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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베드로와 반석(질문, 대답, 부가설명)05/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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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5-14 05:37 조회8,3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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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0분

 

기억절 :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연구 범위 : 갈 4:4, 히 7:26, 마 16:13~20, 엡 2:20, 마 16:21~27, 마 17:1~9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신약성경의 논점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다. 그분은 십자가의 불길한 그림자를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 이 일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마음속에 간직해 오셨던 계획이었다(딛 1:2; 딤후 1:9 참고).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그냥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한 뒤에 삼일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런 일들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하나님의 본성과 율법의 신성성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고려할 때에 그분의 죽음은 인류가 죄악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님의 또 다른 기사들을 꼽아 연구한다. 특히 영원 전부터 계획된 죽음으로 행진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에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메시아의 실제 의미와 사람들이 바라는 메시아의 의미를 구별한다.

➋ 느끼기 : 우리를 통해 능력이 흘러넘치도록 메시아와의 역동적인 관계를 갈망한다.

➌ 행하기 : 주님의 생애를 온전히 반영하기 위해 우리의 생각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분에 대한 허상을 허문다.

 

A. 

❷ 예수님에 대해 진지한 고백을 한 뒤에 베드로는 왜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까?

※ 예수님이 자기의 욕망대로 행동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❸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했을 때에 이 반석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것이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예수님, 성경이 반석은 예수님이라고 계시했다. 베드로는 반석이 아닌 것을 드러내었다. 자주 실수한 것을 기록했다. 

❹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메시아요 교회의 반석으로 인정하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어떤 뜻과 주장을 내려놓아야 할까요?

※ 자아 전체를 포기하고 주님께 굴복해야 한다. 

 

B. 

❷ 베드로가 변형산의 경험을 통해서 깨달아야 했던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하나님의 나라와 자기가 생각하는 나라아 어떻게 다른지 깨달아야 했다. 

❸ 성전세에 대한 논쟁과 관련해서 베드로가 실패했던 것과 배웠던 교훈은 무엇일까요?

※ 예수님을 일반 사람과 동일하게 여겼던 것과 그분이 창조주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❹ 우리가 주님을 더욱 잘 알고 그분을 더 신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험은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가 소그룹으로서 그런 경험을 함께할 수 있을까요?

※ 성경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오직 성경으로만 성경을 연구하여 성령의 인도로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그것을 소그룹에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도덕교과서가 아니고 생명을 주는 계시의 책임을 알아야 한다.

 

결론 : 그리스도의 정체를 앎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날(일) “주는 그리스도시요”

5월 15일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5~16).

 

거의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했던 베드로의 생각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라. 주님이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들을 내쫓으며, 군중들을 먹이고, 놀라운 가르침을 베풀며, 천연계를 조종하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며, 물 위를 걸으셨을 때에 믿기 어려운 일들을 계속 목격하면서 그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역사 이래 아무도 보지 못했던 장면들을 매일 보면서 그는 속으로 어떤 질문을 떠올렸을까?(예를 들면 왜 주님은 침례 요한이 그처럼 수치스럽게 죽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예수님은 육체를 입은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육체 가운데 사시면서 인류에게 봉사하셨다(갈 4:4, 히 7:26, 사 9:6, 눅 2:10~11). 그래서 그분 주위에 있는 자들과 그분과 함께 사는 자들과 그분의 제자들은 여러 독특한 경험을 했다.

 

1. 마 16:13~17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질문을 하셨는가? 유일하게 베드로의 대답만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의 대답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마16:13~17]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답: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지, 또 제자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셨다. 베드로의 대답이 가장 바른 대답이기 때문에 한 대답만 기록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다른 제자들이 대답하기 전에 베드로가 대답했든지. 이 대답은 예수님의 실상을 가장 바르게 대답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올바르게 아는데 중요하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했던 베드로의 고백은 성경에서 가장 현저한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베드로는 그분을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불렀다. 이 고백에서 그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로서 오시는 분 곧 메시아라고 말하고 있다(갈 3:16 참고).

또한 베드로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역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선포했다. 그곳은 이방 국가였다. 앞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돌보시는 모습을 보았다. 어떤 이들은 그분이 유대교 선지자라고 생각했지만 베드로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분이 유대교 선지자 이상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분의 사역은 침례요한,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의 사역보다 범위가 넓었다. 진실로 그분의 사역은 전 인류를 다 포함할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라고 부르시며 자신을 모든 인류와 동일시하셨다. 나중에 밝혀지는 것처럼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그분이 오셔서 이루실 일들의 보편성과 완전함에 대해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았다.

 

<부가설명> 이 사건은 십자가를 지시기 6개월 전에 있었다. 예수께서 3년 반 동안 공중봉사하시는 것으로 유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셨다. 그래도 유대인들에게 친히 입으로 메시아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셨다. 유대인들의 반응이 예수님을 선지자 중에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함께 일한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어보셨다. 이때 베드로가 위에 적힌 대답을 했다. 예수께서는 그 대답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가르쳐준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신 것을 아는 것은 사람의 일반적 생각이나 경험의 세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비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계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본인이 인식하든지 못하든지 상관없다. 베드로도 자기의 대답이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것인 줄 스스로 몰랐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다. 이 고백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된다. 

 

교훈 :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거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입어 그분이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했다.

 

 

둘째날(월) “이 반석 위에”

5월 16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담대하게 고백한 직후에 그분은 베드로에게 대답하시면서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셨다.

 

1. 마 16:17~2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으며 우리는 그분이 뜻하신 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마16:17~2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답: 베드로에게 진실을 알게 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깨우쳐주시고 반석 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다. 음부의 권세를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면 교회는 사람들을 매고 푸는 열쇠를 행사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 반석 위에”라는 구절은 기독교 내에서 논쟁의 주제였다. 가톨릭은 그 반석이 베드로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며 베드로가 첫 번째 교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그러한 해석을 거부한다.

성경의 증거는 그 반석이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주장에 분명히 더 우호적이다.

첫째, 몇몇 곳에서 베드로가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반석으로 비유한다(행 4:8~12, 벧전 2:4~8 참고).

둘째,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묘사한다. 반면 인간은 연약하고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 146:3).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했던 것처럼 그분은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요 2:25)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분은 베드로 속에 있는 생각도 아셨다(마 26:34).

 

2. 다음의 성경절들에 따르면 그 반석이 정말 누구이며, 교회는 누구 위에 세워지는가?(고전 10:4, 마 7:24~25, 엡 2:20)

[고전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마7:24,25]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참고 [고전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반석이시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다. 

 

<부가설명> 역사적으로 ‘이 반석’이 누구냐 하는 논쟁을 한다. 지금도 천주교와 개신교는 이 문제에 일치를 보지 못한다. 천주교는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굳게 가르친다. 그것이 그들의 교권을 지탱하기 때문일 것이다. 개신교는 반석이 예수님이라고 믿는다. 우리도 그렇다. 예수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헬라어로 ‘페트로스’이다. 이것은 남성 명사이다. ‘반석’은 헬라어로 ‘페트라’이다. 이것은 여성명사이다. 단어의 성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반석’과 ‘베드로’는 서로 분별이 되는 단어이다. ‘페트로스’는 ‘돌’이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깨달아 알았다. 반석이나 돌이나 성질이 같다. 다 돌이다. 반석은 큰 돌이다. 돌은 조약돌로부터 반석까지 모든 것을 다 돌이라고 할 수 있다. 성질이 같은 것이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4,5) 예수님께 나아올 때 예수님과 같은 돌의 성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자기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지어주신 것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예수님의 성질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 구절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반석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구절이다. 

 

교훈 :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대답에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인간 베드로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 대한 언급이었다.

 

 

셋째날(화) 사탄이 된 베드로

5월 17일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1. 마 16:21~23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갑자기 베드로에게 강경해지신 이유는 무엇인가? 

[마16:21~23]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답: 예수님의 근본 사명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예수님을 조종하려고 했다. 그는 더 이상 그분을 따르지 않고 그분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말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광야에서 만난 사탄처럼 그분의 사명을 가로막는 위험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3)고 하셨다.

막 8:33은 이 담화에서 예수님이 돌이켜 제자들을 보셨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그분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어떤 이유로도 미혹되지 않으실 것이었다. 하물며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그분의 제자들 중 한 사람에게도 미혹되실 수 없었다.

시몬 베드로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세월처럼 아직도 상황을, 심지어 예수님까지 조종하려 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만의 계획을 실행하려고 했던 유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유다와 달리 베드로는 깊이 회개하고 기꺼이 징계와 용서를 받기 원했다.

 

2. 마 16:24~27을 읽어 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마16:24~27]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답: 인간적인 생각과 계획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꿈을 쫓아가라고 말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꿈을 포기하고 그것들을 그분께 맡기라고 우리에게 권유하신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서서히 배우고 있었다. 진정한 믿음은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을 쫓는 짜릿한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을 내려놓는 고통스런 경험이다. 자신의 꿈을 내려놓을 때에 그대는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이며 동시에 생명을 찾는 것이다.

 

<부가설명>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를 통하여 자기들의 소망을 이루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독립과 세계를 지배하는 강국을 건설하고 다윗의 보좌에 예수께서 앉으시고 그들은 건국공신들이 되어 세계를 호령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을 이야기했을 때 그렇게 깜짝 놀라서 만류했던 것이다. 교과 저자의 말대로 예수께서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고 예수께서 나의 원래도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 사단 노릇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께 복속(服屬) 되어야 한다. 인간은 생명이 없고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생명 없는 자가 생명 있는 존재를 부릴 수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기의 욕망을 이루려고 한다면 사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잘 생각해보아야 하는 문제를 제시하였다. 베드로의 이런 정신을 나무란 후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가르치셨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아를 부인하고 예수님께 복속하는 것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교훈 : 예수님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순간 우리는 사탄이 된다.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뜻과 꿈과 생명을 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있다.

 

 

넷째날(수) 하늘에서 온 격려

5월 18일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마 17:3).

 

1. 마 17:1~9을 읽어 보라. 어떤 일이 있었는가? 그 사건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왜 그토록 중요했는가? 

[마17:1~9]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답: 변화산 사건이다. 베드로가 책망을 받았을 때 제자들이 다 충격과 실의에 빠졌다. 예수께서는 예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실한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셔서 예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고 하셨다. 

 

구주께서 “하늘에서는 사랑과 정의 속에서 거하셨으나 그가 지으신 세상에서는 고독하셨다. 이제 하늘은 그 사자들을 예수께 보냈다. 그들은 천사가 아니요 고통과 슬픔을 당한 사람들, 그러므로 지상 생애에서 시련을 당하시는 구주를 동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모세와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동역자였었다. 그들은 예수와 같이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졌었다.… 이 두 사람이 보좌에 둘려있는 모든 천사 중에서도 특별히 택함을 받아 고난의 광경에 관하여 예수와 더불어 의논하고, 하늘이 동정한다는 보증으로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왔던 것이다. 세상의 희망, 곧 각 사람의 구원이 그들의 면담(面談)의 요지였다”(시대의 소망, 422, 425).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인성을 입고 자신의 고통과 실망의 몫을 아는 이들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으셔야 했다니 대단히 흥미롭다. 누가는 그들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성취하실 별세에 대해 말했다고 기록한다(눅 9:31). ‘성취하다’ 또는 ‘이루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원어 ‘플레로오’를 주목하라. 이 말은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의 구원에 필수적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매우 큰 위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이 그 필요를 알고 이런 격려를 보내는 것은 당연했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은 이미 모든 증거들을 보고 들었지만 이제 그들이 믿어야 할 더 많은 이유를 얻어야 했다. 구름에서 나온 음성이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앞선 두려움을 곧 극복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마태는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마 17:7)셨다고 기록한다. 앞으로 마주할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다.

 

<부가설명>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다윗의 왕국을 건설할 것을 열망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그들의 소망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예수님의 나라의 실상을 보여주셨다. 그들은 부활한 모세와 변화하여 승천한 엘리야를 보았다. 그들이 예수님의 별세할 것을 이야기함으로 메시아의 나라는 부활하고 변화한 사람들의 왕국이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예수께서 재림하신 후에 이 땅에 건설될 것이다. 베드로가 그의 둘째 편지에서 이 광경이 예수님의 재림의 광경이었다고 분명히 기록하였다.(벧후1:16~18) 예수님의 나라는 지금 이런 상태의 나라가 아니다. 죄와 죄에 속한 모든 것이 다 소멸된 후에 오직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들만이 들어가서 생명이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나라이다. 그 일을 위하여 죄와 사망이 처리되어야 하였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께서 죽으셔야 한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은 사망을 영원히 처리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나중에 이것을 깨달았다. 

 

교훈 : 세 제자와 함께 산 위에 오르신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그분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셔야 할 죽음에 대하여 위로와 격려를 받으셨다.

 

 

다섯째날(목) 예수님과 성전세

5월 19일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 17:27).

 

1. 마 17:24~27을 읽어 보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 일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을 알게 되는가?

[마17:24~27]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답: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은 예수님이 왕국의 참 왕이 되심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가 창조주라는 것을 물고기 입에서 세겔을 취하는 것으로 나타내셨다. 

 

모든 유대인들이 성전세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제사장, 레위인, 랍비들은 그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성전세를 납부하셨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분의 사역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엘렌 G. 화잇은 베드로가 그 순간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권위를 증언할 기회를 놓쳤다고 기록한다. “예수께서 세를 바칠 것이라고 수금하는 자에게 대답함으로써 베드로는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유포시키려고 애쓰는 예수에 대한 거짓된 관념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 되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면세된다면 성전이 아버지의 집이 되는 예수에게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는가!”(시대의 소망, 433~434).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인자한 반응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그에게 모욕을 주기보다는 신사적으로 그의 실수를 설명하셨다. 더욱이 예수님은 가장 창조적인 방식으로 베드로가 취한 노선에 적응하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성전세를 납부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그분의 의무를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물고기의 입에서 납부해야 할 세금을 얻으셨다.

이는 특이한 이적이다. 외견상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이때뿐이었다. 그러나 실제 그것은 그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적은 성전뿐 아니라 온 만물에 대한 예수님의 권위를 만민에게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이런 이적을 행하실 수 있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베드로가 목격했던 모든 것 중에서, 특히 그가 낚싯줄을 던져서 처음으로 잡은 고기 입에서 성전세로 내야 할 정확한 금액의 돈을 발견했을 때에 그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사 40:13~17 참고)

 

<부가설명> 4복음서에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이 모두 35개가 기록되어 있다. 병을 고치신 것이 19개, 귀신을 쫓아내신 것 6개, 죽은 자를 살린 것 3개, 천연계 표적 9개이다. 병 고친 것과 귀신 쫓아내는 것이 같은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 2번이기 때문에 겹친 숫자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귀신 쫓아낸 이적 중에 두 개는 병을 고친 이적에도 들어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 중에 9개인 천연계 표적 중에 물고기 입에서 세겔을 받는 것이 포함되었다. 제자들은 천연계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행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천연계 표적은 창조와 피조물을 섭리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드러내는 표적이기 때문이다. 그 9개의 표적은 물로 (1) 포도즙을 만드신 것, (2) 5병2어(5천명), (3) 7병2어(4천명), (4) 폭풍을 잔잔하게 함, (5) 물 위를 걸으심, (6) 깊은 곳에 그물 내린 것, (7) 물고기 입에 세겔, (8) 열매 없는 무화과 마르게 함, (9) 153마리 물고기 잡음 등이다. 물고기 입에서 세겔을 받으심으로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예수님께 순복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오직 사람만 창조주를 거역한 것이다. 물론 그 배후에는 사단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레17:9)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의 마음을 가졌는가? 

 

교훈 : 성전세를 내라는 요구는 주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물고기의 입에서 나온 동전으로 성전세를 내게 하심으로 그분은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셨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5월 20일 

 

예수님이 베드로가 잡은 첫 번째 물고기에서 정확하게 필요한 액수를 꺼내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너무 기이하여서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그냥 일종의 전설이고 교훈을 주기 위한 동화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라고 둘러대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합당치 않은 해결책이다. (사실 해결책이라고 할 수도 없다.) 물론 병자를 고치고, 눈 먼 자를 보게 하며,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는 여타의 이적들과는 대조적으로 이 이적은 다른 속성의 이적에 속한다. 물에 뜨는 도끼 이야기와(왕하 6:2~7) 마른 땅에 젖은 양털, 젖은 땅에 마른 양털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삿 6:36~40). 성경에서 이런 종류의 기적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왜 그냥 베드로에게 돈을 갖다 내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 같은 엄청난 장기를 보여주셨을까?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하여 답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보여준다. 물론 우리는 그분의 위대한 능력의 증거를 항상 보기 때문에 특별히 놀랄 것은 없다. 실상 가시적인 우주에 비해 턱없이 작은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증거이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다면, 물고기의 입에서 나온 동전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록 다른 맥락에서 언급했지만 바울은 핵심을 잘 간추렸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마태복음의 그 기사는 이러한 진리의 또 다른 증거에 불과하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하나님께 자신의 의지를 굴복시키기 위한 베드로의 투쟁은 우리의 투쟁과 같습니다. 이런 투쟁은 말라기 1장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유대 백성에게 최상의 가축만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말 1:13). 하나님이 우리가 드리는 희생제물의 상태를 살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들을 그분께 맡기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가장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주께 맡기겠습니까?

※ 최상의 제물을 바치라고 한 것은 우리의 속죄양 되시는 예수님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의미도 포함되었다. 자아를 바쳐야 한다. 

 

➋ 성전세 문제를 다루시는 예수님의 방법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 우리도 다투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기별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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