손이 만든 것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 너희가 가서 머물러 사는 애굽 땅에서 다른 신들에게 분향함으로 끊어 버림을 당하여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저주와 수치거리가 되고자 하느냐”(렘 44:8).

 

1. 렘 44:1~10을 읽어 보라. 포로들은 애굽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렘44:1~10] 애굽 땅에 거하는 모든 유다인 곧 믹돌과 다바네스와 놉과 바드로스 지방에 거하는 자에 대하여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성읍에 내린 나의 모든 재앙을 보았느니라 보라 오늘날 그것들이 황무지가 되었고 거하는 사람이 없나니 3 이는 그들이 자기나 너희나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나의 노를 격동한 악행을 인함이라 4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치 말라 하였어도 5 그들이 듣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다른 신들에게 여전히 분향하여 그 악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6 나의 분과 나의 노를 쏟아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를 살랐더니 그것들이 오늘과 같이 황폐하고 적막하였느니라 7 나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어찌하여 큰 악을 행하여 자기 영혼을 해하며 유다 중에서 너희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젖 먹는 자를 멸절하여 하나도 남기지 않게 하려느냐 8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손의 소위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너희의 가서 우거하는 애굽 땅에서 다른 신들에게 분향함으로 끊어 버림을 당하여 세계 열방 중에서 저주와 모욕거리가 되고자 하느냐 9 너희가 유다 땅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한 너희 열조의 악과 유다 왕들의 악과 왕비들의 악과 너희의 악과 너희 아내들의 악을 잊었느냐 10 그들이 오늘까지 겸비치 아니하며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내가 너희와 너희 열조 앞에 세운 나의 법과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느니라.

 

답: 유대 땅에서 행한 것처럼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다. 

 

예레미야가 애굽에 억류되어 있을 때 그는 백성들이 유다 땅에서 살았던 때에 겪었던 동일한 문제를 겪어야 했다. 과거에 그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말해야 했지만 이제는 포로 생활을 하면서까지 이러한 재난의 원인이 되었던 동일한 죄를 짓고 있는 일반 백성에게 말해야 했다.

 

2.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몰려와 얼마나 기겁할 만한 대답을 내놓았는가?(렘 44:15~19)

[렘44:15~19] 때에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거하는 모든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16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17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18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19 여인들은 가로되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에게 경배하는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

 

답: 여자들이 다른 신에게 계속 절하겠다고 결연히 대답했다. 그렇게 하도록 남편들이 다 동의했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살았을 때 잘 살았다고 주장했다. 결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심령의 강퍅함과 그들을 사로잡은 기만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예레미야와 맞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가 했던 말씀을 거부하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요시야가 개혁을 단행하기 전에 그들이 이방 신 숭배에 깊이 빠져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전제를 바쳤을 때에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웠고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재앙이 닥친 것은 요시야가 개혁을 단행한 이후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슨 이유로 예레미야를 따르며 그의 경고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예레미야는 ‘아니다. 너희가 잘못 이해했다.’고 대답하였다(렘 44:20~30). ‘재앙이 너희에게 임한 것은 너희가 이 모든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더욱이 변화하기를 거부하는 너희의 완고함 때문에 더 많은 재앙이 닥칠 것이며 너희가 애굽에서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안전은 너희가 숭배하는 이방신처럼 속임수와 거짓에 불과하다. 결국 진실을 알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의중을 알 수 없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것과 그들에게 하실 사실들을 전하실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스스로 다른 소리를 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예레미야 때의 유대인들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건을 기록하여 전하는 것은 그 후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노골적으로 그런 말을 하지 않지만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록된 말씀을 그 의미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해석한다든지 현실적 사회상에 맞추어 설명하려고 한다든지 신학적 사고방식에 맞춘다든지,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본 의도와 상관없이 믿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인들과 다를 것이 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그렇게 때때로 어렵고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된다. 우리는 겸손하게 말씀 앞에 꿇어서 성령의 역사로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도록 기도해야 하고 자주 스스로를 돌아보아 진리 안에 바른 믿음으로 살아가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애굽에 내려간 자들은 유다 땅에서 행하던 죄악을 그대로 행하며 기만과 거짓에 빠져 노골적으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전하신 말씀을 거부하였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2월 18일

 

전체 성경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통해서도 선악의 문제에 직면한다. 하나님이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이 용어들을 정의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 신자로서 선과 악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롬 7:7, 미 6:8, 수 24:15, 마 22:37~39, 신 12:8을 참고하라.)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과 악을 알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 샘 해리스는 그의 책 <도덕적인 풍경(The Moral Landscape)>에서 선과 악을 과학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이 우리에게 강한 원자력과 약한 원자력의 차이점을 이해시키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과학이 언젠가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우리가 인간의 죄악성을 고칠 치료제를 발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라. 인간의 뇌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미 있는 변화가 저렴하게, 고통 없이, 안전하게 일어난다고 상상해 보라. 사이코패스를 위한 치료제를 비타민D처럼 음식물에 직접 투여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제 죄악은 영양학적인 결핍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Sam Harris, The Moral Landscape: How Science Can Determine Human Values (New York: Simon & Schuster, Inc., 2010), Kindle Edition, p. 109.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과학자들조차 과학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서 도대체 그러한 해결책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이 주님의 조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18). 구원이 조건 없이 이르러 온다고 가정하는 것이 판단 착오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건은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공로가 있게 하는 어떤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무조건적인 구원(값싼 은혜)과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율법주의)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믿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고,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그 생명작용으로 율법의 요구가 열매로 나타나면 구원받은 결과이지 노력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그 생명이 작용하는 것이다. 

 

➋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예수님도 하나님도 믿지 않지만 신자인 당신보다 더 잘 살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구원을 도덕적 성취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신자보다 더 바르게 산다고 해도 그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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